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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여행 가이드 해랑

  • 작성일 2023-09-01
  • 조회수 463

지구 여행 가이드 해랑

최현주


   순식간이었다. 남자애가 내 손에 있던 믹스견 T의 목줄을 낚아채 도망가 버렸다. 그 모든 게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일어났다. 아니,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두뇌의 처리 속도가 따라가질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서둘러 달려갔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지 머릿속이 마비된 느낌이었다. 어쨌든 남자애를 잡아야 했다. T를 잃고 난 뒤의 상황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가이드는 고객의 요구를 맞춰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할아버지는 지구에서 30년 동안 가이드로 일해왔으니, 허투루 들을 말이 아니었다.

   ‘넌 아직 너무 미숙해.’

   ‘알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할아버지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혼잣말을 내뱉었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서 할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았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하신 잔소리 같았던 말들을 매일 되새겼다. 이제야 할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신조를 지키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을 자주 내뱉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고객을 만날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며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도문처럼 외워댔다.

   먼 우주에서 작은 비행선을 타고 혼자 여행 중이라는 T-29032023은 지구를 구경하고 싶다며 가이드를 요청해 왔다. T는 지구에서 색다른 경험을 해 보고 싶다며 특별 코스를 신청했다. 바로 댕댕이 코스였다. 내가 이 코스를 5년 전에 만들었을 때, 할아버지는 장난을 치면 안 된다며 혼을 냈다. 나는 요즘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만큼 관심을 보이는 고객이 있을 거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결국 댕댕이 코스를 여행 소개란에 넣었다. 신기하게도 이 코스를 선택하는 고객이 간간이 나타났다.

   나는 단독 주택의 옥탑방에서 무릎 높이 정도까지 오는 커다란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는 할아버지가 지구에 정착해 살게 되면서 우주와의 통신을 위해 만든 장치였다. 우리가 있던 행성에서 빈손으로 떠나왔지만, 다행히 할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았다. 할아버지는 근처에 있던 고물상에서 통신 장비를 만들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통신 장비가 작동하자 할아버지는 우주 여행객들을 안내하던 가이드 일을 다시 시작했다.

   라디오에 설치된 안테나가 움직이며 우주에서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 지구인들에게는 의미 없는 잡음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 신호를 해석할 수 있었다.


   ―오늘 지정된 장소에 도착 예정. T.


   T는 기어이 오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할아버지의 가이드 일을 이어받고 댕댕이 코스는 처음이었다. 할아버지가 만든 코스에는 문제가 생겨서 재정비가 필요했다. 도착할 곳으로 지정된 장소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도착할 곳을 새롭게 마련하기 위해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찾아봐야 했다.

   나는 댕댕이 코스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아 아직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T는 위험할수록 더 좋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혼자 우주를 여행하는 것도 모험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당신이 아니라 내가 걱정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고객이 불안해할 말을 하면 안 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할아버지가 만든 코스 말고 내가 짜는 건 처음이니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동안 꼬박 돌아다닌 끝에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


   ―41.4033×, 2.1740×


   나는 T에게 지구에 도착할 좌표를 찍어 보냈다. 지구 전 지역의 지도와 함께.

   댕댕이 코스는 1박 2일 동안 강아지 모습으로 변신 가능할 때만 선택 가능했다. 첫날은 강아지로 변해 휴식을 취하며 지구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 날에는 공원을 산책하거나 애견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 가장 중요한 일정으로는 햇빛을 받으며 낮잠을 자는 시간이었다. 의외로 이 시간이 가장 좋았다는 고객의 후기가 많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마당이 있는 단독 주택으로 한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풀들이 아무렇게나 자라 있었다. 집주인이 있지만 관리를 안 한 건지, 아니면 아무도 없는 건지 알려고 며칠 동안 지켜봤지만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현관문 쪽에 있는 개집이 바로 T가 올 장소였다. 할아버지는 굳이 재개발 지역 같은 곳을 찾아다녔지만, 도심에도 이런 곳이 꽤 있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발을 동동거렸다. 벌써 세 시간이 지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안 맞을 수는 있지만 이건 좀 불안할 정도로 늦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우주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많이 생겼다. 예전에도 지구로 오다 길을 찾지 못해 헤매거나 지구의 다른 장소로 가버리거나 아니면 마음이 바뀐 경우도 있었다. 단순히 마음이 변한 건 기분이 나쁜 걸로 끝날 일이었다. 문제는 지구의 다른 곳에 떨어졌을 경우였다. 뭣도 모르고 돌아다니다 우주관리국에 걸리면 내 존재가 들통날 수 있었다. 가이드 예약을 받을 때 입단속을 시키기는 했지만, 고객들이 내게 의리를 지킬 필요는 없었다. 우주관리국에 잡히면 나는 지구에서 추방당하게 될 것이다. 정식 통로로 들어온 게 아니니까.

   휴대용 라디오인 워크맨을 꺼냈다. 안테나 역할을 하는 우산을 펼치고 전원을 켰다. 휴대용은 아무래도 신호를 잡아내기가 힘들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하면 우주관리국의 칩을 뺀 통신기를 구할 수 있었다. 이번에 수고비를 받으면 큰맘 먹고 사려고 했다. 시세가 어떤지, 물건은 괜찮은지 정보를 찾아봤던 게 모두 헛수고가 될 판이었다.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이 없었다.


   ―······도 ······착. ······부딪······.


   겨우 잡힌 신호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다 듣지 않고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지구 대기권으로 들어올 때 조심하라고 얘기를 했는데도 비행기 아님 새 떼와 만난 모양이었다. 비행기와 만났을 경우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검기만 할 뿐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며 실시간 뉴스를 확인했다.

   그때 밝은 빛과 함께 뭐가 쾅!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공기가 폭발하는 듯한 위력에 몸이 뒤로 몇 발자국 밀렸다. 바람이 잠잠해질 때까지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이렇게 요란하게 올 줄은 몰랐다. 지구에 도착할 때 생기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방어막을 설치한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위력이라면 방어막을 만드는 기계가 못 견디고 파괴됐을 것 같았다. 젠장. 그거 하나가 얼만데. 수고비에서 함께 받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아 눈을 떠보니 개 한 마리가 마당 한가운데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개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개가 맞겠지? 레트리버와 웰시코기와 진돗개와 보더콜리, 포메라니안과 몰티즈와 푸들의 특징이 조금씩 뒤섞인 대형견의 모습이었다. 한눈에 그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전체적으로 회색과 검은색 털에 가슴과 다리 쪽에 흰 털이 조금씩 있는 상태라 어둠 속에서도 그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내가 참고하라고 보내준 개의 모습이 모두 혼합된 상태였다. 그중에 하나만 선택해서 변신하라는 내 말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아니면 저 상태를 의도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뭘 잘못했나요?”

   개는 멍멍 짖는 대신 인간의 말을 정확한 발음으로 전했다.

   “어떻게 인간의 말을 그렇게 잘하죠?”

   “혼자 우주를 여행하려면 어떤 말도 번역해 주는 인공지능 트랜스기는 필수죠. 이름은 오토예요. 우주의 모든 언어의 패턴을 모으는 게 꿈이죠.”

   가끔 고객과 말이 안 통할 때 저런 기계가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군침이 나올 정도로 갖고 싶었다.

   “좋네요. 하지만 인간들 앞에서는 말하면 안 돼요. 개는 멍멍 짖기만 하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토는 개가 짖는 패턴도 분석했으니까요.”

   “근데 지구에서 숨 쉬는 건 어때요? 처음에는 답답해서 힘들어하는데. 괜찮아 보이네요.”

   지구에 처음 온 고객 중에는 환경에 적응을 못 해 한동안 기침을 하거나 어지러워하거나, 심할 때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도 있었다.

   “우리 행성은 여행을 많이 해서 호흡기 마스크란 게 있어요. 여긴 없나요?”

   T가 앞발로 자신의 코를 툭툭 건드렸다. 코에 있던 투명한 젤리 같은 게 무지개색으로 빛났다. 할아버지가 봤다면 비슷하게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내게 손재주가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마지막에 아무 걱정 없이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런 게 있다면 좋겠네요. 일단 수고비 절반은 선불이에요.”

   T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고객들이 가이드를 받다가 그냥 도망가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수고비는 우주에서만 구할 수 있는 광물이나 물건 등이었다. 우주에서는 정작 아무 가치가 없어도 지구에서는 희소성이 있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 올리면 비싼 돈을 주고 사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를 팔면 몇 개월은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공식적인 거래소를 통한 게 아니라서 가끔은 가짜를 진짜라고 속일 때도 있었다. 매번 의심할 수 없어서 그 정도는 감수하고 지내야 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일 착수 전과 끝난 후에 수고비를 절반씩 주고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참, 그랬죠. 여깄어요.”

   T가 준 돌멩이 같은 걸 가로등 불빛에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아직 전문가 수준은 아니라 사기를 당할 때도 있었지만. 대충 괜찮은 물건인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곳에서 하나하나 따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일단 가죠.”

   서둘러 T에게 목줄을 채우고 집에 가려고 할 때였다.

   “잠깐! 개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어두운 골목길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나는 깜짝 놀라 앞으로 나서며 T를 위험으로부터 지키려고 했다. 나의 가이드는 이제 시작되었다. 내일까지 T를 안전하게 보호하다가 우주로 돌려보내야 했다.

   “방금 큰 소리 난 것도 저 개를 때린 거지? 지금까지 이 주변에서 개를 학대해 온 범인이 바로 너야? 솔직하게 대답해.”

   외치는 소리가 점점 가깝게 다가왔다. 집 앞에 서 있던 주황빛 가로등에 한 남자애가 나타났다. 근처에 있는 중학교 교복이었다.

   작년에 지구의 학교를 경험해 보고 싶다는 고객 때문에 고생한 기억이 떠올랐다. 때마침 중고물품 사이트에서 저 중학교 교복을 발견한 건 천운이었다. 전학 첫날이라 서류를 못 받았다는 핑계를 대며 그날 하루만 그냥 수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너무 어리게 보인다는 말에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미성년인 내가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며 울먹였다. 손으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들이 코를 훌쩍거리며 나를 응원했다. 그때는 어떻게든 넘어갔지만 깊은 한숨이 나왔다. 저 나이대의 청소년과 엮여서 좋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개는 그냥 두고 가. 안 그러면 경찰 부를 테니까.”

   옆에서 T가 멍멍거렸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아까 들은 말이 있어서 짖는 소리를 낸 모양이었다. 그나마 눈치가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래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걸 보면 이 상황이 끝나고 질문의 홍수 속에 빠질 것 같았다.

   “이건 내 개야. 상관하지 말고 꺼져. 개한테 물리고 싶어?”

   남자애를 노려보며 낮은 소리로 위협했다. 내 계획이 더 엉망이 되기 전에 상황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가 쉬고 싶었다.

   “개를 나한테 넘기면 더 이상 뭐라고 안 할게. 괜히 스트레스받는 거 개한테 풀 생각하지 마. 주변에 있는 개들 때리고 다니는 거 다 알아. 개들이 무슨 죄야? 그 개는 차라리 내가 만 원 주고 살게. 이걸로 뭐라도 사 먹는 게 더 낫잖아. 주인이면 옆에 있는 개 인생도 생각해 봐. 좋은 주인 만나서 사랑받으며 살 수 있어. 내가 꼭 그런 주인 찾아줄게. 약속해.”

   남자애가 손을 내밀며 가까이 다가오다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나왔다.

   “착각은 자유지만 이렇게 헛소리를 하면 안 되지. 난 학대한 적 없어. 증거 있어? 괜히 시비 걸지 마”

   “아줌마, 내가 봤거든. 이 동네 돌아다니면서 떠돌이 개들 팼잖아.”

   “허, 아줌마? 너랑 나이 차도 별로 안 나거든?”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아줌마라는 말에 발끈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살아오기는 했지만 지구 나이로 환산하면 겉으로는 남자애보다 몇 살 많은 정도로 보였다.

   “거짓말하지 말고 개 포기해. 진짜 경찰 부르기 전에. 뒷모습밖에 못 봤지만 당신이란 걸 딱 알겠어. 그 우산이 빼박 증거라고.”

   이놈의 우산······.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워졌다. 언제 어느 때든 갑자기 내리는 비를 고객이 맞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했다. 다른 가이드와는 차별점을 갖는 거라고. 기다란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게 귀찮기도 했지만 말이다. 우산을 펴면 안테나 역할도 해서 두고 다닐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써온 물건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생사람 잡지 마. 나는 오늘 여기에 세 번 왔다고.”

   “자기 죄를 안 밝힌다고? 앞으로 벌어질 일은 모두 당신 탓이야.”

   남자애가 갑자기 뛰어와 내 손에 있던 목줄을 순식간에 낚아챘다.

   “어, 어, 어······. 이봐!”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남자애가 T를 데리고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젠장. 욕을 내뱉으며 그 뒤를 쫓았다.



   간간이 있는 가로등 불빛에만 의지해 쫓아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남자애와 T의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대로변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지만 다들 고개를 휙휙 돌리며 외면할 뿐이었다. 계속 걷다가 지쳐서 편의점 바깥에 놓인 의자에 잠시 앉아 숨을 돌렸다. 그제야 거친 숨이 안정되며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T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으면 그나마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남자애한테 벗어나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거 아닐까?

   “맞다! 그게 있었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T에게 목줄을 채운 게 다행이었다. 그 목줄에 위치추적기를 달았었다. 휴대폰에서 위치추적기 앱을 열어 확인했다. 다행히 T의 위치는 근처라고 떴다. 마음이 놓이며 이대로 조금 더 있고 싶었다. 앱을 보는데 T의 위치가 조금씩 움직여 지도를 살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T가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직진으로 쭉 가다가 왼쪽 길로 꺾었다. 또 직진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그 패턴이 반복되었다. 대체 남자애가 T를 데리고 뭘 하는 건지 궁금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될 때를 계산해 그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근처 공원에 있었다.

   그들이 눈에 보였을 때 나는 기가 막혀서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남자애는 목줄을 놓친 채 T의 뒤를 쫓아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T는 공원의 산책로를 신나게 뛰어다니며 간간이 멈춰서 남자애가 쫓아오는지 확인했다. 반려견과 보호자가 장난을 치며 재밌게 노는 걸로 보였다.

   나를 발견한 T가 멈춰서 꼬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다른 보호자를 보고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제 놀이를 끝내야 한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T는 잠깐 멈칫하고 남자애에게 달려갔다. 남자애는 T의 모습에 깜짝 놀라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T는 남자애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힘차게 뛰어 그 품에 안겼다. 남자애는 무릎을 꿇었지만 T의 무게에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T는 꼬리를 흔들며 남자애의 얼굴을 열심히 핥았다. 그제야 T가 지구에서 개로 변해 보호자와 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 있었던 게 떠올랐다. 비행선을 타고 혼자 여행하다 보니 무척이나 심심해서 신나게 놀고 싶다고 했다. 남자애가 아니었으면 내가 저러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갑자기 남자애가 무척이나 고마워졌다. 그래도 이제는 둘의 사이를 좀 말려야 할 것 같았다. 남자애가 T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걸 보면.

   “어, 어? 왜 그래?”

   가까이 다가갔을 때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애가 땅바닥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고 있었다. 남자애의 몸을 돌리자 얼굴이 시뻘게진 채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기침을 내뱉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이유를 찾다가 남자애가 T를 밀어내는 손길을 발견했다. T의 목줄을 잡아 남자애와 멀리 떨어뜨려 놨다. T도 뭔가를 느꼈는지 가만히 지켜봤다.



   “괜찮아?”

   자신을 유남우라고 소개한 남자애에게 물병을 건넸다. 남우는 공원 벤치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까와는 달리 호흡이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감사해요. 제가 털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랬어요. 이젠 괜찮아요. 그리고 오해한 거 죄송해요. 진짜 뒷모습이 닮아서.”

   “그 학대범 찾았으면 좋겠다.”

   “네. 꼭 찾을 때까지 순찰 다닐 거예요.”

   “털 알레르기가 심한 거 같은데. 그래도 개들을 찾아다니는 거야?”

   “못 만져도 동물을 진짜 좋아하거든요.”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었다. 남우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T가 엉덩이를 땅에 꼭 붙이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왜 그러느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그새 정이 들었나? T는 남우와 더 놀고 싶다는 눈빛을 보냈다.

   “안 돼요. 남우는 털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아까처럼 아플 거예요.”

   T의 목줄을 툭 당겼다. 그래도 T는 움직이지 않으려고 버텼다.

   “티가 저랑 놀고 싶대요? 내일 산책 도와줄게요. 줄 길게 잡으면 될 것 같아요. 마스크 쓰고 알레르기 약 먹으면 괜찮을 거예요.”

   남우까지 T와 함께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갑자기 저 둘의 모습이 진정한 보호자와 반려견의 관계로 보였다. 둘 사이에서 오히려 내가 소외되는 느낌이었다.

   “나야 도와주면 좋지.”

   그제야 T는 일어나 나를 따라왔다.



   다음 날 남우를 만나러 가는 길에 T에게 경고하는 걸 잊지 않았다.

   “자기 정체를 들키지 않게 조심하세요. 인간이 알면 안 됩니다.”

   “알아요. 여행객의 규칙이죠. 그래도 진짜 인간하고 교류해 보고 싶었어요. 이걸 뭐라고 하더라? 맞다! 우정이라고 하죠?”

   진짜 인간······. 이 말이 왜 귀에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뭔가 울컥하는 게 그럼 나는 뭔가 싶었다. T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진짜와 가짜 사이에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일지도. 지구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나는 이곳에서 여전히 외계인일 뿐이었다. 만약 나중에 내 아이가 태어나도 그대로 외계인일까? 솔직히 지구에 오기 전에 있던 행성도 진짜 고향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 쭉 거슬러 올라가 봐도 우리는 언제나 여러 행성을 돌아다녔다. 나도 언젠가는 지구가 아닌 또 다른 행성으로 떠나버릴지 몰랐다.

   “당신은 우정을 나누는 인간이 있나요?”

   T의 질문에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졌다. 인간과의 우정이라고?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가끔 오는 여행객들이 가지는 로망이었다. 곧 떠날 여행객에게 진짜 현실을 구구절절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인간은 우정보다 의심의 눈초리를 먼저 보냈다. 돈을 낼 수 있는지, 도망치지는 않을지, 무슨 일을 벌이지는 않을지. 돈을 잘 내고 얌전히 있어도 나를 가만히 지켜보는 눈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T를 보며 고객이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생각하고 가면 최고라고 한 할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겼다.

   “당신은 인간과의 우정을 체험하면 좋겠네요.”

   어제 왔던 공원 입구에서 남우가 팔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T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우에게 달려갔다. 남우는 좋은 건지 무서운 건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무릎을 구부리고 T를 받아냈다. 어제처럼 엉덩방아를 찧지는 않았지만 T의 힘에 식은땀을 흘리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괜찮겠어? 무리하지 말고.”

   남우에게 걱정스럽게 물어보면서 몸이 힘들면서도 저렇게까지 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괴, 괜찮아요. 같이 한 바퀴 돌고 올게요.”

   남우는 T의 목줄을 잡고 공원의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햇빛이 너무 찬란해서 눈을 온전히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가이드를 하면서 이런 여유를 부리는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내 일을 대신해 주다니. 그것도 인간이.

   남우는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T와 놀고 있었다. T는 발라당 누워서 배를 내보였다. 저 자세를 어떻게 아는 건지 신기했다. 아니면 개가 되면 나오는 본능적인 자세인 걸까? T가 엉덩이를 흔들며 좋아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그들이 즐겁게 노는 걸 지켜봤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다 T를 만지는 남우의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게 우둘투둘 나 있었다.

   “이게 뭐야? 이것도 털 알레르기지? 인제 그만 만져.”

   나는 남우의 손등을 확인하고 T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T는 남우의 손등을 보고 낑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자기도 미안한 모양이었다.

   “진짜 괜찮아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남우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너 바보야? 자기 몸을 왜 이리 함부로 다뤄?”

   “개들이 좋으니까요.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개들은 나만 바라보고 그냥 무한한 사랑을 줘요. 내 탓이라고 하면서 상대방한테 어떻게든 나를 떠넘기려고 싸우지도 않는다고요. 아씨, 진짜!”

   남우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갑자기 남우가 우는 모습에 당황스러워 주변을 살폈다. 남우의 팔을 끌어와 벤치에 앉혔다. 남우가 진정될 때까지 옆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T는 남우가 걱정스러운지 무릎에 얼굴을 갖다 댔다. 남우를 생각하면 T를 떼어내야 했다. 하지만 남우가 T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를 받는 것 같아 내버려 뒀다.

   “죄송해요. 요즘 집에 일이 많아서.”

   “아냐. 티랑 놀아줘서 고마워. 엄청 좋아하더라. 그래도 자기 몸을 좀 아껴. 무리하지 말고.”

   “네. 그럼······.”

   남우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T와 인사를 나눴다. T도 당장이라도 뒤쫓아갈 듯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럼 이제 갈까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T의 목줄을 잡아 이끌었다. 이제 T가 떠날 시간이었다. T가 왔던 개집으로 향했다.

   “지구 여행은 즐거웠나요?”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오고 싶어요. 그때도 가이드 부탁해요. 또 남우를 만날 수 있으면 더 좋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드 요청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때도 남우와 연락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남은 수고비에요.”

   T가 반짝거리는 광물 하나를 내밀었다. 그걸 받으려다가 결국 손을 거둬들이고 말았다.

   “왜 그래요? 모자란가요?”

   “다른 걸로 받아도 되나요?”

   나는 무릎을 구부려 T와 눈높이를 맞췄다. T의 코를 톡톡 건드렸다.

   “이걸? ······남우한테 주려고요?”

   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요구였다. 그렇게 간절한 돈을 포기하다니.

   “······줄 수는 있어요. 비행선에 더 있으니까요. 근데 이건 사용 기한이 있어요. 수명이 다하면 그냥 사라질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T는 밝은 빛과 함께 사라졌다. 텅 비어버린 자리에 바람이 불어왔다. 이번 가이드는 완전히 손해 보는 장사였다. 내 손에 남은 투명한 마스크에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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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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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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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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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바다가좋아용

    산책을 하다가 저 개도 어쩌면 지구 여행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는 피식 웃었어요. 소설은 세상을 새롭게 보게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재밌게 읽었어요^^

    • 2023-09-01 17:41:19
    바다가좋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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