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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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월 장원 선정은 [공지사항] 게시판에서 안내됩니다.작성일 2024-06-0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4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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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쓰면서 뒹글' 운영 규정(2024.01.02)작성일 2023-10-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845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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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기내식물!
그 당시의 나는 공부에 미쳐있었다.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들은 그게 어떤 가치를 지니더라도 모두 쳐내는 단호를 몸에 꽁꽁 두르고선나를 향한 호의조차도 시간을 뺏어갈까 노심초사 날선 상태로 받아들이곤 했다. 고3 새학기 3월, 학교에선 텃밭인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반별로 지원자를 뽑아서 텃밭에 씨를 심고 가꾸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고3이 무슨 텃밭이야 공부할 시간 뺏기게..저걸 누가 해 하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지원자가 꽤 있었다. 작년에 같은반이었던 친구들과 새로 같은반이 된 애들이 텃밭 농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벛꽃과 함께 찾아온 중간고사 시험기간. 나는 점심을 거르고 공부했다. 그 1시간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밥을 먹지 않음으로써 내가 나태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했다는것을 꼬르륵 소리로 자각하고자 하는 의도가 컸다. 또 점심을 거르면 길고 긴 7교시가 일찍 끝나는 것도 같아서 좀 마음이 덜 괴로웠다. 그렇게 점심마다 창문 옆 스탠딩 책상에서 영어 본문을 외웠다. 머릿속으로 읽어보는 영어 문장에 하나 둘 들려오는 웃음소리 물 호스소리. 창문 바로 아래에는 텃밭이 있었고 나는 거기서 호스 끝을 쥐고 무지개를 뿌려대는 광경의 목격자가 되어버린 것이다!너무 즐거워 보였다. 지금 사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말하는 홈쇼핑처럼날 저 십대의 청춘에 탑승시킬 막차가 눈앞에 엎질러지듯 급정거한 것이다.애써 무시하려는 생각조차 날려버린광경은 비이성적인 판단이 앞서게 만들었다.샤프를 책상에 내동댕이치고 창문 아래 풍경으로 뛰어들어가기로 했다.과거의 나라면 비웃을 선택을 내지른 채로반에서 나와 복도를 지나치고 계단 두 층을 연속적으로 뛰어 내려가 스터디카페같은 자습실에 들어가서 반대편 바깥이 통하는 문에 달린 드르륵 탁 하면 열리는 방충망을 틱 열고서 친구들에게 손 인사를 했다.그러나 시작부터 완전히 반해버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소개팅에서 처음만난 두사람이 아무리 첫눈에 반하더라도 사랑고백부터 하진 않듯이 나는 텃밭과 초면이라 마음을 아껴두고 기본적인 말부터 시작했다. "물 내가 줘봐도 돼? 이건 무슨 식물이야? 모종삽 달라고? 아, 응 여기! 쌤 안녕하세요, 아 저는 텃밭 아닌데 그냥 구경하러 온 거에요"심지어 나는 속으로 고3이 무슨 텃밭이냐며 불평까지 한 전적이 있기에 더욱 쭈뼛거렸다. 그런 마음이 무색하게 텃밭과 친구들은 성큼 내 마음으로 들어와 앉았다.영어지문은 나 없이 퍽 쓸쓸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 내 눈엔 그런 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점심시간마다 물을 주는 친구들을 따라 나도 텃밭에 들르게 되었다.텃밭이라는 단어는 19살과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텁텁해보이는 인상의 그 이름이 숨긴 어떤 청춘이 텃밭의 흙속에 알차게 박혀 자라나고 있었음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다시는 그런생각을 못 할 거라고 장담한다. 시인들은 자신의 시에 청춘 대신 텃밭을 쓸 거란 말이야. 아아! 그것은 바야흐로 여름. 뜨거운 텃밭이었다. 찬란하고 빛나는 너와 나의 텃밭. 멜론차트 위 우효의 텃밭, 시집속에
작성일 2024-06-22 작성자 해강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9상세보기 -
수필 수상소감 - 피어나는 유월의 월장원
그러니깐, 글틴 비평 게시판에서 그토록 고대해왔던 월장원에 선정되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행복, 성취감, 뿌듯함이 아니라 내 속 깊숙히에서 묵혀왔던 어느 것이 꾸역꾸역 올라와서 내장을 베베 꼬아버리는 감각이었다. 그렇게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솓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구역질을 했다. 무척 기쁘고 좋은 일인데, 어째서 내 몸은 나를 따르지 않을까. 작년 이맘때 즈음에, 나는 처음으로 글틴에 글을 기고했다. 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었는데, 나름대로 필생의 역작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쓰게 된 글이었다. 또는, 처음으로 문학다운 문학을 하게 된 글이었다. 그 이전의 나는 그저 초중고 국어시간에 소설창작 과제를 매우 잘 수행하는 한 학생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보다 책을 더 눈에 오래 두는, 그러나 영화를 더 좋아하는 청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브레송을 사랑하고 이만희를 사랑하고 로셀리니를 사랑하며, 황순원을 사랑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는 문득 그들의 작품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이 일었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습작으로 서너 편 정도. 그러다 글틴에 올린 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을 글로 온긴 작품이었고, 나는 문학적인 장치와 기법들을 가볍게 넣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 당시 소설 게시판에 내가 보기에는 이렇다 할 좋은 작품들이 없었고, 그 달은 내가 쉽게 월장원을 ‘우승’하게 될 줄 알았다. 그리고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다음 달을 기다렸고, 대차게 ‘떨어졌다’. 나는 당시 그것을 ‘떨어졌다’고 받아들였다. 솔직히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을 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은 바로 ‘글장원’의 후보로 올랐었기 때문이었다. 그 달의 무수히 많던 소설들 중 내 작품이 후보로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월장원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나는 글을 처음 써보았으니깐. 다음번에는 월장원과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 희망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어서 그 희망을 확신으로 바꾸려고 했다. 이후 적어도 한 달에 한두 편씩은 꼭 소설을 썼다. 희망이 헛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세 달 후였다. 월장원에서는 좋은 작품만 후보로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글을 기고한 신인 글티너들에게도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너무 못나지 않은 이상은 후보로 선정해 주는 관습이 있던 것이었다. 나는 그 관습의 물살에 휩쓸린 신인 글티너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어떠한 질문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내가 글을 쓴 것이 월장원을 위한 것이었나?’아니었다. 나는 월장원에 당선되고 싶어서 글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쓰고 싶어서 쓴 거고, 굳이 글틴에 올린 것은 유명한 문인들의 조언을 들을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월장원에서 우승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은 내 심장을 더욱 깊숙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매달 매달 소설을 올리고 월장원이 발표될 때마다 내 심장은 꾸겨져
작성일 2024-06-11 작성자 화자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286상세보기 -
수필 앵두의 순수함이 사라지고
앵두 붉고 작은게 귀엽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웃기게도 사랑을 말한다. 작고 귀엽고 붉어서 심장과 사랑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앵두는 앵두일 뿐인데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둘까? 작가가 꿈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앵두를 사랑으로 엮고 의미를 두는 것은 솔직히 꼴사나워 보인다. 그래서 난 앵두를 보면 사랑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앵두는 앵두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몇 초 후에는 "추억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5살부터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수원에 있는 낡은 아파트에 살았다. 그 아파트는 크게 가동과 나동으로 나뉘었다. 가동은 1층이 주차장과 이어져 있었고 내가 살던 나동은 1층이 주차장 아래에 있었다. {그렇다고 나동이 반지하는 아니다. 모두 지상이다. 다만 경사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어 단차가 있었을 뿐이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있던 주차장에는 나무들과 텃밭들이 있었다. 나동은 작은 텃밭이었고 가동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이 길은 무척 인간적이었고 자연적이었다. 한마디로 자연과 인간 그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곳이었다. 조금 돈이 있었을 때 살았던 안양의 아파트 단지, 그리고 약간 어려운 상황에서 살고 있는 수원의 빌라까지 봤을 때 모두 이 아파트보다 좋지 못하였다.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낡은 아파트에서의 생활보다 행복을 느끼는 횟수가 적었다. 그만큼 그 당시 나는 순수하고 순진했고 행복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함께 놀 이웃들이 많았다. 1층과 6층에 살던 동생들과 그들의 누나들까지 나는 친하게 지냈다. 특히 1층과는 자주 왕례가 오갔다. 하루는 우리집에 테레비가 고장났을 때 1층 집에 가서 좋아하던 애니메이션 마지막화를 봤던 기억이 있었다. 6층과는 떡집 단골로 지냈다.{6층 동생의 부모님이 떡집을 운영했다.} 심지어 내가 혼자 학교가는 것을 두려워 하니 1층과 6층 누나들과 동생들과 함께 초등학교 등교를 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 가족들은 끈끈한 마음을 가지고 생활했다. 이들과 많은 추억들이 있지만 제일 크게 기억남는 것은 동생들과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서 앵두를 따고 축구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특히 1층은 남자아이여서 식식하고 나와도 잘맞았다. 그래서 우리 둘은 자주 놀았다. 앵두 열매가 피고 익는 계절이 되면 우린 순진한 마음으로 앵두를 따러갔다. 앵두나무는 가동 앞에 있었지만 아파트를 사는 모두의 것이었다. 특히 이 앵두나무의 소유는 아이들 것이라 말을 해도 과한 말이 아니다. 나와 1층 그리고 6층은 앵두를 따서 집에 가져가 엄마와 이웃들에게 자랑을 했다. 나는 이 앵두를 집에서 요리하겠다며 별의 별 이상한 레시피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나를 보고 있으면 엄마는 웃으며 핫케이크를 구워줬다. 이 때 먹은 핫케잌은 잊을 수 없다. 우리 엄마의 레시피는 가루와 우유와 달걀만 놓고 토핑 없이 구운 것으로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 음식을 앵두를 따는 노동과 음식으로 만드는 고된 행위를 해서 그런지 그 때의 맛은 달콤하고 땀에의해 짭짜롬했다
작성일 2024-06-06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66상세보기 -
수필 내일은 후회할 오늘의 기록
보고싶다 너무 많이항상 이 시간만 되면 먼저 나한테 연락해주던 너였는데‘뭐해?’‘자?’‘전화할까’라는 질문들로 우울한 나를 위로해줬는데한순간에 그런 연락들이 없어지니너무 허전하고 심심하네이 시간만 되면 그냥 나도 그럴거라 생각했나봐당연하게도 너랑 전화하고 니가 먼저 나한테 연락할거라,그렇게 생각했나봐근데 또 후회되는 게 있어나는 그런 너의 질문들에 ‘폰 하는 중’‘안 자’‘그러든가’이런 말들밖에 못해줬다는 거.아 아니다‘니 생각 중’이라는 달달한 말도 가끔식은 해본 것 같아정말 떨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보내면항상 니가 갑자기 감동받았다며 장문의 카톡을 보내기도 했었는데그때 사실 좀 좋았다 나?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좋아한다는 사실이그것 하나만으로도 너무 좋았나봐사실 그거 알아?너는 내가 제일 예쁘다고 해줬지만난 항상 그랬는데내가 조금만 더 예뻤을 때 너를 만났다면,내가 조금만 더 자신감 있을 때 너를 만났다면,내가 조금만 더 심리적으로 안정적이고 건강할 때너를 만났다면,너를 좀 더 사랑해줄 수 있을텐데너를 좀 더 아껴줄 수 있을텐데모두에게 너와 건강한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걸 알릴 수 있을텐데그런 생각들 말야나 참 지금 생각해보니까 더 초라하네그냥 그때 너한테 이런 것들 다 말할걸그냥 싫었나봐 너도 나처럼 아픈 게,그냥 너무 무해하고 나를 기쁘게 해주는 니가나처럼 아파지는 게 무서웠나봐,나의 아픔을 나눠갖는게 너무 나 자신한테 화가 났나봐근데 지금은 말하지 못했던게 후회가 된다.우리가 몇개월 정도 만났는지 기억나?사실 난 정확하게 기억나는데우리 5월에 만나서 1월에 끝난 거우리 생각보다 오래 만났네근데도 사실 내 친구들 중에서 아는 애들 많이 없다?너 소개해주면 다 반할까봐너도 그랬지?근데 사실 그거 보다는 그냥 너랑 둘이 노는 시간도부족한데 누구한테 소개해주는 그런 시간이 좀 아까웠나봐 그리고 사실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게 재밌기도 했고근데 나 아직도 슬퍼하네 너는 잘 지내는 거 같더라나 쫌 삐졌어난 너무 힘든데 너만 너무 잘 지내는 거 같아서그냥 나 지금 벌받고 있는 건가너무 못나게 굴어서 그런건가근데 나 그래도 너 진짜 좋아하고 사랑했어지금까지 좋아했던 다른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좋아했고아직까지도 사실 그런 것 같아그냥 한번만 더 나 보러 와주면 안돼?사실 내가 먼저 너한테 연락하고 싶은데 용기가 안나네,,우리의 첫 이별은 나 때문이었고두번째 이별도 나 때문이었고세번째 이별만이 니가 말한 이별인데내가 어떻게 붙잡아,,사실 니가 아직도 내 스토리 보는 것도 다 알고비계로 보는 것도 다 알아나도 그러니까그냥 둘 다 알면서 왜 아직도 우린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생각해봤는데그냥 다 나 때문이더라너한테 이유는 없어넌 내가 힘들 때 안아줬고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줬어언제나 내 편이 되어줬고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어줬어근데 나는 너한테 해준게 아무것도 없어처음이라 그랬다는 것도 핑계일지 몰라그냥 내가 힘들다는 핑계로 너를 모질게 대했을 뿐,,오늘따라 니가 너무 그립다니가 밉고, 내가 밉다그냥 나는 조금 더 멋진 모습으로 니 앞에 서고 싶은 것 뿐
작성일 2024-06-05 작성자 은유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9상세보기 -
수필 Shadow of Friendship
언제부터였을까? 확실하게 단정 짓긴 어려울 것 같다. 친구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우리는 서로를 이해했다. 그래서인지,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곁에 있었다. 하지만 그 행동이 우리에게 있어 뒤틀린 우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너무 늦은 때였다.처음에는 그저 서로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있어서 안정이 되고, 그 아이는 나에게 있어서 자신감을 주었다.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보완해 주었다. 하지만 그 보완은 서로의 결점을 감추는 것일 뿐이었다.첫 번째 갈등은 작은 것이었다. 나는 자신을 존중하고 싶었고, 그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작은 갈등은 끔찍한 충돌을 일으켰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를 상처주기 시작했다.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놓지 못했다. 어쩌면 그 너덜너덜해진 우정의 끈을 애써 붙잡고 있었던 건 우리의 갈등을 더욱 깊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잃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두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우리에 우리를 가뒀다. 그러나 그럴수록 점점 더 고통스러워질 뿐이었다.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 상처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져갔다. 우리의 우정은 더 이상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다. 우리는 함께 있을 때마다 서로를 상처 입히는 것 같았다.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우정이 뒤틀린 것을 인정했다. 우리는 함께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놓아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가려고 했으나..그것은 쉽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도 의지하고 의존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함께 있을 때 더욱 불행했다.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더 많이 상처 입히기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우리의 우정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 나갔다.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뒤틀린 우정은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많이 상처 입히기만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했다. 나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나는 결코 다시 그런 뒤틀린 우정에 빠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작성일 2024-05-31 작성자 미빈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17상세보기 -
수필 당신의 거시세계와 미시세계
당신이 움직이는 길이 선일지라도 빛에는 점과 같을 것입니다 당신이 점처럼 서 있을 지라도 개미에게는 선과 같을 것입니다
작성일 2024-05-28 작성자 리지소어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88상세보기 -
수필 이방인
우리는 모두 사는 방식이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각자의 성격, 취향, 행동들이 다른 것이다. 한 마디로 개인이라는 내면적 국가가 있고 사회는 이 국가에 들리는 타국인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사람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사람들에게 있어 효율적이고 기쁨이겠지만 나처럼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너무 힘들다. 특히 남들과 달리 지병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 이는 더 잔인하고 무서운 상호작용 방식이다. 나는 나와같이 내향적이고 남들과 다른 사람을 외향, 내향이 함께 어울리는 개인 국가 사이의 어울리지 못하는 이방인이라고 말을 한다. 이방인의 사전적 개념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방인은 남들과 다른 모습과 생각을 가진 사람, 즉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알베르 까뮈의 소설 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까뮈의 은 남들과 달리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뫼르소가 겪는 일을 서술한 책이다. 여기서 이방인의 개념은 타국인이 아닌 대중적인 사고와 생각이 다르거나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난 이방인은 단순 외국인이 아니라는 것과 평범하지 않은 비평범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사고적 개념을 확립했다. 그래서 난 남들과 다른 나를 이방인이라 칭한다. 올해 3월 본례 지병인 기침이 있던 나는 고등학교 적응이 힘들었다. 이방인이라는 자의적 인식 때문일까? 나는 반 친구들과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개학 첫날에는 소화도 되지 않고 미친듯 몸이 떨렸다. "떨지마, 눈치 보지마, 어깨 펴."라는 엄마의 말도 솔직히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내가 그당시 의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책 뿐이었다. 그래서 그 주간에는 은유의 을 읽었지만 그 내용들은 스쳐지나가 지금은 책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다음날도 그 다다음날도 나는 친구들이 무섭고 두려워 말을 잘하지는 못했다. 3월은 매일,매일 힘들어 지옥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3월 13일 글틴에 잠시 들어왔는데 2월달에 쓴 시 이 장원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시는 내향적인 사람이 살아가는 마음을 서술한 시로 지금의 내 모습을 과거에 본듯 그린 것 같았다. 반 친구들이 무서웠지만 또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방인이라는 생각에 쉽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이 모습이 내가 과거에 쓴 시에 잘 담아져 있어 보는동안 신기했다. 그리고 잠시 내가 이방인이 아니었다면이라는 우울감도 함께 몰려왔다. 이후 19일날은 내 문우 필명 김희수가 글틴 소설부분 장원을 했다는 소식에 기뻤다. 그러나 이 기쁨도 학교가 끝나고 난 이후 피로를 이기지는 못했다. 31일 나는 박서련 멘토의 책 을 읽고 독후록을 작성했다. 위 책에는 내가 알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바로 "가끔 생각나요. 나에게 차가운 얼굴을 보여 준 사람들. 그렇지만 사실은 그냥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사람들이 내게 냉담한 표정을 지었던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그런게 아니었을까"라는 구절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작성일 2024-05-26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3 조회수 497상세보기 -
수필 사랑을 쓰다
3월 가정 시간 우리는 '사랑'과 부모가 됨에 따른 것을 배웠다. 3월의 마지막 가정 시간 "다들 조별로 사랑 노래 하나 생각하렴. 다음 시간에 사랑 노래 부를거야." 선생님의 말씀에 가사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왜냐 우리반 28명 중 3명을 제외한 모두가 내향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노래 부르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것은 나도 똑같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주제인 '사랑'을 가지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내가 아는 사랑 노래하고는 뮤지컬 의 과 강성희의 , 박애리의 마지막으로 뮤지컬 의 , 애국가 뿐이었다. 과연 친구들이 위 노래를 알까 걱정을했다. 역시나 내 걱정대로 위 노래 중 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후보에 를 넣었지만 선생님께서 "부처님 사랑, 예수님 사랑, 나라 사랑 노래는 하면 안된다."라고 말을 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에 다들 웃으면 한편으로 '큰일났다'라는 생각이 훅 들어왔다. 여러 고민을 하던 중 최종 고른 곡은 동요 이었다. 다들 이 노래가 왜 사랑 노래인지 궁금해했다. 이 노래가 사랑 노래인 이유는 가사 "사랑해 널 사랑해 오늘은 말할거야"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조는 이 노래를 부르고 창피한 모습으로 자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행히 마지막 조도 동요 을 불러서 창피함은 한결 나았다.그러나 나는 위 수업에 궁금증이 생겼다. 왜 친구들이 선택한 노래는 왜 다 밝고 활짝 핀 꽃같은 노래인 것인가? 처음 조가 불렀던 도 그렇고 우리 조가 불렀던 도 그렇고 마지막 조가 부른 도 그렇고 왜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 노래는 다 밝은 것인가? 또 사랑의 반대인 이별은 왜 다 슬픈 노래인 것일까? 나는 그 질문이 생겼다. 이 질문 때문이가 난 사랑 노래, 이별 노래가 싫다. 사랑 시와 이별 시 모두 싫다. 연애 소설 두 손들고 활짝 뛸 정도로 싫다. 나는 사랑이면서 슬프고 이별이면서 기쁜 그런 작품이 좋다.그래서 난 사랑의 양면성을 보여준 앞써 친구들이 몰랐던 노래가 훨씬 좋았다. 내가 몰라서 그런 것인지 아님 현실을 몰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취향은 확실히 사랑을 경계한다. 일단 '사랑'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겠다. 사랑이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내가 주의 깊게 본 것은 귀중히 여기는 것과 아끼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꼭 밝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사람을 깊게 파고 파면 사람의 본성을 볼 수 있는데 그 본성이 꼭 착한 마음 선선설이 아닌 선악설같은 악한 존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이는 사회 문제인 데이트 폭력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의 매'라고 불리는 말도 있듯 사랑은 모진 것을 모질다 말해 줄 수 있는 그런 것도 포함 되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밝을 수만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부모에게 모진 것을 지적받으면 "사랑을 받아 즐거워"라고 말하는 사람은 적다. 보통은 "아 씨 내가 뭘 잘못해서 그렇지?"라고 말한다. 이 행위에 대하여 거부
작성일 2024-05-25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24상세보기 -
수필 [수필] 2024년 4월 월 장원 발표
[글틴 소설&수필 게시판 멘토, 박서련 작가님의 선정글 입니다.] 수필 게시판 글티너 여러분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5월도 거의 끝에 다다른 이제서야 인사를 드립니다… 늘 부끄럽고 죄송해요. 거두절미하고 이번달의 월장원 발표합니다. 이번달은 큰 고심 없이 위다윗님의 을 월장원으로 추천하기로 했어요. 담대하고 사랑스러운 글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종교적 신념과 불화하는 정체성에 대한 오랜 고민과 지금의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진솔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 글에 드러난 견해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말이 옳겠지요. 이 글의 저자가 스스로를 지나치게 미워하지는 않으려고 마련한 최소한의 영토를 빼앗을 권리가 누구에게 있을까요. 다만 저는 이 글이, 위다윗님이 앞으로 가 닿을 또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남긴 흔적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정체성에 대한 글쓰기는 당사자성을 통해 파괴력과 호소력을 갖지만,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쓰기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유념해 주셨으면 해요. 어떤 이들에게는 이 글의 담대함이 환대로 느껴질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글의 저자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한 말로 아파하기도 하겠지요. 다소의 우려를 뒤로 하고, 이 글의 진솔함과 담대함에 신뢰를 보낸다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내면이 성숙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월장원 축하드려요! 라고 하면 어떤 글인지 다들 궁금하시겠죠-! 글티너 여러분, 월장원 글 많이많이 읽어주세요. 다음달에는 늦지 않도록 노력해보겠다는 공수표를 남겨봅니다… 다가오는 여름 무더위 피해 없으시길! 감사합니다.
작성일 2024-05-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41상세보기 -
수필 숫자의 기억
아무것도 아니던 무언가를 기억하게 되는 일이 있다. 그건 대체로 특별해지기 때문이다. 일상 여기저기에 묻어있어서 채 알지도 못했던 것을 내가 똑바로 바라보고 알아채게 된다면, 그것은 특별해졌기 때문. 나에게는 어떤 숫자들이 그렇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가장 먼저 숫자들을 외운다. 생일, 전화번호, 그 사람에게 의미있는 날짜나, 내가 그 사람을 만난 날짜 같은 것. 시계를 볼 때, 달력을 볼 때, 수학 문제를 풀 때 닮은꼴의 숫자들이 나오면 괜히 반가워진다. 너는 여기에도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그러면 나의 지평이 조금 더 넓어지는 것 같다. 원래라면 스쳐지나갔을 작은 일들에 곤두선 무수한 촉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일이다. 특히 그 숫자로 가리키는 시간에 도착하면, 온 세상을 네 안에서 사는 것만 같아 내가 눈부셔진다. 하루에도 두 번씩, 똑같은 시간은 돌아오기 때문에 나는 잊고 있다가도 너를 떠올린다. 그러면 지금을 살아가느라 바쁘던 것도 어디 깊은 곳에 있던 사랑 닮은 정서 앞에서 전부 고요해진다. 때때로 호들갑처럼, 때때로 딱 일분치의 구원처럼. 나는 그 시간을 대한다. 고대하던 일을 그 시간 즈음에 성공하게 되면 전부 너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인 것만 같고 울다가 시계를 봤는데 낯설지 않은 숫자가 보이면 괜히 시간마저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아 옹송그린 어깨가 조금 판판해진다. 그런 기억이 있다. 초콜릿을 사먹고는 그 두꺼운 종이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접으려는 찰나에 보인 유통기한. 그 날짜가 올해 너의 생일이라서, 나는 여전히 다 먹은 초콜릿 껍질을 가지고 있다. 모난 데 없이 어딘가 정갈하기까지 한 숫자를 보면서 내가 퍽 우습게 느껴졌다. 원래 괜한 일에 과대한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 사랑의 형태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듯이, 나는 사랑을 하는 동안 몸집을 불려서 감탄하고 어디서 빌려온 겉멋든 비유들에 고개를 끄덕인다. 초콜릿 껍질을 가지고 있는 미련하고 어이없는 일에는 중경삼림을 떠올린다. 맥이 들어맞는 곳 하나 없지만, 사랑과 유통기한 너의 생일과 만 년을 견주어 보면서 그렇게 한다. 마음의 갤러리에는 이제는 단번에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된 숫자들이 다양한 조형물과 회화의 형태를 하고 걸려 있다. 그러다가 문득문득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어, 이 숫자 너무 익숙한데 하고. 그러면 옆사람은 그렇게 묻는다. 숫자가 익숙하고 말고 할게 뭐가 있어? 그렇지만 나에게는 생각보다 강한 기억, 생각보다 화려한 추억이 그 밋밋한 획 안에 담겨있다. 누군가와의 시간을 정리하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기면, 나는 숫자를 잊기 위해 애쓴다. 더 이상 시계를 보고 반가워하지 않기 위해 생겨버린 습관들을 나의 윤곽 밖으로 내보내려고 한다. 이른 아침 기상 시간에 익숙해져버린 것이 억울한 퇴사자의 마음처럼 그렇게. 혼자 자조하고 그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준 일을 낯설게 후회하다가 분명히 나의 것이던 이 숫자가, 누구로 인한 것이었는지가 어렴풋해질 때 쯤 나는 다음 돌계단을 밟는다. 계단은 언제나 다음 칸이 있고, 그래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작성일 2024-05-16 작성자 담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42상세보기 -
수필 노력과 재능, 운, 삶에 대한 고찰.
노력도 결국엔 재능인걸까. 결국 모든 것은 운이었던 걸까.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은, 그저 신이 준 허상의 장난감에 불과했던 걸까. 동시에 드는 의문 한가지. 정말 모든 것이 운이고, 정말 모든 것이 재능이면, 세상을 사는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하는 현재는 그저 거대한 흐름 중 하나에 불과했던 걸까. 정말, 나의 노력은 어떤 의미도 없었던 걸까. 애초에 그 노력조차 모두 운이었던 걸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던 것일까.그렇게 생각하며 우울해졌다. 그래도 노력하면 달라진다고 믿었다. 모두가 노력만 하면, 어느정도는 괜찮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전제조건 자체가 틀렸었다. 노력 자체가 재능이었던 거다. 아.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열심히 해봤자 그건 ‘내’가 아니라 ‘운명’이 결정한건데. 나는 나일까. ‘나’라는 존재는 그저 운명의 한 흐름이 아니라, ‘나’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짓거리조차 의미가 있을까?
작성일 2024-05-14 작성자 김윤지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28상세보기 -
수필 말도로르의 반항
말도로르의 노래는 로트레아몽이 발표한 산문시집이다. 카뮈는 그의 책 반항인에서 반항의 역사를 서술하며 한 가지 예로 로트레아몽을 드는데 이후에 서술되는 반항하는 인간상과는 꽤나 큰 차이를 보이는 말도로르의 경우를 자신이 사용하는 반항의 계보에 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말도로르의 특징은 신, 즉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반감과 그에 따르는 사회 규범의 파괴이다. 예를 들어 당시 사회 규범에서의 모범이 되는 가족(명예가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아버지, 가족 간 예의를 지키는 현명하고 다정한 어머니,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들)이 나오는데, 그 가족의 아이를 꾀어내고 마대자루에 담아 포물선을 그리게 던져버린다. 반항의 사전적인 뜻을 찾아보면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 맞서 대들거나 반대함'이므로 말도로르의 일차원적인 테러들을 섭리에 대한 반항으로 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카뮈의 반항은 아무런 숙고 없이 벌이는 무차별적인 테러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이때 반항은 절대적 부정에서 변화해 일어난 행동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절대적인 부정은 모든 의미를 거부하면서도 생을 유지하려 하는데, 생을 선택하는 것에서 이미 생에 대한 가치판단을 한 것으로, 이 부조리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조리한 인간이며 1차 대전을 통해 막 종교와 이성의 신성화에서 벗어난 유럽에서는 부조리의 추론으로 자살의 정당성을 숙고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너무나 솔직한 나머지 절대적인 의미없음에서 나오는 살인의 정당성을 떠올리기보다 자신까지 부정해서 자살로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시작되고 끝난 시기 유럽에는 부조리의 추론을 비틀어 국가적 단위의 살인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고 개인적인 숙고에서의 자살은 사실상 사라졌다. 부조리에서 도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살이 아니라 살인을 선택한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 반항이 아니다. 반항은 자신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침해를 막는 것이다. 침해를 거부하는 것이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반항할 수 있다. 따라서 반항은 절대적 거부도 파괴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전적인 긍정이다. 가치의 인정과 거기서 나오는 보존을 원하는 긍정이고, 따라서 폭력은 가치의 보호를 위해서 필요한 가장 극단적인 수단으로써만 행해질 수 있으며 그 책임 또한 짊어져야 한다. 말도로르도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한다. 섭리, 절대선 등의 것과 거기서 오는 희망을 없애고자 한다. 그런 것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섭리가 희망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따르는 이들도 용납할 수 없다. 섭리에 대항해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섭리만을 공격하고 끝내는게 아닌 것이다. 이때 반항적인 추론은 가치를 손으로 가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섭리를 밀쳐내고 마침내는 섭리를 끌어내리는 것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인간은 기준이 아무것도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반항의 추론은 섭리를 끌어내고 자신이 거기에 앉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추론의 단계에서는 이미 섭리의 자리에 앉은 말도로르에게 섭리를 기준
작성일 2024-05-07 작성자 데카당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55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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