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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vol.250

2026년 2월호
2026년 2월호
문장웹진

소설

문장에서
만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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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2026.02.01
불태울 시간

불태울 시간 장은진 고모 집 마당에는 나무가 많았다. 3년 전 돌아가신 고모부가 심고 가꾼 나무들이었다. 고모부는 멀리까지 산책 나갈 필요 없이 마당에 한 발만 내디뎌도 숲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 좋다고 말했다. 은퇴 전까지도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던 고모부는 힐링을 위해 그 ‘착각’이 몹시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착각이 아닌 게 고모 집 마당은 진짜 숲 같아서, 누구라도 바라보면 숲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고, 숲이라 말하고 생각할수록 진짜 숲이 되어 갔다. 그러니까 고모부는 마당이 진짜 자신의 숲이 되어 주지 않아서, 그 착각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해서 일찍 돌아가신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넘어섰다면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었을 거라고. 나 또한 숲의 놀라운 힘을 어느 정도는 믿으니까. 숲 때문인지, 고모 집으로 내려온 지 나흘 만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맑아졌다. 내 발로 문을 박차고 나온 망할 회사도, 말싸움 끝에 토라진 여자 친구도 숲을 보고 있으면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재취업을 준비 중인 내게 고모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아버지를 통해 침울한 상황을 전해 들었는지 고모는 나한테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다고 했다. 자기 집으로 내려와 머리도 식히면서 취업 준비를 천천히 하라는 것이었다. 공기도 좋고 조용해서 몸과 마음이 금방 건강하고 편안해질 거라는데, 통화가 길어질수록 힐링을 누리고 싶은 사람은 정작 고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화를 마칠 즈음 나는 고모가 집 봐줄 사람이 필요해서 전화를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고모는 스페인 코스타 블랑카에 사는 여고 동창생을 만나러 일주일 후 출국한다고 했다. 동창생도 사별 후 혼자 지내고 있어서 며칠 쉬다 올 거라고 했지만, 뉘앙스는 겨울이 끝날 때까지 푹 눌러앉을 계획인 것 같았다. 고모는 벌써 여고생으로 돌아간 듯 흥분된 목소리였다. 나는 재취업을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데다, 마침 월셋집 계약 기간도 끝나 가서 그러겠다고 했다. 살고 있는 원룸이 풀 빌트인이라 짐 때문에 번거로울 일도 없었고, 월세를 몇 달분이라도 아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결정은 쉬웠다. 고모 말대로 조용한 곳에서 지내며 힐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고모는 전화를 끊으며 마당으로 들락거리는 독수리 5형제 밥도 좀 챙겨 주고, 라고 말했다. 눈을 뜨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지금처럼 마당을 마주 보고 서서 숲이라 말하고 숲이라고 생각하는 것. 진짜 숲이 되어 가게 입속에서 바람을 불며 숲, 하고 발음한 뒤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깊이 들이마시며 숲이다, 하고 여기는 것. 이어서 그 기운을 받아 가슴에 덕지덕지 묻은 답답함을 빡빡 지워 내는 것. 얼마간 투명해졌다 싶으면 빽빽한 나무 사이를 지나 돌담 밑에 독수리 5형제가 하루 동안 먹을 물과 사료를 세 개의 그릇에 나누어 부어주는 것. 그러고 돌아서면 숲은 마루에서 보던 것과 다른 모습과 빛깔로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늘 보던 곳도 등을 지고 반대 방향에서 바라보면 새로

소설 2026.02.01
아직 이른 마음

아직 이른 마음 박하신 섬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성했다. 초여름을 맞는 버드나무 녹음이 무성했고, 고속도로에 바닷가 갯강구들처럼 달라붙은 자동차 정체 행렬이 무성했고, 하늘에 모둠 지은 뭉게구름 떼가 켜켜이 무성했다. 구름으로 말하자면 경부 고속도로 운전자들의 한숨이 한데 모인 것 같은 풍성함이었고 눅진함이었다. 사이사이 파고드는 여름 볕은 쨍쨍하기만 해서 자동차 갯강구들이 아지랑이 같은 김을 뿜어내며 느릿느릿 익어 가고 있었다. 올여름 재해에 가까운 폭염이 찾아온다고 했다. 창문을 내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끊어야 할 텐데. 지난 건강검진에서 의사는 금연을 강한 어조로 권고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라디오에선 올해 메탄가스와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다시 한번 고점을 돌파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 솥단지를 가득 메운 자동차 행렬을 보니 이해가 안 갈 바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차도 노후 경유차라며 폐차를 권고하던데··· 때마침 창밖에서 도로변 축사 냄새가 매연에 엉킨 채 훅 끼쳤다. 과연 오존을 뚫어 버릴 것 같은 유독함이다. 이게 다 나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앞차 배기의 색깔도 심상치 않다. 그래, 어차피 다 같이 찜 쪄지는 마당에 잘잘못은 논하지 말기로 하자. 이미 벌어진 일과 잃어버린 것. 재해에는 고민한들 거스를 수 없는 면이 있고 그렇기에 말 그대로 재해인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암 같은 거다. 분명한 업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건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그래, 평일 오전부터 고속도로에 갇혀 소들 방귀나 맡고 있게 된 것도 말하자면 재해 같은, 암 같은 소식 때문이었다. 그건 폭발에 대한 것이었다. 동선의 묘지가 폭발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건 이른 열대야에 허덕이던 어제저녁이었다. 낯선 번호로 수차례 전화가 걸려 온 것인데 상대방은 대뜸, 동선 씨 친구분 되십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을 매봉도 수호행동위원장이라고 간략히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틀림없이 폭발합니다··· 땅속에 매설된 니트로글리세린과 질산암모늄 수천 킬로그램이··· 당신 친구의 묘지를 박살 내 버릴 거라구요···. 상대방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거대한 세력이 묘지를 파괴하기 일보 직전이라며 호소했다. 그것도 폭약을 심고 아주 섬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고 했다. 그는 동선의 묘소를 지키고 싶다면 나더러 당장 매봉도로 달려오라고 촉구했다. 여기··· 당신처럼 무언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가능하면 내일까지 와 주십시오···. 불가능해도 내일까지 오십시오. 체념하지 않는다면··· 지킬 수 있습니다. 모

소설 2026.02.01
도래의 얼굴

도래의 얼굴 최정나 한 남자가 길을 걷는다. 남자의 이름은 웅현이다. 웅현은 은행나무길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노랗게 물든 황금 터널 안에서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본다. 바람이 일자 은행잎들이 햇살을 따라 휘돌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웅현은 꽃잎처럼 흩날리는 노란 잎사귀들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위로도 햇살이 부서진다. 바람을 받은 잎사귀들이 다시 허공으로 번져 오르다가 방향을 살짝 틀어 다른 데로 이동한다. 웅현은 눈에 비친 풍경을 화면에 담아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웅현은 얼마 전 도래와 이별했다. 그래서 길에서 스치는 사람이 모두 도래로 보인다. 도래가 홀로 걷고, 도래가 누군가와 함께 걷고, 떨어지는 낙엽을 올려다보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내려다보고···. 도래는 출몰하듯 나타나 웅현 곁을 스쳐 지난다. 옆에 있는데도 먼 얼굴, 도래가 자신을 불러내는 건지 자신이 도래를 불러내는 건지 웅현은 알 수 없다. 이윽고 수많은 도래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로 변한다. 도래와 함께 떠난 얼굴들, 이름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웅현은 하늘을 본다. 사랑을 놓쳤니? 황금빛 사이로 겹쳐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 있다. 왜 웃는 거지? 웅현은 누군가 보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놀림 받은 기분이다. 하지만 웅현은 그들이 남겨진 자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긴다. 그렇더라도 역시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을 바꾸고, 곧이어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어 먹먹해진다. 나를 이해해 줘···, 도래의 마지막 말은 웅현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변형되다가 서서히 형태를 찾는다. 빛은 따뜻하고 세상은 노랗게 물들었지. 황금빛 계절이거든. 웅현이 말을 건넨다. 빛의 터널을 나오는 웅현의 눈에 그들이 비쳐 든다. 도래가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웅현의 발걸음은 더디다. 노란빛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거리는 붉은빛에 휩싸인다. 사랑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웅현의 귓가에 닿는다. 여자는 붉게 물든 나무 아래 붉은 낙엽을 밟고 서 있다. 이어 들려오는 맞은편 남자의 웃음소리, 여자가 낙엽을 그러모아 허공에 뿌린다. 그러고는 다시 외친다. 사랑한다고! 붉은색이 그들 주위로 날아올라 빛처럼 흩어진다. 여자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소리칠 기세지만 남자는 계속 웃기만 한다. 웅현은 그들이 붉은 구체 안에 있는 듯하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나도 사랑해!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번져온다. 연인이 낯선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웅현도 소리 나는 데로 시선을 돌리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고 조금 전까지 머물러 있던 은행나무길이 보일 뿐이다. 웅현은 가벼운 듯 장난스러운 남자의 목소리를 아는 듯하다. 웅현은 도래와 함께 걷던 길을 홀로 걸으며 그녀와 함께였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러자

소설 2026.02.01
기계와 황새

기계와 황새 양선형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네가 저질렀던 끔찍한 죄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기나긴 시간 동안, 어쩌면 인간으로 살았던 시간을 초과할 만큼 오랫동안 작동했다. 너는 네게 주어진 원통형의 한계 속에 틀어박혔다. 그것이 너였다. 배터리와 부품이 망가지면 너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착했고, 너는 네 작동을 중지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음은 물론 작동을 중지하고 싶은 욕망 또한 갖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형벌이 단호하게 집행되었고, 너는 눈을 감았으며, 숨이 끊어지기 직전 너는 이후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줄곧 반복해야만 하는 한 줄의 기억 타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었던 시절의 작은 파편으로서 오토마타로 개조된 네 머리통 안에 각인될 예정이었다. 누군가 드러누운 네 팔뚝에 주사를 놓았다. 나른한 의식은 감은 눈 속으로 어른거리는 박쥐 모양의 환영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기억 타래는 네가 과거에 살과 피를, 얼굴과 자의식을 가졌던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의미했다. 인간인 너와 오토마타인 너를 잇는 개체로서의 동일성을, 속죄를 끝마치고 형기가 만료될 때까지 네가 감당해야만 하는 과오와 책임의 연속성을 말이다. 따라서 기억 타래는 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인해 극형에 처해진 바로 그 범인임을 증명하는 전자 신분증이자 영혼의 낙인으로 비유될 수 있었다. 네가 죄수임을 공인하는 사법 기관의 서명, 특수한 일련번호, 기계의 머리통 안쪽에 새겨진 자아의 조각, 네 유한하며 어리석었던 시절의 잔류 데이터. 그러나 너는 네가 다른 기억들 가운데 하필이면 이 기억 타래를 골랐던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을 떠올릴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각별했기 때문인지, 각별했던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무의미했기 때문인지. 너는 카메라처럼 무감하게 눈을 떴으며,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딸깍거리는, 앵앵거리고 번쩍거리는 전자 신호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네 머리통 안에는 한 줄의 기억 타래만이 남아 있었다.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정확하게 움직이는 효율적인 무력함이었고, 그 무력함 속을 공회전하는 짤막한 분량의 이미지 찌꺼기였다. 너는 스크린을 향해 강제로 조향된 인형의 냉담하며 거짓된 눈알처럼 기억의 이미지를 주시했고…… 주시하지 않았으며, 사나운 파도처럼 우윳빛으로 들이닥치는 심신상실이 환하게 빛나는 스크린 주위를 에워쌌다. 네 머리통 안의 암실에서는 언제나 한 줄의 기억 타래가 상영되었다. 너는 기억 타래를 출력하는 영사기이자 영사막이자 영사기사였으며, 성자와 성부와 성령과…… 세 가지 작동인 사이를 그치지 않고 순환하는 자율적인 엔진에 가담하고 예속된 상태였으나, 대부분 네 기억의 관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엔 네 기억의 관객일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ON이었다. 너는 네 신경망에 폭포처럼 흐르는 전류를 자발적으로 차단할 수 없

소설 2026.01.01
늦은 오후의 일

늦은 오후의 일 신연선 1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 가려는데 병원 주차장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생전 땡볕 아래에서 맨얼굴 내보인 적 없던 듯 희디흰 얼굴이었다. 떨고 있는 모습이 사뭇 눈길을 끌었다. 낯선 땅에 홀로 떨어진 모습 같기도 했다. 나의 멍한 눈과 그 사람의 흔들리는 눈이 흐린 하늘 아래 잠깐 마주쳤다. 추운데 얼른 타요, 차 안에서 동생들이 소리쳤고 나는 그야말로 쓰러지듯 차에 올랐다. 차는 순식간에 주차장을 빠져나와 앞으로 나아갔다. 차의 속도만큼 빠르게 창밖 풍경이 뒤로 달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너무나 피곤했다. 누님, 다 왔소. 일어나쇼. 막내 목소리가 꿈결의 경계를 지나 점차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른 동생들을 내려 주고 또 이동하는 내내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바윗덩이가 짓누르는 듯한 어깨의 피로는 여전했다. 습관처럼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차에서 내리자 막내가 뒷자석에 있던 남편의 유골함을 조심히 꺼내 내게 안기고는 돌아섰다. 막내는 장례를 치르는 내내 살뜰했다. 하염없이 넋 놓고 있는 나를 대신해 번거로운 장례 절차를 세심하게 따져 가며 봐주었다. 큰소리 한 번 나지 않게 해 준 것이 고마웠으나 저녁 먹고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누가 밥을 차린단 말인가. 대충 한 상 차리는 것이야 일도 아니지만. 나는 그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눈치가 어땠는지 막내도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걷는 뒷모습이 이십오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꼭 닮아 있었다. 많이 늙었구나. 내가 쟤를 업어 키웠는데. 작기도 작았고, 울기는 또 얼마나 울었는지 녀석이 잠시 숨을 고르느라 울음을 멈추면 귀가 멍할 정도였다. 시간은 어째서 쏘아 놓은 화살일까. 그 까칠한 아기가 늙은 아버지 뒷모습을 하고 구부정 걸어갈 때까지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기분이었다. 집으로 들어서자 묵은 공기 냄새가 났다. 그 경황 중에 습관대로 개켜 둔 남편의 이부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현관 한쪽에 유골함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자리를 찾아 줘야 할 것이었지만, 일단 그대로 두자. 집이 적막하다. 남편과 있을 때도 소란한 적은 거의 없던 곳이다. 남편은 말하는 것을 귀찮아했다. 귀찮아하다가 잘 못하게 된 사람. 질문을 하면 행동으로 답하던 사람. 술을 마시면 말이 다소 늘었지만 곧 잠이 들어 버렸으므로 그러는 시간도 짧았다. 그런대로 산 지 사십 년이 훌쩍이었다. 든든하지도 믿음직스럽지도 않은 반려자였는데 빈자리가 이렇게 나나. 신발을 벗고 집에 올라서서 TV부터 켰다. 흘러나오는 말소리를 들으니 어느 정도 평상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가운데가 꺼진 소파, 색이 바랜 커튼, 구석구석이 들뜬 장판, 시간에 닳은 채 집의 일부가 된 것들. 이곳도 반짝이던 때가 있었다. 연년생 칭얼대는 두 애들을 데리고 이사하면서도 그때는 힘든 줄을 몰랐다. 평생 처음 가져 보는 내 집이었고, 창틀이니 화장실이니 구석구석 묵은 때를 닦느라 한동안 근육통을 달고 살면서

소설 2026.01.01
태양에서 멀리

태양에서 멀리 김채원 지금부터 아침이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히 주어질 것이었으며 당연하게도 솔지에게도 주어질 것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어떠한 저항도 없이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름의 궤적을 그리며 부지런히 그 시간을 사는 일. 솔지에게 그것은 꽤나 쉬운 일이었다. 그치만 어려운 일인데? 솔지는 생각했다. 꽤나 쉽고, 그치만 어려운 일이라고. 알겠습니다, 솔지는 늦저녁에 창문을 열어 두고 혼자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선과 악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잘못 걸렸다, 하면서도 끝까지 읽기는 다 읽었다. 치워 없애야만 하는 악이 존재하고 그 악에 맞서 싸우는 선이 있다는 게 이해가 잘 안됐다. 누가 보아도 선한 (그런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인물들이 고통받는 이야기.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반짝이는 우정이나 사랑 같은 것들. 에구, 눈부셔라. 에구, 싫어라. 솔지는 이 모든 것에 필요 이상의 적의를 가졌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솔지의 약점을 건드리기 때문이었다. 솔지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약점이라는 것은 대개 이런 거였다. 솔지는 배신하기를 잘했다. 그러니까 배신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정도의 배신을 참 잘했다. 최근에 솔지는 세 사람의 친구를 배신했다. 세 사람의 친구에게 차례차례 합성 마약을 권하였다. 세 사람의 친구 민지, 차은이, 가영이가 고등학교 건물 5층 화장실 맨 끝 칸에 모여 차례차례 그것을 받아 보았다. 처음이니까 그냥 줄게. 이게 뭔데? 알지만 한번 물어볼래. 그럼 알려 줄게. 몸에 좋은 약이야. 약의 이름은 해마야. 네가 지었어? 응, 내가. 이름이 영 징그럽고 별로다. 거절해도 돼? 왜? 귀여운데···. 원래 이름은 뭔데? 나도 몰라. 요즘 입시 준비하느라 머리가 아프다며. 생리통도 심하다며. 그런데 나 지금 진짜 돈이 없어···. 괜찮아, 내가 돈이 많아! 내 지갑을 보여 줄게! 솔지의 암호 화폐 지갑은 영단어로 된 열두 개의 암호를 입력해야만 열어 볼 수 있었다. 지갑의 암호는 솔지가 좋아하는 영단어의 단순한 나열이었다. 첫 번째 단어는 window였고 두 번째 단어는 forest 그리고 마지막 단어는 mountain, 산이었다. 겨울 산을 잘게 부순 듯한 흰 알갱이들을 솔지는 차분하게 소분해 가지고 다녔다. 합성이라는 게 둘 이상의 것을 합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인데··· 정확히 무엇과 무엇과 무엇이 기타 등등 합쳐져 마침내 하나를 이루게 된 것인지는 제조하는 역할이 아니라서 몰랐다. 예전에는 약의 성분이 비교적 단순했는데 이제는 좀 복잡해졌다고들 했다. 단속에 걸리지 않으려면 약의 성분이 계속해서 복잡해져야만 한다고들 했다··· ···전부 주워들은 이야기였다. 솔지의 역할은 제조된 물건을 가져다가 주변에 판매한다고 해야 하나 일

소설 2026.01.01
잊고 있고 잇는

잊고 있고 잇는 진연주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지냈다. 한 칸짜리 방. 침대가 있고 책상이 있고 책장과··· 새 둥지가 있는. 2년 전의 새는 죽었다. 좁은 방범창 안에서. 이틀을 울다가. 구구 쿼쿼. 소리가 줄어들면서. 약해지면서. 나는 소리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러고도 며칠을 더. 안전해질 때까지. 며칠 더 기다렸다가. 숨이 죽을 때까지. 숨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당황하면 안 되니까. 당황이 수습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곤란한 일이니까. 며칠 더 기다렸다가. 딱딱해진 새를 치우고.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를 거둬 내고. 방범창의 패널을 깨고. 다시는 새가 갇혀 죽는 일이 없도록. 패널을 깨고. 새는 왜 나가지 못했을까. 들어왔는데 왜 나가지는 못한 것일까. 날개를 펴서 도움닫기를 할 만큼. 공간이 충분히 넓지 않았기 때문일까. 창문의 반을 가릴 만큼. 충분히 높았기 때문일까. 방범창이. 폴리카보네이트 방범창. 폴리카보네이트. 폴리카. 나는 꿈을 꾸고 새가 죽고. 꿈에서 매번 새가 죽고. 구구 쿼쿼. 소리가 줄어들고. 약해지고. 꿈을 꾸고 새가 죽고. 매번. 나는 그 새가 알을 밴 상태였고 새가 죽으면서 알도 함께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슬퍼졌지만 그러한 조금 더의 슬픔이 죽은 새에게는 약간의 좋은 일이겠거니 했다. 그렇더라도 내게 그 새의 죽음은 시간의 궤도 바깥에서부터 시작된 파열음처럼 당혹스럽고 얼떨떨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마주한 삶의 필연적 결말.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여기였을까. 처음부터 죽음을 예견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새가 마침내 남은 삶을 향해 날아오를 것이라고, 구구 쿼쿼 우는 소리가 그러한 안간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켜보거나 지켜보지 않는 일만이 나의 것이었으나 그렇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그 새의 삶에 또는 죽음에 개입했어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랬어야 하나. 나는 한동안 가장 익숙한 골목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허둥대고 우물쭈물하고 두려워하고. 새로운 새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여름이었다. 지독하게 습하고 더운 여름의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반쯤은 정신이 나간 듯 갈팡질팡하며. 나는 새가 나뭇가지와 나뭇잎과 비닐 같은 것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새는 한동안 가만히 앉았다가 황급히 목을 빼 주변을 둘러봤고 부리로 털을 고르거나 몸을 움직여 자리를 고르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 떠나지 않다가 돌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멈추고 날아오르는 일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곳에서 작은 알 두 개를 발견했다. 덧문 밖의 햇살처럼 뽀얗고 눈부신 데다 아주 정교하게 빚어진 도자기처럼 매끈한 것, 완벽한 형태의 생명이 그야말로 덜컥, 거기 있었던 것이다. 철골조와 앙상한 밑바닥만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방범창의 한구석에 말이다. 하나의 존재와 하나의 장소, 그 둘의 대비가 너무도 강렬해서 섬뜩하게 느껴질

소설 2026.01.01
겨울 산을 오르고

겨울 산을 오르고 박현옥 기제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한 일은 산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반 거리에 기제의 아버지가 살았다. 거기서 차로 삼십 분을 더 가면 기제의 아버지가 소유한 선산이 나왔다. 12월 중순, 눈이 내리기 전에 다녀오자며 기제의 아버지가 기제에게 말했고, 이어 기제가 내게 주말에 같이 아버지 댁에 내려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따로 챙길 건 없으나 다만 밑창이 튼튼한 신발을 신으라고 했다. 신발장엔 바닥이 얇고 발목이 드러나는 단화나 굽이 높은 구두뿐이었으므로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트래킹화를 하나 주문했다. 이튿날 저녁에 택배로 받아 본 신발은 정말로 단단했다. 뒤축이 특히 단단해서 기제가 차를 세워 둔 집 앞의 큰길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벌써 뒤꿈치가 쓸렸다. 선산엔 산주였던 기제 고모의 산소가 있었다. 기제를 몇 년 동안 만났는데 고모 이야기는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해도 뜨기 전인 새벽에 뻥 뚫린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며 기제는 조잘조잘 떠들었다. 십수 년 전에 남의 집 선산이었던 걸 고모가 7억을 주고 샀다고. 시장에서 방앗간을 하던 고모는 인근 광역시의 국제공항이 그 산으로 이전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평생 모은 목돈을 죄다 털었다. 산주의 처가 쪽 친척이 도시개발과 과장으로 일한다는 말에 홀린 듯 산을 사 버린 것이다. 그러나 뜬소문이 으레 그렇듯 이전이 거의 확정이라던 공항은 여러 번의 공청회 끝에 무산됐으며, 선산 역시 원래의 값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원래는 얼마였는데?” “6천만 원.” “세상에.” 누군가는 기제의 고모에게 선산에서 송이라도 나면 일 년에 한 달만 일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겠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기제의 고모는 혹시나 하나는 마음에 몇 날 며칠 산을 헤집고 돌아다녔으나 산에는 소나무는커녕 상수리나무만 잔뜩 심겨 있었다. 상수리나무는 참나무와 달리 속이 물러 목재로도 쓸 수 없고 숯으로도 못 만든다고, 기제가 말했다. 고모가 그 산에서 발견한 건 송이도 아니고 산삼도 아니라 지천에 떨어진 도토리뿐이었다. “근데 고모도 방앗간에서 도토리 가루를 팔았거든.” 앙금을 말려 가루 낸 것으로 킬로에 만 원을 받았다. 묵으로도 쒀 먹고 전으로도 부쳐 먹고, 효능도 모르는 채 매일 티스푼으로 한 숟갈씩 퍼먹는 사람도 있었다. 기제는 그러니까 고모가 도토리를 8억 원어치 산 것이나 다름없다며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난 다음엔 그 이듬해 고모가 산 중턱에서 제초제를 먹었다고 말했고 그때는 웃지 않았다. 히터를 세게 틀어 놓아 겨드랑이와 등과 발가락에서 땀이 났다. 뒤꿈치가 쓸린 곳에 땀이 닿아 한층 더 따가웠다. 내가 자꾸 발을 꿈질거리자 기제가 발이 시리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기제는 진작 말을 하지 그랬느냐며 히터를 더 올려 버렸다. 나중에는 엉덩이와 오금에도 땀이 났다. 짧게 깎은 기제의 옆머리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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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촉발되는 신정론(神正論)

소설로 촉발되는 신정론(神正論) 윤인로 신이 하는 일, 하려는 일, 그 일·의지의 정당성·정의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함. 곧, 신이 집행하고 관철시키려는 힘과 뜻의 부정의·부당함·악함을 의로워야 할 신에 근거하여 항소함. 이와 반대로 그런 항소·항고를 불가항력적으로 취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신의 의로움·정당함·선함을 불가피하게 인정함. 부당하고 불의한 신에 대한 항고와 뒤이어지는 그것의 취하·철회, 신의 정의에 대한 변호·변론·변신(辯神). 줄여 말해 신정론(神正論·Theodizee, 신+정의theós+díke의 합성어), ‘신≡정의’라는 상보적 합동체로 구성되는 신의 일·뜻·앎·말·법·힘의 복합체론. 이 복합성의 구축 상황으로서, 그런 상황의 재구축을 위하여, (연작)소설집 『사랑이 한 일』의 문장들을 다시 배치해 보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사랑이 한 일』(이승우, 문학동네, 2020), 다시 달리 촉발되는 「욥기」. §1. 롯의 환대를 받은 두 방랑자가 실은 소돔을 멸하도록 신에 의해 파송된 천사들임을 밝히자, 그 임박한 절멸 앞에서 롯과 그의 삼촌은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 “삼촌이 항의하고 호소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삼촌은 의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취급해서 같이 죽게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그 성안에 의인이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 결국 의인이 열 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신의 답을 받아낸다) 롯은 항의도 하지 않고 호소도 하지 않”는바, 불의의 도시 소돔에 “의인은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모든 삶·관계에 고지되고 발효되는 정지·절단으로서의 신의 절멸·폭력. 신을 대신해 두 천사가 행하는 의인과 악인의 무차별·무분별, 그렇기에 신의 공정(公正/工程)에 제기되는 항의와 호소, 이에 대한 신의 조건부 응답. 항의자 삼촌과는 반대로 롯은 신의 일·폭력을 변론하는데, 신의 그 공정을 증거하고 보증하는 정초력으로서 그렇게 한다. 아래 두 대목 중 하나는 그런 롯을 표시하며, 다른 하나는 집-주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부당하게 추방당한 하갈의 ‘울부짖음’을 표현하고 있다. 아래, 인용에 의한 배치, 그 배치 속에서 발생되는 모종의 의미를 살펴보게 된다. [a] 사람을 울부짖게 하는 것이 악이다. 울부짖음은 고발이고 증언이다. 울부짖음이 신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유죄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확실한, 어쩌면 유일한 증거이다. 신은 ‘규탄하는 울부짖음’만을 유죄 증거로 인정하고 판결한다는 것이 천사가 롯에게 한 말의 내용이다. 롯은 이 성을 위해 울부짖지 못한다. [b]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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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아픈) 몸들, 지속되는 광장-들

가려진 (아픈) 몸들, 지속되는 광장-들 -최진영, 이서수, 최은미의 소설을 중심으로1) 민선혜 1. 광장이라는 ‘사건’, 서로에게 감응-연결된다는 ‘환상’ 슬라보예 지젝은 ‘사건’을 안정화된 도식을 뒤엎을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가 출현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사건은 기존의 틀 자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광장은 ‘사건’이었을까. 우리는 정말 같은 ‘사건’을 통과한 것일까. 이번 광장의 특징적인 면은 내란 사태를 경험하며 민주주의의 훼손을 온몸으로 막고자 한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이 모인 곳인 동시에, 내란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장은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사건들의 격전지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가 통과한 광장이 새로운 ‘빛’과 ‘연대’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광장을 빛과 연대의 광장으로만 의미화하는 것 역시 어딘가 석연치 않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개진시키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표하는 삼보일배의 순간에도 여성의 몸은 너무 손쉽게 남성적 언사로부터 훼손되고, 이때 여성의 몸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버리고 만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광장 안에 존재하는 억압, 대상화, 전시와 혐오의 광장. 광장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광장. 광장의 빛남을 이야기하는 동안 표백되고 괴리되어 미끄러지는 외따로 놓인 또 다른 작은 광장들. 이것을 ‘가려진 몸들’이라고 불러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어떤 몸들이 경험하는 광장은 다른 이들이 경험한 광장과 완전히 동일할 수 없다. 탄핵 구호를 외치는 동안, 뉴스 속보를 확인하는 동안 고통에 응답하는 정치를 원했다. 마땅한 고통에 마땅한 응답을 내놓는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2030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이 광장에서 보여 준 활약과 그들이 들고 있던 깃발들의 이채로움에 대한 찬사 대신, 광장 속에서 부글거리고 있던 ‘우리’ 사이의 작은 차이들과 어긋남에 세심히 주목해 주는 정치를 원했다. 광장이 파한 이후에도 이들이 오롯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런데 그 자리는 마련되고 있는 것일까. 그 많던 ‘우리’는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광장에 나타났던 ’몸‘과 다시 사라져 버리고 있는 ‘몸’.2) 지금 우리는 이 나타남과 사라짐을 경유하여 광장을 소급적으로 재사유할 필요가 있다. 광장에 부재했던 몸들을 끊임없이 호출하는 목소리와 보란 듯이 현전했음에도 다시금 사라져 버린 몸들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하지 않는 목소리, 광장을 사이에 두고 발생하는 이 미끄러짐은 민주주의가 얼마간 성차화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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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3] 오늘의 한국문학과 문학 시장에 대하여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3 -오늘의 한국문학과 문학 시장에 대하여 류수연 1. 노벨문학상의 낙수효과? 2020년대 미디어믹스의 원천IP로 주목받는 것은 웹소설이나 웹툰 같은 웹 콘텐츠이다. 다양한 디지털 기기가 일상화되면서 그러한 매체 안에서 즐길 수 있는 더 많은 콘텐츠가 요구되었고, 웹상의 스토리텔링은 매우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그 결과 현재 웹 스토리텔링은 그 자체로 콘텐츠인 동시에 또 다른 콘텐츠의 원천IP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활자로 된 스토리텔링이 영상미디어로 2차 가공되는 일은 비단 최근에 나타난 현상만은 아니다. OSMU나 미디어믹스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사실 이러한 방식의 콘텐츠 확장은 일상적으로 있었다. 무엇보다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은 가장 오랫동안 원천IP로 각광받았던 이야기 그 자체였다. 하나의 소설이 극이 되고, 또 다른 소설의 영감이 되고 패러디 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과정이다. 트랜스미디어 환경이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을 더욱 가속화하고 확대하였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이야기의 구전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의 신체라는 미디어를 활용한 확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과정에서 발생된 2차 가공은 오늘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로 인해 편집과 각색이 더 시시각각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스토리텔링의 확장은 애초에 이야기의 고유 속성이라 할 만큼 아주 익숙한 방식에 가깝다. 문자에서 이미지와 극으로, 다시 영상과 미디어를 넘나드는 스토리텔링의 확장은, 그 무엇보다 문학이 가장 잘 해 왔던 일이니 말이다. 문학의 영상화는 영화산업의 초창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의 미디어믹스에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은 1960년대 문예영화일 것이다. 영화산업이 부흥하면서, 당시 많은 문학작품이 영화의 원천 텍스트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부터는 TV 단막극을 통해 많은 문학 텍스트가 영상화되었고, 이러한 시도는 2020년대 현재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금희 원작의 (2018), 장류진 원작의 (2020)과 (2025) 등의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트랜스미디어 환경 속에서 예측되는 문학의 미래는 암울한 전망으로 가득하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문학의 위기론은 40년 가까이 논의되는 동안 이제는 잊을 만하면 꺼내는 해묵은 불편함이 되었지만, 웹 콘텐츠의 등장 이후에는 위기론 자체도 언급되지 않을 만큼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미디어 환경이 ‘읽기’의 위기를 기정사실화했다면, 생성형 AI의 등장 이후에는 ‘쓰기’의 위기까지 대두되는 실정이다. 생성형 AI가 문해력까지 대체하는 마당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돌이켜 보면 근현대문학사의 여러 굴절마다 제기되었던 문학의 위기론은, 어쩌면 그래도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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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돌린 김은자의 이미지와 무등산

등 돌린 김은자의 이미지와 무등산 김서라 1. 등 돌린 김은자의 사진 이미지는 그것을 표현하는 사물이나 사건 자체보다는 사물이나 사건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쉽게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에 동일시되기가 쉽다. 이 문제에 맞닥뜨린 근대 철학자들은 판단을 유보하기도 하고 인간의 지각 방식 자체를 문제시하기도 했다. 그들의 이론과는 별개로,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의 방식으로 이미지가 그 사물, 사건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 때문이다. 이미지는 그 사물이나 사건과 마주한 시간을 보존한다. 어렸을 때 그렇게 커 보였던 뒷산이 야트막한 산에 불과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미지의 역사는 사실이나 이념이 아니라 ‘낙차’나 ‘문턱’처럼 감각되곤 한다. 적어도 발터 벤야민은 낙차나 문턱의 감각으로 이미지 속의 역사를 파악한 바 있다. 지금도 그 방법은 유효하다. 어떤 사진이 주어진다면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의도나 피사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나 분석보다, 그 사진이 어떻게 보이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진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그것이 ‘그때’나 ‘지금’을 사진보다 더 또렷하게 이미지화하기 때문이다. 1964년 4월 1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 한 장이 있다. 흰 천을 쓰고 한복을 입은 듯한 여성의 뒷모습이 타원형 프레임 속에 있다. 마치 옛 초상 사진의 프레임 속에 수수한 차림의 여성의 모습이 담겼지만, 이 여성의 뒷모습만 가지고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사진 아래에는 작은 활자로 “무명옷을 입은 「어머니」 김 여사는 사진 찍기 마다고 흰 수건 쓴 머리를 돌려댔다.”고 쓰여져 있다. 이 사진이 함께 실린 기사는 그를 ‘어머니’로 소개하면서 등 돌린 뒷모습을 포착한다. 기사의 제목으로는 ‘숨은 나이팅게일’, 부제로는 ‘삼밭실의 무등원, 죽음을 이긴 새마을의 어머니’라고 달았다. 이 사진과 관련한 기사 내용은 이 무등원과 ‘김 여사’를 다음처럼 소개한다. “광주 무등산 중턱 삼밭실 일대에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2백30명에 달하는 폐결핵환자, 앉은뱅이, 간질병환자, 정신병자 등 불구자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진 38동의 집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마을의 영도자는 연약한 한 사람의 중년부인, 의지할 곳 없는 환자들에게는 어머니이자 누나요, 구세주이기도 하다. ···(중략)··· 「가톨릭」 재단의 손으로 운영되는 제중병원은 가난한 결핵환자를 무료로 치료해왔으나 나을 수 없는 환자를 언제까지나 입원시킬 수는 없어 이들에게는 부득이 퇴원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병 때문에 패가망신이 된 환자들에게는 유리걸식밖에 할 길이 없었다. 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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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名)의 상품, 번역의 연쇄

무명(無名)의 상품, 번역의 연쇄 : 네트워크 시대의 시와 저자성 이성주 1. 저자성의 균열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 이후, 시 비평의 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개념 가운데 하나는 저자성(authorship)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시 쓰기에 인공지능을 포함한 다중 행위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저자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시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입장 역시 강하게 존재한다. 두 입장 사이에는 유보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들이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고, 그에 따라 저자-시-독자의 관계나 독창성(고유성)을 둘러싼 논의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물론 이 글에서 관련 논의를 모두 정리하거나 판별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성 비판이 오늘날 어떤 형식과 논리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최근의 평문 가운데 하나인 박상수의 「영원한 베타 테스트로서의 여름」(『문학동네』, 2025 가을호)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 비평은 2010년대 이후 한국 시에 만연해진 ‘납작함’의 감각을 핵심 문제로 진단하며, 저자성 해체 담론이 간과하기 쉬운 지점을 예리하게 짚어 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참조가 된다. 박상수가 말하는 ‘납작함’이란 최근 시에 나타나는 시적 주체의 무력함, 대상에 대한 비관여성(非關與性), 타자와의 상호작용 약화, 그리고 ‘메타적 인식의 과정’만이 부각되는 경향 등을 아울러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박상수는 최다영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시의 생산 주체를 비인간 행위자와 기술 장치까지 포함하는 연합적 모델로 긍정하는 최다영의 논리가 결과적으로는 주체의 저항과 행위 가능성 혹은 내면의 복잡한 역학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본 글의 맥락에 맞춰 간단하게 말하자면, ‘저자성 해체’를 동시대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승인할 때 타자성이나 윤리적 긴장이 소거된 ‘납작함’ 역시 쉽게 수용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최다영의 입장에 서면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우선 박상수의 글이 지닌 문제의식에 많든 적든 공감하지 않기란 어렵지 않을까. 확실히 최근 시에서 ‘타자와의 접촉면’이 얕아지고 있음은 박상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인터넷상에서 실수나 실언 하나로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쉽게 뒤집고 때로 그것을 근거 삼아 혐오를 정당화하는 오늘날의 문화적 현상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박상수가 ‘무엇’을 주장하는가에 있다기보다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의 글은 맥락이 다른 다양한 이론과 담론을 빠르게 호출하고 병치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령 한병철과 마크 피셔가 별다른 매개 없이 나란히 놓이고, 현대 신학 담론의 어휘들은 그것이 형성된 맥락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문학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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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2] 웹소설이라는 가능성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2 -웹소설이라는 가능성 류수연 1. 지금은 웹소설의 시대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 능력일까, 모국어 능력일까? 물론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요소지만 부득이 한 쪽을 골라야 한다면? 수년 전이라면 당연하게도 ‘외국어’라는 답변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성형 AI를 활용한 초벌 번역이 보편화된 오늘의 관점에서라면, 그 답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아주 결정적인 장면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바로 2022 한국문학 번역신인상에서 말이다. 웹툰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40대 일본인의 한국어 실력이 초급 수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당선자는 AI를 활용해서 초벌 번역을 진행했고, 그 뒤 자신이 일본어 표현을 가다듬었다는 것이었다. 당락을 결정한 것은 만화적 표현과 리듬에 익숙한 당선자의 표현력이었겠지만 번역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언어능력 없이 AI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란이 거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뒤로 채 2년도 되지 않아 생성형 AI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으니, 어쩌면 그 혼란은 이러한 기술 변화에 대한 예고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웹 서사의 달라진 위상을 공공연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AI 번역만큼이나 문학번역의 부문에 웹툰이 있다는 점도 큰 이슈가 되었기 때문이다. 웹 콘텐츠에 부여되었던 수많은 평가절하를 떠올린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웹-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여러 콘텐츠가 등장한 지 불과 20여 년, 그 확장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웹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시장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선발 주자인 웹툰과 후발 주자인 웹소설 모두 대중문화의 절대적 강자로 부각되었다. 거기엔 이들 콘텐츠 자체의 매력도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들 콘텐츠가 다양한 미디어믹스 과정에서 원천IP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웹 기반 서사가 트랜스미디어의 확실한 강자로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웹소설의 경우에는 선발 주자인 웹툰의 원천IP로도 활용되고 있으니, 웹 콘텐츠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난 회차에 살펴보았던 케이팝 스토리텔링 역시 이러한 웹 콘텐츠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바, 오늘날 한국 대중문화를 이끄는 콘텐츠로서 웹 기반 서사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의 한 정점으로 다가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그 중심에는 또다시 이야기가 있다. 이 글에서는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각축을 벌이는 웹 플랫폼이라는 가상공간, 그리고 그곳을 종횡무진하고 있는 웹소설의 의미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2. 취향의 타파스? 일반 문학과 함께 웹소설을 비평적 연구 대상으로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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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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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26.02.01
100년 전 멋진 신혼여행의 기억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100년 전 멋진 신혼여행의 기억 -염상섭의 『해바라기』와 나혜석의 결혼 전후 박진영 노처녀 결혼 풍경 신부 나이 스물넷이면 노처녀인 시절이었다. 서른넷의 신랑이라고 첫혼인일 리 없었다. 암만해도 결혼식을 버젓하게 치러야 했다. 둘 다 유명 인사다 보니 결혼 소식이야 진작에 왁자그르르 퍼졌고, 신문에 신랑 신부 사진까지 실렸건만 그래도 아쉬웠다. 내친김에 결혼 기사 아래 청첩장을 내기로 했다. “저희는 목사 김필수 씨의 지도를 받자와 4월 10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옵나이다. 이날에 귀댁 왕림의 광영 주심을 엎드려 빕니다. 경신년(1920) 4월 3일, 김우영 · 나혜석.” 신문에 청첩장을 광고한다고 발칙한 일은 아니다. 대체 뉘 집 아들딸인지 이름이 없는 게 문제다. 1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청첩장은 신랑 신부가 아니라 부모 이름으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무릇 결혼이란 당사자들의 일이기에 앞서 엄연히 집안 대사인 까닭이다. 요즘에야 신랑 신부가 나란히 팔짱 끼고 걸어 들어가는 일도 흔하다지만 여태 청첩장 문화는 그대로 아닌가? 이만한 기세라면 혈기 넘치는 청년들이야 박수 칠 법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못마땅하다 못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둘 다 웬만한 정도가 아니라 내로라하는 집안 자식들이었다. 그나마 넷째, 다섯째 자식이라서 불행 중 다행이지만 대체 무슨 남부끄러운 짓이란 말인가? 시아버지는 기어코 폐백을 물리치고 술잔이나 기울이러 나갔다. 하기야 목사 주례에 답사랍시고 감히 신부가 한마디 아니라 일장 연설을 떠든 예식이었으니 결혼식이고 피로연이고 애당초 안 들어선 게 차라리 나은 지경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신랑 신부는 이튿날 식전 댓바람부터 양가에 차례로 들이닥쳐서는 신혼여행 떠난답시고 들썩여 놓고는 훌쩍 기차를 탔다. 신부는 두 주일쯤 예정이라고만 무지르고는 어디로 가는지 신랑에게도 도통 알려 주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잡아끌다시피 했다. 이쯤 되고 보면 아무래도 웬만한 신혼여행이 될 리 만무했다. 신랑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의 변호사 김우영, 신부는 진명여학교 최우등 졸업생이자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의 화가 나혜석이다. 사진1. 나혜석 결혼사진 (1920) 출처: 수원시립미술관 남도 신혼여행 사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전에서 잠시 여관에 들렀다가 호남선으로 갈아탄 신혼부부는 한밤중에 목포에 도착했다. 열 시간 넘게 걸린 곤한 여정이었다. 그런데 인력거 잡아타고 곧장 여관에 들어서서는 하녀 이름부터 대는 신부가 영 수상쩍다. 초행길이 아니었던 셈이다. 신부는 3년 전 그 여관 2층에서의 하룻밤을 홀로 추억했고, 영문 모르는 신랑은 얼추 짐작이 나섰지만 섣불리 입을 열 계제가 아니었다. 아직 신혼 둘째 날 밤이었으니. 부산 유곽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하녀와의 사연인즉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신부는 3년 전 도쿄에서 다니던 학교를 빼먹고 홀로 바

기획 2026.02.01
거대한 사랑의 기록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거대한 사랑의 기록 - 김명순 창작집 『생명의 과실』 박소란 사진1. 『생명의 과실』 (한성도서주식회사, 1925) 표지 지난 2025년은 『생명의 과실』(한성도서주식회사, 1925)이 출간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생명의 과실』은 김명순(金明淳, 1896~1951 추정)이 쓴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창작집이다. 국내 서지 기록에 등록된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 문학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명의 과실』도 김명순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때문에 100주년은 터무니없이 고요했다. 별다른 의식이나 언급 없이 우리 문학장은 지난 한 해를 지나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전 김명순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난과 핍박을 떠올리게 된다. 혹여 김명순이라는 선구적 예술가를 아직까지도 과거 그늘진 그 자리에 세워 둔 것은 아닐까, 못내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조금만 검색을 해 봐도 대략의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김명순은 쉽게 소거될 수 없는 이름이다. 1917년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문예지 『청춘』의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친 한국 문단 최초의 여성 작가다. 1920, 30년대 누구보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친 김명순은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고 보들레르의 시를 번역하는 등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피아노를 잘 치고 독일어로 곡을 만들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신문기자, 영화배우로도 활동할 만큼 다재다능했다. 이처럼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첩'이라는 이유로,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자유연애’를 주창한다는 이유로 온갖 조롱을 받았다. ‘부정한 혈액’ ‘문란한 여자’ 등 모욕적인 꼬리표가 일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공부와 집필에 힘썼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힘겨움이 잇달았고, 결국 1951년경 일본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명순은 생전 시, 소설, 수필, 희곡(각본) 등을 한데 묶은 두 권의 창작집을 냈다.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회동서관, 1929 추정)이 그것이다. (세 번째 창작집을 준비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과적으로 불발되었으며, 때문에 창작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도 상당하다.) 이 중 『생명의 과실』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으로 그 의미가 각별하다. 1 『생명의 과실』에는 등단작 「의심의 소녀」를 포함해 소설 2편, 시 24편, 수필(목차에는 ‘감상(感想)’이라 표기되어 있다) 4편이 수록되었다. 소설 「돌아다볼 때」나 시 「유언」, 「저주」, 「탄실의 초몽」, 「유리관 속에

기획 2026.02.01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문장웹진 다시 읽기]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오한기 「더 웬즈데이」(2012년 5월호 수록) 현재(문학평론가) 독자일 때는 몰랐는데, 글을 직접 쓰게 되고서야 느끼는 바가 참 많다. 그중 제일 뼈저리게 다가오는 것은(그리고 이전에는 차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자기가 쓴 지난 글들을 들춰 보는 게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나는 사실 들춰 볼 용기조차 없는 타입이라서 가능하면 이 세상에서 흔적을 아예 지워 버리는 편인데, 그럼에도 어떤 글들은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만으로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그리고 이런 갑작스러운 기습을 하루에도 수십 번 당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전에는 이게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 잘 몰랐다. 습작이 몇 없어서 그랬던 것도 있고, 습작할 땐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야말로 무색무취한 글들을 썼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쓰는 글에 나만의 개성이랄 게 생기면서부터 고통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들 기저에 깔려 있는 내 흉한 자의식과 대면해야 한다는 고통 말이다. 이 지면에서 나는 《문장웹진》에 발표되었던 지난 작품 중 하나를 골라 다시 읽는다. 그래서 청탁을 받고 잠시 고민했다. 편집위원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경우에 따라 이는 작가를 공개 처형하는 기획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기획 단계에서 어떤 악의가 있으셨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운을 떼는 바람에 적어도 이 글에 한해서는 그런 기획이 되고 만 것 같다(제 책임). 이왕에 부관참시를 할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평소에 골탕 먹이고 싶었던 작가를 하나 골라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호감이 가는 쪽은 최대한 배려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과는 무관하게 나는 오한기의 「더 웬즈데이」를 다루기로 했다. 「더 웬즈데이」는 2012년 《문장웹진》에 처음 공개된 이후 그의 첫 소설집인 『의인법』에 수록되기도 한 작품이다. 오한기는 『의인법』을 출간한 뒤로 단 하루도 숙면을 취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그의 끔찍한 악몽을 다시 헤집는 걸 그도 그리 달가워할 것 같지는 않기에, 곧장 그의 얘기를 하는 대신 차라리 내 얘기로 잠깐 둘러 가 볼까 한다. 방 안에서 책만 읽던 독자일 땐 몰랐는데, 나와서 보니 또 하나 깨달은 것은 막상 문인들을 실제로 만나 보니 다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많은 문청들이 공감할 만한 얘기겠지만 나도 작가들을 처음 만나고 충격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뭐야, 글이랑 너무 다르잖아···.’ 나는 아직 많은 문인들을 만나 본 편은 아닌데, 그래서 면역이 없어서 그런가 대개의 경우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작가들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이 괴리가 반드시 모든 작가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작가는 조금 더 솔직하

기획 2026.02.01
『소심록(素心錄)』, 그 마음의 울림과 여운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소심록(素心錄)』, 그 마음의 울림과 여운 정혜경 연주홍빛 표지 배경에 민들레 씨앗이 날아다니고 있다. 표지 왼쪽에는 한자 세로쓰기로 素心錄(소심록) 柳達永(류달영) 著(저)라고 저자가 직접 쓴 글씨가 굳건하게 새겨져 있다. 성천(星泉) 류달영의 수상록 『素心錄(소심록)』(경문사, 1961)이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우선 성천의 수상록이라는 것만으로도 반가웠고, 소박하면서도 여운 있는 표지가 마음을 끌었다. 장정을 맡은 월전 장우성은 농민이 ‘생각하는 민들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성천의 뜻을 이렇게 담았다. 1961년 초판본 민들레 씨앗 하나가 이제사 마음터에 내려앉았다. 저자 성천 류달영(1911~2004)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9년 『농촌 계몽의 최용신 소전』을 저술해서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양정고보 스승이었던 김교신은 최용신을 만나 보았던 성천에게 이 책을 쓰도록 권유했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재직 중이던 성천은 제자들에게 최용신 전기를 읽히고 싶었다. 일본 경찰 검열을 의식하며 어려움 속에 완성한 최용신 전기는 초판 1천 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품절되었을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에 민족 사랑과 계몽 운동의 불씨를 심어 준 책이었다. 그 시절부터 성천의 글은 독자를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되어 6·25전쟁과 4·19혁명 후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발표했던 성천의 글이 했던 역할을 『소심록』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소심록』은 ‘평소의 마음을 기록한 책’이란 뜻으로 근래에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모아 내었다는 겸손한 제목이다. 성천은 이 글모음이 자신에게만이라도 사람다운 사람을 위하여 훗날까지 격려하는 힘을 가질 것으로 믿었다. 그 ‘격려하는 힘’은 충분히 전해져 강렬한 울림으로 왔다. 가로 12.5cm 세로 19cm의 이 아담한 책 405쪽에 51편의 글이 빼곡히 담겨 있다. 『소심록』의 글들은 1959년 3월부터 1961년 2월까지 이 년 동안 《사상계》, 《새벽》, 《사조》, 《신태양》, 《식량과 농업》, 《여원》 그 밖의 여러 잡지와 《조선일보》, 《대학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에 발표한 것이다. 이 책은 1961년 5월에 출간되었으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지 일주기가 되는 시점이었다. 마지막 장 ‘사월혁명’의 다섯 편은 혁명 때 쓰러진 꽃다운 젊음들과 같은 행진 속에서, 거친 호흡을 함께 하면서 쓴 글들이었다. 성천은 4·19혁명은 학생들의 피로 성공했으니, 그 정의로운 피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깊은 존경으로 명복을 빌었다. 성천이 사회의 지도자로서 특별했던 점은 나라의 현실에 대해 고뇌하면서 비전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현실에서의 타개책까지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성천은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중 사토

기획 2026.01.01
동그라미 그리기

동그라미 그리기 최은영 얼마 전, 김창환 님이 쓴 글을 읽었다. 책 제목이기도 한 글의 제목은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세상살이라는 게 그렇게 자로 잰 듯 떨어지지 않습니다. 좀 여유롭게 생각하세요. 제가 지금부터 동그라미를 여백이 되는대로 그려 보겠습니다. 마흔일곱 개를 그렸군요. 이 가운데 V를 표시한 두 개의 동그라미만 그럴듯합니다. 회사 생활이라는 것도 47일 근무 중에 이틀이 동그라면 동그란 것입니다. 너무 매일매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위에 그린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하겠습니까, 세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1) 매일매일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의 말에 위로받았고, 하루를 원으로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하루하루가 동그랗게 완성되며, 시간은 마냥 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순환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은 여러 개의 원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일 초, 일 분, 한 시간, 하루, 일주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일 년··· 한 해를 사는 것을 동그라미 하나 그리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나는 마흔두 개의 동그라미를 그린 셈이다. 앞으로 이 동그라미를 몇 개나 더 그릴 수 있을까. 끝의 끝이 되었을 때 새로운 시작이 돌아온다는 걸 연말이 오면 매번 깨닫는다. 만족하며 살았든 그렇지 않았든 새해는 거저 주어진다.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듯이. ‘새로운 동그라미를 그려 봐’ 하면서. 그러면 마흔셋이 된 나는 다시 손에 연필을 잡고서 새로운 페이지에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한다. 마흔두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지만 여전히 동그라미 그리기는 막막하고 어렵다. 언제부터 동그라미 그리기가 이렇게 어려워졌을까. 새 시간, 다시 주어진 기회, 새로운 삶···.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새해가 시작되면 언제나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산다는 것이 버겁다는 생각을 떨쳐 내기가 어렵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삶이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시간 중에서는 가장 덜 힘든 시기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견딜 만하다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십 대와 이십 대의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나는 마흔셋이 되었는데, 사는 일이 극적으로 쉬워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너의 삶보다는 훨씬 더 평온하다고. 마흔세 번째의 새해를 맞이하여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예전에는 회한도 많고 아쉬움도 많아서 ‘시간을 되돌린다면’이라는 가정을 자주하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지 않는다. 한때는 바보 같은 선택을 거듭한 어린 나를 용서하지 못하기도 했다. 너무 바보 같아서 미워질 정도의 어린 나를. 하지만 그게 그 아이의 최선이었다는 것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나니 더는 그런 내가 미워지지도 않았고, ‘시간을 되돌린다면’ 같은 가정을 하지 않게 됐다. 내

기획 2026.01.01
한 해의 뒷면

한 해의 뒷면 최현진 첫 눈이 내린다. 나의 글쓰기 방에 난 창문으로 흰 원들이 신호등과 선로 위에 앉는 걸 본다. 눈과 바람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외투를 되살리며 종종종 걸어간다. 눈이 쌓인 지면은 세상으로부터 떠 있는 것 같다. 사물의 형체를 지우며 공백에 가까워진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공백(空白)에서 찾아온다. 이 글은 지난겨울에서 다시 첫눈이 내리는 동안의 이야기다. 아홉 살 때 ‘단감’이라는 시를 써 본 것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내 꿈은 작가였다. 2025년은 꿈을 이루며 시작했다. 나의 첫 책이 나온 것이다. 출간 이후의 삶이 책의 질량만큼 가벼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연초 문학상 시상식을 하루 앞두고 아버지가 바터팽대부암이라는 희귀암 진단을 받으셨다. 시상식 가는 길이 앞으로 펼쳐질 투병과 간병의 길처럼 더디고 어려웠다. 이른 봄, 나는 희미한 감각으로 수상과 첫 책의 기쁨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최종 교정지를 만지는 날에 아버지가 누워 있는 고층 병동에서 쏟아지는 폭설을 보다가 그만 커피를 쏟고 말았다. 얼룩이 책에 인쇄되어 나올 것도 아닌데 참을 새 없이 눈물이 푹신 떨어졌다. 나는 서운했다. 내 삶에. 작가는 어떻게 가족구성원 내에서 돌봄이라는 균형을 지키며 자신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는가. 휠체어를 끌다가 메모를 하고 병실에 불이 꺼지면 노트북을 켜 타닥타닥 불씨를 지피기도 하지만 일순간에 불과하다. ‘작업을 이어 나가고 싶다’는 마음과 ‘중지해야 한다’는 갈등은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병원에 도착했지만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서성거린다거나, 환자에게 무뚝뚝하게 군다 거나. 간병 일수를 줄여 보자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러기에 내 직업은 출퇴근이 따로 없는 작가이고 또한 애매한 태도가 걸림돌이었다. 수상과 첫 책의 행운이 함께 왔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쉽사리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나를 축하해 줄 때였다. 병원 앞에 뜬 부드러운 점선의 구름을 보며 사진을 찍어 두는 것이 기쁨의 전부였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문학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작가가 무엇인지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탓인지 모른다. 나는 빠져나갈 출구를 찾고 있었다. 첫 강연은 부산이었다. 책을 내고 공식적으로 들어온 첫 번째 일이었다. 식구들에게 떳떳하게 통보하고 짐을 쌌다. 얼마나 걸리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하루가 걸린다고 했다. 강연은 두 시간이었지만 부산까지 가는 데 오고 가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런데 왜 짐을 싸냐고 물어보셔서 간 김에 글을 쓰고 오겠다고 말했다. 여기서도 글을 쓸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시는 게 아버지 입장에서는 당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글을 쓸 수 없었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내가 초청받은 곳은 시외에 위치한 고등학교였다. 따뜻한 땅에서 올라온 연둣빛 들판을 거쳐 봄 멸치를 잡던 배가 묶여 있는 작은 항구와 벽돌로 쌓은 젓갈 공장을 지나서 달려간 곳에 아늑한

기획 2026.01.01
소망, 반성, 시작

소망, 반성, 시작 김상규 1. 소망 여러분은 언제부터 새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분은 1월 1일을 새해로 생각하실 것이며, 또 어떤 분은 설 명절을 생각하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또 어떤 분은 해가 다시 길어지는 동지를 새해의 시점으로 잡으실 수도 있겠군요. 저는 새해의 시작을 정월대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과학적으로 분명하거나 이론적으로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어릴 적 할머니와의 기억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할머니는 늘 정월대보름이 되면 가족 수에 맞게 하얀 종이를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지(燒紙)라고 불렀습니다. 준비된 소지를 앞이 두껍고 기다란 직사각형으로 접고 나면 우리 집 정월대보름 준비는 끝마친 것입니다. 저녁이 되면 할머니는 나를 부르시곤 그 소지에 가족의 나이와 이름을 적게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소학교도 나오지 않으셨기에 글을 더듬더듬 읽을 줄 아나 쓸 줄은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불러 이 일을 시키신 것이지요. 잘 정리된 소지와 초 하나를 들고 할머니는 마당 구석으로 향했습니다. 불을 태우는 방향을 해마다 바뀌었는데 아마 동네 용한 무당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그리했다고 짐작할 뿐입니다. 남쪽이 흉하면 남쪽으로 소지를 태우고 북쪽이 흉하면 북쪽으로 소지를 태우는 것입니다. 준비가 다 되면 할머니는 이름이 적힌 소지를 순서대로 가슴에 품고 무언가를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그 소원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서서히 몰락해 가는 집안에서 할머니가 할 수 있는 기도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기도가 다 끝나면 가슴에 품었던 소지를 촛불에 태워 하늘로 올려 보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더 멀리 소지의 불꽃이 퍼지기를 바라며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했습니다. 제주 중간산 마을의 거친 겨울바람을 타고 훨훨 오르는 종잇장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할머니 제 소지는 제가 가슴에 품고 불을 붙일게요.” 할머니는 흔쾌히 제 말을 따르셨습니다. 그것은 제가 우리 집안 종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잔병치레가 많아 유난히 병약했던 나에게 할머니는 무엇이든 다 주고 싶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날 버리고 떠난 엄마가 빨리 돌아오길 바란다는 소원을 빌었을까요? 교도소에 들어간 아버지와 삼촌이 빨리 돌아오길 바란다는 소원을 빌었을까요? 그게 아니면 빨리 어른이 되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가슴에 품었던 하얀 종이를 촛불에 붙여 하늘로 올려보냈던 기억과, 제 소원이 담긴 소지의 불꽃이 더 멀리 퍼지기를 바라며 손바닥을 휘저었던 기억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2. 반성 소지를 태우며 빌었던 소망은 이루어졌을까요? 불행하게도 그 기도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집안은 철저하게 몰락했으며 저 역시 혈족의 굴레 속에 벗어나지 못했으니까요.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기획 2026.01.01
시작을 위한 커튼콜

시작을 위한 커튼콜 송희지 ❋ 2025년은 내게 변화와 도전의 해였다. 짧지 않은 학부 생활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두 번째 시집을 펴내면서 지난 이삼 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작업물과 사유들을 털어 냈다. 문화센터 등에서 시 창작 수업을 하며 학생들을 만났고, 창작촌에 입주하며 잠깐의 서울살이를 해 보기도 했다. 또 그 변화와 도전의 한 축에는 극(劇)이 있었다. 새해 첫날, 신문을 통해 첫 희곡 「탐조기」를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 직전까지도 연극에 대한 지식이라곤 소나기 오는 날 도로변에 생기는 웅덩이만큼이나 얕았던 내겐 그 일이 어떤 사건처럼, 무척 고되고 생경한 모험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희곡이 무엇인지, 연극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한 해 동안 고군분투했었다. 많은 희곡을 읽었고 많은 연극을 보았다. 한 명의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손꼽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수의 좋은 작품들을 만났다. 특히 와즈디 무아와드의 작품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음이 틀림없다(나는 『화염』을 각기 다른 극단의 낭독 공연과 무대 공연으로 한 번씩 봤고, 희곡을 여러 번 반복해 읽었다). 또 한 차례의 무대 공연과 한 번의 낭독 공연에 작가로 참여하면서, 연극이라는 무대예술이 가진 힘과 가치를 몸소 익혔다. 시나 소설은 작가의 머리에서 태어나, 그의 손으로 옮겨지고, 그의 품 안에서 완결된다. 희곡은 그와 다르다. 희곡의 완성은 실연(實演)을 위한 하나의 단계이며, 그것은 연출과 배우, 드라마터그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조력을 바탕으로 비로소 몸과 숨을 얻는다. 두 번의 공연 연습에 참여하면서, 나는 배우들의 호흡과 몸짓이 어떤 위력을 가지는지, 연출의 창의적인 시선이 어떻게 무대를 빛나게 하는지, 드라마터그의 예리한 질문이 어떻게 희곡의 골간을 드러내도록 이끌어주는지를 보고 배웠다. 공연으로 다시 만난 나의 희곡은 내가 생각지 못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 나를 작가가 아닌 한 명의 관객으로서 감동하고 환호하게끔 만드는, 기분 좋은 낯섦의 생기였다. 처음 신년 에세이 청탁을 받고, ‘반성, 시작, 소망’이라는 주제를 접하고 나서 자연히 지난 2025년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지나간 일상에 관해 떠올리기보다는, 내 ‘씀’이 한 해 동안 어떻게 몸을 바꾸어 왔는지를 주로 되짚은 듯하다. 이를테면 이전까지는 거의 시만 쓰고 발표해 왔던 내가, 희곡이라는 장르를 접하고 익히게 되면서 겪은 생각·언어·감각의 변화에 대해서, 또 그것이 내 시의 지형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에 대해서. ‘반성, 시작, 소망’이라는 키워드 아래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초점도 분명 그곳을 향해 있을 것이다. 이 에세이는 지난 1년간 내 변화한 내 ‘씀’에 관한 내밀한 살핌, 일종의 고백에 다름 아닐 것이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기억 하나를 먼저 꺼내 본다. 지난가을 나는 연희동의 단란하고 아름다운 창작촌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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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서포터즈]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 중국 천진(天津, Tiānjīn) 책기행 문장서포터즈 2기 박소희 세계 어느 곳을 가든 서점이 있다. 서점이 없다면 책 한 권이라도, 책 한 권도 없다면 문장 한 줄이라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어디를 가든 서점이 있다면 꼭 가보는 사람에 속한다. 비록 그곳이 해외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현재 중국 천진에 위치한 남개대학교(南开大学) 어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서다. 지난 몇 년간 배워왔음에도 곳곳의 한자들은 낯설었다.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낯선 생활 방식까지. 나를 지칭하는 수많은 이름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곳에는 이방인, 외국인이라는 이름만 남아있었다. 천천히 생활에 적응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서점이었다. 이곳에도 책방이나 서점이 있을 텐데 어디에 있을까? 어떤 모습일까? 나는 지도를 켜서 서점들을 하나씩 찾았다. 그렇게 소소하게 시작된 이틀간의 천진 책기행을 적어본다. 사진1. 무명서점 무인도 서점과 무명서점 책기행의 시작은 늘 가는 학교 근처부터다. 학교의 서남문으로 가면 작은 책방이 두 곳 있다. 하나는 무인도 서점이며 하나는 무명서점이다. 중국의 몇몇 장소들은 건물 내부에 있어 이곳이 맞나 헷갈리기도 하다. 처음 간 무명서점도 그랬다. 또 두 서점 모두 벨을 누르거나 노크를 해야 들어갈 수 있는 방식이라 처음에는 운영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러니 중국의 작은 책방을 방문할 때면 의심하지 말고 문을 두드리면 된다. 분명 안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들어간 서점 내부는 아늑하고, 따뜻해서 마치 가정집에 초대된 손님이 된 것 같았다. 고양이들이 있었고, 곳곳에 책이 있었다. 책방지기는 “여긴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으며 이곳에는 오래된 책들만 있다”고 말했다. 역사‧법‧소설 등 여러 종류의 책이 있었으나 주로 경영 도서가 있었고, 중국 문학이나 한국 문학은 비교적 적었다. 비치된 도서 중 비교적 문학의 비율은 적다는 말에 조금 더 구경을 하고 서점을 나섰다. 책을 읽고 싶을 때나 공부를 하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사진2. 무인도 서점 그리고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무인도 서점으로 향했다. 이곳도 벨을 누르니 책방지기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어쩐지 조금 더 환영받는 느낌도 들었다. 이곳은 무명서점과 달리 카페를 함께 운영하는 곳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저런 소품들이 있었고, 무명서점보다 문학, 과학 등 각 분야와 관련한 책이 여러 권 있었다. 한일문학 코너에서는 한강 작가와 김애란 작가 등의 작품과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가 있었다. 다만 한국 문학은 일본 문학에 비해 비교적 수가 적었다. 내가 아쉬움을 표하자 책방지기는 원한다면 직접 서점에서 책을 주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김애란 작가가 유명하며,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란 작품을 추천해 주었다. 한편 무인도 서점은 대출카드를 만들어 책을 빌릴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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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길이 무한히 확장되는 순간 - [문학주간 2025] 도움―닿기

[문장서포터즈] 가능성의 길이 무한히 확장되는 순간 - [문학주간 2025] 도움―닿기 문장서포터즈 2기 김이성 1 안녕하세요. 어느덧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네요. 개인적으로는 문장서포터즈 2기 ‘쓰담’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문학 콘텐츠를 여러분들께 소개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요. 문학을 매개로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 무척 보람찬 시간이었죠. 아마 이 글을 보고 계실 때쯤이면 새해가 밝아있을 텐데요. 저는 이번 원고를 구상하면서 파일 제목을 ‘세밑에서 새해로’라고 붙여놓았대요. 마지막 원고를 작성하며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과연 새해에는 또 어떤 시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새해에도 역시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쓰담’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것처럼 무엇보다 가능성을 믿는 한 해가 된다면 좋겠네요. 최근에 읽은 소설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오더라고요. “엄마, 나 소설 안 쓸래. 일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래.”1) (엄마는 이렇게 답하죠. “쓸 거면서 또 저런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앞의 문장을 반복해서 읊조렸어요. 일하고 사랑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말하는 인물의 태도가 미래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어쩌면 때로는 이렇게 작고 사소한 다짐이 우리를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길로 나아가게 만드는 건 아닐까요? 저도 이제 새해라는 가능성을 향해 첫발을 내디뎌보려 하는데요. 그전에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공유하고 싶은 순간이 있어요. 새 출발을 앞두고 있던 제가 문학의 도움을 받아 용기를 얻었던 순간이죠. 새해로 도약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 중인 분들에게 세밑에서 전하는 저의 후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때 그 순간을 전해보아요. 2 지난 2025년 가을, 일상을 지속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는 문학주간 행사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관련 소식을 찾아보았어요. 몸도 마음도 지쳐 물리적으로 문학과 멀어져 있던 시기였기에 문학의 힘을 빌려 조각난 일상을 수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문학주간과 관련된 글을 찾아 읽고, 저는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어요. : 기획의도 우리가 만약 어떤 트랙을 달리고 있다면 그리 머지않은 곳에 구름판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견고하고 상상할 수 있지만 막상 상상한 대로는 닿지 않는,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은 몹시 중요합니다. 높이 뛰어오르려면 적당한 타이밍을 생각하고 안정적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죠. 문학은 쉬이 상상할 수 없는 구름판을 감각하게 해줍니다. 내가 아닌 삶과 삶으로 이루어졌기에 분명 나인 세계 같은 것들이요. 문학은 자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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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문학, 배우는 문학, 자라나는 문학

[문장서포터즈] 가르치는 문학, 배우는 문학, 자라나는 문학 (인터뷰이: 조인혜, 고등학교 국어교사) 문장서포터즈 2기 김성호 문학은 단순히 독자와 작가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독자와 작가가 되기 위한 그 과정, 여로를 봐야 한다. 그 여로엔 다양한 존재가 있지만, 나는 그중 학교 현장에서의 교사와 학생 간의 공간에 주목했다. 2025년 10월 23일, 합정역의 한 카페에서 조인혜 선생님을 만났다. 9년 전 모교의 국어 교사였던 조인혜 선생님은 인터뷰 내내 진지하고 활기차게, 자신의 독서론과 더불어 서포터즈 질문에 답해 주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조인혜입니다. 배우는 경험을 좋아합니다. (사진1. 조인혜 선생님의 오브제인 뉴욕도서관 에코백) Q. 평소에 문학을 즐겨 접하시나요? 특히 즐기시는 장르나 분야가 있다면요? - 음, 소설을 제일 많이 읽어요. 제일 좋아하는 장르이고요. 책 대화 모임을 4년째 하고 있기도 합니다. 잡지 독서평설과 출판사 사계절 콘텐츠에서 청소년 소설을 읽고 소개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문학을 접하고 읽고 소개하고 가르친다는 건, 일적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에요. 물론 시도 좋아해요(웃음). 쉽지 않지만 시창작 모임을 동료 교사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시 창작 활동을 같이 하기 전에 먼저 저 스스로 배우고 체득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소소하게 문집도 내고요. 시가 어렵지만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희곡은 상대적으로 적게 읽는 편이에요. 최근에는 SF 소설을 많이 읽었고요. 딱히 가리는 건 없고, 그때마다 빠지는 장르나 분야가 있어요. 무엇보다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 아무래도 좋은 작품을 더 좋아합니다. Q. 최근에 그런 작품이 있었는지요? - 박지리 작가의 작품입니다. 다만 어두워서 아이들에게 쉽게 풀어서 얘기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최진영, 김애란 작가의 작품도 좋았어요. Q. 국어교사로서 문학작품을 접할 때와 개인 독자로서 접할 때의 다른 점이 있나요? - 정체성을 나누고 있진 않습니다. 불쑥불쑥 나와요. 그런 게 혼재되어 있죠. Q.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어떻게 문학적인 활동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작품을 다 읽고 대화하게 하려고 합니다. 어떤 활동을 하든 반드시 하도록 했던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책 대화’와 ‘글쓰기’입니다. 같은 소설을 원하는 아이들끼리 묶은 다음, 질문하고 대화하는 활동을 해요. 그 이후 개인 서평을 쓰게 하고요. 사회적 독서인데(정의가 모호하긴 하지만 같이 공유하면서 읽기가 필요합니다. 먼저 선생님들과 경험해보니 그렇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게 참 중요하다고 여러 번 느껴요. 그런 활동을 하고 나면, 혼자 개인적으로 읽었을 때와 사회적 독서 활동 후의 감상의 결과 차이가 커요. 일단 혼자 읽을 때 몰랐던 점들을 알게 돼서 좋은 점이 있고, 내가 잘 몰랐던 같은 반 아이가 저런 생각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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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소리가 울리는 교실

[문장서포터즈] 푸른 소리가 울리는 교실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방문기 문장서포터즈 2기 카페라떼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하루에도 수십 편씩 올라오는 청소년 작품, 백일장에 참여하는 열정적인 친구들, 그중에는 문학을 진로로 삼고 싶은 학생들도 있죠. 그렇다면 이 친구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배우며 성장하고 있을까요? 이번 취재에서는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이하 안양예고 문창과)를 직접 찾아가 그 현장을 들여다봤습니다. 국내 예술고등학교 중 문예창작과가 있는 학교는 단 두 곳뿐이에요. 고양예술고등학교와 안양예술고등학교죠. 안양예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고이고, 연극영화과·음악과·미술과·무용과·문예창작과 총 다섯 학과가 있어요. 학교가 자리한 언덕은 ‘한라산보다 가파르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사진1,2. 안양예술고등학교 본건물과 문예창작학과 실기실 문예창작과는 한 학년당 40명으로 구성돼 있어요(총 3반). 재작년부터 지원자 수가 늘기 시작해 올해 경쟁률이 2.98 대 1로 점점 문학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이 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최근 몇 년 사이, 안양예고 문창과 학생들이 다양한 청소년 문학상에서 이름을 올리며 학교의 문학적 저력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어요. 그 덕분에 문예창작과에 관심을 두는 학생들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사진3. 올해 안양예고 학생들의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 문예창작학과라는 특성 덕분에 글쓰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곳이죠. 시 창작 실기, 소설 창작, 문학 이론 등 전공 수업 외에도 문학 감상이나 독서 토론 수업을 통해 사고력을 넓혀 갑니다. 작가 선생님 특강과 합평 수업이 활발히 이어지는, ‘문학의 공기’가 가득한 교실이에요. 예고의 장점인 학과 전시회, 안양예고 문창과는 ‘눈시울전’이라는 학생들의 작품 전시회를 매년 5월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로 2학년생들이 참여하며 가끔 3학년 학생들도 조금씩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로 안양아트센터 갤러리 미담에서 전체 전시 후, 서울 교보문고에서 지원하는 학생들 중 일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요. 이런 공간에서 매일같이 글을 쓰는 학생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요? 그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습니다. 사진4,5. 안양예고 눈시울전 작품 사진(이현교, 최아원 학생 작품) 2학년 학생들의 이야기, 교실에서 들려오는 연필 소리 2학년 이현교(시 전공), 최아원(소설 전공) 학생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Q: 문창과에 진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요? 처음 마음을 먹게 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현교: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행사로 시를 써서 우수 작품으로 선정 받은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경험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같습니다. 최아원: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 왔는데요, 초등학교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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