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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비너스

  • 작성일 2023-08-18
  • 조회수 480

허리케인 비너스

이선강

 

   “오빠~! 진짜 잘생겼어요.”

   윤선이가 학원 버스에서 몸을 반쯤 내밀며 바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주는 휘파람을 불렀다. 환한 슈퍼 앞을 지나가던 남학생이 돌아봤다. 남학생은 버스 안에서 손을 흔드는 윤선이를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거기 학생! 얼굴 집어넣어.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3호차 기사 아저씨가 짜증스레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야단을 맞은 것도 아닌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윤선이는 전혀 아랑곳 않고 큰 소리로 계속 떠들었다. 

   “야, 방금 봤어? 저 오빠 나 보고 윙크했어!”

   윤선이 말에 진주가 까르르 웃었다.

   “웃기지 마. 웩! 하는 표정이던데? 민경이 너도 봤지?”

   화살이 갑자기 나한테로 날아왔다. 좀 무섭고 싫은 애들이긴 하지만 찍히긴 싫었다.

   “글쎄, 난 어두워서 잘 못 봤는데? 내 자리에선 잘 보이지도 않아.”

   “아, 뭐야.”

   윤선이랑 진주는 투덜거리더니 다른 주제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번엔 남자 아이돌 이야기다. 자리라도 멀찍이 앉았으면 좋았겠지만 바로 한 칸 앞 옆자리라 안 듣고 싶어도 못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야기 중 띄엄띄엄 넘어오는 화살도 피할 수가 없었다.

   시험 기간이라 어제도 잠을 거의 못 잤다. 학원 끝나고 버스 안에서라도 좀 자려고 했는데 윤선이랑 진주는 절대 그 꼴을 못 본다. 자는 척을 해도 기어코 수다 화살을 쏘아 댔다.

   “민경이 넌 어떤 멤버가 제일 좋아? 진주 눈은 구려서 말이야, 대화가 안 통해.”

   “죽을래? 재수 없어!”

   진주가 협박하는 말투와 달리 낄낄거리며 과자를 우적우적 씹어 댔다.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가수라 제일 먼저 생각나는 멤버 이름을 댔다. 

   “야, 걔가 뭐가 좋냐? 춤도 제일 못 춰, 헤어스타일도 이상하잖아. 넌 진주보다 더 구리다.”

   “그런가?”

   은근슬쩍 발을 빼려고 하자 진주가 득달같이 내 뒷덜미를 잡아챈다. 

   “민경이 넌 가수들 중에 누구 좋아하는데?”

   오늘도 조용히 집에 가기는 글렀다. 그냥 속편하게 좋아하는 아이돌 이름을 적당히 댔다. 윤선이랑 진주는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 이름이 나올 때면 앞 좌석을 소리 나게 두드리며 좋아했다. 3호차 안에는 마지막 남은 우리 셋뿐이라 그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둘은 나랑 같은 대단지 아파트 단지에 산다. 그중에서도 학원에서 우리 집이 제일 멀다. 둘은 아파트 동까지 같아서 나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린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야! 너희들 안 내려?”

   학원 버스가 섰는데도 윤선이랑 진주가 계속 떠들고 있자 3호차 아저씨가 또 짜증을 냈다. 

   “아, 왜 승질이야.”

   둘은 짜증을 내며 가방 지퍼도 닫지 않고 그대로 일어났다. 윤선이랑 진주 교복 치마에서 과자 봉지와 함께 과자 부스러기들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늘 그랬다. 어떤 날은 떨어진 빈 봉지를 내가 주워서 내리기도 했지만 오늘은 피곤해서 관두기로 했다. 

   어깨에 멘 무거운 가방이 온몸을 욱신욱신 내리눌렀다. 나는 3호차가 서기를 기다리며 제일 앞에 서 있었다. 갑자기 운전기사 아저씨가 혼잣말을 툭 내뱉었다.

   “요즘 계집애들은 입도 더럽고, 하는 짓도 얼마나 더러운지. 이 짓을 그만두든지 해야지, 내 참!”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린가?’

   분명 윤선이랑 진주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차가 멈췄다. 기사 아저씨가 내 쪽을 돌아봤다.

   “넌 처음엔 얌전해 보이더니 이제 걔들이랑 같이 노냐? 너도 망종 되기 전에 안 어울리는 게 좋을 거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발바닥에 감각이 하나도 없었다. 뭐라고 대꾸도 못 했는데 3호차가 매연을 뿜으며 커브를 돌아 사라졌다. 나는 어두컴컴한 아파트 앞에 내팽개치듯 잠깐 서 있었다. 망종! 정확은 뜻은 모르겠지만 뭔가 기분 나쁘고 억울한 단어였다. 핸드폰으로 망종의 뜻을 검색했다. 여러 개의 뜻 중에서 하나가 눈에 박혔다.

   ‘아주 몹쓸 종자!’

   공동 현관 입구를 올려다보는데 화가 치밀었다. 걔들이랑 똑같이 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둘이 작정을 했는지 꼭 내 건너편 옆자리에 붙어 앉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어?’

   공동 현관 첫 계단에 발을 디딜 때는 비명이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스르륵 스르륵,

   뭔가가 발목을 휘감는 것 같았다. 화들짝 놀라 발을 빼려는데 발아래가 어둑어둑했다. 그건 공동현관 옆 화단의 커다란 금목서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가 속삭이듯 흔들렸다.

   ‘네 잘못이 아냐, 걔들이랑 그 아저씨가 나쁜 거야’

   그 소리를 누가 듣기라도 하는 듯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쩐지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토요일이라 늦잠을 자고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을 때였다. 며칠째 먹은 김치찌개가 또 올라와 나도 모르게 시큰둥하게 말했다.

   “또 김치찌개야?”

   엄마가 냄비를 거칠게 식탁에 내려놓았다. 

   “주는 대로 그냥 먹어.”

   시험 채점을 하느라 늦게 잔 까닭에 멍했다. 그래서 엄마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고 나는 살짝 툴툴거렸다. 

   “아, 진짜 지겨워.”

   엄마가 벼락같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너, 말 그따위로 할래?”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엄마 입에서 ‘그따위로 할래?’라는 말이 나오면 짧게 끝나는 법이 없었다. 

   “뭐? 지겨워? 하루에 세 번 꼬박꼬박 밥 준비하고 치우는 사람도 있는데 어디서 그따위 말이 나와!”

   “그게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한 것이 오히려 엄마 화를 돋웠다.

   “지금 변명하는 거야? 변명이 나와? 그래, 그 대단한 변명 한번 들어나 보자. 뭐, 뭐!”

   엄마가 이렇게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 머릿속이 깨질듯 복잡해서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이럴 때는 고개도 들 수 없을 정도로 목도 뻣뻣해졌다. 부릅뜨고 치켜뜬 눈을 마주 보는 게 무서웠다. 너무 무섭고 억울해서 눈물부터 났다. 

   “고개 똑바로 들어. 울어?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엄마 목소리가 더 커졌다. 가슴이 오그라들 정도로 무서웠다. 그런 내 가슴께를 거칠게 밀며 엄마가 더 크게 소리쳤다.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 먹기 싫으면 먹지 마!”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꼬았던 다리를 급하게 풀다 식탁에 무릎이 사정없이 부딪쳤다. 억지로 참으려고 했는데 울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대답 안 하려고 한 게 아니라…. 흑, 엄마가, 흑, 변명하면 또 변명한다고 뭐라 할까 봐, 흑, 흑…. 죄송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죄송합니다, 한마디만 했으면 됐을 거 아냐.”

   엄마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나를 살짝 안아 주었다. 서러운    맘이 더 북받쳤다. 엄마가 등을 토닥여 줄 때는 더 울어라, 더 울어라! 하고 주문을 외는 것처럼 더 서러워졌다. 그런 마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엄마는 다시 냉정해졌다.

   “무릎은 괜찮아? 일단 세수부터 하고 와.”

   괜찮다고는 했지만 화장실까지 가는 데도 무릎이 욱신욱신 아팠다. 빨갛게 충혈 된 눈이랑 코를 보니까 가라앉아 가던 서러움이 다시 울컥 밀려왔다.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그런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스르륵 스르륵,

   일부러 큰 소리로 코를 풀고 차가운 물로 몇 번이나 세수를 다시 하고 식탁에 앉았다. 먹기 싫은 김치찌개를 억지로 맛있는 척 연달아 떠먹는데 엄마가 또 그 이야기를 꺼냈다.

   “너, 어디 가선 절대 짜증스럽게 말하지 마. 진짜 버르장머리 없어 보이니까. 특히 말조심, 행동 조심하고. 윤선이랑 진주하고는 절대 어울리지 말고. 저번에 엄마가 얘기 했지?”

   결국 며칠 전 버스 일이 학원 원장 귀에 들어갔다. 문제의 남학생이 집에 가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며 말한 게 발단이었다. 

   버스에 붙은 학원 이름까지 전해 들은 남학생 엄마가 학원에 항의 전화를 했다. 중학교 여학생들이 어떻게 자기보다 나이 많은 고등학교, 그것도 남학생을 희롱할 수 있냐며, 애들 교육 똑바로 시키라며 화를 냈다는 거다. 3호차 기사 아저씨에게 사실 확인을 한 원장은 문제의 학생들을 불렀다. 그런데 나까지 딸려 들어갔다. 억울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원장의 표정은 변명으로 듣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빴다. 같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잔소리를 듣고 강의실로 돌아갔다. 윤선이와 진주는     그 길로 가방을 챙기더니 집으로 가 버렸다. 

   그 일이 엄마 귀에 들어간 뒤, 조그마한 꼬투리만 잡혀도 사정없이 내게 짜증을 퍼부었다. 이제 슬슬 지치고 나도 화가 나기 직전이었다. 

   “네가 밖에서 잘못하면 그게 다 엄마 아빠가 가정 교육 잘못시켰다고 욕먹는 일이라는 거 잊지 말고.”

   마지막 말이 내 안에 불을 붙였다. 짧게 이야기해도 다 알아듣고, 이야기 안 해도 다 아는 말들이 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 말을 처음 해 주는 것처럼 길고 지루하게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안아 줄 거면 화를 내지 말든가, 화내서 미안하면 마음이 다 가라앉을 때까지 끝까지 안아 주든가!’

   어른들도 무책임했다. 만날 우리들한텐 말 함부로 하지 말고 행동 똑바로 하라면서 어른들은 더 제멋대로였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엄마 얼굴이 보기 싫어졌다.

   ‘엄마나 그따위로 늘 짜증스럽게 말하지 마’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스르륵 스르륵,

   그때 다시 뭔가가 종아리를 휘감는 느낌이 들었다. 의자에 부딪쳤던 무릎이 화끈화끈 아팠다. 수저를 놓고 양손으로 무릎을 감싸는데 누군가 숙덕이는 것 같았다.

   ‘자기도 늘 짜증스럽게 말하면서 너한테만 그러지 말라는 건 웃기지. 풋! 확실히 네 엄마가 가정 교육은 잘못시켰네.’  

   엄마가 들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엄마 눈을 마주치기는 게 두려웠다.


   “전교 등수 궁금한 사람은 종례 끝나고 따로 와서 물어봐라. 이상!”

   담임이 교실을 나서기도 전에 몇몇 얘들이 담임한테로 우르르 달려갔다. 대부분 성적이 좋은 얘들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바로 답안지가 공개된다. 그럼 가채점을 해서 바로 학원 담임한테 문자로 점수를 보낸다.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엄마한테도 답지 바로 안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이번 주 금요일이면 성적표가 나올 거다. 시험을 잘 봤으면 몇 등이나 올랐는지 빨리 알고 싶었을 거다. 이미 망친 시험 등수는 아예 영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루라도 더 폭풍을 피하고 싶었다. 그럴수록 내 안에서 이는 소용돌이 때문에 숨을 쉬기가 더 힘들어졌다. 

   “구민경! 너 청소 아니잖아. 책상 밀게 빨리 비켜 줘.”

   누군가 소리쳤다. 느릿느릿 가방을 정리하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미안. 지금 나간다.”

   가방 지퍼를 다 닫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사물함에 넣어 두었던 실내화 주머니를 꺼내 와 교실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는데 누군가 실내화 주머니로 내 허리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야,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아, 재수 없어!”

   진주였다. 그 옆으로 윤선이가 웃으며 지나갔다. 원장실 사건 이후로 둘은 아예 작정을 한 듯 나한테 시비를 걸었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손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자기들이 잘못한 걸 나한테 왜 화풀이야!’

   붙잡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한번 화를 내면 도저히 멈출 수 없을까 봐 억지로 참고 또 참았다. 

   ‘저런 밥맛없는 인간들이 어디 한둘이야? 얼굴만 다른 윤선이와 진주들이 이 학교 안에, 길거리에 가득하잖아. 저런 것들이랑 상종을 말아야 해!’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뭔가가 내 허리를 휘감으며 솟구쳤다. 짜릿한 통증 같기도 하고 묘한 설렘 같기도 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군가인지 나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놀라고 불안했지만 이제 제법 익숙한 느낌이었다. 또 누군가 말했다.

   ‘넌 참을 만큼 참았어. 저런 것들한테 따끔하게 한마디 해 줘야 해!’

   ‘그 말이 맞아.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계속 당해야 해?’ 

   실내화를 갈아 신기 무섭게  윤선이와 진주를 뒤따라 뛰었다. 집에 가는 길도 똑같은데 멀리 가 봐야 슈퍼다. 꼭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니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도 되지 않았다.

   614동 놀이터 앞에서 둘을 발견했다. 

   “김윤선, 최진주!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아, 뭐야! 짜증나.”

   둘은 나를 보자마자 그네에 앉으며 신경질을 냈다. 난 그냥 밀어붙이기로 했다.

   “내가 너네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왜 나한테 계속 그래?”

   윤선이가 그네에서 일어나며 바닥에 팽개쳐 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야, 진주! 그냥 가자. 날파리 꼬여서 기분 잡쳤다.”

   진주도 교복 치마를 탁탁 털며 가방을 둘러멨다. 나를 투명 인간처럼 굴기로 했는지 둘은 웃으며 내 옆을 살짝 비켜 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윤선이가 뒤돌아 왔다. 내 앞에 바짝 다가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리 엄마가 하도 너랑 친하게 지내라고 해서 그럴까 했는데 완전 맘 접었다. 이번 시험 떡쳤다며? 수고했다. 그러고 말이야. 너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말이야, 넌 네가 우리랑 엄청 다르다고 생각하지? 아니거든! 너도 우리랑 똑같거덩!”

   이번 시험 한 번 망쳤다고 자기들이랑 똑같이 취급하다니. 모욕적이었다. 그런데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멍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네가 다르다는 걸 보여 줘.’

   목소리만 내 목구멍에 가득 차오를 뿐이었다.    


   학원 담임인 수호가 내 성적표를 보면서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적어도 수학만큼은 백 점을 맞아야지. 구십사 점이 뭐냐. 넌 수학 선행만 몇 번짼데.” 

   수학 담당 이름이 경호라 줄여서 모두들 수호라 부른다. 수호는 지금 전교 등수가 32등이나 밀린 건 문제도 아니란 얼굴이었다. 학원 주력이 수학이기도 했지만 학원 몰래 수호한테 주말 과외까지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호는 벌써 엄마한테 뭐라고 변명하나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번엔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반에서 제일 잘한 애가 구십칠 점인데.”

   나도 유일하게 믿는 과목이 수학이라 정말 속상했다. 그런데 수호는 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듯했다.

   “핑계 대지 말고. 전교에서 백 점 둘이 나왔잖아. 그런데 우리 반에선 너까지 이 모양이니…. 강의실 가 있어.”

   ‘수업은 잘하지도 못 하면서 엄마들한테 아부나 떠는 주제에 자기 실력이 대단한 줄 아나.’

   306호 강의실로 돌아가는데 분한 마음이 들었다. 난 분명 수호한테 과외 받기 싫다고 엄마한테 말했는데 수호 꼬드김에 넘어갔다. 수학은 지금 확실히 잡아 주는 게 중요하다고, 주말에 개별 클리닉 받으면 훨씬 좋아질 거라고 말이다. 엄마한테 나만 따로 학원에 부를 수도 없다며 안타깝다고 했단다. 능력도 없는 돼지 주제에!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강의실 내 자리에 앉으려는데 바닥에 성적표가 떨어져 있었다. 주워 들면서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야, 보지 말라고! 저리 꺼지라고!”

   하필 윤선이 거였다. 스르륵, 스르륵! 아니, 마침 잘 만났다.

   “그럼 안 보이데 잘 두든가. 그냥 눈에 보이는 걸 어쩌라고!”

   내 반격에 윤선이가 눈을 부라리며 벌컥 일어섰다. 책상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뭐? 그럼 눈알만 빼놓고 저리 꺼지든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안에서 불안과 억울하고 화났던 감정들이 소용돌이로 휘몰아쳤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를 꽁꽁 싸매고 있던 올가미가 벗겨졌다. 내 안에서 누군가 눈을 떴다. 그리고 네가 태어났다.

   너는 깨어나자마자 윤선이를 무섭게 노려봤다. 그리고 네 손바닥이 사나운 해일처럼 윤선이 뺨을 후려쳤다.  

   “구민경! 너 뭐 하는 짓이야?”

   강의실로 들어오던 수호가 소리쳤다. 아이들도 비명을 질렀다. 넌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었다. 윤선이는 네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싸고 어쩔 줄 모를 뿐이었다. 너는 침착하게 윤선이를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진짜? 내가 눈알 빼고 한번 붙어 볼까?”

   나하곤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도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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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태몽 찾으러 왔어요

태몽 찾으러 왔어요 변선아 1. 태몽 때문이야 “4교시는 체육이니까, 수업 종 울리면 축구 골대 앞에 모여 있어요.” “네.” 3학년 1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성운이는 힐끔 선생님을 봤지요. 성운이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이 활짝 웃었어요. 교실에 남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야호!’ 그제야 성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어요. 마음은 쌩하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갔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죠. 성운이는 소아 천식을 앓고 있어요. 절대로 뛰면 안 돼요. 엄마는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해서 성운이가 뛰지 않도록 부탁해요. 운동장에서 하는 수업이 있을 때는 성운이 혼자 교실에 남아 책을 읽게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몸을 크게 움직이는 활동이 있는 수업에는 미리 선생님이 말했어요. “성운이는 교실에 남아 있을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좋아.” 이뿐인가요? 급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도 먹지 못해요. 천식에 좋지 않으니까요. 의사 선생님은 가끔씩 한두 번 먹는 건 괜찮다고 하지만, 엄마는 ‘절대 금지’라고 했어요. 어쨌든 지금, 선생님이 그냥 웃기만 했잖아요? 체육 수업에 참여해도 좋다는 말일 거예요. 그동안 교실에 혼자 남아서 책을 읽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오늘은 친구들하고 같이 운동할 거예요. 조심히 달리면 괜찮겠죠? 성운이에게 소원이 있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맘껏 뛰어보는 거예요. 쉬는 시간에 잡기 놀이도 하고 축구도 하고 싶어요.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축구 골대 앞에 모였어요. 물론 성운이도 당당하게 서 있었죠. 곧 선생님이 와서 말했어요. “오늘은 축구를 할 거예요. 성운이는 벤치에 앉아 있을까?” “네? 저도 축구 할 건데요?” 성운이가 실망하며 말했어요. “안 돼. 성운이는 뛰면 안 되니까 친구들 수업하는 걸 지켜보자.” “휴.” 그럼 그렇지요. 성운이는 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벤치로 갔어요. “살살이 공성운, 넌 앉아서 공 차는 거나 구경해.” 민찬이가 성운이 뒤에 대고 소리치고는 혀를 쑥 내밀었어요. 성운이는 민찬이가 얄미웠지요. 민찬이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어요. ‘살살이’란 별명도 민찬이가 지어준 거예요. 천식 때문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는 걸 놀리는 거죠. 민찬이와 아이들이 공을 굴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녀요. 그 모습을 보는 성운이 마음은 소금에 절인 배추 같아요. ‘나도 뛰고 싶다.’ 생각할수록 속상했어요. 왜 자기만 천식이 있어서 뛰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죠. 지루했던 체육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에요.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면서 밥을 많이 먹었어요. 벤치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성운이는

  • 관리자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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