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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주는 법을 몰라 상처를 준 사람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4-01-22
  • 조회수 438

오늘도 시작이다. 전화가 계속해서 울리기 시작한다. 그 전화 울림의 정체는 나의 할머니다. "아, 지겨워." 엄마의 한탄 소리와 한숨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다.엄마가 이리 한숨을 쉬는 것은 난 이해한다. 하루에 적으며 10통 많으면 20통 이상 전화오는데 한숨이 쉬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을까? 이런 집착은 내가 어렸을 때와 아빠가 어렸을 때 그리고 아빠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계속 이어졌다. 할머니는 아빠를 학교, 집,교회만 다니게 했다. 다른 곳에 아빠가 가는 날이면 그땐 아빠가 죽는 날이었다. 엉덩이도 맞고 팔도 맞고 그랬디고 한다. 특히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늦잠을 자면 그 날은 밥도 없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뜻의 무작정 복종했다. 한번도 아빠를 도와주거나 할머니를 막아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는 학교에서 왕따가 되었다. 또래들과 어울리지 않고 돌아다니니 캥거루, 헬리콥터 족이라 그렇게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머니는 계속 아빠를 할머니의 품에만 두었다고 한다. 물론 나도 할머니와 함께 살 때 많은 억압을 받아왔다. "개집애는 차고로 조신해야 한다.  그러니 차를 좋아하고 피아노도 배우고 공부도 잘하는 숙녀가 되어야 한다."  할머니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막아주기는 했지만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내 아들 빼앗아 간 년이 어디서 주둥이를 나불거려!" 라고 말하기 일수였다. 그럴 때마다 아빠와 할머니는 크게 싸웠다. 이게 반복이 되자 아빠는 나와 엄마만 대리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빠는 이사를 가서도 엄마와 나에게 계속 "미안해." 라고 말을 했다.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의 집착 때문에 힘들었다고 했다. 함부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어울렸다면 매일 엉덩이와 손목, 종아리를 맞아야 했으니 친구를 사귀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고 했다. 또한 본인은 교회가 가기 너무 싫었는데 계속 교회를 주일학교 시작 10분 전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때문에 매번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할머니에게 받은 것은 생명과 교회 오빠 그리고 아기 캥거루 라는 별명 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는 딸인 내게는 이런 별명과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아했다. 그래서 더욱더 할머니와 싸웠다고 했다. 싸워서 이겨야만 나와 엄마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왕례는 최소화로 하겠다며 선언 했다. 나와 엄마는 듣던 소식 중 제일 반가웠다. 하지만 이 즐거움은 잠시 뿐이었다.  매일 전화 오는 할머니의 전화에 엄마와 나는 미쳐갔고 그런 모습을 보는 아빠는 매일 밤 퇴근하고 오면 싸우기 바빴다.


 그러던 오늘 할머니의 전화를 계속 씹었는데 30통 이상 오는 것을 보고 화가난 엄마가 따지려고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그 때 전화기 넘어로 할머니의 부들 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살며시 들려왔다. "미연아 내 남편 죽었어 우리 기정이가."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할어버지가 자는 중 심장마비로 어제 저녁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바로 아빠에게 전화했고 나를 대리고 충청도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갔다. 가는 길은 고요하고 어둡고 침침했다. 엄마와 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어둡지만 나와 엄마의 마음은 어둡지 않고 무덤덤했다.


 할머니는 장례식장에서 얼굴이 많이 어두웠다. 그렇게 드세고 집착이 강했던 사람이 한 순간에 어둡고 쳐져있다니 당황스러웠다. 엄마와 나는 할머니에게 고요하게 다가갔다. "어머니 괜찮아요?" 형식상의 질문이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고개를 두번 끄덕였다. 나는 형식상의 울음을 할머니 앞에서 흘렸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떻게요." 그러자 할머니는 함께 울었다. 장례식장이 온통 할머니의 진심어린 울음과 나의 형식적인 울음으로 가득찼다.  엄마는 이런 우리 둘을 달래면서 오는 사람들마다 인사하기 바빴다. 물론 아빠도 소식 듣자마자 와서 도왔다. 하지만 아빤 울지 않았다. 다만 약간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할머니는 외로운지 우리에게 "옛날처럼 같이 살자."라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할머니가 불상해 보이기는 했지만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는 엄마와 아빠도 생각이 비슷한 것 같았다. "함께 살면 안될 것 같아. 우리 딸을 당신처럼 만들 수 없어." 엄마는 강인하고 솔직하게 의견을 말했다. "그래도 이제는 다 늙고 힘이 없는데 우리를 더 괴롭힐까?" 아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둘이 싸우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러자 "주변에 친구분들 없어?" 라고 아빠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이 동공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래고 계속 같이 못 산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아빠는 내게 물었다. "우리 딸 할머니랑 같이 사는 것 어때?"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분명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된다고도 배웠고 못된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다. 할머니는 지금 어렵고 불쌍한 사람인데 나와 아빠, 엄마를 공격한 사람이기도 하니 너무 어려웠다.  나는 생각에 잠기고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달려나갔다. "딸!" 엄마, 아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지만 너무 커서 내게는 부담스러웠다.


 뛰고 또 뛰고 또 또 뛰었다.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 자전거의 경적 소리, 슈퍼마켓 앞 지나치게 큰 음악 소리까지 내 귀를 걸리작거리게 했다. 계속 뛰고 있는데 어린이 공원 앞에서 어떤 낡고 쨍한 곰팡이가 핀 목소리가 내게 들려왔다. "민서야."바로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나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도망가려고 할 때 할머니가 내 몸을 잡았다. "이거 놓으세요." 할머니는 나에게 "민서야 할매가 커피 사줄게. 그러니까 이야기 하자."난 할 수 없이 할머니를 따라 이스트림 커피숍으로 갔다.커피숍에서 할머니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는 어린시절 할머니는 증조 할아버지랑만 살았다고 한다. 할머니가 8살 때 증조 할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져 머나먼 삼다도에 내려가 살았다고 한다. 증조 할아버지는 매일 매일 일용직에 매달리며 살아왔다. 그래서 할머니는 뒷전이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열이 막 나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을 때 증조 할아버지는 무시하고 일만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사랑하는 법을 몰라 나와 아빠에게 상처를 줬다고 했다. 단지 나와 아빠가 할머니처럼 상처 받지 않고 살기를 바라고 사랑만 받기를 기도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집착했다고 한다. 나는 솔직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할머니의 말이 거짓말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일 경우 할머니를 완벽히 용서 할 수 없지만 약간은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들었다. 본인이 가난했고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사랑하는 법을 몰랐고 받지 못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이렇게 나타났다고 생각이든다. 내 마음은 여러 생각이 가득했다. 머리는 아팠다. 머리가 핑핑 돌고 카폐에서 나온 레몬 셔벗 딸기 라때가  여러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에 있는 할머니가 흐릿하게 보이며 내 눈은 살며시 어두워져 어둠 뿐이었다.


 눈에 약간의 흰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끄러운 기계음과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옆에 할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날 걱정하는 목소리로 나를 바라봤다. 할머니는 날 안고 울었다. 엄마와 아빠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뜻 모를 약간의 미소를 보였다. 나도 내 자의가 아닌 타의로 나도 모를 눈물이 흘렸다. 할머니는 레몬 셔벗 딸기 라때 같은 사람인 것 같다. 레몬 셔벗처럼 시큼한 성격을 가졌지만 진짜 마음은 딸기 라때처럼 달큰하고 담백한 사람인 것 같다.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상처를 줬지만 사실 날 사랑한다는 것을 꺠닫고 내 맘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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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끼

"천사는 언제나 긍정의 에너지를 하고 있어서 좋아" 9살짜리 내 동생이 입에서 꺼내는 말이다. 긍정이라 참 좋은 말이다. 근데 나는 요즘 왜 긍정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까? 나의 천사는 어딘가에 가출해서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인가? 나는 동생의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부럽다. 요즘의 나는 볼 수 없는 순수함이 그립다. 내가 지금 왜 이런 말을 머리속에서 말하고 있을까. 독립할 준비가 바쁘고 한창인데 말이다. 계속 물건을 싸고 버릴 물건을 버리고 있는데 이런 잡생각이 드니 아직 나는 사춘기의 감성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사춘기 감성과 함께 짐을 싸고 있는데 9살 동생이 내게 달려와서 물었다."이 원숭이 인형은 뭐야?"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네가 가져"동생에게 말했다. 동생은 신나서 원숭이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아주 크고 아주 헌 그런 원숭이 인형을. 계속 짐을 치우고 치었다. 10년동안 산 집에는 그 세월만큼의 많은 흔적들이 있었다. 오래전에 가지고 논 장난감, 기억에 잊혀진 숨겨둔 구몬 학습지 그리고 내 흑역사 저장고인 사춘기 일기장 기타등등이 이 집에 있는 화석처럼 잠들어 있었다. 나는 하나,둘 버리고 구몬은 찢고 찢어 숨겨서 버렸는데 일기장은 한번 궁금하여 열어봤다. 그 일기장은 열면 않되는 하나의 판도라의 상자였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었다. 엄마와 선생님한테 혼난 이야기, 삼촌 결혼식 간 일, 할머니가 우릴 공격했던 일 그래서 내가 매일 밤 시달린 악몽 그리고 내 옆에서 항상 날 따뜻하게 안아준 원숭이 인형 끼끼가 그 안에 있었다. 나는 순간 아까 희철이가 가지고 간 인형이 떠올랐다. 그리고 난 잠시 마음 속 한 구절들이 울림을 줬다. 할머니는 엄마와 나를 괴롭혔다. "딸 낳은 년은 죄인이다." 옛날에 유행했던 가치관에서 할머니는 벗어나지 않고 있다. 엄마는 이런 할머니에게 매번 하녀처럼 살고 있는데 나는 이런 엄마를 볼 때마다 화가난다. 그러나 할머니가 드는 효자손 앞에 나는 그저 작아지고 약해질 뿐이었다. 내 인생에서 할머니란 존재 때문에 안에 천사는 자라지 못했다. 기쁨이라는 감정은 언제나 내 안 구석에 있었고 나에게는 불안과 슬픔이 가득 차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숨어서 우는 버릇이 생겼다. 방에 들어가 인형을 가지고 울거나 화장실에 들어가 눈물을 훔친적이 있다. 그런 나를 위로해 준 것은 엄마도 아빠도 친구도 아닌 끼끼였다. 끼끼는 커다란 팔을 가지고 있고 이로써 나를 크게 안아줄 수 있었다. 끼끼의 팔로 눈물을 닦고 마음에 부스러기를 치우면 내 감정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었다. 끼끼 덕분에 나는 불안했던 초등학교시절을 버틸 수 있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날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할머니 장례식에 들어갔는데 울고 있는 다른 가족들과 다르게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역으로 슬픔이란 감정보다 기쁨이란 감정이 맨 앞으로 나왔다. 나는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천사는 좋고 순한 존재지만 타락의 긍정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 깨달았다. 그

  • 송희찬
  • 2024-06-29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콘텐츠 입니다. 괴물

엄마가 오늘도 코를 훌쩍인다. 요즘들어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와 내가 보이지 않을 때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할 때가 있다. 오늘도 그런 케이스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는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코를 훌쩍거리는 것을 멈추고 나를 봤다. "엄마 비염 다시 생겼나보다."엄마에게 말하니 엄마는 "그런가봐"라 말하고 나를 피해 부엌으로 갔다. 나는 무심하게 할머니한테 공격을 당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은 붉어지고 나를 외면한 것도 아마 내 몸에 할머니,할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일종의 괴물이라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가슴 속이 찝찝하고 답답하다. 우리 할머니,할아버지는 여느 가족의 할머니,할아버지처럼 평범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나를 아껴주고 엄마와 아빠를 사랑한 좋은 부모, 좋은 시부모, 좋은 조부모였다. 나는 이런 할머니,할아버지에게 호감이 계속 가서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에게 할머니,할아버지와 함께 살자 꼬셨다. 그 당시 엄마도 동생을 임신했을 때였고 아빠 사업도 확장이 되고 있는 시기여서 우리 가족은 빠르게 이사 준비하고 빠르게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가서는 매일이 꽃날 같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길은 나와 엄마,아빠, 할머니,할아버지를 괴물로 만들었다. 할머니는 가면을 쓰고 생활하는 사람이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근사한 노인이었다. 행복한 가정,돈 많은 남편과 돈 많은 아들을 둔 완벽한 여인으로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모습은 사라진 사람이었다. 할머닌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이다. 할아버지도 아빠도 엄마도 모두 본인 손에서 놀아나야 속이 편한 사람이다. 나는 이사 1주일이 지나고 할머니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할머니가 내게 "이거 입어."라고 옷을 주셨다.그러나 이 옷은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의 옷이어서 할머니에게 약간의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나 할머닌 "싫음 입지마."라 하시며 옷을 쓰래기통에 버렸다. 나는 당황하여 "할머니!"소리쳤지만 할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옷을 버렸다. 이를 본 엄마가 할머니에게 "반품해 올까요?"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버럭 화를 내면서 "아직도 거지근성 못 버려가지고 그러니 집안이 그 꼴이지"라며 말을 했다.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 할머니에게 나는 갑자기 화가나서 소리쳤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거에요. 엄마에게 사과하세요!"라고 소리쳤다. 이를 들은 엄마는 "그만하고 참아. 할머니에게 무슨 말 버릇이야."라고 날 말렸지만 할머닌 나에게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라며 큰 소리를 쳤다. 할머니는 그리고 손에 방망이를 드시고 내 다리를 때렸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이 상황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분해서 소리치며 울었다. 그러자 할아버지와 아빠가 다가왔다. 아빠는 이런 할머니를 보고 "그만해요."라 말하고 문을 크게 닫고 집을 나갔다. 할아버지는 이 상화이 재미라도 있는지 막 웃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박수무당이 굿하는 것 같았다. 신이 들어온 것일까? 악귀에 빙의된 것일까? 할아버지는 마냥

  • 송희찬
  • 2024-06-28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콘텐츠 입니다. 감정을 넣는 기계 간호사

오늘도 우리 병원에는 손님이 많다. 요즘 사람들의 마음이 많이 차갑고 힘들다는데 아마 코로나 19가 사람들 마음에 자리를 잡은듯 했다. 요즘 들어오는 환자들을 보면 단순 우울증도 있지만 딜루전과 가성치메의 비율도 크게 증가했다. "다들 정신이 약해서야."나는 정신과에서 일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그들에게 자리 잡지 못했다. 같이 일하는 연두쌤이 엑팅아웃이 온 환자를 말리고 휴개실에 잠시 들어왔다.. "수쌤 요즘 환자들을 보면 너무 마음 아파 미치겠어요."라고 말을 한다. "잡소리는 일 끝나고 하자 연두쌤아" 나는 잡소리 하는 연두쌤을 뒤로 하고 섹션에 들어가 사무 업무를 처리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 연두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나는 그저 한숨을 쉬며 혼잣말로 "환자를 감정으로 보면 안되는데:::그렇다고 감정 없이 다루는 것도 않되고 참:::"라며 말을했다. 이를 들었는지 보호사님이 내게 다가와 커피를 권했다. 그러나 나는 할 일이 너무 많아 그의 선의를 거절했다. 일이 끝나고 퇴근 할라고 옷을 갈아 입고 준비할 때 연두쌤이 휴개실에 들어왔다. 나는 아침에 있었던 연두쌤 의 말이 신경쓰여서 그녀에게 작게 말을 했다. "연두쌤아 환자 너무 감정적으로 생각하지마 , 너만 피곤해져. 나이팅게일도 따뜻한 마음이 있어 위인이 됬지만 그녀의 좋은 판단력이 동력이 되어 사람을 살릴 수 있었던거야." 연두쌤은 이런 내가 당황스러운지 땀을 삐죽 흘리며 연두 쌤은 "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라고 말을 하며 나를 빨리 보내기 바빴다. 역시 선배의 말을 귀담아 듣기는 어린 것 같다.하지만 연차가 쌓이면 내가 말한 말을 알게 되겠지. 집에 들어오면 아들놈이 우리 집에 와 공부하고 있다. "민찬아, 엄마 왔어, 밥 먹자." 그러자 민찬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약간의 흐느낌이 느껴졌다. 나는 이를 보고 사춘기에 접어든 우리 아들이 감정 기복이 심해서 저렇게 우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무시했다. "수민찬 너가 좋아하는 피자 사 왔어." 라고 말을했다. 그러나 아들의 흐느낌은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이런 민찬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중3이나 먹어놓고 아직도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니 참 이기주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할 수 없이 피자 2조각을 접시에 담아서 2층 방 문 앞에 살며시 뒀다. 고르곤졸라를 먹으니 치즈가 늘어남에 따라 내 빈 자리가 늘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젤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데."혼잣말을 내뱉고 나는 방에 잠을 자러 갔다. 오늘도 환자와 보호자는 계속 밀려왔다. 내가 전담으로 맞고 있는 민지 씨는 딜루전을 가지고 있는 환자시다. 민지 씨는 나를 본인의 아들을 괴롭힌 천하의 못되고 싸이코 같은 년이라 생각하는 눈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를 보면 계속 손을 빌고 "우리 아들에게 제발 사과 해 주면 않되요? 아이가 집에서 나오지 않아요." 나는 그 말들을 듣고 흘렸다. 흘리지 않으면 내 정신력이 넘어갈 것 같기 때문이다. 뭐 내가 엄마였어도 저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인데 라는 생각이 계속든다. 아이가

  • 송희찬
  • 2024-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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