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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묵시록 시대의 소설 쓰기
계간평 小說
묵시록시대의소설쓰기
양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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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없었다 해도 이 시대가 묵시록의 시대라는 것은 충분히 알려졌을 것이다. 국가기관의 민간인 사찰과 같은 거시적인 지표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최루액과 물대포, 대로에서의 불심검문, 청년들의 해외 수출, 국기게양식의 부활, 새마을운동의 재도입에 이르기까지, 사라진 것들의 부활을 목도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묵시록의 첫 번째 특징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 단 생명으로의 부활이 아니라 죽은 상태 그대로의 부활. 삶의 좀비화. 그 최종판은 친일 역사교과서 편찬일 것이다. 죽은 자들이, 이미 죽어서 오래전에 파묻힌 자들이, 자신들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역사의 주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은 오직 해골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역사는 망자들의 역사다.
세월호는 그러한 묵시록의 시간을 실시간으로 중계한 다큐멘터리였다. 살아 있는 희망이 무더기로 수장될 동안 해골들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명령했고 구조하려는 모든 움직임을 봉쇄했다. 단 하나, 배가 가라앉는 장면만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그것은 묵시록적인 비극이었다. 묵시록의 두 번째 특징은 그것이 종말을 현시한다는 점이다. 아직 완료되지 않은 종말을 앞당겨 표현하기 때문에(재현의 대상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재현이 아니다. 파국은 묵시록의 전망 속에서만 그것이 파국임이 입증된다. 따라서 묵시록을 다루는 모든 서사는 임박한 파국을 현실화하는 현 동화의 서사다.
그러나 묵시록은 파국을 묘사함으로써 파국의 파국이 된다. 또한 그로써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묵시록이 들여온 시간은 파국의 시간이지만(여기서 묵시록의 파국은‘현실적인 것’이 된다.), 그로써 실제적인 파국이 도래하는 것을 지연시킨다. 두 개의 파국이 하나로 겹치면서 두 번째 파국에 새로운 시간의 가능성, 즉 전망을 마련하는 것이다(여기서 실제의 파국은‘잠재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묵시록의 세 번째 특징이다. 종말을 앞당겨 재현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들여온다는 것. 폐허가 에덴이라는 것. 많은 묵시록 계열의 작품이 종말이 아니라 종말‘이후’를 그리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에게 종말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묵시록은 절망을 이야기하지만 그 절망은 예기의 형식으로 다가온 희망이다. 이렇게 본다면 묵시록의 시간은 직선적인 시간(즉 생성에서 종말까지 불가역적인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인 시간(즉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리부팅의 시간)이다.
우리 시대는 두말할 여지 없는 퇴락의 시대다. 생산성과 성장률은 급격히 감소하고, 정규직은 소수화되고 있다. 장수가 젊음을 대체하고 있고, 실용이라는 이름 아래 삶을 성찰하게 해주는 학문이 말살되고 있다. 적의에 기반한 통치 수단인 지역감정이, 기회주의의 매카시즘이, 소수자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공정경쟁’(?)이 만연하고 있다. 그런데 퇴락은 끊임없이 영(zero)으로 수렴되는 지속의 방법론이다. 기아를 못이겨 제 몸을 먹는 신화의 인물처럼. 퇴락은 무한히 작아지면서도 종결되지 않는다. 제 몸을 먹는 입은 끝내 입만 남을 것이다. 이때의 입이란 탐식이 끝나지 않을 것을 명시하는 알레고리다. 영으로 수렴되지만 영이 되지는 않기에, 퇴락은 반전을 모른다. 묵시록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파국이란 시간을 단절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묵시록의 시간이 소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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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에도 여러 층위가 있다. 첫째 한 개인의 파국이 있고, 둘째로 공동체의 파국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세계의 파국이 있다. 이를 각각 개인의 종말, 시대의 종말, 세계의 종말이라고 부르자. 한 개인의 파국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면 개인의 종말은 시대의 종말이 된다. 한 사회의 파국이 삶 전체의 절멸을 예표한다면 시대의 종말은 세계의 종말이기도 하다. 각 종말은 서로 겹치는 여러 크기의 물결과도 같다. 개인의 종말은 작은 파문을 만들 뿐이지만, 세계의 종말은 모든 것을 쓸어가는 대홍수를 불러일으킨다. 박형서의 「시간의 입장에서」 ( , 2015년 봄호)가 제기하고 있는 문『한국문학』제는 세계의 종말과 개인의 종말이‘우연성’이라는 계기를 두고 서로 결합한다는 사실이다. 두 종말이 우연히 겹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파국이‘우연’의 형식으로써만 당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파국의 평행이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존스홉킨스 대학 진화생물학 연구팀에서 발표한 논문 한 편이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끌었다. 요약하자면 닭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뭐?
뭐라고?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닭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에 300억 마리 넘게 살고 있는 동물이어서,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하더라도 멸종할 확률이 인간보다 다섯 배는 낮다.
하지만 연구팀의 지적에 의하면 그건 닭이 아니라‘닭고기 맛이 나는 유전공학적 농산물(Genetically engineered farm products flavored with chicken)’ 에 불과하다. 지난 백 년 동안 급격한 종 개량과 유전자 조작을 거치며 그들의 직계조상인 적색야계와 모든 면에서 완전히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 짝짓기를 해봤자 수정이 되지 않거나 수정체 내에서 심각한 결함이 발생하는 아종 수준의 분화는 가축화(Domesticated)가 시작된 약 4천 년 전의 일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성행위 자체가 불가능한 기계적 벽(Mechanism barrier)처럼 수정 전 격리 장벽(Prezygotic barrier)까지 구축되어 분화의 가장 마지막 단계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판 다른 생물로 보아야 할 만큼 격리가 진행된 것인데, 야계와 오늘날 닭의 생물학적 격리 수준은 곰과 미꾸라지 정도로 추정되었다. 곰과 미꾸라지가 만나 가정을 이룬다고 생각해보라. 퍽이나 단란하겠다.(pp.26-27)
가짜 권위를 발생시키는 의사-인용문들과 과장과 유머는 (박형서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묵시록의 전략이기도 하다. 품종 개량의 결과로 종 분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정은 틀림없는 과학적 사실이고, 이 사실을 가정법의 형식으로 단언함으로써 종(種)의 멸망이라는 묵시록적 비전을 얻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법은 극단화된 예측을 통해 얻어낸 미래완료 시제를 취한다. 전 세계에서 바글거리는 닭이 실은 유전적 더미(dummy)에 지나지 않는다는 선언은 가까운 미래에 확인될 멸종의 예고편이기 때문이다. 닭고기와‘닭고기 맛’고기의 차이란 진짜와 가짜의 차이, 혹은 “곰과 미꾸라지의 차이”다. 둘 사이에 화해나 교배는 불가능하고 ("곰과 미꾸라지가 만나 가정을 이룬다고 생각해보라"), 그 결과는 파국적이다(“퍽이나 단란하겠다”). 이 비대칭은 무한과 무, 다시 말해“300억 마리”와 0마리(멸종) 사이의 비대칭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응하는 것이 개인의 불행이다. 어느 날 생물다양성 보호기구(IPBES)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적색야계의 알 하나가 배달되어 왔다. 직원 성범수가 이 임무를 맡은 것은“귀싸대기를 한 대 맞았기 때문”이다.
곤하게 자던 중이었다. 머리에 가해진 충격이 어찌나 심했던지 매트리스 스프링의 탄성에 의해 몸이 똑바로 일으켜질 정도였다. 자고있던 방향과 타격이 가해진 위치, 그리고 오른손바닥을 열심히 주무르는 모습 등으로 미루어보아 아내가 제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왼손으로 매트리스를 짚은 뒤 오른손으로 사력을 다해 내리찍은 모양이었다.
아내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대략 남편을 비하하고 결혼생활을 후회하는 것 같았는데, 여러 맥락을 종합해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건 진짜‘으르렁’이었다. (……)
짐은 모두 싸둔 상태였다. 있는지도 몰랐던 커다란 이민가방이 현관 앞에 다섯 개나 줄지어 있었다. 집에 가겠다고 했다. 이혼서류는 우편으로 보낸다나 어쩐다나. (……)
같이 살았던 지난 팔 년에 걸쳐 끝없이 리허설을 해둔 게 아닐까?
세 시간 남았으니 이제는 출발할 시간이네, 남편의 귀싸대기를 내리 찍어 깨워야겠어, 뭐 그런 건가? 제발 이유만이라도 알려달라고 사정했다.
“때가 된 거지.”
아내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때가 되었다고?”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pp.25-26)
성범수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대신 귀싸대기를 맞고는 이혼을 통보받았다. 나름대로 잘 꾸려온 결혼처럼 보였으나 파국은 하루 아침에 다가왔다. 이것이 묵시록임을 알리는 두 가지 증거가 있다. 하나는 성범수가 아내의 으르렁거림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 파국에 부가된 설명이란 그저 우연을 필연으로 가리는 위장술에 불과하다. 묵시록을 겪는 자에게 종말이란 예고되지 않은 재난이다. 성범수는 이해할 수 없는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생각을 다 짜낸다. 지난 팔 년은 이 파국을 위한“리허설”기간이 아닐까? 이 파국은 오래전부터 예비되어온 필연적 귀결이 아닐까? 파국을 맞은 이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횡액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헛된 가설이다. 다른 하나는“때가 되었다”는 아내의 선언. 묵시록의 순간은 도둑처럼 임한다. 때문에 거기에 어떤 대비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선언될 뿐이다. 때가 되었다(The time comes)는 선언은, 일종의 도끼질과도 같다. 이전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둘로 가르는 시간의 도끼질이다. 그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선언이다.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성범수는 뭘 아는지도 모르면서“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은 척을 했다”. 이미 그 시간이 도래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두 개의 파국이 만난다. 지구상의 모든 도계장에서“적색야계의 유전자”가 사라졌다. 살아 있는 닭을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야생 닭의 유정란 하나가 도착한 것이다. 달걀을 보낸 이는‘응우 예’란 이름을 가진 한 ‘뜨라’(선생)였다. 그는 범수를 카렌 족이 사는 산속 마을로 데려간다. 거기에는 온갖 새들과 사람들이 경계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잘 알려진 새만이 아니라“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희한한 새들”도 있었다. 동시에“겨드랑이에 날개가 난 아이”나“부리가 튀어나온 청년”처럼 새와 인간의 경계에 놓인 이들도 있었다.( p.38) 이것이 파국이 제공하는 비현실의 이미지, 즉 유토피아(Utopia)다. 지상의 어디에도 없는 곳, 모든 경계가 지워진 곳. 어디에도 없기에 이곳에는 없는 존재가 다 있다. 지구상에서 멸종한 적색야계에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모든 새들과 새-인간까지. 따라서 이곳을 찾는 모든 여정은 낙원 상실의 서사를 따른다. 성범수는 이곳을 찾아가는 동안 큰 부상을 당해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고(유토피아에 들어서면 현실로 다시 귀환하지 못한다), 하나 남은 야생 닭을 먹고서야 기운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유토피아의 모든 증거를 버려야 한다). 그는“그제야 아내와 완전히 헤어졌음을 깨달았다. 닭이 방금 전에 멸종했다는 것도, 그리고 뜨라가 동굴을 떠났다는 것도”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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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복경」( , 2015년 봄호)이 가시화하는 것은 『한국문학』한 개인에게 밀어닥친 파국이지만, 그 파국을 만들어낸 비가시적인 힘은 시대의 파국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두 개의 신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 개의 표면(표정)이 있다.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나’는“웃는 사람”이다. “너는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매일 웃는 사람 .”(p.65) ‘나’가 웃는 사람이 된 것은 백화점의 침구 판매원이기 때문이다. ‘나’는 좋건 나쁘건 웃음으로 고객을 응대해야 했고, 그래서 늘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어야 했다. 마침내 웃음은 ‘나’에게서 분리되어, ‘나’와 무관한 표면이 되었다.
나는 사과했습니다. 웃으면서요.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항상 웃고는 했으니까. (……) 아니면 뭘 할까요? 어떻게 할까? 울까? 그냥 울어? 곤란하고 불편하니까 울어? 웃는 수밖에 없잖아. 웃으면서, 죄송하다고 할 수밖에. 그러니까 죄송하다고, 웃으면서 죄송하다고 말하자 그들은 지금 웃냐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웃어? 왜 웃어? 너 왜 웃어 웃기냐? 우습냐 우리가? 우스워 이 상황이? 웃겨? 아니요, 아니요, 라고 대답하면서도 나는 웃고 있었습니다. 웃는 것을 내가 멈출 수 없었습니다. 진정으로 당혹스럽게도 내가 웃는 것을 내가 멈출 수 없었습니다. 웃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웃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서도 계속, 이상한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웃는 얼굴이었습니다.(pp.78-79)
육 개월 전에 구입한 이불을 환불하겠다고 온 얌체 고객들이 있었다. 사용한 티가 역력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 이불을 포장하던 주인공이 손을 놓쳐 이불이 그중 한 여자의 정강이를 치자 시비가 붙었다. ‘나’의 사과는 웃음 때문에 전달되지 않았다. 웃음은 통상적으로 기쁨, 환대, 친절, 다정함 같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기호다. ‘웃음’이란 기호는 저와 같은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이렇게 본다면 웃음은 내면의 현시라 할 수 있다. 이때 감정과 표정은 일치한다. 만일 웃음이 내면의 기쁨, 환대, 친절, 다정함을 외부에서 반복하는 것이라면, 웃음은 감정을 재현한다. 이때 표정은 감정과 등가적인 반복이다. 그런데‘나’의 웃음은 현시도 재현도 아니다. 웃음이 내 내면의 상태와는 완벽하게 무관한, “이상한 가면”과도 같은 게 되었기 때문이다. 웃음은‘나’에게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표면이 되었다. 즉‘나’와는 무관한 별개의 신체가 되었다.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감정노동의 실체를 예리하게 묘파하고 있는 대목이다. 웃는‘나’란‘나’자신의 표면을 은닉한‘나’다. 본래의‘나’를 완벽하게 덮어버렸기 때문에 본래의‘나’는 분실되고 만다. “내 얼굴, 웃는 그것, 흡착된 것처럼, 이 웃는 얼굴에서 달아날 수가 없었습니다.”(p.79) 따라서‘나’에게서 분리된 두 번째 표면, 두 번째 신체는 본래‘나’ ,‘나’자신의 파국을 예고한다.
이따금 매니저는 립스틱을 새로 바르고 백화점 근처 지하상가로 내려갑니다. 거기로 내려가서 그녀가 무엇을 하느냐면…… 구매합니다. 저렴한 스커트와 블라우스와 양말 같은 것을 손에 잡히는 대로 계산대에 쌓아두고 그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갈굽니다. 최고,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있게 웃을 줄아는 그녀가 조금의 미소도 없이 매장 직원을 세워두고 질문이나 트집으로 몰아붙이고 까다롭게 굴면서, 그들이 애먹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처럼 해요, 그게 어떤지 언니도 알면서. 그러자 그녀는 내게 반문했습니다. 도게자라고 알아 자기? 도게자〔土下座〕. 이렇게, 인간이 인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자세를 도게자라고 해. 사람들은 이걸 사과하는 자세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과하는 자세가 아니야. 본래 사과하는 자세가 아니다. 이게 뭐냐 하면 자기야, 그 자체야. 이 자세가 보여주는 그 자체. 우리 매장에서 난리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야. 사과가 필요하다면 죄송합니다, 고객님, 으로 충분하잖아? 괜찮잖아 고개를 숙이는 정도로. 그런데 그렇게 해도 만족하지 않지. 더 난리지. 실은 이거니까. 이게 필요하니까. 필요하고 바라는 것은 이 자세 자체. 어디나 그래 자기야. 모두 이것을 바란다.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 압도적인 우위로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경험. 모두가 이것을 바라니까 이것은 필요해 모두에게.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게 필요해. 그게 왜 나빠?(pp.74-75)
이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에게서도 두 개의 신체는 나타난다. ‘나’가 일하는 곳의 매니저는 얼굴도 차림새도 매너도 세련된 이 분야의 판매왕이다. 그녀는 그야말로 완벽한 판매원이어서, 그녀와 그녀 얼굴 사이에 어떤 간격도 없는 듯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런 웃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때로 진상을 떠는 고객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고객이 왕이라는 표어는 점원들이 내면화할 수 있는 것이지 고객 자신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판매왕에게 고객은 시쳇말로‘호갱’이었다. “고객이 매장으로 들어서서 매니저의 질문에 한 번이라도 대답을 하게 되면 그걸로 끝입니다. 아들이 덮을 싱글사이즈 담요를 보러 들른 고객이 결국엔 더블사이즈 담요에 자기가 덮을 이불과 거위털로 속을 채운 베개까지 들고 가는 등의 패턴인데 만족도가 높고 반품으로 되돌아올 확률도 낮습니다. (……) 이런 경우엔 흔하게 구매는 재구매로 이어지고 방문은 재방문으로 이어져……”.(p.74) 이렇게 본다면 고객들도 둘로 분리되기는 마찬가지다. 필요한 물품을 사러 온 고객과 과잉, 충동구매하는 고객의 둘로. 혹은 통상의 고객과 저 자신이 왕인 줄 아는 고객으로. 나아가 저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고객과 왕 대접에 속아서 호갱으로 전락한 고객으로. 자본주의가 제기하는 감정노동은 이 감정과 얼굴의 밀착 여부에 따라 무수한 가면들을 생산해낸다. 매니저는 점원의 신체에서 고객의 신체로 변신했다. 그럴 때 그녀의 친절한 웃음은 싸늘한 비웃음으로 변한다. 그녀는 자신이 감내해야 할 공격성을 다른 자리에서 발산함으로써 두 개의 신체로 분열한다. 공격받은 자가 공격하는 자다. 그리고 이런 이중성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가‘도게자’다. 무릎 꿇는 자세는 사과의 표현이나 사과하는 마음의 현시거나 재현이 아니다. 그 자세는 그 자세 ‘그대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굴복하기, 패배를 자인하기, 열등한 자의 자리에 있기,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기. 매니저는 이것이 세상을 보는‘관점’이 아니라 세상의‘실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녀가 보기에 열등한 자의 신체에서 우월한 자의 신체로 변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은 이런 이데올로기를 부정한다. “스스로 귀하다는 것은…… 자존, 존귀, 귀하다는 것은, 존, 그것은 존, 존나 귀하다는 의미입니까.”(p.76) 매니저는 능동(고객)과 수동(점원)이라는 두 실체로 증식함으로써 자존감을 획득했다. 그러나 그러한 존귀는“존나 귀하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존귀( 尊貴)에 비천함, 비열함, 천박함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웃는 얼굴 뒤에 저 자신을 표현하거나 저장해둘 자신을 갖지 못한‘나’역시 비천하고 천박하기는 마찬가지다. “맞은편 매장의 그녀가 막내야, 하고 나를 불렀습니다. 나더러 그만 좀 웃으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손님에게 응대할 때 너무 웃는다며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웃는 거, 싸구려로 보인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보고 있으면 보고 있는 자기가 다 창피할 때도 있는데 대체 왜 그렇게까지 웃냐고 그거 좀 비굴하게 보이게,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전체 이미지도 안좋아질 수 있으니까 적당히 웃으라는 이야기였습니다.”(p.81) “싸구려, 창피, 비굴”로 요약되는‘나’의 웃는 얼굴도 비천하고 비열하고 천박했다는 말이다. 자신을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한‘나’에게, 파국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도 보고 있어요. 상당히 좋지 않은 화질이네요. (……) 그러나 저것은 내가 맞습니다. (……) 걷다 보니 피곤해 그 소파에 앉았고요. 그게 저기 찍혀 있네요. 소파에 앉는 내가…… 그러나 나는 저기 잠깐 앉았다가 바로 일어났는데요. 앉았다가 일어났을 뿐. 소파를 한번 쓰다듬었죠 손으로. 그 장면이 저기 찍혀 있네요. 저렇게 짧게 앉았다가 일어났고 단 한 번 쓰다듬었을 뿐인데, 그 정도로 소파를 난도질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소파가…… 완전히 너덜너덜할 정도로 찢어졌다면서요. 난도질, 되어 있었다면서요. (……) 어떻게 그 찰나에 그 정도로 난도질할 수 있었겠습니까.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가요?(pp.81-82)
그날, ‘나’는 늦게 퇴근했고, 백화점을 거닐어보다가 소파에 잠깐 앉아서 쉬었고, 그리고 웃었다. “웃고 있네요. 화면 속에 내가 웃고 있어.”사람들이 나를 소파를 찢은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그 웃는 표정 때문이었다. 내 웃음은 복수심에 가득 찬 자의 웃음, 비열하고 천박한 웃음으로 해석되었다. 잠깐 동안에 가죽 소파를 어떻게 난도질할 수 있느냐는‘나’의 항변은, 그 웃음 때문에 부정되었다. 아니, 항변하는 동안에도‘나’의 웃음은‘나’와 무관하게 얼굴에 떠올라 있었을 것이다. 점원으로서의‘나’의 세계는 이렇게 파국을 맞는다.
그런데 마지막 의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저 소파는 누가 난도질한 것일까? ‘나’가 범인이 아니라면“그 찰나에 그 정도로 난도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 마지막 의문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는다. 따라서 백화점을 출입했던‘모두’를용의 자로 지목하게 만든다. 범인은‘나’나 매니저 혹은 다른 점원일 수도 있고 백화점을 출입한 고객일 수도 있다. 모든 자가 잠재적 범인의 선상에 오른다. 모두가 범인으로 의심받는 공동체란 이미 파국을 맞은 공동체다. CCTV에 찍힌 한 개인의 파국 너머에는 그녀를 범인으로 몰아감으로써 은닉된 수많은 이들이 있다. 이른바, 시대의 파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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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의「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문학동네』 , 2015년 봄호)에서도 개인의 파국은 시대의 파국과 동시적이지만, 황정은의 소설에서와 달리 그 파국의 원인이 가시화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작가이자 지방대 교수인‘나’는 지리멸렬한 일상에 지친 나머지 소심하고“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p.204)곤 했다. ‘나’의 유일한 낙은 혼자 사는 변두리 아파트 상가에 있는 호프집에서 소주 탄 생맥주를 마시는 일이었다. 어느 날‘나’는 낯선 남자가 건너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무 특징도 없는 사내다. “남자는 그냥 좀 흐릿해 보였다. (……) 남자를 보며 당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먼지 뭉치’였다.”(p.205) 남자에게 아무 존재감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그 남자가 자신을 어필하는 일이 시작된다. 출근길에, ‘나’는 출입문 건너편“야산이 시작되는 철조망 부근”에서 예의 그 사내를 발견한다.
나무들을 기둥 삼아 파란 천막이 지붕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한 남자가 돗자리를 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남자는 대자보 두 장을 합판에 붙여 들고 있었는데, 한 장은 글씨가 너무 작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머지 한 장은 똑똑히 읽을 수가 있었다.
103동 502호 김석만씨는 내가 입금한 돈 칠백만원을 돌려주시오!(p.206)
“먼지 뭉치”로 표상되는 사람이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는 그냥 거기에‘윤곽’으로 존재할 뿐인 사람이고 그 윤곽마저도 흐릿한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저 변두리 아파트의 배경에 올올하게 새겨진다. 아파트와 야산의 경계에, 다시 말해 삶과 황무지의 경계에 텐트를 치고 먹고 자며 시위를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 아파트의 삶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아파트의 주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아파트와 무관한 것도 아니다. 아파트 주민들이 들고나는 바로 그 풍경 속에서 터전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를 포함해서 변두리 아파트 주민들의 공간을‘삶’(생활)의 무대라고 하자. 여기에는 세 개의 대립항이 있다. 첫 번째가‘죽음’살아 있었으나 지금은 죽은 자. 그(권순찬)를 여기로 초대한 어머니가 그랬다. “저 사람 어머니라는 분이 몇 달 전에 갑자기 찾아와서는 자기가 빚을 졌으니 조금 도와달라고 하면서 계좌번호를 놓고 간 모양이에요. 알고 봤더니 이 사람 어머니라는 분이 사채를 쓴 모양인데……”.(p.207) 몇 달 후에 사내가 계좌로 돈을 보냈는데 그사이 어머니 역시 돈을 갚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과적으로 사채업자에게 돈이 두 번 들어간 거죠. 저 사람, 얼마 전 어머니 장례를 뒤늦게 치르고 곧장 여기로 내려온 모양이에요.” (p.208) 그의 어머니는 죽어 있으나 그를 이곳에 초대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동인( 動因)으로, 살아 있다. 두 번째는‘죽지 않음’. 어머니를 죽음으로 몬 사채업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여기에 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자). 세 번째는‘살지 않음’. ‘죽음’이 한때는 살아 있었으나 지금은 죽은 사람이고, ‘죽지 않음’이‘죽음’이라는 대립항을 모르는 삶이라면, ‘살지 않음’은 비활성화된 삶, 삶에는 포함되지 못했으나 죽은 것도 아닌 삶이다. 예컨대 활인화 (活人畵, living picture) 속의 사람이 그렇다. 그는 살아 있으나 그저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아파트 건너편 야산 초입에 텐트를 쳐놓고 노숙 생활을 시작한 사내가 그렇다. 혹은“먼지 뭉치”로 표현되는 사람이 그렇다. 얼핏 보면 생명 없는(inanimated) 존재이지만 잠시 뒤에 보면 꿈틀하고 움직이는 이 사내가 그렇다.
그는 아파트 주민들의 관점에서 보면 살지도 죽지도 않은 자다. 죽은 자(그의 어머니)나 죽지 않은 자(잠시 뒤 말할 사채업자)는 삶과는 무관한 자다. 아파트 주민들은 그들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사채업자의 어머니마저 그렇다. 그녀는 103동 502호에 사는 할머니인데, “유모차에 의지해 공장단지로 폐지를 주우러” 다닌다.(p.208) 아들마저도 아파트 주민들의 삶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권순찬은 그 경계에 있다. 그는 아파트 사람들과 무관하지도 않지만 아파트 주민인 것도 아니다. 그 경계의 존재를 사람들은 견디지 못한다. 502호 할머니마저 그렇다. “이 할머니가 저 남자 저러고 있는 뒤부터는 밖으로 나오지도 않아요. 폐지 안 주우면 제대로 살 수도 없는 할머니가……”.(p.209) 사람들은“김석만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면 꼭 연락”(p.211)할 테니 자리를 걷으라고 설득하기도 하고,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700만 원을 모금하여 사내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것도 그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사내는 연락을 주겠다는 제안도, 모아온 성금도 거절하고 그 자리를 지킨다. 마침내‘나’가 폭발한다. 이렇게.
G시에 첫눈이 내리던 날, 나는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충동적으로 문을 열고 나가 도로를 건넜다. (……)
나는 그것들을 밟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초록색 패딩 점퍼에 달린 모자를 둘러쓰고, 면장갑 낀 두 손으로 대자보 판을 들고 있는 남자. (……)
남자는 어깨를 잔뜩 옹송그리고 있다가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때문에 그래요? 나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말했다. 어머니가 당신 때문에 죽은 거 같아서 그러냐고요?
남자는 나를 쳐다보던 눈길을 거두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닌데요…… 어머니가 왜 나 때문에 죽어……
남자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빼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런 거잖아! 당신이 늦어서 어머니가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멱살을 잡힌 남자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바람에 휴대용 낚시의자는 뒤로 나뒹굴었다.
아닌데요…… 돈이 육백만 원밖에 없어서…… 두 달을 더 일해야 돼서…… 그렇게 된 건데요……
남자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나는 남자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애꿎은 사람들 좀 괴롭히지 마요! 애꿎은 사람들 좀 괴롭히지 말라고!(p.221)
이 엉뚱한 장면은 살아 있지 않은 삶, 비활성화된 삶이 공동체의 삶에 가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드러낸다. 사내는 아파트 주민들이 무시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경계에서, 아파트 주민들 전체의 삶을 극단적으로 일그러뜨린다. 사내 자신이 그 삶에 포함되지 않은 얼룩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신 연락하겠다거나 돈을 주겠다는 식의 호의로도, 어머니가 당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서 그러느냐는 꾸지람으로도 그를 설득하지 못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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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나는 길에 말하자면, 작 중 인물‘나’가 이기호 자신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런 사소설적 장치는 이 소설의 사실성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이 실화인지 아닌지는 당연히, 중요하지 않다. 이 장치가 목표로 하는 것은, 글의 서술자 마저도‘우리’(아파트 주민)의 일부이며, 그런‘삶’의 지점에서만 저 얼룩이 가시화 된다는 사실이다. 삶의 시선을 가질 때에만 저 얼룩이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서술자는 이 풍경 속에 구성적으로 엮여 있다. 서술자의 저 특수한 위치가 확보되어야 저 괴로움(“애꿎은 사람들 좀 괴롭히지 마요!”) 이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 폭로된다.
그런데, 사내는 의외로 쉽게 치워진다. 누군가 신고를 했고, 노숙인 쉼터 소속의 청년들이 와서 그를 끌고 갔다.“이를 덜덜덜 떨면서 끌려가더라구요 아무 저항 없이.”(p.221) 그는 간단히 치워진다. 비활성화된 삶이 아니라 비활성화된 사물인 듯이. 쓰레기처럼. 이로써 한 개인의 파국이(혹은 한 가정의 파국이라고 해도 좋겠다) 완성되었다.
소설은 누가 그를 신고했는지에 관해서는 말을 아낀다. 다만 서술자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나는 그들을 누가 불렀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그러나 그런 짐작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pp.221-222) 누가 그들을 불렀을까? 그리고‘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왜 독자에게 밝히지 않았을까? 누가 불렀든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를 얼룩이라고, 이 삶에 포함되지 못하는 침입자라고 생각한 아파트 주민이라면 누구나 잠재적인 범인이다. 황정은의 소파를 누더기로 만든 범인처럼. 이것이 공동체의 파국, 시대의 파국이다. 여기까지는「복경」의 동선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다시 추신이 붙는다. 작가이자 서술자인‘나’는 그의 이야기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지지난주 금요일”‘나’는 한 사람을 만난다. 앞서 말했던 그 사채업자다.
차에서 나온 사람은 내 또래의 남자였는데, 꽉 끼는 청바지에 검은색 가죽재킷을 입고 있었다. 가죽재킷의 칼라 부분엔 흰색 털이 달려 있었다. 가죽재킷 안에는 빨간색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복부 비만인 듯 배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남자는 가만히 서 있는 나를 힐끔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103동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누굴 찾아왔구나, 우리 아파트에 저런 차를 모는 사람도 찾아오는구나, 생각하며 102동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몇 걸음 걸어가다가 말고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그가 들어간 103동 쪽을 바라보았다. 그였구나! 그 사람이었구나!(p.222)
사채업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권순찬은 비활성화된 삶으로 혹은 살아 있지 않은 얼룩으로 잊혔을 것이다. 그런데 죽지 않은 자, 다시 말해 삶에 포함되지 않으면서도 그 삶 전체를 부정하는 자가 등장한다. 그는 권순찬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만들고 권순찬을 얼룩으로 만든 진정한 원인이었고 같은 방식으로 우리 모두를“애꿎은 사람”으로 만든 원인이었다. 우리는 권순찬이“애꿎은”우리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권순찬을 쓰레기처럼 치웠다. 그러나 실은 저 사채업자가 범인인 것이다.
죽지 않은 자의 원형은 좀비다. 좀비는 불사의 몸이지만 사실은 삶을 부정한 죽음이다. 모든 삶은 죽음을 내장하고 있다. 삶은 한시적일 때에만 비로소 삶이다. 반면 죽지 않음은 어떤 삶도 내부에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삶을 흉내 낸 죽음일 뿐이고 그래서 실은 영원한 죽음이다. 모든 삶을 부정하는 죽지 않음, 삶을 떼어내서 혹은 죽음에(권순찬의 어머니에게처럼) 혹은 살아 있지 않음에(권순찬에게처럼) 배당하는 죽지 않음이란 죽음의 권능이며 죽음의 외화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에 대해서.(p.223)
이 문장은 앞의 문장과 같지 않다. 이제 화를 내는 주체는 권순찬이 아니라 우리다. “애꿎은 사람들”속에는 우리만이 아니라 권순찬 씨도 들어 있다. 대립항이 다르게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묵시록 시대의 소설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전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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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윤의
서울 출생. 2006년『중앙일보』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평론집『포즈와 프러포즈』(2013)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