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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 프로젝트

  • 작성일 2023-09-29
  • 조회수 498

체인지 프로젝트 

이미주


   녀석은 투명한 상자 안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상자 뚜껑 위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 상자 뚜껑이 열리면 배송된 제품의 등을 세 번 이상 세게 두드려주세요. 수면 중인 제품이 깨어납니다.

   상자는 기계음을 내며 자동으로 열렸다.

   “와, 대박이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긴 속눈썹, 오뚝한 콧날. 녀석은 정말이지 열세 살의 나와 똑 닮았다. 이럴 수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지금은 오후 다섯 시. 아빠, 엄마가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밤 열 시. 무려 다섯 시간 동안 나는 체인지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시행하기로 마음먹은 건 삼 일 전이다. 일요일이라 아빠, 엄마와 같이 홀로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갑자기 홀로비전이 깜빡거리더니 모니터에 할머니가 나타났다. 

   “내 친구들은 생일 때, 손자, 손녀를 복제한 복제인간을 선물로 받았다던데….”

   “어머니, 사실은 우리도 준비하고 있었어요. 배송사 실수로 배송이 좀 늦어진다네요. 삼 일 후에 훈이 복제인간이 어머님 집에 배송될 거예요.”

   모니터에서 할머니가 사라진 후, 내가 엄마에게 다가갔다. 

   “내 복제인간을 할머니한테 보낸다고? 인공지능 로봇 사줬잖아.”

   “사람이랑 로봇이랑 같겠니? 로봇은 손만 잡아도 차가운데 복제인간은 따뜻한 온기가 있잖아.”

   “에이. 뭔가 찝찝해. 나한테 허락도 안 맡고 엄마, 아빠 미워.”

   나는 방으로 들어와 캡슐 침대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누웠다. 

   “가만, 나랑 똑같은 아이가 할머니 집에 배송된다고?”

   나에게 있어, 매일 여섯 시간씩 들어야 하는 홀로그램 강의는 최악이었다. 머리에 붙이는 컨센츄레이션 칩 때문에 집중하지 않을 때마다 홀로그램 모니터에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내 이름이 적혔다. 이름이 열 번 축적되면 나는 그 지겨운 콘센트레이션 집중 케어를 주말 내내 받아야 한다.

   나랑 똑같은 녀석을 이용해서 한 달만 마음대로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 날, 나는 홀로그램 강의를 듣고 거실로 나왔다. 아빠, 엄마는 늘 밤늦게 들어와서 나 혼자뿐이었다. 홀로비전 모니터를 켜고 이제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던 목록을 찾아봤다.

   “음. 이곳이겠지?”

   나는‘복제인간 센터’에 메시지를 보냈다.

      - 이틀 후 배송될 복제인간 주소지를 변경합니다. 기존 라운드 월드 마크 5호에서 센트럴 시티 뉴 113-6호로 변경 부탁드립니다.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알림음이 떴다.

      - 전송한 메시지가 처리되었습니다.

   나는 복제인간이 도착할 주소를 할머니 집에서 우리 집으로 변경했다.

   그래서, 지금 녀석이 눈앞에 있는 거다. 나는 낑낑대며 녀석을 내 침대로 옮겼다. 이 녀석을 깨우려면 등을 세게 세 번 두드려야 한다던데. 그건 전혀 걱정할 것 없다. 매일 늦잠을 자는 나를 위해 엄마가 내 등을 세 번 아니 열 번은 후려치니까.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매직펜으로 녀석의 엉덩이에 그림을 그렸다. 그때, 녀석이 코를 골았다. 곤히 잠에 빠진 내 모습과 같아서 뭔가 섬뜩했다. 뒷걸음질로 방을 나와 서둘러 엄마의 비행차 키를 찾았다. 키를 주머니에 넣고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오늘은 아빠, 엄마가 아빠 비행차를 함께 타고 가는 바람에 엄마의 비행차가 남아 있었다. 

   엄마의 검정 자율 비행차 좌석에 앉자 저절로 시동이 걸렸다.

   “할머니 집.”

   나는 평소에 엄마가 하던 대로 모니터에 대고 소리쳤다. 비행차가 공중으로 떠올라 하늘에 뻗어있는 도로를 달렸다. 창밖을 보니 건물 옥상에 홀로그램 광고가 번쩍였다.

      - 혼자서 외롭죠? 복제인간이 외로움을 덜어드립니다. 지금 문의하세요.

   “쳇. 복제인간이 무슨 외로움을 덜어준다고. 진짜도 아닌 가짜인 게.”

   너무 긴장한 탓일까. 깜빡 잠이 들었다.

      - 할머니 집 옥상에 도착했습니다.

   자율 비행차의 안내음에 번쩍 눈을 떴다. 

   “내가 내리면 다시 집으로 가.”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할머니가 미끄러지듯 달려왔다. 

   “훈아, 배고프지?”

   할머니는 나를 매일 봐 온 듯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식탁 위에는 된장찌개와 각종 나물이 올라와 있었다. 

   “읍. 냄새가 이상해.”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할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된장찌개 한 숟가락을 떠서 목에 넘겼다. 시금털털한 맛에 절로 눈이 감겼다. 

   그날 밤, 나는 할머니 옆에 누웠다. 할머니가 내 가슴을 두드리며 자장가를 불러줬다. 몇 분 후, 할머니는 내 코에 귀를 대보고 거실로 나왔다.

   “얘야. 훈이 아니 복제인간이 좀 이상한 것 같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복제인간한테 나와 함께 지낸 것처럼 기억을 넣었다며? 식성도 나랑 맞췄다고 하지 않았냐? 근데 음식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하는 건 뭐냐?”

   아뿔싸. 이제 나물만 먹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한 달 동안 홀로그램 강의에서는 탈출할 수 있으니 그걸로 됐다. 

   “오늘 처음 깨어나서 기억이 뒤엉켰을 수도 있어요.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주입된 기억에 맞게 잘 행동하지 않을까요?”

   할머니는 다시 방에 들어와 내 머리칼을 쓸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할머니가 만들어 준 나물 반찬을 맛있게 먹는 척했다. 할머니를 따라 산책하러 나가고 할머니와 함께 트로트도 불렀다.

   그날 밤, 할머니는 나를 재우고 또 엄마에게 연락했다.   “이 복제인간에게 주입된 기억이 이제야 돌아왔나 보다. 어찌나 말을 잘 듣고 예쁘게 행동하는지. 고맙다. 참 우리 진짜 훈이는 잘 있지?”

   “요사이 부쩍 자랐어요. 요즘 어머님에 대해서도 자꾸 묻더라고요. 어머님은 잘 지내시는지. 그리고 채소도 갑자기 잘 먹더라고요.”

   나는 울컥했다. 진짜 아들을 몰라보고 가짜 아들한테 푹 빠진 엄마가 미웠다.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진짜 손자를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다니. 

   한 달 정도 후에 할머니 생신이다. 그때가 되어야 부모님이 이곳에 찾아올 텐데. 이 생활을 한 달을 해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놀려고 왔는데 이럴 순 없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할머니니까 이해해주겠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할머니, 고글 좀.”

   “그건 왜? 잘 시간이 넘었는데.”

   “그냥 고글 줘.”

   가장 나답게 하는 게 할머니에게 제일 잘 먹힐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더 크게 내 목소리를 냈다. 할머니는 내 말을 잘 들어주었다. 역시 우리 할머니다. 진작 나답게 행동을 하는 게 정답이었다. 

   “오래 안 쓰다 보니까 먼지가 쌓였네. 감마짱, 이거 깨끗이 닦아 줘.”

   맞다. 그러고 보니 내 앞에 인공지능 로봇 감마짱이 있었다. 나는 감마짱을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모니터로 누군가에게 연락하려고 하면 내게 알려줘.”

   감마짱이 거실로 나간 후, 나는 VR 룸에 들어갔다. 몸에 센서를 달고 고글을 쓰고 도플갱어 게임을 선택했다. 이 게임은 나와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를 찾아내어 제거하는 게임이다. 내가 먼저 녀석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두 비행차 사이에 누군가가 수상하게 서성거렸다. 나는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근처로 다가갔다. 순간, 녀석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나랑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였다. 나는 광선총을 쏘려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알림음이 떴다. 그 사이 녀석이 먼저 광선총을 쏘며 말했다.

   “내가 진짜고 네가 가짜야.”

   레이저 불빛이 날아왔다. 가상 세계였지만 너무나 생생해서 나는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팔이 덜덜 떨렸다. 그때, 감마짱이 내 고글을 벗겼다. 

   “할머니께서 모니터로 연락을 시도하십니다.”

   나는 거실로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할머니!”

   내가 소리를 지르자 할머니가 뒷걸음질을 쳤다.

   “이 새벽에 누구한테 연락하려고요?”

   “친구한테.”

   할머니가 멋쩍게 웃었다. 분명하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연락해서 내가 또 이상해졌다니 어쨌다니 이런 말을 할 게 뻔했다.

   “늦은 시간에 친구한테 연락하면 민폐에요. 얼른 주무세요.”

   할머니는 쭈뼛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고글을 썼다. 이번엔 다른 게임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뿔싸. 햇빛이 창문 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얼른 할머니를 찾았지만 없었다.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할머니가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자율 비행차가 옥상으로 내려앉았다. 차에서 아빠, 엄마 그리고 녀석이 내렸다. 할머니가 녀석을 끌어안았다. 

   “어머니, 이 녀석이 어쨌다고요?”

   아빠가 묻자 할머니가 갑자기 씩씩댔다.

   “아니, 쟤가 말이야. 새벽 내내 게임을 하고 또 나한테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고 그랬다니까.”

   “음, 그럼 확실히 이상한데. 폐기처분을 해야겠는데요?”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나는 주먹을 말아 쥐고 외쳤다.

   “아빠, 엄마. 사실은 내가 진짜야. 저 녀석이 가짜고.”

   “무슨 소리야? 내가 진짜야. 네가 복제인간이겠지.”

   화가 난 나는 녀석을 떠밀었다. 우리는 서로 엉켜 엎치락뒤치락했다. 아빠와 엄마는 뒤엉킨 우리를 보고 발을 동동 구르며 혼란스러워했다. 

   “이, 이런 일이. 누가 누군지 헷갈리네.”

   순간, 내가 복제인간을 침대에 눕히고 한 행동이 떠올랐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저 녀석이 배달 왔을 때 녀석 엉덩이에 매직펜으로 똥을 그려놨어. 정말이야. 한 번 확인해봐.”

   녀석이 식은땀을 흘리며 바지를 추켜올렸다. 숨이 가빠지더니 엉덩이를 더듬거렸다. 누가 봐도 수상했다. 아빠, 엄마는 방향을 바꿔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훈이가 요즘 너무 착했어. 그렇죠?”

   녀석은 고개를 숙이다가 몸을 틀어 밖으로 냅다 뛰었다. 아빠와 엄마, 할머니와 내가 녀석을 잡으려고 뛰었다. 녀석은 잘 먹고 잘 잤는지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아빠가 다급하게 말했다. 

   “안 되겠다. 저 반대쪽으로 돌아라. 사방으로 막아서 잡자.”

   우리는 서로 협동해서 녀석을 잡았다. 녀석은 바지춤을 잡고 발버둥을 쳤다. 나는 억지로 바지를 살짝 내렸다. 녀석의 엉덩이 위에 똥이 그려져 있었다. 

   아빠가 녀석의 겨드랑이를 들어 올려 홀로폰으로 QR코드를 찍었다. 

      - 이 제품은 복제인간 제9881호 – 1입니다.

   “이 녀석, 오작동하니 빨리 반품해. 가짜가 감히 나인 척하다니.”

   엄마가 눈을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얘는 너무 착해. 그래서 할머니에게 맡기고 갈 거야. 어머니 얘는 정말 잘할 거예요.”

   “뭐라고? 어이가 없네.”

   내가 소리를 질렀다.

   “이것 봐. 얘는 버럭 대지도 않고 말도 잘 듣고 참 예쁜 아들이었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녀석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울부짖었다.

   “아빠, 엄마. 나 버리지 마.”

   아빠와 엄마가 녀석을 부둥켜안았다. 나만 덩그러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 후, 녀석은 할머니에게 맡겨졌고 짧은 시간 녀석과 정이 들어버린 아빠와 엄마가 녀석을 보기 위해 매주 할머니 집에 찾아왔다. 

   “하, 또 공부하기 싫다.”

   내가 할머니 방에 누워서 중얼거리자 녀석이 다가왔다.

   “우리끼리 가끔 바꿀까? 어차피 부모님도 우리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매번 확인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처음으로 녀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가짜가 아니게 느껴져 흠칫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잠바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산자락 아래에 할머니 집이 있었기에 나는 오른쪽으로 완만하게 늘어선 산자락으로 걸어갔다. 숲 근처에만 갔는데도 싱그러운 풀 냄새가 훅 끼쳤다. 

   “킁킁.”

   숨을 크게 들이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와, VR과는 확실히 다르네. 흙냄새, 풀 냄새, 바람 냄새 너무 좋다.”

   산자락을 감아 돌다가 비탈진 길로 들어서자 숨이 금세 턱까지 차올랐다. 

   “헉헉.”

   등허리를 굽혀 거친 숨을 쉬며 비탈진 길을 올려다보았다.

   “하, 저렇게 가파른 길을 어떻게 올라가지.”

   다리에 힘을 주며 겨우 한 발짝씩 나아갔다. 신발에 모래가 달라붙었다.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등허리에 셔츠가 딱 달라붙었다. 

   “목말라.”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다. 

   “찰랑.”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계곡이 있나?”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었다. 멀리서 연못 하나가 보였다. 

   “헉. 정말 연못이 있잖아?”

   연못을 VR로만 보았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어서 괜히 긴장되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연못 근처로 갔다. 

   “꿀꺽.”

   침을 삼키며 엉덩이를 최대한 뒤로 빼고 연못을 슬쩍 들여다봤다.

   “잘 안 보이네. 조금만 더 가까이 갈까?”

   한 발짝 다가서자 연못에 흐릿한 형체가 울렁거렸다. 

   “물고기인가?”

   조금 더 몸을 바짝 붙였다. 출렁거리는 연못에 물고기가 보였다 사라졌다. 숨을 훅 들이마시고 고개를 쭉 빼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정확히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머리를 더 아래로 숙이다 무게가 아래로 쏠려 몸이 기우뚱거렸다. 연못에 돌멩이 몇 개가 굴러떨어졌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발이 미끄러졌다.

   “어? 어!”

   검은 연못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풍덩.”

   물방울이 사방에 튕겨 올랐다.

   “사, 살려줘.”

   입에 연못물이 들어갔다.

   “어푸어푸.”

   “나 수영 못 해. 누가 좀 살려주세요.”

   나는 손을 쭉 뻗었다. 

   “뽀글뽀글.”

   입에서 물방울이 연이어 뿜어져 나왔다.

   “나 이제 착하게 살 거예요. 진짜예요. 가짜 아니고. 살려만 주세요.”

   눈물, 콧물로 범벅된 채 중얼거리는데 서서히 몸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가 내 손을 꽉 낚아챘다. 

   “정신 차려!”

   일단 그 손을 젖 먹던 힘을 다해 붙잡았다. 

   “야! 눈 뜨고 발을 디뎌. 네 키보다 얕아. 여기.”

   “응?”

   나는 반사적으로 발을 쭉 폈다. 정말 내 키보다 얕은 연못이었다.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녀석이었다.

   “너 속이려고 일부러 연기했는데, 걸려들었다.”

   창피해진 내가 물을 머금은 셔츠를 쥐어짜며 억지로 웃었다.

   “콧물이나 닦고 이야기해라.”

   “무슨 콧물이 있다고, 켁켁.”

   연못 물을 먹어서 그런 가, 입에서 기침이 뿜어져 나왔다.

   “넌 여기 왜 왔어?”

   “너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뒤늦게 따라왔는데 다급한 네 목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랬냐?”

   머쓱해졌다.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 

   “추우니까 일단 내려가자.”

   “그럴까?”

   나는 녀석의 손을 맞잡고 연못을 빠져나왔다. 연못을 빠져나오며 돌멩이를 잘 못 밟았다. 

   “악.”

   발목을 삐끗했다.

   “괜찮아?”

   녀석이 걱정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어. 이 정도쯤이야.”

   발을 더 내디뎠다. 발목이 욱신거렸다.

   “아야.”

   “안 되겠다. 업혀.”

   “뭐?”

   “업히라고.”

   “아니, 그건 좀.”

   “그래? 그럼, 너 여기 있어. 곧 해 떨어진다.”

   거뭇거뭇한 어둠이 숲을 서서히 삼키고 있었다. 몸이 젖어 살이 떨렸다.

   “어, 어쩌지.”

   “나 갈게.”

   “잠깐만.”

   “왜?”

   “업어줘. 잠깐만 뭔가 이상하잖아.”

   “자, 어부바.”

   “뭐야? 내가 아기야?”

   “업혀. 얼른. 나도 춥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몸을 녀석의 등에 기댔다.

   “똑바로 업혀.”

   두 손바닥으로 녀석의 어깨를 꼭 잡았다.

   “기대. 그게 너도 나도 편해.”

   머리를 녀석의 등에 기댔다. 생각보다 따뜻했다.

   “있잖아.”

   용기를 내고 싶었다. 지금이 가장 말하기 적합할 것만 같았다. 이 순간이 지나면 절대로 다시 말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왜?”

   “미안해.”

   “뭐가?”

   “그러니까. 내가 너보고 계속 가짜라고 한 거.”

   정적이 흘렀다. 나를 업고 내려가는 녀석의 숨소리만 숲속에 울려 퍼졌다.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미안해. 우린 가족인데 내가 너에게 너무 못되게 굴었어.”

   “가족?”

    녀석이 크게 놀라워했다.

   “응. 피를 나눈 사이보다 더 진한 사이야. 핵을 나눈 사이랄까.”

   “핵을 나눈 사이?

   “응. 내가 복제인간에 대해 찾아봤거든.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 내가 어릴 때 내 몸속에서 뽑아낸 체세포의 핵을 엄마가 제공한 난자에 집어넣은 다음, 복제 수정란을 만들어서 인공 자궁에 넣어 네가 태어난 거야. 그러니까 넌 내 핵을 나눠 가진 거야. 우린 핵을 나눈 사이지. 음,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먼저 세상에 나왔으니까 내가 형이야. 1초만 먼저 태어나도 형인데 난 너보다 무려 십 삼 년을 먼저 태어났으니까.”

   녀석이 어깨를 작게 떨며 말했다.

   “앞으로 잘 지내자. 형.”

   “그래. 우린 가족이야. 잊지 마. 그리고 이제부턴 마음으로만 날 형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이름 불러. 난 마음이 넓으니까. 하하.”

   “나한테 진짜 형이 생겼어.”

   녀석이 환하게 웃었다. 녀석은 복제인간은 맞지만, 가짜 인간은 아니다. 녀석은 진짜 녀석이다.

   나는 녀석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쿵쿵 녀석의 심장이 뜨겁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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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태몽 찾으러 왔어요

태몽 찾으러 왔어요 변선아 1. 태몽 때문이야 “4교시는 체육이니까, 수업 종 울리면 축구 골대 앞에 모여 있어요.” “네.” 3학년 1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성운이는 힐끔 선생님을 봤지요. 성운이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이 활짝 웃었어요. 교실에 남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야호!’ 그제야 성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어요. 마음은 쌩하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갔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죠. 성운이는 소아 천식을 앓고 있어요. 절대로 뛰면 안 돼요. 엄마는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해서 성운이가 뛰지 않도록 부탁해요. 운동장에서 하는 수업이 있을 때는 성운이 혼자 교실에 남아 책을 읽게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몸을 크게 움직이는 활동이 있는 수업에는 미리 선생님이 말했어요. “성운이는 교실에 남아 있을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좋아.” 이뿐인가요? 급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도 먹지 못해요. 천식에 좋지 않으니까요. 의사 선생님은 가끔씩 한두 번 먹는 건 괜찮다고 하지만, 엄마는 ‘절대 금지’라고 했어요. 어쨌든 지금, 선생님이 그냥 웃기만 했잖아요? 체육 수업에 참여해도 좋다는 말일 거예요. 그동안 교실에 혼자 남아서 책을 읽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오늘은 친구들하고 같이 운동할 거예요. 조심히 달리면 괜찮겠죠? 성운이에게 소원이 있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맘껏 뛰어보는 거예요. 쉬는 시간에 잡기 놀이도 하고 축구도 하고 싶어요.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축구 골대 앞에 모였어요. 물론 성운이도 당당하게 서 있었죠. 곧 선생님이 와서 말했어요. “오늘은 축구를 할 거예요. 성운이는 벤치에 앉아 있을까?” “네? 저도 축구 할 건데요?” 성운이가 실망하며 말했어요. “안 돼. 성운이는 뛰면 안 되니까 친구들 수업하는 걸 지켜보자.” “휴.” 그럼 그렇지요. 성운이는 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벤치로 갔어요. “살살이 공성운, 넌 앉아서 공 차는 거나 구경해.” 민찬이가 성운이 뒤에 대고 소리치고는 혀를 쑥 내밀었어요. 성운이는 민찬이가 얄미웠지요. 민찬이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어요. ‘살살이’란 별명도 민찬이가 지어준 거예요. 천식 때문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는 걸 놀리는 거죠. 민찬이와 아이들이 공을 굴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녀요. 그 모습을 보는 성운이 마음은 소금에 절인 배추 같아요. ‘나도 뛰고 싶다.’ 생각할수록 속상했어요. 왜 자기만 천식이 있어서 뛰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죠. 지루했던 체육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에요.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면서 밥을 많이 먹었어요. 벤치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성운이는

  • 관리자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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