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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간질간질

  • 작성일 2022-09-23
  • 조회수 85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중단편)]



등이 간질간질




손이랑






아침부터 전쟁이었다. 무조건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엄마와 아파서 학교에 갈 수 없다고 버티는 나는 마치 전쟁터의 적군처럼 대치 중이었다. 아빠는 아직 아프다잖아, 애가 아프면 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쉬어야지 무슨 학교에 가,라고 말했다가 핀잔만 듣고 엄마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건 모두 ‘영어 동화 말하기 대회’ 때문이다. 이번에도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대회 내내 똥만 싸다 왔다. 물론 대상은 지혜가 받았다. ‘어차피 우승은 박지혜’라는 말이 다시 확인되었다. 지혜는 이름부터 ‘지혜’로운 내 절친이다. 유치원 원아 때부터 쭉 1등만 한 친구이다. 지혜는 이길 수 없다. 지혜는 지혜라는 이름처럼 지혜롭고 또 지혜로웠다. 내 친구 지혜는 얄밉도록 모든 걸 지혜롭게 잘했다. 나도 내 이름을 지식이나 박식, 지성이나 다식이라고 지었다면 지혜 못지않게 똑똑하게 살았을 것이다. 이건 순전히 이름 탓이었다. ‘도전’이라고 이름을 지은 엄마와 아빠 때문이었다. 정도전처럼 훌륭한 학자가 되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하는데 ‘훌륭’은커녕 시원찮은 결말만 있었다. 나의 열한 살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유치원에서 크리스마스 연극 발표에서 라푼젤역에 도전했지만 떨어지고 눈사람역을 맡았다. 2학년 계주 선발에서도 넘어져 1등을 놓쳤다. 이번 4학년 반장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설문까지 밤새워 가며 열심히 준비해 도전했는데 ‘어차피 반장은 박지혜’라는 말처럼 지혜가 반장이 되었다. ‘영어 동화 말하기 대회’만은 자신 있었다. 『토끼와 자라』 이야기를 내용을 수정해 발표하기로 했다.
“도전, 괜찮은데. 이번엔 문제없이 대상 받을 것 같아. 이번 자선 공연도 『토끼와 자라』 이야기라고 하던데. 이건 네가 대상 받는다는 운명적 신호라고 생각해.”
지혜가 늘 그랬듯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번엔 반드시 잘할 거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말하기 대회가 있던 날,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배가 아팠다. 아침에 먹은 돼지비계 김치찌개가 체했는지 살짝 힘만 주어도 화장실로 뛰어가야 했다. 내 순서가 되어 무대에 올랐을 때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자라가 토끼를 업고 용궁으로 가는 장면을 건너뛰고 무대에서 내려와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지혜가 왼쪽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불렀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체해서 학교 못 가는 사람은 없어. 이제 화장실도 가지 않잖아. 약도 먹었으니까 음식만 조심하면 괜찮아.”
괜찮은지 아닌지는 내가 알지 엄마는 모른다. 배 속에 돌덩이가 있는 것처럼 묵직하고 아랫배가 살살 아프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공연 따위 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3, 4교시 체육과 음악 수업 대신 보배관에서 공연을 관람하게 되어 있었다. 너무 기대된다. 너도 그렇지. 도전아? 경쾌한 솔 음에 맞춰져 있는 지혜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오늘따라 지혜의 경쾌한 솔 음이 손이 닿지 않는 등을 간질이는 것처럼 거슬렸다.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뭐가. 하나도 기대되지 않아. 짜증 나. 토끼처럼 하얗고 보송보송한 카디건을 입은 지혜가 왼쪽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얄미워. 나도 모르게 입에서 툭, 터져 나왔다. 나는 얼른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입이 간질간질, 등이 간질간질거렸다.
공연은 문어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자라가 문어 아가씨의 아름다운 가발을 만들기 위해 토끼 가죽과 털을 구하러 가는 이야기였다. 실내는 어둡고, 음악은 잔잔하고 아랫배는 살살 아프고, 으슬으슬 춥고 눈꺼풀은 내려앉았다. 지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어떡해, 사냥꾼이 나타났어. 도망쳐야 해. 토끼야, 자라야, 도망쳐. 지혜의 다급한 목소리, 아이들의 애타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부서졌다.
“도전, 최도전!”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지혜 목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도 없었다. 에이, 뭐야, 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어라, 여긴! 숲속. 내가 오솔길에 서 있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생각하고 있는데 숲속에서 하얀 털 뭉치가 떼구루루 굴러 나왔다. 놀란 토끼 눈에 긴 귀를 안테나처럼 세우고 코를 찡긋거리는 토끼? 아니 지혜? 고개를 왼쪽으로 갸우뚱 기울였다.
“혹시, 도전이를 알아?”
지혜, 아니 토끼가 말을 했다. 경쾌한 솔 음. 지혜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내 눈이 놀란 토끼 눈처럼 커졌다. 지혜를 닮은 토끼라니. 쳇.
“도전이를 아냐고?”
“어, 알긴 아는데. 그러니까, 내가 도전인데.”
얼떨결에 우물쭈물 대답했다.
“세상에 자라야! 진짜 세상에 도전이 있었어. 육지에 도전이가 살고 있었어.”
수풀 사이에서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자라가 걸어 나왔다.
“자라야, 빨리 도전이라고 외치자. 빨리. 도전!”
토끼와 자라가 오른팔을 엇갈려 걸어 외치고는 성큼 내 앞으로 다가섰다.
“자, 그럼 이제 우리를 바다 용궁에 데려다줘.”
“용궁?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은. 도전이라는 소녀를 만나면 도전이라고 크게 외치면 도전이라는 소녀가 대신 도전해 줄 것이라는 말이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또 그 위의 할머니의 할머니, 또, 또 그 위의, 위의 할머니의 할머니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어. 그러니까 너는 우리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도전해야 해. 그렇지 자라야?”
내가 무슨 말인지 몰라 토끼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토끼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깡총 뛰어 내 앞에 섰다.
“너 정말 답답하구나. 자라는 다리를 다쳐서 헤엄칠 수 없어. 네가 대신 우리를 위해 도전해서 우리를 안전하게 용궁에 데려다줘야 한다고.”
“내가? 왜?”
토끼는 큰 귀를 앞뒤로 까딱거리며 팔짱을 꼈다.
“너 정말 답답한 아이구나. 그야 네가 세상에 한 명밖에 없는 도전이니까!”
토끼가 덥석 내 손을 잡더니 막무가내로 잡아당겼다.
“이럴 시간이 없어. 대머리 문어 사냥꾼한테 쫓기고 있어. 문어는 팔이 여덟 개나 되는 명사수야. 빨리 바다로 가야 해.”
나는 토끼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문어가 너를 잡으러 온다고?”
“대머리 문어가 노리는 건 자라야. 사람들한테 자라탕이 몸에 좋다는 소문이 돌아서 마구잡이로 자라를 잡고 있어. 자라가 씨가 마르고 있다고. 자라가 다친 것도 대머리 문어 때문이라고. 대머리 문어는 화살을 가지고 있어서 멀리서도 우리를 쏠 수 있다고. 자, 빨리 가자.”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는 듯 토끼가 힘주어 내 손목을 잡았다.
“잠깐, 잠깐. 그럼 혹시, 너희가 그 유명한 『토끼와 자라』의 그 토끼와 자라야? 그런데 거기엔 문어가 나오지 않는데.”
내가 토끼 팔을 잡고 버티자 토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토끼고 얘가 자라인 것은 맞아.”
자라가 등껍질에서 고개를 내밀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토끼 씨를 만나기 위해 용왕님의 허락을 받고 정말 큰마음 먹고 15년 만에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토끼 씨가 아프다고 하여. 토끼 씨를 데리고 용궁으로 가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왔는데 이렇게 되었지 뭡니까. 토끼 씨에게 민폐만 끼쳤어요. 토끼 씨 간이 상하면 안 되는데 말이죠.”
이상한 자라였다. 점잖은 척 존댓말을 쓰는 것도 웃기는데, 토끼를 토끼 씨라고 부르는 모양은 코웃음이 날 정도로 웃겼다. 게다가 간? 간이라고. 책 내용대로라면 토끼는 자라의 꼬임에 넘어가 간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 초긴장 위기 상황이다.
“안 돼. 절대 용궁에 가면 안 돼.”
토끼와 자라가 동시에 물었다.
“왜?”
꿍꿍이가 있는 자라 앞에서 용궁에 가면 간을 빼앗기고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잠깐 아주 잠깐 그냥 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혜를 닮은 토끼가 용궁에서 골탕 좀 먹게 두는 게 간질거리던 등을 긁는 것처럼 시원할 것 같았다. 입을 오물거리며 잔뜩 겁먹은 눈으로 나를 건너다보는 토끼를 보며 조금 전 생각을 슬쩍 가슴속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지혜를 닮은 토끼가 자라를 따라가 간을 빼앗기도록 둘 수 없었다.
“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지. 아, 맞다. 너는 육지 동물이라 바다에서는 숨을 쉴 수 없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 등껍질 안엔 산소통이 있어요. 토끼는 내 등껍질 안에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용궁에선 그런 것 없이도 숨 쉴 수 있답니다.”
자라가 토끼를 꼬셔 용궁에 데려가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한 모양이었다. 생각해야 했다. 토끼를 살려야 했다. 나는 잔뜩 미안한 얼굴로 토끼를 보았다.
“어떻게 하지. 나는 수영도 못해. 자신 없어.”
자, 이제 포기하시지 자라야. 네 시커먼 속을 드러내라고.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자라를 쳐다보았다. 토끼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이럴 수가. 도전이 도전은 할 수 없다니. 너무 절망스러워서 간이 더 상하는 것 같아.”
토끼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자라는 토끼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내게 말했다.
“도전은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도전을 못 할 리가 없죠. 혹시 뭐, 보답 같은 것, 사례를 원해서 이러는 겁니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주 뻔뻔스럽게 말했다.
“무슨, 그런 말을. 내가 뭐, 자라만도 못한 놈인 줄 알아? 내가 네 시커먼 속을 모를 줄 알아?”
“제 속이 시커멓다고요?”
“토끼를 꼬셔서 용왕에게 데려가 토끼 간을 바치려고 하는 거잖아.”
내가 턱을 치켜들고 자라에게 달려들자 토끼가 자라와 내 사이에 끼어들었다. 놀라서일까. 기다란 귀가 더 길어진 듯 보였다.
“그럴 리가. 내 간은 망가져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데 용왕님께 왜 내 간을 바쳐?”
“용왕이 아픈데 토끼 간을 먹어야만 나으니까. 어때 내 말이 다 맞지?”
“자라야. 그래? 용왕님이 아파? 정말 내 간이 필요해?”
토끼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자라를 쳐다보자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이 맞아. 토끼야, 너에게 관직을 준다고 했지. 너를 꾀었잖아. 용궁 구경을 시켜 주고 잔치를 열어 주겠다고 했잖아.”
“용궁은 이미 다 구경했어. 이번에 가면 네 번째야.”
토끼는 입을 삐쭉 내밀며 불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라는 나빠야 했다. 자라는 토끼 간을 노리고 토끼를 속이는 이야기가 『토끼와 자라』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라는 분명 나빴다.
“도전 씨는 굉장히 예의가 없군요. 토끼 씨는 저와 가장 친한 친구인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자라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서자 토끼가 깡충깡충 내 앞에 뛰어와 랩을 하듯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하얀 털이 새하얗게 질려서 파르르 떨렸다.
“맞아. 내 친구 자라는 내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보러 온 거야. 나를 용궁으로 데리고 가려고. 내가 간이 나빠져서 간에 좋다는 용궁에서 자라는 싱싱한 해초를 먹게 해 주고 쉬게 해 주려고 온 거라고. 용궁의 해초를 육지로 가져오면 바로 썩어 버리니까.”
이게 아닌데. 동화 내용과 달랐다. 동화에서 자라와 토끼는 항상 속고 속이는 경쟁자였다. 자라와 토끼가 절친이라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토끼 씨, 걱정하지 마세요. 도전 씨가 할 수 없다고 해도 내가 토끼 씨를 꼭 용궁으로 데리고 갈게요. 저기 보이는 소나무만 지나면 절벽이 나와요. 절벽 아래 바다가 있어요.”
자라는 결심한 듯 눈을 반짝이며 토끼를 등에 업으려고 했다. 눈물겨운 우정이었다. 업히지 않으려는 토끼와 업으려고 하는 자라 사이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반질반질 미끌미끌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희들 이쪽으로 올 줄 알았지.”
토끼와 자라, 나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햇빛에 유리처럼 반짝거리는 대머리 문어가 우리를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토끼는 금방이라고 쓰러질 것처럼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문어의 활에 맞기 전에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에 망설임 없이 자라가 토끼 앞에 나섰다. 문어가 활시위를 당겼다. 쑤우우우웅. 활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자라를 향해, 아니 토끼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어느 틈에 토끼가 자라를 밀쳐 내고 앞에 나섰다.
“안 돼!”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날아오는 활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린 사람은 자라도 아닌, 토끼도 아니 나였다. 공중으로 몸을 날리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나도 모른다. 배에 벼락 맞은 것처럼, 배가 두 동강이 나는 것처럼 아팠다.
아, 너무 아파. 배에 불이 붙은 것 같아. 아, 아아.
벼랑으로 떨어졌다. 도전아, 최도전! 희미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 들려 도전아! 지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우당탕. 쓰러지고 넘어지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최도전! 최도전!”
엄마 목소리가 성큼 귓가로 다가섰다. 눈을 뜨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엄마 옆에 지혜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맹장염이래. 수술해야 한대. 어떻게 참았어. 많이 아팠을 텐데.”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은 듯 말했다. 엄마, 내가 계속 아프다고 했잖아,라고 말하려는데 지혜가 나를 껴안으며 울었다.
“지혜가 많이 놀랐나 보다. 너를 업고 뛰었대. 보건실까지.”
보건실 선생님을 부르면 되는데 지혜스럽지 못하게,라고 입속으로 되뇌었다. 코끝이 찡해졌다.
“최도전! 나는 네가, 꼭.”
지혜의 목소리가 울컥울컥, 눈이 토끼 눈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지혜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 친구. 내 도전아!”
지혜의 경쾌한 솔 음이 귀에서 울렸다. 등이 더는 간질거리지 않았다.











손이랑
작가소개 / 손이랑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습니다. 201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이 당선되고, 202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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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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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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