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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 테이프

  • 작성일 2022-09-09
  • 조회수 961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중단편)]



입술 테이프




이병승






또 싸운다.
아빠와 엄마는 툭하면 싸운다. 싸울 때는 내가 있든 없든 상관도 안 한다.
총알 몇 개가 심장으로 날아와 박힌다. 칼 몇 개가 날아와 마음을 찌른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는다.
“제발!”
싸우는 소리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간다.
“싸우지 마!”
내가 소리치자 아빠와 엄마는 들은 척도 안 한다. 나는 더 크게 소리친다. 그러자 멈칫한다. 둘이 나를 동시에 본다.
나는 액체 괴물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엄마 아빠를 쏘아본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 뺨을 타고 턱에서 맺혔다가 툭, 떨어진다.
“아, 알았어. 방에 가서 자.”
엄마가 나를 토닥이며 방으로 데려간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는다.
엄마가 내 어깨를 토닥이더니 살며시 나간다. 잠시 후 이번엔 목소리를 낮춰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쿵쿵, 뭔가 물건 부서지는 소리도 난다.
잠시 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철컹 나고 조용해진다. 아마 엄마가 나갔을 거다.
아빠의 고함이 집 안에 쩌렁쩌렁 울린다. 발을 밟힌 괴물 같다.


아침에 일어나자 어제 일이 생생하다. 꿈도 서러운 꿈을 꾼 것 같다.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난 분명 억울하고 화나고 서러웠다.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책상 위에 있는 테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종이테이프였다. 그걸 잘라서 입에 X자로 붙였다.
뭔가 마음에 들었다.
내 말은 아무도 안 들으니까 이제부터 난 말을 하지 않을 거다.
그런 모습으로 학교에 가니 건우가 날 보고 깔깔 웃는다.
“그거 뭐야?”
미처 생각 못 했다. 내 결심은 어른들과 말하지 않겠다는 거였는데 테이프 때문에 건우하고도 말을 못 하게 됐다. 할 수 없이 건우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톡을 쳐서 보냈다.
“난 이제부터 말을 안 하기로 했어. 특히 어른들하고는.”
나는 주저리주저리 어제 있었던 일을 톡으로 써서 보냈다. 건우는 참을성 있게 그걸 다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 엄마도 내 얘긴 안 들어. 얘기 좀 하자고 앉혀 놓으면 내 얘긴 딱 1분 듣고 자기 얘긴 한 시간도 넘게 해. 너 진짜 대단하다. 멋져!”
건우가 엄지까지 척 세워 주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입에 X자로 붙인 검은색 테이프를 보며 재미있어했다.
건우가 나 대신 얘기를 해 주었다.
“은율이는 이제부터 어른들하고 말하지 않겠대. 그래서 붙인 거래.”
그러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른들은 우리 얘기를 듣지 않아. 아무리 말해도 그건 아니라고 하지.”
“내가 얘기하면 시끄럽대. 자기는 전화하면서 깔깔거리면서…….”
“분명히 말했는데 맨날 언제 그랬냬.”
“나도 붙일까?”
“나도.”
아이들이 장난처럼 자기도 테이프를 붙이겠다고 했다. 건우가 신이 나서 학교 앞 문방구에 가서 똑같은 검은색 종이테이프를 사 왔다. 남자애들이 너도나도 자기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그건 너무 안 예뻐.”
다미는 알록달록 색깔도 있고 동물 그림이 있는 테이프를 잘라 붙였다.
“그거 괜찮다.”
여자애들은 제각각 특색 있는 테이프를 꺼내서 서로 붙여 주고 붙이고 신이 났다.


“너희들 그게 뭐야?”
담임 선생님이 우리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 건우가 톡으로 선생님께 설명했다.
톡을 본 선생님은 나를 쳐다봤다. 나는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침착하려고 애썼다.
“은율이가 대단한 일을 벌였구나. 선생님도 너희랑 생각이 같아.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너무 안 듣지. 어리다고 무시하면서 말이야. 아주 좋은 생각이야. 참고로 선생님은 교실이 조용해져서 너무 기뻐. 이대로 수업을 하면 공부도 잘될 것 같아.”
선생님은 배시시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수업을 했다.
우리는 선생님이 펄쩍 뛰며 난리 칠 것을 예상했다.
“얘들아, 선생님이 어떡하면 테이프를 뗄 거니?” 하고 물으면 우리는 각자의 요구 사항을 말할 작정이었다.
우리는 맥이 좀 빠졌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남았다. 교장 선생님이 지나가다 복도에서 교실 안의 우리를 보면 선생님을 불러서 야단을 칠 거다.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어떡하든 해결을 해야지 이게 뭡니까?”
쩔쩔매는 선생님을 보게 될 거라 예상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4교시 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교장 선생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 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옆 반 아이들 몇 명이 신기하다고 쳐다보기는 했는데 그뿐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 반 톡에 의견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테이프를 붙인 채 밥을 먹을 순 없잖아?”
“오늘 메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치킨카레야.”
“난 입술이 간지러워.”
“뗄까?”
“떼자.”
아이들은 미련 없이 테이프를 떼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원함을 만끽하며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은율아, 넌 안 떼?”
건우가 자기 치킨카레를 다 먹고 내 식판을 넘보며 물었다. 나도 그만 떼고 싶었다. 입술이 따갑고 간지러웠다. 배도 고팠다.
“은율이는 안 뗄 거야. 한번 한다면 하는 애잖아.”
다미의 말이 귀에 꽂혔다. 다미는 내가 우리 반에서 제일 좋아하는 애다. 무심한 듯 밥을 먹고 있었는데 나를 좋아한다는 티를 안 내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다미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한번 한다면 하는 애라고?
그렇다면……!
나는 미련 없이 카레 향이 피어오르는 식판을 건우에게 밀어 주었다. 건우가 앗싸! 하면서 치킨만 골라 먹기 시작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테이프는 내 손으로 뗄 수 없었다.
엄마 아빠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다시는 안 싸우겠다고 맹세하면 그때 뗄 거다. 이제부턴 내 말을 귀담아듣겠다고 약속하면 그때 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떼어 주기라도 해야 한다. 그럴 때 마지못한 듯 넘어가야 한다. 절대 내 손으로 먼저 뗄 순 없다.


한번 한다면 하는 애라는 말은 생각할수록 마음에 들었다. 입술이 근질근질했지만 나는 점점 한번 한다면 하는 애가 되어 가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오려면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았다.
여긴 집이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잠깐 떼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건우한테 문자가 왔다.
“엄마한테 네 얘기 했더니 되게 웃었어. 너 참 귀엽다고 하더라. 근데 귀엽다고가 뭐냐? 남은 심각한데…… 하여튼 어른들이란…….”
나는 배가 몹시 고팠다. 건우는 밥을 먹었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기운이 나서 떠들어 대고 있겠지.
“아무튼 내가 생각해도 테이프는 기발했어. 이번에 확실하게 보여 줘. 파이팅.”
그럼 너도 하든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테이프를 떼려고 하는데 고양이 네오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회색 눈과 마주쳤는데 마치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한번 한다면 하는 애가 되어야만 했다. 다미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데 실망하게 할 순 없었다.
테이프는 그대로 입에 붙인 채 공책을 펴서 적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잘 듣지를 않아. 내가 그렇게 번지 점프를 시켜 달라고 했는데도 위험해서 안 된다고 하고, 검도 학원 보내 달랬더니 끈기가 없어서 금방 싫증을 낼 거라며 학원비만 아깝다 하고. 죽어도 가기 싫다는 극기 훈련 캠프는 억지로 보내고.
아빠 엄마가 싸울 때 내가 아빠 편들어 주면 엄마가 화내고 엄마 편들어 주면 아빠가 서운해하고. 다시는 서로 안 싸우겠다 약속해 놓고 맨날 싸우고…….
내가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 칠 땐 동물은 안 된다더니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갑자기 고양이를 데려오고…….
친구 사귈 때도 엄마한테 허락받으라 하고……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그건 아니라 그러고…….


그렇게 한참 쓰다 보니 졸렸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었다.
언제 오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방에 가서 누웠다. 적은 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늦게라도 보겠지. 보면 어떤 반응일까? 가슴이 철렁하겠지…….


아침에 일어나니 집이 조용했다. 나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안방에 붙어 있는 욕실 바닥은 젖어 있고 식탁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는 걸 보니 벌써 출근한 게 틀림없다.
탁자로 달려가서 어제 적어 놓은 걸 봤다.


“다 이유가 있어. 나중에 얘기하자.”


엄마가 빨간 볼펜으로 크게 휘갈겨 적어 놨다. 맞춤법 틀린 곳에는 체크가 되어 있었다.
울컥 화가 났다.
서러웠다.
역시 내 말은 듣지를 않는다.


“은율이는 아직도 시위 중이구나. 선생님은 평화적인 시위라면 얼마든지 지지해.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좀 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어. 암, 그렇고말고. 파이팅!”
선생님은 두 주먹을 쥐어 아래로 잡아당기듯 흔들어 보이고 생긋 웃었다.
아, 이게 아닌데.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와서 떼어 주면 좋겠는데. 선생님은 평소와 달리 너무 자상하고 이해심 많고 젊잖다. 너무 나를 존중해 준다.
그냥 좀 확 떼어 주면 안 돼요?
나는 속으로 외쳤다.
선생님은 내가 조용해져서 속으로 은근히 좋아하는 건 아닐까? 내 꾀에 내가 넘어가서 골탕 좀 먹어 보라는 뜻일까?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에 사람들이 쳐다볼까 봐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런데 의외로 나한테 관심 있는 어른이 없었다. 모두 제 할 일이 바쁜지, 분명 나를 본 것 같은데 왜 그러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계속 가리고 가야 하나 그냥 얼굴을 내놓고 가야 하나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 어정쩡하게 걸으며 골목을 돌아서다가 걸음을 멈췄다.
성당이었다.
일요일마다 가기 싫다는 나를 억지로 깨워서 데리고 가는 곳이다. 그때만은 엄마와 아빠도 한마음 한뜻이 된다.
나는 내 입의 테이프를 떼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떠올랐다.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겠다고 하면 테이프를 붙인 채 말을 할 수 없으니 떼어 주시겠지?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수녀님이 보였다. 휴대폰으로 신부님께 고백할 게 있어요,라고 적어서 보여 주었다.
수녀님은 나를 빤히 보더니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제일 나이 어린 신부님이 왔다. 휴대폰을 끄는데 언뜻 보니 게임을 하다가 나온 것 같았다. 내가 좀 귀찮은 것 같은데 티는 안 내려고 하는 듯했다.
고해성사실에 들어갔다.
나는 테이프 때문에 우물우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말을 했다.
그러자 한참 만에 신부님이 말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
신부님이 저쪽으로 먼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뛰어나갔다.
총알같이 빠르게 휴대폰에 적어서 보여 드렸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셨잖아요?”
나는 일부러 턱을 쑥 내밀고 휴대폰을 신부님 코앞에 들이밀었다.
“하느님은 다 알아들으셨어. 속으로 생각만 해도 돼. 그게 기도란다.”
신부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저만치 사라졌다. 어째서, 어째서 모두 내 입에 붙은 테이프는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
이게 이상하지 않은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드나?
안물안궁*)인가?


*)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함


성당을 나온 나는 힘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바로 그때 전동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가 맹렬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앗, 골패 할아버지닷!”
평소에 전동 휠체어를 타고 무서운 속도로 아이들 사이를 막 쑤시고 다니는 성질이 급하고 고약한 할아버지였다. 아이들이 뭐라 하면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서 골패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나는 할아버지 앞을 가로막고 섰다.
“비켜!”
나는 할아버지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꼼짝하지 않았다. 이대로 치고 가진 않겠지?
설마?
설마?
휠체어는 나를 치고 갈 듯이 달려오다가 간신히 멈춰 섰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안 비켜?”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선 채 할아버지를 뚫어지게 봤다.
“뭐 할 말 있냐? 할 말 있으면 해.”
할아버지는 그제야 내 입에 붙은 테이프를 본 것 같았다. 삐뚤어진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건 뭔 짓거리냐?”
눈동자가 시뻘건 할아버지는 예상대로 10초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내 입에 붙은 테이프를 잡아당겼다. 쫙, 쫙 두 개의 테이프가 떨어졌다.
“아얏!”
나는 따가워서 입술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뭐냐니까?”
“……그게,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도망쳤다. 골패 할아버지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향해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는 도망치면서 속이 다 시원해서 날아갈 것 같았다. 평소엔 제일 무섭고 싫었던 골패 할아버지가 지금은 제일 고마운 사람이었다.
입술이 따끔거렸지만 숨쉬기가 편해졌다.
떡볶이집 앞을 지나는데 배가 엄청나게 고팠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빨대로 우유와 물밖에 먹지 못했다. 새빨간 떡볶이가 나를 유혹했다.
“아줌마, 떡볶이 주세요!”


집에 온 나는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처음에 테이프를 붙인 이유는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게 싫었고,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말을 안 하기로 한 건데 그 방법은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다미의 말이 떠올랐다.
은율이는 한번 한다면 하는 애야!
그래, 그렇다면 이제부턴 작전을 바꾸는 거다. 말을 안 하니까 더 모른다. 오히려 말을 안 하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제부턴 말을 할 거다.
졸졸 따라다니면서, 내가 좋아하는 래퍼처럼, 귀에 때려 박듯이 말을 할 거다.
내가 하고 싶은 말, 엄마와 아빠가 꼭 들어야 하는 말. 어른들에게 다가가다 바닥에 쏟아진 말, 한마디도 흘려버리지 못하게 쉬지 않고 말을 할 거다. 당장 엄마 아빠부터 시작이다.
어디, 들어오기만 해 봐라.











이병승
작가소개 / 이병승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계간 《어린이와 문학》 편집주간을 역임했고 정채봉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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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태몽 찾으러 왔어요

태몽 찾으러 왔어요 변선아 1. 태몽 때문이야 “4교시는 체육이니까, 수업 종 울리면 축구 골대 앞에 모여 있어요.” “네.” 3학년 1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성운이는 힐끔 선생님을 봤지요. 성운이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이 활짝 웃었어요. 교실에 남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야호!’ 그제야 성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어요. 마음은 쌩하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갔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죠. 성운이는 소아 천식을 앓고 있어요. 절대로 뛰면 안 돼요. 엄마는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해서 성운이가 뛰지 않도록 부탁해요. 운동장에서 하는 수업이 있을 때는 성운이 혼자 교실에 남아 책을 읽게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몸을 크게 움직이는 활동이 있는 수업에는 미리 선생님이 말했어요. “성운이는 교실에 남아 있을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좋아.” 이뿐인가요? 급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도 먹지 못해요. 천식에 좋지 않으니까요. 의사 선생님은 가끔씩 한두 번 먹는 건 괜찮다고 하지만, 엄마는 ‘절대 금지’라고 했어요. 어쨌든 지금, 선생님이 그냥 웃기만 했잖아요? 체육 수업에 참여해도 좋다는 말일 거예요. 그동안 교실에 혼자 남아서 책을 읽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오늘은 친구들하고 같이 운동할 거예요. 조심히 달리면 괜찮겠죠? 성운이에게 소원이 있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맘껏 뛰어보는 거예요. 쉬는 시간에 잡기 놀이도 하고 축구도 하고 싶어요.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축구 골대 앞에 모였어요. 물론 성운이도 당당하게 서 있었죠. 곧 선생님이 와서 말했어요. “오늘은 축구를 할 거예요. 성운이는 벤치에 앉아 있을까?” “네? 저도 축구 할 건데요?” 성운이가 실망하며 말했어요. “안 돼. 성운이는 뛰면 안 되니까 친구들 수업하는 걸 지켜보자.” “휴.” 그럼 그렇지요. 성운이는 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벤치로 갔어요. “살살이 공성운, 넌 앉아서 공 차는 거나 구경해.” 민찬이가 성운이 뒤에 대고 소리치고는 혀를 쑥 내밀었어요. 성운이는 민찬이가 얄미웠지요. 민찬이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어요. ‘살살이’란 별명도 민찬이가 지어준 거예요. 천식 때문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는 걸 놀리는 거죠. 민찬이와 아이들이 공을 굴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녀요. 그 모습을 보는 성운이 마음은 소금에 절인 배추 같아요. ‘나도 뛰고 싶다.’ 생각할수록 속상했어요. 왜 자기만 천식이 있어서 뛰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죠. 지루했던 체육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에요.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면서 밥을 많이 먹었어요. 벤치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성운이는

  • 관리자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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