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나의 단어, 수호자에게

  • 작성일 2023-08-16
  • 조회수 683

나의 단어, 수호자에게

지영


   문을 열자 구름 떼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쨍쨍거리며 제자리를 맴도는 구름 모양의 풍경을 지켜보다가 인기척에 서둘러 움직였다. 신도시에 자리한 소규모 서점은 마스크를 쓴 사람들로 북적였다. 입구와 가장 가까운 데에 세워진 세로 배너 옆을 서성이다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뒤 ‘올해 SNS를 뜨겁게 달군 화제의 책’을 쓴 작가, ‘MZ세대의 시선으로 난민 문제를 풀어냈다’고 평가받은 조윤정 작가와의 대화가 시작됐다. 책을 둘러싼 세간의 말들, SNS에 올린 글이 주목받으며 출간으로 이어진 과정, 난민 관련 갈등에 대한 작가의 입장 등이 이야기됐는데 아무것도 읽지 않고 참석한 나로서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환한 얼굴로 머뭇거림 없이 말을 늘어놓는 작가를 나는 묵묵히 바라만 봤다. 그러니까 오늘의 마스크는 꽤나 유용한 가면이었다. 참석자들이 질문할 시간이 되자 누군가 물었다.

   “작가님. 제가 여기 오기 전에요,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힌 판에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단어가 올해 얻게 될 행운 같은 거라고 해서 그걸 했어요. 저는 작가님의 단어가 궁금한데요. 여기서 해볼 수는 없으니까 대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나, 나왔으면 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질문하신 분은 어떤 단어를 발견하셨나요?”

   “아, 전 환희요.”

   “멋진 일 년이 기다리나 보네요. 그렇게 되길 바라고요. 저는, 이런 질문 무서워요. 하하하. 한 줄로 정리하거나 주제를 밝히는 게 정말 어렵거든요. 이것도 비슷한 계열의 질문이고요.” 여기저기서 가볍게 웃음이 터졌고 조윤정이 말을 이었다. “저의 단어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릿하게나마 들릴 뻔했던 그의 단어는 제자리를 맴도는 구름 떼가 쫓아냈다. 거리는 차가웠고, 너의 단어는 무엇이냐고 묻는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떨쳐내지 못하는 기억과 함께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


   창문을 열자 종에 매달린 물고기가 막대 사이를 날기 시작했다. 속이 빈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는 투명하게 쨍쨍거렸다. 형인은 살짝만 건드려도 툭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통화 중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일단 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형인이 말했다. “지금 애들한테 전화해서 옮기라고 말하래. 살려야 할 거 아니냐고.”

   “지시에 가까웠어?”

   “명령과 지시 중에 뭐가 더 강한 말이지? 아니, 부탁해야 하는 거 아냐? 솔직히 말해서 폐강돼도 상관없는데, 나는. 내 강의도 아니고···, 삼십 분만 있으면 퇴근이잖아. 금요일 오후에 뭐 하는 짓이니.”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형인은 수화기를 들고 숫자 버튼을 눌렀다.

   수강생이 열 명 이하면 폐강해야 하는데 아슬아슬한 강의가 일곱 개였다. 해당 분반 강사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덩달아 담당 과목 조교인 형인도 바빠졌다. 최대 인원을 채운 분반 신청자들을 위기에 처한 반으로 옮겨가게끔 유도하는 게 형인이 해야 할 일이었다. ‘통합적 사고와 작문’은 1학년을 위한 강의이고, 34분반은 체대 대상이니 경영대 3학년은 다른 분반으로 가야 한다, 시스템상 수강 신청은 가능하지만 재수강 등의 사유로 뒤늦게 듣거나 전공별로 배정된 분반에 본인 전공이 해당하지 않는 경우 수강 불가가 원칙이다, 이는 국문과 내규니 옮겨 달라. 형인은 부탁과 강권이 묘하게 섞인 말투로 이동을 권했지만 신통치 않은 듯했다.

   “뭐? 알겠어요?” 통화를 마친 형인의 목소리에 불쾌함이 가득했다. 수화기 너머 학생이 짜증 섞인 말투로, 거기에 ‘겠’을 조금 높고 세게 발음한 듯했다. 형인의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내 앞으로 가져왔다. 번호 몇 개를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숫자 버튼을 누르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옛말은 틀렸다. 고통은 나눌수록 배가 될 뿐이었다. 누구는 알바 중이니 두 시간 후에나 통화가 가능하다고 했고, 툭 끊고는 아예 받지 않는 이도 있었다. 감정 소모를 몇 차례 더 하고, 국문과 사무실이니 연락 달라는 문자메시지도 서너 번 발송한 후 마지막으로 통화할 번호를 꼭꼭 눌렀다. 상대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고 나는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럼에도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분반을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곧장 상대의 일목요연한 입장 정리가 이어졌다.

   “제가 사 학년이긴 하지만 편입생이고 재수강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일 학년과 동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편입생이라면 삼 학년 때 들었어야 했지 않았나요?”

   “저기요, 제가 삼 학년 때 듣던, 사 학년 때 듣던 그쪽이 무슨 상관인데요? 그쪽이 뭔데요? 무슨 자격으로 전화한 거냐고요.”

   열 개의 전화번호 아래 적어둔 조윤정, 편입, 재수강에 동그라미를 그리던 손이, 듣던을 듣든으로 고치던 손이 멈췄다. 눈으로 책상 한쪽에 밀쳐놓은 친절 교육 자료집을 찾았다. 전화 응대는 친절하게 하라, 당신이 학교의 얼굴이다!를 높은 톤으로 강조하던 강사를 떠올리며 크게 숨을 들이켰으나 입을 떼는 건 쉽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직접 학생에게 연락하라고 하셨어요. 선생님 말씀이고, 저희는 상황을 정리해야 해서요. 안 그러면 저희도 어렵습니다.”

   “그쪽 사정이고요. 인원 적은 반으로 가서 학점 안 나오면 책임질 거예요? 근데 진짜 교수도 아니잖아요. 전임도 아니고. 17분반 최나라 강사님 지난달에 졸업하고 강의 맡은 거던데 그럼 시간강사라는 뜻이니까요. 암튼 월요일에 학적과나 교무처에 전화해볼 건데···.”

   “듣고 싶은 수업을 들어요, 그럼.”

   “아, 짜증 나. 그럼 왜 옮기라고 그랬어요? 이딴 대접받으려고 비싼 등록금 내고 학교 다니는 거 아니거든요. 위에 전화하기 전에 똑바로 하시죠.”

   나는 순간 흙먼지가 흩날리는 운동장에 떨어진 듯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번외 경기를 뛰는 선수, 게다가 이름표마저 없는 선수, 평생 천연 잔디 구장에서 뛰지 못할 선수, 그런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쟤 그쪽이랬지? 야, 여기서 박사과정 수료한 선배거든.” 옆에서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형인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씩씩거리던 형인은 이름과 전화번호, 메일 주소를 가지고 구글에서 조윤정의 트위터를 찾아냈다. 그를 내버려 두고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목련나무 주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바람결에 고요히 흔들리는 풍경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버티자. 대충 버티자.

   아까의 통화를 곱씹었다. 불쾌했으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 성적을 주는 사람이 아니므로 학점을 책임질 수 없었다. 게다가 영민한 학생이었다. 담당 강사가 지난주에 졸업한 것도 맞고, 그러니 시간강사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미리 검색해 본 걸까. 국문과 최나라의 논문이 제출된 시기를, 아니면 전년도 강의목록을 확인했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다니 놀라운 학부생이었다. 한 세계의 지위 체계를 읽어내는 눈이 나는 부러웠다. 훅 불어온 바람 탓에 풍경이 꽤나 시끄럽게 울어댔다. 나는 창문 앞으로 의자를 끌고 갔다.  아직은 찬바람에 뺨이 얼얼해졌다.

   물고기 모양의 풍경은 지난가을 조교를 시작하며 내가 직접 걸었다. 시간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강사법이 시행된 후 학위가 없는 나는 강의를 계속할 수 없게 됐고, 학과 행정조교를 하라는 지도교수의 말에 딱히 델 핑계가 없어서 계약서에 사인해야 했다. 논문과 졸업, 그리고 강의가 동의어인 세상에서 학위 논문도 없고, 그래서 졸업도 하지 못한 내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좋게 생각하면 이력서를 쓸 때 한 줄 쓸 수도 있고, 게다가 학교에 나오는 일이기도 했다. 도서관에 발을 들이는 게, 아니 학교까지 오는 게 쉽지 않은 날들을 보낼 때였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논문을 쓰기에도 나쁘진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1970년대 여성 작가 소설에 나타난 애도를 주제로 잡았다가 석사논문처럼 환대로 확장해보라는 지도교수의 조언에도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도서관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퇴근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가거나 카페나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과외를 하러 갔다. 논문은 내 일과에서 서서히 멀어졌고, 대신 풍경이 울 때마다 뛰쳐나가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어디론가 가고 싶을 땐 부러 창문을 열어 물고기가 울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결되는 괴로움은 아니었고, 그렇다면 풍경의 결말은 하나였다. 의자 위에 올라서자 휠들이 멋대로 돌았고 그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 형인이 언니, 하고는 뛰어와 의자를 잡았다.

   떼어낸 풍경을 저만치 있는 쓰레기통으로 던지려는데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지완 선배가 보낸 메시지였다. 혜령 선생님, 내가 어젯밤에 부탁했던 거 있잖아. 그거 학생들에게 안 보냈어요? 과제 때문에 빨리 연락해야 한다고 했잖아.

   메일 주소록 안 주셨는데요, 라고 썼다가 지웠다. 내려와 의자에 앉아 다시 메시지를 입력했다. 저는 선생님의 연구조교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연구조교가 배정되지 않은 강사님이고, 저는 대학원 업무 담당자입니다, 라고 썼다가 또 지웠다. 대신 편집 버튼을 눌러 대학원 윤지완 선배를 윤지완 선생님으로, 다시 윤지완 강사님으로 바꿨다.

   개강 전 마련한 통합적 사고와 작문 강사 모임 자리에서였다. 학과의 지원에 관한 것, 예를 들어 자료 복사 등이 미비하다는 지적을 듣다가 가만히 있기 뭐해 한마디 거들었다. 학과장님께 말씀은 드려보겠지만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라는 내 말에 분위기가 싸해졌고 그때부터는 입을 다물고 강사들의 말을 받아 적기만 했다. 화젯거리는 학생들의 수업 태도로 이어졌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또 입을 열어버렸다.

   “전 사무실 전화벨만 울려도 심장이 두근거려요. 어떤 억지를 피울지 몰라서요. 요즘 애들이란 표현은 싫지만 저도 감당 안 돼요.”

   침묵 위로 따갑고도 냉정한 시선이 느껴졌다. 박사논문은 시작도 못 했고, 모교에서 강의도 해본 적 없는 네가 우리의 고충을 아냐는 의미를 내포한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들이 종종 해오던 부탁이, 실은 하급자에게 내리는 지시 혹은 명령이 아닌가 싶던 의심은, 의심이 아니었다. 관계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수용하지 못한 벌이라 여기며 나는 남은 회의 내내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있었다.

   학과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배운 게 있다. 이사회와 총장 등 일부를 제외하고 학교의 갑은 차라리 학부생이고, 조교를 안 해도 돼서 갓 스물 넘은 아이들에게 ‘그쪽’으로 불릴 일이 없는 이들을 제외하곤 대학원 진학은 신분제의 가장 밑바닥에 자신을 밀어 넣는 행위였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여섯 시 알람에 눈을 뜨면 나는 청소도구다, 라고 되뇌어야 했다. 내 위치를 거기에 두는 게 속 편했다. 학교, 교수, 강사, 학생이 쏟아내는 불평, 불만, 짜증, 화를 잘 담아야 하는 쓰레받기는 을도, 병도, 심지어 정도 아니었다. 쓰레기를 던지는 그들도 누군가의 을이라면 나는 주요 관계망에서 벗어난 비존재였다. 대학원의 사두품이, 다 같은 사두품이 아니라는 걸 시오도 알고 있을까.

   시오.

   메시지 창을 닫고 인터넷 창을 열어 시오를 입력했다. 방콕 에라완 사원 앞에서 폭탄이 터진 후로 종종 시오를 생각했다. 태국 정부가 위구르족을 중국으로 돌려보낸 데에 따른 터키인들의 보복일 수도 있다는 테러에서 한국인 희생자는 없었다. 그래서 별일 없겠지 싶었으나 걱정과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검색될 리 없다는 것을, 희생자가 있다 한들 이름이 명시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오를 검색하곤 했다. 그건 내 습관이었다.

   늘 실패하고야 마는 습관은, 오늘은 달랐다. ‘-하시오’가 나오던 평소와 달리 다큐영화제, 감독 시오가 굵은 글자로 뜨는 기사가 검색됐다. 이게 시오라고? 설마. 하지만 ‘당신의 단어’가 아닌가. 드르륵, 의자 밀리는 소리가 내 귀에마저 거슬리게 울려 퍼졌다. 시계는 막 7시 반을 가리켰다. 형인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급히 짐을 챙겼다. 서두른다면 늦지 않을 것이었다.


⟨인터뷰 : 당신의 단어⟩


   나는 인도 다람살라 맥그로드 간즈에 있는 티베트인의 망명지를 찾았다. 중동 분쟁 지역의 천막 난민캠프를 떠올리지 말라. 이곳은 형성된 지 육십 년이 넘었고 세월을 머금고 단단하게 뿌리내렸다. 이곳에서 양철 지붕 너머로 붉은 노을이 번지던 오후에 텐진을 만났다.

   텐진 : 무슨 말을 해야 하죠? 내 단어가 뭔지 모르겠어요.

   시오 : 당신이 하고픈 말이요. 텐진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일 수도 있고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니면 당신이 원하고 꿈꾸는 것일 수도 있고요.

   텐진 : 잘 모르겠어요. 나에게 그런 단어가 뭘까요?

   시오 : 있잖아요, 난 저 룽가가 좋아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하얀색, 색색의 직사각형 천이 이어진 걸 보면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물론 저기 적힌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요. 아마도 부처님의 말씀이겠죠?

   텐진 : 그럼 당신의 단어는 룽가예요?

   시오 :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텐진 : 근데 당신도 불자인가요?

   시오 : 난 절에선 부처님에게, 모스크, 여성 출입이 가능한 곳이 있다면 그곳에선 알라에게 기도해요. 물론 힌두교 사원도, 자이나교 사원도 들어가고요.

   텐진 : 하하하, 그게 뭐예요. ···잠깐만요. 이거 봐요. 내 망명자 등록증이죠. 망명 정부에서 발급해 준 거예요. 오 년에 한 번씩 갱신해야 하죠. 나는 삼 세대에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여길 벗어난 적도 없죠. 그래서 당신이 부러워요. 여기저기 다닐 수 있는 사람들요.

   시오 : ···혹시 돌아가고 싶나요?

   텐진 : 제가 돌아갈 곳이 어디죠? 저기요, 나는 그곳을 그리워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니에요. 여기도 싫고 난민이니 망명자니, 그런 것도 지긋지긋해요. 그냥 멀리 떠나고 싶어요. 낯선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먹고 특별한 사람을 만나고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어요. 아, 그러니까 내 단어는 저거예요.


   텐진의 시선이 닿은 곳에 지프 몇 대가 모여 있고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이 오고 갔다. 룽가 뒤로 붉은 태양이 사라지고 사위는 푸르게 어둑해져 갔다. 터미널, 시오가 얻은 첫 번째 당신의 단어였다.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봄이었다. 그날 나는 중앙도서관 100번 대 철학과 800번 대 문학 서가를 오가며 종일 시간을 보냈다. 목과 허리는 뻣뻣하고 눈도 뻑뻑해서 잠깐 쉴 생각에 지하 휴게소로 내려갔다. 과제와 시험 준비로 분주한 학생들을 둘러보다가 캔 커피를 하나 샀는데 문득 이 휴식이 가당키나 한가 싶어졌다. 논문에 쓸 만한 키워드도, 참고할 만한 구절 하나도 얻지 못한 날, 달달한 것은 기분을 낫게 해주지 못했다. 빈 캔을 버리려는데 쓰레기통 앞 게시판에 붙은 영화제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독특한 무늬로 직조된 붉은 옷을 입은 이들 아래 적힌 ‘티베트’는 흥미롭지 않았으나 무료 상영이었다. 게다가 멀리 갈 필요도 없는 게 후문 근처 영화관에서 하는 영화제였다. 성과 없는 하루의 끝자락, 나는 피로와 자책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이런 주제의 영화제에 얼마나 오겠나 싶었으나 예상과 달리 영화관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미세한 틈도 없이 겹치고 겹친 말들에 둘러싸이자 피로는 배가 됐다. 그냥 집에 갈까 하는데 누군가가 나를 아는 체했다. 이따 보자, 하고선 반대편 좌석으로 가버린 시오를 보다가 엉겁결에 자리에 앉았다.

   중국의 티베트 침공, 그 역사적 배경과 현재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사실, 지겨웠다.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깜박이며 끝나기만을 기다리는데 나도 모르게 스크린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다큐멘터리는 마지막으로 티베트를 탈출하는 사람들을 담았다. 풀 한 포기 없는 모래 언덕만 넘으면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그가 이끄는 망명 정부가 있고, 그래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인도 군인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티베트인의 월경을 막았다. 나는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세계에 없던 이들로 인해 눈물을 흘렸고, 목숨 걸고 국경을 넘는 이들 앞에서 스스로를 질책했다. 저들을 봐, 생존과 존엄의 문제야. 너는, 너의 고(苦)는 고작 아닐까. 고작 석사논문이잖아. 배부르고 철없는 투정이라고. 87분이 지나는 동안 자책의 색은 확연히 달라졌다.

   월경은 실패했고 다큐멘터리는 끝났다. ‘이따 보자’가 마음에 걸렸으나 언제 밥이나 먹자와 비슷한 인사려니 여기고는 상영관을 빠져나가려는데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뒤를 돌아보니 시오였다. “이따가 지금인데.”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어어, 만 반복했다. 시오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오른쪽 검지로 내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톡톡, 밥 먹으러 가자.” 그 가벼운 손짓에 어쩐지 이스트를 넣은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던 어둑한 기운들이 펑, 터져 버릴 듯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서너 발자국 앞서가는 시오를 따라 걸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라멘 식당에 발을 들여놓은 후였다. 빈자리는 벽을 보고 길게 놓인 테이블뿐이라서 나와 시오는 나란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테이블 주위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 사람, 시오는 누구인가. 오가다 마주치면 가볍게 묵례는 했으나 대화해 본 적 없는 일 년 선배, 학부 학번은 같다고 들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말 한마디 나눈 적 없는 어색한 사이. 흠흠, 헛기침만 연신 내뱉었다. 그렇지 않아도 길고 좁은 실내는 낮은 조도의 주홍빛 때문인지 더 갑갑하게 느껴졌다. 하필이면 음악도 없었다. 뭐라도 흘러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아까 들었던 티베트 전통 음악이라도 좋으니 제발. 

   내가 속으로 주인의 센스 없음을 탓하는 동안 시오는 상체를 20도쯤 뒤로 젖힌 채로 벽에 붙은 메뉴판을 천천히 읽었다. 직사각형 나무 조각에 새겨진 글자에 시선을 두고 머리를 까딱까딱 흔들면서, 옆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세차게. 내 오른손도 덩달아 시오의 등 언저리에서 머뭇거렸다. 시오가 시오는 없네, 하고 작게 중얼거린 후에야 움직임은 멈췄고, 나도 낯선 역의 1번과 2번 출구 앞에서 덜 헤맬 방향을 고민하는 사람처럼 굴던 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주방 쪽에서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렸다. 먼저 입을 뗀 건 시오였다.

   “나는 미소라멘. 너는?”

   “···나도 같은 거.”

   “내 이름은 시오야, 라고 말하면 진짜냐고 묻는 일본인도 있어. 세상에 시오라멘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부모님은 다른 이름을 택했을까? 세 개의 선택지가 있었대. 영복, 동강, 시오. 복실이나 똥깡이로 불릴 바에야 시오가 낫다 싶었나 봐. 시오가 시기와 미움을 뜻한다는 걸 안타깝게도 엄마와 아빠는 몰랐어. 배움이 많지 않은 분들이거든. 그런 선택지를 준 사람 잘못이지.”

   갑작스레 쏟아내는 말들에 뭐라 대꾸할지 고민하다가 아닌 줄 알면서도 혹시 시오니즘의 시오냐고 물었는데 시오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지 아니고 에스 쓰는데. 지오니즘 아니고요, 시온 아니고요, 시오입니다.”

   짐작대로 시오는 유대교를 믿지 않았고, 교회나 성당에 나가지도 않았다. 딸이 시험장에 있던 시간, 시오의 엄마는 오대산 골짜기에 있다는 작은 암자에서 1교시 언어영역 시간에 절을 하고 잠깐 쉬었다가 또 2교시 수리영역이 끝날 때까지 절을 하고는 현미밥과 소고기뭇국에 깻잎멸치찜과 연근아몬드조림을 곁들여 먹었다고 했다. 딸에게 싸준 것과 같은 도시락이었다. 소화에 무리가 없고 두뇌 활동에 도움을 주는 식사를 마치고-물론 소고기와 멸치는 골라내고 먹지 않았다-, 탐구와 외국어영역 시간에도 정성을 다해 부처와 보살들을 부른 엄마는 꼬박 일주일을 앓아누웠다. 들인 정성에 비해 성과는 미비했고 시오는 혹독한 일 년을 보내야 했다.

   “재수했으니까 언닌가, 그런 생각 금지. 나 빠른.”

   상대방을 고려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 화법이었다. 나는 일부러 벽에 튄 얼룩에 집중했다. 화용 언어에 약간 부족함이 있는 이와 무슨 얘길 해야 하나 싶었다. 옆자리 대화라도 들리면 좋으련만 혼자 식사 중인 남자와 여자는 앞에 놓인 라멘과 휴대폰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학과 사람들의 입과 입을 떠도는 얘깃거리에서 시오는 아렌트였다. 인문관 복도를 지나가는 시오를 가리키며 나라 선배가 쏙닥거렸다. 스터디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다가 옆에 있던 지완 선배에게 당신이 바로 아이히만이에요, 라는 말을 뱉은 후로 시오는 아렌트의 어깨에 앉게 됐다고 했다. “물론 지완 선배가 생각이 없긴 해. 별일이 다 있었다. 발제 때문에 교수님한테 깨질 수는 있지. 근데 다음 시간에 다시 해오라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일걸. 거기서 끝났으면 지나갈 얘긴데 그 소리를 듣고도 다음 사람 발제할 때 핑크색 펜으로 다이어리를 꾸미다가 강의실에서 쫓겨난 거지. 시오 쟤, 사회성이 떨어지긴 해도 나쁜 애는 아니고. 좀 특이하지.”

   나는 아네트 베닝과 이히 리베 디히를 떠올렸다가 멋쩍게 웃고 말았다. 시간은 흘렀고 나도 타인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이 없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아이히만과,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그를 통해 평범한 모습의 악을 고찰한 책을 안다. 나치를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시민권을 얻기까지 난민으로 살아야 했던 유대인 철학자도 안다. 맞다, 시오 아렌트. 그 사실을 인지하고부터 나는 침묵을 물리쳐야 하는 숙명을 지닌 수다꾼이라도 되는 듯 바삐 떠들어댔다.

   “···네 논문은 잘되고 있니? 내 논문은 산으로 가서 겨우 평지로 끌어내렸더니 도리어 심해로 곤두박질쳤는데, 다큐 보고나니까 논문으로 인한 고통은 별것 아닌 게 되네. 어떤 힘듦은 감히, 그래 감히가 되는 거 같아. 그들 앞에서 감히 이게 뭐라고.”

   이 정도면 아이히만으론 보이지 않겠지. 안도하며 작게 숨을 내쉰 순간, 시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게 객관적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영역인가? 고통은 절대적이진 않아, 적어도 내게는. 네가 느낀 감정을, 슬픔을, 좌절을 평가절하하지 마. 나도 감히 말하는데 네가 감히 안 그랬으면 좋겠어. 근데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책임도 없는 걸까?”

   코끝이 시큰해지더니 눈가가 촉촉해졌다. 하지만 눈물은 건조한 안구를 겨우 달래고는 사라졌다. 뜸을 들이며 뱉은 ‘과연’ 때문인지 문어체처럼 들리는 말에 요즘 『타인의 고통』을 읽나 싶었다. 의자 아래 바구니에 담긴 시오의 가방을 슬쩍 봤지만 수전 손택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중국을 상대로 싸울 거야?”

   아차, 싶었다. 별생각 없이 폭력과 전쟁을 일상으로 받아들인 사람처럼 비쳤으면 어쩌나. 하지만 다들 아이히만에게 얼마간 지분을 내주고 살지 않는가.

   “넌 국문과가 아니었을 것 같다.”

   “맞아, 나 국문과 아냐. 여기 출신도 아냐. 너 같은 사람들 때문에 대학원 생활 만만치 않았다.”

   “혜령 씨는 사두품이구나.”

   심드렁한 표정과 지나치게 부드러운 말투에 나는 눈과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분명 사, 두, 품이었다. 시오의 분류법에 따르면 지도교수의 애제자로 분류되는 소수만이 성골이 될 수 있었다. 동 대학 동 전공은 진골, 동 대학 타 전공은 육두품, 타 대학 동 전공은 오두품, 그리고 타 대학 타 전공은 사두품. 오리알이 될 바에야 다른 강에 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전공만 바꿔 진학한 시오는 육두품이었다. 편입이라는 변종도 있으나 그렇다고 삼두품으로 분류되진 않는데 어차피 사두품 이하로는 다 비슷비슷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강에서도 오리알은 될 수 있다는 연설을 마친 육두품이 분주히 움직였다. 테이블 밑 서랍을 열어 냅킨을 꺼내더니 가운데를 꼬아 리본을 만들고 그 위에 수저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이 세계의 최하층에게는 지나치게 정중한 테이블 매너였다.

   김이 올라오는 그릇 두 개가 우리 앞에 놓였다. 시오는 차슈 하나를 입에 넣고 한참을 오물거렸다. 나는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진하고 묵직한 국물을 싫어하면서 이걸 왜 먹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고작 사두품밖에 될 수 없는데 ‘고’의 시간을 보내는 이유도 함께.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테이블 위로 침묵이 흘렀다. 오래가지는 않았는데 시오의 흥얼거림 때문이었다. ···시오의 시오는 시오라멘의 시오도, 시오니즘의 시오도 아니지. 물론 시오지심의 시오도 아니야. 시기와 미움의 시오가 이름일 리가 있겠니. 시오의 시오는 착할 시에 대낮 오, 그렇다고 선한 낮은 아냐.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날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면을 몇 번 씹지 않고 삼킨 탓에 속이 불편했다. 명치 언저리를 살살 문지르다가 그만 웃어버렸다. 밥 먹자는 시오의 제안을 덥석 문 이유를 알 듯도 했다. 그러고 보니 가로등을 보지 않고 곧장 집으로 들어왔었다. 그즈음 나는 켜졌다와 꺼졌다를 반복하는 가로등 아래서 서성이곤 했다. 고장 신고를 하는 이가 없길 바라며 한참을 있다가 아무도 없는 방으로 돌아가는 게 마지막 일과였다.

   노래처럼 들렸던 시오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다짐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신분제 사회라면 최선을 다하지 않겠다고. 내 자리를 명확하게 깨달은 후 가로등 아래를 서성이는 일은 서서히 줄었다. 고장 신고가 들어갔는지 가로등이 수리됐을 때 심적으로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시오와 나, 우리는 아무 때나 메시지를 주고받고 종종 만나 밥 먹는 사이가 됐다.


   “저는, 숨 쉬고 있었습니다.” 논문은 왜 아직 이 모양이냐, 대체 뭘 한 거냐는 지도교수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으나 시오는 답했다. 논문을 좀 못 썼기로서니 이렇게 질책받을 건 아니지 않느냐는 의견을 피력한 후 시오는 위대한 철학자의 이름을 빼앗기고 그냥 이상한 애가 됐다. 같은 질문을 받고 고개를 숙인 채 연거푸 죄송하다고 말한 나는 논문을 썼다. 선배들에게 딱딱한 검은 책을 건네며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이 불타거든 과하게 튼튼한 냄비 받침을 재로 만들기 위해 내가 저지른 일인 줄 알라는 말도 덧붙였다. 논문을 끝낼 수 있던 원동력이 시오의 묘하게 설득력 있는 분류법이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논문 전달을 끝으로 나는 학교를 떠났고, 곧장 수험 생활을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교사가 되길 원하는 부모님의 성화에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으나 실상 내 욕망에 따른 행보였다. 가난하고 불안할지라도 배우고 고민하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배우며 고민하는 삶에 수반되는 불안정은 늘 두려웠다. 더군다나 사두품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박사과정을 시작한들, 학위를 따고 졸업장을 손에 쥔다 한들 사두품은, 그래도 사두품일 터였다. 신분 없는 세계로 갈 테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살 테다, 노량진 학원가에서의 내 목표였다.

   많이 늦은 듯해서 조바심도 생겼으나 학부 동기 중에는 합격한 이보다 수험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이 더 많았다. 나는 그걸 위안 삼으며 자신 있게 책을 펼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손님과 어머니』에 흐르는 감정을 불륜으로 설명하는 수험서를 덮어야 했다. 수사 ‘하나’에 복수접미사 ‘들’을 붙일 수 없는 건 무의식적으로 획일화를 주입하는 거라 따져댔다. 그때 밤낮으로 꿨던 꿈속에서 나는 ‘하나들’이 자유롭게 통용되는 세상에서 사는 자였다. 당연하게도 임용고사 1차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소식을 전하자 엄마는 수고했다며 푹 쉬라고 했는데 아빠는 달랐다. 약해 빠져서, 간절함이 없어서라는 말을 듣다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의 무늬들을 헤아렸다. 꽤나 어지러운 일이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다 보니 깜박이던 가로등이 떠올랐다.

   인쇄소에서 막 나온 논문을 건네며 나는 대한민국에서 스물일곱이면 늦은 거라고 말했다. 시오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인생 이모작을 시작할 때라며 세 개나 보유한 중등교원 자격증을 써먹으라고 단호하게 말했는데 그렇게 말하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휴대폰을 들고 새겨듣지 않았어야 했는데. 너 때문이야, 라고 썼다 지우고는 망해버린 게 분명한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라고 적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8개월이 너무나도 아까웠던 때, 스물여덟에게 한없이 미안하던 순간 나는 시오를 찾았다.

   두어 시간이 지난 후 답이 왔다. 그곳은 춥고 이곳은 따사롭지. ···뜨거운가? 망한 자여, 실패한 인생이여. 이리 오렴, 내게로 오렴. 도서관을 불태우겠다는 계획은 당연하게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책 위로 먼지가 쌓이는 동안 아이히만은 매우 빠른 속도로 박사논문을 썼고 모교와 수도권 4년제 대학교에 시간강사로 출강했다. 아렌트는, 국문과의 아렌트는 사라졌다.

   육두품과 사두품의 말로는 다르지 않았다. 시오는 학교를 떠났을 뿐만 아니라 한국을 떠났다. 인근 나라를 잠시 방문하는 방식, 비자 런으로 90일짜리 관광 비자를 갱신하며 태국 방콕 여행자 거리 근처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몇 달째 지내는 중이었다. 이제 시오를 도망간 오리 새끼나 이상한 애, 육두품으로 부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나는 시오의 이곳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곧장 예약했다.

   며칠 뒤 우리는 방콕 수완나폼 공항 입국장에서 만났다. 까무잡잡하게 탄 시오가 살짝 어색하기도 했고, 여행을 준비하느라 바닥난 통장이 떠오르면서 잠깐 후회도 됐지만 택시에 앉아 야자수와 읽을 수 없는 글자들로 채워진 간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시오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누워버렸다. “지금 몰려오는 긴장과 피로는 오래 묵은 거구나.” 그렇게 말하는 시오를 나는 빤히 바라봤다.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시오는, 그런 시오의 얼굴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생기가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도 모르게 집에서 뭐라고 안 하냐고 물었다. 시오는 부모님 탓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시오는, 명은 긴데 역마살이 있대. 십 년 만에 얻은 자식이라 역마살은 ‘그깟’이었지 뭐. 어쨌거나 시오는 낯선데 또 이국적이어서 자신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나 하는 기대도 했으나 방향과 규모를 예상하지 못한 거지. 맥주 마실래?”

   몇 시간 후 스튜디오 바닥은 표범과 코끼리가 그려진 맥주 캔으로 가득 찼고, 우리는 그사이에 널브러져 있었다. 시오가 일어나 창문을 열었는데 구름이 잔뜩 낀 검은 밤하늘에 망고 같은 노란 달, 아까 몇 개나 깎아먹은 망고 색깔을 닮은 달은 보이지 않았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싫었지만 내버려뒀다. 달도 별도 없는 창 너머를 응시하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오래 바라보다가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오야, 여기서 혼자 지내는 거 위험하지 않아?”

   “한국에 있는 우리 집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니? 저녁 준비하다 칼을 떨어트려. 발등에 꽂히진 않았는데 튕겨 나간 칼이 동맥을 찢어 과다출혈로 가. 강도가 들었는데 맞서다가 목을 졸릴 수도 있지. 넘어져서 부러진 뼈가 폐를 공격할 수도, 가스 밸브를 잠그지 않아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갈 수도 있고. 또 이중으로 책을 쌓아둔 책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압사당하거나, 아니면 책이 떨어지면서 뇌에 손상을 입혀 그 자리에서 사망에 이르거나. 네 논문이면 정말 짜증나겠다. 야, 한국이 제일 위험해. 주적 북한이 삼대 세습을 하면서 건재하잖아. 어, 얼굴 굳어졌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근데.” 시오는 손바닥을 세워 내밀었다. “걱정은 경제적 지원과 함께요. 마음만은, 사양합니다.”

   그 말에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시오는 화용에 문제가 있고, 나는 내 멋대로 생각했다. 시오가 너무 멀리 있는 달을 욕망하는 것 같다는 착각, 이곳에서의 시간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오만, 건방진 마음들을 지워내야 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는데 옆에서 시오가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스탠드를 켜자 꿉꿉한 어둠 속의 그가 순간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게 두려워서 눈을 감아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자 카메라를 든 시오가 내게 물었다. 

   “혜령 씨, 당신의 단어는 무엇입니까?”


   터미널을 자신의 단어로 뽑은 텐진은, 딱 거기까지만 가능했다. 터미널에 앉아서 오는 이들과 가는 이들을 바라볼 수는 있었으나 자신이 오고 가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눈을 얻었다. 텐진은 자신의 목소리로 시오가 만난 이들의 단어를 전달했다.

   맥그로드 간즈를 떠난 시오와 텐진의 ⟨당신의 단어⟩은 터키 이즈미르의 고성(古城) 근처에서 삼십 대 후반의 한 여자를 만났다. 그는 엄마, 그리고 세 명의 이모들과 함께 왔는데 여행인지 노예 체험인지 잘 모르는 채로 며칠을 보내다가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던 중 인터뷰에 응했다. 여자는 당신의 단어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곧장 균형과 조율을 뽑았으나 잠깐 고민하더니 감튀!로 바꿨다. 느낌표는 꼭 붙여달라는 말과 함께. 마음이 가라앉는 날에 감자튀김을 먹으면 조금은 위로 떠오르는 기분이 든다며, 웨지도 나쁘진 않지만 기본 스타일인 프렌치프라이를 제일 좋아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터뷰를 마친 감튀! 씨 앞에는 식은 웨지 감자가 서너 개가 남아 있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는 화산을 보겠다며 새벽 세 시에 혼자 산길을 걷던 이십 대 후반의 여자를 만났고, 그에게서 심연을 얻었다. 심연 씨는 정작 화산의 분화구를 들여다보길 주저했는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 한들 그게 심연이겠냐며 자조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함께 여행한다는 메이트 구리 씨를 자랑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구리 씨는 납작하고 보들보들한 초록색의 개구리 인형이었다.

   자바섬을 떠나 발리섬으로 가는 페리 안이었다. 시동이 꺼진 버스의 제일 뒷좌석에 앉아있던 시오는 짠 바닷바람을 맞으며 앞자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장암 3기 선고를 받았으나 병원에서 눈 감기 싫어 여행을 시작한 오십 대 후반의 남자는 오해가 화산으로 이끈 힘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오해 씨는 출발 직전 대장의 종양이 실은 염증을 오진한 것임을 알게 됐고,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울컥하는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은 아닌 여행을 하는 오해 씨의 이야기 후에 심연 씨가 재차 등장했다. 발리 옆에 위치한 작은 섬 누사 렘봉안에서 만난 심연 씨는 자신의 단어를 수정하고 싶다고 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거쳐 파키스탄 훈자, 살구나무의 마을에 가고 싶지만 출발지인 카슈가르가 있는 위구르 신장 지역의 정세 불안으로 갈 수 없다고, 훈자는 괜찮겠지만 파키스탄도 만만치 않다며 별 탈 없이 여행할 수 있을 정도의 안정을 원했다. 그건 곧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도 최악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평화까진 아니라도 최악은 피할 정도의 안정, 시오와 텐진이 만난 열세 번째 단어였다.


   일주일 동안 시오와 함께 싸얌과 스쿰윗, 사톤과 칫롬, 펫차부리와 아리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를 걸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이름들이 기억에서 흐릿해질 무렵 나는 새 학번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석사와 박사를 같은 학교에서 하는데 입학금을 또 내야 한다는 게 선뜻 이해되진 않았으나 세 번 내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고, 학번을 새로 부여하고 관리하는 비용으로 여기기로 했다.

   과정을 시작하고 나서는 발제와 스터디 준비로 분주하게 지냈다. 학원과 과외 수업 자료를 수정하며 바삐 지냈다. 피곤한데도 잠에 들지 못하는 밤들이 많았고, 그럴 땐 일어나 창문을 열고 가로등을 봤다. 가로등 앞에서 생각은 늘 방콕에서의 밤에 멈췄다. 그날 시오가 던진 질문에 나는 잠깐 숨이 막혔다. 불합격이나 실패가 아닌 환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석사논문에서 가장 범박하나 무엇보다 중요한 단어, 내 논문의 키워드 환대. 시오의 질문 덕분에 나는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오 역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 달 만에 고향 집에서 뛰쳐나와-물론 본인은 쫓겨났다고 표현했지만- 내게 왔다. 낡아빠진 속옷, 줘도 안 가질 꼬질꼬질한 티셔츠와 리넨 셔츠, 바지 몇 벌이 전부인 40리터 배낭과 함께.

   “너의 단어를 실현할 시간이야.” 내가 쉽사리 알아듣지 못하자 시오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환대를 베풀어야 할 때야.”

   “환대 같은 소리한다. 절박함은 어디 있죠? 더군다나 오롯이 너의 선택이거든요.”

   “이름 때문이라니까.”

   어쨌거나 동거가 시작됐다. 집에 들이닥친 다음 날부터 시오는 나를 깨워 학교에 보내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식사까지 준비했다. 계란말이와 콩나물국, 색색의 샐러드가 있는 저녁 식사는 오랜만이었다. 다진 채소는 넣지 않고 조미 김만을 넣은, 촘촘하면서도 부드럽게 말린 계란말이는 좋았으나 마냥 좋진 않았다. 방은 좁았고, 내가 없는 사이 어디 서랍이라도 뒤지면 어쩌나 불안했다.

   보름쯤 지나서였나, 연달아 붙어 있던 과외를 마치고 돌아온 밤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노트북에서 흘러나온 빛으로 둘러싸인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시오는 티 테이블 앞에 동그랗게 앉아서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슬쩍 보니 방콕에서부터 붙잡고 있던 단어 이야기였다. 흠흠, 내가 낸 인기척에 그제야 시오가 고개를 돌렸다.

   “혜령 씨 왔어? 오늘도 수고했어.”

   “방콕에서부터 궁금했는데 왜 단어를 수집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이야?”

   “수집 아닌데. 이거 선물이야. 바깥이 궁금한 어떤 이를 위한 선물. 지지나 응원에 더 가깝나? 근데 뭐든 상관없지. 아니지, 의미가 없다 한들 뭐 어때.”

   나는 털썩 주저앉아 시오가 편집하는 영상, 의미가 없다 한들 상관없는 단어 이야기를 봤다. 요 며칠 쌓인 고단함이 이렇게라도 흘러가길 바라며. 여행자들의 감상적이고 자기애에 취한 말들 끝에 또래로 보이는 외국인이 등장했다. 여자의 보잉 선글라스 위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시오가 비쳤다. 그가 물었다, 그럼 당신의 단어는요? 카메라는 쨍쨍거리는 하늘과 잔잔한 바다를 한동안 비췄다.

   그날 그곳에서 시오는 잔인한 것은 바다가 아닌 인간이라고 결론 내렸다. 생각하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던 시오는 해변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자 그들은 쉿,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다음 날 오전 해변에 나타난 침묵의 수거자들을 시오는 말없이 따라 걸었다. 얼마 되지 않아 얇은 비닐봉지는 쓰레기로 가득 찼다. 적도의 태양이 정수리에 내리꽂힐 즈음 그날의 수거는 끝났다. 그제야 수거자 중 한 여자가 물었다. “혹시 한국인입니까? 내 말은 남한 사람이냐고요.”

   시오는 평소처럼 북한에서 왔다고 농담할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는 무릎을 감싸 안고 울기 시작했다. 여자는 무릎을 꿇어 두 팔로 시오를 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들은 시오의 방으로 갔다. 텔레비전엔 몇 개의 외국 채널이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KBS World였고 시오와 사람들은 희미하게 남은 희망이 수면 아래로 잠기는 것을 함께 봤다.

   영어 방송이라 시오보다 더 정확하게 알아들은 그였지만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접한 시오보다 잘 알 수는 없었고,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인정은 있었으나 결국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은 자도 행복한 척해야 할 것만 같은 휴양지에서 시오의 안위를 물었고, 슬픔과 좌절, 무기력을 함께 나눴다. 그것만으로도 그때의 시오에게는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에 거스러미 같은 게 이는 듯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영상은 시오의 질문과 그의 답으로 끝났다. 시오가 물었다. “당신은 선한 사람인가요? 그가 답했다. “저는 그다지 선하지 않아요. 그저 마음에 남는 게 싫은 겁니다. 그뿐이죠.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그럼 당신의 단어는요?” 묘한 미소를 지으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오에게 사람들의 행방을 물었다.

   “집에 갔지. 갔겠지? 가고 있거나.”

   “넌 언제 돌아올 건데?”

   “나 한국이잖아요.”

   “다 돌아온 거 맞아? 아니 왜 자꾸 밖으로 나도는 건데?”

   “난, 나는 세상으로 숨은 거야.”

   시오는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표정을 짓고는 바닥에 깔린 러그에 벌러덩 누웠다. 하늘거리는 바지 위에 촘촘하게 그려진 코끼리들이 출렁거렸다. 내게 들릴까 말까하는 작은 목소리로 돌아가서 단어를 모아야지,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도 그곳에, 머물 곳을 내준 환대에 대한 답례 위에 누웠다. 감사하게도 선물은 마음에 들어. 미안하게도 너의 단어는 낭비가 아닌가 싶어. 의미 없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낭비하는 게 아닐까.

   그럼 나는.

   이모작에 시간과 열정을 헌납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니 내 단어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아니다. 심장이 바삐 뛰기 시작했다. 인풋은 있는데 아웃풋은 없는 회로에 갇혀 내가 일 년을 망쳤다면 시오는 더 오랜 시간을 낭비했다. 심장이 뛰는 건 불안 때문이 아니라 안도감이 데려온 아드레날린 탓이었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시오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몸을 일으켜 세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시오의 코끼리들을 만질 수는 없었다. 시오가 짐을 꾸려 내 방을 떠나고, 다시 한국을 떠난 후 많은 밤들에 내가 잠들지 못했던 것은 눈앞에 아른거리던 그 코끼리들 때문이었다.


   ⟨당신의 단어⟩ 속 시오는 카메라를 들고 홍콩으로 갔고, 텐진 역시 목소리로 여정에 동행했다. 시오와 텐진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소호의 쌀국수 가게였다. 길게 늘어선 줄에서 시오는 주말여행을 온 또래의 한국인들을 만났다. 헝, 하고 한 박자 쉬었다가 살짝 콧속으로 빨아들이는 식으로 ‘컹’을 발음하는 그들은 각각 방황내일 없음을 자신의 단어로 뽑았다. “방황하는 사람이랑 내일이 없는 사람이니까 서로에서 부담 없네.” 그렇게 말하며 방황 씨는 온종일 끓여댄 소고기에서 나온 기름으로 미끈해진 바닥을 하얀 운동화로 살살 쓸어댔다. 내일 없음 씨는 연두색 플라스틱 젓가락을 내밀면서 국수나 먹으라고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식사를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들은 높은 조도의 핑크빛을 뿜어내는 간판을 발견했고,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자꾸만 흔들려서 포기해야 했다. 다음 날 시오는 내일 없음 씨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날빛을 머금고 선명하게 찍힌 홈리스(homeless)는 오늘부터 나의 단어라는 설명과 함께 왔다. 화면은 까맣게 페이드아웃 됐고 시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령 씨, 당신의 단어는 무엇인가요?”

   스크린 위로 초록색 양말을 들고 웃고 있는 시오와 빨간 니트를 어깨에 두른 내가 나타났다. “이거 써도 되는 거지?” 장난스런 말투로 시오가 물었다. “그래라.”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극장 스피커를 통해 듣는 낯선 음성에 얼떨떨했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심드렁하게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잠깐의 적막 후 시오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단어는요? 아, 아, 아.” 아, 아, 아, 허밍을 듣는 순간 나는 기억의 도래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너의 질문은 찾았니?” 그 질문 앞에서 나는 한없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직후였으니까 설 연휴였을 것이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물꼬를 튼 이는 작은아버지였다. 그는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언제까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부모 피를 빨 거냐며 얼른 취직해서 시집이나 가라고 했다. 옆에서 큰어머니가 맞장구쳤다. 여자는 배운 년이나 못 배운 년이나 동네 사우나에서 발가벗고 있으면 다 똑같다, 아파트 쉼터에 가봐라, 소학교도 못 나온 할마시나 여고 나왔다며 으스대는 할마시나 자식 자랑으로 입이 마를 날 없고 남 험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말했다. “집에 데리다와 지젝을 놔드려야겠네요.” 대리석과 자작나무의 이상한 조합을 떠올릴, 아니 세상살이 무서운 줄 모르고 공부만 하던 조카가 살짝 돈 건 아닌지 의심할 어른들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충고를 가장한 잔소리는 돈과 함께 해주세요. 마음만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말버릇이 그게 뭐냐며 엄마에게 등을 맞았다. 친구들은 하나둘 며느리나 사위를 얻었고 아직 손자가 없는 엄마는 자랑할 구석 하나 없는 답답한 딸만 있을 뿐이고, 내 원룸 보증금은 부모님의 노후 대비 통장에서 나왔다. 과외를 몇 개 뛰고 논술 첨삭을 얼마나 해야 보증금을 반환할 수 있는지 계산하니 어지럼이 일어서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갈 곳은 없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나는 걷고 걸었다. 문 닫힌 분식집과 카페를 지나서, 문은 닫혔는데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한 조명 가게도 지났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문이 열린 패스트푸드점을 발견했다. 문을 열자 직원들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버거킹입니다.”

   버거와 음료 주문을 마치고는 빈자리에 앉아 아까 했던 말을 곱씹었다. 데리다를 읽어댄들 무조건적인 환대를 베풀 아량도, 지젝을 읽어댄들 타자의 욕망을 침범하지 않을 자신도 없었으나 그것들이야 책에서 하는 말이기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글과 삶이 일치되는 경우는 드물 테고, 내가 그 미약한 확률에 뽑힐 가능성 따위는 없었다. 학위를 딴다 한들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인서울은 바라지도 않고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면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1호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며 경기도와 충청도를 떠돌아야 한다. 아니지, 불러만 주면 감사할 일이었다. 골품제를 버리고 새로운 신분제를 택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나는 무신분의 사회를 꿈꾼 게 아니라 육두품보다 더 위로 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시도는 실패했고 경로를 변경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차라리 시오가 현명했다. 내가 갈팡질팡하는 동안 어쨌거나 일관된 행보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며칠 전 시오는 고향의 맛이라며 버거킹 와퍼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진을 보내왔다. 다국적 기업의 음식을 먹고 자란 이에게 고향의 맛이 차지한 영역은 넓었다. 태국 산간 마을에서 머물다가 지난주부터는 방콕 변두리에서 지낸다며 스튜디오 사진도 보냈는데 나쁘지 않았다. 학교 앞 창문도 없는 고시원 방과 비슷한 가격이었으나 크기나 방음 등을 따져볼 때 거주의 질은 훨씬 높았다. 마트나 시장에서 과일과 채소를 사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으니 어떤 면에선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전과 달리 시오는 매일 시간을 할애하여 일한다고 했다. 전사(轉寫)나 논술 첨삭을 하고, SNS에서 보기 좋은 짧은 영상의 멘트를 만들고 있기엔 내다 버린 육두품이 아까웠으나 시오의 계산법에 따르면 강을 건넌 지 오래된 이에겐 서울에서 최저임금을 조금 웃도는 돈을 받으며 하는 일보다 한글이 깔린 노트북이 있고 인터넷만 연결된다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나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40리터짜리 배낭에서 늘지도 줄지도 않은 생활이었다. 그리고 그때처럼 시오에게는 자신의 공간을 내어줄 마음도 있었다. 다음 학기부터 수도권 한 대학에 출강하기로 했고, 통장 여윳돈을 써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순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와퍼와 커피는, 내게 고향의 맛은 아니었으나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나는 반쯤 먹은 와퍼를 내려놓고 비행기 티켓을 검색했다.


   보름 후 나는 시오와 함께 그때처럼 싸얌과 스쿰윗, 사톤과 칫롬, 펫차부리와 아리, 얼마 후에 잊힐 이름의 동네들을 걷고 또 걸었다. 구글 맵을 켜기도 했지만 대부분 시오의 경험과 감으로 행선지를 결정했다. 종종 쇼핑몰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에 땀을 식히며 코코넛 주스나 태국식 밀크티 차옌빤을 마셨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낯선 말들을 속에서 시오는 내게 태국 사람들은 ㅅ과 ㅆ을 구분하지 못하는 편이고, 그래서 Siam이 싸얌으로도, 사얌으로도 들린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Sukhumvit은 스쿰빗이 아니라 스쿰윗이라고 부르는데 그건 여기선 V로 표기하나 W로 발음해서 그런 거라고, 산스크리트어였나 팔리어의 영향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우리는 언어와 문화가 뒤섞이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게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신기하다는 대화도 나눴다. 쇼핑몰을 나와 주홍색 꽃들로 둘러싸인 낮은 건물을 지나려는데 이국적인 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화려한 탑과 색색의 꽃들, 줄지어 서 있는 백화점과 호텔 사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곳은 에라완 사원이었다. 시오가 말했다.

   “여긴 힌두교 브라흐만을 모신 곳이야. 불교 국가에서 좀 특이한 건데 다들 영향을 주고받으니까 특이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암튼 인도에 가면 브라흐만 사원은 거의 없고 비슈누, 쉬바, 가네쉬, 하누만이 훨씬 인기 있어. 여기도 좀 복잡한 게 남부로 내려가면 무슬림들이 많아. 팔십 퍼센트는 될걸. 딥사우스로 불리는 지역들이 있거든. 나라티왓, 얄라, 빠따니, 송클라. 이런 곳에 가면 무장한 반군들이 있고 테러 위험도 있어. 바다도 맑고 아름답고 거리도 멋진데, 사람들이 이토록 평범하게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데, 그래서 슬프기도 하더라. 혜령, 지금 어디 있어? 내 말 듣고 있어?”

   창조의 신 브라흐만과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쉬바는 나와 무슨 상관일까. 코끼리 형상의 가네쉬와 원숭이 형상의 하누만은, 내 관심 밖에 있었다. 아까 먹은 팟타이와 똠얌꿍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너무 기름졌고, 뒤늦게 똠얌꿍 안에 있던 레몬글라스가 조금 역했다.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시오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라면이나 먹자.”

   우리는 스튜디오에서 신라면을 먹으며 이게 한국의 맛이라며 웃어댔고, 함께 처음 먹었던 라멘 국물이 미소였는지 시오였는지로 티격태격했다. 노란 망고에, 초록 망고까지 배불리 먹고는 그대로 누워버렸다. 창문 너머 눈썹달이 초승인지 그믐인지로 또 싸우는데 시오가 초록색 양말을 내 캐리어 안으로 휙 던졌다. “돌아가면 그때 줘.” 싸얌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좌판을 지날 때 마음에 드는 눈치여서 내가 얼른 계산한 양말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공항으로 떠나기 몇 시간 전이었다. 시오의 스튜디오가 있는 동네를 걷는데 앞서가던 시오가 걸음을 멈췄다.


With smiles and kisses,

we prefer to seek accord beneath our star,

although we’re different(we concur) just as two drops of water are.

-Wislawa Szymborska, Possibility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1)내 기억이 맞는다면 ‘두 번은 없다’인데.”

   출입문 유리에 새겨진 시구를 보며 느릿느릿 말하던 시오가 가게 문을 열었다. 검은 철제 프레임 탓인지 단정한 분위기를 풍기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회색 리넨 셔츠를 입은 여자가 웃으며 인사했다. 시오 역시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는데 그걸 보니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앉자마자 시오는 「두 번은 없다」를 검색했고, 나는 당장에라도 달려가 빨간 펜을 내밀 기세인 시오를 달래야만 했다.

   “제목 좀 틀린 거 가지고 왜 그래. 주인이 자기가 썼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둬. 안 본 사이 논문 쓰기로 마음먹었어? 출처 달아?”

   살짝 열린 창문에서 맑은소리가 들려왔다. 종 모양의 풍경이 내는 소리 사이로 끈적거리는 바람도 불어왔다. 나는 꿉꿉한 뺨을 만지며 생각했다. 보통의 시오라면 틀린 채로 두면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거라 말할 텐데. 시오에게서 유연함과 익숙함이 느껴졌고, 여행이 아닌 생활하는 중이라는 인상까지 받았지만 다 착각이라고, 지친 게 분명하다 싶었다. 나는 근근이 사는 게 지치지 않느냐고 물었고, 근근이 아니라는 시오에게 그게 아니라면 뭐냐고 되물었다.

   “저축이지.” 마땅치 않다는 듯 시오의 윗입술이 삐죽 올라갔다. “일종의 적금이랄까. 정기적금 말고 자유적금 같은 거.”

   “탈 수는 있고?” 그렇게 내뱉고는 앞에 놓인 스무디를 빨대로 세게 빨았다. 망고의 노골적인 달콤함을 자몽의 미묘한 씁쓸함이 덮어버렸다. “영원히 탈 수 없는 적금인 건 아니고? 아니지, 만기일도 없는데 무슨 적금이야. 그래 적금이라고 치자. 근데 어느 날 화폐 가치가 폭락한다고 생각해 봐. 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망고자몽 스무디를 먹을 수 있던 돈이 쓰레기가 되는 거야.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단정할 순 없지. 그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도 없잖아.”

   옆에 있는 커피 한 모금을 벌컥 들이켰다. 안에 든 얼음이 너무 자잘해서 입 안 가득 찼다. 아프게 차가운데도 입 안을 맴도는 씁쓸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시오는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가 입을 열었다.

   “시장에 갔는데 그날따라 자몽이 안 보이는 거야. 직원한테 자몽 있냐니까 머뭇거리더니 망고랑 망고스틴을 내밀더라.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나 싶어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그레이프 프루츠를 달라니까 뒤에서 자몽을 가져오는 거야. 자몽, 걔는 되게 영어처럼 생겨가지고 영어가 아니래.” 시오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혜령, 그거 알아? 포르투칼에서 잼보아였던 게 일본으로 가서 자봉이 됐고 한국에서 자몽이 된 거래. 근데 이 커피, 너무 쓰다.”

   시오는 작게 흥얼거렸다. 아, 아, 아, 아. 그 허밍을 들으며 나는 스무디 빨대를 커피잔에 집어넣고 이리저리 저어 버렸다. 시오는 빨대 두 개가 꽂힌 잔을 쳐다볼 뿐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빨간 니트를 꾹 붙들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시오에게 보기만 해도 덥다고, 일 년 내내 더운 곳에 처박혀 있으면서 이런 건 왜 들고 있냐고 핀잔했지만 정작 방콕에서 지내는 동안 에어컨 바람 탓에 니트를 유용하게 쓴 건 나였다. 


   휴대폰의 비행기모드를 해제하자 메시지가 바삐 들어왔다. 언니, 얘 봐. 형인이 남겨둔 링크를 눌러보니 누군가의 트위터에 접속됐다. ‘분반 이동하라는 이상한 여자 때문에 강의 놓칠 지경이다.’ 이상한 여자가 우리 말하는 거지?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 걸까? 아니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데. 형인의 푸념에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저 문장의 ‘여자’가 담당 강사인지 조교인지 모호하지 않나. 게시물이 되어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교수나 강사일 테니 곧 교체될 청소도구는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근근이.

   트위터를 찬찬히 살펴봤다. 윤정은 지난해 편입에 성공했고, 대학원 진학을 고민 중이었다. 빨간 조끼를 입은 사람에게 『빅이슈』를 사고 구호단체에 후원도 한다. 아프리카 말라위의 후원 아동에게 받은 사진과 편지를 넘겼다. 빨간색 티셔츠와 군청색 바지를 입고 신발까지 신은 채로 잠든 아이의 사진도 있었다. 침대가 아닌 해변의 모래 위였고 결코 깰 수 없는 잠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평범한 아이와 평범한 장소가 만들어 낸 비극적인 사진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사람들은 먼 데서 일어난 타인의 일에 애도를 표했다. 윤정 역시 그러했다.

   윤정의 #pray for를 보고 있자니 허기가 졌다. 서둘러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이곳은 그때의 영화관이고, 나는 그때의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쁜 숨을 들이켜며 식당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여전히 좁고 어둡고 의자는 열다섯 개뿐인 그곳에서 대걸레를 든 알바생이 나를 쳐다봤다.

   “어, 마감했는데···. 잠깐만요.”

   안쪽 기둥 너머로 사라진 여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가득 든 투명한 유리컵을 들고 나타났다. 미소라멘만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테이블에 앉아 물로 마른입을 적셨다. 이내 두건을 두른 남자가 나타났다. “윤정 씨 먼저 가봐.” 그 말에 서둘러 앞치마를 벗는 여자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남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알바가 좀 지쳐 보인다고, 주문 꼭 받아달라고 해서 드린 거예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니,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고통이니 정말이지 괜찮아요. 게다가 곧 지나갈 테니까요. 근데, 지금 너무 자몽한데 시오는 어디 있을까요? 자몽, 한국어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새어 나오려는 말 때문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신 그릇을 들고 국물을 들이켰다.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온몸에 훈기가 돌았다. 그때처럼 진하고 묵직한 국물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습관처럼 함께하던 이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 그뿐이었다. 초록 양말은 그새 낡아 발목에서 흐느적거렸다. 빨간 니트가 어디 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라멘 국물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


   찬바람 속에서 가만히 서 있던 나를 깨운 건 엄마의 전화였다. 엄마는 무너진 교권을 다룬 시사 프로그램을 보다가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자식이 떠올라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무서운 세상이다. 그래도 참고 살아야 하는 거야. 다들 견디면서 사는 거야. 근데 딸, 밥은 먹었고?”

   “엄마, 내가 갑이야.”

   “사람 사는데 갑이 어디 있고 을이 어디 있냐?”

   “나 실력 있다고 소문나서 오겠다는 애들은 많아. 일정이 빡빡해서 내가 학생을 골라. 그럼 내가 갑이지.”

   “그래서 좋아?”

   “응?”

   “딸은 딸이 갑이어서 좋으냐고.”

   “응, 아니. 응, 아니. 나도 모르겠다.”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삼켰다. 거리는 너무 차갑고, 엄마는 늦었어도 밥은 꼭 챙겨먹으라고 했고, 나는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네이버 길 찾기에서 검색해보니 라멘 식당은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곳에 있었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그때 ⟨당신의 단어⟩는 너의 단어는 찾았냐는 물음으로 끝났다.

   텐진이 아닌 시오의 목소리였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네가 감튀!를 얻었던 터키는 튀르키예로 국가 명칭을 변경했고, 나는 종종 네가 심연을 만났던 화산들, 카와 브로모와 카와 이젠을 검색한다. 미세먼지와 바이러스로 마스크가 일상이 된 세상이 됐고, 나는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는다. 새로 자리 잡은 세계 역시 무엇과 무엇으로 구분되는데 뭐가 우위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모르고 싶다. 그러면서도 나는 구분 짓는다. 그때처럼 어떤 이들은 고무보트나 냉동 트럭에서 발견된다. 국경을 넘은 경우도,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여전히 일부는 숨을 쉬지 않는 상태로 발견된다. ···다수일지도 모르겠다. ···다수일 것이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나는 조깅하거나 걸으며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을 알고, 가끔 비닐봉지와 집게를 들고 길을 나서기도 한다. 책은, 책은 읽지 않는다. 이론서도, 소설과 시도, 에세이도 읽지 않은 지 오래다. 그렇다고 글을 안 읽는 건 아니다. DSM-5에 따르면 사회적 의사소통 장애는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구분된다. DSM가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발행한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이라는 것과, 5가 다섯 번째 개정판을 가리킨다는 것은 수능 국어 비문학 지문을 읽다가 알게 됐다. 지완과 나라 같은 이름은, 데리다와 지젝 역시 내 일상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내 오랜 습관이었던 너도 그렇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마음이 철렁하는 순간에 나는 더 이상 너를 찾지 않는다. 네 안위를 묻지 않는다. ···너를 찾던 밤은 내 안위를 위해 존재했음을 안다. 가끔 네게 자몽의 뜻을 말하는 꿈을 꾼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네가 모아온 몇몇 이야기는 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쓰나미 이후를 다룬 재난 다큐, ⟨그것이 지나간 자리⟩가 좋았다. 목적지까지 걸어서 954m, 도보 17분. 너와, 네가 모은 단어들은 어쩌면 지키고자 하던 마음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마음이 흐릿한 밤, 드디어 나는 한 걸음 내딛었다. 목적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어떤 이에게 조금은 가까워진 겨울밤이었다.


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에서

추천 콘텐츠

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 관리자
  • 2023-11-15
멜들다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