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책방곡곡] 공주시 데시그램북스(제3회)

  • 작성일 2022-07-01
  • 조회수 690

[책방곡곡]

 

 

 

공주시 데시그램북스(제3회)

 

 

사회/원고 정리 : 멧새
참여 : R.SSAM, 커피적인평화, 왕버섯, 윤여름, 청양맨
책 : 정보라, 『저주 토끼』(아작, 2017)

 

 

 

 

『저주 토끼』를 만나다

 

멧새 :
오늘 6월 2일, 함께 이야기할 책은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입니다. 이 책은 2017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의 최종심에 오르면서 재출간되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엊그제 올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의 수상작으로, 인도 작가 기탄잘리 슈리(66세)의 장편소설 『모래의 무덤(Tomb of Sand)』이 결정되었습니다. 『저주 토끼』의 수상은 아쉽게 불발되었지만, 여러분과 함께 이 작품집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멧새 :
일단 표제부터 참 강렬하죠?

커피적인평화 :
영어판에서 토끼를 RABBIT이 아니라 BUNNY로 했다네요. 그 점도 인상적이에요.

멧새 :
사랑스러운 토끼가 ‘저주’를 하는 물건의 이름이 된다는 점도 어필했을 듯하고요. 일단 소감을 들어 보겠습니다. 어떠셨나요? 단편 10개가 모여 한 권의 책으로 묶였는데요. 조금 무섭기도 하고 내용이 끔찍하기도 하고……. 하지만 각자 느낌은 좀 다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의견을 들어 보고 싶습니다.

커피적인평화 :
어쨌든 책이 술술 읽히니까 재미는 있어요. 책방 주인 입장에서 저는 읽어 보라고 권하면서 판매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책 안 읽는 분들이 아니라면 추천하기 좀 저어되지만, 이번 달에 한 권이라도 읽어 볼 거야 하는 분들께는 일단 재밌으니 어떻게든 만족하실 순 있어요 하고 추천해 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런 차원의 추천은 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책을 누구에게나 쉽게 권하기엔 좀 아쉬운 부분이 너무 많았어요. 웹 소설 같다고 할까요? 마치 인터넷으로 그냥 막 쓴 그런 느낌을 굉장히 많이 받았고요. 작품으로서의 퀄리티랄까, 아무튼 많은 의문이 들었어요.

윤여름 :
저는 이 책을 엄청 빨리 읽었어요. 우선은 문장이 되게 간결하잖아요. 그래서 쉽게 읽혀서 그 점은 좋았고요. 「저주 토끼」랑 「머리」까지는 좀 흥미 있게 봤는데, 사실 뒤의 작품들은 의문이 들긴 했어요. 이렇게 단편을 여러 편 쓰기보다는 차라리 몇 가지 내용을 중점으로 중편으로 썼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기묘한 이야기’ 같은 걸 읽는 느낌이었어요. 단편영화를 보는 느낌? 이런 내용이라면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서 넷플릭스 시리즈처럼 만든다면 더 인기를 끌지 않을까요?

청양맨 :
저는 소설을 잘 안 읽어요. 보통 과학이나 인문, 사회, 그런 쪽으로 읽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어요. 3개월 전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은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 분위기로 이 책을 한번 읽어 보자 했는데 굉장히 당황스럽더라고요. 제일 궁금했던 게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지……. 이 모임에도 그게 궁금해서 온 게 컸어요. 문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내가 이상하게 느끼는 건지, 이 책을 읽은 분들은 어떤 생각일지 궁금해서 오기도 했고요 저도 넷플릭스 시리즈 같은 영상으로 이 작품을 만났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겠지만, 책 자체는 완독하기 힘들더라고요.

R.SSAM :
말하자면, 스토리가 좀 막 엉긴다고 할까, 이렇게 막 복잡하고 그런 건 없었어요. 각 단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는 크게 어렵진 않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멧새 :
본 이야기는 천천히 한 편 한 편씩 짚어 가면서 해보기로 하고요. 책의 맨 마지막에 실린 「재회」는 작가의 유학 시절 이야기를 섞어 만든 듯해서 앞의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좀 더 ‘소설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보라 작가가 폴란드의 크라쿠프 시에서 유학할 때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라고 추측했습니다. 다만 앞의 작품들에 작가가 더 주력한 게 아닐까요? 작가의 야망이 느껴졌어요. ‘나의 창작’을 전설이나 민담, 나아가 신화로 만들어 보겠다는 야망 말이죠. 하지만, 민담, 전설, 신화는 아시다시피 ‘구비문학’에서 기원하죠. 최초의 이야기꾼이 만든 서사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입으로 전해지면서 가지를 치고 살이 붙고 또 덜어내면서 집단이 만드는 문학이죠. 그 결과, 굉장히 탄탄한 서사 구조를 지니면서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가 되죠. 그런 점에서 『저주 토끼』의 작가가 너무 큰 욕심을 내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본인 나름으론 굉장히 치밀하게 썼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너무 무모하다고 봐요. 당연한 결과지만 서사 구조면으로 보아도 여러 작품에서 ‘균형’이 많이 무너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러와 같은 공포물일수록 구조가 매우 치밀해야 하죠.

윤여름 :
맞아요. 예를 들어, 『좀비』(1995) 같은 호러물의 치밀함 같은 거죠.

커피적인평화 :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이죠?

윤여름 :
네. 만약에 『저주 토끼』가 진짜 장르 소설의 한 분야라면 적어도 정세랑의 『목소리를 드릴게요』(2020)만큼은 썼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소설의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부터 말하자면, 일단 인물부터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지난달 다루었던, 윤성희 작가의 『날마다 만우절』(2021)만 해도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차분히 세세히 그려지면서도 대다수 불행한 삶을 살죠. 그런데 작중 인물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스스로 상처를 내진 않아요. 그런 점에서 『저주 토끼』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스스로가 자신을 너무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죠. 스스로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의 처지가 이 정도인데 불쌍하지 않으냐는 식으로 강하게 주장해요. 이 정도인데 읽은 당신들이 ‘나’를 연민 안 할 수 있어? 상대방이 이렇게까지 잘못했는데 용납할 수 있어? 이런 식으로 독자에게 압박감을 주고 있어요.

멧새 :
그러니까 인물 묘사를 통해 독자들이 스스로 상황을 이해하고 납득하게 한다기보다…….

윤여름 :
네, 스스로한테 너무 대놓고 얘기를 하니까요.

R.SSAM :
본인이 주장을 하면 안 되나요?

윤여름 :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저는 그 점이 너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너무 최악의 설정을 배치해 놓고 누구나 충분히 알 수 있는 클리셰(cliché)와 상황을 전개하니까, 뭐랄까, 참 읽기 힘들었어요. 공감하시나요? 일단 저는 그 인물 설정부터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멧새 :
그렇게 볼 수 있죠. 메시지를 앞세워 인물, 사건, 배경을 종속시켜 버린 결과 인물과 사건이 작위적으로 느껴진다는 말씀이네요.

윤여름 :
네, 설득이 전혀 안 돼요. 물론 페미니즘과 같은 주장은 인정하지만 소설 작품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서술한다면 오히려 반감을 사게 되지 않을까요?

커피적인평화 :
메시지가 과연 있는 걸까요?

멧새 :
메시지가 있긴 하죠. 있기는 한데…….

왕버섯 :
이런 형식의 소설을 고어 장르라고 해요. 핸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1898년)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제가 참 좋아하는 작품인데요. 굉장히 오래전에 발표된 소설이고 후대 소설가들한테 큰 영향력을 주면서, 이 작품을 오마주(homage)한 작품도 굉장히 많죠. 고딕 소설의 시초라고 해도 좋죠. 그런데 이 작품이 지금 보면 그렇게 끔찍하진 않아요. 지금 보면 굉장히 클래식하지만 당시에는 무지 파격적이었고, 어떻게 이런 서스펜스를 만드는가 하면서 호평을 받았어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독자를 심리적인 불안 속에 몰아넣으면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에요. 『오토란트 성』(호레이스 월폴)이나 『웨이크필드의 목사』(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소설) 같은 유명한 작품도 있어요. ‘오토란트 성’ 이야기는 결혼식을 올려야 할 신랑이 머리가 으깨진 채로 헛간에서 발견되는 것부터 시작돼요. 자극적인 설정으로 시작하죠. 물론 정보라 님의 「저주 토끼」나 「머리」부터 모든 작품의 소재 역시 자극적이죠. 그런데 소재가 자극적이란 점을 문제 삼는 건 아니에요. 같은 자극적인 소재라도 그 안에 녹아들어 있는 사유의 퀄리티가 어떠한가? 그런 점을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은 인간 보편의 욕망 문제를 계속 환기시켜요. 백여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충분히 독자의 공감을 이끌기 때문이죠. 문학 작품이라면, 또 좋은 소설이라면 보편적인 공감을 만들 비유와 상징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주 토끼』에는 인간 보편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아요.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이 굉장히 소름끼치면서도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빠져들었던 건 그 이야기가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멧새 :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료 작가들이나 문우들과의 피드백이 없었던 건 아닐까요? 합평이라는 대화 과정은 자신의 작품을 객관화하여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 되잖아요. 조심스런 추측이지만, 그런 과정이 생략된 채 출판사와 다이렉트로 결합된 건 아닐는지요? ‘환상소설’ 영역의 개척이라는 모토 아래 너무 성급하게 출판 시장에 등장한 작품은 아닐지.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출간된 작품집에 일정한 독자층이 만들어지고 반향이 일어나면서 어떤 편향이 굳어진 건 아닌지요. 그런 편향 그대로 어떤 세력이 되었다고 할까요? 물론 추정일 뿐입니다.

윤여름 :
그런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특수성도 중요하긴 하죠. 하지만 보편성이란 게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봐요. 어떤 작품은 고전(古典)이 되어 시간의 힘을 이겨내면서 꾸준히 독자의 공감과 사랑을 받죠. 지금 읽어도 소통이 되는 까닭은 강렬한 주제의식이 시대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커피적인평화 :
『저주 토끼』를 읽으면서, 뭔가 있을 것같이 계속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그냥 끝나버리잖아요. 그게 좀 허탈했어요. 읽는 도중에는 이런 소재를 쓰는구나, 재밌다 하면서 읽어 나갔는데, 끝이…… 결론이 없이 그냥 끝났어요. 설마 결론 내기 싫어서 그냥 끝냈을까, 이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열 편 모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윤여름 :
정보라 작가님 인터뷰에서 본 듯한데, 작가께서는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해요. 권선징악이 불가능한 이 사회가 분했고, 복수를 하고 싶었다고…….

멧새 :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작가가 분노해서 썼구나 하는……. 작품 전반이 인간관계나 사회관계에서 선한 의도가 악용되는 것에 관한 복수극으로 이루어져 있죠. 작가가 실제 유사한 상황을 체험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런 상황에 분노가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 분노를 작품으로 잘 조직해서 그런 나쁜 상황에 대해 독자 역시 동일한 분노가 일어나도록 공감을 확보해야죠. 입장에 따라서는 꼭 공감이 필요한가, 이렇게 메시지와 주장이 전면에 서는 문학도 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과 저는 그렇진 않은 거죠. 문제제기가 앞서는 문학보다는 등장인물의 고통을 내 자신의 이야기로 감정이입하면서 깊은 공감과 성찰을 만드는 문학을 애호하는 입장인 셈이죠. 우리 입장에서는 이 작품이 참 과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이렇게 다른 입장, 다른 문학관에서 얘기할 수 있는 작품이 있고 독자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만큼 우리 사회와 문화가 풍부해지고 다채로워진 건 사실인 것 같아요. 어떤 작품을 두고 다들 좋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아니다, 우리에겐 감동을 주지 못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취향의 문제라고 할 수 있고, 그 취향대로 거기에 맞는 독자층을 형성하고 그들에게 읽히는 작품을 쓰는 창작 그룹이 생겨나고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저주 토끼』는 다채로운 생각을 만들고, 한편 조금 씁쓸한,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작’이긴 한 것 같습니다.

왕버섯 :
어떤 이는 『저주 토끼』가 이른바 MZ세대에 알맞은 소설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MZ세대’라는 낱말의 실체가 있는 걸까요? 그런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작품 속으로

멧새 :
작품 한 편씩 이야기해 보죠. 우선 저부터 말해 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저는 마지막 편인 「재회」는 그래도 소설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성관계할 때마다 묶어 달라고 하던 변태적인 애인의 버릇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할아버지 때문에 생긴 거였죠. 그의 할아버지는 아주 비극적인 폴란드 역사를 온몸에 새긴 할아버지였습니다. 행복하진 않지만 몸을 묶으면 ‘안전하다’고 느끼고, ‘살아 있어도 좋다고 허락받은’ 느낌이 든다는 그의 사연은 충분히 소설적입니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인은 슬픈 모습의 유령이 되어 방에 머물며, 또 크라쿠프 광장을 배회하는 유령들과 같은 처지가 됩니다. 가슴 뭉클한 대목이죠. 다른 작품도 이런 식으로 풀었으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이 작품에 비하면 다른 작품들은 이 작품과 같은 ‘개연성’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주 토끼」만 해도 그 개연성 또는 논리가 성립하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친구를 대신해서 복수하기 위해 ‘저주 토끼’를 만드는 일가가 등장하는데요. 과연 복수는 대행할 수 있는가? 복수의 주체로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또는 정확한 복수의 대상은 무엇인가? 작품은 이러한 핵심적 질문들을 물고 늘어지지 않습니다. 너무 쉽게 처리되거나 해결하지 않는 거죠. 결과적으로 과연 무엇을 저주하고 무엇을 복수한 것인가? 이 점이 애매하게 마무리되어 버립니다. 논리적인 개연성을 확보하지 않은 데 따른 결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네요.

왕버섯 :
욕망의 밀도가 진해져야 설득력이랄까, 복수의 당위성이 생긴다고 봐요.

멧새 :
그렇죠. 복수의 권리, 나아가 복수를 대행할 권리를 획득하려면 최소한 친구를 내 자신처럼, 나아가 내 자신으로 여기게 된 사연이 있어야 하거든요.

왕버섯 :
대강의 스토리는 알겠지만, 무엇을 저주하고 무엇을 복수했는지 강렬한 깨달음의 포인트가 슬프게도 없는 거죠.

윤여름 :
사실 저주 행위로 복수를 한다는 점도 좀 차원이 낮다고 여겨지고요. 아까 말씀하신 설화들, 예를 들어 흥부전 같은 작품들은 개연성이 매우 풍부하죠. 더구나 왜 ‘토끼’인가 하는 점도 설명이 없어요.

커피적인평화 :
연약하고 귀여워서? 그러면 저주할 수 있다? 설득력이 약하네요.

멧새 :
「즐거운 나의 집」은 어떻게 보셨나요? 대도시에서 살기 힘들어서 지방 소도시로 거처를 옮긴 부부 이야기죠. 나중에 반전이 등장하고요. 그 부부가 매입한 건물 지하에 있던 아이 유령이 엄마가 될 사람만 남겨 놓고 죽게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윤여름 :
저는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이 작품은 생각보다 재밌었어요. 이 작품에 제일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멧새 :
그러셨군요. 위에 말한 개연성이란 점에서 이 작품은 그럴듯해 보입니다. 대도시의 답답함을 피해 소도시로 거처를 옮겼지만, 사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이곳 나름의 야만성과 폭력성이 있으므로 낭만적인 도피는 무모하다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겠습니다.

커피적인평화 :
약간 페미니즘적으로 접근한 것 같아요. 여성으로서의 갈망과 욕망, 이를 해소해 주지 못하는 현실, 스스로 현실을 돌파해 낼 수 없는 무력감, 이를 해결해 주는 유령이라는 존재 등이 등장하죠.

R.SSAM :
이 작품 역시 「저주 토끼」처럼 문제 해결의 대행업자가 등장하는 셈이네요. 아이 유령 말이죠.

윤여름 :
알겠는데, 불편한 건 등장인물을 너무 학대하는 점이에요, 인물들을 너무 폭력적으로 다룬다는 거죠. 페미니즘적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에서도 그렇고, 「즐거운 나의 집」에서도, 「덫」이나 「몸하다」에서도 여성을 괴롭히고 있어요. 역으로 ‘여혐’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을 정도로 여성을 너무 괴롭힙니다. 물론 여자들이 이렇게까지 사회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겠죠. 그렇지만 이러한 가학적인 접근은 역효과를 낳기 마련입니다.

멧새 :
그런 점에서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말하고 움직이는 ‘인형’ 같아요. 살아 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피규어’랄까요?

왕버섯 :
저는 작품에서 인물을 설정할 때 이 인물이 진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작품에서 인물을 다룰 때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쉽게 고통 속에 내버려두고, 이유도 부족하고 또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멧새 :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허수아비가 되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조종당하는 인형이라면, 그런 게 더 소름 끼칩니다. 문학이란 사실 존재감 없고 그저 가난하고 그늘지고 이런 아주 미묘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갖는 끝없는 연민이고, 이들을 너무 무시하는 사람에 대한 분노며, 또 그런 이들조차 어떤 그늘이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그 결과, 작중 인물들이 내 자신이거나 내 주변 사람들로, 그러니까 진짜 살아 있는 존재로 느껴지면서 감동받게 되는 거잖아요. 「머리」는 어떻게 읽으셨나요? ‘머리’가 은유하는 게 뭘까요? 누구나 감추고 싶은 비밀 같은 걸까요? 그래서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을 상징하는 걸까요? 성형수술과도 같은 변신의 욕구를 말하는 걸까요?

왕버섯 :
저는 이 ‘머리’가 주인을 왜 ‘엄마’라고 부르는지 그 호칭이 궁금했어요. 내 자신의 부산물들이 왜 ‘나’한테 ‘엄마’라고 하는지요?

윤여름 :
죄책감을 갖게 하려고?

왕버섯 :
글쎄요. 그래도 ‘엄마’라는 호칭은 좀 아닌 것 같은데…….

멧새 :
나하고 똑같은 존재가 나타나면, 하나는 죽게 된다는 도플갱어 이야기겠죠?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키에슬로프스키)처럼 말이죠.

윤여름 :
아마도 작가의 의도와는 많이 벗어난 반응이 아닐까 싶은데요. 「차가운 손가락」이 너무나 해학적으로 읽혔어요. 자동차 사고 후에 김 선생과 이 선생이 나누는 대화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 같아요. 물론 사고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매우 안타깝지만, 작품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불분명해 보였어요.

멧새 :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심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작품을 읽고 난 이후에는 그 심사기준이랄까, 최종심에 오른 근거가 무언지 알고 싶긴 합니다. 이 작품집의 성취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 작품에서 표현되는 숱한 불안과 공포와 관련해서 여러분은 어떤 불안, 어떤 공포가 있는지, 오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여쭤 보고 싶네요.

윤여름 :
저는 라섹 수술 이후에 하루 동안 보안 렌즈를 껴서 앞이 보이지 않은 적이 있는데요. 그때 생각한 게 사람이 어딘가에 장애가 왔을 때 다리를 못 쓴다든가 귀가 안 들린다거나 눈이 안 보였을 때, 제일 무서운 건 안 보이는 거겠구나란 걸 그때 알았어요. 그것만큼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게 없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정말 무서웠던 게, 지금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내가 이대로 실명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과 공포가 엄청 났어요.

R.SSAM :
진짜 무서웠겠다. 믿을 수 있는 건 귀밖에 없잖아요.

멧새 :
왕버섯 님은 어떤 때 가장 공포를 느끼시나요?

왕버섯 :
저는 공모전에 작품을 내려고 하는데, 완성된 작품을 집에서 읽을 때 공포를 느꼈어요.

R.SSAM :
왜요?

왕버섯 :
쓰고 나서 검토할 때요. 대본 써놓고 읽을 때 내가 알고 있는 것만큼 잘 써졌나, 그걸 체크할 때 되게 공포스러웠어요. 몸이 차갑게 식어요. 손끝도 발끝도 무지 차가워져서는 내가 아는 만큼 잘 녹여냈나? 그동안 연마한 기술을 남김없이 쏟아 부었나? 이걸 읽었을 때 독자들이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있거나 설득력이 있을까, 없을까? 이런 걸 생각할 때 엄청 무섭죠.

멧새 :
청양맨 님은 어떠신가요?

청양맨 :
제가 제일 공포스러운 건, 부모님이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안 좋다 할 때인 거 같아요. 건강이나 죽음에 대해서 종종 생각하거든요. 근데 좀 의연해졌어요. 우주에 관한 책을 좋아해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80, 90년 인생이란 게 2만 년 인류 역사에 비하면 진짜 찰나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나아졌어요. 예전만 해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심했거든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왕버섯 :
최근에 시몬 보부아르가 쓴 『아주 편안한 죽음』을 읽고 통곡했어요. 어머니가 죽어가는 여정을 쓴 책이에요. 엄마가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그 짧은 며칠을 쓴 건데, 되게 긍정적으로 느끼는 슬픔, 이런 거 있죠. 철학자여서 그런지 죽음에 대한 통찰을 아주 간결하고 이해가 잘 되게 쓰셨더라고요. 저에겐 너무 명작이었답니다.

커피적인평화 :
저는 뭐가 무서울까요, 생각이 안 나요. 불안과 공포가 언제지? 잠이 안 올 때, 잠이 안 와서 불면증에 시달릴 때 이런 게 오히려 좀 더 현실적인 공포 같아요. 잠을 못 자면 내일이 너무 힘들잖아, 맞아, 내일이 힘들어져. 그런 생각이 들면 불안하죠. 저는 너무 현실적인 사람인가요?

R.SSAM :
저는 어렸을 때부터 되게 태평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이런 상상에 따른 무서움은 없고요. 저도 커피적인평화 님처럼 현실적인 불안은 있죠. 그냥 지금 하는 일에 대한 거죠.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다 보니까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잖아요. 그런 것에 대한 무서움이랄까, 얘들이 나중에 잘 되어야 하는데…… 이런 것에 대한 걱정과 무서움은 있죠.

멧새 :
사회가 주는 불안함도 있고, 지구 환경이 악화되면서 오는 불안감도 있죠. 또 저마다 개인적으로 갖는 불안과 공포들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역으로, 이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의미 있겠지요. 모임을 마치면서 오늘 처음 참석하신 청양맨 님께 마지막 정리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청양맨 :
재밌었습니다. 『저주 토끼』를 읽으면서 제가 느끼고 생각했던 게 특이한 게 아니었구나, 확인하게 되어 재밌었습니다. 제가 좀 특이한 줄 알았거든요. 다음 달에도 재밌고 유익한 이야기 나누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모두 반가웠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만나요!

 

 

 

 

 

 

 

 

 

 

 

마리아
멧새 | 책이라면 다 맛보고 싶은 쟁이   
리오
R.SSAM | 일년 내내 즐거운 독서 꿈나무   
베로


왕버섯 | 거친 야생에서 온갖 풍파를 이겨낸 왕버섯   
봉천댁
윤여름 | 나의 계절은 언제나 여름이었다   
파피루스
커피적인평화 | 꽤 다정한 책방지기   

 

 

 

   《문장웹진 2022년 7월호》

 

추천 콘텐츠

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