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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커튼 뒤의 시인과 고단한 연락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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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뒤의 시인과 고단한 열락의 꽃
전소영
피핑 톰의 커튼
밤은 영원 같았다. 여명이 달빛을 물어갈 무렵까지도 여인은 좀처럼 눈을 감지 못한다. 섣불리 꺼내든 용기를 마침내 발휘해야 할 때, 사람이라면 누구나 초조를 앓기 마련이다. 다만 그럴 때마다 여인은 사내의 얼굴을 떠올린다. 속악한 권력에 기대어 승자의 기분을 앞서 누릴 그였다. 마음이 서서히 다져진다. 동이 트자 여인은 주저를 물리고 길에 나선다. 사내의 말 대로 옷을 벗고 말에 오른다. 영지를 한 바퀴만 돌면 될 일이었다. 숭고와 수치 사이에서 여인은 아슬아슬하게 버틴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예상 밖의 장면이 펼쳐진다. 거리에 사람의 기척이란 없다. 창문마저 숨을 죽인 채 커튼으로 제 몸을 싸매고 있다. 나신은 마지막까지 의도적 외면으로 보호된다. 뜻밖의 희생과 뜻밖의 보답이 만나 다정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여인의 이름은 고다이버(Lady Godiva), 작인들의 세비를 탕감해주기 위해 영주 남편에게 맞섰던 날 겨우 열여섯이었다.
여기에서 끝이 났더라면, 이 이야기는 필요한 날 적절한 방식으로 회자될 수 있는 교훈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균열로 미담은 완성되지 못한다. 다시 고다이버의 날로 돌아간다. 창의 커튼들은 여지도 없이 굳게 여며져있다. 아니다. 단 하나의 커튼이 위태롭게, 은밀하게 틈을 벌렸다. 그 사이로 한 쌍의 눈길이 비어진다. 금기 너머로 기어이 나체를 탐하는 그는 피핑 톰Peeping Tom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이 사내의 엿보기는 규범과 윤리를 비껴 두려운 향락(jouissance) 쪽으로 제 주인을 몰아간다.
피핑 톰의 존재란, 정말 오점인가. 희생과 보답의 미담으로 영주제를 지탱해간 당대 질서 쪽에서 바라보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야겠다. 그는 사람이어서, 사람의 본성이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어서 이따금씩 욕망이 대동하는 불안에 대해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쪽으로 마음을 주기 마련이다. 굳이 라캉(Lacan)의 전언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안다. 삶이 욕망 안의 결핍을 매 순간 마주하는 일이자 고통과 싸워서라도 욕망을 좇는 것임을. 그러니 이렇게 바꿔 적기로 하자. 피핑 톰은 욕망의 가장 순수하고 정제되지 않은 이름, 질서의 희생양이었다.
백야 속으로 걸어간 시인
그렇다면 묻는다. 당신의 커튼은 어떠한가.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커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자가 끝내 놓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열리거나 닫힌다. 그 방향이야 하나일 수 없겠지만 적어도 시인의 것이라면 어디로 열리거나 닫힐지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시를 쓰려 마음을 먹었다면 한번쯤은 언어 앞에서 주저하고 무모해지며 고투 했을 것이다. 언어가 시의 질료인 이상, 시어에 대한 갈망과 성취가 시인들의 향락(jouissance)과 멀리 있을 리 없다.
그런 시인의 커튼을 유독 머뭇거리게 하는 시절이다. 공적 발화들에서조차 말은 본래 뜻을 잃어버리고 속수무책으로 타락했다. 시인의 일만은 아니겠다. 말 할 자리가 많아진다 하여 말이 진실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 역시 나날이 익숙해지는 중이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가. 시를 어떻게 꾸려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들로 돌연 아연해지는 것은 어쩌면 시대의 필연이다. 그러니 목하 시들이 그 어느 때보다 자주 시인과 시작(詩作)에 관한 사유를 갈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러워 말자. 시가 머무는 곳은 언제나 쓰는 이들의 바람과 읽는 이들의 갈증이 조우하는 자리였다.
이런 영혼이 있었다, 이런 영혼이 있다, 그는 이런 영혼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영혼이 없었다, 복도를 따라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너는 복도를 따라 돌아다닌다, 청자를 잃은 소리처럼, 방향이 없는 아이처럼, 박물관에는 아무도 없다
어떤 것도 참고할 만했다, 파편 하나도 하찮은 게 없었다, 이것은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던 자의 뼈다, 이것은 그의 그릇이며 이것은 그가 마시게 될 물이다, 유리 관 속에 제시된 만물의 세계를 보기 위해 너는 쉬지 않고 돌아다닌다
영혼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영혼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이에 말은 주인 없이 오래 떠 있었다, 잠이 덜 깬 유령처럼 복도를 울게 하는
― 송승언, 「학예사」 전문
이따금씩은 제련된 단어나 연, 명징한 전언들 보다 이런 문장들 앞에서 더 서성거리게 된다. 시의 어지러움이 삶의 어지러움을 온몸으로 노래하는 것일 때 그렇다. 그런 어지러움은 읽는 이를 소외시키는 대신 시 안으로 깊이 끌어들인다. 이 시인의 시가 대개 그러한데, 옮긴 시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 이번에도 발길 닿는 대로 박물관을 걷듯 시를 배회해보는 것이 좋겠다.
마지막 부분쯤을 입구 삼아도 될 것이다. 말이 말 하는 사람과 말 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 유령처럼 부유한다 했다. 무엇을 말 하(지 않)는 것인지 더듬으니 ‘그의 영혼’이 만져진다. 그란 또 누군가 했더니 박물관에 진열 된 뼈와 물건의 주인이다. 박물관이 내처 그렇다. 만물은 유리관에 진열되어 있고 이렇더라, 하는 설명들이 확실성을 뽐내며 덧붙여져 있다. 그런데 그 세계에 영혼이란 없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을 다시 출구 삼는 것이 옳겠다. 말 한 것과 말 하지 않은 것 사이에 말이 있다. 말해지기 전과 후가 달라지는 대상의 의미에 대한 것으로 읽어도 좋겠다. 설명에 갇힌 전시된 뼈는 흙 속의 뼈와 다르다. 언어라는 것이 가뜩이나 대상의 본질을 오롯이 옮기기 어려운데다 지금과 같이 언어의 가치가 퇴색된 때라면 더욱 그러하겠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그래서 이것은 이즈음의 시에 관한 시다. 시인은 대개 학예사이다. 언어로 시에 세계를 진열한다. 그러나 명민한 시인은 비장하게 직무 유기를 고려한다.
시인은 언어 속에서 백야를 발견하고 겸허해진다.
입속의 새떼를 모두 날려보낸다
입안에 백야를 기른다 말은
너는 언어를 머금고 있는 연습이다
세계를 머금는다는 거……
네트는 별빛처럼 광대하지만 고독하다
멀리 있는 행성일수록
우주와는 가까워지듯이
시 쓰기는 거주지를 잊는 경험이다
내가 희생시킨 몇 마리의 사슴들
시 쓰기의 평균율, 불쑥,
자신도 모르는 시간으로 기습하는 거
하야의 이미지들
백야엔 뱀파이어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희미한 빛을 마신다.
그 빛은 뱀파이어의 피가 된다
몸을 숨긴 언어들이 백야가 되어갈 때
시는 피붙이를 찾는다 빛에 피가 닿듯이
국적 없는 바람
어미 없는 꽃잎
빗소리가 가득 쌓여 있던 하늘
백야에 나는 언어 속으로 사라진다.
― 김경주, 「백야의 타이핑」 전문
비슷한 고뇌를 통과해 새 길을 밝힌 시를 옮겼다. 시인이 적어낸 시 쓰는 법이다. 대놓고 시론이 된 시는 가끔 지루하다. 다만 시론을 시의 몸체로 보여주는 시는 경이롭다. 한 시인이 문득 언어 속에서 백야를 발견한다. 백야라 쓰였으나 겸허라 불리기도 한다. 그것을 입 안에도 옮겨놓기 위해 시인은 무려 한 세월 품었던 제 언어들을 날려 보낸다. 놓침이 아니라 놓아줌이다. 지난 날 그에게 시어는, 새떼같이 구구절절 소란했다.
그렇게 비워진 입속에 백야가 자리 잡는다. 언어를 오래 머금기 위한 것이다. 수다스러운 언어들로부터 멀어진 시가 외려 본령에 닿길 기대해본다. 나와 거리를 둔 행성이 실은 우주에 가깝듯 말이다. 이것은 수많은 네트 위에서도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 차라리 고독으로 걸어가려는 시인의 혼신이다. 다만 백야를 문다는 것이 침묵을 뜻하지는 않는다. “거주지를 잊는 경험” 이후 이 시는 앞의 행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가 된다. 새로운 “시 쓰기의 평균율”로 만들어져 있어서이다.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기도 하다. 내내 하얀 여름 밤, 줄곧 검을 뱀파이어, 붉은 피, 하얀 빛, 방향 없는 바람, 흩날리는 꽃잎, 어둑한 하늘. “하야의 이미지들”이 폭발하는 감각으로 빚어져 있다. 읽으려 할 때 닿아오지 않지만 닿으려 하면 읽힌다. 지시적인 언어들 대신 포에지가 최대한 끌어올려져 있어서이다. 이것이야 말로 시가 찾은 새로운 “피붙이”, 대상의 설명서가 아니라 감각의 그릇이 된 언어일 터. 시인이 언어를 지독하게 갈아 시는 감각으로 지극하게 피었다.
감각이라는 권능
누구나 가져서 누구도 아끼지 않지만 감각에는 권능이 있다. 그것은 말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오면 다감한 괴력을 발휘한다. 그런 풍경을 읊은 시가 있더랬다.
쌀 옆에는 운동화가 있다
생리대 옆에는 오렌지가 있다
과도 옆에는 상비약이 있다
팬티 옆에는 서류 봉투가 있다
가방을 열어 변기를 꺼낸다
손수건을 열어 욕조를 꺼낸다
발바닥을 열어 슬리퍼를 꺼낸다
땡볕을 궁리하며
나날이 시커매진다
빨래를 궁리하며
나날이 더러워진다
솥을 들고
내 나라를 삶아
새로운 친분을 도모한다
불법 체류자와 함께 나누어 먹는 두부조림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는 레바논 여자와 함께 나누어 먹는 생수
― 김소연, 「가방 같은 방」 부분
눈앞에 그려야 할 것은 이국을 떠도는 누군가의 가방. 그이의 가방이라면 사실 거의 방이다. 방에 있어야 할 것들이 다만 어지러이 담겨있는 것이다. 쌀 옆의 운동화, 생리대 옆 오렌지, 과도 옆의 상비약, 팬티 옆 서류봉투. 가방 안의 연상법이다. 여행의 일이 다 그렇다. 손수건이 자주 욕조의 역할을 하고, 빨래를 궁리해도 나날이 때가 쌓인다. 그 곤궁함이, 곤궁함이라 말해지는 대신 짧은 행의 나열로 감각된다. 이런 시는 감각이 지닌 권능에 대해 잘 아는 시인으로부터 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시의 절반 이후를 읽고 그것을 절절히 짐작했다.
여행자가 딱 한 가지를 버려야만 한다면 그것은 말이어야 할 것이다. 용도 폐기 된 내 나라 말도, 접근 불가한 그 나라 말도 그에게는 별무소용이다. 그러나 덕분에 다시 되새긴다. 그보다 더 오랜, 다른 소통 수단이 있었음을 말이다. 새로운 친분을 위해 솥에 제 나라를 삶는다고 했다. 불법체류자와 두부조림을 먹거나 레바논 여인과 생수를 마신다고 했다. 덜 유려하지만 더 익숙한 몸의 언어, 여기서는 미각이다.
서울역의 시끌벅적한 푸드코트 한쪽에
젊은 부부가 음식을 먹고 있다
밥 한 숟갈 뜨고 눈 한 번 맞추고
반찬 한 젓가락 집고 눈 한 번 맞추며
늦은 점심을 먹는다
그러다 뭐라 뭐라 열심히 수화를 하고
미소를 끄덕인다
― 배한봉, 「가을이 지구를 방문하는 이유」 부분
미각은 힘이 세다. 보는 것보다 듣는 것보다 먹는 것이 강력하다. 끼니의 힘이라 해도 좋겠다. 끼니는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다. 때로 선악미추의 판단보다도 앞서, 순식간에 감정의 빗장을 열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식사는 나와 당신을 아주 사소하게 가장 강력하게 우리로 만든다. 수화를 쓰는 부부는 밥을 먹고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 더 깊어진다. 고독한 여행자의 가방은 누군가와 함께 무엇을 함께 먹는 순간 모국의 방이 되어버린다. 그래서일 것이다. 맛의 감각을 사람과 사람의 매듭으로 그려낸 시가 요새, 시에 관한 시 만큼이나 많다.
모든 얼음을 만져볼 수 없지만 나의 사전에는 자주 냉기가 다녀간다 나의 오감이 실패한 단어를 나의 사전이 대신 닿는다 그러니까 나무 안에 흐르는 꽃이 내 사전의 일이다
나의 모국어를 읽을 수 있는 대륙까지가 이 사전의 가능성이겠지만 멀리, 반도를 버린 무덤들도 무간으로 사전에 드나든다 문장도 사전에 정박할 수 있는 이유이다
(…)
사전을 수첩이라 부르는 여자의 눈에서 다친 물고기를 건지는 일도 있다 어떤 날은 사전만 바라봐도 몸이 흐리다 나의 사전은 나의 신체를 흐르는 것이다 사전을 잃어버릴 때마다 악천후가 신체로 드나들었지만 나의 죄 없는 부주의는 그때마다 다른 기후로 이주했다
이 사전이 끝날 때 모든 말들이 일어나 나의 한때를 버릴 것을 안다 폐허에서 무너진 자신의 시간을 바라보는 눈, 그 눈이 나의 사전의 이름이다
― 박진성, 「나의 아름다운 사전」 부분
이쯤에서 처음의 물음을 돌이켜야겠다. 아무 말이나 휘휘 쓸 수 없는 요즘이라 했다. 그럼에도 언어는 시의 처음이자 최소한이라 끝내 버릴 수 없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궁리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으나, 조언을 구하고자 한다면 이 시인에게 하는 것이 좋겠다.그는 조금 별스러운 사전을 지녔다.
만져보지 못한 얼음의 냉기를 상상하게 해야 한다. 모국어의 영토 바깥까지도 미쳐야 한다. 이것이 저것이다, 알려주는 대신 이것을 느껴라, 교감해야한다. 사전에게 맡겨진 것 치고는 임무가 과도하다. 그냥 사전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사전이다. 사전만 보아도 ‘몸’이 흐려지고, 사전이 ‘신체’를 흐르며, 사전을 잃어버릴 때는 ‘신체’에 악천후가 드는, 그런 시인의 것. 이 사전은 으레 머리로부터 뽑아낸 언어가 아니라 처절히 몸이 뱉어낸 언어를 갈무리한다. 그래서 진심이 의심되는 무람없는 말들 앞에서 속수무책인 이즈음, 이런 사전에서 비롯된 시는 기꺼이 세상과 맞서 줄 것 같다. 아니, 맞서 달라. 그래야 우리도 산다.
실패하는 꽃과 시인의 운명
커튼을 연 피핑 톰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그에 대해서라면 알려진 이야기가 별로 없다. 벌을 받아 추방을 당했다거나 장님이 되었다는 후일담만이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은 마침표로 남아있을 뿐이다. 세비가 낮아졌고 고다이버의 공덕은 높아졌다. 행복한 결말이다. 그리고 불행한 시작이었다. 봉건 질서는 그 후로도 오래 건재했고 작인들의 고단한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에둘러 말 할 것도 없이, 우리의 삶은 고다이버의 날들 보다 절망적일지도 모른다. 어둡고 부정(不正)한 일이 체적을 넓혀가는 동안 정(正)한 일은 별빛만큼이나 찾기 어려워졌다. 밤이 깊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두 가지 정도이다. 암흑에 눈이 익길 기다리거나 불 밝혀 나아가는 것. 나는 모른 척 하고 있지만 시인들이 어느 쪽을 택할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여 마지막으로 이 시를 적는다.
신바닥에 진흙이 달라붙는 아직 덜 마른 농촌 길에 홈이 뚜렷한 경운기 바퀴자국이 찍혀 있다. 그 바퀴 자국은 갠 날은 사라지고 비가 내리는 날만 일을 하는 이상한 흔적이다.
자국만 있고 실체가 보이지 않는 현장 한쪽으로 달맞이꽃 한 송이 비켜서 피어있다. 사람들은 딸딸이가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사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 허만하, 「경운기 바퀴 자국」 부분
비 내리는 날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냥 비도 아니고 누군가의 신발 바닥에 진흙을 남길 만큼 세찬 비다. 그런 궂은 날만 일을 하고 갠 날엔 생색도 안낸다. 이 존재의 습성이다. 죽었다고 했지만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존재의 현실이다. 시가 일러주는 대로 경운기라고만 생각하기에는 이 습성과 현실이 어쩐지 낯익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쓴다.
궂은 날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나서는 이가 시인이다. 문학의 죽음이 말해진지 오래이지만 시신詩身이 아직 시신屍身으로 발견되지 않은 것은 그 고되고 갸륵한 노고 덕이다. 그런 시인의 자취라면 진흙길 위에도 남아 시가 될 것이다. 곁에 피었다는 꽃이 가슴을 찌른다. 달맞이꽃은 그리움과 기다림을 품고 있다 했던가. 시절에 속절없고 희망이 가뭇없어도,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시인들은 계속 쓸 것이다.
꽃으로 시절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복 될 패배에 이 시절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아름다움이 있다. 많이 쓴다는 사실만으로 진정성을 논할 수는 없다 해도 거듭 쓰려는 마음만은 진심인 것이다. 어둠이 언제 걷힐지 모른다지만 시인들은 다시 꽃을 피워 달라. 그래야 우리가 달빛을 꿈꾼다.
전소영 문학평론가 201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홍익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