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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곡곡] 공주시 데시그램북스(제2회)

  • 작성일 2022-06-01
  • 조회수 927

[책방곡곡]

 

 

 

공주시 데시그램북스(제2회)

 

 

사회/원고 정리 : 멧새
참여 : R.SSAM, 커피적인평화, 윤여름, 왕버섯
책 : 윤성희, 『날마다 만우절』(문학동네, 2021)

 

 

 

 

멧새 :
오늘 5월 2일 저녁 7시, 데시그램북스에서 윤성희 님의 소설 『날마다 만우절』 이야기를 엮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2021년 7월에 나왔습니다. 책 맨 뒤에 각 단편의 발표 지면이 나와 있는데, 2016년부터 2020년까지의 소설입니다. 1년에 한두 편 수준이면 다작의 작가는 아니지만, 작품이 나올 때마다 고평을 받으며 문학상도 꽤 많이 받았습니다. 한국일보문학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동인문학상도 받았습니다. 소설가 윤성희는 ‘단편소설의 마에스트로’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윤성희의 소설이 역사적인 소재도 아니며, 판타지 요소가 조금씩 들어가 있긴 하지만 판타지 작가도 아닙니다. 소설가 윤성희는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들과 실제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데뷔작 「레고로 만든 집」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태도입니다.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고, 우리 가족과 친척의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작가 윤성희는 리얼리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의 『날마다 만우절』에 실린 11편의 작품 역시 하나하나 짚어 볼 만한 주제들이 가득합니다. 우선 R.SSAM 님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마음을 움직인 장면들

 

R.SSAM :
책에 실린 작품 모두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스위치」의 ‘막냇삼촌’에 마음이 많이 쓰였어요. 살아가면서 숱한 우연을 만나지만 어린 시절 촉망받던 막냇삼촌이 교도소에 가게 된 처지가 몹시 쓸쓸했죠. 화자인 ‘나’에게 삼촌은 “스위치 같은 거야. 그렇게 이상한 놈이 되는 건. 버튼 하나로 왔다 갔다 하는 거지. 그러니 스위치를 잘 켜고 있어야 해.”(279쪽) 하고 말합니다. 그 대목을 곱씹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어느 밤」에서, 훔친 킥보드를 타다 넘어진 ‘나’를 독서실 청년이 발견하고선 전화로 구급차를 부르죠. 구급차가 올 때까지 청년과 두런두런 대화하며 어느새 청년을 위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대목에서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청년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아팠겠네. 나는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그 후로 뭔가가 사라졌어요. 성공하고 싶은 마음, 뭐 그런 것들이요. 사람들한테는 고시 공부 중이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안 해요. 청년이 말했다. 나는 그래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든 거라고.(108~109쪽)

커피적인평화 :
저는 「어느 밤」에서 킥보드를 타다 크게 넘어져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이상하게도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바쁜 일상을 강제로나마 정지시킨 상태에서 맛보는 휴식의 희열이랄까요? 그런 해방감 같은 게 있었습니다. 생업과 학업으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까 이런 장면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아요.

멧새 :
「어느 밤」에서 ‘나’는 넘어져서 비를 맞죠. 그것처럼 「여름방학」이나 「남은 기억」에서 몸이 물에 젖는 장면이 있습니다.

    빗방울이 이마에 떨어졌다. 비를 맞자 웃음이 났다. 쌤통이다. 쌤통이야. 차라리 비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07쪽)

커피적인평화 :
맞아요. 그 부분도 빡빡한 일상에서 잠깐이라도 일탈하는 장면이어서 같은 인상을 받았답니다.

    물이 나오는 시간이 끝났는지 분수대는 작동을 멈추었다. 지금 누군가 날 본다면 비도 오지 않았는데 옷이 젖은 걸 이상하게 여길 것만 같았다.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었다. 속옷이 비칠 것이다. 누가 보면 어때. 나는 창피해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여름방학 때는 누구나 물놀이를 하는 법이니까.(32쪽)

    “이 할머니가 물총에 맞고 싶대.” 아이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미끄럼틀 뒤에 숨어 있었던 아이가 그럼 그러자,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 가슴에 향해 물총을 쏘았다. 차가웠다. 나머지 아이들도 따라서 물총을 쏘았다. 처음에 머뭇거리던 아이가 가장 신나게 총을 쏘았다. 옷이 흠뻑 젖었다. “이제 시원해요?” 아이들이 물었다.(86쪽)

윤여름 :
저는 윤성희 소설을 좋아해요. 그런데 『날마다 만우절』에서 「작가의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본인의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위로’가 싫었다는 말이 놀라웠습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작품의 스타일이 고정된 인상을 주는 것에 관한 거부 또는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것. 계속 소설을 써야 하는 입장에서는 참 중요한 통찰로 여겨졌습니다.

    어느 작가마다 꼬리표가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위로라는 단어가 꼬리표처럼 따라오곤 했다. 그 말이 싫었던 시기가 있었다. 내 글이 뭐라고 독자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타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위로를 준다는 말이 무서워 나는 부러 냉소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다. 소설이란 그렇게 쓸모가 있는 장르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311쪽)

 

윤여름 :
작품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우선 「어느 밤」에서 큰딸인 ‘나’에게 ‘덕선’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게 싫었던 엄마가 동생에게는 ‘지미’란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는데, 술 한 잔 마시고 출생신고 하러 간 아버지가 ‘지민’이라고 이름을 만들어옵니다. 공교롭게도 ‘나’가 놀이터에서 훔친 킥보드에는 ‘장민지’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고, 끝에는 그 킥보드를 원래 자리에 놓아 둘 것을 독서실 청년에게 부탁합니다. ‘이름’의 사연 같은 걸로 엄마와 ‘나’와 딸의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소설적 짜임에 감탄했어요. 「네모난 기억」에서도 정민과 민정이란 이름을 지닌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 소설도 마찬가지죠. 저는 이렇게 짧은 단편에서도 치밀한 구성력을 엿볼 수 있어서 작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왕버섯 :
윤성희 소설의 문장이 참 돋보이는 것 같아요. 배경도 독특했습니다. 단지 세세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네버엔딩 스토리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격정적인 전개나 충격적인 반전, 거대한 성취나 참담한 몰락과 같이 스펙터클하고 진폭이 큰 감정의 울림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일상을 다룬 이야기라서 당연한 일이고 또 취향에 따라 선호가 갈릴 수 있으니까요. 앞에서 말했듯 작가의 문장력과 다루는 대상에 관한 찬찬한 시선은 참 좋았습니다.

 

멧새 :
저는 윤성희 소설의 핵심은 뭘까 생각해 봤어요. 어쩌면 윤성희 작가만이 아니라 모든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핵심 동기라고도 생각되는데요. 예를 들면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불이 켜진 저 집에 누가 살까 상상해 보았다.(96쪽)

 

멧새 :
작가라는 존재는 타인 그리고 그의 삶과 죽음, 그의 사연과 인생에 관심을 기울이죠. 위 문장처럼 깊은 밤, 건너편 동의 아파트 건물에 딱 한 군데 불이 켜져 있을 때 ‘저 집에는 어떤 이가 살고 있을까? 무슨 일로 이 심야에 불을 켠 것일까?’ 하는 호기심의 발동이 그 시작입니다. 여기에서 비롯된 생각은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 타인에 비춰 보는 자신의 생과 최후, 그리고 ‘나’에 관한 타인들의 평가마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모든 것에 관한 호기심이 작가들에게 제1의 창작 동기가 되지 않을까요? 호기심은 막연한 관심이나 애정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걸 소설화하고 싶은 욕망은 뭘까요? 그 욕망은 어쩌다 생겨나게 될까요? 윤성희의 작품을 읽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작가는 지어내는 사람일까, 아니면 옮겨 적은 사람일까? 그런 생각까지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떤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

 

윤여름 :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여섯 번의 깁스」를 읽으면서 알게 된 건데요.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무려 여섯 번이나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겪습니다. 그 사고들은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게도 어이없이 일어나고, 코믹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여섯 번의 깁스를 하는 동안, 가장 친한 친구인 ‘윤정이’를 잃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여러 차례 실연과 파혼마저 겪습니다. 스무 해 동안 한 사람이 겪는 일치고는 몹시 큰일이라 굉장히 참담한 지경이 될 법한데, 희한하게도 삶의 고비 중간중간에 여섯 번의 깁스를 한 것이 완충 역할을 했습니다.

    응급차에 실려가면서 나는 이 정도 사고면 갈비뼈는 부러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수 없으면 엉치뼈나 다리가 부러졌을 것이다. 이번이 여섯 번째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네 번의 절교와 한 번의 파혼을 당했다. 네 번의 절교와 한 번의 왕따를 당한 뒤 선물처럼 찾아온 단짝 친구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 두 번이나 이직을 했고, 스트레스로 탈모를 겪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섯 번째로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렇게 애를 써서 나는 그냥 어른이 되었다.(59쪽)

 

윤여름 :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에 ‘내’가 놓일 수도 있었는데, ‘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그 고비들을 완만히 넘어가게 한 거죠. 삶이란 이렇게 전개될 수도 있구나, 완전한 절망 가운데서도 삶에는 우연이라는 게 있어서 또 이렇게 다시 살아가게끔 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예를 들어, 작가 이태준이 단편 「달밤」에서 ‘황수건’이라는 활달하고 구김살 없는 서민을 통해 식민지 지식인의 우울함을 해소하면서 정취 가득한 작품이 되도록 한 것과 비견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의 깁스’도 작중에서 그런 역할을 맡고 있어요.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경쾌하게 상승시켜 삶의 고비를 비교적 어렵지 않게 넘어가도록 적절한 장치를 절묘하게 배치한 작가 윤성희의 솜씨가 두드러진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왕버섯 :
그런 작품이 또 있어요. 「블랙홀」도 마찬가지예요. 부모님부터 해서 언니네도 그렇고, 오빠네까지 어른들이 말하듯 동티가 난 것처럼 모든 집안 식구들마다 안 되고, 집이 넘어가고, 살림은 갈수록 졸아들고, 급기야 다치고, 돌아가시죠. 막내인 나도 일이 안 풀리긴 마찬가지죠.

    오빠는 울었다. 하지만 나도 언니도 오빠를 달래 주지 않았다. 오빠, 그런 이야기라면 나는 수십 개도 더 말할 수 있어.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내 안에는 언니가 말한 구멍보다 더 큰 구멍이 있다고.(249쪽)

 

왕버섯 :
하나 남은 시골집을 처분하러 시골로 내려간 오빠가 소식이 없죠. 언니랑 가보니, 사소한 일들이 자꾸 미뤄져서 어쩔 수 없이 시골집에 머물러 있었던 거예요. 근데 버리려고 꺼내 놓은 김치냉장고에 들어 있던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형제자매 셋이서 그 김치로 밥을 해 먹고, 자연스레 지난 일들을 하나둘 꺼내며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게 돼요. 이 집안도 절망이라면 다른 단편에 나오는 가족들 못지않을 텐데, 이 김치통 하나가 식구를 다시 모으고 서로의 얘기를 들어 주고 다독이는 풍경을 만들죠. 앞에 말씀하신 것처럼 김치통도 ‘여섯 번의 깁스’처럼 삶을 다시 이어 가게 하는 완충장치 역할을 하는 거죠. 인생을 비참한 지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삶의 우연한 작은 사건들이랄까, 그런 요소들을 작가께서 심사숙고해서 잘 배치하신 것 같아요.

R.SSAM :
얘기를 듣다 보니, 「스위치」의 내용도 어둡다면 어두운 상황인데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겠어요. 가족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막냇삼촌은 교도소에 가 있죠. 하지만 ‘나’에게 막냇삼촌은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이고, 또 ‘나’를 예뻐한 사람이죠. 삼촌이 교도소에 가게 된 건 동물원의 좁은 우리에 갇혀 제 삶을 살지 못한 채 생기를 잃은 동물을 자신의 손으로 안락사 시켰기 때문이었죠. 여느 가족들처럼 이해받지 못한 채 이방인처럼 따돌려진 식구가 꼭 한두 명 있기 마련인데, 이 작품에서는 막냇삼촌이 그런 존재죠. 새해 첫날 삼촌을 면회하러 온 ‘나’는 공휴일엔 면회가 불가능하단 얘기를 듣고 헛걸음을 하게 되죠. 반입금지 품목이라 딸기가 그려진 분홍색 양말도 삼촌에게 전해 주지 못한 채 교도소 근처의 식당에서 순두부찌개를 시켜 놓고 삼촌을 생각합니다.

    콘솔 박스에서 안경 닦는 천을 찾아내 안경도 닦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점퍼 안주머니에 넣어 둔 양말이 생각났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양말을 벗고 새 양말을 신었다. 딸기에는 씨가 열두 개씩 박혀 있었다. 내일 막냇삼촌은 눈 쌓인 운동장을 걸을까? 양말은 두툼한 걸 신는지. 장갑은 있는지. 그게 궁금해졌다.(280쪽)

R.SSAM :
여러분 말씀에 기대어 생각해 보면, ‘딸기 무늬의 분홍색 양말’이 자칫 가라앉을 수 있는 분위기를 경쾌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새해 첫날에 내린 눈과 자동차 보닛에 얹어 놓은 눈사람도 그렇고요.

 

다정한 말의 선한 힘

 

커피적인평화 :
저도 얘기를 들으면서 읽었던 단편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모든 작품에 공통된 ‘무엇’이 느껴지네요. 아까 여름 님이 말씀하신 「작가의 말」을 다시 봤어요. 뒷부분에 작가가 이런 말을 했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구멍을 빠져나올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들이 덜 외로울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들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들에게 다정해지고 싶었다.(312쪽)

커피적인평화 :
위로를 주는 작가라는 말이 부담스러웠던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그러고 싶다고, 용기를 주고, 덜 외롭게 ‘괜찮다’ 하고, 다정해지고 싶다고 말이죠. 이어서 작가는 “소설은 독자의 삶과 만난 후에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이제 나는 조심스럽게 인정한다. 그러니 내 소설도 누군가의 삶과 멋지게 조우하길. 우연히 스쳐가는 동안 서로 위로를 받길. 정말 그렇게 되면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날마다 만우절』에 실린 작품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자신과 가족을 생각하고 불행과 우연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윤성희 작가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싶네요. 당신의 작품이 내 삶과 조우했고, 위로받았다고, 그래서 행복해해도 좋다고 말이죠.

멧새 :
말씀대로 작품 속에서 불행을 겪는 인물들이 다시 기운을 차리고 힘을 내는 근거들이 새롭게 눈에 띄는 것 같아요. 그 근거들 가운데는 ‘어떤 말들’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눈꺼풀」에서 ‘내’가 사고로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워 있는데, 어떤 말이 들려오죠.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러면 안 된다고. 누군가가 또 말했다. 속삭이는 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구세요? 나는 속으로 물었다. 내 옆 침대에 있던 할머니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나흘 전에 응급실에 실려와 지금까지 나를 지켜봤다고.(189∼190쪽)

멧새 :
그 말을 시작으로 옆 침대 할머니가 무언으로 전하는 말씀에 따라 힘을 주어 눈꺼풀을 뜨게 되거든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에서도 ‘나’는 삼촌이 떠나기 전에 남긴 ‘착하다’는 말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는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삼촌이 다시 말했다. “착하다. 착하다. 착하다.” 세 번이나 미리 칭찬을 했으니 나중에 착한 일을 세 번 더 하라고 삼촌이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슬펐다. 나는 삼촌이 떠날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착한 아이가 되기 싫다며 화를 냈다. 다음날 삼촌은 돈을 벌어서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남겨 두고 떠났다. 부자가 되면 새집을 지어 주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엄마는 그 쪽지를 보고는 미친놈이라는 욕을 수십 번도 더 했다.(201쪽)

윤여름 :
우리가 살면서 듣는 여러 말 가운데 잊히지 않는 어떤 말들이 있죠. 그 말들이 하나둘 모여 내 자신의 생각이나 태도 같은 걸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말이 몸에 새겨진다는…… 그러니까 체화된다고 할까요? 그래서 ‘나’는 친구와 형제와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도 감히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날마다 만우절』에는 그런 류의 말들이 많이 등장하죠. 그래서 저는 한편으론 이 작품집이 ‘말의 힘’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런 말들도 참 아름답습니다.

    자전거를 탄 아이가 골목길에서 불쑥 튀어나와 아저씨가 급정거를 했다. 그 바람에 나는 혓바닥을 씹었다. 어떤 아이가 우리가 탄 트럭을 따라오면서 비눗방울을 불었다. “정말, 정말 좋았어요. 그 순간이요.”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자요?” 한참 후에 나는 아빠를 불러 보았다. “아니.” 아빠가 대답했다. 나는 첫눈이 내리면 그때도 이렇게 같이 침낭에서 잠을 자자고 말했다.(223쪽)

멧새 :
“아빠, 자요?” 하고 아이가 묻자 아빠가 무심하게 “아니.”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마음이 뭉클해지네요. 카뮈의 『이방인』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무심한 다정함’이라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대목입니다. 『날마다 만우절』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낱말들을 얻게 되네요. 가족, 친지, 이웃 그리고 ‘나’, 질병과 사고와 죽음, 그리고 생계와 음식, 집 등등 말이죠. 『날마다 만우절』에는 관혼상제가 모두 들어 있어요. 아이가 어른이 되고, 짝을 짓고, 가족을 만들고 또 가족을 잃고, 이를 슬퍼하고 기억하는 일들. 이렇게 윤성희의 소설은 읽는 이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윤여름 :
그렇죠. 윤성희 작가의 소설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언제 어디서든 다시 자주 읽힐 거라고 생각해요.

 

멧새 :
동감합니다. 자, 이것으로 『날마다 만우절』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애쓰셨습니다. 다음달에 이야기 나눌 책은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입니다. 다 아시듯이 최근 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 후보에 올라간 작품입니다. 다음 모임도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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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웹진 202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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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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