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리뷰] 월간 〈읽는 극장〉 5회 – 작정하고 ‘추락’

  • 작성일 2021-09-06
  • 조회수 1,002

[리뷰]

 

 

월간 〈읽는 극장〉 5회, 〈작정하고 ‘추락’〉 리뷰

 

 

 

 

아르코예술극장 개관 40주년 기념
월간 읽는 극장 5회, “작정하고, ‘추락’”
연극〈추락ll〉에 대해 나누는 연출가와 번역가의 문학 낭독회

 

 

 

    예술은 우리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고, 쾌락을 즐기거나 맘껏 눈물 흘릴 수 있게도 해 줍니다. 또 어떤 예술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무례함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있는가 하면, 무시하고 모른 척하고 있던 그 지점을 끄집어내어 대화의 장에 올려놓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관객으로서 불편한 작품을 봐야 할까요. 불편한 그 낯선 감각을 마주한 후 다시 그전처럼 모른 척할 수 없게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라면 오히려 다르게 질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불편함이 관객인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 줄까요? ‘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가, 불편함을 왜 느껴야 하느냐’라는 거부감 섞인 불평 대신 ‘그럼 우리는 그 불편함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떨까요? 그 설명되지 않는 낯선 감각과 마주할 때, 여태껏 세상에 존재해 온 언어는 왜 이를 왜 설명하지 못하는지 의문을 품어보고자 합니다.

 

    7월의 〈읽는 극장〉은 〈작정하고, ‘추락’〉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존 쿳시의 소설 『추락』을 원작으로 한 연극 〈추락Ⅱ〉을 연출한 김한내 연출가 그리고 연극에 관객으로 함께 한 송섬별 평론가가 자리했습니다.

 



 

    연극 〈추락Ⅱ〉의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 루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사는 50대 백인 남성으로 대학교수입니다. 어느 날 루리는 자신이 가르치는 멜라니라는 학생과의 성추문을 혐의로 학내 조사위원회에 소환돼 권고사직을 당하고, 딸 루시가 운영하는 농장으로 떠나 함께 지내게 됩니다. 루리는 쉬기도 하고 루시가 어떻게 사는지를 보기도 하는데 그러던 중 루시가 폭력적인 사건을 당합니다. 원작과 연극의 중심이 되는 이 이야기에는 성폭력과 젠더 불평등, 인종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 등 다양한 문제와 맥락들이 섞여 들어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연극은 힘의 질서가 휘청이며 변화하고 있는 사회에서 행해지는 혐오와 증오에 대해 말합니다.
    송섬별 번역가는 원작 소설에 대해 좋아하기도 싫기도 한 복잡한 소설이라고 감상을 밝히며, 루리와 루시라는 두 명의 주요 인물에 대한 묘사가 불균형할 정도로 치우쳐져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소설 자체가 루리 교수의 행적을 따라 진행된다거나 그의 내면까지 상세히 서술되어 그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고 설명할 기회를 충분히 가지는 반면, ‘루시의 내면은 루리 교수조차도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수수께끼처럼 제시’된 것이죠. 김한내 연출가의 말한 바로는 연극을 본 관객들 역시 ‘그런 폭력을 당한 후 아버지의 적극적인 설득과 여전히 다시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의 위협에도 왜 루시는 왜 계속 그곳에서 살겠다고 고집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물어오기도 했습니다. 〈추락Ⅱ〉를 연출한 김한내 연출가는 연극을 준비하며 원작에조차 나와 있지 않은 의문에 대해 직접 답하고자 했습니다.

 

    “애초에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연습실에 거하는 우리 모두가 루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 루시는 알고 있었던 거 같다. 루리가 속해 있는 상징계 안에서 루시의 욕망은 스스로를 제대로 설명할 언어를 발견할 수 없음을. 그리고 언어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것이기에 나의 존재와 나의 경험을 포착할 수 없을 거란 걸.” (김한내, 연극 〈추락Ⅱ〉 메모 「〈추락Ⅱ〉를 준비하며 - 답 하기 어려운 질문에 답 해보기」 중)

 

    어떤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기억과 언어 속에서 지워져 왔습니다. 여성, 소수자의 이야기가 특히 그래 왔지요. 지금까지 대변되고 설명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내면과 욕망에 대해 주목할 때에도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인물이 어떻다’라고 내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게 참 쉽죠 사실은. … 루리 입장에서 얘가 앞으로 뭔가 계속 고통받을 거 같고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다 보니까 … 루시도 자기의 겪은 바를 토대로 … 충분히 주체적으로 결정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너 불행할 거야, 너 고통 받고 있어서 판단을 못 해서 그래’라는 방식으로 평가절하하기가 굉장히 쉬울 수 있겠다….” (양경언)

 

왼쪽부터 송섬별(번역가), 김한내(연출가), 양경언(진행자/문학평론가)

 

    적어도 〈추락〉 속에서 루시의 내면에 있는 욕망과 감정은 그의 아버지 루리에게 그리고 작품 바깥의 독자들에게조차 온전히 포착될 수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는 언어를 가진 자들로부터 계속 해서 해명을 요구받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질문하며 욕구를 밝혀내고자 했던 김한내 연출가는 이 지점에서 다시 루시를 생각하며, “루시한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루시는 루리로부터 날 이해시켜 달라며 “사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계획도 없고 의사도 없고 다만 논리적으로 부숴내기 위해서” 대답을 요구받았습니다. 루시의 감정과 욕망이 루리에게 또는 이 사회에게 쉽게 이해되고 설명 가능한 것이었다면, 굳이 당사자가 해명하고 몇 번씩 설득하지 않았어도 이미 우리에게 포착되었을 겁니다. 말해지지 않았던 것에 대해 평소처럼 쉽게 판단하지 않고 질문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며 우리는 우리의 언어가 부족했음을, 설명을 요구하는 그 질문이 오히려 억압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읽는 극장의 눈은 루시에 이어 멜라니로 이어졌습니다. 소설 속에서 루시의 내면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거나 주류적 언어에 의해 곡해되었다면, 멜라니는 그 존재 자체가 아주 자연스럽게 지워졌습니다. 김한내 연출가는 “루리가 심판대에 서고 케이프타운을 떠나면서 멜라니의 존재는 없어지고, 나중에 루리가 찾아가서 해명을 하고 사과를 하는 상대방도 멜라니가 아니라 멜라니의 아버지로 대변되는 이 가족”이라며, ‘멜라니가 중간에 사라진’ 것이 원작에서 가장 아쉬운 지점이라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연극에서는 어떻게 재해석되었을까요?

 

    “멜라니의 목소리는 그럼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끝까지 멜라니를 남겨놓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케이티로 존재하게 만든 건데요…” (김한내)

 

    작품에는 루시네 집에 함께 사는 개 케이티가 등장합니다. 연극에서 케이티를 연기하는 배우는 다름 아닌 멜라니 역을 맡은 배우입니다. 멜라니 역할의 옷도 그대로 입고 특별히 개 흉내를 내지도 않으며 연기합니다.

 

    “처음에는 멜라니가 뒤에서 루리를 훔쳐보는 방식으로 본인 자체는 어둠 속에 숨어 있고 훔쳐보는 시선, 뒤에서 바라보면서 고발을 하면서도 정면에서 ‘니가 나한테 잘못했잖아’라고 얘기할 수 없는 시선을 사용하다가 … 나중에는 루시가 당하는 일에 대해 루시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쫓아가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루리와 정면으로 응시를 할 수 있는 시선에서 끝나게 하고 싶었거든요. 그게 원작에서 아쉬웠던 멜라니의 목소리를,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연극적으로 찾아주고 싶은 저의 시도였어요.”(김한내)

 

    멜라니의 역할을 맡았던 배우는 공연 속 장소가 루시네 농장으로 이동한 후에도 개 케이티로 등장하여 계속 인물들 주위에서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의도적인 배치였습니다. 그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리라는 인물의 배경과 상황을 좀 더 살펴야 합니다.

 

    작품 속에서 루리는 백인으로서의 기득권, 남성으로서의 매력이 잃어가고 있는 중년이라는 위치, 영문학과 교수에서 커뮤니케이션 학과로의 이동 등 시대적으로도 개인적으로 자신의 가치 혹은 기득권이 사회적으로 유지되지 무시되는 와중이었습니다. 연극에서는 삭제되었지만, 소설 원작에서 루리는 멜라니 이전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칭 ‘연애’를 해왔는데, 이는 백인 중년 남성 교수가 스스로의 힘을 확인하는 방편으로써 연애를 선택했을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동등한 위치에 있는 이들 간의 관계 맺기가 아닌, 자신의 위치와 기득권을 확인하는 과정인 것이지요. 김한내 연출가는 인간과 개 역시 이렇게 불균형한 관계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실 개라는 존재도 동물이라는 존재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느끼게 해 주는 존재가 그 이면에 동물이라는 대조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고,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기 때문에 힘을 갖고 있고 인간이기 때문에 특별하고 뭔가 더 우월한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해 주는 것도 역시나 개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김한내)

 

    즉 백인 남성 교수인 루시와 대학생 멜라니(또는 루시와 관계한 더 많은 여학생들) 사이에는 우월성과 타자화의 권력이 있고, 이는 인간과 개(동물) 사이에도 역시나 존재한다는 통찰입니다. 연극 〈추락Ⅱ〉의 재해석에서는 멜라니와 케이티가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고 보고, 한 명의 배우를 통해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지요. 개 역할을 사람이 사람답게 연기하는 것을 보는 관객은, 사람의 소유물이나 인형처럼 타자화되었던 동물(개)에게 주체성이나 인격이 부여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개와 사람 사이에 그어져 있던 경계를 인식하지 않았을까요. 또한 멜라니 역할과 같은 배우가 개 케이티를 연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멜라니’들’ –루시의 자존심과 권력을 확인시켜 주는 수단으로서 폭력의 대상이 되지만, 그럼에도 목소리와 존재는 쉽게 사라지는– 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연극 〈추락Ⅱ〉에서 케이티를 통해 멜라니를 계속 존재하게 하게하고 나아가 마지막에는 루리와 정면으로 응시하기까지 연결 지은 것은, 종(인종)-젠더 기득권과 타자화된 존재들 사이의 불균형을 ‘작정하고’ 적극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닐지 조심스레 짐작해봅니다.

 

왼쪽부터 송섬별(번역가), 김한내(연출가), 양경언(진행자/문학평론가)

 

    송섬별 번역가는 첫 번째 낭독에서 여성들의 분노에 대한 에세이집 『불태워라 – 성난 여성들, 분노를 쓰다』에 직접 쓴 역자 후기 「세라 크루라면 어떻게 했을까」 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글은 “‘나는 끝까지 존엄을 유지해야 하고, 분노를 해서는 절대 안 되며, 내가 그릇이 크다는 말을 많이 들어온 만큼 끝까지 견디고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그 그릇이 깨졌을 때, 내가 그 분노를 견딜 수 없었을 때 저한테 일어났던 일”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미친 사람처럼 화가 날 때 세라 크루 역시 ‘억울했을까’, ‘분노의 그릇이 견디다 못해 깨졌을까?’ ‘아니면 품위 있게 계속 견디고 버텼을까?’라고 질문합니다.
    송섬별 번역가는 이 글을 낭독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이 원작에서 또는 공연에서 멜라니한테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멜라니가 할 수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 중에 하나와 비슷할 수도 있지 않을까?” (송섬별)

 

    멜라니는 말해진 적 없는 이야기를 속으로 간직한 채, 소설 속에서는 사라졌고 연극 속에서는 인물들을 응시한 채 주위를 맴돌며 존재했습니다. 송섬별 번역가의 이 연결지음을 통해 멜라니에게도 견디다 못해 깨질 만큼 분노가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이야기되었다면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해집니다. 그럼에도 멜라니의 진짜 마음과 생각은 결국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진 존재와 그 마음, 분노에 대해 질문하고 상상하고 궁금해함으로써, 멜라니의 존재와 언어가 지워졌다는 그 사실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기억됩니다.

 

    우리는 연극 〈추락Ⅱ〉와 7월의 읽는 극장 〈작정하고 ‘추락’〉을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모르는 욕망과 언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들이 우리 사회에서 타자로 구분 지어져 왔는지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른 존재에 대한 깨달음 역시 거리를 두고 계속해서 ‘타자’의 위치에 두는 태도로 이뤄진다면 이는 대단히 문제적입니다.
『불태워라 – 성난 여성들, 분노를 쓰다』라는 제목에 대해 송섬별 번역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선동적으로 보일 수 있는 제목을 가져온 것도 에세이집 자체의 의도가, 편집자들이 여러 작가들로 하여금 분노에 대해서 해석을 하거나 거리를 두고 멀리서 ‘여성의 분노란 무엇인가’ 이렇게 바라보는 글이 아니라 실제로 분노를 느끼면서, 내가 지금 화가 나 있는 상태로 글을 써라, 페이지가 불에 타서 재가 될 정도로.” (송섬별)

 

    “해석을 하거나 거리를 두고 멀리서 여성의 분노란 무엇인가”라고 관음하는 태도는 곧 그 일은 당신의 일이고 내 일은 아니라는 구분 짓기가 됩니다.
분노는 우리의 언어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감정이 되어야 하며, 해명을 요구받는 대신 쉽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존재들이 내 옆에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되며 살아갈 수 있게 우리는 부단히 질문하고 공감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글의 처음에 ‘’우리는 그 불편함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8월입니다. 코로나19 상황은 더 심각해지고, 무겁고 축축한 공기는 더 뜨거워졌습니다. 혐오와 증오, 폭력과 차별을 경계하는 힘도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혼자서는 하루하루 제대로 살기도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 팍팍한 시대를 함께 분노하고 함께 불편해 하고 함께 이야기하며 같이 뚫어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읽는 극장과 함께하는 모든 분이 9월도 무탈히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월간 읽는 극장 8월편 보기

 




월간 읽는 극장 8월 편 “기억 전쟁”


 

 

    글쓴이 : 김현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코로나와 기후위기의 시대를 어떻게 같이 잘 살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대화와 토론, 수다와 위로가 오가는 우리의 시간과 장소들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함께 춤추기를 좋아합니다.

 

 

 

월간 읽는 극장 아카이브

 

▶ 7월 읽는 극장에서 이야기 나눈 공연

연극 〈추락ll〉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7.9~18)

 

 

 

 

 

▶ 7월 〈읽는 극장〉에서 낭독된 문학 작품

릴리 댄시거, 『불태워라 : 성난 여성들, 분노를 쓰다』번역 송섬별

 

 

 

 

 

 

 

 

   《문장웹진 2021년 09월호》

 

추천 콘텐츠

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