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대구 차방책방(2회)

  • 작성일 2020-08-01
  • 조회수 1,197

[책방곡곡]

 

 

 

대구 차방책방(2회)

지금, 여기, 한국 문학

『화이트 호스』 강화길

 

 

사회/원고정리 : 이재은
참여자 : 이재진, 홍지훈, 신해리, 김수운

 

 

 

 

 

    대부분의 경우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이미 남성 권력 위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오랜 시간 동안 한국 문학에서 여성 캐릭터는 수동적이고 희미한 대상, 가부장제도의 요소로 등장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여성이 주인공인 서사가 자주 생겨나면서 가부장제를 벗어던지고 대상화로부터 자유로워진 여성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획일적으로만 그려지던 여성 캐릭터에 색채를 입히며 단단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강화길 작가의 『화이트 호스』를 함께 읽고 나누며 지금, 여기, 한국 문학이 그리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사회자 : 몇 년 사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많아졌어요. 그중에서도 강화길 작가의 행보는 독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달에는 강화길 작가의 신작, 『화이트 호스』를 함께 읽었죠. 다들 어떻게 읽었나요?

 

신해리 : 처음 읽었을 때는 무서웠어요. 이미지나 상황들이 구체적이고 여성 화자가 중심에 있는 이야기다 보니 감정이입이 잘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상황이나 감정에 대해서 세세하게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감이나 몰입감이 엄청나서 놀라기도 했어요.

 

홍지훈 : 여성 서사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읽었는데 작가의 문장 자체가 굉장히 날카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스릴러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이재진 : 『괜찮은 사람』을 통해서 강화길 작가를 처음 알았고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기대감이 있었어요. 읽는 내내 역시 강화길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읽었어요. 일상적인 상황이나 소재로 감정들을 드러내서 더 스릴러처럼 다가왔어요.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나 공포감들을 잘 표현해 낸 책인 것 같아요.

 

이재은 : 두려움과 공포를 기반으로 감정이 정점에 이르는 과정이 생생했어요. 외부의 자극과 내적 갈등이 대립하는 순간이 합쳐져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감정들이 툭, 툭 터지는 것들이 좋았어요. 캐릭터가 구체적이고 입체적이라는 느낌도 받았고요. 누구도 마냥 선하기만, 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그려 줬다고 생각해요.

 

사회자 : 다들 비슷하게 스릴러처럼 읽기도 하고 여성의 입장에서는 감정이입을 하면서 읽었네요. 단편들을 살펴보면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있고 여성 화자가 중심에 있잖아요.

 

신해리 : 여자가 주인공이라서 감정이입이 더 잘 되는 건 있어요. 특히 이 책은 여자들이 일상 저변에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잘 끄집어냈다고 생각했어요.

 

이재진 : 맞아요.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없는 두려움? 「서우」에서 택시를 탈 때 느꼈던 그런 감정들? 혹시 남자들도 택시 번호판을 외우거나 메모해요? (홍지훈, 김수운 : 일부러 하진 않죠) 일상에서 남자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두려움을 여성 화자가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보통 여성들은 다 느끼는 감정이잖아요. 그런 것들을 대변해 주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홍지훈 : 책을 읽으면서 「음복」이나 「가원」을 통해서는 엄마를 많이 떠올렸어요. 뒤에 나오는 「오물자의 출현」에서는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이나 SNS 등에 대한 소문 같은 것들도 생각하게 됐고.

 

신해리 : 여성들의 감정은 늘 배제되는 것들을 보면서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음복」을 읽으면서 남자들은 당연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해를 안 하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어요. 부당함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김수운 : 책에 나오는 남자들을 실제로도 많이 봐요. 정작 저도 어떤 상황에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눈치 없이 있을 때도 있을 거예요. 책을 읽으면서 몇몇 상황에서 답답했는데 저도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사회자 : 이렇게 듣다 보니 다양한 감정의 흐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는 「음복」, 「가원」은 가족을, 「손」은 공동체를, 「서우」, 「오물자의 출현」은 사회를, 「화이트 호스」, 「카밀라」는 개인의 영역을 이야기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었어요.

 

신해리 : 「음복」을 읽으면서 한국형 스릴러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남녀의 역할이 많이 무너졌지만 제사라는 제도를 통해서 허물어지지 않는 경계가 남아 있고 여자가 안고 가야 하는 것에 대해 감정을 쌓아올려서 날카롭게 터뜨렸잖아요.

 

이재은 : 할머니-고모-시어머니-세나(주인공) 이 여성들의 관계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가부장 제도를 보여줬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었어요.

 

이재진 : 「가원」을 읽으면서 딸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우리 아빠가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제 딸은 우리 아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구나.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보다 자기랑 더 많이 놀아 주고 예쁘다고 해주고 맛있는 거 사주는 사람을 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걸 보면서 주인공도 어린 시절 느낀 감정들을 통해 할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신해리 : 내가 미워하는 할머니는 같은 삶을 반복하지 않도록 진정으로 사랑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할머니 때문에 미칠 것만 같고 나를 ‘나의 인생, 나의 삶, 나의 미래를 자신의 무엇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73쪽) 할아버지는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이 갈등의 고리인 것 같아요.

 

김수운 : 정우처럼 살지 말자. 박윤보처럼 살지 말자. (웃음) 남자들은 진짜 문제가 많네요. 저도 읽으면서 딸 생각을 많이 했어요. 작품에서 할머니가 자기 손녀를 누구보다 엄하게 키우잖아요. 옛날에는 남자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쳤잖아요. 사실 할머니의 교육은 잘 되라는 사랑인데 그래서 마음이 찡하면서도 씁쓸하고 찝찝했어요. 사랑이라는 것이 어떨 때는 예쁜 사랑으로 어떨 때는 나쁜 사랑으로 나뉘게 되는데 사람마다 각자 사랑하는 방식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랑이 아닌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이재은 : 가원이라는 이름이 원래는 여자 이름으로 쓰이는 이름이래요. 작품에 나오는 집은 돌보아야 하는 집으로 나오잖아요. 이 작품에서 여자란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나오는데 할머니의 주체성을 통해서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줬잖아요. 그런 의미로 제목이 큰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했어요.

 

홍지훈 : 「손」은 이미 권력구조가 형성된 작은 공동체 내에서 외부인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결속력이 강한 집단에서 뭔가를 한다는 것이, 바꾸려고 애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읽었어요.

 

김수운 : 작은 시골마을에서 이장은 권력의 상징인데 이장의 부정적 행위를 들춰내려고 하는 것이 주인공이잖아요. 마을에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사람이 없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다 잘 지내고 있었는데 손 없는 날 나타난 이 사람 때문에 마을의 행사를 망치죠. 학생들에게 교사라는 권력을 사용하는 이장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권력구조를 흔드는 ‘손’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신해리 : 저는 사실 강화길 작가가 작품의 소스를 현실 세계에서 많이 가져온다고 생각했는데 「오물자의 출현」도 떠오르는 사건들이 있어요.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만 보더라도 사람들은 보고 싶은 부분들만 보고 듣고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미지를 유통시켜서 그걸 믿게 만들고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도록.

 

홍지훈 : 맞아요. 전형적인 언론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넷에 나오는 글들과 가십, 찌라시 같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고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것들도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진실마저도 진실로 믿지 못하게 묻어버리는 혼잡한 지금의 사회.

 

이재진 : 오물자라는 말이 인형인 줄 처음 알았어요. 사실 인형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서 사는 거잖아요. 주인공인 김미진 씨도 그렇게 구성된 것이 아닐까. 실제의 김미진 씨는 없고 특출 나지 않아서 가십의 중심에 있는 인형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이재은 : ‘가십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가십에 불과한 법이니까. 알면 됐고, 모르면 또 됐고, 뭐 그런 거 아니겠나.’(183쪽) 마지막 문장이 와 닿네요. 사회가 한 개인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방식과 여성에 대한 대상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인 것 같아요.

 

 

홍지훈 : 「화이트 호스」는 반대로 작가가 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인 것 같아요. 작가의 진취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희망이 담긴 작품인 것 같았고 강화길 작가 스스로가 하려는 것을 공유해 준 것 같기도 해요.

 

사회자 : 『화이트 호스』를 읽으면서 인상 깊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신해리 : 공간 구성을 진짜 잘하는 것 같아요. 화장실과 부엌 같은 장소는 여성이라는 젠더성이 짙은 공간이잖아요. 화장실은 여성이 숨어서 우는 장소, 쉬는 장소로 그려질 때가 많고 부엌은 항상 여성의 전유물처럼 다뤄지니까요.

 

이재은 : 부엌, 화장실 등의 공간도 그렇지만 사실 젠더성을 가지는 단어를 잘 배치하는 것 같아요. 「손」에서 아무 설명 없이 베트남 여자였다, 라고 서술한 문장, 「오물자의 출현」에서 인형이라는 단어가 가진 이미지가 있잖아요. 좀 더 나가면 단어가 가진 정치성을 잘 이해하고 활용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이재진 : 저는 택시를 타는 건 일상적인 건데 「서우」에서 표현된 많은 것들이 실제로 제가 하는 행동이라 인상 깊었어요. 기사의 정보를 확인하고 뒷좌석에서 바라보는 기사의 오른 얼굴에 대한 기억이나 택시의 소속과 번호를 기억하기 위한 행동 같은 것들이요.

 

김수운 : 저는 「음복」에서 시어머니가 아들은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며느리에게 말하는 부분에서 실제로 우리 엄마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소름 돋았어요.

 

사회자 : 수록된 단편 중 좋았던 작품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재은 : 저는 「서우」가 너무 좋았어요.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젠더에 대한 이미지를 정확하게 설명했고 이 젠더성이 엎어지는 순간, 뒤바뀌는 순간 두려움의 크기가 어떻게 커지는지가 잘 보였어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감정의 순간 같은 것들도 좋았고요. 그리고 결론적으로 범인이 누구인지 너무 궁금해서 작가님께 꼭 물어보고 싶은 작품이에요.

 

신해리 : 「카밀라」에서 좋았던 건 남성-여성 이성 간의 연애가 아닌 여성-여성 간의 관계였어요. 젠더성을 파기하자 드러나는 아이러니함들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퀴어소설을 읽을 때 주로 성애적인 부분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여성을 부각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 게 보여요. 여성의 행동, 직업 같은 것들을 드러내지 않고 이름을 사용하고 성별을 알 수 없는 행동들 등으로.

 

김수운 : 저는 지금 상황에서 공감할 수 있고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작품은 「음복」과 「가원」이었고 그래서 제일 몰입하면서 읽었어요.

 

사회자 : 우리가 함께 읽었던 김초엽 작가의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강화길 작가의 『화이트 호스』 모두 여성 서사를 담고 있는 작품들인데 이런 작품들이 최근에 더 자주 읽힌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김수운 : 여성들의 시선이나 목소리를 나눌 수 있는 플랫폼이 많이 생겼어요. 매체를 통해서도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예전에는 제한된 사람들의 제한된 목소리가 세상의 것이라고 말했다면 지금은 다양한 목소리들을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매체, 플랫폼이 생겨나서 세상의 목소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있죠.

 

이재진 : 저는 사실 한 사람의 소유라고 여겨졌던 여성들이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세대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여성들이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내는 세대가 되었다는 정도?

 

홍지훈 : 비슷하긴 한데 전보다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졌고 어떤 사회적인 현상에 관여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남녀 역할에 대한 구분이 있던 세대에서 구분이 사라져 가면서 가치 대립들이 생겨나고, 상대적으로 가려졌던 여성들의 생각과 감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여성 서사의 글들이 읽히게 됐다고 생각해요.

 

이재은 :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사회구조도 서사도 당연히 남성 중심이었다고 생각해요. 여성이 가부장제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면 이제는 이런 방식들을 통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이게 한국 사회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사회자 : 오늘도 다양한 읽기로 이야기를 나눠서 고맙습니다. 오늘의 한줄 평 해볼까요?

 

신해리 : 여자에 의한 여자들에 대한 여자들의 삶 이야기.

 

이재진 : 강화길이 강화길 했다!

 

김수운 : 여성 서사에 첫발을 내딛은 순간.

 

홍지훈 : 가족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해준 책.

 

 

 

 

 

 

 

 

 

 

 

 

 

 

 

 

이재은

사회 / 이재은

서점주인. 느리게 자라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편

 

이재진

참여자 / 이재진

일, 육아, 내 인생 모두 즐겁기를 바라는 3n살

 

홍지훈

참여자 / 홍지훈

평범한 직장인 아무개 입니다

 

신해리

참여자 / 신해리

춤추는 사람입니다:)

 

김수운

참여자 / 김수운

평범하게 회사 다니는 내일의 축구왕

 

 

   《문장웹진 2020년 8월호》

 

추천 콘텐츠

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