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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나비날다책방(제1회)

  • 작성일 2020-04-01
  • 조회수 1,375

[책방곡곡]

 

 

 

배다리 나비날다책방(제1회)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 지금은 책과의 거리를 좁힐 타임!

 

 

사회/원고정리 : 정지은1
참여 : 청산별곡, 이재은, 이병국, 정지은2
함께 읽는 책 : 『감염된 독서_질병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최영화, 글항아리

 

 

 

 

 

    '사회적 거리두기'가 화두인 요즘, 언론에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감염내과' 의사들이다. 감염내과는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콜레라, 홍역, 천연두, 페스트, 장티푸스, 말라리아 등의 감염질환을 다루는데, 각종 백신이 개발되고 항생제가 발전하면서 전염병 자체가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02년 '사스'를 시작으로 2015년 메르스, 2020년 코로나 19까지 감염질환이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들면서 감염내과도 주목받고 있다. 우리가 읽은 책은 '감염내과 의사가 쓴 문학과 역사 속 감염병 이야기'인 『감염된 독서』(최영화, 글항아리, 2018). 2018년에 나온 책이지만 지금 이 시국에 딱 맞는 책이라는 생각에 동의하고 읽은 바,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했다.

 

책읽기 모임 '책락' : 책을 즐겁게 읽고 나누는 모임


 

사 회 : 다들 별 탈 없이 건강히 지내고 계십니까. 이렇게 소규모로나마 사람들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 나눌 자리가 없다 보니 너무 반갑습니다. 오늘 이야기 나눌 책은 『감염된 독서』인데 다들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책이 이렇게 짧은 글을 모아 둔 책인지는 모르고 읽기 시작했는데,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병'이라는 주제와 연관되는 많은 책을 만날 수 있어서 흥미로웠어요. 제가 읽은 책조차 감염내과의 눈으로 특정한 질환을 서술한 대목을 뽑아내고, 그 질환에 대해 이야기를 덧붙이는 전개 덕에 전혀 다른 작품을 만나는 듯한 느낌이었죠. 이 책에 나오지만 아직 읽어 보지 못한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은 덤이구요. 개인적으로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다뤘더라면, 저자분이 소녀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 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나오지 않아서 아쉬웠어요. 사실 저자의 전문 분야인 감염내과는 일반인들에게는 좀 생소한데, 에이즈나 전염병처럼 남들이 보기 어렵고 꺼리는 질환을 진료하고, 열을 동반하는 질환이 많아서 '불(열)을 끄러 다니는 소방관'이라고 불리기도 한답니다.

 

청산별곡 : 저는 의사가 쓴 책이라서 어떤 '병'에 대해 좀 더 일반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런 정보보다는 저자가 의사로서 겪었던 에피소드와 문학 작품을 연결하는 데에 더 집중한 것 같아서 아쉬운 부분은 있었어요. 하지만 한번 읽으려고 마음먹으니까 쭉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하게 쓰인 책이었어요.

 

이재은 : "문학은 인간 곤경의 기록"이라는 가오싱젠의 말처럼 정말 많은 문학 작품에 병이 등장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게 됐어요. 김승옥의 『서울․1964년 겨울』에서 죽은 아내의 시신을 4천 원에 넘겼다는 구절을 보면서 그 금액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어요. 그 아내의 죽음이 급성 뇌막염 때문이었던 것,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던 것은 생각났는데 구체적인 금액은 잊고 있었거든요. 작가가 주목한 것은 죽음과 이별의 의식이었는데, 독자인 제게는 전혀 다른 부분이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웠어요.

 

이병국 : 처음에는 서평 책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서평과 에세이의 중간쯤 되는 느낌이었어요. 인용이 많은 편이라서 저자의 이야기는 하다가 만 듯한, 마무리가 잘 안 되는 글도 몇 개 있었어요. 아주대의료원 소식지에 쓴 칼럼을 묶은 글이라 그런지 지면의 제약이 느껴지는 글들도 있었는데 책으로 펴낼 때 좀 더 보강했으면 좋았겠다 싶어 아쉬웠어요.

 

정지은 : 저는 이 책이 올해 처음으로 끝까지 다 읽은 책이에요. 쉽게 읽혀서 좋았고, 한센병에 대해 쓴 단락을 읽으면서 고등학생 때 소록도로 봉사활동을 다녔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어요. 1년에 한 번 갈 때마다 많이 반가워하면서도 먼저 다가오지는 못하셨거든요. 방학 때 방문하면 이야기도 하고 산책도 같이하고 전복죽도 배달해 드리고 하면서 2주쯤 머무르곤 했어요. 주소를 알려드리면 1주일에 한 번 꼴로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로는 가보지 못했네요.

 

이재은 : 소록도에 가본 적 있는데, 한센병도 그렇고 우리 사회가 어떤 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힘든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잠깐만 아파도 일상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책 전체에서 '병'을 다루다 보니까 병에 대해 갖고 있던 기억이나 경험 같은 걸 계속 떠올리게 됐어요. 책 초반에 나오는 '병문안'에 대해 쓴 단락을 읽으면서 나희덕 시인의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는 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다 같이 읽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이병국 : 맞아요. 사실 병문안은 갈 일이 생길 때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는 건 좋은데 가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되잖아요. '김 선생에게'라고 시작되는 편지 같은 시를 쓰신 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잘 쓰셨더라고요. "자네가 올지 안 올지 모르겠네…나는 이제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네/나의 질투를 용서하게나/나는 아직 살아 있으니 두려워 말고 오게/사는 아름다움에 대해 내 한 수 가르쳐 주겠네"를 읽고 나니, 앞으로는 병문안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지은 : 맞아요. 요즘은 사실 병문안도 잘 받지 않는 추세이긴 하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이라도 가서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긴 합니다.

 

이재은 : 저자분을 포함해서 여기 등장하는 의사들은 다 글을 잘 쓰더라고요. 병문안에 대해 글을 쓰신 분도 그렇고, 심지어 뒷부분에 나오는 화장실 낙서조차도 글이 너무 좋아요. 의사가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 소설가의 생계를 위협하는 느낌이었어요. (웃음) 중간쯤에 이태준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말라리아도 문인으로서 앓았던 것일까요?"라고 표현한 대목은 정말, 저자가 풍부한 문학적 소양을 지닌 현직 의사이기에 쓸 수 있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부럽기도 하고 그랬어요.

 

책락 모임 사진


 

사 회 : 그러고 보면 그리스 신화의 아폴로 신이 시와 음악의 신이면서 의료와 치유, 건강을 주관하는 신이기도 했잖아요. 마종기 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시골의사로 알려진 박경철 같은 분도 글을 참 잘 쓰는 의사죠.

 

정지은 : 질병과 문학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지만, 저자가 만난 아픈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와 닿았어요.

 

청산별곡 :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겪었던 의사의 불친절했던 행동이 다시 떠올랐어요. 조금이라도 더 설명해 줬으면 하는 환자의 바람과는 달리 회진 때 휙 와서 보고 가버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환자를 거의 물건 취급하는, 헤밍웨이의 「인디언 캠프」에 나오는 백인 의사까지는 아니지만요. 그 백인 의사는 아들까지 데려가서 제왕절개를 하지만, 산모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는 등 모욕적으로 대하잖아요. 저자분은 그 의사와 달리 '환자를 본다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온 결과 깊어진 눈으로 환자들을 대하는 것이 느껴져요. 마음과 눈을 열고 환자를 볼 수 있도록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구요. 저자분이 실제 환자를 보는 의사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의 입장이다 보니, 구체적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신 것 같았어요.

 

이재은 : 맞아요. "누워 지낸 지 얼마나 된 것 같으냐는 물음에 여름은 지나서 다친 것 같다고 대답한 친구가 있었지요. 햇볕에 그을린 팔을 보니 그렇답니다. 한겨울이라 흔적도 희미한데 보고자 하니 보입니다" 이 구절이 바로 그랬어요. 저 역시 의사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이 많이 깨졌어요. 나중에 혹시라도 아프게 되면 그을린 팔을 보고 누워 있던 시간을 짐작해 내는, 사려 깊은 의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 회 : 지금도 손 씻기가 마스크 쓰기보다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예전에도 손 씻기와 물 끓여먹기와 같은, 어떻게 보면 사소하고 간단해 보이는 실천들이 정말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이재은 : 게다가 이그나스 젬멜바이스라는 의사조차 그 주장을 했다가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쫓겨났다는 것도 놀랍죠. 당시에는 의사들이 가운에 피나 각종 고름이 묻어서 더러워질수록 수술 경험이 많고 능력 있는 의사라고 생각했다고 하니까요. 세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병원이 오히려 감염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걸 몰랐던 거죠. 의사들이 시체를 해부한 손으로 산모를 만지고 아기를 받은 탓에 많은 산모들이 사망했는데도요.

 

사 회 : 마침 오늘 구글 메인페이지 로고가 바로 '이그나스 젬멜바이스의 손 소독법'이었어요. 구글이 매일 시작 화면에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기념하곤 하죠. 지금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식이지만, 1847년만 해도 손 씻기 운동은 아주 낯선 것이었다고 하잖아요. 참고로 173년 전 3월 20일은 젬멜바이스가 빈 병원 산부인과의 수석 전공의에 임명된 날이라고 하네요.

 

청산별곡 : 다시 한 번 손 씻기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게 됐어요. 사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 이 책에 딱 한 장밖에 없는 사진이 실려 있는데, 그 사진이 꽤 강렬해요. 1900년대 초반 제중원의 수술 장면인데 같은 사진임에도 제가 보는 것과 저자가 읽어내는 사진이 많이 달라서 놀라기도 했어요. 관점의 차이가 확 느껴졌죠. 100년 전 수술장의 사진을 보면서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을 보는 착각에 빠지다니 전문가라 보는 게 다르구나 싶었어요. 제가 책방 사진을 보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구요.

 

책락 모임 참관묘 : 반달이


 

사 회 : 백민석 소설가가 "사회적 거리 두기는 책과의 거리 좁히기, 책과 가까워지기"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도서관도 임시 휴관 중이고, 서점에 나가기도 좀 애매한 상황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시간이 많이 생겨서 책을 많이 읽을 것 같지만, 넷플릭스나 왓챠처럼 워낙 집에서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많다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요즘 어떻게 일상을 보내고 계신지 공유하고 이 자리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이재은 : 저도 사실 넷플릭스 많이 보는데 너무 오래 보면 머리가 아프다고 해야 할까, 종이책을 읽는 즐거움에 비할 바는 아닌 것 같아요. 요즘 학교에 가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해 스타들이 책을 읽어 주기도 한다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우니까요. 바이러스는 빨리 해결되면 좋겠지만 이번 사태로 일정하게 타인과 거리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병국 : '죽을 때 후회하는 다섯 가지'가 기억에 남아요. 내 뜻대로 살걸, 일만 하지 말걸, 친구들 좀 챙길걸, 도전 한번 해볼걸, 화 좀 덜 낼걸. 이 다섯 가지를 다 하기는 쉽지 않지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먼저 뭘 하지는 못할지언정 누가 무엇이든 하자고 하면 '도전하는 의미에서' 다 OK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요즘 대학 강의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다 보니 동영상 강의 녹음하고, PPT 만들고, 카톡으로 과제 내주고 체크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오랜만에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을 읽어서 좋았고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더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청산별곡 : 코로나 19 사태로 많은 행사나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오히려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어요. 물론 경제적으로는 타격이 크지만 주어진 시간 동안 책방 주인답게, 책을 읽고 골라서 큐레이션도 하고, 책방도 새롭게 꾸미는 즐거움을 누려 보려고 합니다. 하반기에 제대로 뛰기 위한 시간을 준비해야지요.

 

정지은 : 3월이 사실 제일 바쁘고 많은 것이 시작되는 시기인데, 강제 디톡스를 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이번 책모임 덕에 책 한 권을 다 읽은 것처럼, 꼭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책락 모임 사진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정지은

사회 / 정지은 1

문화평론가. 배다리 나비날다책방과 주인장, 집사를 애정한다.

 

정지은

참여자 / 정지은 2

여기저기 관심 많은 골칫덩이 20대 청년

 

이병국

참여자 / 이병국

책 좋아하는 글쟁이 겸 이런저런 알바生

 

이재은

참여자 / 이재은

소설을 씁니다. 작년에 첫 소설집 『비 인터뷰』를 출간했어요.

 

청산별곡

참여자 / 청산별곡

나비날다책방지기 겸 문화기획자. 어떻게 하면 재밌게 일하면서 놀까 늘 꿍꿍이중이에요.

 

 

   《문장웹진 202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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