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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서툰책방 3편―무심한 바다가 좋아서

  • 작성일 2019-09-01
  • 조회수 915

[독자모임-책방곡곡]

 

 

책방곡곡 춘천 서툰책방 3편
―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날에 '무심한 바다가 좋아서'

 

 

사회/원고정리 : 정승희
참여 : 한주석, 김상아, 박은솔, 조성윤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을 때, 가장 간단해 보이지만 어려운 방법은 실제로 떠나는 것이다.
길을 나설 때 우리는 일상을 지배하고 있던 공간을 뒤로 한 채, 낯선 장소를 만난다. 떠나고 싶은 이유는 저마다 제각각이겠지만, 여행자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난다는 점에서 같다. 여행자는 공간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일상에 두고 떠난다. 가령, 나를 옭아맸던 직장, 나를 힘들게 한 사람, 내가 매일 잠을 자고 밥을 먹던 집, 쌓인 고지서들, 매일 만났던 골목길 풍경 등. 그러나 누구나 떼어내고 갈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있다. 바로 나 자신. 그래서 여행을 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알게 된다. 내가 알고 있던 나와 몰랐던 나를 만난다.

 

    혼자 간 첫 해외여행을 기억한다. 무척이나 설레고, 기대했던 여행. 호기롭게 여행 기간을 한 달을 정했고, 여행 중에서 만날 모험들과 내 인생의 중요한 깨달음을 기대했다. 하지만, 나는 낯선 사람과 장소를 생각보다 두려워해서 모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길에서 얻으려는 깨달음은 오지 않았다. 그저 불안하고, 두려운 날들을 여행지에서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번 여행은 실패라고 생각했다. 꿈꿔 왔던 여행이었지만, 기대만큼 즐겁거나, 행복하거나, 모험이 넘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여행 또한 삶의 일부라서 행복한 순간과 불안하고, 힘든 순간들이 함께 있었다. 그렇다고 첫 여행이 완전히 실패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때 당시에는 완전한 실패로 느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경험을 통해 나는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여행 중에도 두고 온 일상을 걱정하는 나. 바닷바람을 좋아하는 나. 사람들에게 말 거는 게 두려운 나. 화려한 관광지보다 조용한 동네를 좋아하는 나. 그리고 그 이후에 커다란 기대와 목표 없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여기, 나처럼 실패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태평양을 요트로 항해했지만, 자신의 항해는 실패였다고. 이 책은 실패한 모험가의 기록이라고. 이번 독자모임에서는 〈무심한 바다가 좋아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 저자의 모험 _ 요트로 태평양 항해하기

 

한주석 : 처음 만난 사람들과 5달 동안 태평양을 항해하는데, 작은 요트에서 생활해야 했잖아요. 그 공간에서 열심히 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어요.

 

정승희 :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던 점은 저자의 항해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던 점이었어요. 같은 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항해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었잖아요. 이 항해가 저자에게는 도전이자 꿈이었더라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거죠. 5개월 동안 요트 안에서 다른 목적을 가진 선원들과 생활을 해야 하는데, 출발 전에 이야기도 충분히 나누고, 준비를 조금 더 했으면 항해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김상아 : 요트 안에서 선원으로서 생각해 주지 않는다고 느끼고, 서러움과 불만이 있었다고 책에 쓰여 있는데요. 만약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런데 워낙에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부류의 사람들이니까 저자가 배를 타기 전에 함께할 동료들과 이야기가 충분히 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한주석 : 읽을수록 안타까웠어요. 책 앞부분에 '외로운 모든 영혼에게 바치는 나의 외로운 마음이다.'라고 쓰여 있는데 저자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어요. 성향과 목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 긴 항해를 하는 것은 역시나 힘들고, 자신의 밑바닥까지 체험해 보는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박은솔 : 그런데 저자는 다른 선원들과 친해지려고 노력도 했는데, 5개월 동안 함께하면서 이렇게 안 친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어요. 다른 선원들도 저자에 대한 배려가 적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김상아 : 확실히 지금 대화를 하면서 느끼는 건데 이 책은 진짜 여행기네요. 여행은 흔히들 말하길 자아 찾기라고도 하잖아요. 저희도 이 저자가 이런 사람이고,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이야기 나누는 게 정말 여행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주석 : 책의 앞부분에 저자의 성격이 잘 드러난 글이 있었잖아요. 앞으로 항해를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잘 말하기도 하고, 자기주장도 할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은 점이 아쉬웠어요. 처음에 보여준 자신의 색깔을 끝까지 가져가기를 원했나 봐요.

 

박은솔 : 저자가 어디를 가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항해를 시작해 보니까 그렇지 않은 거죠. 자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느낀 혼란스러움을 볼 수 있었어요.

 

조성윤 : 저는 자신이 생각한 것하고 어긋날 수도 있지만, 작은 공동체 안에서 동화되고, 일원이 되려는 노력이 보기 좋았어요. 저자는 이 항해를 용기도 아니고, 자신감도 아니고, 단순함으로 시작한 거라고 하잖아요. 그때그때마다 자기답지 않은 모습도 보이고, 불만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막연히 좋아서 시작한 것이니까요.

 

김상아 : 한편으로는 운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한 번도 태평양을 항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거든요.

 

 

 

* 각자의 모험

 

조성윤 : 이 책은 본인이 하고 싶었고, 동경해 왔던 것을 과감하게 시도했던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주석 : 항해하면서 겪은 일들, 감정을 용기 있고 솔직하게 썼다고 생각해요.

 

김상아 : 도전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그마한 변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좋았고, 저자가 이 여행을 떠난 이유 중의 하나가 대자연에 제압당하고 싶었다는 말에 공감이 되어서 밑줄 그으며 읽었어요.

 

한주석 : 혹시 각자 생각하는 모험 같은 게 있나요?

 

조성윤 : 일상에서 작은 시도들도 모험이라고 하잖아요. 안 먹어 본 음식을 먹어 본다거나 하는 그런 의미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상아 : 전 작은 습관을 바꾸는 것 자체가 큰 용기이자 모험이라 생각해요.

 

정승희 : 저자는 모험을 이렇게 정의 내렸네요. 처음 시도하는 것이자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 저는 수영인 것 같아요. 바다에서 수영하기. 저는 물을 무서워하고, 바다에서 수영하기를 상상하지 못하는데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들 보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거든요. 물에 있는 느낌은 또 다르잖아요. 그 자유로운 느낌을 느껴 보고 싶은데, 정말 제겐 모험인 것 같아요. 생각만으로도 너무 어려워요.

 

한주석 : 저는 부시 크래프트 캠핑이요! 천막만 가져가서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요. 너무 무서울 것 같지 않아요? 불곰 만나면 어떡해요?

 

정승희 : 상아 님은 곧 해외여행을 처음 가는데요, 이것도 모험 아닌가요?

 

김상아 : 그렇죠. 저도 살짝 걱정은 되는데, 제가 여행지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너무 궁금해요. 소개팅도 하기 전에 제가 가서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서 나갈 때도 있는 것처럼. 첫 해외여행이고, 혼자 가는 거라서 걱정은 되는데, 기대하는 마음도 있어요.

 

박은솔 : 저는 아이슬란드 링로드를 여행하고 싶어요. 친구가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다고 해요. 일단 그전에 운전면허를 취득하기가 제게 모험이고, 그 이후에 언젠가 운전을 하면서 아이슬란드 링로드를 여행하고 싶어요.

 

조성윤 : 저는 지금까지 인생이 모험이에요, 모험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김상아 : 히말라야도 꼭 가보고 싶어요! 히말라야에서 트래킹하고 싶어요.

 

정승희 : 모험을 떠났을 때 아름다운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 것 같아요. 떠나지 않았더라면, 저자가 책에서 묘사한 바다 위에서 본 하늘, 별, 자연의 풍경이 주는 아름다움을 마주하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시도하고,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있는 것 같아요.

 

박은솔 : 일상에도 많은 일이 있지만, 그래도 재밌는 이야기는 모험했을 때 생기는 것 같아요.

 

정승희 : 여행을 떠날 때,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다 받아들일 줄 아는 여유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여행은 무조건 좋아야 해, 라고 생각하면 스스로 더 힘들게 만들 수 있어요.

 

박은솔 : 저도 처음에는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여행이라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생각이 들었는데, 여행 중에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나서 무사히 잘 돌아왔음에 만족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여행지도 알 수 있게 되었어요. 저는 여행지에서 유명한 관광지보다 한적한 장소를 더 선호해요. 한적한 곳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조금 내려놓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가고, 이렇게 여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거야

 

정승희 : 책 속에서 가족들과 아름다운 추억 이야기가 중간중간 나오잖아요. 그중에서도 엄마가 해준 말이 저자가 항해할 때 큰 힘이 되었을 거라 생각해요.

 

박은솔 : 저는 엄마를 생각하고, 엄마가 해준 말에 유독 울컥했어요. 갑자기 울 것 같기도 했고요. 엄마들이 대부분 그렇잖아요. 내 아이가 무던하게 살고,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러면서도 저자를 응원하는 엄마의 말이 와 닿았어요.

 

정승희 : 저도 그 부분과 관련해서 엄마가 이 말을 한 게 와 닿았어요. "보통 사람들은 많이 걸어서 평평하게 난 통로를 찾아 걷는데, 우리 수민이는 저 옆의 장미도 궁금하고, 가시가 있더라도 아무도 모르는 저런 길을 걷고 싶은가 봐." 엄마가 아이의 입장에서 이야기해 주고, 그 삶을 존중해 주고, 인정해 주는 말을 할 때 뭉클했어요.

 

박은솔 : 맞아요. 엄마가 말을 참 예쁘게 잘 전달해 주는 것 같아요.

 

조성윤 : 엄마가 '너는 언제나 머릿속으로 여행할 줄 아니까, 한 달 동안 배 안에서 아무리 지루해도 즐길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저자에게 전했는데, 이 부분이 인상 깊었어요. 말의 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기도 했고요.
또, '나의 두려움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내는 차가운 눈빛과 그들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나이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내 욕심과 고집이야.'라는 문장이 있어요. 저는 저자가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저는 이제야 그것을 깨려고 하거든요.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는 모습이 좋아 보여요.

 

박은솔 : 저자는 하려고 마음먹으면, 뭐든지 시도해 보는 사람인 것 같아요.

 

 

 

    *
   3개월 동안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날에〉라는 주제로 독자모임을 하였다. 이번 모임에서는 실패한 모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 것처럼 마냥 실패로 끝난 경험은 아닐 거로 생각한다. 아마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항해를 했겠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것들을 배우고, 얻고,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삶에서 크고 작은 실패들을 겪는다. 그러나 그런 실패들은 무언가를 시도했을 때 얻어진다. 작가 김연수는 이런 문장을 적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심지어 시도했으나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조차도 나는 성장한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실패를 많이 하는 삶을 살고 싶다. 다르게 말하면 시도를 많이 하는 삶. 성공이 아닌, 시도.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을 때 어디론가 떠나 보기도 하고, 이야기를 읽기도 하고, 유머에 기대기도 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달 동안 책방을 찾는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하고, 공유하는 기회를 가져서 기뻤다. 같은 독자로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어 좋았다. 우리가 만났던 일요일 저녁이 생각이 나, 이번 독자모임이 끝나고도 비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기로 했다. 지금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승희

사회, 원고정리 및 구성 / 정승희

서툰책방 여주인장. 읽고, 쓰는 삶을 좋아합니다.

 

한주석

참여자 / 한주석

서툰책방 남주인장. 즐거움을 찾아 책의 세계를 돌아다닙니다.

 

김상아

참여자 / 김상아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 많이 웃고 싶어요.

 

박은솔

참여자 / 박은솔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많은 평범한 대학생.

 

조성윤

참여자 / 조성윤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과학을 전공했지만 비과학에도 흥미가 많아요.

 

 

   《문장웹진 2019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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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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