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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곡곡 부산 영도 손목서가 1편 ㅡ 어른이 되어 어린이책을 읽다

  • 작성일 2019-04-01
  • 조회수 2,170

[독자모임-책방곡곡]

 


※ 기획의 말
2019년 독자모임 코너 [책방곡곡]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의 독립서점들을 방문하고, 그 지역의 문인 및 독자의 목소리를 청취하고자 합니다. 각 지역의 문학 생태계와 특수한 현안들이 곳곳에 계시는 독자들에게 서로 공유되어, 사유와 비평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책방곡곡 부산 영도 손목서가 1편

ㅡ 어른이 되어 어린이책을 읽다

 

 

사회/정리 : 유진목
참여 : 서은주, 최진경, 황선화

 

 

 

    부산 영도 바닷가에 서점 '손목서가'를 연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열 평 남짓 작은 서점의 서가를 꾸리면서 잘 팔리는 책이라든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내가 서가에 꽂아 둔 책들이 잘 팔리는 책인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책인지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책들만으로도 작은 서점의 서가는 금세 가득 차버렸고 베스트셀러가 아니어도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꼼꼼히 살펴 고르는 손님들 덕분에 서점 주인으로서의 즐거움과 보람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와중에 어린이책 서가를 꾸리면서 여러 달 막막함을 느꼈는데, 지금껏 읽어 본 적이 거의 없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내게는 어린이책을 선별할 수 있는 기준조차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린이책을 구비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일 텐데 나는 꼭 어린이책 서가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서점에 자주 오시던 단골손님이 집에 가지고 있는 수백 권의 어린이책을 이동도서관처럼 가지고 나와서 여러 아이들과 함께 읽는 것이 꿈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신이 나서 손목서가 마당에서 하면 좋겠다고, 그리고 저도 아이들과 같이 읽어 보고 싶다고 대뜸 이야기했다. 하루는 어떤 손님이 서점에 없는 책을 주문하고 가면서 한 동네에 서점이 생긴 것도 좋은데 어린이책도 있어서 참 좋다고 하셨다. 나는 서점을 하는 동안에 어린이책을 많이 읽어 보고 싶어서 조금씩 모으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뒤 그분이 주문한 책을 찾으러 와서는 어린이책 두 권을 선물로 주고 가셨다. 그저 서점에서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신기하기도 하고 한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날로부터 어린이책 서가를 볼 때마다 그분들 얼굴이 생각났다. 내가 왜 어린이책을 읽고 싶어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고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곧장 연락을 하지는 못하고 매번 망설이기만 하다가 <책방곡곡>만 한 좋은 기회가 없겠다 싶어 불쑥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는지 청했다. 집에 있는 어린이책을 더 많은 어린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는 최진경 씨. 서점에 책을 사러 와서는 어린이책을 선물하고 간 서은주 씨. 그리고 어린이책을 읽어 주는 모임에 가서 위로를 받고 돌아온 뒤로 어린이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황선화 씨. 그리고 어린 시절 읽지 못한 책을 지금이라도 실컷 읽어 보고 싶은 서점의 주인인 나. 이렇게 손목서가를 통해 서점 주인과 손님으로 만난 네 사람이 함께 읽고 싶은 어린이책을 한 권씩 추천하고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했다. 모임을 만들고 보니 우리는 모두 여성이었고, 어린이책이 지금처럼 풍요롭지 못했던 7,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였다.
    최진경 씨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너>를, 서은주 씨는 하마다 게이코의 <평화란 어떤 걸까?>를, 황선화 씨는 안상학 동시집 <지구를 운전하는 엄마>를 함께 읽어 봤으면 좋겠다고 모임을 앞두고 전해 왔다. 나는 이분희의 <한밤중 달빛 식당>을 함께 읽고 싶다고 했다. 책을 추천한 사람을 떠올리며 책들을 읽고 있자니 최진경 씨는 왜 이 책을 추천했을까 궁금했다. 서은주 씨는 <평화란 어떤 걸까?>를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황선화 씨에게도 <지구를 운전하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루빨리 물어보고 싶었다.

 

 

황선화 : 제 아이는 대학생인데 어릴 때 그림책을 읽어 주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아이가 중학생이 됐을 때 우연히 그림책을 읽어 주는 모임을 1년 정도 했는데 그때 너무 좋았던 거예요. 그래서 그때 집에 가면 아이한테 모임에서 읽은 책을 같이 읽어 보자고 했어요. 그러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나서는 그림책에서 한참 멀어져 있다가 작년에 그림책을 읽는 모임에 가끔씩 놀러가게 됐어요. 옛날에 좋았던 생각이 나서요. <지구를 운전하는 엄마>는 얼마 전에 모임에 갔다가 보게 된 책이에요. 동시집인데 읽으면서 많이 웃기도 하고 재밌더라구요. 그래서 같이 읽고 싶었어요.

 

유진목 : 이번에 추천하셔서 저도 읽었는데 <배꼽>이라는 첫 시부터 정말 좋았어요. 참외 배꼽은 참외꽃이 피었다 떨어진 자리고 사과 배꼽은 사과꽃이 피었다 떨어진 자린데 내 배꼽은 무슨 꽃이 피었다 떨어진 걸까 궁금해 하잖아요. '엄마꽃'이라는 말은 처음 본 것 같아요. 너무 아름다워서 여러 번 곱씹어 발음해 봤어요.

 

서은주 : 저는 요새 애들한테 화를 많이 내는데, 아이들 입장에서 아이들 입말로 써진 동시를 읽으니까 좀 미안해지더라구요. 지금까지는 그림책을 주로 읽었는데 동시집도 많이 읽어 보고 싶어졌어요. 저는 대학 다닐 때 문학을 전공했거든요. 소설을 많이 읽어선지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근데 교수님이 저보고 너는 소설 쓰지 말고 어린이 문학을 하는 게 낫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도 저는 계속 소설에 관심을 두고 소설만 쓰려고 했는데, 결혼 후 글과 자연히 멀어졌다가 아이가 생기고 커가면서 학부모 모임에 나가다 보니 아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고민을 하면서 다시 어린이 문학이 제 삶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지금은 부산학부모연대에서 영선지회를 맡아서 엄마들이랑 아이들이랑 모여서 '전래놀이'를 하고 있어요. 2주에 한 번씩 학교 강당을 빌려서 모이면서 어린이책도 함께 읽어 보자 하게 됐어요. 그리고 그 처음으로 평화그림책 시리즈를 읽을 예정이에요. 4월 셋째 주부터 시작할 거예요.

 

유진목 : 그런데 저희가 먼저 이 책을 함께 읽게 되었네요. 특별히 이 시리즈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최진경 : 4월은 역사적으로 여러 의미가 있는 달인 것 같아요. '4·3 제주'도 있고, '4·16 세월호'도 있고. 잔인한 4월이죠.

서은주 : 그래서 평화그림책 시리즈를 읽어 보면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최진경 : 저는 2006년경에 도서관에서 그림책 공부를 했어요. 그때 복지관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는 활동을 같이했는데, 제 아이가 태어나서 열 살이 될 때까지 거의 매일 그림책을 낭독해 준 게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아이가 잠이 안 올 때도 읽어 주고, 아이랑 어떤 문제에 대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가야 할지 모를 때도 저랑 아이의 문제와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책을 읽어 주곤 했어요. 그러다 보니 그림책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때 금정도서관에 그림책 강좌가 있어서 신청을 하고 영도에서 금정구까지 다녔죠. 거기서 그림책을 읽어 주고 같이 놀이도 하는 활동을 3년 정도 했어요. 그러다가 아이가 중학생이 됐는데 사춘기가 오면서 서로 소통하기가 어려워진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그때 아이가 그러더라구요. "엄마, 나를 아이 때처럼 대해 줘." 그래서 어릴 때 했던 것처럼 제가 공부하면서 읽던 그림책을 꺼내서 읽어 줬어요.

 

유진목 : 오히려 어른처럼 대해 달라고 할 것 같은데 의외의 반응이네요?

 

최진경 : 제 사춘기를 생각하면서 좀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아이를 너무 빨리 어른처럼 대해 버린 거예요. 저는 사춘기 시절이 너무 싫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아이의 사춘기도 싫었던 거예요. 제가 아이한테 두는 그 거리감이 고스란히 아이한테 전해진 거겠죠. 그래서 어렸을 때 엄마가 해준 것처럼 해달라고 하는데 제가 당시에 아이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이나 태도가 보이면서 깜짝 놀랐죠. 아이가 어렸을 때 했던 것처럼 다시 함께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림책을 통해서 아이와의 관계가 회복이 됐어요. 사춘기 때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잖아요. 나는 너무 못났고, 쓸모없게 여겨지고. 그럴 때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사랑스런 존재인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림책이 있어서 아이에게 그 감정을 전해 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그림책도 아예 보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이가 태어나고 엄마가 되어서 그림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어린 시절의 상처가 많이 치유가 됐어요. 어른이 되고 나서 그림책을 보는데 아 내가 그때 그랬었구나, 그때 그 감정이 그런 거였구나,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더라구요. 그전까지는 어린 시절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원망했거든요. 그러면서 어린이책이 가진 치유의 힘을 경험하게 되고 신뢰하는 마음도 갖게 된 거죠. 요즘은 '토닥토닥'이라는 모임을 하고 있는데 이 모임에서도 어린이책을 읽어요. 아이들에게 읽어 주기 전에 어른들이 먼저 읽으면서 자신의 마음부터 토닥이자는 의미도 있어요.

 

유진목 : 그러고 보면 여기 모인 우리들은 일부러라도 어린이책을 많이 읽자고 생각하는 어른들인 거네요. 어린 시절엔 어땠어요? 저는 어렸을 때 책을 못 읽었거든요. 집에 책이 없었어요.

서은주 : 저도 어릴 때 그림책을 읽은 기억이 없어요.

 

최진경 : 저도 그래요. 제가 87학번이거든요.

 

황선화 : 저는 68년생.

 

유진목 : 그럼 70년대 중반에 어린 시절을 보내셨겠네요. 저는 81년생이니까 80년대 중반에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87년도에 일곱 살이었어요. 지금도 그때 생각이 나는 게 왜 '방판'이라고 있었잖아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그때 비닐가방에 그림책이 두 권씩 들어 있고 책마다 카세트테이프가 딸려 있는 그런 게 있었어요. 그걸 엄마가 하나 사줬거든요. 갖고 싶은 게 많았는데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해서 정말 지금 생각해도 필사적으로 골랐던 기억이 나요. 그때 고른 게 <인어공주>예요. 같이 들어 있는 책은 <아기 돼지 삼형제>고요. <아기 돼지 삼형제> 말고 다른 책을 갖고 싶었는데 비닐가방에 같이 들어 있는 그대로 사야 했어요. 좀 뜬금없는 조합이죠. 저의 첫 어린이책 기억은 그거예요. 그리고 부모님이 우선 책에 관심이 없었고 저에게 책을 읽어 주신 적도 당연히 없었어요. 그런데 재밌는 게 방판으로 산 책에 카세트테이프가 딸려 있잖아요. 엄마 대신 카세트테이프가 저한테 책을 읽어 준 거죠. 그때 <인어공주> 테이프를 들으면서 지금 생각해 보면 되게 뭔가 무섭고 슬픈 감정에 푹 빠져 있었던 거 같아요. 뭔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때 파도소리가 막 나오고 그랬던 것 같고, 그러면 막 조마조마해하고요. 그 시절에 나온 동화들은 대체로 젠더 관념이라든가 삶에 대한 상징들이 상당히 뒤틀려 있어요. 잠들어 있으면 왕자가 와서 깨워 줘야 하고 말이죠. 청소하고 허름한 옷만 입다가 왕자에게 선택되면 청소 안 하고 좋은 옷 입고.

 

황선화 : 그러게 말예요. 카세트테이프 하니까 생각이 났는데, 저야말로 아이한테 책을 읽어 주지 못한 엄마거든요. 직장에 다녀오면 피곤하단 핑계도 대고. 그래서 그때 저는 아이한테 책 읽어 주는 테이프를 틀어 줬어요. 그때부터 그림책이라는 게 아이한테 읽어 줘야 하는데 제가 못 읽어 주니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것 같아요.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우연히 그림책을 읽어 주는 모임에 나갔는데 다른 사람이 읽어 주는 그림책을 들으니까 너무 좋더라구요. 일단 듣고 있는데 그냥 내가 막 행복한 거예요. 어른이 돼서 그림책을 좋아하게 된 거죠. 그래서 그런가, 그림책은 어른들이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어요. 내 안에 있는 불안들, 상처들을 그림책이 쿡쿡 건드리거든요. 그럼 되게 울컥하면서 그 감정이 좀 풀어지는 게 느껴져요. 제가 어렸을 때 그림책을 읽은 기억은 없어요. 그래서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는 것도 어려웠겠죠. 저는 중학생이 되어서야 학교에 조그맣게 구색만 갖춰 놓은 도서관에서 책을 접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유진목 : 그럼 우리는 어렸을 때 정작 그림책을 읽지 못한 세대가 아닌가 싶네요.

 

최진경 : 그러게요. 저도 어렸을 때 그림책을 읽은 기억이 없어요. 그런 게 있었나 싶어요. 나중에 좀 커서 잡지를 읽었던 거 같아요. 엄마가 시내 나갔다 올 때 <소년 중앙>을 안 사가지고 오면 제가 거의 막 시위하듯이 밥도 안 먹고 그럴 정도였어요.

 

유진목 : 동화나 그림책처럼 이야기가 실려 있는 건가요?

 

최진경 : 만화도 있고, 이런저런 정보들?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하여간 글자들을 읽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거였어요. 그래서 엄마가 얘가 글을 읽는 걸 좋아하나 보다 하면서 세계명작 같은 걸 사다주시기 시작했어요. 그게 어린 시절에 읽은 책들에 대한 기억의 전부예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 문예부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시를 썼거든요. 그러면서 긴 문장들보다 짧은 문장들이 지닌 매력을 알게 된 거 같아요.

 

유진목 : 맞아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시와 그림책의 문장들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진경 : 길지 않은 문장들이 함축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있잖아요. 근데 그 많은 의미들이 짧은 문장을 통해서 확 와 닿는 거예요. 피부에 아릿하게 닿기도 하고 가슴에 와서 확 꽂히기도 하고. 제가 그림책에 푹 빠진 계기이지 싶어요.

 

황선화 :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읽을거리 자체가 드물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활자만 보면 달려들어서 읽었던 것 같은데.

 

서은주 : 맞아요. 제가 중학교 때 <여학생>이라는 잡지가 나왔는데 저는 그걸 엄청 열심히 읽었어요.

 

최진경 : 저도요. 그 잡지 생각나요.

 

유진목 : 잡지 이름이 <여학생>이에요?

서은주 : 네, 잡지 이름이요.

 

유진목 : 맙소사. 그럼 <남학생>이라는 잡지도 있었어요?

 

최진경 : 아뇨, 그런 건 없었어요. <여학생>이 아마 81년도에 나왔나.

 

유진목 : 저 태어났을 때네요.

 

최진경 : 또 생각이 나는 게 중학교 때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 중간에 서점이 있었거든요. 거기 들러서 책을 엄청 봤던 거 같아요. 자주 오니까 주인아저씨가 저를 알아보고 새로 나온 책 있으면 알려주고.

서은주 : 우리도 시내 나가면 서점이 딱 하나 있었는데.

 

유진목 : 그때 그럼 서점에 성인 책이랑 청소년 책이랑 구분이 되어 있었나요?

 

최진경 : 그런 거 없죠. 그럴 만한 규모도 안 되고.

 

서은주 : 지금처럼 책을 자유롭게 접할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고.

 

유진목 : 저도 초등학교 다닐 때, 그때는 국민학교였는데, 학교에 도서관 같은 게 있긴 했어요. 근데 거기서 책을 빌려서 읽는다기보다는 도서관을 만드는 활동에 더 비중을 두었던 걸로 기억해요. 집에서 책 다섯 권씩 가져오라고 해서 도서관 채우고.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어처구니가 없죠. 선생님들이 머리를 맞대서 아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들의 목록을 만들고 그렇게 도서관을 채워서 독서를 유도하는 게 아니라 집에서 책을 가져오라니. 저만 해도 학교에서 책 가져오래, 해서 부모님이 주는 대로 가져갔던 것 같거든요. 그렇게 책을 가져다 내고 정작 도서관이라는 데가 학교 안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정말이지 엉망진창이었네요.

 

최진경 : 그러니까 지금이 참 행복한 것 같아요. 읽을거리도 많고 이렇게 마음껏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유진목 : 이쯤에서 다니카와 슌타로의 <너>를 추천하신 이유를 듣고 싶어요.

 

최진경 : 처음에는 손목서가에 이 책이 있기에 보게 됐어요. 그때 <나>를 먼저 펼쳐 봤거든요.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리고 어릴 적에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기억해 낼 수 있다면 엄마들이 아이들을 친구처럼 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엄마들은 아이들한테 자신의 감정을 덧씌우는 경우가 많거든요.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어려워요. 근데 있는 그대로 보려면 일단 자기가 덧씌운 감정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나>를 읽어 보게 됐어요. <나>는 상대에 따라서 역할이 달라지는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거든요. "나, 남자애가 보면 여자애, 아기가 보면 누나, 오빠가 보면 여동생, 엄마가 보면 딸 유리, 아빠가 보아도 딸 유리, 할머니가 보면 손녀 유리, 삼촌이 보면 조카 유리." 여기서 제가 딱 머무르게 된 거예요. 제가 결혼을 하면서 한꺼번에 전에 없던 역할들이 주어지더라구요. 남편한테는 아내, 시어머니한테는 며느리, 아이에게는 엄마. 그게 저한테 즐겁기도 했지만 때로는 엄청나게 부담이 되었던 거죠. 내 이름은 최진경인데, 나는 하나인데,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는 것을 결혼하고 나서 갑자기 맞닥뜨리게 된 거예요. 그래도 빨리 엄마가 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지금은 생각을 해요. 며느리로 아내로 적응하는 기간이 4년 정도 있었고, 그 이후에 엄마인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조금은 편하지 않았나 싶어요. 우선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아내이거나 며느리이거나 두 가지 역할만 해내면 됐으니까요. 결혼하자마자 한꺼번에 닥쳤으면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다니카와 슌타로의 이 그림책을 읽는데 너무 와 닿았어요. 그러고 나니까 '너'라는 존재도 생각할 여유가 생기더라구요. 그렇다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지? 질문하게 됐어요.

 

유진목 : <너>에서 저는 "내가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너도 하나밖에 없어."라는 구절이 정말 좋았어요. 사실 다니카와 슌타로가 그림책을 쓴 것은 서점을 열고 나서 알게 됐어요. 저는 시인으로만 알고 있었고,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집을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서점 준비하면서 다니카와 슌타로 시집을 입고하려고 주문창에 작가 이름을 입력하는데 그림책들이 쭉 나오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서점에 주문한 책들이 와서 한 권씩 읽는데 정말 좋더라구요. 특히 <너>를 읽는데 "집에 돌아와 나는 울었어. 너도 울었을까?"라는 구절에서 굉장히 울컥했어요. 많은 경우에 내가 울었다는 사실만 중요해서 타인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하잖아요. 내가 우는 것처럼, 너도 울었을까 궁금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상처를 받는다면 타인도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파괴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최진경 : 요새 부산에서도 '스쿨미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는데, 그때 선생들이 하는 변명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딸 같아서 그랬다." 이건 정확하게 바꿔서 질문을 해봐야 되는 말이거든요. 내 딸이라면 그렇게 했겠는가. 마찬가지로 나는 이랬는데, 너는 어땠을까 바꿔서 우리는 계속 질문하고 궁금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진목 : 맞아요. 그 질문에서부터 공감이 생겨나는 것이고요.

 

최진경 :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공감도 있을 수가 없죠.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감정, 타인의 마음도 애초에 없는 거니까요.

 

서은주 : 저도 <평화란 어떤 걸까?>를 읽고 나서 최진경 선생님이 추천하신 <너>를 읽었는데 타인의 인권을 생각하게 하는 면에서 맥락이 통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최진경 : 저도요. 어린이책이 기본적으로 '존중'과 '평화'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이번 모임을 준비하면서 하게 됐어요.

 

서은주 : <한밤중 달빛 식당>도 보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서로 다 각자 따로 책을 추천했는데 주제들이 통해서 신기하기도 하고 첫 모임을 오는 마음이 좋더군요.

 

유진목 : 저는 요즘 '기억'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아서 '기억'이라든가 '망각'이라든가 그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책들을 많이 읽고 있었거든요. 이번 모임을 앞두고 무슨 책을 같이 읽으면 좋을까 하고 둘러보다가 "기억과 선택에 대한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야기"라는 책 소개 문구를 보고 <한밤중 달빛 식당>을 주저 없이 고르게 됐어요. 그리고 책을 주문해서 읽었는데 이게 만만치 않은 내용이더라구요. 지우고 싶은 나쁜 기억들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삶은 나쁜 것들과 함께 흘러가잖아요. 좋은 것만 있지 않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나쁜 일들이 있을 때마다 지나치게 자책하고 삶을 부정하고 무너지곤 했던 제 자신을 스스로 타이르게 되더라구요. 나쁜 일은 나쁜 일대로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삶은 계속되는 거니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잘 잡아 보자는 생각이 들면서요. 그리고 <평화란 어떤 걸까?>를 읽는데 "평화란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것"이라는 구절을 만나서 정말 많은 위안을 받았어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스스로를 자책하고 미워했는지도 보이구요.

 

서은주 : 사실 전쟁이라든가 분단국가라든가 하면서 '평화'라는 개념을 거창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평화란 어떤 걸까?>를 읽어 보면 우리 세대가 언뜻 생각하는 그런 '평화'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아요.

 

유진목 : 맞아요. 처음에 전쟁으로 시작을 하는데 뒤로 갈수록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아주 평범한 일상까지 이어져서 감동적이었어요.

 

서은주 : 얼마 전에 학부모 한 분하고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거든요. '평화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어서 가봤는데, 거기서도 굉장히 일상적인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특히 요즘 뉴스에 많이 나오는 '몰카' 이야기 같은 걸 예로 들면서 안전하지 않은 일상에 대해 생각해 보더란 거죠.

 

유진목 : 그러고 보면 우리의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이 젠더 의식이라든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게 전무했죠. 이제야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터져 나오고, 안희정 사건을 통해서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지금까지 사회 통념이라는 것 자체가 불평등을 기반으로 조성되고 전파되고 오랜 시간 이어져 왔으니까요. 여성들은 애초에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 자신이 원하는 삶 자체를 살 수도 없었고 살기는커녕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었죠.

 

황선화 : 저는 요새 제 자신에 집중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생각해 보면 일상을 단단하게 지켜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싶어서거든요. 근데 쉽지가 않아요. 일상의 평화는 너무나도 쉽게 깨지고, 좌절하고. 제 자신이 주체가 돼서 사는 게 저한테 익숙하지 않은 거예요. 오랫동안 나 자신이 없는 삶을 살았던 거죠. 사실상 '평화'라는 것은 정치적 문제와 연결시키기 쉽지만 내 일상에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켜낸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는 너무 어려우니까요.

 

유진목 : 저도 생각해 보면 '평화'라는 개념을 일상과는 먼 개념으로 체득한 것 같아요. 제가 85년, 86년에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서 유치원을 다녔는데,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게 유치원 끝나고 집에 올 때 하루가 멀다 하고 울면서 집에 왔거든요. 최루탄 때문에 눈물 콧물 범벅이 돼서 집에 오는 거예요. 그리고 집에 오면 엄마가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송이 끊기더니 사이렌 소리가 나왔어요. 대피하라고. 북한에서 넘어왔다고. 전쟁난다고요. 제가 어린 시절에 접한 '평화'라는 개념은 '전쟁'과 맞물려 있었던 거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런 어린 시절을 겪고 자란 세대가 '평화'를 일상과 연결 지어 생각하려면 많은 것들이 내면에서 부서져야 가능할 것 같아요.

 

 

유진목 : 그런 면에서,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평화란 어떤 걸까?>에서 "싫은 건 싫다고 혼자서라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 땅의 모든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한데 마음 한구석에는 머뭇거리는 제 자신도 있어요.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는 개인이 과연 안전하고 평화롭게 자신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인가 생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어른들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지 못했어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책임이 있으면서 무책임한 말로 전락시킨 존재도 결국 어른들인 거죠. "어떤 신을 믿더라도, 신을 믿지 않더라도, 서로서로 화를 내지 않는 것." 이 구절은 정말 어디 높은 데 올라가서 큰 소리로 외치고 싶어요.

 

최진경 : 그만큼 지금 우리들이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는 거겠죠. <평화란 어떤 걸까?>라는 이 묵직한 제목에 대해서도 그래서 다시 질문해 보게 돼요. 우리 세대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과 반대 개념으로 '평화'를 익혀 왔다면, 이제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때인데, 그렇다면 우리 개인들이 어떻게 '화해'를 할 것인가, '화해'란 어떤 걸까? 라고 질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왜 싸웠지? 우리가 뭘 양보할 수 있지? 이렇게 질문할 때 그림책이 주는 힘이 엄청난 것 같아요. 구구절절 길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주입하지 않으면서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하니까요.

 

유진목 : 맞아요. 분노란 뭘까. 용서란 뭘까. 저도 평소에 많이 생각하는 주제인데, 그러다 보면 답을 찾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찾아서 읽게 돼요. 이런 주제로 아주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이 있는데, 특히 용서나 분노, 차별과 혐오의 개념에 대해 생각할 때 마사 누스바움이 쓴 책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이 얘길 하는 이유는, 마사 누스바움의 책들이 정말 두껍거든요. 긴 시간을 들여서 긴 글을 읽고 생각해야 하죠. 모두가 읽으면 좋지만 그만큼 진입 장벽이 높은 책이에요. 어른들에게도 그런데 청소년들이나 어린이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죠. 그러다 이번에 추천해 주신 <평화란 어떤 걸까?>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어요. 그 두껍고 무거운 책이 하고 있는 이야기가 이 그림책에 한 줄 한 줄 적혀 있더라구요. 그러면서 막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거예요. 요즘 아이들은 좋겠다 하고요. 우리도 어렸을 때 이런 책을 읽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타인을 존중하는 어른으로 지금의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고. 이게 다 지나친 감상이라 해도 저는 우리의 다음을 이어서 살아갈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져 보게 돼요.

 

    어린이책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첫날 나는 이 모임이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음에도 새로운 어린이책을 가지고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제야 서로 통성명을 하고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서로 눈을 맞추고 여러 번 울컥하고 때때로 한바탕 웃으면서 자연스레 속엣 이야기를 꺼내 놓고 있었다. 각자 가져온 어린이책의 한 페이지를 펼치고 소리 내 서로에게 읽어 줄 때는 한 분 한 분 얼굴을 눈여겨보았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보이면서도 내 엄마 같기도 한 얼굴들을.

 

 

 

 

 

 

 

 

 

사회, 원고정리 및 구성 / 유진목

시인. 서점 손목서가 주인. 책을 쓰고 책을 모으고 책을 팝니다.

 

참여 / 서은주

모든 아이들의 삶이 존중받고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이들과 전래놀이를, 엄마들과는 그림책을 읽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참여 / 최진경

영도마을교육공동체 사무국장.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부산지부 활동가. 영도에서 태어나서 51년째 영도에서 살고 있는 그림책읽어주는 할매가 꿈인 사람.

 

참여 / 황선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혹은 어른이 되지 못한 나를 살피고 다독이며 그림책과 함께 바다 곁에 살고 있습니다.

 

 

 

   《문장웹진 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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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청탁

[에세이] 황당한 청탁 손세실리아 몇 해 전 일이다. 모 공공기관의 잡지 외주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편집 담당 아무개라 자신을 소개하곤 산문 청탁 건으로 연락했단다. 마침 산문집 준비 중이었고, 써야 할 글감이 몇 있어 흔쾌히 수락하곤 착실하게도 마감 날짜를 지켜 넘겼다. 언제 끝날지 모를 팬데믹 상황에서의 거리 두기, 인원 제한, 방역 등 여러 규제와 제약으로 인해 경영난에 허덕이는 책방카페 운영자로서의 경험담을 담담하게 풀어냈던 것인데 담당자로부터 게재 불가 통보를 받았다. 두려움에 처한 자영업자와 소시민들로부터 공감을 받을 만한 내용인지라 어리둥절했더니, 자신도 당혹스럽다며 사과하고선 기획위원들의 반대라서 하는 수 없단다. 이유를 묻자 제목 때문이라며, 재난지원금은 정부에서 지급했는데 어째서 돌아가신 시부가 지급한 것으로 표현했느냐는. 혹여 불온한 내용은 아닌가 상상할 수도 있어 간추려 말하자면, 공간 오픈 10년이 지나도록 번듯한 영업용 커피 기계도 없이 꾸려 오던 중, 코비드19 장기화로 인해 한가해진 틈을 타 당근마켓에서 구입한 중고 기계를 설치하며 겪게 된 일이다. 하는 김에 서가 리모델링도 감행했던 건데 빠듯한 형편을 알고 있다는 듯 작고하신 후 팔리지 않아 오래 비워 둔 시부님의 시골집이 처분돼 자녀 넷이서 공평하게 나눴다는 사연을 유산이라는 상투적 표현 대신 재난지원금으로 비유했던 것. 실제로 그렇게 여겨지기도 했고. 생전에도 이과 성향이셨는데 여전하시구나 싶게 액수도 타이밍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나보다 처지가 더 어려운 이들에게 양도할까 하다가 유산이라기보다 어쩐지 시부님께서 보내 주신 재난지원금 같아 감사히 받기로 했다. 주위에 휴업과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 그나마 문을 열고 있는 가게도 대부분 버티기 작전에 돌입한 듯한 분위기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보니 ‘어렵다’는 푸념도 금기어다. 오죽하면 천국에서 보내 준 재난지원금을 넙죽 받았겠나. (중략) 각설하고, 팬데믹이 아니었음 앞만 보고 내달렸을 내 인생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긴 건 분명하다. 주위에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는지 살피고, 미력하나마 챙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런 내 모습이 저승에 계신 시부님의 마음까지 흔들었을지도. - 졸저 『섬에서 부르는 노래』 중 「천국에서 지급된 재난지원금」 일부 은유를 팩트로 읽고 내린 결정이 어처구니없었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구차해 입을 다물었다. 괜찮다며 실소하는 내가 이해심 많아 보였던 걸까? 최종 편집까지 열흘쯤 여유가 있으니 다른 글을 써준다면 기다리겠단다. 지면의 앞부분에 실리는 꼭지라서 비울 수 없다며. 담당자가 무슨 죄냐 싶어 수락했다. 비록 전화 통화와 이-메일로 나눈 대화였지만 내 글을 꼭 싣고 싶노란 그의 정중하고도 간곡함이 고맙기도 했고, 한편으론 어차피 책에 수록할 산문 한 꼭지가 더 생기는 거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손님 뜸한 가게의 며칠 매출 총액보다 원고료가 후했다. 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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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는 레벨업

[에세이] 아홉수는 레벨업 이나리 1. 한동안 웹소설을 많이 읽었다. 웹소설은 이천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인소’(인터넷소설)와 달리 핸드폰으로 보기 때문에 서사의 호흡이 색다르다. 일명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으로 불리는 특정 서사 조건이 강하게 작용한다. 물론 ‘회빙환’이 최근에 유행하는 웹소설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가령 ‘환생’은 불교와 힌두교의 종교적 교리에서 나온 윤회전생의 개념으로 이미 친숙한 서사적 요소다. ‘회귀’는 또 어떤가. 오래된 영화 중에 (1993)이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필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하루를 겪는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자살이라는 선택까지 시도하지만 반복되는 시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필이 반복된 하루 안에 갇혀서 깨달은 것은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점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해지는 것. 그제야 필은 회귀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필에게 회귀는 일종의 저주와 같다. 회귀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이 영화뿐만이 아니다. 영화 (2004), (2017), (2018) 등은 타임루프물로 불리며, 반복되는 시간을 주인공이 겪는 형벌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웹소설에서 등장하는 회귀는 이와 다르다. 주인공이 겪는 ‘루프’는 형벌이라기보다는 인생의 기회이고 다른 선택지다. 말하자면, 이미 오답 노트를 모두 작성한 주인공에게 문제 풀 기회를 다시 준 셈이다. 주인공에게는 이미 모범답안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삶을 더 행복하게 끌고 나갈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된다. 큰 맥락을 보자면 ‘빙의’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읽었던 책 속으로 들어가 해당 등장인물에 빙의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은 안전할 수밖에 없다. 미래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웹소설의 독자로서 나는 이 ‘안전한 불확실함’에 빠져들었다. 주인공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흥미진진하게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회빙환’의 요소들로 인해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안전장치를 믿었다. ‘안전한 불확실함’이라는 이 모순적인 요구를 충실히 지켜주는 서사라니. 서사의 본질은 불확실성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확실하게 안전하기를 바라는 모순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내 현실이 팍팍할수록 그들의 안전한 모험은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2. 미래를 안다는 것. 그건 인간사에서 항상 선망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미래를 알고자 한다. 알지 못한 상태로 미래를 기다리는 현재는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고통스럽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그중 하나는 선지자, 웹소설 방식으로 말하자면 예지자를 찾는다. 하늘이 내린 신통한 능력을 발휘해서 미래를 예지해 주는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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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의 시작과 끝

[에세이] 괴담의 시작과 끝 현찬양 나는 중학교 졸업식에서 귀신을 본 적이 있다. 운동장에서 사백여 명에 달하는 아이들과 그 두 배쯤 되는 부모들이 조회를 하듯이 서서 식순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지루해서 우리 반 교실 창문을 보고 있었는데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처음엔 얼룩인 줄 알았는데 점차 뚜렷해지면서 교실 창문 너머로 얼굴 같은 것으로 변했다. 얼굴 모양의 흰 얼룩인지 흰 얼룩 모양의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 반 누가 아직 나오지 않았나, 싶었지만 얼굴이 너무 하얘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눈은 움푹 들어가서 보이지 않고 얼굴의 윤곽은 뚜렷한데 몸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교복을 입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키를 보면 우리 또래인가 싶기도 한데······.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게 정말 맞아? 나는 옆에 애를 손으로 쿡 찔러서 “저거 보이냐?”라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면 약간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그 애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으아 저게 뭐야.” 그 소리에 주변이 일순 소란해졌다. 학생들과 학부모 모두 그것을 보았다. “뭐야, 저게.” “누구 안 내려왔나 보네.” 같은 소리들로 시끄러워지자 단상 옆에 있던 담임선생님이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아이들이 창문을 가리키자 담임은 우리 반 애들의 숫자를 세보고는 실장(우리 학교에선 반장을 그렇게 불렀다)더러 올라가 보라고 했다. 실장이 올라가서 귀신이 비치는 창문 너머에서 손을 엑스자로 그었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실장은 다시 내려왔지만 여전히 귀신은 그곳에 있었다. 하얀 얼굴로 졸업하는 아이들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제야 선생은 제법 당황했는지 실장에게 유리창을 닦아 보라고 했다. “애들이 창문 너머로 분필 지우개를 터니까 그게 묻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러니까 창문을 닦으면 돼.” 그 말은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실장은 걸레를 가지고 가서 창문을 닦았다. 그래도 사람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엔 술렁였지만 졸업식이 진행되자 점차 귀신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햇빛이 반사된 것일 거라는 둥, 잘 닦이지 않는 얼룩일 거라는 둥, 하는 소리도 들렸다. 합리적인 듯 보이는 가설들이 몇 가지 나왔으나 식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무엇도 검증할 수는 없었다. 선생님과 친한 몇몇 아이들이 “우리 교실에서 사람 자살한 적 있어요?” 하고 직설적으로 물어 보았지만 물론 선생님들은 대답하지 않았는데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찡그린 얼굴로 자기들끼리 소곤거렸을 뿐이다. 학생회장이 연설하고 동창회장이 연설하고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학년 부장 선생님까지 한마디씩 하고 나자 몇 명이 표창장을 받았다. 꽃다발을 수여하면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는 동안

  • 관리자
  •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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