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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모임 - 책방곡곡 제주 시옷서점 2편 - 우리가 맞닥뜨리는 세계의 소설

  • 작성일 2019-02-01
  • 조회수 1,192

[독자모임-책방곡곡]

 


※ 기획의 말
2019년 독자모임 코너 [책방곡곡]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의 독립서점들을 방문하고, 그 지역의 문인 및 독자의 목소리를 청취하고자 합니다. 각 지역의 문학 생태계와 특수한 현안들이 곳곳에 계시는 독자들에게 서로 공유되어, 사유와 비평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주 시옷서점 2편

- 우리가 맞닥뜨리는 세계의 소설

 

 

사회 : 현택훈(시인, 시옷서점 대표)
참여 : 안민승(사진작가), 홍임정(소설가), 김진철(제주대 강사, 동화작가), 허유미(시인), 김신숙(시인), 오승주(인문학 강사, 작가)

 

 

 

[caption id="attachment_142403" align="aligncenter" width="230"]홍임정, 『먼 데서 오는 것들』
(파우스트, 2015)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42404" align="aligncenter" width="230"]김사과, 『더 나쁜 쪽으로』
(문학동네, 2017)
[/caption]

 

 

 

 

현택훈 : 오늘 시옷서점에서 두 번째로 모이네요. 오늘은 홍임정의 소설 『먼 데서 오는 것들』(파우스트, 2015)과 김사과의 소설 『더 나쁜 쪽으로』(문학동네, 2017)을 중심에서 얘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제주의 소설에 대한 것도 함께 논의가 되면 좋겠습니다. 소설집 『먼 데서 오는 것들』을 쓴 홍임정 소설가는 제주도로 이주한 작가인데, 이 책에 보면 대부분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수록작품 중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이들을 데려갈까」는 제주 고사리를 채취하는 일이 주요 사건이잖아요. 책을 읽은 느낌이 어떠셨는지요?

 

김신숙 : 저는 이주한 작가라는 규정이 위험하다고 봅니다. 작품 속에서 제주의 삶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주민이라는 말처럼 이주 작가라고 굳이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더욱이 홍임정 작가는 원래 사진을 찍다가 제주도에 와서 소설을 쓰게 되었잖아요.

 

허유미 : 그렇긴 하지만, 제주도에서만 유독 이주민이라는 말이 쓰는 것이 특성인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원주민이라는 말도 사용되고 있는데요. 외부에서 오는 것에 대해서 구분을 지으려는 사고가 있는 것 같아요.

 

김진철 : 제주도가 그런 점이 심하죠. 그것을 문화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고립된 사고이기도 해요. 같은 제주도 안에서도 이동을 잘 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이주한 사람들들은 달라요. 제주도를 입체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어쨌든 물리적보다는 화학적 융합을 한다면, 이주한 사람의 눈으로 소설을 바라보는 점이 소설의 한 방식인 건 확실합니다.

 

홍임정 : 물론 저의 경우는 제주도에 오기 전부터 소설을 쓰긴 했습니다. 제주에서 소설을 쓴다면 무엇을 쓰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요. 그런데 제주에서는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가 일부러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제주도의 환경이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어요. 그래서 자전적 이야기를 주로 쓰게 된 것 같아요. 소설은 픽션이긴 하지만, 저는 있는 사실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어요.

 

 

김신숙 : 소설에 의지하며 살아 온 시간이 있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제가 소설에 의지했던 순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며 저는 우울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조숙하게도 소설을 읽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생 때부터 입시중심인 환경에 대해 고민했지요. 아무도 나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 입시증후군을 앓았습니다. 그후 많은 여성 소설가들에게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십대 후반을 여성소설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자랐습니다. 대학에 와보니 남자 동기들은 삼국지 같은 얘기만 하더군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이주해서는 달동네만 골라서 살았습니다. 아마도 내가 읽은 소설의 현장에 가서 갈고 싶었던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제주로 온 사람들이 바닷가 근처를 찾아가 머물듯, 저는 서울의 달동네 같은 곳만 기웃거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청량리, 마장동 등 소설의 배경이 되거나 그와 비슷한 장소만 옮겨 다녔지요. 한예종이 있는 동네에서도 몇 개월 살았어요. 소설에서 만난 세계와 반응하며 연소되는 시절이었습니다. 그후 제 손에 들어온 이 두 소설은 마치 무슨 운명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허유미 : 이 책에 보면 "언젠가부터 나는 얼굴을 찍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해 내가 사진에 담고자 했던 것은 얼굴에 드러나고 있는 눈빛이었다"(「먼 데서 오는 것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제주도가 피사체가 되어 제주도를 렌즈로 들여다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사진을 찍어왔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오승주 :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쓰메 소세키나 조지 오웰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이 몸은 고양이야』 같 사소설 느낌이 있었고, 조지 오웰의 소설 『카탈로니아 찬가』의 소설을 대하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홍임정 소설가는 탈북한 사람들을 취재해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앞으로도 기대가 됩니다.

 

허유미 : 외부에서 내부를 보는 눈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부에서 내부를 볼 수 없잖아요. 소설가는 외부에서 내부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홍임정 소설가는 제주라는 외부에서 지나온 삶과 같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어서 소설을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이 삶의 실패와 좌절이 있어서 날카롭고 거센 문장이 있을 수 있는데 외부에서 내부를 보았기에 담담하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표제작인 단편 「먼 데서 오는 것들」을 보면, 롤랑 바르트의 책 『밝은 방』에 나오는 말을 언급하고 있어요. "사진에 있어서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이 존재했음과 내가 지금 그것을 보고 있는 바로 그곳에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말이 홍임정의 소설을 말해주는 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소설인데, 사실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오승주 : 외부에서 왔다는 것은 떠남이 생기는 것이고, 그래서 거리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요. 책 제목 '먼 데서 오는 것들'이 말하는 것처럼 먼 데서 왔기에 거리가 생겨서 소설을 쓰는 시점이 적절해지는 것 같아요. 저도 젊은 날을 서울에서 보내다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제주도와 거리가 생겼어요. 그 거리에서 경계가 생기니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등장 인물 역시 제주에 있지 않고, 서울에 있다가 제주로 내려가서 서술을 하잖아요. 4·3에서 도망쳐 나왔기에 볼 수 있었던 것이죠. 4·3을.

 

안민승 : 저는 홍임정 소설가를 옆에서 지켜보면 어떤 집요함을 느낍니다. 홍임정 소설가의 책 『붉고 푸른 당신과 나 사이』를 보면 그런 생각이 분명해집니다. 사실 자신의 얘기를 가감없이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홍임정 소설가는 르포에 가까운 소설을 씁니다. 마치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처럼 꾸밈 없이 쓰는 느낌을 받아요.

 

김신숙 : 저는 이런 점도 재미있었어요. 전직 사진가였던 사람이 소설을 쓰며 문장이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으며 읽는 문장의 맛이 좋았습니다. 마치 사건을 사진 찍듯이, 사진 작가의 감각으로 문장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른 소설가 중에서도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가 소설을 쓰는 경우, 그 직업이 소설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문학이 사람 사는 이야기이니. 그리고 진정성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서 소설을 써왔는데, 그렇다면 굳이 제주도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 가서도 그곳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서 소설을 쓸 것으로 예상됩니다. 홍임정 소설가는 소설 외에는 독립출판사와 작은도서관 일을 하시잖아요. 그러한 삶이 소설에도 반영이 된다고 봅니다.

 

김진철 : 제목을 노래 제목으로 많이 했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어요.

 

현택훈 : 저는 홍임정의 소설에서 문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음악에 대한 분위기가 소설에 바탕을 이룬 경우가 많아서 시를 읽는 느낌을 받으며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안민승 : 홍임정의 사진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소설 「먼 데서 오는 것들」에 나오는 사진 이야기에서 찍은 사진이 이 사진입니다. 이 사진이 홍임정 작가의 거의 마지막 사진 작업이었습니다.

 

홍임정 : 저는 10년 넘게 사진을 찍었지만, 사진이 너무 어려웠어요. 그러다 우연히 글을 쓰면서, 내가 사진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을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진기를 내려놓고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주에 산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힘들 때마다 바닷가에 가서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제주는 바로 바다였습니다. 제주가 사진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가장 신경쓰는 것은 나레이션입니다. 어떤 목소리.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허유미 : 사춘기를 앞둔 성장소설 「꽃 찾으러 왔단다」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고 마치 유년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동네 문방구 가서 손거울을 사서 아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손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어렸을 적 슬프면 방안에 앉아 손거울을 들여다보던 시간이 있었거든요. 이 작품 끝 부분에 "아빠, 나 가슴이 나오는 것 같아요." 가 나오는데요. 작품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버지가 부재인 중에도 화자는 성숙해가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남았습니다. 이런 기억의 성찰이 자신을 상처 속에 가두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게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신숙 : 홍임정이라는 사람 캐릭터도 소설 같아요. 어렸을 때 유괴를 당했다가 탈출한 적도 있다고 들었어요. 보기엔 작고,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굉장히 큰 시야를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도에서 소재를 뜯어먹으려는 소설가의 자세를 종종 보는데, 홍임정 소설가는 그와 달리 소설을 통해 제주도의 영역을 더 넓히는 작품들이 많아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따뜻한 확산이라고 느꼈습니다. 인터뷰를 하고, 취재를 할 때도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저는 소설가의 눈을 사랑합니다. 소설가들은 문제 의식을 잘 잡습니다. 그런 문제 의식을 통해 제가 시를 쓰기도 하구요.

 

김진철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도 우주에서 오는 분위기가 있는데, 이 소설집의 제목도 그와 비슷하게 '먼 데서 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제주도가 서울에서는 먼 데라고 하잖아요. 사실 비행기를 타면, 아주 먼 곳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 먼 데서 오는 것이 제주에서 쓰였기에 가능한 제목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대상을 거시적으로 혹은 미시적으로 보게 되는데, 제주의 소설가들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제주를 바라보아야 할 것 같아요.

 

안민승 : 홍임정의 소설은 이 세계의 지도 위에 자신만의 습자지를 얇게 겹쳐서 희미하게 비쳐오는 형상들을 그리고 있는 듯 보여집니다. 미로를 탈출할 방법으로 끊임없이 헤매는 자의식을 내려놓음으로써, 입체성의 세계 위로 포개놓은 습자지의 얇은 막과 함께 떠오르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아요. 깍아지른 미로의 길 위로 떠오른 그 세계는 사뿐히 가볍게 뛰어 오른 공간은 아닌지라 어쩔수 없이 위태롭고 위험하며 아슬아슬합니다.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작가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덜어내는 방법밖에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얇은 습자지 아래로 추락하여 다시 닫힌 미로속으로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먼지처럼 가벼워져 그 위를 떠있는 듯 안착하여야 하기 때문이겠죠. 그녀가 내려앉은 곶자왈 역시 여전히 길을 잃고 낙마하기 쉬운 공간이며, 미로를 벗어 난 후 맞닥뜨리는 제주의 바다 역시 길을 지우는 파도 위의 망망대해로 그녀 앞에 주어질 뿐입니다. 그리하여 그녀가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가벼워져서 높고 쓸쓸한 어떤 먼 곳의 무언가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갖게 됩니다. 미로의 형상은 지웠으나 습자지로 펼쳐진 광야는 언제 발을 헛디뎌 추락할지 모를 위험의 세계이며, 얇은 광목천으로 덧대어진 망망대해조차 언제 발이 빠져 가라앉을지 모를 불안을 내포하고 있어서입니다.

 

현택훈 : 애정이 느껴지는 말이네요. 저는 소설 「꽃 찾으러 왔단다」를 읽으며 오정희의 초기 소설 「중국인 거리」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부재, 영어 식민 사회에서 사는 이 환경이 자아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제주도의 환경이 소설가의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홍임정의 소설을 통해 의미 있는 얘기들이 많이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김사과의 소설 『더 나쁜 쪽으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 볼까요. 이 소설은 한국 사회에서 벗어나 생각을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마치 제주를 배경으로 할 때 새로운 경계가 생기는 것처럼 소설가의 눈을 통해 코스모폴리탄의 시각으로 세상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홍임정 님과 안민승 님이 김사과의 소설 『더 나쁜 쪽으로』(문학동네, 2017)를 함께 읽자고 추천했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서 얘기를 전개해 볼까요.

 

홍임정 : 김사과 소설가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그녀의 장편소설 『미나』(창비, 2008)를 통해서였습니다. 소설을 통해 그녀가 그린 소위 '강남에 사는 십대 아이들'의 세계는 한마디로 끔찍했어요. 강북 변두리에서 자란 내가 어쩌다가 강을 건너 그쪽으로 가게 되면 느껴지곤 했던 알 수 없는 흉폭을 소설 속 십대들이 재현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이 소설을 스물네 살에 뉴욕인지, 베를린인지에서 썼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녀 역시 강남에 사는 십대 아이들의 흉폭한 세계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던 겁니다. 이후로 그녀가 소설이나 산문을 발표할 때마다 쭉 읽어왔는데, 저는 언제나 그녀가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패션잡지처럼 그것을 먼저 예민하게 감지하고 선점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곤 했어요. 강남문화든, 문학과 예술이든, 한국사회든, 세계의 추세든. 그녀의 소설 쓰기에서 저는 이 시대의 소설 얘기를 할 수 있는 지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민승 : 이 소설 『더 나쁜 쪽으로』는 태초에 낙원을 상실한 인간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시간을 확장하여 통시적으로 봐도 좋을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내면에 지도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 지도는 내면의 미로를 뚫고 존재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필연적으로 바라고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평면성의 지도를 세계와 부딪히는 입체로 구축해보면 거대한 미궁의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절망적인 것은 세계의 미로를 구축한 관념은 너무 낡아있고, 우리가 겨우 가진 것이라곤 육체성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그 미로의 좌표들은 견딜만한 지옥도로써 기능을 하게되어, 약에 쩔어 헤매거나 출구없는 절망의 문 앞에서 서로가 믿지도 않는 가짜 낙원의 대용품들로 견뎌내는 선택지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죠. 이러한 점을 함께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현택훈 : 그렇군요. 세계의 끝에서 희망이 없다는 것을 목도하는 일이 소설가의 일인 것 같아 서글퍼지네요. 저는 이 소설이 소설이지만 시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시집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요. 다른 분들은 어땠어요?

 

허유미 : 홍임정의 소설 『먼 데서 오는 것들』에서는 제주라는 외부에서 가족의 상처,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서 자신이 정체성을 안정으로 변화시키며 외부였던 제주가 내부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반면에 김사과의 소설 『더 나쁜 쪽으로』는 깨진 거울의 파편 속에 또 다른 파편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모습을 갖춘 형체가 보이지 않고 상처가 아물 시간도 없이 계속 곪아 가고 있습니다. 소설 대부분이 주인공의 신분을 밝히지 않아서 소설 속 불행을 살아가는 그들이 나이거나 너이거나 우리인 것 같았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실패로만 향하는 몸들과 함께 내가 함몰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책을 덮어 버리곤 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외부와 내부가 없습니다. 청춘도 사랑도 타국 생활도 전부 외부입니다. 한 번도 내부를 품은 적이 없는 이들이 쓰러지고 찢겨지며 존재 방식을 찾아가는 모습들만 가득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삶이 책에서 말한 대로 더 나쁜 쪽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직 절망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신숙 : 김사과의 소설은 시 같기도 하고 온라인게임 같기도 했습니다. 온라인 게임 같다는 것은 일방적이고, 게임에 아주 중독된 학생들이 엄청 빠른 속도로 중얼거리는 변병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세계의 개」라는 작품을 읽으며 도입 부분이 바로 우리들을 보여 주는 말 같아 보였습니다. 우리도 문학잡지 같은 걸 계획하고 있으니까요. 웹진으로 만들지, 종이책으로 만들지 그런 걸 고민하고 있으니까요. "호텔은 바닷가 버려진 마을에 있다. 마을의 한 주민이 프랑스 제3의 문학잡지를 창간했다. 프랑스의 특산품 권태가 이십 년간 그에게 그 짓을 하게 만들었다. 그가 한 손에 이십 헥타리터 한정 포도주를 들고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나는 웹디자이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은 지드래곤이 힙스터 삘 양년들이랑 뉴욕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지 못했을 때의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봄날의 황사같이 무기력하게 쏟아져 있다."라는 표현도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황사도 이제 역사가 IMF정도는 된 것 같군요. 그런데 자꾸 뉴스에 등장하니 무엇인가 늘 새로운 위험 같아 보입니다. 「세계의 개」라는 작품은 '사랑을 자주 말하는 걔'가 등장합니다. 걔는 '그 아이'의 줄임말입니다. 세계는 축소되고 있습니다. 글자 속에서만, 의식주 속에서만, 상품 속에서만, 그리고 문학잡지 속에서만 축소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을 말하는 지점이 좋았습니다.

 

 

오승주 : 얼마 전에 방학을 맞이해 가족여행을 갔던 일이 떠오르네요. 하루는 캐리비안 베이에서 퀵 슬라이드를 탔고, 다음날은 에버랜드에서 아이들이 바이킹이라 부르는 콜럼버스 대탐험을 두 번 타고 멀미를 했습니다. 소설을 읽는 일은 그렇게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김사과의 소설은 책을 기다리기 전에 e북으로 먼저 구매해 전자책 앱을 다운 받고 읽었습니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세계와 문장의 전쟁을 읽는 일인 것 같아요. 욕망의 범위를 놓고 펼치는 전쟁의 역사가 소설에 펼쳐져 있습니다. 세상은 욕망의 범위를 강요하며 인간은 애완견처럼 지시를 따르죠. 세상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식은 몇 가지 관념을 지배하고 욕망의 서사로 이루어진 게임을 만들어 인간들끼리 박 터지게 싸우도록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에버랜드와 캐리비안 베이는 승부가 갈리고 안정기에 접어든 얌전한 욕망의 공간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소설가는 온몸이 문장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사과는 관념 덩어리들을 감각적으로 펼쳐놓고 있더군요.

 

김진철 : 이 소설 『더 나쁜 쪽으로』는 개인적으로 소설의 맥락을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마치 날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고 할까요. 삶 자체가 맥락이 없으니 오히려 더욱 현실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가 일부러 그것을 노린 것 같기도 하구요. 내용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느낀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회에서 잉여인간으로 치부되는 현실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 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지는 못하는, 그래서 결국은 피폐해져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목격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간관계 형성이 불가능하거나, 표피적 관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현택훈 : 공감합니다. 그렇다면 김사과 소설가는 왜 이런 방식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 걸까요? 이미 그 지점에 대한 얘기도 나오긴 했지만, 그러한 문제 의식을 주목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홍임정 : 이 소설의 제목처럼 세계는 더 나쁜 쪽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늙고, 지겹고, 실패했고, 약빨도 더 이상 듣지 않고, 부르주아는 6대까지 이어지고, 그리고 장충동에서 죽은 말.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 되고, 후퇴하고, 퇴행하며 더 나쁜 쪽으로만 기울어지는 그녀의 세계 인식 속에서 그녀가 여전히 최전방에서 빠르게 적을 감지하고 있는 게 맞다면 우리도 장충동에서 말의 사체를 발견하게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한 점이 이 소설을 읽는 가치라면 가치이겠지요.

 

안민승 : 그렇습니다. 자폐적인 욕망의 가지 몇가닥을 붙들고 밀랍으로 녹아가는 늪속에서 겨우 떠있는 일은 그래서 눈물겹고 외로움에 안타깝기는 하지만 우리모두 익히 아는 일이라 비밀조차 되지못합니다.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건 그 견딜만하다는 사실때문입니다. 우리가 처한 위험은 존재를 완전히 파괴할 만큼 위험하지도 못하며, 그녀가 의지하는 불안 역시 자살로 이끌어 줄만큼 스스로를 끝장내어 주지 않습니다. 견딜수 없다는 것이 참을 만 하다는건 역겨움을 유발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이 견딜만하다는 건 지겨움만을 남기게 되는 건 아닐까요.

 

현택훈 : 맞습니다. 그런 식으로 김사과 소설가는 세상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주의 소설에 대한 얘기도 함께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제주가 곧 당대가 될 테니까요.

 

허유미 : 네. 저는 이 두 소설에서 모두 상처를 보았는데요. 제주에는 4·3이라는 큰 상처가 있습니다. 4·3 소설이 많이 나오면서 아픈 상처들이 언어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소설가 김석범은 오사카에서 살면서 제주도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통해서 제주 4·3 사건 당시 벌어진 참극에 대해 듣게 되어 제주도에서 벌어진 일에 충격을 받고 이후 문학에서 4·3을 다룹니다. 그의 대하소설 『화산도』(보고사, 2015)는 30년 동안 집필했다고 들었습니다. 4·3이라는 상처는 내부자가 보는 시각과 외부자가 보는 시각이 아주 오랫동안 달랐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4.3을 잘 들여다 보고 모두 함께 아파하고 부둥켜안았으면 합니다. 결국 우리가 부둥켜안아야할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진철 : 김사과의 이 소설에 보여주듯 이주라는 것이 공간의 이동의 측면도 있지만 관계의 이동이 더 큰 부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관계의 이동이 성공적일 경우 자연스럽게 정착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고립되어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소설 『먼데서 오는 것들』이 제주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면, 소설 『더 나쁜 쪽으로』는 사회에서 튕겨져 버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무엇이 정답이다, 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주의 소설가들이 이러한 부딪치기로 소설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홍임정 : 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대한 얘기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도 제주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애초에 김사과 소설가가 '강남'이라는 지명도, 행정명도, 지리명도 아닌 이상한 땅에서 예민하게 감지했던 흉폭함은 자연스럽게 조세희의 소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문학과지성사, 1978)을 떠올리게 합니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이 난쟁이 가족의 집을 부수던, 그리고 작은 쇠공을 쏘아올리고 굴뚝에서 떨어져 죽은 난쟁이의 피가 스민 바로 그 땅의 흉폭함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은 잠식당하는 세계의 지표인 것입니다.

 

오승주 : 그런데 이 소설에서 말하는 나쁘다는 도대체 누구에게 나쁘다는 걸까요? 저는 욕망의 경계로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세상이 허락한 욕망을 넘어가면 나쁜 것이겠죠. 저는 욕망의 경계를 여행하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습니다. 여권의 체류기한, 아이폰 불빛, 마약과 섹스, 그림과 영화. 욕망의 게임에서 허우적대다가 어지러워하는 욕구불만의 비명 소리를 듣습니다. 저는 가족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욕망의 족적들을 되새겼습니다. 김사과의 소설 속 인물처럼 샌프란시스코나 뉴욕 혹은 '더 나쁜 쪽으로' 튕겨나가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자는 모습을 보면서 돌아왔습니다. 얌전한 욕망의 평화로운 경계 안으로.

 

김진철 : 김사과의 소설 『더 나쁜 쪽으로』의 내용 중에 '테이트모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미학적 가능성을 이용하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버려진 공장이 박물관이 되고, 버려진 아파트는 갤러리가 되고, 버려진 발전소는 언더그라운드 클럽이 되고 그걸 팔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소설에서는 설정이었겠지만, 꼭 제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주의 옛날 건물들, 감귤창고, 허름한 집, 오래된 건물들이 하나 둘씩 다른 가치를 가진 장소로 거듭나고 있는데요. 물론 그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의미가 있는 경우도 많지만 어쩌면 본질을 지워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장소의 역사와 정체성 보다 그냥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즐기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현택훈 : 흥미 있는 연결이네요. 제주에서 활동하는 조중연 소설가는 소설 『탐라의 사생활』(삶이보이는창, 2013)을 보면, 근대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의 이야기로 연결을 짓더군요. 그렇게 연결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승주 : 오늘 이렇게 참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소설은 도전하고 세계는 응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작년부터 19~20세기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마치 전쟁사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세계가 닫아 놓은 욕망을 거칠게 열어젖히는 소설은 처음에는 연약해보였지만 욕망의 문을 끝내 여는 모습이 황홀했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을 때였나? 출판사 사장은 수감되고 소설은 온갖 빨간펜으로 줄거리조차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지만 두어 세기가 지난 후 저는 지워졌던 내용을 온전히 완역본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카프카의 소설은 작가 본인이 유언으로 불태우라고 했지만 무수한 그의 원고들은 전집판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이것 역시 욕망의 표현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설을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간편하게 구분되지만 소설을 읽지 않고는 욕망의 경계에 손을 댈 수 없다고 봅니다. 그 싸움은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100년이나 200년 후에는 욕망의 기록을 누군가 소중히 발굴하고 보존해서 스스로를 업데이트할 테죠. 우리가 흡족할 욕망의 범위, 방향을 만나기 전까지 문장에서 펼쳐지는 욕망의 전쟁은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쓰는 자에게도, 읽는 자에게도.

 

안민승 : 네. 소설에서 세계가 중요한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오늘 얘기한 이 두 소설을 관통하는 세계관은 크로노스의 미궁이었습니다. 연인이 건네준 실을 풀어가며 지혜롭게 미로를 뚫어내고, 괴물을 죽이고 연인과 탈출하는 이 미션은 이미 실패를 예견하거나 왜곡된 채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김사과의 경우에 연인은 이미 약에 취해있거나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버렸고, 오히려 그 괴물을 벗삼아 이 길들을 헤쳐나가야 하는 미션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홍임정의 경우 역시 굳게 붙들고 있던 미궁의 끈들이 예기치 않게 끊어져 버리거나 놓쳐버린 채 지워진 길들 위에 남겨져 있고요. 둘다 공히 광야를 걷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온도차는 정반대의 촉감을 전해줍니다. 김사과가 메마르고 뜨거운, 선인장만 드문한 사막의 길이라면, 홍임정은 차갑고 얼어붙은 시베리아 벌판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두 곳다 풀 한 포기 자라기는커녕 그 흔한 이정표조차 찾기 힘든 곳이죠. 그리하여 읽는 내내 간절한 바람 같은 것이 역설적으로 돋아나는 감각을 느끼게 합니다. 부디 그녀들이 낡은 세계라는 관념의 문을 부수고 우리 세계의 미궁을 풀 수 있는 언어의 해답들을 가져와 주기를 바랍니다. 신이 직접 새긴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온, 어떤 고대의 선지자와 같기를. 언어의 신이 있다면 그녀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그녀들의 고통이 값없지 않았기를 그 앞에 무릎 꿇고 기원할 따름입니다.

 

현택훈 : 네. 오늘 두 소설을 중심으로 오랜 시간 소설에 대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함께해주어서 감사 드립니다. 오늘 모임을 통해서 소설과 세계 인식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눴습니다. 의미 있는 얘기들이 많이 나와서 좋았습니다. 다음에는 동화에 대한 얘기를 해 볼 예정입니다. 동화를 통해서는 이 어두운 세계가 조금은 밝아질 수 있을까요.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

 

 

 

 

 

 

 

 

 

사회, 원고정리 및 구성 / 현택훈

시인. 1974년 제주 출생. 2007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4‧3평화문학상 수상.

 

참여 / 허유미

시인. 1979년 제주 출생. 2015 《제주작가》 신인상 등단. 라음 동인.

 

참여 / 안민승

사진가. 1972년 부산 출생. 독립출판 '파우스트' 운영.

 

참여 / 홍임정

소설가. 1976년 부산 출생. 소설집 『먼 데서 오는 것들』, 인터뷰집 『희망은 빛보다 눈부시다』, 『붉고 푸른 당신과 나 사이』.

 

참여 / 김진철

동화작가. 1981년 제주 출생. 2006년 《제주작가》로 등단. 단편동화집 「잔소리 주머니」.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제주대학교 출강.

 

참여 / 김신숙

시인. 1979년 제주 출생. 2012년 《제주작가》, 2015년 《발견》으로 등단.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 《시린발》 편집장.

 

참여 / 오승주

인문학 강사, 작가. 1978년 제주 출생. 『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발간.

 

 

   《문장웹진 2019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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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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