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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래 외면 받고, 때로 외면하는 글쓰기

  • 작성일 2016-09-01
  • 조회수 926

 

[에세이]

 

 

오래 외면 받고, 때로 외면하는 글쓰기

 

 

최분임

 

 

    저녁이면 무료하고 답답한 하루가 또 지나갔다는 느낌이 몸 어디선가 밀려 나왔다. 흔히들 늦었다, 라고 말하는 삼십대 후반의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마흔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삶이 이렇게 지루하고 무력해도 되는 걸까?’ 씁쓸한 혼잣말에 손을 놓고 멍해지는 날이 많아졌다. 알 수 없는 공허감에 스스로를 낭비했다. 주위를 둘러보거나 친구들과 전화 통화라도 하고 나면 나와는 전혀 다른 공기,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 삶의 방향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거침없고 당당해 보였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주눅이 들었다. 마냥 이렇게 살 것이냐고, 내 안의 누군가가 날 툭, 쳤다. 그렇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지, 라고 되물으며 움츠러드는 자신이 보였다. 바람 빠진 풍선에 공기를 불어 넣듯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몰아세우자 묻어 뒀던 꿈, 글을 써보고 싶다는 대답이 들렸다. 그러나 생각은 생각일 뿐 막연하고 캄캄했다. 곧이어 열등감이 고개를 들었다. 열등감은 못처럼 견고해서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쉽게 뽑혀 나가거나 뽑아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먼 저곳에서 이곳까지 그 어떤 알 수 없는 속도가 막 지나간 듯 내게 처음으로 열등감을 안긴 친구 희가 곁에 서 있었다.

 

    *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이었다. 옆집에 살던 희는 키가 크고 마른 몸매에다 얼굴도 예뻐서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집안 사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늙은 아버지와 배다른 형제들, 재취 자리로 들어와 1남 3녀를 낳은 희 엄마는 늘 술에 취해 풀어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오빠마저 알코올중독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삶을 접기 위해 여러 번 농약을 마셨고 매번 저승 문턱에서 되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몸과 마음은 망가져 폐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희 오빠에게 마을 사람들은 ‘불사조’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꽉 막힌, 출구 없는 동굴 같은 환경에서도 희는 늘 밝고 명랑했다. 집안의 어떤 한 줄기 빛은 막내딸 희가 아니었을까, 아니 희가 붙잡고자 한 것이 한 줄기 빛 아니었을까, 싶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 당시 5월이면 어린이날을 즈음하여 시내에 있는 황성공원에서는 박목월 시인의 이름을 딴 <목월백일장>이 열렸다(검색을 해보니 올해로 49회째, 해마다 열리고 있었다). 그 백일장에 참여하려면 각 학교에서 실시하는 글짓기를 통과해 대표로 뽑혀야 했다. 다른 것은 다 기억에서 휘발되고 없는데 그 당시 희가 고른 <냉이>, <얼굴>이라는 시제만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중 <냉이>라는 제목의 동시는 다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른 봄 냉이를 캐 와서 물에 씻고 보니 하얀 뿌리가 드러났다. 그 종아리가 추워 보였다.” 선생님이 읽어 주시는 희의 동시를 듣는데 질투심과 열등감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희의 반짝이는 상상력과 글 솜씨를 따라갈 수 없을 거라는 열등감은 그때부터 내 안에 똬리를 틀었다. 어떻게 단숨에 저리 잘 쓸 수 있지, 싶었다. <얼굴>이라는 동시도 아주 기발하고 훌륭했는데 세월이 다 집어삼킨 탓에 머리에 남아 있지 않다. 정작 나 자신은 그날 어떤 시제로 무엇을 썼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희와 나는 <목월백일장>에 나갈 학교 대표로 뽑혔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희에게 기가 꺾여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날 백일장 행사장에서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인물이 있었다. 무리에 섞여 식전 행사에 참석했는데 맙소사, 연단에서 인사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 박목월 선생이 아닌가! 어떻게 책에 나오는 인물을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직접 눈앞에서 봤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정작 백일장은 시큰둥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그날 우리 둘 중 누구도 수상권에 들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희는 운이 없었을 뿐, 심사위원들 눈이 나빠 희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내게 일찌감치 열등감을 유적처럼 남긴, 재능이 반짝이던 희는 결국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도시를 떠돌다 29살의 봄, 자신이 살던 13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세상과 이별했다. 세상이 희를 버린 것인지 희가 더러운 세상 따위 던져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떤 좌절과 비참함이 희를 캄캄한 절벽으로 내몰았는지를 짐작하기엔 나는 함량미달이었다. 희의 사망소식에 회사를 조퇴한 후 고속버스를 타고 장례식장을 가는 도중 냉이의 시린 종아리가 내내 차창에 떠올라 희의 모습과 겹쳐졌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희는 부검실에 있었다. 경찰과 병원 관계자들이 바삐 드나드는 문, 열고 닫는 그 사이사이 희가 보였다. 쏟아지는 불빛 아래 핏기 가신 나신으로 침대에 반듯하게 눕혀져 있는 희는 눈부셨다. 냉이 뿌리처럼 희고 긴 종아리가 유난히 추워 보였다.

 

    *
    희를 떠올리자 린도 곁을 서성였다. 희가 내게 일찌감치 열등감을 심어 줬다면 린은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 곳인지, 인간 또한 얼마나 허약하며 부조리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준 친구였다. 린은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어느 날 갑자기 린이 서울로 남의 집 가정부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에게 가정부라니,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한계를 뛰어넘는 가혹함이 존재했으며 나는 단지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린에게 미안했다. 어린 딸에게 모진 린의 어머니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어린아이를 가정부로 들이겠다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누구보다 영리하고 공부를 잘해 늘 1등을 놓쳐 본 적 없는 린에게 닥친 이 상황이 실제인지 꿈인지조차 헷갈렸다. 또한 이 현실을 린이 견딜 만한 것인지조차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린은 가기 싫다고, 앞으로 더 말 잘 듣고 더 공부를 잘하겠다며 매달렸지만 새파랗게 젊은 과부였던 린의 어머니는 어린 딸을 매몰차게 뿌리치셨다. 린의 어머닌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큰아들을 일찌감치 대처로 내보낸 후 린의 언니와 린마저 남의 집 가정부로 보내면서도 태연하셨다. 속은 알 수 없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그 당시 내가 아는 모성은 그렇게 비정한 것이 아니었다. 은연중에 든 생각이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모성은 자식들의 손을 놓지 않는 것, 탯줄처럼 견고하게 연결된 그 무엇이 부모와 자식 간의 끈이라고 생각했기에 린의 어머니를 도무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성은 그 어떤 욕망보다 자식이 중심이거나 먼저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린에게 닥친 현실을 통해 나는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어떤 것들이 실은 모래성처럼 허약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또한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뭔가 무참히 짓밟힌 느낌이 들었다. 삶에 대한 부정과 냉소적 태도는 아마 그때부터 싹텄을 것이다.

 

    *
    그 당시 마을에서 형편이 넉넉한 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 집도 가난이라면 만만치 않았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술과 담배로 한 번뿐인 생을 소비했으며 집 밖에서는 호인, 집 안에서는 폭군을 자처하셨다. 당연한 듯 집안일 따위 돌아보지 않으셨다. 아버지에게도 부성이란 게 있긴 있었을까,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문득문득 드는 의문이다. 안팎의 모든 일은 어머니 차지였다. 어머니에게 결혼은 사막을 건너는 일이었으며 당신은 늘 목마른 낙타였다. 혹 안에 저장된 에너지를 믿고 낙타가 사막을 건너듯 어머닌 당신의 혹인 자식들을 믿고 견디셨다. 아버지가 술을 과하게 드시는 날, 사막엔 비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쳤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한바탕 회오리가 집 안을 휩쓸었다. 그렇게 삶을 낭비하던 아버진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어느 날 불쑥 생을 빠져나가셨다. 삶이 생각대로 짐작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아버진 모르고 계셨던 걸까. 자리에 누운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등교 준비를 하는 나와 동생을 불러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생전 하지 않던 잘 다녀오라, 는 말을 남긴 채 그날 오후 눈을 감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집 안이 적막해진 상황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프고 슬픈 게 아니라 그 어떤 아픔도 슬픔도 실감나지 않는 게 아프고 슬펐다.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스스로가 무참했다. 내겐 아픔이나 슬픔에게 내줄 감정 따윈 없는 걸까, 스스로에 대한 의문과 갈등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안심이 되는 건 불화가 일어나지 않는 집 안의 공기였고, 안심할 수 없는 건 내 무감각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잠시 혼란스러웠고 오래 담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재가 남긴 상처는 그 부재로 인해 조금씩 아물어 갔다.
    7남매라는 등짐을 지고 걸으면서도 낙타, 어머닌 늘 묵묵하셨다. 고개를 가누지 못할 만큼 머리에 임을 이고 남의 집에 품을 팔고 지게를 지고 소를 몰아 밭을 가셨다. 밤낮을 가리지도, 여자라는 이유로 지레 겁을 먹지도 않으셨다. 또한 솜씨가 좋아 이웃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 초상집 수의를 짓는 일이며 잔칫집 떡과 유과를 만드는 일 등, 몸 아끼지 않고 힘을 보태셨다. 가까이 사는 시누이, 고모가 당신을 사람도 아닌 황소라며 놀려도 꿈쩍하지 않으셨다. 평생 메마르고 황폐한 길을 걸었지만, 몸빼를 벗어난 적 없었지만, 그 길이 어미인 자, 모성의 길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셨다. 그렇게 고달픈 삶이었으면서도 자식들 공부를 많이 못 시켜서 늘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온전히 당신의 삶을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어머니께 한없이 죄송하지만 그땐 그 모든 걸 당연하게 여겼다. 내 어머니뿐이 아니었다. 마을의, 주위의 모든 어미들이 내 어머니와 비슷했다. 그랬기에 린 어머니의 행동은 낯설고 생경했다.

 

    *
    그렇게 서울로 떠난 린은 내게 수시로 객지에서의 고달픈 생활과 집에 남겨진 두 동생에 대한 걱정,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보내왔다. 나는 린의 외로움과 좌절, 한숨과 원망, 서러움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정성껏 편지를 쓰는 것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알 수 없는 죄책감, 자리를 바꿀 수 없는 현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또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싶어 들판을 쏘다니며 딴 꽃잎들과 나뭇잎들을 책갈피에 넣어 말린 후 매번 편지에 동봉하곤 했다. 린은 그녀의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와 일 년치 선금을 받아가는 바람에 좀 더 조건이 좋은 집으로 옮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며 눈물이 번져 제대로 읽을 수 없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덧붙여 밤마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베개 밑에 칼을 넣고 잔다고 했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저 덤덤한 삶이 어느 누군가에겐 얼마나 날카롭고 아슬아슬하며 슬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린을 저렇게 가혹하게 몰아붙였을까, 부조리하고 참담한 현실에 숨이 막혔다. 그 먼 시간, 칼끝에 벤 듯 오래 아팠다.
    그 후부터였다. 나는 마치 첩자처럼 린의 어머니를 훔쳐보는 일로 바빴다. 린의 어머닌 시골에 살면서도 딱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어디 몸이 아픈 것도 아니면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지도, 남의 집 품을 팔러 다니지도 않으셨다. 일찍 세상 떠난 남편을 대신해 어린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 따윈 관심이 없어 보였다. 늘 분단장을 한 후 한복 속에 입는 속치마 바람으로 집 안을 맴돌거나 옷을 잘 차려입은 후 시내로 나가시곤 했다. 나는 당신의 모든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중에도 그 속치마가 늘 의문이었다. 동네 어느 아낙도 그런 차림새로 집 안을 맴돌며 하루를 보내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게다가 대문이나 울타리가 있는 집도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몸매가 은근슬쩍 드러나는 그 속치마의 의미를 깨달았다. 시골에서 뭇 사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방법 내지 장치로 속치마만 한 게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원초적인 욕망의 민낯을 본 듯 얼굴이 달아올랐다. 비밀스럽게 감춰져야 할 것을 들춘 느낌이었다. 삶의 진실은 차갑고도 씁쓸했다.
    린이 떠난 계절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밤꽃이 막 피어오르던 때였다. 마을 앞 냇가 건너편 우리 밭 밭둑에는 아름드리 밤나무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린과 함께 밤나무에 기어오르기도 하고 그늘 아래에서 소꿉놀이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장소였다. 소꿉놀이가 시들해지면 밤나무 밑 냇가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으며 가을이면 함께 밤을 줍기도 했는데 이제 그 어디에도 린은 없었다. 린이 떠난 후 혼자 마을 쪽 둑길에서 건너편 밤나무들을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 아름드리 밤나무 밤꽃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허공의 누군가 입술을 오므려 밤나무를 부는 것 같았다. 부풀어 오른 나무들이 뭉게구름처럼 붕 떠오르기도 하고 엷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으며 웃음소리가 밤꽃 속으로 숨어들며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감아 보면 일렬로 늘어선 밤나무들이 겅중겅중 고무줄놀이에 빠진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맨발로 우르르 냇물을 건너오는 밤꽃 향기가 달리기 잘하는 린이 달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이내 먹먹해져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들숨을 크게 쉬곤 했다. 그렇게 손에 잡히지 않는 린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다 뒤를 돌아보면 공중에 뜬 밤꽃들이 마치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밥 한 끼를 지어 모시 밥상보를 덮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린이 돌아온다면 저 밥상보를 확 걷어내고 따뜻한 밥 한 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늘 배고팠던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질질 끌리던 그림자가 잠시 명랑해지곤 했다. 그렇게 린을 그리워할 때면 희에게 느꼈던 열등감을 제치고 언젠가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된다면 린의 이야기를 꼭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그렇게 린은 알게 모르게 세상에 대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눈뜨게 했다.

 

    *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들 때 부엌에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매일같이 노래와 더불어 일반인들의 사연이 흘러나왔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연들을 듣다가 MBC라디오에서 <신춘편지쇼>가 있다는 공고를 듣게 됐다. 봄이면 매년 진행하는 이벤트라고 했다. 그해 주제가 <봄>과 <할머니>였다. 그 주제를 듣자마자 해마다 봄이면 산나물을 뜯기 위해 먼 산을 헤매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더불어 어머니 꽁무니에 매달리듯 따라붙던 고모도 떠올랐다. 두 분의 애증관계를 봄과 엮어 써보고 싶었고 단숨에 써내려갔다. 글을 보내고 나서는 이율배반적이게도 제발 내 글이 뽑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꾸며 쓴 글은 아니었지만 고모 입장에서 들으면 고모를 욕보이는 내용이었고 결국 내 치부를 내보인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랬는데 나중에 내 글이 1등으로 뽑혔다는 연락이 왔다. 고모가 제발 라디오를 듣지 않길 바랐다. 다행히 고모가 그 방송을 듣진 않았는지 조마조마했던 시간이 별일 없이 지나갔다.
그러다 그해 가을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참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일장이 열리는 마로니에 공원이 저만치 보이자 긴장이 됐다. 늦게 도착한 탓에 식전 행사는 일찌감치 끝난 상태였고 공원 여기저기 흩어진 참가자들이 10월의 햇살 아래 글을 쓰고 있었다. 접수를 하는 곳을 몰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뒤늦게 접수를 하고 글제를 확인하니 산문 부문 글제가 <외출>과 <물방울>이었다. <외출>이란 글제를 보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오래 만지작거렸다. 불과 몇 달 전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사준 휴대폰이었다. 위암으로 진단받고 항암 치료를 위해 입원한 병실에서 시아버님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내게 휴대폰을 선물하신 일이었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다 갖고 다니던데, 늦었지만 마음먹었을 때 해줘야지.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
    당신 병세 걱정보다 내게 사줄 전화기에 더 마음을 쓰며 같이 간 시누이에게 현금을 건네셨다. 괜찮다고, 집에서 하는 일도 없는데 무슨 휴대폰이냐고, 안 그러셔도 된다고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다음에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그런다는 말씀에 입을 닫았다. 그러셨던 아버님을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언제나 곁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려운 일이 터질 때마다 아버님 생각이 간절하던 터여서 울컥했다. 나무 그늘에 자리를 깔고 앉아 또 한참을 넋 놓고 앉아 있다 천천히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장례식 때 벌어진 이야기를 중심으로 아버님은 잠시 이승에서 외출한 거라고, 삶과 죽음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누구나 그 경계에 놓여 있다고, 삶이 있기에 죽음도 있다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 소중하고 값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감정이 앞서다 보니 어느새 글은 늘어지고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 날씨에 계속 몸이 떨렸다. 나중에 원고지에 옮겨 적기 시작할 때는 손가락이 곱아 볼펜을 쥐기가 힘들었다. 마감했으니 빨리 제출하라는 관계자의 말에 초고를 다 옮기지 못한 채 급하게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원고를 제출하고 나니 아쉬움이 많았다. 참가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자 한결 가벼워졌다. 문학 강연을 들으면서 글을 쓰는 허영에 들뜨지 않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랬는데 시상식에서 내 이름이 불렸다. 기대도, 생각도 못한 장원이었다. 또 몸이 떨렸다. 심사위원들은 심사평에서 “우리는 재치보다는 진솔함을,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진정성에 더 큰 점수를 주기로 했다.”라고 했다. 그 백일장을 끝으로 글을 쓸 수 없었다. 아니, 내 글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상을 받고 생각해 보니 내가 글을 잘 써서 받은 상이 아니었다. 결국 주변 인물, 어머니와 고모, 시아버님을 우려먹었을 뿐이라는, 그 이상의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내겐 부족하다는 자조는 날 주저앉게 했다. 빚진 글쓰기였다는 생각이 날 괴롭혔다.

 

    *
    그러다 우연히 지역 문학 동아리 모임인 <소래문학회>에 나가게 됐다. 한 달에 한 번 회원들이 모여서 합평을 하고 있었다. 시와 수필,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시를 썼고 합평도 시 위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쓸려 나도 시를 써볼까, 겁 없는 생각에 붙들렸다. 그렇지만 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학창 시절을 다 합쳐도 시를 써본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 몇 번의 글짓기에서 상을 탄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기억들이 슬그머니 날 부추겼다. 흔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내게 딱 맞는 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치기 어린 감상과 손에 잡히지 않는 흐릿한 관념, 소재주의, 성찰 없는 묘사 등이 난무하는 시를 써 합평회에 참석했다. 그런 시에 뭇매가 쏟아졌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고 그만 포기하고 싶었다. 그래도 시를 쓰는 동안 행복했던,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주는 아슬아슬함이, 글이 주는 뜨거움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는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다. 시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괜히 야속했다.
    동아리 모임에 나가 시 합평을 받는 중에 인터넷에서 《사이버문학광장》을 알게 됐다. <창작광장>이라는 메뉴에 끌려 들어가 보니 일반인들이 작품을 올리면 일주일에 몇 편을 골라 기성 시인들이 평을 해주고 있었다. 이게 시가 되겠느냐고,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느냐고, 누군가를 붙들고 묻고 싶은 간절함에 드문드문 시를 올렸다. 잘 쓴 시를 뽑아 평을 해주는 곳이라 평을 못 들을 때도 있었다. 시가 아니라 넋두리라는, 산문이라는, 신파라는 소리를 듣고 나면 부끄럽고 힘이 빠졌다. 퇴고를 한 작품에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 됐다는 소리를 들을 땐 당장 그만두고 싶기도 했으며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을 땐 나이를 탓하며 한숨이 나왔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비판이 날 키울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 글에 대한 그 누군가의 비판도 두려워하지 말자, 이건 내게 하는 비난이 아니다.’ 이렇게 다짐하고 나자 조금씩 뻔뻔해졌다.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 비판들이 시를 쓰게 하는 힘이 됐다.
    그러다 《문장》을 통해 <동서문학상> 공모가 있기 전 실시하는 게시판 이벤트에 참여하게 됐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 이름 있는 시인들이 일일이 댓글로 평을 해주는 형식이었다. 그런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슴이 설렜다.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매달렸다. 요철이 심한 시에 칭찬보다 회초리가 더 많이 쏟아졌다. 그 회초리들이 부끄러움을 지나 아픔을 지나 뻔뻔함을 지나 달게 느껴졌다. 8주 동안 진정어린 충고에 감사했고 죄송했다. 그래도 여전히 시는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이 답답했다. 선명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딘 감각에 매번 절망했다. 진화하지도 않았는데 퇴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땐 한심해져서 시를 외면했다. 그러다 슬그머니 다시 들여다보는, 변덕이 죽 끓듯 했다. 그 게시판에서 주 장원을 받은 작품과 몇 편을 퇴고해 <동서문학상>에 응모를 하고 난 후 잊었다. 시를 끌어안고 산 시간들로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거니와 내 시의 정서가 통하지 않으리라 생각해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나중에 「매조도를 두근거리다」라는 작품이 대상을 받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 몸이, 생각이 잠시 가벼워졌다가 오래 무거워졌다. 정신이 들자 겁이 나기도, 부끄럽기도 하면서 시의 단초를 제공해 준 정약용 선생과 그 부인과 소실이었던 분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걸친 듯 불편하기도 했다. 내가 과연 이 상을 받아도 될까, 싶었다. 상이 주는 부담감이 가끔은 좋았고 가끔은 싫었다.

 

    *
    가끔은 글이 날 억압했고 가끔은 내가 글을 억압했다. 가끔은 글이 날 의심했고 가끔은 내가 글을 의심했다. 가끔은 글이 날 저울질했고 가끔은 내가 글을 저울질했다. 가끔은 글이 날 슬프게 했고 가끔은 내가 글을 슬프게 했다. 앞으로도 나는, 내 글은, 가끔 맑고 가끔 흐릴 것이다.

 

 

 

 

 

 

에세이 최분임

작가소개 / 최분임

경주 출생.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제23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산문 부문 장원·제12회 삶의 향기 동서문학상 대상. 소래문학회·동서문학회 회원.

 

   《문장웹진 201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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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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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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