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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작년의 일이었다. 문득 더는 미루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써야 할 글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래도, 라는 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내 잘못이 아니고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죄책감 따위 느낄 필요 없다는 걸 논리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잘 모른다. 아빠나 엄마에게 주워들은 이야기 몇이 내가 아는 할아버지의 전부다. 어렸을 적에 집이 부자였다던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집이 망해 외할아버지를 따라 먼 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그 후 월남전에 참전해 고엽제 후유증으로 청각장애 2급 판정을 받아 항상 보청기를 끼고 다녔다. 이불에 구멍을 낼 정도로 담배를 자주 피웠다. 불같고 심하게 가부장적인 성격이었다. 불교였다가 중간에 천주교로 개종해 친가 전체를 천주교인으로 바꾸기도 했다. 노년에는 카트에 비둘기 모이를 담고 길가에 뿌리는 습관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매일 카트를 끌고 공원으로 나갔다. 오 년 전 무단횡단을 하다가 차에 치인 후 계속 투병생활을 하다 작년 9월 꽃동네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셨다. 생전에 나를 정말 예뻐하셨다고, 엄마는 말했다.기억나는 것도 몇 없다. 내가 유치원 때 할아버지가 아현동 문방구에서 레고를 사줬던 것,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바람에 친척들이 다 모인 곳에서 아빠의 인사를 듣지 못해 왜 집에 왔는데 인사를 하지 않느냐며 불같이 화를 낸 것, 내가 할아버지 방에 누워 작은 TV로 애니메이션 채널을 보고 있는데 문을 살짝 열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간 것. 그 외의 기억은 모두 병원에 있는 모습이다.돈이 할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성모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할아버지는 여러 번 병원을 바꾸더니 꽃동네에 들어가셨다. 친가는 육 남매였고 그중 세 분이 성직자였다. 나는 부랑자나 보호자 없는 사람이 오는 곳이 꽃동네였다, 라고 습작에 썼다.병원비에 간병인 월급까지 합하면 매달 나가는 돈이 너무 컸다. 그래서 점점 시설이 좋지 않은 곳으로 할아버지를 옮겼다. 몇 년이 지나자 휠체어를 타고 옥상정원을 돌아다니실 수 있었던 할아버지는 팔다리가 완전히 굳어버릴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굽어 펴지지 않는 할아버지의 무릎을 주무르며 사람의 몸이 이렇게 변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 달에 한 번 꽃동네에 찾아가면 나와 엄마가 할아버지의 몸을 주무르고 있을 동안 아빠는 1층 로비에 내려가 있거나 동생과 장난을 쳤다.그때는 아빠가 많이 미웠다. 친가 친척들도 미웠다. 할머니 집에서 육 남매가 모두 모였던 날이었다. 어쩌다 할아버지 얘기가 나왔다. 큰아버지인 신부님은 자신이 신부가 된 이유에는 할아버지에게 벗어나려고 했던 것도 있다고 했고, 고모는 할아버지 때문에 고생을 참 많이 했다고 했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그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할아버지 때문에 아빠가 내 나이 때부터 가게 일을 돕고 건물 청소도 하는 등 고생을 했던 것은 알고 있었다.투병하며 오래 사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아빠가 말했다.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내 기억 속에서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만 저런 뉘앙스의 말이었던 것은 확실했다. 언젠가 아빠에게 물었다. 왜 저런 말을 했냐고. 기억하고 있냐고. 나는 아빠가 저 말을 했을 때, 너무 무서웠다고.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고. 아빠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했다. 그런데 딱 잡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한 뒤 약간 핀트를 달리 나가는 식으로 찜찜하게 해명을 해서,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빠가 정말로 그렇게 말 한 적이 없는지.투병하며 오래 사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 말이 맞는지 틀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찍 죽고 싶다는 것 하난 확실하다. 60이 되기 전에 죽을 거다. 목에 구멍이 뚫려 말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침대에만 누워 보내는 하루를 상상할 수 없다. 할아버지는 지금 흑석동 성당 평화의 쉼터에 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날들을 병원에서 보냈고 성당에서도 보낼 것이었다. 가끔 평화는 무슨 엿 같은 소리, 하고 생각한다.할아버지는 이 년 정도 꽃동네에 계셨다. 말만 꽃동네지 실상은 그 많은 후원금을 어디다가 썼나 싶을 정도로 관리가 정말 거지 같았다. 커다란 방 안에 환자 열 명이 넘게 들어가 있는데 막상 그곳에 배당되는 간호사는 채 세 명도 되지 않았다. 간호사들은 환자 가족이 와야 슬그머니 모습을 비쳤고 침대나 화장실 같은 시설도 열악했다. 이런 거 따질 처지가 아니란 거 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꽃동네에 가지만 않았으면, 돈을 더 투자해서 재활 치료만 받았으면 몸이 그렇게 굳는 일도 폐렴으로 허망하게 돌아가시는 일도 없었을 거다.할아버지 문제에 대해서는 남 잘못을 따지다가 결국 내 탓을 하게 된다. 그때 학원이니 영어 과외니 해서 내 교육비로만 한 달에 백 만원이 나갔다. 이런 생각을 하면 밑도 끝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런다. 엄마에게 이 얘기를 한 적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를 죽인 것만 같다고.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충분히 사실 수 있지 않았냐는 내 말에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엄마는 말했다. 열아홉 살 먹은 지금, 조금은 알겠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나는 엄마의 말을 전부 이해하기에는 아직 많이 어리다.정말 오랜만에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고 휠체어를 타고 계신 할아버지 사진을 정리하며 아빠는 말했다. 삼촌도 똑같은 말을 했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부모 자식 사이의 진지한 대화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했다. 고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 아빠한테도 할아버지의 모습이 남아있다. 나는 그게 싫어 집을 나간 적도 있었고 아예 아빠를 없는 사람 취급한 적도 있었다. 아빠도 그랬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목요일이었다. 사망통지서에 적힌 시간을 보니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무렵이었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동생이 문자 못 봤냐고 물었다. 그제야 핸드폰을 켰다. 고모는 내 옷을 보더니 따로 갈아입을 필요 없겠다고 했다. 나는 검은 색 옷을 입고 있었다.아빠의 눈이 빨겠다. 그런데 목소리만큼은 참 담담해서, 살짝 떨리지만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방에 들어가 한참을 펑펑 울고 나니 고모가 밥을 먹고 가자고 했다. 퉁퉁 부은 얼굴로 밥을 먹었다. 처음엔 이걸 어떻게 먹지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한 그릇을 다 비웠다.아현동 성당 별관이 장례식장이었다. 주일에는 발인을 할 수 없고 별관에서 결혼식이 잡혀있는 바람에 이 일장을 치러야했다. 난생처음으로 상복을 입었다. 상복이면 뭔가 특별할 줄 알았다. 이를테면 그냥 한복보다 입는 법이 더 복잡하다던가. 오히려 몇 초 만에 입을 정도로 간단했다. 머리에 꽂는 하얀 핀도 그렇고 음식들도 그렇고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뿐이어서, 이게 뭐야, 싶은 맘도 있었다. 학교에서 야자를 하던 도중 주머니에서 장례식장에서 꽂았던 리본 핀이 튀어나온 적도 있었다.별관은 2층까지 있었다. 장례식장은 1층이었고 나는 상복을 입은 채로 아무 생각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여니 온통 하얀색 투성이었다. 다음날 있을 결혼식을 위해 직원들이 가구를 옮기고 있었다. 황급히 문을 닫고 장례식장으로 뛰어갔다. 서러웠다.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새벽 세 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음식을 가져다주고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음식을 나르고 손에 생선 찌꺼기를 묻혀가며 그릇을 정리하다 보면 잡생각이 싹 날아갔다. 그날 효녀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겉으론 멋쩍은 듯 웃었지만 모두가 나를 욕하는 것만 같았다.조문객이 오면 신부님(큰아버지)이 간단한 미사를 드렸다. 남의 장례식에서 미사를 드린 적은 있어도 아버지의 장례미사를 드릴 줄은 몰랐다고 신부님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새벽 두 시였나. 상에 남아있는 음식을 치우다 할아버지 영정 앞에 앉아있는 삼촌(신학생)을 봤다. 구부정한 어깨로 삼촌은 오래도록 할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불 꺼진 방에 촛불 혼자 타들어 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세상에는 내가 어림할 수도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한때는 사이비라고 느낄 정도로 혐오했던 천주교를 존중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조용한 장례식이었다. 소리 내서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삼촌과 신부님, 수녀님(큰 고모)는 울지도 않았다. 우는 대신 다들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 그것이 너무 무서웠다. 올해 외할머니 장례식장에서 곡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긴 했지만, 그래도 그땐 차라리 소리 내서 울었으면 했다.태어나서 아빠가 우는 걸 딱 두 번 봤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 꽃동네 입원 일로 신부님이 곤경에 처했을 때. 우울증에 걸려서 한창 고생했을 때도 울지 않았던 아빠였다. 나는 울고 있는 아빠의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런 것뿐이었다.장례 미사 때 참 많은 사람이 왔다. 염수정 추기경님(장례식에 왔던 작년에는 서울 대주교님이셨다)부터 해서 신학교 학생들, 수녀님들. 그렇게 많은 성직자는 처음 봤다. 연단 앞에서 신부님은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할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다고 했다. 처음 보는 신부님은 할아버지를 육 남매 중 세 명을 성직자로 키워낸 훌륭한 분이라고 했다. 뭐라 더 말하기는 했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발 자기가 뭘 알길래 저딴 말을 해. 나도 잘 아는 것은 없었으면서, 저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화장을 기다리는 작은 방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위령 기도를 드렸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제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쉬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떨림도 없이 이 말이 반복됐다. 중간에 방을 나왔다. 나는 아직도 파수꾼이- 이 말만 들어도 힘이 풀리고 토할 것 같다.누군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데 오 년은 충분한 시간이었나. 아니면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어서 그랬나. 친가는 생각보다 빨리 담담해졌고 할아버지 얘기도 곧잘 했다. 담배 냄새가 가득하던 할아버지 방이 창고가 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그 방에는 곰팡이가 자주 슬었다. 공기 청정기를 가져다 놔도 곰팡이는 계속 자라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상이지만 알고 보면 반지하인 집안 구조 때문에 무슨 짓을 하든 계속 곰팡이가 생긴다고 아빠는 말했다.아파하는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에게, 특히 가족에게 피해 주지 마라.이런 말을 하는 남자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아빠는 엄마에게도 할아버지에 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게는 할아버지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아현동에 갈 때마다 아빠에게 산책을 하자고 졸랐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빠는 옛날 얘기를 들려줬다. 여기서 할아버지가 장사를 했다- 할아버지를 따라 건물 청소를 한 적도 있다- 어렸을 적에는 맨날 쌈박질만 하고 돌아다녔다- 나는 가만가만 얘기를 들으며 응 응, 맞장구를 쳤다. 할아버지 얘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기보다는 말을 할 때 묘하게 들뜬 아빠의 얼굴을 계속 지켜줘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와 하지 못한 말을 나에게 하는 것 같았다.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작년의 일이었다. 문득 더는 미루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써야 할 글이었지만 쓰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담담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