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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의 樂취미들] 추리 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작성일 2015-12-01
  • 조회수 1,070

 

[젊은작가의 樂취미들]

 

 


추리 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권민자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 시리즈를 끝내기 위해 셜록 홈즈를 죽였을 때 수천 통의 항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코난 도일이 “내가 실제로 사람을 죽였어도 그렇게 욕을 먹진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던 일화는 추리소설 팬이 아닌 사람도 들어 봤을 법한 유명한 일화다. 셜록 홈즈는 영화로도 몇 번 제작되었는데, 특히, 2010년 영국 BBC에서 《 셜록 시즌1 》이 방영되면서 다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오죽하면 셜록 역을 맡은 배우인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일컬어 잘생김을 연기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겠는가. 1992년부터 일본 출판사 고단샤의 소년 만화 잡지 《주간 소년 매거진》에서 연재되고 있는 『소년탐정 김전일』의 주인공 김전일이 추리를 시작할 때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라고 말하는 것 역시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면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명대사가 되었다. 여기에서 눈치 채신 분들이 있겠지만 필자는 추리물 광팬이다. 광팬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잡아야 될지 모르겠지만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얌전한 선에서) 추리물을 읽거나 보고 있는 중이다. 한때 애거사 크리스티에 감화되어 고고학자와 결혼하길 꿈꿨던 적도 있었다. “고고학자는 여자가 택할 수 있는 최상의 남편이죠. 왜냐하면 고고학자는 여자가 늙으면 늙을수록 관심을 가질 테니까요.”라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말에 왜인지 모르게 수긍이 갔다. 추리 동호회에 가입해서 정모에 나간 적도 있었다. 2008년쯤이었는데, 당시 필자는 싸이월드에 기반을 둔 추리 동호회와 네이버에 기반을 둔 추리 동호회에 가입해 활동했었다. 싸이월드에 기반을 둔 추리 동호회의 경우 진중한 분위기에 기존 멤버 간의 관계가 화기애애했던 반면 네이버에 기반을 둔 추리 동호회의 경우 (초)발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가 정모를 갔던 것은 싸이월드에 기반을 둔 추리 동호회였는데 친목 느낌이 강하게 들어 한 번 나가고 이후로는 카페 활동만 드문드문 했다. 네이버에 기반을 둔 추리 동호회의 경우 정모에 참여해 보고 싶긴 했는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모 장소에 가기 위해서는 거리 곳곳에 숨겨져 있는 암호를 풀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과 시내에서 그렇게 만난다는 게 당시의 필자로서는 선뜻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 용기가 있었다면 한 번 정도는 참여하지 않았을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그러다 보면 횟수가 늘어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여하튼 필자는 혼자서 꾸준히 (정말 얌전한 선에서) 추리물을 즐기고 있다.
    처음 추리물을 접하게 된 것은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를 읽으면서부터였다. 스토리보다 분위기에 끌렸다. 그 후 추리물을 접할 때마다 고양이 울음 같은 것을 느끼곤 한다. 『검은 고양이』에 이어서 포의 『황금 벌레』를 읽게 되었는데, 암호에 빠져 친구에게 몇 차례 암호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친구에게 암호 만드는 법과 해독하는 법을 아무리 알려줘도 호응해 주지 않아 그 놀이는 금세 시들해졌지만, 이를 계기로 추리물을 혼자 탐독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포에게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논리적으로 추리함으로써 해결에 도달하는 것이 추리소설의 기본 골격이지만 트릭이 아닌 분위기에 끌려 추리물을 좋아하게 되어서인지 ‘10명의 인디언’이라는 동요가 나오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든가 ‘귀수촌 공놀이 노래’라는 동요가 나오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악마의 공놀이 노래』를 특히 좋아한다. 히치콕에 의해 유명해진 로버트 블로흐의 작품 『싸이코』와 레이먼드 챈들러의 『롱 굿바이』 역시 그런 이유에서 좋아한다. 필자가 좋아하는 작가는 애거사 크리스티, 마쓰모토 세이초, 요코미조 세이지 등이다. 추리소설은 증거에 입각해 범죄의 진상을 규명해야 하기 때문에 경찰사법제도가 확립되고 민주적인 재판이 행해지는 나라가 아니면 발달하기 어려워 영국과 미국, 일본 같은 몇몇 나라에 한해 발달되었으며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작가도 드물고 작품도 빈약하다. 필자의 경우 영국과 일본의 고전 추리물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분위기가 음습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추리소설을 읽을 때 고립된 섬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 좋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보다 많이 접하기 위해 일본 드라마를 보게 되면서 일본 추리 드라마까지 본의 아니게 섭렵하게 되었는데 《 춤추는 대수사선 》이나 《 파트너 》, 《 과수연의 여자 》, 《 경시청 수사 1과 9계 》 같은 시리즈 형사물이라든가 현대물보다는 여전히 고전이 더 좋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1950년 《주간 아사히》에서 공모한 ‘백만 인의 소설’에 「사이고사쓰」를 응모해 3등으로 당선되면서부터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는데, 이후 40여 년 동안 작가 생활을 하면서 약 980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추리소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애거사 크리스티가 80여 편의 작품을 쓴 것과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방대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견습 작가 몇 명을 작업실에 숨겨 두고 썼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긴 했지만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업량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많이 읽을 수 있어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며 작가의 그런 미스터리함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또한, 애거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두고 반전을 거듭하는 작품이라며 걸작으로 꼽기도 하지만 추리소설 작가에게 금기시된 트릭을 썼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필자는 그마저도 재밌다. 그런 논리에서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역시 충격적으로 읽었다. 누군가 한 번쯤은 금기의 트릭을 써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탐정 중에서는 책으로만 봤을 땐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을 좋아하고, 영상물로 봤을 땐 애거사 크리스티의 《 포와로 》를 좋아한다. 2004년에 방영되어 2013년에 종영된 『미스 마플』은 시즌 4에서 주연 배우가 바뀌면서 극의 몰입도에 방해가 된다. 무엇보다 1989년에 방영되어 2013년에 종영된 《 포와로 》는 그 긴 시간 동안 포와로를 연기해 준 데이비드 서쳇이 싱크로율도 잘 맞았고, 멋있었다.
    추리물 덕후인 필자에게는 작은 소망이 있다. 첫째, 우리나라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인 《 제웅도 》를 보고 싶다. 1987년 6월경 일요일 저녁 10시에 KBS 2TV ‘일요추리극장’에서 3주간에 걸쳐 3부작으로 방영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방송국에서 원본을 분실해서 현재 구할 수 없다. 당시 본 사람들의 입소문에 의해서만 알려져 있는 전설의 드라마 《 제웅도 》를 보려면 타임머신이 필요할까? 둘째, 누군가와 공동으로 추리소설을 집필하고 싶다. 조지 더글러스 콜과 데임 마거릿 이사벨 콜 부부 작가나 엘러리 퀸(프레더릭 대니와 맨프레드 베닝턴 리의 공동 필명)처럼. 셋째, 추리 테마파크를 건설하고 싶다. 홍대나 강남에 추리카페가 있긴 한데 그런 식의 소소한 곳 말고 놀이공원과 박물관을 겸한 거대한 테마파크를 만들고 싶다. 가령 스위스에는 작가인 에리히 폰 다니켄이 2003년에 개장한 미스터리 파크가 있다. 수수께끼에 대해 쓴 책들과 자료들을 토대로 본관 외 테마별로 일곱 개의 건물(동양, 비마나, 마야, 메가스톤, 나즈카, 접속, 도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식의 테마파크에 ‘귀신의 집’이나 JTBC에서 방영된 《 크라임씬 》을 모티브로 세트장을 만드는 것이다. 나라별로 유명한 탐정작가와 탐정소설을 소개한 박물관을 만들고 테마별로 몇 개의 관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배경으로 섬을 만들어 그 안에서 10명이 팀이 되어 추리를 하게 한다든가,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배경으로 놀이 열차를 만든다든가, 『매그레 시리즈』를 배경으로 법무실을 만들어 취조를 해보게 한다든가,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배경으로 스파이 게임을 한다든가, 『수수께끼놀이는 저녁식사 후에』를 배경으로 집사가 나와 추리소설의 트릭을 설명해 준다든가 등등.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루팡이 튀어나오는, 그런 설정의 테마파크! 그런데 손님이 올까?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재정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 같은데……. 넷째, 아직도 번역되지 않는 각국의 수많은 추리소설들을 번역할 작가를 양성하고 싶다. 그러나 그나마 가능성 있는 소망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추리소설만이라도 수집하는 것 정도일까?


 

 

작가소개 / 권민자(시인)

- 1983년생. 2012년 《문학사상》 등단.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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