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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님을 추억하며] 선생님, 그곳은 어떻습니까?

  • 작성일 2015-05-08
  • 조회수 1,058

 

[박경리 선생님을 추억하며]

 

 

선생님, 그곳은 어떻습니까?

 

 

 

조용호

 

 

 

 

    늦게 문단에 나와 당시 단편집은 한 권 묶어냈지만 장편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늘 나를 괴롭혔다. 일간지 기자로 살면서 제대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는 게 유일한 변명이었다. 단편은 그때만 해도 주말에 회사 앞 여관을 잡아 턱 밑까지 차오른 내압으로 1박 2일 동안 써내기도 했다. 주지하다시피 단편과 장편은 다르지 않은가. 열정과 에너지만으로는 단숨에 써낼 수 없는 장르가 장편이다. 단편은 에세이, 장편은 철학에 비유한 글을 본 적 있다. 분명한 자신의 세계관과 인간을 바라보는 튼튼한 안목으로 짜지 않는 한, 제대로 된 장편이 나오기 힘들다는 맥락이었을 게다. 하물며 반복적인 밥벌이의 일상 속에서 긴 호흡의 정서가 필요한 장편 쓰기가 용이하겠는가. 애면글면 노심초사하다, 직장생활 18년 만에 처음으로 휴직이란 걸 감행했다. 그것도 겨우 6개월짜리.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생계는 엄중하여 처자식 생활비를 대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니 문단 바깥의 생활인 시각으로 보자면 6개월씩이나 무급으로 ‘한갓’ 장편소설을 위하여 휴직한다는 건 대단한 만용일 수 있다.
    토지문화관은 3개월까지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었다. 휴직을 결심할 무렵 먼저 신청을 해놓았는데 결국 휴직 후반부 3개월로 낙착됐다. 첫 3개월은 집에서 빈둥거렸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쉬운 건, 집에서 소설쓰기가 가능하리라고 착각한 단견이었다. 일상을 먼저 벗어났어야 했다. 그 3개월은 그동안 쌓인 독기를 빼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2003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겨울 3개월을 토지문화관에서 살았다. 당시만 해도 난방비가 만만치 않아 겨울에는 ‘손님’을 받지 않는데 그해는 특별히 본부 건물이 아닌, 박경리 선생 사택 아래 새로 지은 하얀 집, 작가들을 위한 공간에 우리가 들어간 것이다. 박경리 선생이 사재를 투자해 지은 토지문화관 아래쪽 ‘귀래관’은 그보다 훨씬 뒤에 생겼다. 이때의 우리란, 당시 만년 하숙생인 <아침이슬> 작곡가 김민기를 비롯해 소설가 박범신, 차현숙, 그리고 나까지 모두 네 명에 불과했다.
    방음이 잘 되지 않아 위층에 머물던 차현숙이 심야에 문을 여닫고 걸어 다니는 소리에 박범신 선생은 귀신이 오봉산에서 내려와 작가들을 괴롭히는 줄 알았다고 농반 진반 회고하는 걸 들은 적도 있다. 나는 잠귀가 둔해서 그런지 밤의 소리 때문에 괴롭힘을 당한 적은 없다. 옆방의 박범신 선생은 당시 명지대 문창과 교수였는데, 어느 날은 서울에 다녀오더니 머리칼을 다 자른 모습이었다. 빡빡 깎기보다는 상고머리에 가까운 삭발이었다. 그는 교수직을 내놓았다고 했다. 소설이라는 게, 문학이라는 것이 그리 연륜의 높낮이를 떠나 사람들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 치명적인 속성을 지닌 모양인데 그 과정을 거쳐 나오는 작품은 각기 다르니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네 사람은 아침 식사는 공동 주방에 비치해 놓은 식빵과 커피로 알아서 챙겨먹고 아주머니가 차려 주는 상은 하루에 두 번 받았다. 정갈한 상이었다. 박경리 선생이 텃밭에서 키운 재료로 직접 조리한 나물을 작가들과 마주치는 걸 피해 새벽이나 늦은 밤 주방에 가져다 놓곤 하셨다. 선생은 산책길에 마주치면 늘 반찬이 먹을 만한지 먼저 물으시곤 했다. 그 정성과 배려가 고마워 나도 무언가 답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걸까. 선생이 통영 분이라는 걸 알고 있던 터에 당시 취미로 즐겼던 게 바다 선상낚시였으니, 그것도 당시 한창 심하게 빠져 있던 레저였으니, 겨울 바다에서 잡아 올린 자연산 우럭을 감상하는 일쯤이야 즐거운 노동이었을 게다. 겨울에는 바다 수온이 내려가 고기들이 깊숙이 내려가 활동성이 현저히 줄어드는 까닭에 웬만해서는 낚시로 우럭 같은 바닥층 어종을 잡아 올리기가 쉽지 않다. 주말에 외출해 먼 바다 침선 낚시까지 감행해서 잡아온 우럭을 먼저 박경리 선생 집에 올려 보내고, 집에서 준비해 준 양념을 넣고 공동 주방에서 우럭매운탕을 끓여 소주 파티를 벌였다. 이 매운탕을 한 수저 뜬 뒤 김민기 선생이 이마를 탁자 위에 댔다. 그이는 그렇게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쳐들더니 이렇게 맛이 있을 수 있느냐고 파안대소했다. 서해 먼 바다에서 잡아온 재료의 신선함이 일등 요인이었을 터이다. 바닷가에서 자란 박경리 선생님도 우럭 맛을 알 테니 칭찬을 기대해도 충분하지 않았겠는가.
    겨울에는 ‘하숙생’들을 받지 않던 관행을 깨고 비탈길 하얀 집에 머물도록 배려해 주신 마음이 고마웠다. 겨울 바다에 나아가 잡은 우럭을 드렸던 행위가 사랑받은 건 아니었다. 몇 번 하얀 집 위쪽 선생 집으로 인사차 올라가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물론 선생의 ‘강의’를 일방적으로 듣는 게 대부분이었다. 선생은 칭찬을 기대했던 나에게 “낚시꾼은 싫어해요!”라는 말로 그 기대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생계를 위해 고기를 잡는 어부는 어쩔 수 없지만 유희를 위해 생명을 낚는 낚시꾼은 수용하기 어렵다는 맥락이었다. 작가들의 공동 주방에서는 탄성이 터졌는데 정작 바닷가 출신 선생이 맛본 우럭은 어땠는지 잔뜩 궁금하던 차에 나온 발언이었다. 선생의 철학이 그렇다는 것이지 우럭의 맛까지 부인한 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생명에 대한 선생의 생각은 겉치레가 아니었다. 설날 세배를 드리러 올라갔다가 두 시간 가까이 들었던 ‘강의’는 생명을 대하는 한민족의 자세에 자긍심을 키우는 계기였다.
    그때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름다움을 위해 생화를 꺾어 장식하는 꽃꽂이 문화는 조선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일례로 조선에서 상여가 나갈 때 장식하는 꽃은 모두 종이로 만든 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러했다. 일찍이 유년기에 상여가 나가던 들녘마을에서 살았고 대학 시절에는 도서관에서 투신해 죽은 학우를 장례 지내기 위해 상두꾼으로 상여소리를 부르고 돌아다녔으니, 상여 꽃이 종이꽃이었다는 말이 보다 강렬하게 꽂혔을 수밖에 없으리라. 생명을 꺾어서 인간을 위해 아름다움을 치장하는 문화는 우리의 심성과 상치되는 것이라는 언설이었다.
    토지문화관에서 작가들을 초대해 공개 강연과 낭독 행사를 벌이는 기획에 초대돼 간 적이 있다. 그날 강연이 끝난 후 선생이 따님인 김영주 관장과 함께 원주 시내로 나가 저녁을 사주셨다. 선생은 그때도 여전히 담배를 줄기차게 피우셨다. 아직 담배를 끊기 전이었던 나로서는 그리 스스럼없이 담배를 권하며 흡연자를 자유롭게 하는 그분이 고마웠다. 그렇다 해도 선생이 피우는 독한 담배가 안타까워 잠시 화장실 가는 척하며 인근 담배 가게에 들러 가장 연한 ‘에세’ 한 보루를 사서 선물로 드렸다. 선생은 몇 년 후 폐암 선고를 받고도 담담하게 담배를 피우셨다고 했다. ‘토지’에서 ‘하산’해 현업으로 복귀한 뒤 공개 지면을 통해 선생께 띄운 편지의 말미에 나는 이렇게 썼다.

 

    - 선생님, 원주 오봉산 토지문화관 뜰에 올 봄 새로 심으신 앵두나무에 열매는 열렸는지요. 지금은 벌써 다 떨어졌겠지만 그 빨간 앵두들을 선생님의 ‘새끼’들에게 새가 모이를 물어다 주듯 나누어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앵두 맛도 못 보고 황망히 도시로 내려온 지금, 저는 선생님이 최근에 이룸 출판사에서 내놓으신 장편소설 『나비와 엉겅퀴』와 산문집 『생명의 아픔』을 밤새워 읽고 기사를 쓰기 위해 앉아 있습니다. 취재원 혹은 텍스트와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기사를 써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저는 그런 거리를 오늘 이 지면에서는 무시하고 싶습니다. 천둥이 울고 번개가 치던 지난밤 내내 선생님의 글을 보면서 느꼈던 텍스트의 치열함과 생명에 대한 웅숭깊은 애정과 절망을 엿보았던 느낌은 어설프게 거리를 둔다고 해서 더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이런 편법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당신의 작품에 대해 어설피 이러저러하게 말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갈급한 환경과 생명 문제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하라고 찡그리시는 것 같습니다.?꽃 한 송이 꺾는 행위의 참담한 살상에 대해, 꽃꽂이 문화가 조선의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문화는 심성의 반영이지만 문명은 기능에 속한다는 원리에 대해, 청계천 복원 과정의 그릇된 행태에 대해, 더 지면을 할애하기를 바랐을 겁니다. 인간에 대한 환멸과 애정을 뛰어넘어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연민으로 건너간 선생님은 우리 시대 인간들의 정체 모를 불안감의 정체를 선명하게 정리하시더군요. 우리는 지금 어머니를 잃은 고아로 가고 있는데, 그 어머니는 깊이 병들었고 젖줄마저 썩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선생님, 저는 정작 그런 고상한 높은 말보다도 쓸쓸한 하소를 닮은, 『다시 Q씨에게』 보내는 편지의 이 대목이 더 사무칩니다.
    ‘도대체 시간은 축복입니까 시련입니까, 행복입니까 불행입니까. 아마도 그 두 가지 모두를 다 가졌겠지요. 죽음과 삶, 만남과 이별, 희열과 절망, 그 쌍칼을 든 진실로 정체 모를 그게 시간입니까. 공간을 지배하는 권능을 쥔 시간은 그러면 신일까요?’
    P. S. 저 신비한 생사의 시간을 넘어가신 지도 벌써 7년째입니다. 선생님, 그곳은 어떻습니까?

 

 

 

작가소개 / 조용호(소설가)

1961년 전북 좌두 출생. 199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장편소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시인에게 길을 묻다』,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통영문학상·무영문학상 수상.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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