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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신간리뷰] 지나감과 나눔

  • 작성일 2015-05-01
  • 조회수 1,199

 

[문학신간리뷰]

 

 


지나감과 나눔

- 정영효, 『계속 열리는 믿음』(문학동네, 2015) 리뷰

 

 

 

김태선(문학평론가)

 

 

통한다는 것은 공동의 실체가 아니라 연결된 존재 자체의 사실,
‘전염’이라는 것은 ‘소통’에 대한 다른 이름이며 뭔가를 전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는 전함이 있다는 사실, 지나감과 나눔(passage et partage)이다.
- 장-뤽 낭시, 『부인된 공동체』 중에서

 

 

 

jyh-book    ‘계속 열리는 믿음’이라는 표현은 흥미롭다. ‘믿음’이라는 마음의 한 상태를 ‘계속’과 ‘열리는’이라는 낱말이 각각 시간화, 공간화 하고 있다. ‘계속’은 끊임없이 이어짐이라는 시간을, ‘열리는’은 한계 지어진 것의 한계를 허무는 움직임을 표상케 한다. ‘믿음’은 내적이고 주관적인 표상인데,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입게 되면서 마치 객관적인 사물인 것처럼 바깥으로 드러난다. ‘나’의 안에만 머무르던 것이 바깥으로, 공동의 장으로 노출되는 것이다. 정영효의 시집 『계속 열리는 믿음』에서 공간과 시간에 관한 시어들이 자주 나타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시어들은 ‘나’라는 개체,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와 함께 작용하며 움직인다.
    공동체라는 이름은, 보통은, 공통된 것을 공유하는 이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대개 서로 같은 성질을 지니거나,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다. 그런데 ‘하나’라는 동일성을 중심으로 모임이 만들어지면 구분이 생겨나게 된다. 속한 자들과 속하지 않은 자들, 우리와 너희, 이곳과 저곳 등등. 이런 구분은 단절을 야기하고 소통을 가로막는다.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걸 막고 안에만 머무르게 한다. 그러나 ‘계속 열리는 믿음’은 안에만 머무를 수는 없게 한다. ‘하나’를 중심으로 하는 것과는 다른 공동체의 가능성은 그 믿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용저곳이 거짓처럼 느껴질 때 이곳은 마침내 목적이 된다
      - 「관객」 중에서

 

    「관객」에선 ‘이곳’과 ‘저곳’이라는 이름으로, 두 축으로 공간이 분할되어 있다. “싸움이 시작됐는데 말리는 사람은 없고/ 사고가 났는데 상황만 늘어나고 있다”라는 사건이 벌어진 곳은 ‘저곳’이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어도, 그 사건을 보는 이가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에겐 그저 ‘저곳’의 일일 뿐이다. ‘이곳’과 ‘저곳’이라는 분할은 물리적인 장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주체가 자신을 위치시키는 심리적인 장소에도 해당된다.
    시에 등장하는 목소리의 주체는 사건이 일어난 곳을 ‘저곳’이라 지칭하며 ‘이곳’에 있지만, “가만히 지켜보며 인상적인 것을 생각”하는 순간 그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그는 “악몽은 침대를/ 인형은 아이를/ 가까우면서 일정하게/ 한쪽은 다른 쪽을 초대한다”고 생각한다. ‘이곳’과 ‘저곳’이 분리되어 있지만, 이처럼 가만히 지켜보는 일은 사건으로 하여금 주체에게 “복잡한 감정들”을 전한다. ‘저곳’에 속하지는 않았기에, 이런 변화는 그가 전염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이곳’과 ‘저곳’의 구분은, “그렇지만 그건 저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나아가 “저곳이 거짓처럼 느껴질 때 이곳은 마침내 목적이 된다”. ‘저곳’의 일을 두고 거짓이라 여긴다면, ‘이곳’과 ‘저곳’은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이곳’은 ‘저곳’을 배척하는 이름이 된다. ‘저곳’을 배제하기 위해 ‘이곳’은 ‘목적’이 된다. ‘이곳’만이 옳다고 여겨진다. 이는 ‘하나의 길’만 추구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의 길만 믿었다 하나의 출구를 찾았다 고요함도 시선도 하나뿐인 게 이상했다 여태 우리가 모으지 못했던, 하나라는 것은 모두 평화로울까
      - 「해결책」 중에서

 

    ‘하나의 길만 믿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우리’라 지칭한다. ‘우리’는 동굴을 지나고 있다. 동굴은 함께 행하는 과업이 이루어지는 곳이자 공동의 목적을 위해 지나야 하는 곳이다. “가장 가까운 길을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를 믿고 찾는다. 그런데 이건 이상한 일이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모였음에도, ‘하나’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같은 곳에 있어도 같은 곳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이들 하나하나는 개별자이기에 각각 다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두려움이었고 앞을 감싼 채 단단해지는 어둠과 알 수 없는 형상” 때문에 ‘우리’는 ‘다름’을 침묵하고 ‘하나의 길’만 믿고 따른다. 우선은 동굴을 지나야 하기에 “계속 침묵하기로 했다”고는 하지만, 그런 해결책에는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여태 우리가 모으지 못했던, 하나라는 것은 모두 평화로울까”라는 의문. “동굴을 지날 때까지는” 침묵하기로 했지만, “우리만 있다는 게 함정처럼 느껴질수록”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한다.
    시의 목소리가 ‘우리’와 ‘목적’이라는 이름에서 이상한 걸 느끼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이상함은 인식의 차원에서 주체에게 각인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의 차원에서 촉발되고 있다. 만일 “이상한 경험이 평범하게”(「사라졌다」) 변한다면, 많은 것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를 이루는 ‘나’도 사라질 것이다. ‘나’를 ‘나’로 붙드는 건 이상함을 느끼는 일이다. 그런데 이는 ‘나’의 안에 ‘나’와는 다른 것이 함께하는 일이다. 「나의 후보들」에서 “나는 계속 확실해지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나’의 확실성은 ‘생각하는 나’, 곧 이성의 토대다. 그러나 ‘나’는 “계속 확실해지지” 않음으로써 이성과는 다른 움직임을 불러일으키는 심급이 된다. ‘나’가 “계속 확실해지지 않는” 이유는 시간의 지나감에 의해 생겨나는 차이들 때문이다. “자주 대화하고 남의 말을 잘 듣지만 이런 것들을 언제나 잠시 뒤에 다시 생각한다”고 하는 행위에 의해 ‘대화하고 남의 말을 잘 듣는 나’와 ‘생각하는 나’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고 균열이 일어난다.
    ‘나’와 ‘나’의 균열은 「공모」에서도 나타난다. “언제부턴가 나는 선생으로 불리게 되었고”라고 할 때, “언제부턴가 나는 나를 선생이라고 소개하게 되었고”라고 할 때, ‘선생이라 불리는 나’와 주체로서의 ‘나’ 사이에 차이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런 균열은 정체성이라는 ‘하나’에 틈을 내는 일이다. 틈을 통해 타자가 들어설 자리가 생겨난다. 「공모」에서 ‘나’는 자신이 ‘선생’으로 불리게 되었을 때, “손님이 올 때마다 탁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상대가 “먼저 말하지 않았는데도” 고민을 묻는 ‘나’를 확인한다. 이런 행위와 마음이 바로 ‘공모’다.
    『계속 열리는 믿음』에서 ‘나누다’라는 표현이 비교적 빈번하게 쓰인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나눔’은 어떤 것을 여럿으로 가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럿이 공유함을 일컫는 표현이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다’라는 표현처럼 어떤 상황에 참여함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 실상 공동체라는 것은 어떤 목적을 공유하는 이들이라기보다는 존재, 즉 있음 그 자체를 나누는 이들이다. 때문에 공동체에는 어떤 행위보다는 존재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당면한 문제들, ‘나’를 구속하는 힘들은 나눔의 공동체를 향한 움직임을 가로막는다. 불안으로써 ‘하나의 길’을 믿게 하고, 그에 따른 ‘목적지’를 삼게 한다. ‘하나의 길’에 따라 목적을 향해 간다면, “조금씩 나는 평범한 예가 되고” 말 것이다. ‘평범한 예’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모두 “처음이 두려웠고 흉내를 좋아했으므로/ 흔한 일을 대표로 뽑아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들이다. “낮을 찬성하는 밤을 가지기 위해 남들과 근심을” 나눌 뿐이다. 차이를 긍정하는 일보다는 동일성을 긍정하는 일이 쉽고 습관처럼 튼튼하기 때문이다.(「목적지」) ‘여기’에만 머물러 있다면, ‘나’의 안에만 머무르고 있다면, 일어난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것 같고, 편안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는 ‘최후의 거짓’에 예속되며 결국은 ‘나’를 망실케 하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계속 열리는 믿음』은 “싸움이 시작됐는데 말리는 사람은 없고/ 사고가 났는데 상황만 늘어나고”(「관객」) 있는 ‘동굴’의 시대를 ‘관객’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다. 마치 자기고해를 하듯이. 그러나 지금 여기에는 비탄이나 회의, 절망만 있는 건 아니다.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지나다’라는 표현에는, 지금의 상황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창문과 거리 사이를 궁금해 했으므로
남의 즐거움에도 관심을 두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표적이 되는 자들이었다
      - 「당사자들」 중에서

 

    동굴의 시대, 일어난 사건을 두고 관객처럼 바라만 보고 있지만, ‘우리’는 그로부터 떨어져 존재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주 발각되었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지켜보고 있는 이로 떨어져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건과 타자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이다. 사건과 타자 역시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다. 서로의 시선이 통하면서 감염과도 같은 접촉이 일어난다. “최초의 진실을 숨기는 최후의 거짓말”이 ‘이곳’과 ‘저곳’을 갈라놓고 ‘하나의 길’만 믿도록 했지만, ‘우리’ 역시 ‘당사자들’이다. 당사자들일 때 ‘우리’는 ‘하나의 길’만 믿는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를 넘어서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노출에 의해 ‘우리’는 ‘우리’ 바깥에 놓인 존재가 된다. ‘우리’와 타자는 서로 전혀 다르더라도, 서로의 시선에 의한 소통으로 인해 연결되고 연루되어 있다.
    당사자들임을 자각한 ‘우리’는 ‘하나의 길’과는 “낯선 경험에 다르게 도착하기 위해/ 멈칫거리면서 숨을 고르고/ 시키지 않았는데도 가역적으로 반응”한다. 지금의 조건이 되는 ‘최초의 진실’을 알기 위해. 물론 그 최초의 진실로 곧장 가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지나는 일’은 “많은 날들이 쌓일 수” 있도록 하고, ‘하나의 길’을 믿는 일로는 가지 못했던 ‘낯선 경험’에 가 닿게 하여 “익숙한 근처가 늘어”나도록 할 것이다. ‘우리’ 역시 존재의 통로, 지나는 길이다. ‘하나의 길’과 동굴처럼 막힌 곳이 아니라, 타자가 ‘우리’ 안으로 지나는 열린 길이다. ‘지나감’은 존재들을 열린 공간으로 만들며, 서로를 노출시킨다. 이로써 이곳과 저곳이 서로 통하게 된다. ‘지나감’에 의해 믿음은 ‘하나의 길’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계속 열리는 믿음”이 된다. 이 믿음은 공간을 여는 공간, 지나감에 의해 계속 열리는 공간이 된다. 계속 열리는 믿음은 “방의 이외를 원하게”(「이어지는 곳」) 한다. 한계라고 생각되었던 것을 뛰어넘게 한다.
    ‘나’와 ‘우리’는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계속 열리는 믿음’으로 “남의 즐거움에도 관심”을 두고 “서로에게 표적이 되는 자들”이다. 이제 “너와 너를 바라보는 나,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내가 연설에서 소외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만족스러웠으므로 지나간 시간들을 안심했다”(「연설을 원하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침묵은 끝날 것이다. ‘계속 열리는 믿음’을 지닌 나눔의 공동체에 의해 ‘검은 거리’지만 “조금씩 다른 생각들이 쌓인 곳에서”(「짐작하는 날들」) “결정적인 목소리를”(「검은 거리」) 듣게 될 것이다.

 

 

 

작가소개 / 김태선(문학평론가)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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