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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문학신간리뷰] 국경을 넘나들기
[문학신간리뷰] 국경을 넘나들기 - 김성중의 『국경시장』 이은지(문학평론가) 김성중의 두 번째 소설집 『국경시장』(문학동네, 2015)은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국경’과 ‘시장’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지하듯이 시장은 노동을 통해 생산된 사물을 화폐로 교환하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화폐는 그 중심이 텅 비어 있음으로 인해 세상만물을 매개하는 데 가장 능란한 사물이다. ‘모든 것과 맞바꿀 수 있는 사물’의 권능은 유혹적이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화폐라는 사물을 손에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노동이라는 대가를 바쳐야만 한다. ‘노동’이라는 두 음절의 행위에는 구체적 인간 실존의 상당한 부분이 제물로 그득히 들어차 있어, 텅 비어 고도로 추상화된 화폐와 맞바꾸기에 적당한 중량의 희생을 자랑한다. 희생은 표제작인 「국경시장」에서 선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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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문학신간리뷰] 지나감과 나눔
[문학신간리뷰] 지나감과 나눔 - 정영효, 『계속 열리는 믿음』(문학동네, 2015) 리뷰 김태선(문학평론가) 통한다는 것은 공동의 실체가 아니라 연결된 존재 자체의 사실, ‘전염’이라는 것은 ‘소통’에 대한 다른 이름이며 뭔가를 전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는 전함이 있다는 사실, 지나감과 나눔(passage et partage)이다. - 장-뤽 낭시, 『부인된 공동체』 중에서 ‘계속 열리는 믿음’이라는 표현은 흥미롭다. ‘믿음’이라는 마음의 한 상태를 ‘계속’과 ‘열리는’이라는 낱말이 각각 시간화, 공간화 하고 있다. ‘계속’은 끊임없이 이어짐이라는 시간을, ‘열리는’은 한계 지어진 것의 한계를 허무는 움직임을 표상케 한다. ‘믿음’은 내적이고 주관적인 표상인데,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입게 되면서 마치 객관적인 사물인 것처럼 바깥으로 드러난다. ‘나’의 안에만 머무르던 것이 바깥으로, 공동의 장으로 노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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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문학신간리뷰] 도래하는 노래
[문학 신간 리뷰] 도래하는 노래 - 안희연,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5) 리뷰 김태선(문학평론가) 시집을 펼치자 “이 별은 나의 불행을 축으로 운행되고 있어”(「프랙털」)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의 불행일까. 하지만 불행의 주인을 밝히려는 일은 무용할 것 같다. 그를 밝혀내어 이 별에서 배제하려 하더라도 우리 삶에 퍼져 있는 불행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분명, 안희연의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어떤 불행과 슬픔에 관한 정념들이다.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마치 비애극의 등장인물들처럼 불행을 겪으며 파멸로 치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익숙한 실패와 좌절들이 연속되는 삶에는 어떤 구원도 없을 것만 같다. 그런 날들이 밤처럼 이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백색 공간」, 10-11면) 누군들 행복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행복한 생각을 할 수 없는 이유들은 너무나도 많다. “나를 안아 보세요 그것이 사월 바다의 체온이에요”(「검은 낮을 지나 흰 밤에」)라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혹시 굴뚝에 사는 사람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나의 작은 베르나르두 소아레스 씨」)와 같은 물음을 발생시킨 상황들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의 시간은 “밤 그리고 밤”(「접어놓은 페이지」)이 이어지는 것처럼 어둡다. 고통에 처한 이들의 부름이 들려오지만, 그런 부름에 다가가는 일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 「백색 공간」(10-11면) 중에서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에는 「백색 공간」이라는 이름의 시 세 편이 수록되어 있다. “지독한 폭설이었다고” 시에 쓰인 것처럼, 눈으로 뒤덮여 표백된 어떤 실재하는 공간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테고, 혹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거나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 종이나 캔버스 같은 것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안희연의 시에 등장하는 ‘백색 공간’은 이 두 가지 사태 모두를 가리킨다. 세계의 맨얼굴, 맨땅이 눈과 같은 것으로 뒤덮여 버린 상태, 그리고 무언가 그려지거나 쓰이기 이전의 상태. 전자는 은폐와 망각의 공간일 터이고, 후자는 사건이 도래하기 직전인 잠재성의 공간일 터이다. 우선 은폐되고 망각된 것의 이름을 불러 보자. 가령 절벽이라는 말, 시인은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에서 ‘벽’이라는 시어를 자주 만나게 된다. “절벽 위에서 동전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 나올 때” “땅속에 박힌 기차들/ 시간의 벽 너머로 달려가는”(「몽유 산책」), “벽에서 태어난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와요”(「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벽에 걸린 그림자를 떼어내도/ 벽에는 그림자가 걸려 있고”(「접어놓은 페이지」), “벽은 계단을 감추고 있다 오후 세 시 벽은 세 번 깨어나고 대부분 잠들어 있다”(「벽」), “벽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들 앞에 하나의 벽이 놓인다”(「트릭스터」) 등등, 이외에도 많은 표현들이 있다. 벽은 공간을 구획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가로막는 것, 어떤 한계에 대한 이름이다. 벽은 무한한 확장을 차단함으로써 공간을 한정짓는다. 벽에 가로막혀 있을 때 우리는 다른 곳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손톱자국’은 그런 벽을 넘어서고자 하는 부단한 움직임일 것이다. 그러나 절벽은 그것을 은폐한다. 마찬가지로 ‘계단’ 역시 물에 잠겨 있다.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억누르고 은폐하는 작용이 행해지고 있는 셈이다. 횔덜린의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 또한 자라난다”라는 시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벽으로 가로막혀 충분히 절망적인 것처럼 보임에도 구원의 징후는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눈 위에 눈이 쌓이듯, 불행 위에 절망이 계속 쌓이고 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벽으로 인해, 우리는 불행에 이어 무력함에 처하게 된다. 무력함 때문일까, 「피아노의 병」에는 “건반을 누르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습니다”라고 말하는 ‘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빌린 발을 신고 긴긴 잠에 들어도 내가 죽은 아이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피아노는 흰 천으로 덮여 있습니다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는 일에 하루를 씁니다 끝까지 손을 흔드는 자세가 그림자의 표정을 결정지을 것이라고 - 피아노의 병」 중에서 「피아노의 병」에선 ‘그’가 ‘나’에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린다. “연주하라, 죽은 아이의 목소리로”라고. 그러나 “빌린 발을 신고 긴긴 잠에 들어도 내가 죽은 아이가 될 수는” 없었기에 “건반을 누르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 이어진다. 아이가 죽었다. 죽은 아이가 있다. “춤추는 아이와 그 아이를 쓰러뜨리는 파도, 천진하게 다시 일어나 춤추는 아이와 그 아이를 쓰러뜨리는 파도……” 아이는 “천진하게 다시 일어나 춤”을 추겠지만, 파도는 계속해서 그 아이를 쓰러뜨린다. ‘파도’와 ‘아이’라는 시어가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2014년 4월의 참사를 상기하게 된다. 그날 이후 바다를 가리키는 표현과 아이를 가리키는 표현이 만나는 문장을 만나게 될 때마다 그 참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시대가 우리의 지금 여기를 구성한다. “죽음은 죽음일 뿐”(「요제피네」)이라고 말함으로써, 당시의 기억을 잊게 만들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액자를 든 사람들”, “몇몇은 원하는 이야기를 골라 담아 자리를”(「트릭스터」) 떠나는 사람들이다. 액자, 즉 프레임은 형용할 수 없는 것을 틀로써 의미를 단순화시킨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언어를 통한 대답은 없다. 적어도 언어를 통한 대답은 없다.” 자신이 죽은 아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아픔은 온전히 타인에게만 속하거나 나에게만 속할 수는 없다. 우리 시대를 슬픔에 처하게 만든 고통은 언어로 단순하게 의미화 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다. 이를 무시하고 ‘액자를 든 사람들’처럼 간편하게 그러한 것들을 추상화해 버리는 행위는, 이 공간을 하얗게 표백하고 은폐하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시인이기에 ‘그’의 지시에 속박되어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인의 얼굴’에 노출된 것처럼, ‘그’의 지시는 시인으로 하여금 타자의 아픔, 그러나 타자의 것만은 아닌 아픔에 근접성으로 호출된다.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말, 그러나 수행이 불가능한 말로 인해 시인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언어를 통한 대답은 없다.”는 명제에도 불구하고 시인인 그는 우선 그 말할 수 없음, 침묵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침묵을 말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물속에 얼굴을 들이밀면/ 도처에 말할 수 없는 어둠뿐”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어둠, 그곳엔 “가만히 잠들라는 명령을”(「상상 밖의 모자들로 가득한」) 받은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은 “물속에는 왜 문이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여기 사람이 있어요”라고 말해 보지만, 돌아오는 건 “가만히 잠들라는 명령”뿐이다. “죽은 아이의 목소리로” 연주하는 일이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기에, “피아노는 흰 천으로 덮여” 있다. 그런데 불가능으로 인한 무력함에 처해 있는 이에게 돌연 어떤 힘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 그 순간이란 지금 여기의 시간과 공간을 끝까지 견뎌 보려는 의지에서 발현한다. ‘나’는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는 일에 하루를 씁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태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는 일”에는 그 모든 것을 견디고자 하는 이의 윤리적 실천이 나타난다. 외면하거나 “원하는 이야기를 골라 담아 자리를”(「트릭스터」) 뜨지 않고, “눈에다 못을 박아 넣고 싶은 날들이 흘러”(「검은 낮을 지나 흰 밤에」)감에도 “나는 긴 호흡을 끌고 벽의 끝까지 가”(「벽」)보는 사람이다. 분명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며 “가만히 잠들라는 명령”(「상상 밖의 모자들로 가득한」)이 지배하는 세계에는 어떠한 구원도 자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는 일에 하루를” 쓰면서 견디고 있는 것일까. 앞서 우리는 ‘백색 공간’의 두 가지 모습을 생각했다. ‘백색 공간’에 담긴 후자의 모습,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흰 종이 혹은 하얀 캔버스를 살펴볼 차례다. “단 한 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백색 공간」, 10-11면)이라는 소망을 밝히는 이에게 백색 공간은 세계의 맨살을 하얗게 표백해서 감춰버린 상황만 가시적으로 드러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잠재성의 공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직 어떤 것도 결정되지 않은, 때문에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하는 그런 상태의 공간이다. 분명 ‘백색 공간’으로 지칭된 이 세계는 “모든 악몽 위에 세워진/ 고요의 땅”(「선고」)으로 먼저 나타난다. 그러나 “그곳으로/ 너를 찾으러 간다”(「선고」)라는 결연한 수행문으로 인해 ‘백색 공간’은 이제 우리를 불가능에 처하게 했던 공간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때문에 시인은 “미끄러지면서/ 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 글자의 내부로 들어간다”(「백색 공간」, 64-65면). “언어를 통한 대답은 없다”고 하지만, 시인은 그 안으로 더 파고들어간다. 끝까지 가보는 것, 최대치에 이르러 그 한계를 넘기 위해서다. 침묵이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도록, 말이 행위로 나타날 수 있도록. 이제 ‘백색 공간’은 어떤 행동도 나타나지 않았기에, 더 풍부한 가능성이 도래할 수 있는 곳으로 뒤바뀐다. 이처럼 ‘나’를 무력함에 처하게 했던 사태가 ‘나’의 고유한 능력으로 전복되는 순간, ‘나’는 “먼지로 뒤덮인 피아노 덮개를 열듯/ 하나하나/ 용서를”(「선고」) 빌 수 있게 된다. 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 보기도 하는 왼쪽으로 세 번째 사람과 오른쪽으로 세 번째 사람 손목과 우산을 합쳐 하나의 이름을 완성한다 나란히 빗속을 걸어간다 최대한의 열매로 최소한의 벼랑을 떠날 때까지 - 「파트너」 중에서 죽음은 분명 나의 것일 수 없지만, 동시에 그 죽음에 처한 타자의 것일 수만은 없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모든 불가능성을 가능성에 이르게 하는 자유의 사건으로 기술되고 있지만, 그와 반대로 레비나스는 인간의 무력함이자 부자유의 경험이라 말한다. 이러한 무력함과 부자유의 경험은 앞서 살펴본 대로 안희연의 시에 등장하는 ‘나’에게서도 나타난다. 타자의 것일 수만은 없는 죽음 앞에서 ‘나’는 ‘너’에게 호출된다. ‘나’는 ‘너’의 호출을 피할 수 없다. 불가능과 부자유는 그런 호출을 수식하는 이름으로 보이기도 한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검은 날을 지나 흰 밤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겐, 그리고 그에게 호출되어 연루의 감정을 느끼는 이들에겐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사람”(「검은 날을 지나 흰 밤에」)이 되어 얼굴을 들이민다. (타인의) ‘얼굴’ 앞에 섰을 때, ‘나’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과 책임이라는 의식에서 자기 존립의 근거를 마련한다. “너의 머리를 잠시 빌리기로 하자”라는 말처럼, ‘나’의 주체성은 유아론적으로 홀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와 함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실존이라는 이름, 즉 바깥에 서 있음이라는 말은 그렇게 타자 앞에 노출됨으로써, 그리고 그 타자를 향해 열려 있음으로 ‘나’가 이루어져 있음을 함축한다. 때문에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 보기도” 하지만 “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처럼” 나를 불가능의 상태로 고립시켜 놓았던 벽은 허물어지고 “하나의 이름을 완성한다”. “하나의 이름을 완성”하는 일은 모든 차이를 제거하고 개별자들을 동일성으로 묶는 일은 아니다.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오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하자”는 말처럼, 나의 존재 조건이 타자와 함께함을 느끼게 된 이에게 “하나의 이름을 완성”하는 일은 ‘백색 공간’에서 표백되고 은폐되어 비존재에 처하게 될 위험에 처한 이를, “가시권 밖”(「백색 공간」, 10-11면)에 있던 이를 다시 안으로 불러들인다. “정면을 보는 것과 정면으로 보는 것”이 다르듯 시인은 우리를 불가능에 처하게 한 세계에서, 그 세계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정면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세계가 보여주려 하지 않았던 모습까지 정면으로 보려 한다. 정면으로 볼 수 있을 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거짓말을 하고 있어」)라는 태도에서 “나란히 빗속을 걸어간다”라는 태도로 바뀌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함께하는 ‘파트너’가 있기에 불가능처럼 보였던 고요는 이제 “최소한의 벼랑”이 되고, “하나의 이름을 완성”함으로써 ‘나’의 움직임은 “최대한의 열매”가 되어 그 벼랑을 떠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러나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 부끄러움이 만드는 길을 따라 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다 절벽이라고 한다면 갇혀 있다 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 -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중에서 우리는 어떻게 벽을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 일은 염색공이 골몰하듯 “흑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어떤 색을 입힐 것인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일처럼 어떤 계획에 따른 움직임보다는, “얼결에 페인트 통을 엎질렀을 때/ 우리는 태어났다”는 말처럼 “그의 아름다운 실수”에서 비롯된다. 어떤 계획에 따른 움직임의 실천은 능력의 함양을 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그 능력은 우리를 불가능에 이르게 했던 그 사회에 의해 배태된 것. 때문에 그러한 능력으로는 벽을 허물 수 없다. 그런 능력으로는 “내정된 실패의 세계 속에”서 “플라스틱 병정들처럼/ 하루치의 슬픔을 배당받고/ 걷고 또 걸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만이 가능할 것이다. 벽을 허무는 건 사회로부터 받은 능력과 함께하지만 동시에 그 능력을 위반하면서 태어나는 “아름다운 실수/ 돌이킬 수 없는 얼룩들”이다. “거울은 파편으로 대항한다”(「파트너」)는 말처럼, 의도와 목적에 종속된 유기적인 움직임이 아닌, 파편처럼 흩어진, 마치 어떤 이들에게는 실패처럼 보일 수 있는, 의도에 반하는 우연의 결과들, 유희적인 움직임에 의해 벽은 무너질 것이다. 유희적인 움직임에 의해 “벽을 담이라고 발음하는 발목이/ 이쪽으로 넘어”(「벽」)오는 것처럼, “절벽이라고 한다면 갇혀 있다/ 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처럼 관점을 바꾸고 사태를 뒤흔드는 힘이 나타날 것이다.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에서 시인이 쓴 문장들은 각각의 낱말들이 촘촘하게 결속되어 높은 밀도로 자신을 표현하지만, 문장과 문장 그리고 시와 시의 배열은 유기적인 종합에 반하려는 듯한 충돌들을 불러일으키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령 ‘피아노’라는 시어의 쓰임을 두고 보았을 때, 「피아노의 병」 이후에 「파트너」가 배열되는 흐름이 자연스럽겠지만, 시집의 실제 배열에선 「파트너」가 「피아노의 병」보다 몇 편 앞에 놓여 있다. 뿐만 아니라 ‘새’, ‘벽’, ‘계단’, ‘기차’, ‘나무’, ‘이름’ 등 시인이 상징처럼 쓰는 시어들은 개별 시편 안에서만 살필 때와는 달리, 여러 시편들에 파편처럼 흩어진 것들이 서로를 되비추며 그려내는 다양한 목소리의 공명을 감지할 때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가두려는 움직임에 저항하면서 그 모습을 흩어진 채로 반영하는 알레고리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파편으로 대항한다”는 내용의 차원을 형식으로 구현한 것이다. 시인의 노래는 “거울처럼 파편으로 대항하는” 이의 움직임처럼 알레고리(하나의 전체로서 세계를 뒤덮으려는 ‘벽’을 거울의 파편들을 통해 그를 다시 조각으로 흩어 놓음으로써 가시권 밖의 안부를 드러내는 일)와 상징(‘백색 공간’이 은폐하였던, 단절시켜 놓았던 관계를 다시 호출하여 만나게 하는 일)이 어우러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다.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 부끄러움이 만드는 길을 따라/ 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다”는 말처럼, 시인은 “오래된 실패를” 꺼내어 “빛을 머금은 노래를” 부를 것이다. 작가소개 / 김태선(문학평론가) -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문장웹진 2016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