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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수상자 나주탐방 동행기] 민들레와 쪽빛의 힘

  • 작성일 2015-04-02
  • 조회수 2,203

 

[민들레문학상 수상자 나주 탐방 동행기 ]

 

 


쪽빛의 힘, 민들레의 빛

 

 

 

이은선(소설가)

 

 

 

 

    나주로 가는 길은 멀었다. 꽃샘추위가 몰아닥치기 직전의 푹한 봄날. 오래간만에 나들이 가는 티를 내느라 아침 일찍 서둘러 의사 선생님 얼굴 한번 보고 말 몇 마디 주고받은 후에 출발한 길이었다. 볕이 더워 자동차의 창문을 여니 기침이 나왔고, 창문을 닫자니 땀이 흘렀다. 민들레 문학상의 역대 수상자들을 태운 버스는 이미 경기권역을 벗어났다는 전화를 받은 직후였다. 안성 휴게소부터 길이 막혀, 정안 휴게소를 지날 때가지 걷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입은 바짝 마르고, 속도 끓었다. 배도 고프다 못해 쓰리고, 콧물과 기침은 쉴 새 없이 나왔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어서 아침에 만난 의사 선생님의 의술을 살짝 의심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나주로 가기에도 다급한 와중에 광주에 들러 시인을 태웠다. 나주 기행에 기꺼이 동참해 주겠노라 약속했던 시인이었다. 제대로 된 인사와 안부, 그간 어찌 지냈느냐는 말들은 나주에 도착해 밥이라도 좀 먹고 나서 하기로 했다. 오래간만에 만난 시인에게서 ‘얼굴이 핼쓱해졌다’는 말을 들었다. 다섯 시간을 내리 도로체증에 시달려 온 탓이었다. 기분이 좋아 시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려던 찰나, ‘얼굴만 그렇고 몸은 그대로네’라는 직선적인 말이 날아왔다. 그제야 나는 시인을 트렁크에 태웠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광주에서 나주가 지척인지라 그나마 그만큼만 싸우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국밥집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금성문’을 보았다. 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2호라는 그 객사? 우선 금성문도 밥을 먹고 나서 봐야 제대로 보일 듯했다. 50년 원조 국밥집에 들어서자마자 “두 분이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테이블에 앉아 숨을 돌리기도 전에, 물 한 잔 마시기도 전에, 국밥이 나왔다. 나주 국밥집의 신속함이 눈물겨웠다. 허겁지겁 국밥을 먹는 나를 보며 시인이 물었다.

 

    “민들레 문학상이 올해 몇 회째야?”
    “(볼멘소리로) 그것도 모르고 왔수?”
    “다시 자세히 알려줘.”
    “아, 목 아픈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몸 속 깊이 박혀 있는 친절함을 어찌하지 못해 민들레 문학상의 취지와 확대, 그리고 수상자들이 어찌하여 나주 기행을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말과 동시에 국밥도 국물 하나 남김없이 내 뱃속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시인은 내 말을 듣느라 밥을 절반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시인을 이끌고 민들레 문학상 수상자들이 모여 있다는 나주의 커피 명소 ‘예가체프’로 향했다. 그제야 비로소 금성문이, 나주의 거리가,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쭉 늘어선 국밥집의 간판들과 금성문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배가 좀 든든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금성문이 제대로 보였고, 그 위용에 놀랐다. 객사가 저 정도의 크기면 나주 관아는 얼마나 핵심적인 통로 역할을 했다는 거야? 몇 명이나 잘 수 있지? 아직도 저 터는 발굴 중인가 보네? 내 물음에 시인은 답이 없었다. 나주의 지척에 사는 시인이 ‘아는 게 없어서 답을 못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거친 걸음으로 일행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오래간만에 여행을 나선 이들의 설렘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1회와 2회 민들레 문학 특강에 강사로 참여한 전력이 있고, 1회에는 시상식 진행을, 2회 때는 시상식의 대본을 썼다. 3회 때는 다시 시상식을 진행하면서 이 상과 많은 인연을 쌓은 셈이었다. 해마다 ‘이번에는 어떤 작품이 선정될까?’ 하며 기다리기도, 회가 거듭될수록 민들레 문학상의 내실이 더 튼튼해져 가고 있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진 적도 많았다. 작가들이 특강 강사 지원을 한 까닭에 제비뽑기와 ‘선정위원’을 초빙하여 강사 선정을 했다는 후일담은 두고두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였다. 시상식장에서 수상자가 상을 받으며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가슴이 벅찼고, 다시 내 집이 생긴다는 생각으로 한껏 올라간 음성의 수상 소감을 듣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여기에 이르기까지 함께해 준 모든 이들의 노고를 언급해야 하는데, 그건 글의 맨 나중에나 하는 거니까 - 본디 하이라이트는 맨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니까! - 다시 나주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음료 한 잔씩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고 있는 반가운 얼굴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더 예뻐졌다는 의례적인 말을 듣고도 맞잡은 손에 힘을 들어갔다. 카페에서의 조우도 잠시, 곧바로 그다음 일정이 이어졌다. 금성관을 둘러보고 황포돛배를 타는 곳으로 이동을 하는 일이었다. 차량을 따로 가져온 까닭에, 수상자들이 금성관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시인과 함께 황포돛배 선착장으로 먼저 이동을 했다. 잠시 후에 다시 보자는 살가운 인사를 뒤로 하고 빈말 잘 못하는 시인을 내 차에 태웠다. 그러다 보니 내가 시인을 너무 극진하게 모셔오고,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 한 번만 더 입바른 소리 하면 도로에 내려놓겠다는 생각으로 운전을 하던 참이었다. ‘벌꿀 모텔’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뭣이여? 저게? 벌꿀? 허니 버터? 허니 버터 모텔이네?” 나도 모르게 크게 웃다가 핸들을 꺾었다. 한적한 이차선 도로가 아니었다면, 영산강에서 ‘모두 안녕’ 하고 돌아갈 뻔했다. 나주의 역사도 잘 모르고, 입바른 소리도 잘 못하는 시인과 함께.
    돛배가 쉽게 출발하지 못했다. 승선 인원을 조사하고, 그들의 주소와 주민번호를 적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매표소 직원과 선장 간에 의견 충돌(승선지를 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으나, 배에서 내려서 가져와라, ‘니가 가져가라’라는 엄청난 ‘기싸움’이 있었다. 결국 나와 시인이 선장과 매표소 직원 사이를 오가며 의견 절충을 했고, 성질 급한 내가 뛰어가서 승선지와 볼펜을 가져왔다. 그러다가 그분들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후로도 십여 분을 더 허비한 뒤에야 배가 포구를 떠났다. 영산포를 휘돌아 진격하는 배 위에 올라 ‘천연염색박물관’으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편도는 이십여 분, 왕복은 오십오 분이 걸리는 뱃길이라 했다. 우리 일행은 박물관으로 가는 편도만 이용하기로 했고, 다시 매표소 직원과 선장에게 따로따로 그 이야기를 전달했다. 선장님께 매표소 직원에게 전화 한 통만 걸어 달라고 말하면 간단하게 끝났을 일을, 우리는 서로 난감하게 쳐다보다가 결국 내가 종이와 펜을 얻어다가 다시 승선표를 적는 일로 마무리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배가 출발하자마자 선장님이 “배 잡아 줄 사람 탔냐?”고 물어서 그것은 또 무슨 소린지 의아해하다가 한참 뒤에나 알아챘다. 선장님은 결국 상말을 간신히 참는다는 얼굴로 지하에서 누군가를 불러 올렸다. 개량한복을 입은 또 다른 선원이 돛배 위로 나타났다. ‘배 잡아줄’ 이인 모양이었다. 이 큰 배를 맨손으로 어떻게 잡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너무 추워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래저래 왔다 갔다 하며 심부름을 하고 있던 나만 빼고 모두들 선실 안에서 경치를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나 혼자 얼어 죽는 줄 알았다고 너스레를 떨자, 수상자들이 하나 둘 내 곁으로 와주었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모자를 샀다며 형광색 모자를 쓰고 온 전년도 수상자가 보였다. 2014 대상 수상자도, 1회 수상자도 보였다. ‘자갈 자갈 자갈’이라는 시구로 기억하고 있는 수상자도 보였다. 심사위원을 맡으신 고영직, 박경장 선생님도 보였다. 수상자와 함께 온 시설 관계자도, 그리고 추위에 떨다 선실에 웅크리고 있던 나와 그곳에 모인 ‘우리 모두’가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출발한 황포돛배 안이었지만 천연염색박물관에 이르러서는 다 같은 식구처럼 한층 더 가까워져 있었다. 물론 강바람이 춥다고 옆에서 구시렁거리던 나의 시인도 같이. 이른봄에 배를 탄 우리가 잘못이지 영산강이 잘못이겠냐며 시인을 달래다가 나는 그만 선실로 들어가 버린 탓에 웬만하면 그의 곁으로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여차하다 또 옆에서 걷게 되었다. (강바람 맞고 기침하다가 내게 감기가 옮을까 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인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나는!)

 

    청출어람(靑出於藍). 쪽이라는 식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만 처음 알았던 모양이었다. 영상 취재를 위해 동행한 미디어 영상아티스트 나미나 작가는 ‘쪽빛’을 몰랐냐며 내게 타박을, 시인은 ‘쪽도 모르는 무식한 소설가’라며 구박을, 수상자들은 ‘아, 작가라고 해서 다 아는 건 아니구나!’라는 시선을 내게 보내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위적이지 않은 푸름, 약간 색이 바랜 하늘빛 같은 그 색에 오래도록 눈을 두었다. 한참을 둘러보다 갓 책을 낸 동료 작가와 내가 매번 신세를 지는 이웃 주민에게 선물하기 위해 쪽빛 손수건 두 장을 샀다.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 두 장밖에 못 샀지만, 내가 ‘쪽의 가치’를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며 스스럼없이 돈을 지불하고 나니 박물관 관람이 끝나 있었다. 바로 그 옆에 위치한 백호문학관으로 다함께 이동했다. 백호문학관의 김은선 사무국장(이름이 어쩐지 낯설지가 않아 더욱 반가웠다)이 백호, 즉 임제 선생의 일대기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백호 임제 선생이 어떤 사상을 가진 분이었는가를 설명하는 김은선 사무국장님을 보고 있자니 학예사라는 직함이 돌올하게 빛나는 듯했다. 내 고장의 역사를 설명하고 그것을 널리 알리는 일. 그것은 그 일에 대한 자부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명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니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변사가 읽어 주는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보는 느낌이었다. 영산강가에 자리한 백호문학관의 위치와 더불어 ‘쪽빛’을 알게 된 나는 신나는 걸음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먹으러 갈 때만 기운이 난다며 타박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지만, 새겨듣지 않았다.
    저녁으로 나주 민물장어 정식을 먹었다. 나는 장어보다는 그 옆에 곁들여져 나온 쌀 발효 음료가 더 먹고 싶었지만, 식후에 진행될 순서를 위해 따라온 몸임을 상기하며 인내심을 발휘했다. (술 없이) 경건하게 장어정식을 먹은 후에 극동연수원으로 향했다. 숙소이자 우리의 저녁 행사가 이루어질 곳이었다. 연수원 측의 배려로 산 밑에 있는 편백나무 방을 쓰게 되었다. ‘나무 냄새 난다’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 했다가 “쪽도 모르더니, 편백도 모르느냐”는 통박을 먹었다. 역시 시인에게서. 나는 아예 귀를 닫았다.

 

    고백하건대, 대본도, 사전 말 맞춤도 없는 행사였다. 소싯적에 이름을 떨쳤던 레크리에이션 강사이자 ‘교회오빠’인, 진무두 전(前) ‘빅이슈’ 본부장과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순서만 가지고 행사를 시작했다. 나주시에서도 우리 민들레 예술문학상 수상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해 주었다. 나주시청 분들의 환대가 우리 행사를 한껏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네 개 조로 나누어진 수상자들이 각자 조 이름과 조장을 정하고 조별 소개를 했다. 심사위원과 특강 작가 자격으로 나주에 합류해 준 고영직(심사위원), 박경장(특강 참여 작가), 이철송(시인), 강회진(시인) 선생님을 필두로 조별로 둘러앉은 수상자들의 탁자에는 갓 출간된 『민들레 문학상 수상 작품집』이 놓여 있었다. 여러 선생님들의 노고가 곁들여진 책이었다. 수상자들과 스태프들은 이번 나주 기행에서 문집을 처음 받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읽었다. 처음에는 눈으로, 두 번째는 목소리로, 나중에는 다 같이 온 마음을 모아 읽었다.
    그 작품들이 한갓 재능과 글쓰기에 대한 열망으로만 채워진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잘 알았다. 누군가의 삶이, 신산하고도 고달팠던 그들의 시간이 한 줄의 문장, 한 문단의 삶으로 나타나 있는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읽는 이도, 듣는 우리도 마음이 울컥해서 조금씩 진행이 끊기기도 여러 번. 하지만 우리는 유머와 재치, 그리고 노래를 즐길 줄 아는 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던가!(진짜다)
    전날 새벽까지 디제잉을 마치고 나주에 합류한 디제이 타마의 음악과 ‘노래방 가사’를 찾으시는 분들에게는 가사가 담긴 노트북 화면을 제시한 미디어 영상아티스트 나미나의 유쾌한 센스가 덧대어졌다. 테이블마다 카나페와 와인, 주스와 물이 제공되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직원들이 낮부터 준비해 둔 자리였다. 음악과 와인, 카나페와 수상자들이라니!
    서른 개 남짓 준비된 소소한 선물들이 주인을 찾아갈 때마다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선물이 크거나 값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기분 좋게 그곳에 모인 모두에게 선물을 증정할 수 있었다. 어느 조에서는 여성 수상자에게 ‘선물 몰아주기’를 감행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심사위원과 현장에서 합류한 시인들도 선물을 받고 함께 장기자랑을 했다. 그중 백미는 즉석에서 진행된 삼사행시 짓기였다. ‘나주 국밥’과 ‘영산강’이 시제로 주어졌고, 각 조에 배정된 작가들이 심사위원이 되어 심사를 할 적에 나와 진무두 전 본부장이 한 곡씩 노래도 불렀다. 광주에서 이 ‘나주의 밤’을 위해 밴드도 달려와 공연을 펼쳐 주었다. 여러 노래들 중에서 이선희의【 인연 】이 특히나 인상적이었고, 김광석의【 일어나 】를 부를 때는 모두 다 같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세 시간 남짓한 밤의 행사가 그렇게 끝이 났다.
    수상자들은 의기양양한 전리품처럼 치킨 한 마리씩 들고 편백나무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주의 밤이 이우는 중이었다. 와인이 남아서 어쩔 수 없이 내 방으로 가지고 왔다. 먹을 것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먼저 방에 돌아와 있던 시인이 특히 반가워했다.

 

    머리가 터질 듯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깼더니 이미 일행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연수원으로 돌아가 전날에 이은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어제의 완벽한 분장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연수원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를 보고 흠칫 놀란 이들과 ‘밤새 안녕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나는 그다지 안녕하지 않은 얼굴로, 간담회에서 수상자 분들의 발언을 들었다.

 

    민들레 예술문학상을 진행해 주어 고맙다.(매년 진행이 될 수 있도록 나주시도 협조해 주었으면 좋겠다.)
    민들레 문학상 수상자들에게 ‘배지’ 하나씩 마련해 달라. (자부심 있게 달고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전국적으로 민들레 문학상이 확대되었으면 좋겠다.(이 상의 외연이 확대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갔으면 좋겠다.)
    꾸준히 이런 모임을 지속했으면 한다.(인터넷 카페 활성화를 통하여 우리의 활동을 널리 알리고 싶다.)

 

    말끝마다 ‘보람 있었고, 참 고맙다’는 말들은 빼놓지 않는 수상자들이었다. 수상자들은 점심 식사를, 나는 해장을 위해 나주 국밥집으로 이동을 했다. 그때까지도 숙소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던 시인을 태우고 다시 금성문 옆으로 갔다. 우리보다 먼저 금성문에 도착한 수상자들이 그 주변을 산책하고 돌아왔다. 빈집의 문고리를 잡아 보았다고 했다. 그 집에서 몇 명이나 살 수 있는지도 가늠해 보았다는 말도 이어졌다. ‘집만 보여’ 산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누군가의 말이 가슴에 남았다. 그나마 괜찮은 집들은 기름보일러가 놓여 있어 ‘기름값 비싸서’ 나주 내려와서는 못 살겠다는 농담도 입에서 입으로 흘렀다. 그래도 국밥 냄새는 실컷 맡겠네! 누군가 또 말을 되받았다.
    나주 국밥의 진한 국물을 마시면서 이 여정이 끝나 가고 있음을 상기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올라가도 서울에 도착하면 저녁때가 되는 거리였다. 어떤 음식보다 재빨리 한 그릇 뚝딱 먹을 수 있는 국밥이었지만, 모두의 식사는 느리게 이어졌다. 밥을 다 먹으면 나주를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에 서둘러 금성문을 한 바퀴 더 돌고, 서성문까지 걸어갔다 온 수상자도 있었다. 나는 수령 오백 년이 넘어 표피가 돌처럼 변한 나무 밑에 둘러앉아 일행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고맙다는 말은 거기서도 이어졌다. 나는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고맙다’고 말하게 하는가에 대해 한참 생각을 했다. 그와 더불어 여기까지 수상자들을 모시고 와 일정을 진행해 준 이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봄 햇살에 기대어 ‘참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수상자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여러 차례 악수를 했고, 성에 차지 않아 버스에 올라서도 ‘안녕’을 고했다. 무사히, 무사히 지내다가 꼭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만 바랄 따름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더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민들레 예술문학상의 수상자들을 실은 버스가 서울로 출발했다. 창문에다 대고 끝까지 손을 흔들던 이들의 얼굴을 모두 내 눈에 담아 두었다. 두 팔을 흔들면서 화답했지만 내내 아쉬운 마음이었다.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갔더라면,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했더라면, 더 유심히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우리는 그렇게 나주 기행을 마쳤고, ‘다음’을 위해 ‘건강’을 지키겠노라는 약속의 말을 주고받았다. ‘민들레의 다음’을 기약하는 시간. 그것을 우리가 ‘나주에서’ 해냈다.

 

    * 나주에서의 시간을 함께했던 민들레 예술문학상 수상자 분들에게 다시 한 번 축하드리고, 꼭 건강하시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함께 수고해 주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직원 분들과, 진무두 전(前) 빅이슈 본부장님을 비롯한 잡지 《빅이슈》의 편집진과 나주시 관계자 여러분들, 민들레 예술문학 기행을 이끌어 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선뜻 ‘집’을 내어준 서울시를 비롯하여 민들레 문학 특강에 참여해 준 모든 작가님들과 심사위원님들, 그리고 제가 글 속에서 내내 ‘시인’이라 부른 광주의 강회진 시인에게도 특별히 고맙고, 함께 ‘기행’할 수 있어 즐거웠다는 말을 남깁니다.

 

 

 

    이름 한 번씩만 불러 봐도 될까요? 호칭 없이 말예요.

 

    - 이선정, 이규원, 이원재, 안광수, 김영서, 이지화, 김창훈, 김정우, 김영철, 안병훈, 박인숙, 이선미, 양병주, 오한식, 권일혁, 진무두, 나미나, 김정혁, 고영직, 박경장, 강회진, 이철송, 김은선, 권지애, 박헌일, 이성진, 정대훈.
    (함께 ‘다음’을 기약한 분들의 이름입니다. 나주 기행에 참여한 모든 분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쪽빛 기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나주 들판에는 지금쯤 민들레꽃이 피어 있겠네요!

 

 

 

작가소개 / 이은선(소설가)

1983년 충남 보령 출생.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수료. 2006~2007 KOICA 단원으로 우즈베키스탄 세계언어대학 한국어강사역임.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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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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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예쁘시긴 백점 만점에 백점ᆞ 말씀 잘 하시긴 천 점 만점에 천점ᆞ 진행 하시는 쎈스는ᆢ만점이었어요^^

    • 2015-04-04 11:08:5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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