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김중일 픽션에세이]삼십대 그리고 작별이란 말

  • 작성일 2015-03-02
  • 조회수 1,336

 

[김중일 픽션에세이]

 

 


삼십대 그리고 작별이란 말

 

 

 

김중일

 

 

 

 

    변변한 작별도 없이 삼십대가 가고 있다. 작별 위에 누워 작별을 덮고 작별을 먹고 작별을 마시며 작별을 타고 작별을 지나 작별에 도착하여 작별을 열고 작별 속으로 들어가 작별의 한가운데에서 매 순간 작별의 시간을 살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나의 삼십대. 나는 곧 삼십대를 떠나야 한다. 나는 내가 지나온 시간의 의미를 정리할 능력이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부끄러움을 부끄러움 없이 모조리 고백하고 기록한다면 조금은 가능하다. 모든 고백의 문장들은 의미가 있다. 문장의 끝에는 마침표가 찍히기 마련이다. 내 삼십대를 고백하는 문장의 마침표로 나는 ‘작별’을 찍고 싶다. 물론 작별 이후에도 문장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 문장 역시 무엇의 기록이든 한 점 작별로 모일 것이다. 나는 의도치 않게 「삼십대」라는 제목의 시를 쓴 적 있다. 그저 밤마다 조용히 시간을 더듬던 손가락이 알아서 쓴 시. 이별의 직전까지, 작별의 시간을 기록한 시다.

 

나뭇잎은 나무의 눈꼬리에 매달린 채
여름내 녹슬어 가는 눈물이야
나무는 공중이라는 텅 빈 눈동자로
늘 너를 지켜봐
어제의 눈과 오늘의 눈과 내일의 눈으로
한꺼번에 녹슨 눈물 쏟고 있는 나무가
나무의 말로 전한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과 너와 나의 불행이
평등해지길 기대하지 마라
그러나 끝끝내 평등해질 때까지
지금 이 시각의 날씨를 따라
얼음 냄새 진동하는 깊은 숲으로
왈칵 비처럼 쏟아져라

 

― 「삼십대」 중에서

 

    누구든 삼십대를 맞는 마음은 특별하다. 몇몇은 청춘이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십대에서 이십대가 되는 시간을 비롯해 생의 절기마다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하지만 ‘청춘’이라는 이름만큼은 삼십대에게만 주고 싶다. 이십대에서 삼십대로 막 건너가는 그 순간이 생에 거의 유일하게 주어지는 청춘의 환절기라고 생각한다. 청춘은 갔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가 바로 청춘이라는 말은 허언이다. 반면 청춘을 인지하지 못하는 청춘 또한 반쪽짜리다. 많은 사람들이 삼십대가 되어 새삼 청춘을 발견하고 비로소 청춘을 산다. 온전한 청춘은 빠르게 소멸되는 ‘청춘’의 속성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청춘’을 의심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이다. 삼십대의 몸은 여전히 젊음 속에 있으며 생을 통틀어 청춘이란 관념과 가장 치열하게 응전한다는 점에서 온전한 청춘의 시간이다.

 

    내게도 삼십대는 청춘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작별의 시간이었으므로 청춘의 시간이었다. 나 역시 삼십대를 맞으며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의 노랫말에 공감했지만, 삼십대를 보내며 그 노랫말의 단어 하나만 살짝 바꿔 주고 싶다. 요컨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속의 ‘이별’을 ‘작별’로 바꿔 주고 싶다. 나는 우리가 이별이라고 불렀던 거의 모든 것들이 사실 작별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이별과 작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그만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작별을 이별까지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과정 없는 결과처럼, 작별 없는 이별로 인해 우리는 불행해진다. 작별은 이별을 준비하는 것이며, 깊이 인사하는 것이고, 이별의 문이 열리기까지 저마다 한 생(生)을 창작한 것이다. 離(떠날 리) 자를 쓰는 이별과 달리 작별이 作(지을 작) 자를 쓰는 이유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는 이별이 아닌 작별의 시간 속에 있다. 한 사람을 기억하는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는 한, 사람은 이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작별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거의 전부다.
    생(生)이라는 말. 오늘 밤이 지상으로 엎질러지듯 매일 내게 너무 많이 쏟아지는 말. 나를 침묵하게 하는 말. ‘작별’은 거의 유일하게 ‘생’에 빗댈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별은 끝까지 차오른 생이 급기야 죽음 이후의 망각 쪽으로 흘러넘치는 것이라면, 작별은 이별 직전까지 한 생을 서서히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 밖으로부터, 이별은 반드시 온다. 알몸으로 태어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색색의 작별이라는 옷이다. 이별이 생과 생을 잇는 정류장이라면, 작별은 정류장 사이를 잇는 시간의 길이다.
    작별이란 말은 오늘밤을 정점으로 검게 스러지기 시작할 꽃의 이름이다. 작별은 지금부터 스러질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최대한 활짝 핀 꽃의 이름이다. 작별이란 꽃은 생을 가장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뜨거운 이마에 열꽃처럼 피어난다. 확실한 건 작별이 잦은 사람은 열정적인 사람이다. 생을 몇 배의 시간으로 사는 사람이다. 나는 시간 냄새를 풍기는 그런 사람이 좋다. 가령 근래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는 시간 냄새가 난다. 오래 슬퍼 말라고, 네가 살아 있는 한 너는 너의 가족과 함께 작별의 시간을, 그러니까 지금의 생을 ‘여전히’ 살고 있으며 아직 이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고백하고 싶다. 허락한다면 나는 너를 내 친구로 삼고 싶고, 내 애인으로 끌어안고 밤을 건너고 싶다고. 네 모든 울먹임과 속삭임을 한 움큼의 모래처럼 호주머니에 넣어오고 싶다고. 물론 호주머니 밖으로 꺼내 달빛처럼 반짝이는 그것을 지금 이 글을 읽는 네게 보여주려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다 흘러내리겠지만.

 

    작별이란 말이 좋다. 작별은 뚜렷한 계절이 아니며 계절을 잇는 환절기다.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 5월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을과 겨울 사이 11월 같다. 작별이란 말에는 이별이란 말과 다른 심박동이 있다. ‘작별하다’는 말은 마치 작사 혹은 작곡이란 말처럼 이별을 창작하는 것이다. 그 말에는 죽음이 이별을 싣고 떠날 리듬과 노랫말을 밤새 고심하는 진심어린 창작의 시간이 녹아 있다. 혹시 지금 행복을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작별의 시간을 훌륭하게 보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작별의 시간은 선물이다. 작별의 시간은 내가 네게,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다.
    작별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단언하건대 행운이다. 살면서 우리는 작별의 시간을 가질 기회조차 없이 이별을 떠안아야 할 때가 있다. 작별의 시간을 통해 삶의 근력을 키우지 못한 상태에서 안아야 하는 이별은 태산만큼 예측 못할 무게로 덮쳐온다.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지기 마련이다. 세월호 사건이 진정 아픈 것은 유족들이 작별의 시간을 한순간에 일방적으로 빼앗겼기 때문이다. 속수무책 뺏기기에는 작별의 시간은 너무나 절실한 것이다. 작별의 상실은 치명적인 일이다. 유족들은 이별을 먼저 떠안은 채 작별의 시간을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은 거꾸로 매달리는 형벌과 같다. 다시 봄이 왔다. 다시 작별은 시작된다. 나무나 꽃들 같은 식물들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작은 작별의 시간을 선물한다. 봄의 꽃은 작별 이후 더 무성한 나뭇잎을 피우고, 가을의 나무는 작별 이후 눈꽃을 가득 매단 넓은 공중을 낙엽 대신 매단다.

 

    작별이란 이별까지의 생의 전 과정이다. 누가 지금 이 순간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든 그들은 작별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작별은 꽃처럼 노랗고 잎처럼 푸르고 낙엽처럼 붉으며 눈처럼 새하얗다. 우리는 지금 작별의 계절을 살고 있을 뿐이다. 이별을 미리 걱정할 겨를이 없다. 작별로 인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작별을 얻지 못함으로 인해, 즉 작별의 상실로 인해 우리는 정말 불행해진다. 그러니 온힘을 다해 작별해야 한다. 나는 지금껏 작별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어쩌면 작별에는 그런 성분이 있는 것도 같다. 늘 최선을 다하지 못한 느낌이 들게 하는 성분. 작별만큼 삶의 냄새가 진하게 밴 것이 있을까. 나의 작별은 이별로 향하며 네게 건네는 뜨거운 ‘인사’다.

 

 

 

작가소개 / 김중일(시인)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가 있음.

 

 

   《문장웹진 3월호》

 

추천 콘텐츠

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