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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같은 소리(3)

  • 작성일 2015-01-01
  • 조회수 881

 

 


사랑, 같은 소리 (3)

 

몸은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로
뀌어진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이며,
가축의 무리이자 양치기다.

프리드리히 니체 1)

 

 

조재룡(문학평론가)

 

 

 

*

 

    에로스와 사랑, 그 잔인하면서도 모호한 관계에 관해서도 말을 아낄 수는 없다. “사랑의 극단적인 충동이 죽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 사드의 책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2) 바타유가 생성의 극점 에로스와 죽음의 극단 타나토스가 서로와 서로의 도움 없이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고 강조했던 대목을 상기한다. 이 양자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바타유의 지적을 좀 더 확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삶과 죽음, 육체와 영혼, 욕망과 금기, 말과 사유, 다수와 소수, 사회와 개인처럼, 하나를 다른 하나의 대척점이거나, 서로 별개의 것일 수 있다고 여겨져 온 이 두 짝의 개념들이 실상은, 별도로, 별개로, 오롯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절름발이에 불과하거나, 양면이 분명하지만 떼어내는 순간, 존재의 성립 가능성 자체를 상실하고 마는 동전이나 종이의 앞면과 뒷면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사랑을 매개로 차분히 따져 보면, 이 두 항 간의 분리 불가능성이 반드시 보장된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사랑이 몸과 마음의 벌어진 간극을 좁혀주고, 별도의 윤리나 도덕도 없이, 원래 하나였다고 긍정하면서 이 둘을 결속시키는 데 쉽사리 성공적으로 합류하는가 생각해 보면, 그게 우리 생각보다 그렇게 쉽사리 합의를 목전에 두거나 확신을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바타유는 ‘사랑의 극한 충동’에서 야기된 섹스의 작동 원리를 추적하면서, 이러한 충동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설파한다. 성애가 몰고 올, 저 아린 상처나 흔들리는 감정의 파장보다, 바타유가 정작 눈여겨본 것은, 그와 같은 상황에 돌입할 때의 짧은 순간에 표상되는 무엇이며, 느낌이나 감정과는 사뭇 다르다 할 이 표상의 순간, 솟아나는 어떤 현상이다. 그리고 내친 김에, 그는 이 짧은 순간이 사랑의 최고점, 사랑의 실질적 체험, 사랑의 유일한 형태, 구체적인 체현이라고 관념적 윤리주의자들에게 넌지시 경고의 메시지를 날리고, 나아가 그것이 실로 죽음의 체험과 다르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죽음의 현현과 죽음이 현재에 존재할 가능성을 일깨우고, 죽음의 양식에 진리의 면류관을 씌운다. 바타유가 말하려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합일은 사랑의 속성이 아니라, 섹스가 에너지의 과잉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오히려 무관하지 않다. “과잉은 필연적인 결과로 죽음을 초래하며, 정체됨(停滯)이 홀로 존재들의 불연속성(존재들의 고립)을 지탱하노라 약속”3)한다는 지적처럼, 과잉은 흥분을 앙양(昻揚)하고, 역동을 보장하러 뜻밖의 순간에 우리의 정신과 몸에 찾아든 신비롭기 그지없는 타자의 방문이지만, 어쨌든 소멸을 예정하기에 지속의 문제와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랑인가? 그렇지 않은가?

   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희창 옮김, 민음사, 2004, 50쪽.
   2)  G. Bataille, L'Erotisme, Les Editions de Minuit, 1957, p. 48.
   3)  같은 책, pp. 111~112.

 

 

    나는 감정과 감성이 물질적인 성질을 띤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 되었고, 온몸으로 그것들의 밀도와 형태뿐만 아니라, 내 의식의 제재를 받지 않는 그들의 독립성과 완벽한 행동의 자유를 느꼈다. 이러한 내면 상태에 견줄 만한 것들을 자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날뛰는 바다, 깎아지른 절벽의 붕괴, 심연, 해조류의 증식. 난 물과 불에 빗댄 비유와 은유의 필연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심지어 가장 닳고 닳은 표현조차도, 어느 날 그 누군가 실제 겪었던 것이다. 4)

   4)  아니 에르노, 『집착』(정혜용 옮김), 문학동네, 2005, 21쪽.

 

    타자와 나는 이 에로스의 순간에, 함께, 같은 침대 위에서, 죽음을 체험하는 동시에 서로의 합일을 일순간 경험하게 된다. 과잉 에너지에 의지해 죽음으로 달려가는 성애의 소리가, “온몸으로 그것들의 밀도와 형태”를, 아니 여기저기서 뿜어 나오는 그것들의 “독립성과 완벽한 행동의 자유”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압도적으로 압박해 오는 정념의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의 동공이 열리고, 호흡이 어려워지고, 맥박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쾌락의 극한은 숨쉬기조차 힘든 짧은 순간으로 채워지며, 바로 이 순간, 오로지 이 순간, 두 사람은 죽음과 쾌락이라는 정점 하나에 붙들려 잠시 하나로 고정되기도 할 것이다. “물과 불에 빗댄 비유와 은유의 필연성”을 결국 이해하게 되는 저 상승하는 힘과 소진되는 과잉, 빠져나간 열기와 날개가 없는 추락이 눈앞에 어른거리지 않는가.
    물론 에로티즘이 완성을 꿈꾸는 이 순간, 그러니까 이 죽음을 체험한 순간이 반드시 사랑을 보증하는 순간은 아니다. 각각의 신체 부위에 대한 감각을 토대로 이기적으로 작동하는 에로티즘이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합의, 그러니까 한 곳으로 함께 나아가자고 지혜를 모아 토론을 하거나, 사이좋게 합일점을 찾아내기 위해 협업을 하는 것도 아니며, ‘함께’ 조화를 추구하며 이질적인 쾌락을 뭉뚱그려보려거나 하나로 녹여내려고 상대방을 기다리거나 배려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길 바라면서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라고 말하는, 함께 하려는 마음가짐에서 생겨날, 예컨대, 공통의 원칙 따위를 궁리한다 한들, 이 에로티즘이라는 망나니가 어떤 원칙에 갇히고 또 복종하거나, 합리나 상식의 외투를 입고 눈먼 두 사람을 동굴 밖으로 안내하리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와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따로 헛돌아도 무어라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서로의 무능을 탓하며 꾸짖거나 원망할 수 없는 것이 에로스라면, 바랐던, 갈구했던, 상상했던, 크게 품었던 애초의 저 마음이 또 어땠건 간에, 이 에로스가 두 사람의 감각을 따로 놀게끔 나와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조장하고, 두 사람이 감각이 서로 자주 미끄러지게 두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개입하는데, 어떻게 이 에로스를 쫓는 두 사람이 공정한 게임을 진행할 뾰족한 수가 있을 것이며, 차분하게 사랑 따위나 논하면서, 껌을 씹고, 태연히 손톱을 깎고, 머리를 손질하고, 서로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기도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타자가 타자를 배려하고, 염려하고, 다독일 수 있겠는가? 타자의 몸이 성행위의 유일한 매개로 존재한다면, 에로티즘의 쾌락은 항상 저만이 향유하는 쾌락이며,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도 결국에는 찾아 나서려 작정하고 마는, 헛디딘 각자의 유토피아인 것이지,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무엇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사랑이 제 각각의 실낙원에 갇혀 버둥대는, 좀스런 새침이나 무관심한 체면과는 다른 것이라고,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며 산다. 사랑은 ‘우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 사랑은 ‘서로’의 결과물일 수 없다는 것일까? 김록의 시를 하나 읽는다.

 

 


그는 나를 사랑했네
나는 그를 사랑했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았네
그는 나를 사랑했을 뿐
나는 그를 사랑했을 뿐
우리는 서로 사랑할 틈이 없었네
우리는 자신의 사랑을 사랑하기에 바빴네
그는 나를 아직도

- 「구조 (構造) - 전문

 

    우리말에서 ‘서로’나 ‘우리’의 용법은 너무나도 다양하여, 사실은 아무것도 아닐 때가 태반이다. ‘우리’나 ‘서로’는 문법을 비웃고 발화를 무화시키는 단어로, 가히 난해함의 정수라 부를 만하다. 사랑만큼이나 모호한 ‘서로’나 ‘우리’라는 말은, 오로지 맥락 속에서만 제값을 돌올하게 매김 할 뿐인, 어떤 순간의 구조물 속에 놓여 잠시 붙들리는, 항구적으로 미끄러지는 속성에 기대는 까탈의 화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서로’ 무언가를 도모했다고, 함께했다고 생각해도, 혼자인 경우가 다반사이며, 함께하자는 말이 이기심을 제어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개의 사랑이, 하나를 배격하고서 끌어안으려는 둘, 즉 ‘우리’는, 주로 말하는 이가 저 자신과 듣는 이, 또는 저 자신과 듣는 이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로 쓰이거나, 실사(實辭) 앞에 놓여 말하는 이가 저 자신보다 아래인 사람을 상대로 자신과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고자 할 때 사용된다. 또한 ‘우리 마누라’나 ‘우리 애인’과 같은 표현처럼, 사회적으로 용인이 된 경우, ‘우리’는 공동체를 포괄하는 인칭이라기보다, 오히려 점유를 강조한,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으로 타자를 포섭하는 기이한 소유격의 반열에 올라, 유치함을 대변하는 언어 상징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쓰임을 고려할 때, ‘둘이 등장하는 무대’이자 ‘둘이 하는 게임’을 사랑이라 한들, 이 우리의 게임, 이 우리의 무대는 늘 불안하거나 모순의 형태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며, 김록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생리적 특성을 지닌 사랑에 대한 반격, 그러니까, 사랑을 대변하고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우리’의 연약함과 취약함, 가식과 불완전성을 고발한다.
    사랑으로 너와 내가 하나로 묶인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단단하지 못하며, ‘우리’라는 말 자체가 파놓은 애매모호함의 함정을 피해갈 도리도 없어, 너무 자주 한숨을 내쉬고, 진땀을 흘리고, 넘어지고, 당황하는 순간과 순간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록은 이렇게 너와 나, 즉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로, 사랑이라는 이유로 하나로 묶이곤 해도, ‘서로’를 사랑할 틈 따위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으며, 외려 자신의 사랑만을 ‘성급히’ 확인하거서 그런 후, 바삐 우리에서 빠져나오기에 여념이 없다고, 사랑의 근간인 ‘우리’, 사랑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인 우리, 그러나 사랑 앞에서 아무런 구속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헛도는 너와 나를 강제로, 잠시나마 묶기 위해 허방으로 내던진, 주의하지 않으면 그리 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형의 밴드와 같다고 말한다. 그것은 빈껍데기와 같은 둘이자 종종 육신을 하나로 마주하게 해주는 ‘우리’이지만, 한없이 겉도는 매정한 ‘구조’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사랑을 꿈꾸는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서로에게 보장할 수 없는 우리가 되어, 제 몸의 한 부분을 영리하게 만족시키고 사라질 뿐인, 그렇게 사라지고 조만간 다시 나타날 뿐인, 십 분에서 십 오 분짜리 우리인 것이다. 섹스가 끝난 후, 둘 사이가 돈독해졌다거나, 타자에 대한 고유한 감정이 생겼으며, 타자의 내부에 나의 영역이, 나의 내부에 타자의 공간이 마련되었다고, 그렇게 믿어 상대방을 구속하여 또 맥 빠지게 하고, 그렇게 믿거나 믿고 싶어 하면서, 또 다시 타인에게 제 멋대로 소유의 낙인을 찍기도 하면서, 혼자 이상한 관념으로 달아나기를 반복하는, 뻔뻔한 몇몇의 사람들을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자주 보았단 말인가? ‘구조’라는 말 역시 애매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어떤 대상이나 존재의 뼈대나 골격만을 의미하는 구조(structure)라는 개념은 대상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결속을 전제하는 시스템(system)과 달리, 요소들 간의 특별한 관계나 유대를 상정하지 않는다. 가령, 우리의 몸이 산소 25.5 % 탄소 9.5 % 수소 6.0 kg 63 % 질소 1.4 % 등의 분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 지식을 통해 우리는 알고 있으며 또 그렇게 말하지만, 이 구조적 사유가 몸의 작동 방식을 설명해주거나, 몸에다가 영혼을 소환해내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

 

 

*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섹스를 하고, 밥을 먹고, 함께 살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려, 공감하려 하고, 우리들 앞에 놓인 삶의 무늬와 그 색깔을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없는 시간, 부족한 시간, 허덕이는 시간을 쪼개어 공유하거나 공비(公費)하려 애쓰고, 서로가 서로에게 은밀한 메시지를 보내며 사적인 제 세계관을 털어놓거나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기도 하고, 그의 주장을 반박하거나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제가 뱉어낸 말을 후회하기도 하지만, ‘우리’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모든 일들은, 가만히 따지고 보면, 실로 각자의 입장을 확인하고,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허공에 내던지고, 각자의 생각을 공허하게 발설하고, 각자의 몸을 놀려 제 몸의 이기심을 취해 오고, 각자의 밥그릇을 비우고, 각자 살고자 하는 제 삶을 살아 나가고, 자신을 비추는 거울 앞에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주절거리고, 각자의 고통을 상대에게 무책임하게 투척하고, 각각의 의견에서 일반적인 동의를 끌어내길 바라고, 각자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서 뱉어낸 제자신의 말에 확신을 덧입혀 이해했다고 믿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는 오로지 구조적으로만 각자에게, 우리 자신의 각자에게 충실하면서 ‘서로’라는 말을 서로에게 던져 올가미를 씌우고, 개별 구조물이 빚어내는 일시적이고, 이질적이고, 집요하고, 이기적이고, 참담하고, 폭력적이고, 일방적이고, 주도면밀한 기만에 눌어붙고, 착각에 빠진 황당하고도 숙성되지 않은 견해를 갖고서 뿌듯해하고, 타자와의 충돌에 가담하여 지혜롭지 않은 지혜와 옳지 않은 옳음으로, 이타적이지 않은 이타심과 배려 없는 배려로, 외로운 공동체를, 외롭게, 그러나 외롭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마음대로 궁굴리며, 그것을 심지어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사랑은 무언가를 파는 행위이며, 무언가에 붙들리는 행위일 뿐이라는 것일까? 그 가운데 가장 치졸하고 악질적인 것은 한 눈에 반했다고 말하는 사랑, 눈먼 사랑이다. 그렇게 눈에 붕대를 동여맨 사랑이, 여기저기 불려나올 때, 앞 못 보는 자가 제 안위를 위해 휘두르는 맹목의 지팡이와도 같은 사랑은 폭력의 또 다른 말이고, 개인의 정신적 착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행위의 지리멸렬, 자기 자신이라는 모호하고도 주관적인 기준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럴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음에도, 누군가를 잰 걸음으로 뒤쫓는 이 추격전과 이 훔쳐보기의 관음증을 사람들이 용인하는 것은, 삭막한 이 세계에서 낭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인위적인 자책과 그것마저 없으면 너무 쓸쓸하다는 식의 황당한 추정에 근거에 허술하게 붙잡아 둔 위무 정도도 허용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지내야 하는 우리의 삶 자체가 너무 너절하고 비루하고 건조하고 밋밋하고 씁쓸하고 처참하고 재미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물원 철창에 가둬 놓고 그 우리 밖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기 딱 좋은 모든 형태의 행위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아침 우리의 안방을 찾아오지만, 이 드라마는 그러나 지겨운 반복 같은 것이지, 사랑이 아니다. 거기에는 사랑 대신, 감정의 소비, 시간의 낭비, 개인의 카타르시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위와 선망이 자리할 뿐이다. 어찌되었건, 첫 눈에 반했다고 생각한다면, 필시 있지도 않는 허상에 붙들린 정신 착란의 발현일 것이며, 이 착란을 타자에게 덧 띄워, 오로지 그 이미지만을 보고 은밀하게 즐기려하는 이기적인 행위이자 착각이자, 골려주고 싶은 심산과 다르지 않은 심리적 착취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몹시도 고결하다고 믿는 동시에 불확실성을 감추지 못하는 공상과 현실과 밀접한 영역에 거주하는 무엇인가로 사랑을 손에 쥐었다는 착각 속에서,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붙잡고 허우적거리며, 우리 모두는, 흥분제나 종교와도 비슷해 유토피아를 대신할 이 일회용품의 지옥을 얻기 위해서, 오늘도 불모의 모래사막을 건너려고 불가능하고도 서툰 걸음을 힘겹게 내딛고 있는 운명의 소유자들이며, 그러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의심과 경멸의 눈초리를 흘겨 보내는 시선을 한사코 거부하려는 자만에 찬 사람들이다. 자아만을 강화시키는 나르시시즘, 욕망이라는 전차 위에 자발적으로 올라타는 충동, 착각의 극대화로 소급된 리비도의 빈번한 전이, 우상을 키우고 숭배를 조장하여 위로받는 초자아의 낭만, 삶이라는 룰렛 위에서 선택된 한 대상에게 반복적으로 특수한 형태의 자기만족을 지속하려는 유아기적 심리, 과연 이런 것들은 온전히 사랑일 수 있을까?

 

 

    거의 모든 인간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정치]에 있어서도 다정한 결합이란 오해의 산물이다. 이런 오해란 곧 쾌락이다. 사내는 외친다. “오! 나의 천사여!” 여자는 속삭인다. “엄마! 엄마!” 그리고 이 두 어리석은 것들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 건널 수 없는 심연, 전달 불능의 이 심연은 극복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다.

- 보들레르, 『내면일기』에서 -

 

    보들레르가 가령 “사랑하는 욕구라고 인간이 고상하게 부르는 것은 고독에의 공포이며 외부의 육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잊고픈 욕구”라고 말할 때, 나는 이 미친 문장을 쓰기 위해, 그가 항상 다른 세계에 있으려 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꼼짝없이 씁쓸함에 붙들린다. 사랑의 메커니즘에 대해 주구장창, 우리가 듣고 싶어 환장한 말들을 주억거리는 현대 철학자들의 권고나 사랑이라는 말로 제 눈을 들어 어딘가에 고정해 놓은 공통의 지평선이 둘의 관점에 따라 완벽하게 다르고 설파하는 심리학자들보다, 보들레르는 훨씬 이전에, 사랑의 실현 불가능성과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은 아닐까? 매번 변하는 것 같고 유연하며, 상대적이고 때론 조화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이렇게 사랑은 필연적으로 독선적이며, 그렇기에 어딘가 잠시 고정되었다가 곧 어디론가 미끄러지는 기이한 운동이다. 미끄러진 것이 한 곳에 머물러 고이면, 어떤 도식이 생겨나게 되며, 이 도식은 물론 사랑이 아니라, 친애가 되거나, 욕망의 형태로 분출된(될) 행위의 개연성을 끌어안을 뿐이다. 어쩌면 사랑보다, 친애가 더 선하고 훌륭한 것일 수 있으며, 욕망이 사랑보다 더 구체적이고 솔직한 것일 수 있다. (남자들에게서) 섹스로부터 사랑을 견인해낼 방법은 없는 것일까?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들에게 어떤 마법을 부려, 전기 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참새나 질척한 빗길에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보고도 마구 흥분하게끔 그들을 개조하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남자는 사랑에 있어서 사람이기 어렵다는 말일까? * (계속)

 

 

 

   《문장웹진 201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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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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