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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인터뷰 나는 왜 조해진 소설가 자선 단편]PASSWORD

  • 작성일 2014-10-01
  • 조회수 1,542

 

[공개인터뷰_나는 왜]
[조해진 소설가 자선 단편]

 

 

PASSWORD

 

 

 

조해진

 

 


 

    1

 

    서울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서울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나 같은 불우한 인간을 위해 뭐든지 해줄 수 있다는 식의 과잉된 친절과 배려를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내게는 자주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 자리가 없는 곳, 내가 없을 때만 비로소 완벽한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될 것 같은 곳, 하여 나로 인하여 인위적인 평온을 가장해야 하고 그 가장의 시간이 불편하다고 호소하고 있는 듯한 곳…… 이런 상념들이 명색이 내가 태어난 곳에 대한 첫인상이라는 것을 나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물론 나는 나의 잘못을 알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기에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면 무언가 억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냉장고에서 찬 맥주를 꺼내 마시곤 했다.
    만약 그때 나 역시 다른 행사 참가자들처럼 생모를 만났다면 안에서부터 문을 닫아 놓은 것 같은 서울에 대한 나의 첫인상 따위는 잊은 채 다만 뜨거운 감격 속에서 귀국할 수 있었을까. 전 세계 한국계 입양인들의 네트워크라는 그 비영리 단체에서 마련한 2주간의 행사 기간 동안, 그러나 나의 생모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단체에 속한 스태프들이나 대학생 위주의 봉사단은 그것이 마치 그들의 잘못이나 실수라도 되는 듯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생모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대신 돌아가신 생부의 누나, 그러니까 내게는 고모가 되는 사십대 후반의 여성이 나를 찾아오긴 했다. 12년 만에 만난 고모를 나는 알아보지도 못했지만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숙련된 배우처럼 더없이 사실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입양되기 전까지 나는 고모 집에서 고모의 딸들과 함께 살았다. 친자포기각서에 도장을 찍은 건 생모였겠지만 키우지도 못할 아이를 처분하도록 생모에게 강요한 사람은 고모일지도 몰랐다. 고모에게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만 그녀는 네덜란드어는 물론 영어도 할 줄 몰랐기에 우리 사이에 소통될 수 있는 언어는 없었다. 게다가 남은 행사 기간 동안 나를 만나러 올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못했다. 그래서였는지 극적으로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던 그녀는 세 시간 후, 조금은 어색하게 내 어깨를 한 번 안아 준 뒤 황급히 행사장을 떠나갔다. 보이지 않는 줄에 연결된 듯 행사장 출구를 빠져나가며 흘끗흘끗 뒤를 훔쳐보던 그녀의 매끄럽지 않은 행동이 내 마음을 이유 없이 아프게 했다.
    남은 행사 기간 동안, 다른 참가자들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때 나는 정오까지 늦잠을 잤고 밤에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호텔 근처를 배회했다. 서울의 밤거리는 낮이 주는 상념보다 훨씬 더 나를 불편하게 했다. 개별성이 감지되지 않는 비슷비슷한 사람들의 외투 안쪽엔 나와는 다른 인간임을 표시해 주는 라벨 하나씩이 붙어 있을 것 같았고, 거리의 지나치게 밝은 조명은 나 같은 라벨 없는 인간을 단박에 찍어낼 듯이 섬뜩하면서도 나태하게 빛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밤의 산책을 그만뒀다. 그 대신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켜놓고 호텔 침대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텔레비전 속에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한국어로 웃고 떠들고 울고 화를 냈다. 14년 전까지 나 역시 저 언어를 혀 안에 숨겨 두고는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마음껏 꺼내어 자유자재로 사용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내게는 그 모든 소리가 기계들의 윙윙대는 소음처럼 무의미하게만 들렸다. 희미하게라도 기억이 나야 하는데 간단한 인사의 표현조차 기억해 낼 수 없다는 것이 언제나 새삼스러웠다. 내 안에서, 어쩌면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곳에서, 강하게, 내 살아 있음보다 강하게, 한국이라는 곳이 나를 거부하듯 나 역시 한국어를 거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 날엔 한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공포감에 몸을 떨기도 했다. 나는 물론 그와 똑같은 분량의 공포를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결국 행사 마감일 나흘 전,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 말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짐을 쌌다. 생모를 만난다면 다시는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혼자서만 은밀하게 키워 온 양부모를 향한 배반의 희열도 짐과 함께 착착 접어 가방 속에 밀어 넣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다시 네덜란드행 비행기를 탔다.
    네덜란드로 돌아간 후에는 양부모와의 약속대로 J를 위한 수술을 받았고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그들이 보내준 돈으로 대학에 다녔다. 각기 다른 성 정체성을 갖고 있는 두 명의 애인을 사귀었고 두 번의 이별로 바닥까지 마음을 소비해 보기도 했다. 대학은 한 학기를 남겨 놓고 그만뒀다. PASSWORD. 암스테르담 외곽에 위치한 세무사 사무실에서 파트타임 직원으로 일하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는 전차 안에서 신문 한귀퉁이에 나는 그렇게 썼다. 두 번째 연애도 실패로 끝났을 무렵이었다. 그때는 또한, 다이어리의 ‘이 달의 계획’ 마지막 줄에 언제나 예외 없이 ‘자살’이라는 단어를 연필로 꾹꾹 눌러썼던 시절이기도 했다.
    ‘PASSWORD’라고 쓴 신문을 가슴에 안고 퇴근한 날로부터 석 달 후, 그리고 나는 노트북을 켜고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2

 

    10년 만에 다시 만난 고모는 열여덟 살의 나를 끌어안았을 때처럼 뜨거웠다. 너무 격정적인 포옹으로 공항 로비를 오가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한 번씩 곁눈으로 쳐다보며 지나가는데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고모는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고모 곁엔 고모와 닮았으나 그녀의 젊은 날과는 그리 겹쳐지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두 명의 여자들이 서 있었다. 다행히 나는 그들과 나를 연결시킬 수 있는 몇 개의 장면들을 어렴풋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가령 M이 소꿉놀이를 하면서 벽돌 가루를 삼키는 바람에 밤새 설사로 고생했던 일이나
    내가 실수로 D가 가장 아끼는 종이인형의 목을 부러뜨려 서로의 머리채를 쥐어 잡은 채 심하게 싸우기도 했던 어느 저녁나절, 그리고 덤프트럭 뒤에서 셋이 나란히 엉덩이를 내밀고 오줌을 누었던 장면 등이 2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와 내 머릿속에서 조심스럽게 재생됐다.
    고모와의 긴 포옹이 끝난 후, 나는 시내의 저렴한 호텔에 묵겠다고 말했지만 고모와 두 사촌은 내 캐리어 가방을 끌고 공항 밖의 야외주차장 쪽으로 앞장을 섰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잠깐의 휴가 동안만 한국에 머물 거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내가 이미 회사를 그만둔 상태이며 이번 방문 기간은 얼마든지 길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결국 나는 설명할 기회를 잃은 셈이었다.
    시내 한식집에서 값비싼 정식 코스를 먹은 뒤 우리는 고모 집으로 갔다. 내 예상과 달리 고모는 가난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울에서는 부자들만 소유할 수 있다는 강남의 고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인 23층 고모의 아파트로 들어선 나는 사촌들의 안내로 M의 방에 짐을 풀었다. M은 전날 몇 벌의 옷과 소지품을 D의 방으로 옮겨 놓았다고 했다. 나보다 한 살 위인 M의 방은 단출했고 책꽂이엔 각 나라의 여행 책자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M은 2년 전, 살인적인 경쟁률을 뚫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서울 외곽에 있는 정부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D는 집 근처의 보습학원에서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D는 나와 고모 사이의 소통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해석 가능한 각자의 언어로 옮겨 주는 걸 자신의 할 일이라고 여겼다. 간간이 들려오는 M의 영어 발음이 훨씬 자연스러웠지만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고모가 하는 일은 정확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나는 D로부터 고모가 강남역 근처에서 작은 술집 하나를 경영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고모는 10여 년 전에 이혼했고 그 위자료로 술집을 개업했다는 것이다. 그 시기가 내가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와 맞물렸기 때문에 충분히 나를 챙겨 주지 못한 걸 두고두고 떠올리며 후회했노라고도 했다. D의 얘기를 모두 정성스럽게 경청한 후, 나는 떠듬떠듬 고모가 내 생모와 연락하며 지내는지 물어보았다. D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곁에 있던 M은 영원의 시간 속으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듯 고개를 숙인 채 단단한 침묵을 지켰다. 이후에 M이나 D가 고모에게 생모를 만나고 싶다는 내 간접적인 의견을 전달해 주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엔, 그 누구도 더 이상 내 생모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국에 다시 온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밤이 깊어지고 서로의 눈에서 하루분의 피곤을 발견한 우리는 한국어와 영어로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M의 방으로 들어온 나는 캐리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양부모에게 이메일을 썼다. 보내진 못했다. 일종의 계약관계였던 우리는, 10여 년 전 열아홉 살의 내가 J와 함께 수술대에 오른 이후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었다. 이미 정리된 관계에서 내 처지와 현 위치를 설명한다는 건 결국 쓸데없는 책임감과 부담감만 요구하는 것임을 모른다 할 수는 없었다. 노트북을 끄고 다이어리를 꺼내 ‘이 달의 계획’ 마지막 줄에, 그리고 나는 천천히 썼다. PASSWORD. 오랜만에 ‘자살’이라는 단어가 입력되지 않은 다이어리는 가벼워서 좋았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으나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한국을 다시 찾은 첫날, 나는 그렇게 M의 방에서 새벽 늦도록 뒤척였다.

 

 

    3

    고모 집에서 가장 먼저 하루를 여는 사람은 M이었다. M은 6시 반쯤 일어나 한 시간 정도 출근 준비를 한 후 8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섰다. 출근 시간은 9시였지만 8시 이후의 북적이는 지하철이 싫어서 조금 이르게 출근하는 거라고 M은 말했다. M이 출근하고 세 시간 정도 지나면 D가 방에서 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D는 씻는 데만 30분 이상을 소비했다. 그러나 느긋하게 시작된 그녀의 출근 준비는 정신없이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다가 급기야 간다는 인사도 없이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모습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다른 식구들이 깰까 봐 발뒤꿈치를 살짝 올린 채 조심스럽게 거실과 욕실을 걸어 다녔던 M의 출근 전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고모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고모는 새벽 5시가 하루의 끝으로, 정오가 하루의 시작으로 입력되어 있는 자신만의 시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고모는 정오부터 한 시간가량 청소기나 세탁기를 돌리면서 보냈다. 그럴 때, 나는 M의 방에서 나와 조용히 고모 근처를 서성였다. 조금만 서성이다 보면 고모는 몸짓과 눈짓으로 내가 할 만한 집안일을 지시해 주곤 했다.
    오후 2시쯤 고모마저 출근하고 나면 그때부턴 무거운 침묵이 아파트를 채우게 된다.
    처음 일주일 정도는 주로 M의 책장에 꽂혀 있던 여행 책자를 들춰 보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비가 오는 날 M의 방에 앉아 있으면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방을 채 빠져나가지 못하고 책상 뒤나 침대 아래 숨어 있다가 비의 습기를 만나고 나서야 길 잃은 유령들처럼 스멀스멀 스며나오는 그 냄새가 나는 싫지 않았다. 가족들 몰래 담배를 피우며 M이 대체 어떤 시간들을 흘려보냈을지 내게는 늘 미스터리였다. 여행 책자에도 M의 미스터리는 있었다. 출판사도 제각각이고 여행지도 유럽 유명 도시부터 아프리카의 오지까지 다양한 그 책자들을 M은 대부분 정독한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취미는 여행이 아니라 오로지 여행 책자 읽기였다. 그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고 사흘 이상 집을 떠나 본 적도 없다 했다. 그 사흘의 시간조차 학교나 회사가 의무적으로 강요한 단체 여행이나 출장에 지나지 않았다. 한 권의 여행 책자를 훑고 나면 그 책자의 부피만큼 M을 알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내가 독해한 건 알파벳으로 표기된 지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책자를 덮을 때마다 거기에 들어 있던 모든 활자들이 M을 알아 가는 데 꼭 필요한 코드들이 되어 내 머릿속에 입력되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은, M이 담배를 피우다 말고 온몸을 옹송그린 채 흐느껴 우는 모습을 그려 보기도 했다. 다만 상상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장면의 테두리에 느슨히 기대어 서 있는 내내, 나는 심각하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오후 2시 이후부터 가벼운 산책을 다니기 시작한 건 한국에 온 지 2주째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아파트 단지 주변은 걷기에 좋았고 단지 입구에 있는 대형 지하상가엔 구경할 것이 많았다. 직장을 그만둔 데다 한국에 오는 통에 많은 돈을 쓰긴 했지만 나는 마트에 들를 때마다 과일이나 생필품 같은 걸 사곤 했다. 실제로 내 통장은 아직 무거웠다. 양부모는 여전히 매달 15일만 되면 내 소유의 통장에 약간의 돈을 송금해 주고 있었다. 기분이 바닥일 때는 돈을 보내고 있는 그들을 내 마음속에 세워 둔 채 한 명씩 총으로 쏘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보내주는 돈을 늘 필요로 했고 언제나 꼭 필요한 곳에 남김없이 쓰곤 했다. 기분이 평소보다 좋아서 스스로도 어색하다고 느끼는 날엔, 그들에게 더 이상의 송금은 필요 없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는 나를 허공에 세워 두고는 조용히 돌아섰다. 버림받은 내 마음속의 나는 총상보다 더 큰 고통으로 ‘No’를 외치며 오래오래 울부짖곤 했다.
    그 아이를 만난 것도 오후 2시 이후에 시작되던 그 가벼운 산책길에서였다. 평소처럼 아파트 단지와 지하상가를 돈 뒤, 운동이라도 할 겸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여 고모의 아파트로 올라가다가 나는 그 아이와 맞닥뜨렸다.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였다. 작고 깡마른 꼬마가 속옷 차림으로 22층과 23층 사이의 계단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반복적으로 때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꼬마의 몸을 부여받고 환생한 시시포스와 조우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머리카락이 거의 나 있지 않은 아이의 머리는 구타 탓인지 여기저기 멍이 들어 있었고 실루엣도 울퉁불퉁했다. 아이의 손에는 놀라울 정도의 힘이 들어가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그 손이 머리를 내리칠 때마다 빈 복도에는 퍽 하는 메마른 소리가 울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손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무엇도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고 머릿속에 대고 명령했지만 기억의 회로는 이미 뒤죽박죽 엉켜 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내가 생모에 대해 언급하자 반사적으로 침묵하던 M의 옆모습이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선명한 이미지로 플래시백됐다. 위로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그 무엇도 위로해 줄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해야 했던 그 순간의 영원성을 M은 어떤 방식으로 견디고 있었을까. 문득, 아주 간절히 나는 M이 보고 싶어졌다.
    마침 중년 여인 한 명이 계단을 통해 아이가 있는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뒤로 뻗대는 아이를 여인은 그저 무덤덤한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이내 아이의 양쪽 겨드랑이에 팔을 끼웠다. 소리 없는 그들의 고투가 1분 정도 지속됐다. 여인의 가슴을 밀치는 아이도, 그런 아이를 끌어당기는 여인도 말이 없었다. 아이는 아직 말을 제대로 못 하는 듯했고 여인은 점잖은 언어로 아이를 타이르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터득한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여인은 익숙한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흰색의 긴 천을 꺼내 아이의 두 팔을 뒤로 묶고는 아이를 번쩍 안은 채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여인이 아이를 안고 들어간 곳은 고모의 아파트 바로 앞집이었다. 나는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 집의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 앞의 광포한 시간은 이미 뒤를 향해 정신없이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고, 머릿속의 서랍 하나가 열리면서 튕겨 나온 수많은 이미지 파일들은 마술사의 카드들처럼 어지럽게 섞이고 있었다. 기억의 회로가 닿는 곳이 그날들임을 감지한 내 마음속의 내가 두 손으로 머리통을 감싼 채 목 놓아 울부짖었지만 막무가내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그 기억들을 내 힘으로는 막아낼 수 없었다.

 

 

    4

    기억은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다. 열두 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그곳에 처음 발을 내디딘 순간, 내 존재는 오직 공포로만 대체되었다. 내가 곧 공포였고 공포가 곧 나였다. 거인의 세계에서 걸어 나온 듯한 두 명의 키 큰 외국인이 내 한국 이름이 새겨진 피켓을 들고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나를 피켓에 써놓은 삐뚤빼뚤한 한국 이름이 아니라 ‘베로니크’라는 낯선 이방의 이름으로 불렀다.
    양부모 집에는 내 방이 있었고 향긋한 빵 냄새가 있었으며 조금은 병약해 보이는 금발의 소녀도 있었다. 그녀가 J였다. 양부모도 J도 대체로 내게 친절했다. 그리고 그 친절함 뒤에는 그만큼의 무관심이 그림자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나를 무시하지도 않았고 명목 없는 구박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도 않았다. 절제된 행동 속에는 허술하게라도 감춘 적의가 없었기에 불필요한 경계심으로 예민해질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한국에서 쓰다 남은 여분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전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새로운 인생을 배당받은 기분이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내가 있는 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판단하지 못해 한참을 두리번거려야 했고, 요의로 새벽에 잠이 깰 때면 문 밖이 곧 끝없는 낭떠러지로 이어질까 봐 감히 방문을 열어 보지도 못했다. 그것이, 뿌리가 뽑힌 자의 운명이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J보다는 내가 더 양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에 시달리게 됐다. 단기간에 네덜란드어를 익혔고 작문이나 수학 성적이 나온 날엔 칭찬뿐인 시험지를 어서 빨리 양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물론 내가 남들보다 탁월하게 잘하는 것이 생길 때마다 양부모는 적당히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 양쪽 뺨에 짧은 키스를 해주었다. 하지만 양부모의 그런 애정 표현은 내 계산보다 항상 모자랐고 성의가 없었다. 사소한 실수나 잘못을 저지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집의 누구도 내게 화를 내지 않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주의를 주지도 않았다. 실수로 수학 문제를 하나 더 틀린 날, 나는 학교 화장실에서 내 뺨을 세게 때렸다. 너는 정말 아무 쓸모없는 아이구나. 뺨은 곧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나는 나의 체벌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더 크고 더 확실한 체벌을 내려야 했다. 손님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잘못된 어휘를 사용한 날엔 플라스틱 자로 내 종아리를 때렸고, 양어머니의 유리컵을 깬 날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유리 조각으로 허벅지를 찔렀다. 그리고 이제는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혼자만 있는 공간에선 어김없이 이어졌던 스스로를 향한 언어적 학대……. 문제의 심각성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J였다. J는 어느 날 양부모를 데리고 나를 감시하다가 내가 제도용 칼을 꺼내 그날의 실수를 벌주려던 순간 내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양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울먹였고, 양아버지는 그런 양어머니를 보듬으며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자신에게조차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교과서적인 훈계를 남기고 내 방문을 닫은 사람이 그들 중 누구였는지도 이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길었던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나는 나의 잘못과 실수를 용납할 수 있는 관대함을 배우지 못했고, 그랬기 때문에 체벌도 멈출 수 없었다.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에야 스스로가 스스로를 벌주어야 했던 나의 체벌은 끝났다. 양부모의 슬픔과 J의 만류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오로지, 내 체벌의 무의미함을 인정해야 했던 그 일 때문이었다.
    양어머니는 J를 낳은 이후로 심한 신부전증을 앓았고 양아버지는 그런 아내에게 오래전 신장 하나를 떼어 주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양어머니는 언젠가 J도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됐다. J에겐 형제가 없었고 양부모에겐 신장을 부탁할 만한 친척이 없었다. 양아버지는 양어머니의 과장된 불안을 조금이라도 잠재워 주고 싶어 J와 같은 혈액형의 아이를 입양하기로 했다. 입양한 아이의 신장을 친딸에게 이식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아니, 그들의 건강한 양심과 독실한 신앙심이 그들로 하여금 그 진의에 눈멀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신장을 이식하려면 혈액형만 맞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형까지 적합판정을 받아야 했고 그 확률은 오로지 신의 주사위만이 알 수 있는 거였다. 예감이 빗나가지 못하고 결국 J도 본격적으로 신부전증을 앓기 시작하면서 양부모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일종의 우울증 처방약으로 데려온 나에게 그들은 마지막 판돈을 걸 수밖에 없었다.
    내 조직형 검사가 나온 날, 양부모는 병원 복도 간이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신의 은총을 받은 선량한 사람들의 위대하고도 감동적인 기적이 마침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한 발 떨어져 벽에 기대 서 있던 열다섯 살의 나는 병원 복도 창을 통해 들어오는 봄 햇살을 건너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있던 환자복 차림의 내 또래 남자 아이가 창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는 손바닥으로 나비나 늑대 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게 선물해 주었다. 어딘가 치명적으로 아픈 사람들은 어디서든 그렇게 서로를 쉽게 알아보고 위로를 해준다는 사실이 나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한참 후에야 의자에서 일어난 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J를 위해 신장 이식 수술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내게 물었다. 여전히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를 조율할 줄 아는, 신중한 예의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신이 성의 없이 내던진 주사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나는 순순히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사실 그들의 질문은 ‘예스’ 외에는 대답할 말이 없는, 질문을 가장한 정당한 요구에 지나지 않았다. 순간, 어디든 전화를 걸어 나를 알고 있느냐고 묻고 싶은 욕구를 참기 힘들었다. 누구든 나를 안다고 한다면 어서 빨리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나를 좀 데려가라고, 그래야 하는 거라고 열다섯 살의 소녀답게 떼를 쓰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버림받은 이후 처음으로 생모가 그리워졌다.
    하지만 내가 전화할 곳은 없었고 한국을 떠날 때부터 따로 연락처를 주지 않은 생모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짐을 쌀 수도 없었다. 바뀐 것은 단 하나, 그날 이후 체벌이 끝났다는 것뿐이었다. 흉터는 빠르게 아물어 갔고 체벌이 빠진 일상은 덤덤하게 흘러갔다. 아픔이 있을 때 그 아픔을 즉각 내 몸에 남기는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았기에 나를 훑고 지나간 아픔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을 소비하게 되었다는 것 외에는 정말이지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건너오고 나서야 ‘왜?’를 되뇌는 나를 발견하긴 했다. 아무도 상대를 해주지 않는 빈 벌판에 서서 절대 진리에 의심을 품고 있는 불행한 철학자처럼 나는 침착하고 골똘하게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럼에도 끝내 내가 다만 누군가의 삶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나면, 나는 내 가슴속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던 양부모와 J를 꾸역꾸역 꺼내 놓고는 한 명씩 한 명씩, 총으로 쏘았다.

 

 

    5

 

    그날 저녁 고모는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했다. 고모가 집으로 오기 전까지 나는 D에게서 앞집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D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하나같이 놀라운 것뿐이었다. 그 애는 꼬마가 아니라 이미 사춘기 무렵의 소년이었고 ? 하지만 D도 소년의 정확한 나이는 알지 못했다 ? 가족도 없이 간병인 아주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으며, 부모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는 한 달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소년을 보러 올 뿐이라고 했다. 왜, 라고 묻자 장애 때문일걸, 옆에서 M이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소년은 유전자의 장난으로 다운증후군 환자로 태어났고 그 탓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소년의 부모는 그런 자식이 부끄러워 익명성이 보장되는 아파트의 꼭대기 층에 가둬 놓은 것이다. 탑에 갇힌 라푼젤은 지나가는 왕자가 구원해 주었으나 강남의 고가 아파트 23층에 사는 소년은 구원을 꿈꿀 수조차 없다. 이 세상 전체가 소년에겐 탑일 테니까.
    “그런데 자기 머리는 왜 때리는 거지?”
    다시 물으며, 나는 어쩐지 M은 오래전부터 소년과 친구처럼 지내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기 머리를 때리는 건 장애 때문도, 스트레스 때문도 아냐. 그것 외에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 길이 없어서 그래.”
    M이 제법 유창한 영어로 긴 문장을 구사해서인지 D는 우우, 입술을 모아 장난스럽게 야유 같은 감탄의 표현을 했다. 나는 D와 함께 웃으면서도 또다시 영원의 시간 속으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M의 침묵하는 옆모습을 흘끗흘끗 훔쳐보았다. 그날 M과 D는 나를 위해 편지 한 장을 써주었다. 우선 한국어로 내용을 쓴 다음 글자 하나하나에 영어로 발음을 단 편지였다. 간병인 아주머니도 좋아할 거야. 마지막으로 D가 용기를 주었다.
    “여기 앉아 봐라.”
    그리고, 여느 날과 달리 밤 11시가 되기도 전에 집에 도착한 고모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으며 가벼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고모의 충혈 된 눈과 상심한 듯한 표정에 나는 불안했다. 소파에 누워 있던 D는 은근슬쩍 나와 고모 사이에 끼어 앉으며 통역을 준비했고 주방 쪽으로 걸어간 M은 식탁에 앉아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꼭 엄마를 만나 봐야겠니? 라고 고모가 물었노라고 D가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D의 통역 없이도 고모의 입에서 흘러나온 ‘엄마’라는 단어만은 단박에 알아들었기에 고모가 하고 있는 말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 어딘가 불편하고 이유 없이 슬퍼졌는데, 그 불편한 슬픔이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인지는 감히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엄마라고 불리는 그 사람을 꼭 만나야 한다는 것,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이 도시 어딘가로 들어갈 수 있는 내 고유한 번호를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거라는 것, 오직 그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몸에서 나왔고 그녀는 내 뿌리였다. 나는 나의 근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내가 힘을 주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고모는 잠시 뚫어지게 나를 바라봤다.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하지만 그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을 가능하다면 영원히 미루고 싶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고모가 몹시 떠듬거리는 말투로 내게 무언가를 말했다. 나는 다급하게 D를 건너다봤다. D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D가 차마 통역하지 못하는 고모의 말을 물론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의 생모는 이번에도 나와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사물을 인지할 수 있었던 어느 날부터 나의 눈에 생모는 보이지 않았었다.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생부의 섬세한 눈빛도, 저녁상 앞에 앉을 때마다 이유 없이 나를 부끄럽게 했던 젊었을 적 고모의 싸늘한 시선도, 나와 장난치기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M과 D의 순박한 웃음도, 심지어 이제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고모부의 머리숱 적었던 매끈한 이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생모의 얼굴, 그녀만은 내 기억에 없다. 그녀는, 두려웠던 것일까. 20여 년 전에 탑 속에 가두고 지워버린 자신의 아이가 탑 밖으로 손을 내밀어 사랑을 구걸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게 할 만큼 무서웠던 것일까.
    어느새 M이 예쁘게 깎은 사과를 접시에 담아와 내 곁에 앉았다. 그녀는 그것만이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의 전부라는 듯, 포크로 사과 한 조각을 찍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사과를 받는 대신 M의 창백한 손을 잡았다. 이 집에서 내게 진실을 얘기해 줄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내 생모는 범죄자야? M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이야? 이번에도 M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혹시 심각한 병에 걸려서 거동조차 못 하는 거야? M이 또다시 고개를 젓는 것을 보기도 전에 나는 M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모두 아냐. M의 나직한 음성이 귀가 아니라 내가 기대고 있던 그녀의 어깨를 통해 들려왔다. 말해 봐. 그럼, 너무 먼 곳에 살아? 술이나 마약에 중독된 건가? 설마 기억상실증은 아니겠지? 연이어 쏟아지는 질문에 M은 더 이상 답변을 하지 않은 채 심하게 떨리고 있던 내 어깨를 보듬어 주었다. 고모는 돌아앉았고 D는 화장실로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누구라도 깨주길 원했지만 우리를 감싸고 있는 침묵은 견고하기만 했다. 울고 싶으면 울어. M이 내 귓가에 나만이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속삭였지만 나는 생모 때문에 눈물을 흘릴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저 너무도 쉽게 내 감정을 자기연민이라는 화두 앞에 서게 하는 그 장면, 그러니까 J를 위한 수술을 마치고 혼자 잠에서 깼던 그날의 고독하고 추웠던 저녁 병실이 떠올라 조금, 눈가가 젖을 만큼만 아주 조금 울었을 뿐이다. 그 인색한 몇 방울의 눈물을 보아버린 고모는 이내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울음을 터뜨리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외쳐대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 길고 긴 이야기 속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깜짝깜짝 놀라며 M의 여린 어깨 위에서 몸을 떨어야 했다.

 

 

    6

 

    세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는 현관문 앞에서 나는 전날 저녁 M과 D가 써준 편지를 꺼내 다시 한 번 읽었다. 아, 이, 와, 노, 라, 도, 되, 어, 요? 저, 는, 그, 냐, 앙, 아, 이, 에, 친, 구, 가, 되, 고, 시, 퍼, 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 봤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현관문의 전자키 뚜껑을 열고는 어젯밤 M이 D 몰래 작은 메모지에 적어 주었던 여섯 개의 숫자를 차례차례 입력했다. M이 어떻게 소년의 PASSWORD를 알게 되었는지는 묻지 못했다. 물론 M이라면, 밤마다 소년이 풀어 준 머리채를 타고 소년의 방으로 올라가는 능력이 있다 해도 나는 믿었을 것이다. 이내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같은 평수의 같은 아파트임에도 고모 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공간이 하나하나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봤지만 소년의 집은 끝없는 적막뿐이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땅 밑으로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몇 발짝 떼지도 않았는데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퍽, 퍽, 퍽……. 내 오른편에서부터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그 메마른 소리가 어떤 영상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는 건 자기 몸보다 큰 바위를 하데스의 언덕으로 올리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해 아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동안 온몸에선 힘이 빠져나갔다. 퍽, 퍽, 퍽……. 나는 나도 모르게 소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짧은 거리였음에도 어느새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한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소년에게 닿았다. 반사적으로, 그리고 나는 소년의 머리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잠시 후, 등허리를 통해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아악, 소년은 나로 인해 자신을 때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악을 썼고 나는 소년의 주먹 쥔 손이 등허리에 닿을 때마다 전해지는 통증을 참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소년의 미래를, 나는 조금은 알 수 있다. 어느 날 눈을 뜨면 세상은 모든 문을 닫아건 채 등을 돌리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월이 흘러도 소년에겐 소년이 서 있을 만한 곳을 가르쳐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소년은 어두워지기 시작한 병실에서 혼자 눈을 뜰 것이고 소년의 친부모는 언제나 소년이 갖고 있는 것보다 적은 분량의 그리움으로 소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죄의식에 빛바래져 어느 날엔가는 무관심이라 불러도 되는 영역으로 흘러가 버리리라.
    그것이, 얘야, 버림받은 자들의 운명이란다, 내 아이야.
    꼭 통증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더 이상 소년을 끌어안고 있을 수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절제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미안해. 너한텐 이 엄마가 정말 미안해. 의미 없이 중얼거렸지만 나는 내 감정을 직시할 수도 없었고 그 감정에 적당한 이름을 붙일 수도 없었다. 소년의 머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일어나 뒷걸음을 치며, 내가 지금부터 가게 될 곳은 이 세상의 바닥이어도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홉 밤 아홉 낮을 끊임없이 추락해야 닿을 수 있다는 이 삶의 끝이라 해도, 그리하여 내 살아 있음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남지 않고 소멸된다 해도 아까울 것은 없었다. 현관문 앞에서 나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그 중년의 여인이었다. 친, 구, 가, 그, 냐, 앙, 노, 라, 되, 아, 이, 는, 친, 구, 가……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글자 하나하나가 M과 D가 써준 쪽지에서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장바구니를 들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무력하게 여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현관 쪽으로 달려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그 집에서, 소년의 견고한 탑으로부터 뛰쳐나와야 했다.
    고모의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M의 방으로 들어가 벽에 세워 둔 캐리어 가방을 내려놓고 노트북과 몇 벌의 옷을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집어넣었다. 정신없이 짐을 싸다가,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겐, 도망갈 곳도 도망갈 시간도 없었다. 양부모가 흐느껴 울던 병원의 복도로부터 14년이나 되는 세월을 가르며 부지런히 달려왔는데도 그때처럼 내게는 전화를 걸어 나를 알고 있느냐고 물어볼 만한 곳도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가을용 점퍼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국 짐 싸는 것을 포기한 채 나는 캐리어 가방의 지퍼를 열고 낡은 다이어리를 꺼냈다. ‘이 달의 계획’ 마지막 칸에 적어 놓은 ‘PASSWORD’를 두 줄로 지운 뒤 아무것도 적지 않은 종이를 한 장 뜯어 무턱대고 M에게, 라고 썼다. 다 쓴 편지는 바로 찢어버리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찢지 못한 편지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캐리어 가방 위에 걸터앉은 채 어두워지는 창밖을 오랫동안 건너다봤다.
    “정은아아! 베로니크야!”
    나를 부르는 고모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린 건 벽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저녁 7시를 가리킬 때쯤이었다. 고개를 돌려 현관 쪽을 바라봤다. 고모보다 먼저 신발을 벗고 도착한 고모의 그림자가 온 힘을 다해 내게 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지만 그 말을 할 수 없어 애가 탄다는 듯 그림자의 손짓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잠시 후,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고모는 미친 듯이 손짓만 하는 그림자를 한쪽으로 밀어내고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말했다.
    “빨리 나와 봐라, 빨리! 니 엄마가 왔다, 니 엄마아!”
    이상했다. 고모는 분명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지나온 길바닥 위에서 몽땅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그 언어를, 나는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캐리어 가방에서 아주 천천히 일어서며 고모 뒤편에서 걸어오는 누군가를 두 눈을 찌푸린 채 뚫어지게 바라봤다. 희미한 실루엣이 아주 조금씩 선명해지며 내게 다가오는 동안, 바닥의 내 그림자는 심장에서부터 끊임없이 붉은 피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정작 무덤덤한 나와는 달리 총상보다 더 큰 고통으로 울부짖는 내 그림자를 지켜보는 내내 내 몸은 나른해졌고 걷잡을 수 없이 졸음이 밀려오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온 고모가 무언가를 말했지만 그새 누군가 이 세상의 볼륨을 줄여 놓았는지 고모의 놀란 목소리는 터무니없이 작게 들렸다. 너무 늦었노라고, 나는 오직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한국을 다시 찾은 것뿐이라는 이야기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에게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단 하나의 위안은, 고모 곁에 서 있는 그녀를 정신을 집중해서 보지는 않을 것이므로 앞으로도 나는 그녀의 얼굴을 완벽하게 기억해 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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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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