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문학카페 유랑극장 후기] 신라의 봄, 경주의 꽃

  • 작성일 2014-05-14
  • 조회수 780

 

[문학카페 유랑극장 참관후기]

 

 


신라의 봄, 경주의 꽃

― 경주문학관, 동리목원 문학관(하성란 소설가, 김동규 철학자)

 

이은선(소설가)

 

 

 

 

경주_이은선-1

 

    천년 고도로 들어서기 직전까지 차 안에서 대본을 고쳤습니다. 양 연출님은 스마트 폰과 노트북, 그리고 이미 나와 있는 대본을 번갈아가며 이 문장과 저 문장 사이를 오갔습니다. 아무래도 쉽게 여기고 갈 수 없는 시간이었지요. 「곰팡이 꽃」이라는 하성란 소설가의 단편 소설을 가지고 <잉여, 괴물의 관점 취하기>라는 제목의 행사를 하러 가던 차 안이었습니다. 양연식 연출님과 조연출이자 행사 진행자인 저, 그리고 영상 진행을 맡은 나미나 화가와 행정 총괄진행을 맡은 한정태 선생님이 함께 가던 참이었습니다.
    그 전날까지 지속된 대본과 행사에 관한 논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결국 행사는 행사대로 진행하되 모든 농담과 재미를 위한 코너는 삭제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지요. 그것을 위하여 경주로 내려가는 내내 대본을 수정했습니다. 지난주에 진해에서 ‘서로 기다림’에 관한 행사를 한 지 오 일 만의 일이었습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 행사의 지속에 관하여 여러 차례 회의를 하였으나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고, 부랴부랴 취소하자니 대관과 미리 약속된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일도 난제였습니다. 결국 양연식 연출님은 달리는 차 안에서 하성란 소설가의 「별 모양의 얼룩」 전문을 새롭게 읽었고, 양 연출님의 부탁을 받은 전국 국어교사 모임의 회원이자 시인이신 이계윤 선생님은 학교 도서관에서 하성란 작가의 저작과 신문 기사들을 살피는 ‘이원 생중계 수정’을 강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경주에 계신 분들과 만나야 했습니다. 우리만 생각하고 취소나 연기를 논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웃거나, 다짜고짜 애도하는 마음만 내세울 수도 없어 여러 모로 난감했습니다. 그리하여 작가와 연출진은 소설 「곰팡이 꽃」과 「별 모양의 얼룩」을 함께 이야기하자는 것으로 차 안 회의에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내려오는 네 시간 반 동안 그 모든 것들이 이루어졌고, 그렇게까지 하고 나서야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이 땅의 안타까운 마음들과도 맞지 않겠느냐는 말이 이어졌습니다.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에서 열린 행사였습니다. 예상 외로 많은 관객이 몰려와 준 까닭에 몇몇은 서거나 통로에 앉아 행사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도 보였고, 수업을 안 들어가고 왔다는 대학생들도 여럿이었습니다. 하성란 소설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한 남성은 맨 앞줄에 앉아 있었어요. 극단 창세 배우들이 소설 「곰팡이 꽃」을 주제로 한 낭독공연을 펼쳐주었습니다. 객석과 무대를 가리지 않고, 관객 사이를 오가며 열연을 펼쳐준 배우들 덕분에 다소 어둡게 시작했던 행사가 반짝, 밝아졌습니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웃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소설의 내용과 배우의 몸짓이 우리를 조그맣게라도 웃게 했던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쯤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게 될까요. 아니 예전 같은 웃음을 절대로 웃지 못하게 될 분들을 생각하면 웃음도 삼가야 하는 게 아닐까, 내내 생각했습니다. 바뀐 대본 만큼이나 긴장했던 진행자였습니다. 하성란 소설가 역시 내내 굳은 표정으로 ‘엄마’와 ‘작가’의 눈으로 본 요즘의 일들, 마음 아픈 일들을 꼼꼼하게 짚어 주었습니다.
    엄마이자 소설가로, 아니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번 사태가 너무 뼈아프다는 그녀의 말이 자꾸 가슴에 맴돌았습니다.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소설가는 자꾸만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녀가 덧붙인 사회적인 메시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태도에 관해서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메시지를 이야기하려면 지금 일어난 사태에 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어 목이 메었지요. 그 일에 관하여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대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이번 사태를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관하여 여쭙고 싶었습니다. 아마 저는 에둘러서 작가와 철학자에게 물어봤겠지요. 그러나 제대로 기억나질 않습니다. 다만 경주 선덕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우리 앞에서 밝게 웃고 있던 것만이 계속 눈에 밟힙니다. 100초 토론을 하겠다고 학교를 조퇴하고 왔다고 했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공부하기 싫어서 핑계대고 여기 온 거예요?”라고 농을 건넸겠지만, 이렇게 여기 와 주어 고맙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습니다. 공부도 좋고, 모두 다 좋은데 가족들과 더 많이 웃고 모쪼록 건강하라는 당부가 뒤를 이었지요. 왜 자꾸 그들에게 시선이 가는 것인지, 교복이 어쩌면 그렇게 예쁘던지…….

 

    김동규 철학자가 말한 ‘잉여의 삶, 괴물의 시선’이 관통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사회의 잉여들은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잉여’이며 그들은 과연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소설 「곰팡이 꽃」 속에서 발견한 잉여와 괴물의 삶에 관하여 김동규 철학자는 “소비의 사회와 가볼러지 1)”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쓰레기를 뒤지는 삶과 쓰레기를 소비하는 삶 사이의 괴리감이 우리 사회를 잉여적인 시선과 괴물의 시선으로 나누는 것이라는 말이었지요. 「곰팡이 꽃」 속의 삶과 김동규 철학자가 자주 가서 강의를 한다는 부산의 반송시장의 노숙자들의 쉼터에 관한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괴물의 시선’이라는 말에 자꾸 마음이 쓸렸습니다. 누가 저 괴물을 만든 것이며, 그 괴물도 처음부터 괴물이었겠는가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김동규 철학자의 강연 원고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쓰레기는 늘 시선 바깥에 있다. 그(것)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이해되지도 않는 존재로 부려진다. 그리고 기어이 매립이라는 단계를 거치고 만다. 그러나 그 바깥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부려진 의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오해를 이해로 전환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김동규, <잉여, 괴물의 관점 취하기> 중에서)
    시선과 소비에 관하여 그리고 잉여와 괴물에 관한 김동규 철학자의 강연이 끝났습니다. 관점과 시선의 차이, 소비에서 쓰레기까지의 이야기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우리에게 다가왔고, 그 위에 살포시 소설 「곰팡이 꽃」이 얹혀 있었습니다. 철학자와 작가가 사회를 바라봐야 하는 태도와 시선에 관한 대화 끝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화성 씨랜드 참사를 그린 소설 「별 모양의 얼룩」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지요. 하성란 소설가의 또 다른 저작이었습니다. 저는 글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을 때의 작가의 목소리와, 평소에 엄마이자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서 생활을 할 때의 목소리가 많이 다른가에 관하여 질문을 했고, 작가는 성심 성의껏, ‘그렇지 않다’고도, ‘그렇다’고도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죽도록 일하고 죽도록 소비하는 삶,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놓지 않는 작가로서의 시선, 엄마와 한 여자로서의 삶이 혼재되어 있는 그녀의 말을 그곳에 모인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만 가만히 듣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녀의 말을 덧대어주어 철학자의 나붓나붓한 음성까지.

 

    1) 가볼러지(garbology): 쓰레기학을 뜻하는 새로운 용어로 쓰레기장을 조사해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실태를 알아보는 사회학의 한 수법이다. ‘garbage(쓰레기)’에 학문을 뜻하는 접미사 ‘logy’를 붙여 만든 신어이다.(두산백과)

 

 

    소설 「별 모양의 얼룩」 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합니다.
- 일 년이 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건 아이의 좁은 보폭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이가 그 걸음으로 돌아오려면 아직도 수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하성란 소설, 「별 모양의 얼룩」 중에서)

 

    마지막에 저는 그 어떤 말보다 꼭 이 문장을 읽어주고 싶었습니다. 딱히 이때를 위한 소설의 문장은 아니었지만, 행사 전반에 걸친 어떤 감정들과 지금 이 상황들이 매우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는 문장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지난 리뷰에 이어, 클로징 멘트를 고스란히 옮겨 적습니다. 행사가 어땠고 느낌은 이러했다를 적기보다는, 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저희의 마음이 담긴 글귀이기 때문입니다.

 

 

클로징 멘트

 

   - 지난주 이 시간에 저는 진해에서 참 어렵게 이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행사 자체가 어려웠다는 것이 아니라, 세월호의 사건이 일어난 지 사흘 후에 진행된 행사였고, 또 그들의 생사 자체를 알 수 없어 답답하던 차에 진행된 행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이제부터 우리의 종교는 기적이고 기다림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래도 사고는 사건이 되고 인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 그렇게 쉽게 버리는 거 아니지요. 우리는 아직도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까지고 이 기다림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발견된 죽음 앞에서는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꽃다운 나이에 안타깝게 간 어린 학생들의 죽음에 현존하는 언어로 할 수 있는 모든 애도의 마음을 표합니다. 아주 많이 미안합니다. 그곳에서는 부디 평온하세요.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경주_이은선-2

 

 

 

 

   《문장웹진 5월호》

 

추천 콘텐츠

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