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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통, 뿔과 닭

  • 작성일 2012-12-11
  • 조회수 1,031

 

   [내가 읽은 올해의 책]

 

 

비와 통, 뿔과 닭

─ 『뿔바지』, 자끄 드뉘망(김태용), 2012

 

한유주

 

 

 

 

 

   나의 이름은 안입니다. 본래는 한이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나 안이라고 발음하더군요. 이 글은 여행자들을 위한 사무실과 우체국이 있는 광장에 있는 싸구려 카페테리아에서, 이곳의 모든 음식 값을 합한 것보다 몇 배쯤 비싼 만년필로 쓰고 있어요. 2012년이 가고 있군요. 2013년이 오고 있나요?

   노란 형광색 작업복을 입은 청소부들 여럿이 모여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어요. 나의 뒤편에서. 나의 앞에는 커피 한 잔과 만년필, 노트, 당신의 책, 소금통과 후추통, 어둠, 나의 두 손, 그리고 만년필을 위한 가죽집이 놓여 있어요. 이 가죽집을 불란서어로는 에튀라고 부르는데, 당신도 이 단어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당신의 국적에 대해 여전히 분분한 의견이 오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카페테리아의 거대한 전면 유리창 밖으로 청소부들이 아무렇게나 놓아 둔 비와 통이 보여요. 비와 통. 비통. 이곳의 청소부들은 길가를 잠식한 낙엽들을 쓸어 모으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곳의 청소부들과 저녁을 들고 있을지.

  당신의 유일한 시집 『뿔바지』를 한국어로 옮긴 번역자와, 그것을 책으로 출간한 편집자가 당신의 국적은 어디인가라는 문제를 독자들에게 던진 적이 있었어요. 누군가가 당신은 프랑스인이 아니라 불란서인이라 말했고, 당신의 책은 어느 지역 도서관의 서가에 프랑스 현대시가 수록된 책들과 함께 발각되는 일도 있었지요. 밤과 손이라는 이름. 누군가는 그 이름이 프랑스적인 이름이 아니라 말하기도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요, 당신은 삼척에도 갔던 사람, 「인터내셔널」이라는 시를 쓴 사람, 타구에 침을 뱉듯 타국에 당신의 원고를 팽개친 사람. 사람들이 사물의 이면에만 관심을 쏟을 때 당신은 ‘─다’로 끝나는 모든 한국어 문장을 의심했고, 밤의 손들을 빌려 외래어표기법에 의해 한국어로 적힌 모든 고유명사를 괄호 안에 가두어 놓았죠.

   지난여름, 편집자의 집을 찾아가 당신의 책을 샀어요. 책을 만드는 일과 책을 파는 일을 동시에 해야 했던 편집자는 피곤한 얼굴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단 한 권의 책이라며 『뿔바지』를 내게 내어주더군요. 「의문사」와 「돌연사」라는 시가 인쇄된 엽서 두 장과 함께. 그러면서 편집자는 내게 말했어요. 나머지 499권의 『뿔바지』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머지 499권의 『뿔바지』들을 읽은, 혹은 입은 499명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다고. 그리고 편집자는 내게 물었어요. 당신은 500번째 『뿔바지』를 어디로 이동시킬 생각인가요.

   나는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누군가가 말하길 소설가들의 유일한 소망은 시인이 되는 것이라 하기도 했었죠. 이제야 나는 그 말을 이해해요. 자발적인 이해는 아니지만. 어쩌면 미필적인 이해라 할 수도 있겠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이 글은 싸구려 카페테리아에서 열두 명의 청소부들에게 둘러싸여 당신의 미발표 원고보다 몇 배쯤 비싼 만년필로, 녹색 잉크로 쓰고 있어요. 당신은 (괄호)도 믿지 못하겠다고 썼지요.)

   나는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썼던가요? 이제는 앞에 쓴 문장도 믿지 못하겠군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청소부들이 식탁 위로 낙엽을 던지며 놀고 있어요. 마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낙엽 밑에 묻힌 닭의 뼈와 소의 지방을 생각하니 마른 낙엽처럼 건조한 식욕이 일어요. 저들이 흩뿌리는 차가운 낙엽들처럼, 당신의 페이지들도, 당신의 엽서들도 바스러질 수 있을까요?

   2013년이 오고 있네요. 2012년이 가고 있나요?

   당신의 책을 구하러 편집자의 집을 찾아갔을 때, 편집자는 내게 커피 한 잔을 대접하며 당신의 책을 만드는 동안 질투와 지툴을 동시에 느꼈다고 하더군요. 나는 지툴이라는 단어의 뜻을 끝내 묻지 않았고, 편집자가 1세제곱미터의 종이상자에 넣어준 책을, 아니, 당신의 책이 담긴 1세제곱미터의 상자를, 끌고, 이곳으로 왔어요. 상자는 해지고 닳았지만 그 와중에도 당신의 책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죠. 이곳에서 나는 윤느를 만났고, 우리는 뿔바지 대신 뿔이 잘린 닭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어요. 그리고 서로의 잔에 포도주를 부었어요. 포도주를 부음. 포도주의 부음. 뿔 없는 닭을 먹으며 나는 자연사를 생각해요. 모든 죽음은 자연사다. 내가 육성으로 발음하는 모든 낱말 위에 붉은 줄이 그어지기를. 윤느와 나는 당신의 죽음에 대한 내기를 했어요. 의문사다. 돌연사다. 자연사다. 나는 이러한 세 가지 죽음들 이외의 죽음은 알고 있지 못했고, 윤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나는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알 수가 없군요,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나와 윤느는 포도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죽음을 애도하며 마침내 잔을 들었을 때, 포도주는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식사를 마친 청소부들이 떠나가고 있어요. 식탁마다 그들이 흩뿌린 낙엽들이 쌓여 있네요. 낙엽으로 만년필을 위한 옷을 짓고 싶군요. 에튀, 라고 발음하면 당신은 에퉤, 라고 발음하겠지요. (이 글은 불란서의 싸구려 카페테리아에서 수천수만의 낙엽들에 둘러싸여 실로 묶인 공책에 푸른색 잉크로 쓰고 있어요. 낙엽들이 모두 사라지면 2012년이 간다는군요.) 텅 빈 잔들이 놓여 있네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텅 빈 낙엽들로 덮인 텅 빈 잔들이.

   낙엽들이 모두 사라지면 2013년이 온다는군요. 당신은 2009년에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2013년에도 삼척에서, 카페 드 마리에서, 잔 드뉘망의 창가에서, 울리포라는 이름의 해변에서 눈을 맞고 있기를. 그날이 오면 형광색 작업복을 입은 청소부들이 낙엽 대신 눈을 쓸며 바다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 줄 거예요. 왜가리, 왜가리, 라고 외치며. 2012년이 가고 있나요?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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