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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우리는 언제 웃음을 터뜨리는가?

  • 작성일 2012-11-05
  • 조회수 1,726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_제6회

   소설가 성석제와의 대담

 

 

 

[대담] 우리는 언제 웃음을 터뜨리는가?  

 

 

일시 _ 2012. 9. 20(월) 저녁 7시 20분

장소 _ 대학로 예술가의 집 3층 다목적실

 

 

 

 



 

   강신주 _성석제 선생님을 만나 뵙기 전에 워밍업 질문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독자 (강철목련) 1 : 멋스런 유머와 웃음보다 눈물과 고통이 더욱 요동치는 이 삶을 건너가면서 고통마저 의식적으로 무화하는 광인의 웃음이 필요할까요? 장자의 ‘빈 배’ 같은 무심의 미소를 짓는 지혜가 필요할까요?

 

   강신주 _ 강철목련 무섭지 않아요? 목련인데 강철이에요. (웃음)

   ‘광인의 웃음’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완전한 희망이라기보다 약간 거리를 둬서 희망을 가지세요. 우리가 어떤 꿈을 꾸잖아요? 꿈을 꾸려면 유머감각이 있어야 돼요. 유머는 거의 거리두기 작업이기 때문에 고통에 매몰되면 안 되잖아요?

   사회과학자, 철학자들, 정치철학자들은 꿈을 얘기해야 되죠. 우리 사회는 이렇게 가야 된다고요. 문학자들은 어쨌든 유머감각을 통해서 거리두기가 일정 정도 가능하잖아요. 내가 나를 딱 보면 “나 헤어지네”, “나 죽네” 거리 두잖아요? 여기로도 갈 수 있고 가짓수를 열어 놓고요. 유머마저 없으면 삶은 너무 힘들 거예요. 유머 때문에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도 있을 거예요.

   강철목련님 질문을 보면 이분은 강인하신 분이거든요. 모 아니면 도죠? 유머는요, 게 걸 윷, 그 사이에 있어요. 모는 아니에요. 뭔 줄 아시겠죠? 우리가 궁극적으로 행복해지는 삶이 모라면, 그 사이에 있어요.

 

 

   독자 2 : 삶 속에서 고통과 죽음의 장이 있고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담대해지라는 디오니소스적 새싹이 바로 웃음이 아닐까요?

     

   강신주 _ 질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책을 너무 많이 읽으셨어요. 한 마디로 말해서 안 받아들이셨던 분의 질문이에요.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여 본 적이 없으실 거예요. 어쩌면 새싹이 웃음이 아닐까요? 담대함이요. 맞는 말인데요. 받아들인다는 것이 고통에 젖는 건 아니죠? 웃음이라는 걸로 뭔지 모르지만 거리두기를 하면서 고통을 품어버리는 이런 것들, 디오니소스적으로 갈 것도 없고요.

   우선 선생님 질문지 있잖아요, 그거부터 하나씩 보겠습니다. 저희 둘이 수다를 떨다 보면 대답을 못 들을 것 같아서 선생님 편하신 대로 하나씩 고르세요.

  

 

   독자 (푸른섬) 3 : 웃음은 어떤 점에서 가장 강력한 삶의 무기가 될까요?

 

   강신주 _ 웃음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가 민주적인 사회라고 봐요. 다양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어떤 정부를 보면 웃음 코드를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하죠?

   직장상사가 헛소리할 때 웃어 보면 알아요. 그게 얼마나 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데요. 권력자들 앞에서 터트려 보시고 아버지 훈계에 피식 웃으면, 얼마나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지 (웃음), 웃음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가 민주적인 사회예요. 억압하는 곳은 남루한 사회예요.

 



   독자 (서울사는 뉴요커) 4 : 작가님께서는 언제 가장 행복하십니까?

 

   강신주 _ 지금이 좋아요. 지금이 좋고 지금 이 순간이 좋아요.

 

 

   독자 5 : 웃어서 행복한 것일까요? 행복해서 웃는 것일까요?

  

   강신주 _ 아까 얘기했죠. 불행할 때 웃어요. 행복할 때 만일 웃는다면 여러분 심각하신 거예요. 농담 아니에요. 진짜로 불행할 때 웃어요. 강의에서 대답이 됐을 거예요.

  해학과 해탈은 대충 아시겠죠? 해학은 유머의 유형이고, 해탈은 끊는 거예요. 고통도 행복도 느낌이 없어야 돼요. 무슨 소리인지 아시겠죠? 그러기가 너무 어렵잖아요. 그래서 힘들어요. 힘들어서 권하고 싶진 않아요. 돌아가시면 해탈이 돼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미리 죽는 방법이라고 보면 돼요. 삶이 너무 힘들 때 미리 죽을 수 있어요. 너무 힘든 고통을 당했을 때 회색빛과 같은 평온함이 들죠. 때려도 슬퍼하지 않아요. 해탈은 무서운 거예요. 어떤 기대나 어떤 희망도 좌절될 때 해탈은 오니까요. 미리 죽는 방법이에요. 그걸 아무리 강조를 하더라도 저는 싫어요. 해탈하지 말고 해학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파하실 거 아파하고 겪어야 될 거 다 겪고 죽어야 되거든요. 미리 차단하지 말고 웃음도 매일 조금씩 채워 나가세요. 이제 제 얘기는 그만 하고 예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성석제 작가님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독자 6 :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웃는 것을 금기시하거나 천박하고 가벼운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한국 문학에서 ‘웃음’을 소재로 방대하고 멋진 소설을 쓰는 분이 성석제 작가입니다. 본인 소설 중 가장 슬픈 얘기는 무엇인가요?

 

   성석제  _ 가장 슬픈 건 생각이 안 나요. 비슷한 제목이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사람’이란 게 있습니다. 상당히 짧은 이야기인데, 대충 얘기를 하자면 알래스카에 사는 원주민들도 비버가 귀해서 잡기가 어렸답니다. 고기는 맛있고 털은 아주 유용해서 모두들 굉장히 노력하나 젊은 시절 요령이 없어서 못 잡다가 죽기 전에야 어떻게 비버를 잘 잡을 수 있을지 안대요. 그래서 눈 쌓인 수풀을 향해서 서 있는 겁니다. 글로 썼을 때는 재밌었는데요. (웃음) 말로 하니까 정말 싫네요. 너무 설명적이 돼서요. 말과 글의 차이 같습니다. 

 

   독자 (박선호) 7 : 성석제 작가님 작품을 보면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이 많이 느껴집니다. 이것이 작가님이 집필하신 글의 주요 모티브인지요? 작가로서 왜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성석제 _ 작가들은 어떤 특정한 부분을 다루고자 하는 건 아니고 인간의 모든 면을 다 다루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다 나열하면 지루하기 때문에 작가들도 심심하지 않겠어요? 방법으로 낙찰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아주 비루하고 비천한 것부터 극단을 내세우는 방법, 그래서 대단히 신성한 것까지 다 있습니다. 그런 두 가지를 극단으로 내세우고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하는 방법을 소설 쓸 때 많이 동원하는 거죠. 그래서 주인공들을 보면 대단히 극단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언제 한번 주인공들의 생존율을 생각을 해봤더니 너무 많이 죽어요. 굉장히 즐겁게 살다가 갑자기 죽는 경우, 처음부터 죽고 시작하는 경우, 소설의 등단작이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인데요. 벌써 죽고 시작합니다. 깡패가 다리에서 떨어져서 강물에 떨어지기까지 4.5초 동안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거죠.

  소설 나온 지 한 17년쯤 되나요? 그동안 수없이 죽였습니다. 요샌 덜 죽이려고 노력 중입니다. 요즘은 자연사를 선호합니다.

 

   강신주 _ 참고로 빨리빨리 죽어야 단편이 가능해요. 오래 살면 장편이 되잖아요? 저도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읽었는데, 너무 재밌거든요. “쿵” 하고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떨어지는 거죠. 주석도 다셨어요. 가속도 다 계산하시고요. 그게 번쩍번쩍 빛나고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성석제 작가님의 작품의 근본은 유머잖아요? 모티브가 극단적인데 유머를 가해서 좀 일상적인 걸로 받아들여요.

  중요한 얘기 해주셨죠? 최근에는 자연사를 선호한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강렬했던 유머감각이 희석될 수 있는지 고민을 좀 해보시면 될 거 같아요. 앞으로의 작품에 대한 지적일 수 있을 거 같아요. 사실은 제가 개인적으로 초기작을 굉장히 사랑하거든요. 너무 강렬하게 반짝 보여주는 거요. 개인적으로는 부탁드릴 수 없지만, 돌연사 쪽으로 계속 가시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성석제  _ 그러면 제 명이 좀 짧아질 겁니다.

 

   강신주 _ 그게 무슨 의미죠?

 

   성석제 _ 그러니까 작가란 사람들은 한 사람, 소설 주인공의 내면에 완전 들어갔다 나와야 되거든요. 그 사람과 같은 입장이 되는 거죠. 그 사람이 죽으면 나도 죽는 거죠. 정서적으로든 관념적으로든 가치관으로든 요샛말로 빙의가 됩니다. 작품을 되풀이하다 보면 의사들이 명이 짧은 것처럼 저도 좀 오래 사는 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

 

   강신주 _ 오래 사시려고요?

 

   성석제 _ 10여 년 전쯤에 후배 작가가 죽었어요. 선배 소설가 한 분이 동료작가, 기자분이 많이 모인 장례식장에 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내가 오면서 신문을 보니까 여러 가지 직업군에서 작가가 명이 짧기로 세 번째더라. 작가보다 명이 짧은 사람이 누군가?’ 기자하고 의사라고요. 의사 중에 외과의요. 사람 몸에 손을 대고 수술을 하고 그러는 게 기계적인 것 같지만 사람인 이상, 상처를 들여다보고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죠? 스트레스 푸는 방법으로 술이라든가 뭐 여러 가지를 이용하죠. 그땐 기사를 읽지 못했고요. 얼마 전에 다시 기사가 나왔습니다. 작가는 한참 위로 올라갔습니다. 요즈음은 연예인이 1위입니다.  

 


   독자 8 : 소설가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임팩트 있는 한 마디 부탁합니다.

 

   성석제 _ 노벨상 수상식장에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문학상은 못 받을 것 같고 노리는 게 평화상입니다. 물리학상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가설은 준비가 됐는데, 증거가 없어서 소설 쓰느라 바빠서 아직 증거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강신주 _ 아까도 얘기했지만 작가님 소설책을 사 보시면 왜 노벨 물리학상을 노리는지 아실 거예요. 계산을 너무 하세요.

 

 

     독자 (백진선) 9 : 번쩍하고 황홀했던 순간에 성석제는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고 황홀했던 순간은 성석제 작가님은 언제이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요?

 

   성석제 _ 아무것도 안 보이죠. “아무것도 안 보이네” 그렇게 말했겠죠.

 

   강신주 _ 이게 성석제 선생님의 유머거든요. 별로 안 웃기죠? 웃기신 분? 팬들은 웃기죠.

 


     독자 10 : 세속적인 의미에서 완전히 릴랙스 되고 무아지경에 이를 때가 있었는지요?

 

   성석제 _ 있겠죠. 기억이 안 나죠. 무아지경인데 어떻게 기억을 합니까?

 

   강신주 _ 무아지경이라도 기억은 나잖아요?

 

   성석제 _ 무아지경(無我之境)이란 한자말 뜻을 잘 기억해 보세요.

   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96년인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제가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한밤중에 택시에 받혀서 깨보니까 다음날 아침이에요.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동안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프지도 않았고 오히려 더 좋았다고 할까? 그래서 그 경험이 소설을 쓰는 데 많은 보탬이 됐어요.

   나중에 알게 됐는데, 천연 모르핀이라고 하죠? 엔도르핀이 과잉 분비된 거예요. 아픈 거를 몰랐죠.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잊을 수 없는 뼈저린 아픔이 닥쳐왔는데, 모르핀으로도 진정시킬 수가 없었어요. 사고가 나서 내가 심각한 상태인데 멀쩡했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그런 때가 있었어요. 그런 경험이 있었어요.

 

   강신주 _ 만족스러우세요? 백진선 님 오셨나요? 안 오셨나요? 질문하고 왜 안 오세요? 이분은 질문만 하고 만족하시는 거예요. (웃음)

   성석제 작가님 얘기 들어 보면 모르핀, 엔도르핀 등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오죠? 특징인 것 같아요. 상당히 가볍게 이야기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느낌이 사실 많이 들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서 조폭이 떨어져 죽는데 조폭 옆에 여자가 타고 있거든요. 묘사하신 거 기억나요. 여자는 기절해 있거든요. 마지막에 조폭인데 무섭다고 그래요. ‘엄마 무섭다’ 그래요. 거기서 빵 터지면서 씁쓸하게 돌아오는 거죠. 질문하신 분은 머릿속에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가 머릿속에 있었을 것 같아요. 가장 황홀한 순간을 물었던 질문 대신 좀 얘기를 해보면, 그 작품 어떻게 구상해서 쓰셨는지요?

 

   성석제 _ 그냥 후배하고 차 타고 가는데 ‘소설 속의 시간은 얼마나 될까?’ 일반론을 얘기하고 있었어요. 평론가였어요. 소설 쓰기 전이었어요. 단편은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하루, 며칠, 어떤 에피소드의 단편이고, 장편은 한 사람의 일생 정도 그런 분량이죠. 일반론 얘기를 하다가 좀 더 줄일 수도 있겠는데 하면서, ‘빅뱅의 순간은 너무 짧아서 빵 하면 끝나니까 소설이 안 될 거 같다. 그럼 얼마 정도로 줄일 수 있을까?’ 하다가 그런 생각을 해냈습니다. ‘다리에서 떨어져 죽는다 치고, 그 정도 시간이면 자기 인생에 대해서 되돌아보지 않을까?’ 했습니다.

 

   강신주 _ 오래 산 것 같지만 내 자신을 돌아보는 게 4.5초밖에 안 되는, 이 정도의 찰나적인 순간들 있잖아요? 허허로움이라고 해야 되나? 중요한 일을 딱 꼽으면 몇 개 없잖아요? 많으세요? 중요한 사건 나열하면 1초도 안 돼 끝날 수도 있어요. 나중에 꼭 내 인생의 4.5초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성석제 작가님을 보면 남미의 보르헤스처럼 정서적이라기보다 굉장히 지적이라는 느낌을 받아요. 4.5초의 문제도 최소단위가 뭘까, 그런 고민으로 소설을 구성하시잖아요. 보르헤스도 그런 느낌들이에요. 너무 백진선 님이 의도하지 않았던 이야기까지 한 것 같군요. 다음 질문입니다.

 

 


   독자 (구희일) 11 : 글 속에 자신의 평소 성격이 반영되는 편인가요?

 

   성석제 _ 글을 쓸 때의 성격이 반영될 것입니다. 성격이라고 말해야 되나? 장소, 날씨, 먹은 것, 냄새, 주변 사람들의 대화, 모든 것들이 계속 소설 쓰고 있는 동안에 안에 들어오죠. 제가 정해 놓은 어떤 틀이 있는데 그 안에 뛰어 들어오고 방해하고 간섭하고 그럽니다. 그런 것들이 전부 총체적으로 들어가죠. 반영하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반영이 됩니다. 소설을 다 쓰고 나서 언젠가 읽어 보면 저는 ‘그런 게 거기 있었구나. 어떤 사람을 봤구나’ 등 많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게 뭐랄까? 일기 같다고나 할까? 여행 수첩 같다고나 할까?

 

   독자 12 : ‘개그 콘서트’를 보지 않으면 웃기는 이야기도 제대로 낄 수 없고 또 동료 사이에서 왕따가 되는 분위기입니다. 요즘에는 ‘브라우니’나 ‘갸루상’ 아니면 동료들끼리 웃을 일이 없습니다. 웃음의 획일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성석제 _ 뭐든 간에 웃을 수 있다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론가가 아니라서요. 저도 그런 걸 재미있게 보거든요. 보다가 저한테 안 맞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게 브라우니입니다.

 

   강신주 _ 갸루상은 좋아하세요?

 

   성석제 _ 갸루상은 맞았다 안 맞았다 그럽니다. 이미 어떤 코드를 익혀서 저한테 그 사람이 할 말을 먼저 하기 전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 알 때 채널을 돌리죠. 그 다음에도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런 걸 제외하고 전 개그프로도 재미있는 건 재미있게 봅니다.  

 

   강신주 _ 웃음의 획일화라고 했는데 좀 덧붙이면, 똑같은 대목에서 웃진 않아요. 사람들이 ‘슬프다’라고 할 때 잘 얘기해 보면 내가 슬픈 땐 어떤 요소가 강하고 저 사람이 슬플 때는 어떤 요소가 강한지 달라요. 슬픈 영화 보고 얘기 나눠 봐요. ‘슬픈데 울었어. 너도 울었어? 많이 울었어? 슬프지?’ 하고 얘기하다 보면 어느 대목에서 슬퍼하는지 사람마다 달라요.

  겉으로 어떤 게 터졌다고 해서 감정의 획일화가 안 돼요. 질문한 분은 고민해 보셔야 해요. 똑같이 웃어도 웃는 자극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생각을 해보시면 좋을 거 같아요.

 


   독자 13 : 외국 사람들이 가장 놀란 점 중 하나가 ‘한국 사람들은 웃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성석제 _ 외국 사람들이 그렇게 놀랄 게 없나? 세상이 너무나 다른데, 우리가 사는 집을 돌아본 것도 아니고, 교실에 들어가 본 것도 아니고, 같이 TV 앞에 앉았던 것도 아니고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강신주 _ 방금 웃으셨죠? 왜 웃으신 거예요? 맞는 거 같아요. 아까도 그랬잖아요. ‘예측 불가능해야지 반은 웃는다.’

   성석제 작가님 매력은 단편을 보면 어찌 될까를 모르겠는 거예요. 어떤 때는 허허롭기도 하고 머리가 띵하기도 하고요. 이게 작가님이 가진 특징인데 방금 그렇게 웃겨 주셨고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어디에서 웃어야 할지.

 


   독자 (박인영) 14 : 유머러스한 소설은 어떻게 쓰나요?

 

   성석제 _ 여러 가지 대답이 있는데요. 유머를 일부러 쓰려고 하면 정말 안 나옵니다. 자연스러워야 하는데요. 저는 조상들에게 부모님들에게 감사하는 게, 저를 농촌에서 낳아 주셨거든요. 이분들을 보면, 많이 웃어요. 농촌 사람들은 고생이 많죠. 고되고 힘들고 날씨도 변화무쌍해요. 농사를 하기에 참 어렵습니다. 이분들의 피부도 일찍 노화가 되죠. 광노화라고 하죠. 제 또래 농사짓는 친구들은 저보다 다 스무 살 이상 늙어 보입니다. 그런데 보면 하회탈처럼 웃음기 같은 게 있어요. 힘들어서 아마도 아예 조상들이 웃으라고 심어 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자연 질서의 조화로 생긴 낙천주의라는 게 있는데 저는 농사도 안 짓는데 농촌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낙천주의를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그 낙천성이 소설에 투영되는데, 물론 유머로 곧바로 번역되지 않아요. 제가 쓴 걸 보고 저도 웃을 때가 있거든요. 제가 기억력이 나쁩니다. 제가 쓴 걸 기억을 잘 못 합니다. ‘이걸 누가 썼지?’ 해요. 그런 거죠. 계속 농부가 마치 논에 나가서 벼를 살피듯이 무슨 일이 없어도 일을 조금씩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매일 그걸 안 하면 뭔가 오늘 제대로 산 거 같지 않고 그런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며칠 푹 쉬다 보면 그 속에 저절로 빵 터지는 게 아니라 은은하게 깃드는 문장의 낙천성이라고 할까요? 깃들어 있다가 마감에 임박해서 특정한 문장이나 단어로 폭발하기도 합니다. 그런 정도 아닐까? 일부러 마감을 넘겨서 ‘아! 큰일났다’ 이런 식이면 도저히 그런 문장이 나올 수가 없을 겁니다. 아마도 웬만한 사람이라서요.

 


   독자 15 : 자전거를 좋아하시나요? 자전거를 타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성석제 _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참 고맙다 그러죠.

 

   강신주 _ 4대강 사업과 관련됐나요?

 

   성석제 _ 제가 갔습니다. 4대강을 간 건 아니고 아라뱃길 자전거 길, 한강 자전거 길, 낙동강 자전거 길을 자전거를 타고 갔습니다. ‘굉장히 비싼 자전거 길을 만들었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강신주 _ 잘 만들어졌던가요?

 

   성석제 _ 정답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전거 길을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좋아해야 되는데 너무나 비싸게 번쩍번쩍하게 전시적으로 만들어 놨고, 또 어떤 경우에는 자기들이 이런 놀라운 공사를 했으니 맛을 보라는 듯이 보를 왔다 갔다 하게 합니다. 여주보, 강천보를 자전거 길로 계속 넘어가야 합니다. 왜 이런 짓을 하는지, 거기에 굉장히 많은 돈이 들어갔을 텐데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친자연적 친환경주의자들이에요. 그런 수작을 금방 알아챕니다. 저와 자전거를 함께 탄 분이 저하고 같이 이번에 강을 따라 첫날 100km를 끌고 갔더니, ‘역시 우리 자전거 탄 사람들을 공범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 길을 건설한 것 같다’ 그랬어요. 제가 한 말은 아니고요.

 

   강신주 _ 자전거를 타면서 무슨 생각을 하세요?

 

   성석제 _ 처음에 자전거를 타면 몸하고 자연하고 자전거, 이 세 가지가 아귀가 맞지 않습니다.

   제 근육과 자전거와 길, 어느 순간이 되면 이 세 개가 조화를 이룬다고 할까요? 굉장히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도달하기까지 ‘왜 다리에 힘이 없지? 왜 바람이 많이 불지? 덥지? 춥지? 자전거가 왜 이 모양이지?’ 하다가 근육도 조화를 이루게 되면, 온갖 생각이 지나가는 겁니다. 점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좀 나중에는 극단적인 단계가 되면 윙윙윙윙 하는 자전거 소리만 나는 그런 단계까지 가는 거죠.

 

   강신주 _ 그런 걸 소설로 써보면 어떨까요?

 

   성석제 _ 알맹이가 없어서요. ‘좋았다’ 이런 얘기 갖고는 설득력이 없죠. 그런 거는 여행 수기로 쓸 만합니다. 소설가는 자기 경험을 멋있게 내세우는 것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거부감 같은 것을 느낍니다.

 

   강신주 _ 성석제 작가님 경험보다 성석제 작가님이 아닌 것을 만듭니까?

 

   성석제 _ 만들려는 게 아니라, 사실 제 이야기는 재미가 없습니다. 아주 드물게 직접적인 경험이 포함되긴 한데요. 노골적으로 제가 나가면 재미가 없습니다.

   캐릭터들은 바깥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남의 이야기죠. 그런 이야기들은 특정한 어떤 사람의 에피소드를 썼어요. 남들이 찾아올 수 있어요. 제가 소설을 쓴 지 얼마 안 될 때였는데, 어떤 사람의 얘기를 썼어요. 그 사람이 조폭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소설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원고료 일부를 청구하겠다 그래서 너무 무서워서, 다른 조폭에게 두들겨 패라, 라고 그래서 조용해졌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함부로 남의 얘기를 갖다 쓰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죠. 계속 변용이 됩니다. A라는 사람한테 들은 얘기가 B라는 사람의 성격과 약간 맞아서 좀 다른 이야기로 변주되는 식이죠. 무수히 많은 캐릭터들이 생겨나고 얘기가 생겨나요. ‘나를 좀 써다오’, ‘캐릭터에 써다오’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대개 재미가 없어요. 소설로 쓸 만하지 않습니다. (웃음)

 

   강신주 _ 참고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제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용하신 건가요?

 

   성석제 _ 당연히 염두에 뒀던 거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학림’이라는 다방이 70년대 말 80년대 초중반에 있었어요. 지금은 카페로 바뀌었죠? 제가 1학년 때 좋아하는 선배와 같이 여기까지 걸어와서 학림 다방에 앉아서 음악을 들었습니다. 거기에 전축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턴테이블에 얹어 놓고 칠판에 곡목을 적게 돼 있습니다. 재킷을 보고 곡목을 적죠. 그 선배가 맨날 와서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음반을 올려놓고 칠판에다가 당연히 독어로 ‘Also Sprach Zarathustra’를 적으면서 마지막에 갑자기 점을 확 찍어요. 백묵으로요. 그게 너무 멋있었습니다. 아마 들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앞에 장대한 팡파르가 나오죠? 지금 생각하면 유치해요. 그런데 그땐 정말 멋있고 맘에 들어서 ‘언젠가 나도 저런 식의 제목을 마침표를 쾅 찍어 봐야겠다’ 생각한 게 아마 소설 제목을 정할 때 반영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강신주 _ 여러분들도 슈트라우스의 음악 한번 들어 보시다가 다시 한 번 읽어 보면 쓰셨을 때 느낌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아요.

 



   독자 16 :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좋은 처세란 무엇일까요?

 

   성석제 _ 저한테 물어보시는 겁니까? (웃음)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시인 황동규 선생님과 저는 2005년에 독일 함부르크에서 문학행사가 있어서 가서 처음 만났는데 제가 만난 분 중에 그분이 가장 박식한 분이세요. 박식한 분 앞에서 이분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뭔가 질문을 하면 최선을 다해 알려드렸습니다. 그때부터 황 선생님이 저를 박식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나 봐요. 그 후에 꽤 여러 번 만났는데, ‘이게 뭐냐? 저게 뭐냐?’ 그러면 최선을 다해 답을 드렸습니다. 어느 날 경북 선산 절에 갔다가 탑 아래 피어 있는 꽃을 보고 ‘이게 뭐냐?’ 그래서 ‘제가 모르겠습니다’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성 선생님이 모르는 게 있느냐?’고 그래서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랬는데 그때 굉장히 가슴에 많이 맺혔어요. 제가 모르는 게 있다니! (웃음)

   북한 평양에 간 일이 있는데 또 그 꽃이 피어 있어요. 거기에 개선문 가이드들이 있습니다. 북한 가이드들이 한 명도 아니고 열 몇 명이 모여 있어서 ‘이 꽃 이름이 뭐냐?’ 물어보니 이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 사람들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 왔다 갔다 하고 정신없이 찾다가 제가 떠나려고 하는데 막 달려와서 알려주셨습니다.

   묘향산에 갔더니 또 있었어요. 안내원 동무한테 물어봤더니 또 난리가 났어요. 제가 와서 찾아보니 ‘플록스’라는 꽃인데 우리나라에도 많습니다. 절의 스님들이 많이 좋아하는데, 패랭이와 닮은 아름다운 꽃인데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정작 ‘사해문서’에 대해서 황동규 선생님한테 여쭤 본 적이 있는데 황 선생님이 ‘나는 모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모르시면 어떡합니까?’ 했더니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합니다’라고 그래서 ‘아! 이런 거구나. 모른다면 모른다고 하는 거구나’ 다시 한 번 황 선생님한테 배웠습니다.

 

   강신주 _ 『논어』에 나온 말이죠. 공자가 제자한테 ‘알면 안다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게 아는 거다’라고 했죠. 방금 성석제 선생님 말씀이 ‘나는 공자의 수준에 이르렀다’, ‘황동규 선생님 두 분이 같이 이르렀다’ 그런 얘기를 하신 거고요. 미리 받은 질문을 마치고 이제부터 이은선 사회자가 직접 질문을 받아서 성석제 작가님에게 던질 겁니다.

  

 

 

이은선 작가의 1문 1답

 

 

   이은선 : 영화 〈올드 보이〉에 출연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석제 _ 안 했습니다.

 

   이은선 : 시를 쓰는 성석제와 소설을 쓰는 성석제는 어떻게 다른가요?

 

   성석제 _ 원고료가 다릅니다.

 

   이은선 : 법대 지원 이유가 궁금합니다.

 

   성석제 _ 법대 지원한 거 아니고요, 법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이은선 : 성석제에게 맛있는 음식이란?

 

   성석제 _ 넘어가면 안 되나요?

 

   이은선 : 지금까지 성석제를 가슴 뛰게 했던 것은?

 

   성석제 _ 아무래도 사랑이겠죠?

 

   이은선 : 성석제에게 독자란?

 

   성석제 _ 참을성이 굉장히 강한 분들이다.

 

   이은선 : 지금 이 순간 성석제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성석제 _ 전어를 먹으러 가고 싶다.

 

   이은선 : 강신주 선생님, 1문 1답입니다. 강신주에게 철학적 사유란?

 

   강신주 _ 넘어가죠.

 

   이은선 : 강신주가 철학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하고 있을 법한 일?

 

   강신주 _ 고생물학자

 

   이은선 : 강신주에게 독자란?

 

   강신주 _ 원수요.

 

   이은선 : 지금까지 들은 질문 중 가장 황당했던 질문은?

 

   강신주 _ 철학적 사유란 무엇인가? 너 철학해 봐.

 

   이은선 : 관객들이 가장 예뻐 보인 순간은?

 

   강신주 _ 저항할 때

 

   이은선 : 여러분, 저항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항 질문 들어가겠습니다.

 

 

   관객과의 질의응답

 

 

   관객 1 _ 강신주 선생님! 노장 사상에서 웃음이나 유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고, 우리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강신주 _ 장자 부인이 죽었을 때 장자는 막 북치고 놀아요. 친구가 조문 왔는데 ‘아! 신난다’ 그러니까 친구가 ‘너 해도 너무한다. 너랑 같이 결혼해서 큰아들도 낳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 그랬더니 장자는 자기가 할 일이 그것밖에 없대요.

   이런 거예요. 영혼이나 귀신이 있다고 했을 때 내가 떠났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인상 팍팍 쓰는 것, 전 원치 않아요. 장자는 ‘아! 진짜 부인을 사랑했구나’ 그런 거예요. 여러분들이 못된 생각을 지닐 땐 ‘나 떠나면 불행에 젖을 거야’ 그럴 거예요. 장자는 그런 식이 아닌 거예요. 돌아보세요. 여러분들이 배우자를 두고 떠나요. 배우자가 재혼하길 원하시는 분 손 들어 보세요. 나 없이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는 분 손 들어 보세요. 얼마 없잖아요. (웃음)

   장자는 이야기책이잖아요. 유명한 솔개 이야기 아시죠? 제자들이 스승이 죽으면 땅에 묻으려고 해요. 장자가 막 화를 내죠? ‘왜 너희들은 솔개의 먹이를 빼앗아서 땅강아지 먹이로 주려고 해? 이 나쁜 놈들아!’ 그래요. 그런 얘기를 보면 장자가 웃기게 얘기를 하거든요.

   누군가 울 때는 자기 연민에 빠져 울어요. 떠난 사람 생각하면 웃어야 되거든요. 장자가 막 드럼 칠 때 까르르 하지만 속은 미어터지는 거죠. 떠난 사람한테 보여줄 수 있을 게 뭘까 할 때, 웃는 모습 보여드리는 거죠. 더 아프죠. 힘들죠. 장자 이야기에는 죽음에 관한 얘기가 많아요. 죽음에서 유머감각을 발휘해요. 여러분들도 그럴 거예요. 웃는데 뭔가 서늘하게 와요.

 

 

   관객 2 _ 성석제 작가님이 출연하신 EBS ‘테마기행’의 한 장면이 기억나는데요. 어느 산골 가족들 중 아이를 보고 ‘너는 정말 나랑 닮았다. 우린 한 조상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기셔서 ‘정말 이야기꾼이구나’ 하고 굉장히 강한 느낌을 받았는데요. 매번 작가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픽션 같기도 하고 논픽션 같기도 한 느낌을 받았어요. 원래 작가님 이야기를 안 쓰신다고 했는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호랑이를 봤다」는 픽션인지요? 두 번째로 궁금한 것은 성격이 굉장히 낙천적인 것 같은데 힘들거나 궁지에 몰렸을 때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성석제 _ 예. 칠레에서 있었던 일은 제가 믿는 그대로입니다. 소설 아니고요. 아마 우리가 같은 인류로서 공통의 조상을 갖고 있지 않다면, 단세포 동물일 때예요. 공통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사실로 믿어서 그랬고요. 저를 참 많이 닮기도 했고요. 「호랑이를 봤다」 서두에 보면 원고 독촉에 시달리는 소설가가 나와서 내 얘기가 아니냐고 하는데, 글쎄요, 저는 원고 독촉에 시달려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안 쓰면 안 되는 상황을 설정하기 위해서 거기에 제 얘기가 들어갔던 건 카페목련 정도입니다. 목련이 적산 광량이라고 하나요, 적상 열량이라고 하나요? 자기가 받은 총열량, 빛의 양에 따라 다음 해에 꽃을 피울 숫자를 결정한다는 거죠. 제 뜰 앞에 핀 목련을 보고 배워서 쓴 거고요. 언제나 그렇진 않죠. 저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

   궁지에 몰렸을 때는? 아! 예. 몰린 적이 있네요. 궁지에 몰리면 도망가려고 하죠. 뭐든지 어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망가려고 하겠죠.

 

 

   관객 3 _ 돌연사를 선호하는 철학자와 자연사를 선호하는 쪽으로 돌아선 소설가 중에서 저는 참 소설가가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성석제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웃음에 대한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지난 시간에 읽었던 많은 책이 떠올라서 저의 마음을 정리할 수 있어 좋았고요. 웃음이라는 게 비극과 거리두기에서 나온 것이라면, 공감을 전제로 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성석제 소설가님께서는 작품을 쓰실 때 공감을 얻기 위해 남달리 구사하시는 전략이 있는지요?


   성석제 _ 웃음이란 게 비극과 거리두기에서 나온다는 건 처음 들어 보고요. 그런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창작하는 입장에서 늘 구체적인 뜻을 통해서 정확하고 아름다운 결론을 에두르려고 합니다. 한사코 똑바로 가는, 정석으로 가는 아주 명료한 길을 놔두고, 자꾸 옆길로 새고 헤매고 놀고 딴 짓을 하는 식이 이게 제 스타일이 아닌가? 안 갈 수도 있고요. 가다 말 수도 있고요. 질문이 뭐였죠? (웃음)

   공감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그 소설에 등장하는 한 인물, 중요한 인물과 완전히 한몸이 되는 거죠. 그 사람이 어떤 식의 말투를 가지고 있고 어떤 식으로 생각할 것이고 그런 것들을 아주 잠시라도 하나가 돼서 생각을 해보면 제가 잘 모르던 많은 것들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소설가인 저 아닌 많은 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요. 그런 데서 문장이 우러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 말씀 듣다 보니 생각이 났는데, 웃음이라는 것은 거리를 생기게 하네요. 그러니까 동화작용이 아니라 이화작용을 하는 것 같아요. 의아함을 느낄 때가 있는데요. 존경을 받았던 어른이 갑자기 흙탕물이나 이런 데 미끄러졌을 때 웃음이 나는 이유가 뭘까? 다칠 수 있는데요. 그분이 스승님일 텐데 저는 웃었거든요. ‘뭐가 우습냐고?’ 하시는데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도 인간의 흥미로운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이럴까? 왜 이러이러해서 웃음이 나는가?’ 알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그 일을 알아야 되는데……. 저는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은 참 재밌다’ 그렇게 말하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관객 4 _ 성석제 선생님, 일단 왜 소설을 쓰시는지요?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대학교 3학년 때인가 시로 정현종 선생님 시간에 발표하지 않았나요? 왜 지금 시를 선택하지 않고 소설을 선택하셨는지요? 그리고 기형도 작가와 연계해서 생각나는 분이라 기형도의 시의 무게와 성석제의 소설의 무게를 함께 논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성석제 _ 제가 일부러 소설을 쓰려 해서 썼다기보다 시는 사실 그렇습니다. 제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잘 안 되는 걸 억지로 쓰려고 일부러 애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시를 쓰고 있었고, 저 혼자 안 쓰면 상대를 안 해 줄 것 같아서요. 그 무렵에는 복학해서 동료도 별로 없었고요. 시 쓰는 선후배들이 떠나가면 너무나 외로울 거 같아서, 억지로 시를 쓰려고 노력을 했었죠. 그러다가 기형도라는 친구가 먼저 등단을 했고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시를 계속 쓰려면 등단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마추어로 남아 있으면 지쳐서 시를 못 쓰게 될 수도 있다. 그럼 등단을 하자.’ 그래서 했고 그 다음에 또 그런 얘기도 했습니다. ‘우린 프로니까 청탁을 받기 전에는 쓰지 말자. 청탁받기 전에 쓰는 건 아마추어나 하는 짓이다.’ 그래서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 친구가 저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돌연사했죠. 제가 그 친구가 쓴 유작시를 정리해서 유고시집을 내고, 그 후에도 몇 번 산문집도 내고, 나중에 발굴된 시도 모아서 전집을 내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둘이) 시에 관해서 읽는 것도 비슷하고 일 년에 적어도 한 200일 이상은 만나거나 대화를 하는 사이니까 상당히 비슷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가 남기고 간 시들을 정리하다 보니 문장이 내가 쓴 건지 친구가 쓴 건지 헷갈릴 때가 많았습니다. 마침 어떤 계기로 어느 날 소설 청탁이 왔습니다. 청탁을 거부하면 안 되니까 소설을 썼더니 시 청탁이 안 오고 소설 청탁이 와서 그래서 소설가가 돼서 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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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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