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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윤성희 소설가와의 대화

  • 작성일 2012-06-30
  • 조회수 2,507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_제2회

윤성희 소설가와의 대담

 

 

[대담] 윤성희 소설가와의 대화

 

 

2012. 5. 23(월)

예술가의 집 다목적홀

김용규(철학자, 진행), 윤성희(소설가, 대담)

 

 

 

   김용규 : 선생님, 안녕하세요?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해 「부메랑」으로 제11회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하셨는데요, 다시 한 번 축하드리고요. 좋은 소설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질문에 앞서 개인적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어떤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평소 인터뷰를 즐기지 않으시고 자기 이야기를 잘 안 하신다고 적혀 있더군요. 그래서 작품도 ‘일기 형식의 일인칭을 버리고 삼인칭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쓰신다고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세요?

 

   윤성희 :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요. 체질에 안 맞는 것 같아요. 인터뷰를 즐기지는 않는데요. 저한테 많이 들어오지도 않아요. (웃음) 혹시나 들어오면 해요. 하면서 계속 ‘즐기지 않습니다’ 말해요. 할 때도 최선을 다해서 해요. 그런데 이 인터뷰라는 것이 낯선 누군가와 만나서 질문과 답을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구어체로 거짓 자서전을 쓰는 사람처럼, 나도 모르게 제 뜻과 다른 말을 하기도 해요. 괜히 집에 가서 ‘그 말은 너무 잘난 척한 게 아닌가?’ 그러기도 하고요. 크진 않지만 약간의, 어떤 자기 혐오감이 드는 거 같아요. 그런 일을 하고 나면요. 그래도 소설책을 냈을 때 (인터뷰) 들어온 대로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요.

 


   김용규 : 평소 인터뷰를 즐기지 않으시고, 또 개인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잘 안 하신다는 점에서는 저와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저와는 아주 다른 점을 갖고 계신데요. 다름 아니라, 상(賞)을 참 많이 받으셨어요! 저도 책을 열댓 권 썼는데, 한 번도 상을 받아 보지 못했거든요. 저야 상이 자주 주어지는 분야도 아닌 데다 재주가 천박하고 나이도 있고 해서 마음을 비웠습니다만, 선생님을 존경하여 닮고 싶은 후배 작가들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우선 사회를 보는 우리 이은선 작가부터 그러리라 생각되는데요. 특별한 비법이 있으신지요?

 

   윤성희 : 비결은 없어요. 어머니가 제 사주를 봤는데 40대까지 계속 좋다고 하더라고요. 운이 좋은 거 같아요. 운이 안 좋을 때가 올 거 같아요.

   글쎄요. 어느 날 운이 좋다는 거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어요. 특히 작년에 황순원 문학상을 받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제 자신에게 그랬어요. 상을 전에도 많이 받았으니까 앞으로 평생 안 받아도 좋겠다고요. 몇 년에 한 번씩 후보에 들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동료 작가들이 ‘네 소설 읽어봤는데 괜찮았어’ 얘기를 해주는 거 들으면서 쭉 평생 글을 썼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황순원 문학상을 받았어요. 스스로 너무 창피하게요. ‘왜 그럴까?’ 했어요. 처음에는 너무 어릴 때 상을 받으니까 굉장히 힘들었어요. 아주 예전에 힘든 걸 극복하면서 ‘상을 안 받아도 돼. 될 대로 되자’ 그러면서 어깨 힘을 안 주는 게 생긴 거 같아요. 한 번 연기상을 받는 배우가 계속 연기상을 받는 것처럼요. 제 자랑하는 게 아니고요. 그런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웃음) 그 운이 실력이 아니라 운인 것 같다는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김용규 :
다 이렇습니다. 여러분들 '쿵푸팬더'라는 영화 보셨죠? 거기서 보면, 쿵푸팬더 아버지가 우동 국물 내는 비결이 있다고 합니다. 나중에 풀러 보면, ‘없다!’고 하죠. 지금 윤 작가님 하신 말씀이 그런 게 아닙니까? ‘특별한 비결 없다. 너도 열심히 해봐라.’ 그런 거죠. 제가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하신 ‘일기 형식의 일인칭을 버리고 삼인칭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작가로서의 관점과 사고 때문이라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삶이나 내면을 들여다보기보다 주위의 사물들과 사람들을 둘러보는 작가적 관점과 사고가 선생님 고유의 스타일을 만들었고, 그것이 돋보여서가 아닐까요? 다른 분들은 뭐라고 이야기하고, 또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윤성희 : 어! 글쎄요. 저는 일기 형식의 일인칭을 버리고 삼인칭의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게, 이런 것 같아요. 가령 제가 농담으로 ‘일기를 잘 안 쓴다’고 해요. ‘나 일기 안 써’ 그러는데요. 왜냐하면 소설이라는 것은 주인공이 나 일인칭이어도, 절대 내가 아닌 거예요.

   어느 날 제가 이런 경험을 했어요. 길을 가다가 막 노을이 지고 나무가 멋있는 거예요. 굉장히 큰 나무가 있었어요. 예전 같으면 ‘멋있다’ 그래야 하는데 ‘그녀는 나무를 바라보며 멋있다고 생각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김용규 : 타고난 소설가십니다.

 

   윤성희 : 그 느낌이 왠지 쓸쓸했어요. 예전에 읽은 어떤 일본 소설에서요. 소설 제목은 까먹었는데 이런 비슷한 대목이 있었어요. 중학생인 남자 아이가 하굣길에 개천을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뒤통수에 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는 귓불을 만지고 있다’고 했어요. 3인칭으로 자기를 만들어 생각하는 거예요. 그 단락의 마지막 문장이 ‘그는 너무 쓸쓸해졌다. 돌아와서 나는 생각했다. 나의 돌파구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창작이었다’라고 해요.

   그 대목과 내가 동시에 떠오르면서 ‘소설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삼인칭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제 생각이 작품에는 영향을 주었지만, 영향을 준 것이 상을 받거나 작품 평가가 좋게 된 것까지는 판단을 못 하겠고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게 계기였습니다.

 

   김용규 : 20세기 초,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이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는데요, 이들 작품의 공통성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줄거리에 비중을 두지 않고,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돌발적으로 떠오르는 주관적 체험과 생각, 감정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거지요. 이것이 그들 작품이 종전의 소설들과 다른 점이기도 한데요, 그래서 어떤 우연한 계기로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 다음부터는 마치 땅속에 묻힌 고구마들이 하나만 추켜들면 주렁주렁 매달려 따라 올라오듯이 전개됩니다.

   저는 선생님 작품들을 보면서 기법상 이와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무엇보다도 줄거리에 비중을 두지 않고, 돌발적으로 떠오르는 사람과 사물, 기억과 생각 등을 따라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그렇지요.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의 이야기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의식의 흐름’을 따라 무겁게 간다면, 선생님의 이야기는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경쾌하게 간다고나 할까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과 다른 점이 있을까요?

 

   윤성희 : 저는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해요. 그리고 이 「부메랑」과 「웃는 동안」 단편을 쓰기 전에 장편을 썼는데요. 그때 버지니아 울프 소설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어요. 공통점이라기보다는 어느 부분에 있어서 제가 흉내 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을 했고요. 이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한 단계 완성시켜 놓은 거니까, 나중에 읽은 후배 작가들은 그들이 산맥을 넘은 것을 어떻게든 흉내 내고 좇아가고 싶고 이런 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데 의식의 흐름 기법은 제가 따라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해요. 제 자신의 그릇도 작은 거 같고요. 그래서 제가 비법은 흡사하나 그보다는 더 간결하고 경쾌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아마도 의식의 흐름이란 것을 저는 징검다리처럼 사물을 좀 두고 사물을 따라서 건너가는 방법, 이런 흐름을 만든 게 아닐까 생각이 들고요.

   너무 창피한 얘기지만 작가가 되고 나서야 단편을 한 20편 쓰고 났더니 ‘아! 나는 소설에 대해 잘 몰랐구나’ 그런 걸 많이 알게 됐어요. 지금도 모르지만요. 전 시점이 뭔지도 몰랐던 거예요. 너무 아는 게 없었어요. 왜냐하면 문장을 써보면 알아요. 이론상으로는 저도 아는데 문장을 쓰고 나니까 일인칭, 삼인칭의 세계에서 쓸 수 있는 문장이 없는 거예요. 슬럼프 비슷하게 찾아왔을 때가 있었어요.

   이런 거예요. ‘그녀는 슬픈 듯 웃었다’ 이런 문장을 쓸 수 없었어요. 슬픈 듯? 그걸 누가 판단하지? 이런 생각이 들면 그럼 아무 문장도 쓸 수가 없고 ‘그녀는 웃었다’ 그거밖에 안 되는 거예요. 이런 시기가 있었어요.

   그런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까라는 생각을 할 때 아주 예전의 삼인칭 전지적 시점 같은, 이야기의 개입을 많이 하는 소설을 써보기도 하고, 전혀 개입하지 않는 소설을 쓰기도 했어요.

   「부메랑」에서 버지니아 울프와 그 선생님들과 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거기선 철저하게 주인공 내면을 쫓아가는데요. 저는 작가로서 전지적으로 관여를 하고 많이 이야기를 흩트려 놓는다고 할까요? 주인공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 휴대폰 얘기도 따라가고 타인의 역사도 따라가요. 고구마 줄기처럼 주렁주렁이 아니고 샛길로 빠져나갔다가 ‘아! 샛길이지?’ 하고 본궤도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 방식을 택해 보려고 했어요.

 



   김용규 :
겸손하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버지니아 울프의 터널파기라고 했던 것을 오늘날 우리의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지 않나 싶은데요. 한국의 버지니아 울프가 아닌가요?

 

   윤성희 : 돌아가신 분들이 그게 아니라고 할까 봐 걱정이 되네요.” (웃음)

 

   김용규 : 그렇다면 공은 선생님한테 돌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화는 저한테 돌아오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또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저는 오늘, 우리가 앞에 다룬 이야기와 연관시킨다는 의미에서 선생님의 작품을 프루스트나 울프의 작품들과 나란히 견주면서 질문을 드려 보고 싶은데요.

   프루스트는 자기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무의지적 기억(memoire involontaire)’을 따라 창작한다고 천명했어요, 처음부터 줄거리를 미리 짜놓고 창작하지는 않고, ‘무의지적으로’ 써나간다는 것을 의미할 텐데요, 그래서 이야기가 곁가지로 우회하면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궁금해요.

   선생님의 글도 문장은 짧고 템포가 빠르지만, 이야기는 수많은 곁가지로 우회하기 때문에 느리게 전개되거든요. 선생님은 작업을 어떻게 하세요? 처음부터 줄거리 없이 무의지적으로 하세요? 아니면 이야기 줄거리는 미리 정해 놓고 그 사이사이에 곁가지들을 끼워 넣는 작업만 하세요? 그것도 아니면 어떤 다른 방법으로 하나요?

 

   윤성희 : 글쎄요. 윗분들은 돌아가셔서 어떻게 쓰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렇게 쓰진 않고요. 머릿속으로 좀 더 구도를 잘 짜놓는 편이에요. 구도를 짜놓는다는 게 굉장히 재밌는 게 오늘 짜고 오늘 쓰면 그게 아닌 거예요. 그러면 또 내일 쓰다가 다시 짜고 그렇긴 하지만 머릿속에 언제나 아웃라인을 갖고 있어요.

   특히 단편에서는 좀 작가가 철저하게 건축처럼 설계도를 짜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한 측면으로서는 쓰다가 우연히 들어온 사건이나 우연히 찾아지는 대사를 받아들이는 편이기도 해요. 그럼 이야기가 제가 원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기 마련인데 다르게 흘러갈 때마다 멈추고, 어느 게 맞는지 판단하고 다시 쓰는 편이긴 해요. 그게 소설을 쓸 때 가장 재밌는 일 중 하나인데요. 저도 모르게 대사를 하나 써놓고 ‘너 요새 왜 술 안 마셔?’, ‘그냥 끊었어’ 그러면 친구가 ‘주인공이 알코올 중독인가?’ 말하면 주인공이 알코올 중독이 돼요.

   혹은 장편을 쓸 때 경험한 건데요. 제가 머릿속으로는 이 주인공이 3분의 2 지점에서 죽어야 되는데 죽지 않는 거예요. 다시 쓴 글을 읽어봤어요. 그 주인공이 제가 모르게 쓴 문장들에서 굉장히 스스로에게 생명력이 있더라고요. 그럼 죽이지 말아야지 그래요. 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그것을 받아들이는 편이긴 해요.

   여러분들이 영화에서 보듯이 첫 줄을 생각하면서 쫙쫙 써야지 그렇게 되지는 않는 거 같아요.

 



   김용규 :
선생님이 ‘우연히’라는 말을 계속 하셨는데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은 입천장에 닿는 마들렌 빵가루라든지, 빳빳하게 풀 먹인 냅킨이라든지, 또는 길에 까는 울퉁불퉁한 포석(鋪石) 등을 통해 우연히 과거와 현재를 잇는 회상에 빠지고, 그것을 통해 좌절에 빠진 그의 삶이 변하게 되는데요, 선생님의 작품들에서도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요.

   「부메랑」을 보면, 주인공은 고장 난 선풍기를 고치려다가, 서로 틀어진 관계가 된 옛 동창을 떠올리게 되고, 그 일을 통해 거짓으로 자기를 미화해 가던 그녀의 자서전에 변화가 일어나는데요, 어떠세요? 삶이란 본디 그 같은 우연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자신의 삶이나 내면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것들이 그 같은 우연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선생님에게 우연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윤성희 : 저는 우연이라는 게 이야기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 중 하나인 거 같아요. 제가 소설 쓰는 사람이니까요. 우연이 없다면? 엄마 아빠가 우연히 만났으니 제가 있겠죠. 그래서 소설에서 우연을 많이 쓰고 많이 받아들이는 거예요. 저희는 모두 우연이 있는데 시간을 말씀하신 것처럼 어제 우연을 겪었으면 다음날 그 우연에 대해서 판단해 보고 스스로가 자라고 성장해요. 그러다 보면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우연이 있는 거 같아요. 사람은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사건을 만나기 마련이라는 말을, 소설 속에서 좋아하거든요. 그렇게 처음에는 ‘왜 이런 우연이 왔지?’ 그러지만 10년, 20년 이상 되면 자기가 자기 삶을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우연이 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용규 :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생각하고 살면 생각하는 대로 살고, 생각 없이 살면 생각 없이 사는, 그런 것처럼 결국에는 우연은 오늘 이제 만난 우연, 이것을 그 다음에 우연이 아닌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찾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르주 풀레(Georges Poulet)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글에서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인 것이다’라는 멋진 말을 남겼는데요, 이때 풀레가 말하는 구원이란 자기가 누군지,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삶에 대한 공포, 무력감, 혐오감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말하지요. 어떻습니까? 「부메랑」 같은 선생님의 작품들에서도 회상 또는 기억의 연결이 이런 역할을 하나요?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아니라면, 선생님의 소설에서 회상 또는 기억의 연결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윤성희 : 저도 오늘 와서 선생님 강연을 듣다가 ‘회상이란’ 이 문장을 만났는데요. 이 문장이 다가왔어요. 이렇게 근사하게 생각해 보진 못했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반드시 기억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서사 장르 중에서 기억을 이렇게 마음대로 하는 건 소설밖에 없어요. 아무 때나 기억해요. 물마시다 기억하고 밥 먹다 기억하고 친구랑 싸우다 기억하고, 아무 때나 기억해요 기억도 아주 길게 해요. 주인공이 죽기 직전, 권총이 저한테 날아올 때 죽기 0.5초 전에 원고지 100매에 걸쳐서 기억할 수 있는 장르기도 해요. 그래서 맨 처음에는 이런 사소한 이유 때문에 기억을 아주 흥미롭게 여겼어요.

   그런데 어느 날 소설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까 나라는 사람을 완성하는 건 나중인 거 같아요. 가끔 제가 중학교 때 일을 반성하면서, ‘중학교 때 내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지?’ 그러면 15년 전의 사건과 마흔이 된 내 자신이 만나는 순간 17세가 되는 느낌?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이 「부메랑」이라는 소설에서 거의 마지막 문장에 자신이 쓴 자서전의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걸 주인공이 깨달으면서 내가 죽은 지 1년이 지났다라는 문장에서 다시 시작해야지라는 문장이 있어요. 독자의 대화에 가면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 묻는 질문이 많아요. ‘그래서 주인공이 죽었다는 거예요?’ 심지어 ‘유령이에요?’라고 물어요.

   자서전이 아이러니한 게 살아 있을 때 써야 하는데요. 살아 있을 때 누구를 위해서 쓰는 거예요? 타인에게 읽히기 위해서 쓰는 건 허무한 거거든요. 그래서 자신이 죽어서 이 세상에 없다는 입장에서 자서전을 쓴다는 것, 그래서 이 여자는 다시 첫 줄부터 써야 된다는 걸 깨닫는 거죠. 이것도 역시 ‘기억이라는 건 나를 나중에 완성시켰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하나의 측면에서 보면 소설이라는 것이 재밌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삶을 현재 살아가는 자신보다 훨씬 디테일하게 기억하면서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주변에 남자친구가 있는데 매번 남자친구가 술 취해서 ‘난 너 사랑해’ 백 번 외쳐도 지겹기만 할 뿐이에요. 소설에서는 백 번 외쳐도 주인공이 잘 느끼지 못하거든요. 디테일이라는 걸 통과하지 않으면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 거 같아요. 그런데 디테일이라는 것도 역시 기억인 거 같아요.

   선생님 강연에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지난 후에 아버지는 작년에 내게 무엇을 했지?’ 그런 게 생각나야지만 그 사람을 비로소 재해석하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그것이 없다면 그냥 ‘우리 아버지는 좋은 분이었지’ 말고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면 그럼 그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이것도 역시 문학 안에서 기억이 주는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기억들이 소설에서 역할을 하게 하고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요.

 


   김용규 :
버지니아 울프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돌발적으로 떠오르는 기억과 현실을 연결시키는 자신의 소설기법을 ‘터널 파기’라고 이름 붙인 적이 있는데요, 이 말은 자신의 소설이 서로 단절되어 존재하는 시간들, 공간들, 사건들, 인물들의 사이를 마치 ‘터널을 파듯이’ 연결함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새로운 진실들로 이뤄진다는 의미일 텐데요, 선생님 소설들도 역시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들, 기억들, 사물들, 단어들을 연결시켜 새로운 진실을 밝혀내는 일을 합니다. 울프식으로 표현하자면 ‘터널 파기’를 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부메랑」에서 그렇듯이 이렇게 해서 새롭게 드러난 진실이 꼭 아름답고 바람직한 것만은 아닐 텐데요, 터널을 팠더니 추하고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드러났다면, 그것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삶을 도울까요?

 

   윤성희 : 글쎄요. 아주 추한 진실이 너무나 추한 진실이어서 무슨 고대 희랍 비극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게 아니라면, 웬만하면 우리 삶을 돕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그런데 이건 좀 너무 인간을 모르는 게 아닌가 좀 조심스럽긴 한데요.

   우리가 이게 추한 진실이든 만나야 했던 사건이든 자꾸 자기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재해석해야 된다는 것은 이런 거 같아요. 시간하고도 비슷한 거 같은데요. 마르케스 자서전 맨 앞에 나오는 말 중 이런 게 있어요.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어떻게 기억하느냐’라는 말이 있어요. 선생님이 자서전을 쓰는 건 언제나 자기 인생을 다시 재구성해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뒤돌아보지 않으면 자기 삶을 살았던 자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 내 인생은 장편 7권은 나와 이러는데 안 나오는 이유는 자신의 삶을 나열식으로 알지 되돌아봐서 겹치지 않는 거예요. 7살의 나와 60살의 나를 겹쳐 보거나 15살의 나와 현재 나를 겹쳐 보지 않는 거 같아요. 그런 행위를 인간이니까 해봐야 되지 않나 싶어요. 자기 자신이 망가지더라도, 인간이라면 그래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제가 말하고도 좀 추상적인 거 같은데요. 「마담 보바리」 소설을 보면 거기에 엠마 보바리 남편인 샤를 보바리란 사람이 엠마가 죽은 후에 부인을 생각하면서 잠드는 장면이 있어요. 거기 이런 게 있어요. 그 사람은 부인을 굉장히 사랑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눈을 감고 부인을 생각하면 할수록 기억나지 않아요. 그래서 꿈속에서 부인을 안으려고 하면 재가 되어 푹 가라앉는 꿈을 꾸어요. 저는 그게 의문이었어요. 사랑한다고 해놓고 죽은 후에 왜 기억하지 못할까? 그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면 샤를은 디테일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요. 사랑만 한 거예요. 그래서 죽은 후에 얼굴을 기억 못 한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런 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 게으른 사람이 된 거죠. 무덤덤하게 죽게 되는 거예요. 그런 게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김용규 : 결국 선생님 말씀을 정리해 보면 우린 살기만 하면 안 되고 사는 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네요.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며,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자기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했어요. 이 말은 인간은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야기에 의해 재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새로운 자기를 구성하기 위해 벌이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베케트의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에서 주인공 크랩도 녹음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서전을 쓴 셈이지만, 그는 끝내 이야기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를 통해 재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이 싸움에 패배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부메랑」을 보면, 주인공이 자서전을 써요. 그런데 그녀는 기억을 미화하고, 왜곡하며 거짓으로 쓰거든요, 그러다 결국 “내가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다”로 시작하는 자서전을 다시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소설이 끝나는데요, 그녀에게 자서전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윤성희 :
부메랑」 주인공에게 왜 가짜 자서전을 쓰게 했냐 하면, 주인공은 샤를이라는 남자처럼 자기 인생에 대해서 디테일이 너무 없는 사람인 거예요. 어느 날 자서전을 쓰려고 거짓된 디테일 하나를 만들어 보는 거예요. 사과나무 아래 누워 보니 그 향기는 너무 좋았다고 하고 그럼 그걸 정당화시키기 위해 과수원 집 딸을 하고요. 하녀도 있고 식모도 있어야지 하죠. 그러다 보니 계속 거짓된 자서전을 쓰게 돼요. 그래서 이 여자는 자기 삶을 재구성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그런 게 없어서 거짓된 자서전을 쓴 걸 깨닫고 맨 마지막에 자신이 팔다리가 해체된 추상화 느낌을 받으면서 이것이 잘못된 거구나 깨닫게 되는 거거든요.

   아마 제 소박한 소망은 이 여자의 남은 일생이 기니깐 남은 인생은 이젠 스스로 사소한 기억이 사소한 게 아니라는 것, 인간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그 사소한 기억들을 하나하나씩 쌓아서 자기를 완성한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그때부터 조금 더 행복하게 살게 하고 싶었어요.

   원래는 주인공 나이가 너무 많았는데, 너무 늦게 깨닫는 게 아닌가 불쌍해 그래서 사는 나이라도 길게 하자, 더 긴 세월을 살게 하자 해서 나이를 낮췄거든요. 그녀에게 자서전은 그런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요.

 

   김용규 : 선생님의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부메랑」은 저를 비롯한 오늘 여기 계신 분들에게는 더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될 텐데요, 그 가운데 한 부분을 낭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잠시 정리하자면 오늘 우리는 과거란 사라져 버린 어떤 게 아니고 회상에 의해서 기억에 의해서 현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걸 알았습니다. 또한 현재 역시 좋든 싫든 미래 어떤 지점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칠 거란 것도 알았죠. 그렇다면 우린 이제부터라도 회상을 통해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되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정체성, 내가 누구고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찾아야 합니다. 다가올 미래를 위해서 지금 이 순간도 보다 소중한 기억이 되도록 매순간 순간을 그렇게 만들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지 어느 미래 시점에서 또 오늘 지금 한 이런 행위들로 해서 새로운 자기가 형성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5월입니다. 좋은 계절이죠.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다. 주말엔 부모님이나 옛 선생님들 찾아뵙고 소중한 기억 되살려 보는 게 어떨까요? 아이들과 함께 화분에 꽃나무라도 심으면서 아름다운 기억들을 만들어서 간직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나중에 여러분들 삶에, 그 아이의 삶에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야만 크랩처럼 한 번뿐인 삶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나서 뼈를 저미는 회한과 절망 속에서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클레리사처럼 삶에 대한 무력감 혐오 공포에서 벗어나서 끝끝내 살면서 조용히 걸어가게 하는 존재의 용기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은선(소설가 진행) - 스피드 OX 퀴즈

 

  ─ 솔직히 어떤 문학상의 경우 드디어 올 게 오고야 말았다고 생각했다.(X)

  ─ 혼자 살고 있는데 사실 주변에 괜찮은 남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실 나는 소설과 결혼했다.(X)

  ─ 난 어딘가로 늘 떠날 결심을 한다(O)

  ─ 솔직히 소설가가 된 것이 행복하다(O)

 

 

 

[독자 질문] 윤성희 답

 

   Q : 앞으로 10년 후의 꿈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 저는 미래의 꿈은 별로 그렇게 크게 세우지 않는데요. 제 꿈은 눈이 침침해지는 시기가 좀 늦게 찾아와서, 꾸준히 지금 같은 속도로 책을 읽었으면 좋겠고요. 1년에 2~3편의 단편과 3~4년에 장편 하나씩을 쓰는 삶을, 노인이 될 때까지 했으면 좋겠다는 꿈이 있어요.

 

   Q : 평소 윤 작가님 소설을 재밌게 읽고 있는 팬입니다. 소설을 쓸 때 가장 재미있다고 느끼는 때가 언제인가요? 그리고 광천 삼화농업 부사장이 마흔두 살인데 돼지 오백 마리, 소 이백 마리, 차도 두 대나 있는데 만나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A : 후자부터 대답하면 그런 좋은 신랑감이 있으면 본인(이은선)이 만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하구요. 그리고 (소설을 쓸 때 가장 재미있다고 느끼는 때는) 아까 제가 얘기한 것 중에 있는데요. 저도 모르게 문장이 주인공의 운명을 바꿀 때 재미있고요. 소설을 완성하고 나면 언제나 말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요. 그럴 땐 다른 짓을 해요. 마감하고 대중목욕탕 욕조에 앉아 있으면 집에 가서 다 지워야 되겠군 그래요 그러면서 집에 가서 다 지워요. 그럴 때 행복해요.

 

   Q : 저도 소설을 쓰고 싶어 하고 쓰고 있는 사람인데요. 항상 구상이 떠오르잖아요? 사소한 거라도 소설에 집어 넣어야겠다 생각하는 것들은 주변에 필기도구를 갖고 다니면서 메모하시는지요? 저는 꿈까지 꾸다가 일어나서 머리맡에 놓아 둔 종이에 쓰고 자요.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순간을 다 캡처하고 싶은데요. 진짜 소설가들은 어떻게 하는지, 소설가의 노트 같은 게 궁금해요.

   A : 저는 주로 휴대폰에 있는 메모장 기능을 많이 쓰고요. 술 마실 때 영감이 많이 떠올라요. 다음날 전혀 알 수 없어요. 언젠가는 술자리 같이 있는 사람 이름을 적었어요. 까먹으면 이분에게 여쭤 봐야지 하고요. 다음날 여쭤 보면 그분도 기억 못 한다고 하더라고요. 동료 작가들을 보면 아주 심한 메모광도 있고요. 저는 그 정도는 아니고 단어들 적어 두는 편이에요. 저는 대신에 이런 상상을 많이 해요. ‘만약에’라는 상상을 하루 50개씩 하는 거죠. 그게 재밌어요. 재밌어야 되잖아요? 뭐든 시작을 할 때 그리고 자서전을 쓰는 거와 비슷한데요. 매일매일 첫 문장을 한 번씩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아요. 자신이 소설 속 3인칭이라고 생각하고 첫 문장을 만들어 보는 거죠. 그런 것들을 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 중 하나고요.

 

   Q : 오늘 강의를 듣다 보니까 평소에 관심이 있는 부분이 생겼어요. 꼭 프로필이 화려한 전문작가가 아니라도 평소에 자서전을 쓰고 싶은 소망이 좀 있었어요. 의식의 흐름이랄까, 재구성, 어떤 기억의 단절, 여러 가지 말씀들을 하셨는데, 그중에서 일반인이 보통 글을 쓰기가 쉽진 않은 거죠. 제게는 어떤 조언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A : 저도 소설 속 주인공처럼 자서전을 쓸 생각을 했는데요. 제가 못해 봐서 무엇이 필요할까는 생각을 못해 봤는데 아까 말씀드린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자서전도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살았던 그 자체가 아니라 ‘왜 얘기하고 싶은지, 어떻게 얘기하고 싶은지’가 중요해요. 의식의 흐름, 이런 거 전혀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전 작가가 되고 난 다음에야 동료 작가들하고 얘기할 때 아는 게 없어서, 책을 읽어야지 그러면서 알았어요. ‘어떤 기법으로 써야지’ 이런 건 중요하지 않고, ‘나는 왜 이걸 쓰고 싶어 할까’ 하면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Q : 전 55세 된 서울에 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소설을 처음 접하게 된 경우가, 인천에 살 때 이문열 선생님 댁에서 한 2년간 배웠습니다. 소설가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어떤 생각으로 글을 쓰고 있을까 생각했어요. 하루에 두 시간 듣는 게 어려워서 졸다시피하고 그랬는데 경희대학교에서 2년 공부해 보니 재밌더라고요. 잘 쓰든 못 쓰든 간에 글 쓰는 게 참 좋구나 하면서 매일 글을 씁니다. 윤성희 작가님 글을 보니 좋은 게 너무 많아서 많이 베꼈습니다. 글 쓰는 데 도움이 많이 되겠고요. 오늘 좋은 글 많이 배웠습니다.

   A : 감사합니다.

 

   Q : 오늘 여러 가지 키워드가 나왔는데요. 저는 소설 장르의 소설보다 세상에 떠도는 자서전이 진짜 소설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윤성희 작가님의 키워드 중 하나가 시간이었는데, 사시면서 시간에 대해서 갑자기 문득 새삼스레 인식하게 된 순간이 있을 거 같아요. 최초로요. 그게 몇 살 때였는지요? 아무 의식 없이 그냥 살다가 ‘시간이 이런 건가?’ 하고 번개 밝듯이 그런 순간이요.

   소설을 쓰시면서 나 자신과 거리 두는 3인칭으로 사물을 대하는 걸 말씀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다 보면 내가 투영이 되지 않을까요? 나의 관점, 취향이 어떤 주인공에게 들어가서 이거 아니지 않을까 하면서 브레이크 거는 경우가 없는지 두 가지 질문 드립니다.

   A : 저는 어릴 때 저희 어머니가 방학이 되면 저를 외갓집으로 데려다줬어요. 한 달씩이요. 할아버지, 할머니밖에 안 계시고, 깡시골도 아닌데 소하고 지내고 그랬어요. 그럴 때마다 어릴 때부터 뭔가 심심한 게 되게 좋았어요. 뭔가 멈춰 있는 듯한 느낌? 그런 게 오늘날 제게 영향을 주기도 하는데요. 어릴 때도 ‘굉장히 심심해’ 이런 말 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제가 이게 내가 시간을 인식한 최초의 사건인 줄은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한 십 년 전쯤인가 하루 종일 저희 집에 앉아서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사건이 뭔가 생각해 봤어요. 그때 할아버지는 어땠고 옆집엔 누가 살았고 그런 얘기를 저희 어머니께 물어보면 다 틀려요. 왜곡돼요. 그렇게 최초의 사건을 기억해 내려 한 순간이 있었어요. 그걸 왜 내가 기억하려 할까 그러다가 하루 종일 기억하려는데 기억나지 않았는데 혼자 길을 걷다가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앉아서 차 몇 대를 놓치고, 뭔가 멍하면서 어리둥절했어요. 제가 망연자실이란 단어를 되게 좋아해요. 망연자실, 어리둥절, 이게 제 인생의 키워드인 거 같아요. 그런 순간이 있어요. 내가 왜 여기 서 있지? 기억상실증처럼 그러고 있을 때 맨 처음 영상처럼 떠오르는 사건이 있는데 매번 달라요. 영상처럼요.

   소설을 쓸 때 제가 제 자신을 버리고 3인칭으로 쓰려고 노력하는 건 맞지만 어쨌든 쓰는 건 저라는 사실은 버릴 수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작가는 소설을 잘 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게 아니라 제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 필요가 있어요. 주인공에겐 어쨌든 피하고 싶지 않아도, 내 자신이 투여되기 마련이에요.

   제 가치관, 취향, 제가 현재 생각하는 것. 그러니까 제 자신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오늘날 지금 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가 들어가는 게 맞는 거 같아요. 그것을 어떤 때는 브레이크 걸고 싶을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놓아두기도 하는데요. 가령 제 자신을 1000개의 블록으로 나누면 이번 소설에는 두 개쯤 선물하고 다음에는 두세 개 정도 이식하는 거죠.

   크랙의 가장 큰 단점이 이런 거 같아요.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 자긴 이렇게 살아야지, 그렇게 살아서 그런 거 같아요.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게 더 먼저인 거 같아요. 그러다 보면 주인공에 제 자신이 들어가겠죠. 그럴 땐 부끄럽기도 하고, 피할 수 없는 거 맞아요.

  

 

[독자 질문]  김용규 답

 

   Q : 자서전을 쓰신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쓰고 싶으십니까?

   A : 생각 안 해 봤는데 오늘 얘기 맥락에서 보면 지금 현시점부터 거꾸로 써야겠죠. 현시점부터요. 아마 그렇게 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서전 쓰려면 좀 오래 살려고 합니다.

 

   Q : 시를 좋아해서 선생님 책을 접하다가 왔는데, 지난번하고 이번에 와서는 작가들에 더 매료가 됐어요. 시하고 철학하고 결합하다 보면 써야 될 시가 있고 좋아하는 시가 있잖아요. 좋아하는 철학과 시가 있을 때 어떻게 쓰시는지, 정말 좋아서 쓴 책은 어떤 책인지요?

   A : 첫 책이에요. 첫 책에 90여 편 시를 뽑아서 썼는데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와 연관된 것들을 찾아서 썼습니다. 시가 원체 많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다 제가 좋아하는 시거든요.

   특별히 더 좋아하는 시라고 하면, 저는 나이가 있어서 요새 젊은 작가들 시를 접할 기회가 없었고요. 우리도 젊었던 시절이 있으니까요. 제가 젊었을 때 유치환 선생님 시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행복도 그렇구요. 저 책을 쓰면서는 일단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거기에 맞춰서 시들을 골라서 썼죠. 대답이 됐습니까? (웃음) 정말로 좋아하는 시들을 썼어요.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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