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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김선우 시인과의 대화

  • 작성일 2012-06-02
  • 조회수 3,081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_제1회

김선우 시인과의 대담

 

 

[대담] 김선우 시인 과의 대화

 

 

 

 

 

 

   김용규 : 에코페미니즘을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여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 김선우 시인입니다. 시집은 쌉니다. 팔천 원이에요. 그래서 우선 본 질문을 드리기 전에, 선생님은 언제부터 시에 관심을 두고 시를 쓰시기 시작하셨어요? 궁금합니다. (관객 웃음)

 

   김선우 : 질문하시는데 왜 웃으세요?

 

   김용규 : 제가 말이 어눌해서 그럽니다.

 

   김선우 : 저도 말이 어눌한데 어떡하죠?

   시에 관심을 갖고 산 건 오래된 거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일기 쓰는 거 좋아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썼어요. 일기 쓰면서 일기장하고 대화하고 노는 게 일종의 문학행위였다고 한다면, 그 시절부터 문학을 광범위하게 했다고 해야 할까. (웃음) 시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훨씬 나중에, 이십대 중반쯤 사는 게 너무 지랄 같아서 ‘살아야 돼? 이렇게? 견뎌야 돼?’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외람됩니다. 선생님.

 

   김용규 : 사는 게 지랄 같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구체적으로 생활고라든지, 실연을 당하셨다든지 어떤 것인지요?

 

   김선우 : 아까 나이가 많을수록 걱정이 많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대개 이십대 초중반부터 걱정이 많았던 거 같아요. 세상에 별로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이 사는 방식, 지구별에서 인간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다가, 이 지구가 우리를 얼마나 받아내고 견뎌 줄까? 백 년 후에 인간을 상상할 수 있을까? 200년 후에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이런 생각들이 심각하게 들었던 때가 20대 초반을 지나면서였거든요. 그때까지 저는 인간의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선한 의지와 꿈에 의해서 아름답게 디자인될 수 있다고 믿었어요. 10대와 20대 초반, 대학 다닐 때는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이 있을 것이다 믿었어요. 이렇게 경쟁과 착취로 유지되는 사회가 아니라 뭔가 좀 우리가 공공의 선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가치에 의해서 조금씩 더 나누고 더불어 살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할 것이다 믿은 게, 20대 초반이었어요. 그걸 지나면서 현실이라는 장벽을 맞부딪치면서 인간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20대 청춘의 육체적 정신적 특성이랄까. 불같이 절망하고 불같이 희망하고 불같이 사랑하는 그런 질풍노도의 특성이 고스란히 제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비관을 작동시켰다고 할까요. 일종의 ‘극단적 비관’이 찾아왔죠. ‘인간은 절대 지금까지의 자기 삶의 방식을 포기 못하고 점점 더 지구에 암 덩어리 같은 존재가 되어 갈 것 같다, 그럼 희망 없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만사가 다 귀찮아지고 우울해지고 전망을 찾기 어려워지더라고요. 그 시기엔 ‘어떻게 살까’보다 ‘어떻게 죽을까’를 더 자주 고민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죽을까 고민하는 것도 실은 되게 고단하더라구요. 진짜 죽을 것도 아니면서 만날 어떻게 죽을까를 고민하는, 일종의 자기 연민 같은 게 작동했던 시기이기도 하겠고요. 아무튼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하다 죽어지지는 않는 어느 날에 시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어느 여행지에서 하게 됐어요.

 

   김용규 : 타고난 시인입니다. 타고난 에코페미니즘 시인이에요. 우선 시집에는 ‘나의 철학’이란 시가 들어 있네요.

   “낭독회에서 독자 한 분이 물어 오셨다. 첫 시집부터 줄곧 똥오줌 이야기가 많단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에코페미니즘 철학 때문이겠죠 하시길래, 오 그렇죠 철학!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엄마가 문 밖에서 끼루룩 웃으신다”

   그런데 어떠세요? 어머니께서는 웃으실망정 스스로 에코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세요.

 

   김선우 : 저를 이루는 다양한 세계관들이 있겠는데 그중 중요한 한 축이죠.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철학적 자세로 세계를 바라보고 세계 속에서 자신을 운영해 가는 방식은 매우 섬세한 주의를 요하는 작업이지요. 매우 섬세하게 타인에 대해 배려하고 배제와 소외가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더불어 살게 하는 실천적인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에코페미니스트냐고 물으면 제 대답은 예스지요. 에코페미니즘적 세계관을 생활 속에서 잘 실천하고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자기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겠지만요.

 

   김용규 : 그러면 잘들 아시겠지만 그래도 에코페미니즘이 뭔지 설명해 주세요.

 

   김선우 : 그런 건 철학 선생님이 설명해 줘야죠? (웃음)

 

   김용규 : 김 선생님 대담하려고 교보문고에 가서 에코페미니즘 책을 한 권 사서 열심히 사서 읽었는데 눈도 침침하고 잘 모르겠더라고요.

 

   김선우 : 아까 여러분 들어오시기 전에 저희 둘이 앉아서 재미있고 행복한 시간 만들어야 할 텐데 이런 얘길 나누다가, 선생님께서 ‘저는 워낙 재미난 말을 못해서 재미없을 거예요’ 했는데, 진짜 재미있으시죠? 강의 내내 ‘철학 강의가 이렇게 재미있구나, 어쩜 이렇게 쏙쏙 들어오고, 내 말을 저렇게 생선뼈 바르듯이 쏙쏙 발라 넣어 줄까?’ 대리 쾌감 같은 걸 굉장히 많이 느꼈어요.

   우리가 그렇죠. 이론에 대해서 장황하게 얘기하기 시작하면 사실은 그 이론에 대한 정설과 반대 얘기와 다양한 가설에 대한 얘기를 몽땅 다 해야 해서, 항상 시간이 너무나 쓸데없이 많이 소모되는 거 같아요. 에코페미니즘에 대해서 물으면 저도 딱 잘라서 ‘이런이런 거예요’라고 말할 수 없는 거 같은데, 익히 알다시피 에콜로지와 페미니즘이 결합된 말이잖아요? 에콜로지에서 제가 보는 가장 긍정적인 가능성은 그간 서양의 이성중심주의가 노정한 문제들, 인간이 모든 생태계의 최상위에 있는 특별한 존재이고 다른 생명체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여기고 뭇 생명에 대해 군림하는 독선적 자기 확신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지점이에요. 또 굉장히 실천적인 학문이고요. 인간의 이성과 오만한 탐욕에 대해서,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별에 존재하는 무수한 생명들이 낱낱이 몽땅 존귀한 존재들이라는 것으로, 인간 상위가 아니라 생명체 모두를 수평 관점에 의거해 강강술래처럼 손잡게 만드는 관점의 전환을 가장 강력하게 구현하는 생태주의에 페미니즘이 결합되면서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우리 삶에 매우 전복적이고 실천적인 관점의 변화를 요구하죠. 인간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차별들 중에서 참으로 길고도 질기게 차별당해 온 남성과 여성의 차별의 역사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기를 든 페미니즘은 필연적으로 모든 차별받는 존재들과의 연대의식을 작동시키죠. 차별에 대한 저항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차별 없는 사회의 행복의 가능성과 화해와 상생이겠죠. 더러 항간에 떠도는 말들 중 가장 크게 페미니즘을 오해하는 것이, ‘남성이 우리를 지배해 왔으므로 당신들이 우리를 지배해 온 만큼 우리가 당신들을 지배하겠어’라는 자세가 페미니즘이라는 오해를 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데, 그건 페미니즘에 대한 정말 심각한 오해고요. 성적인 차별이나 계급적인 차별이나 민족, 인종적인 차별이나 인간사에 존재하는 그 모든 차별과 차등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면서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조건으로 인해 차별받고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지혜로운 학문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해요. 지구상의 모든 생명 존재들 속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종이 다른 생명들에 비해서 특별히 우월해서 착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겸허하게 통찰하게 해주는 에콜로지와 차별의 폭력에 저항하며 조화와 상생을 추구하는 페미니즘, 이 매력적인 두 가지 학문이 착 붙으니까 좋은 방식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세상에서 실천하며 살 수 있는, 다양한 실천론들이 만들어지는 거 같아요. 소박한 자연보호운동부터 반핵 운동, 공정무역 같은 녹색 소비자 운동, 소소하고 아기자기하고 재미난 많은 운동들이 에코페미니즘의 범주 속에서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지요.

 

   김용규 : 오! 참 말씀 잘하시죠? 제가 뭐 여쭤 보기가 좀 무섭습니다. 비교되니까요. 그런데 새로운 걸 알았어요. 페미니즘에 대해서 특히 남성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시죠? 우선 페미니스트들에게 겁먹지 않습니까? 페미니즘은 남성보다 여성이 우월하고 인간보다 자연이 우월하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방금 김 선생님 말씀 들어 보니까 에코페미니즘은 과격한 페미니스트 주장과 달리 그렇게 양분해서 위계적 질서를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또 쌍방이 적대관계를 갖고,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종전 가부장 제도나 여성이 남성보다 우익에 서야 한다는 그런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 사실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 위치만 바꾸는 거죠. 동전 뒤집기처럼. 그래서 동전이 뒤집힐까 봐 남성들은 항상 겁먹고 있었습니다. 가정적으로 위기를 겪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저도 그렇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김 선생님 말을 들으니 그게 아니고, 에코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 자연과 인간, 소비자와 생산자, 보편적 문화와 지역적 문화, 이런 것들이 서로 상호 의존적으로 상호 연결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가 동등하게 서로를 존재하게끔 위해 줘야 한다고 이런 내용으로 이해가 갑니다. 그래요. 그래서 만물은 서로 연결돼 있고 의존돼 있다는 이런 에코페미니즘 세계관에 적극 동의하고자 합니다. 학교에서는 보통 이것을 유기체적 세계관이라고 배웠죠? 이것은 사실상 고대, 그리고 중세를 지배해 오던 세계관이지요.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선생님께서 왜 이 같은 사유를 하게 되었는지 또는 우리가 왜 이런 세계관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아니면 남인도에 있는 영적 공동체 오로빌에 다녀와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라는 에세이집도 내셨는데요. 그 얘기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해주시죠.

 

   김선우 : 그게 제가 특별히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건 이런 자리 나와 보면 알겠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갖고 있는 것인데, 굳이 역추적을 해보자면 가령 이런 거죠. 제가 강원도 강릉에서 되게 촌아이로 태어났어요. 뒷산에 자그마한 야산 동굴 속에 내 아지트 만들고 나무랑 얘기하고 ‘오늘은 어떤 새랑 놀까? 어떤 버섯을 딸까?’ 이런 일상에 너무 행복해한 유년을 보낸 깡촌의 아이였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자연의 모든 존재들과 구성요소들에 대해 인간과 친구지 수직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우친 것 같아요. 제가 나중에 머리가 큰 다음에 ‘아! 네가 가진 관점을 에코페미니즘이라고도 한다는구나’ 그래서 에코페미니즘 책을 읽어 보니 ‘아! 바로 내 생각이잖아’ 하고 책을 보게 됐는데요. 그런 종류의 책들에 예로 나오는 게, 실제로 제가 유년에 경험한 것들이 되게 많았어요. 제가 대가족에서 자랐는데 농부였던 저희 할아버지는 콩밭에서 콩을 심는데 진짜로 한 구멍에다가 콩을 세 알이나 네 알을 넣었어요. ‘콩 하나에서 싹 하나가 나는데 왜 이렇게 많이 심어?’ 하면, 이게 다 인간 것이 아니라는 의미의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신 거예요. ‘싹이 트면 새도 와서 먹어야지. 다람쥐도 와서 먹어야지. 쥐도 먹어야지. 남는 건 잘 키워서 우리 입속에 들어오면 하늘의 뜻이지’ 이런 식의 얘기를 자연스럽게 하시던 어른들 속에서 자란 영향이 있겠지요. 또 가령 설거지하고 나면 설거지물 버릴 때 뜨거운 물 수챗구멍에 휙 버리지 말라고 할머니에게 야단맞고 ‘앗! 뜨거워’ 하는 개미들 벌레들 이런 것들이 다친다고 혼이 나요. 그런 것이 초가지붕 막 뜯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던 산 밑 가난한 감나무 집에 살면서 그냥 체화되었던 말씀들이고 경험들이에요. 나중에 보니까 그런 것들이 굉장히 특별한 경험처럼 특별히 소개도 돼 있고 그래서 ‘야! 이거 나 횡재한 집안에 태어났는데…….’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죠. 인간이 귀한 것만큼 하나도 차등 없이 개미나 지렁이 한 마리, 밤나무 한 그루, 꽃밭에 꽃 한 송이 그런 게 귀한 목숨이라는 것을 알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셨던 그런 어른들의 관점이 사실은 고스란히 지금 우리에게 강력한 문제제기 하는 거예요. 지구 멸망이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위험사회에서, 지금처럼 탐욕한 인류의 삶의 방식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자발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만든 오로빌 같은 실험공동체도 그런 맥락의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거고요.

   ‘이렇게 살다 지구 어떡해?’ 걱정 많은 어른처럼 ‘이렇게 살다가 그냥 망할 수는 없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지구 한끝에 모여 인간 사회에 만연한 차등과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고 인간이 어떻게 서로에게 더불어 좋은 존재들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삶으로 경험해 보고자 하는 그런 마을이에요. 오로빌에는 작년에 다녀왔지만, 공공선에 바탕한 다양한 실험을 하는 아주 많은 공동체들이 전 세계 곳곳에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 공동체들을 다니는 것이 저에게는 많은 가르침도 주고, 다양한 경험도 좋아해서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지요.

 

   김용규 : 같은 맥락에서 『나의 무한한 혁명』 가운데 ‘고구마 밭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옆」이라는 시에 눈길이 가는데요, 이 시에서 선생님은 고구마를 인간의 심장에 비유한 다음, 고구마의 번식을 “꾸덕꾸덕한 심장 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여리고 따뜻한 누군가의 목숨줄이 생겨나/ 너는 좀 넓은 데서 숨 쉬라고 가만히 뱉어 놓은”이라고 사랑스럽게 묘사함으로써 존재의 상호연결성과 의존성을 노래한 것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이 제목이기도 한 ‘옆’이라는 용어입니다. ‘위’도 ‘아래’도 아니고, ‘앞’도 ‘뒤’도 아닌 ‘옆’인데요, 선생님에게 ‘옆’이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김선우 : 우리 사회가 알게 모르게 행하는 폭력들 중에 수직적 위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많은 것 같아요. 우린 아주 어려서부터, 지금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반 친구들끼리의 경쟁과 시험 성적을 통한 순위 매기기와 그런 경쟁을 통해서 위로 올라가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학습을 하면서 살아가죠. 모든 교육을 다 마치고 직장에 들어가서도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올라가야만 살아남는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잖아요? 선생님이 ‘이렇게 살다 보니까 세상 뜨죠?’라고 말씀하신, 정말 그렇게 위로위로 올라가려고 안간힘쓰다 세상 뜨는 거죠. 옛날에는 ‘위로위로 가다 보면 뭔가 꿈꾸던 세상이 있을 거야’라는, 비록 그것이 헛것이라 할지라도 ‘꿈을 좇아’ 위로 올라갔다면, 이젠 꿈조차도 이미 너무나 더러워진 거예요. 헛것이라도 꿈을 좇아 위로위로 올라갔다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이젠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위로위로 올라가야 되는 사회예요. 살아가기 위해서 누군가와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밟아야 하고 퇴출당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승진시험 준비해야 하고 그러다 어느 날 세상을 뜨게 되는 이런 사태들, 이런 기가 막힌 폭력의 사태들에 언제부턴가 우린 너무 무감각해 있다는 것이 어쩌면 최고로 두려운 일이란 생각이 든 거예요. 일상에 내재해 있는 폭력에 대해서 우린 이제 심각해하지 않아요.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거죠. ‘그게 사는 건데’라고 살아가야만 살아지는 이 슬픈 족속들, 이 슬픈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하루빨리 알아야 하는 거, 하루빨리 우리 일상으로 데려와야 하는 거, 저 위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 친구, 사랑과 우정의 관계로 가꾸어야 하는 이 ‘옆의 존재들’만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소중한 관계들을 옆에다 두고도 알아채지 못하고 혹은 방치해 두고 끊임없이 위만 쳐다보고 가는 삶이 아니라 수평 위치로의 강력한 전환, 이것이 절박하게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옆’이라는 말을 사랑해요.

 

   김용규 :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중요한 말을 해주셨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까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말이 생각납니다. 인지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움베르토 마투라나는 사랑을 “일상생활에서 내 옆에 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규정했는데요. 다른 존재를 내 옆에 받아들여 저대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의미지요. 이 사람이 생물학자입니다. 이게 지난 수억 년을 거듭한 생물들의 끊임없는 생존경쟁 진화를 통해서 얻어진 지혜라고 이런 얘기 하는 것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다 아시다시피 사랑이라는 게 다의적입니다. 그래서 참 아무데나 사용할 수 있지만, 참 어디에도 사용하기 어려운 말인데요. 쉬운 얘기로 우선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을 자기 옆에 두고 싶어 합니다. 그런 욕망만 있는 게 아니고 한걸음 더 나가서 그 대상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데요. 그러니까 가령 자식을 극진히 사랑하는 부모가 그 아이를 내 옆에 두고도 싶지만 소유물처럼 다루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남녀 간의 애정 관계에서도 끊임없이 그런 힘겨루기, 줄다리기가 계속됩니다. 선생님 시 「내꺼」에 묘사된 “소유격에 숨어 있는 마음의 그림자 노동”이지요.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는 다분히 가부장적인 사고이자 폭력이라고 저항할 수밖에 없겠는데요. 이런 모든 소유격에 숨어 있는 마음의 그림자 노동, 자식하고도 남편하고도 끊임없이 합니다.

   이 시에서 선생님은 “말이야 천만 번 못 하겠는가 내 마음이 당신을 이리 사랑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당신꺼라고 말하지 않는다/ 햇살을 곰곰이 빗기면서 매일 다시 생각해도/ 당신이 어떻게 내 것인가 햇살이 공기가 대지가 어떻게”라고 읊었습니다. 어떤 존재도 다른 존재의 소유물이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된다는 의미겠지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뭔가요?

 

   김선우 : (웃음) 제가 계속 이렇게 웃으면 사람들이 웃던데……. 왜 다들 이렇게 진지하세요? 되게 심각하신 것 같은데요.

 

   김용규 : 심각하십니다. 선생님 말씀에 대한 기대가 많고 심각하신 것 같습니다.

 

   김선우 : 제가 지금 갑자기 「내꺼」라는 시를 낭독을 해드려야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괜찮죠? 돌발상황입니다. (낭송)

 

   김용규 : 왜 선생님께서 예정에 없던 시를 낭송했는지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 낭송한 것 같아요. 용서하시고요. 제가 낭송을 듣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고대 언어에는 소유를 나타내는 것에는 동사가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내가 소 한 마리를 가지고 있다’ 할 때 영어로 ‘해브(have)'가 없었다는 거예요. 단지 ‘소 한 마리가 옆에 있다’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존재론적으로요. 그런데 산업사회가 된 이후에 서구에서도 소유동사를 사용하는 일들이 급작스럽게 늘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탐욕스러워진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와서는,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것들까지도 소유동사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치통을 가지고 있다’, ‘두통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들은 소유동사를 옛날 영어에서 쓸 수가 없었답니다. 심지어는 나는 ‘아내를 가지고 있다’, ‘애인을 가지고 있다’ 스스럼없이 쓴다는 겁니다. 뭔가를 억압하고, 존재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이런 에리히 프롬의 얘기가 낭독 중에 떠올랐습니다.

 

   김선우 : 소름 돋았어요. 완전 딱 맞아요.

 

   김용규 :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내 것이 아닌 당신을 오늘도 다만 사랑한다라고 표현하신, 소유하지 않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이제 나이 들어 그런지 소유하지 않는 사랑은 왠지 좀 쓸쓸하고 뭔가 그래도 사랑이라고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소유하는 맛이 있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유하지 않는, 내 것이 아닌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김선우 : 낭독하고 나면 패스할 줄 알았는데 또 물어보시네요. 기억력 비상하십니다. 끈질기세요. (웃음) 어쩌면 이런 양면성, 가령 선생님께서 방금 솔직하게 말씀해 주신 ‘뭔가 하나 갖고 있어야 맘이 든든하던데’ 이런 마음은 그건 인지상정이라고 하잖아요. 자연스러운 맘이라고 생각해요.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그 대상과 조금 더 친밀해지고 싶은 어떤 관계성에 대한 욕망, 그런 욕망은 충분히 발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욕망의 자연스러운 발현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요. 문제는 그런 층위가 아니라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소유의 강박인데요. 의식, 무의식 중에 매우 폭력적으로 주입되는 소유에 대한 욕망들은 반드시 충분히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이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냐, 실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인데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은 아닌가, 나의 외부로부터 무언가 꼭 소유해야 진정으로 나는 편안한가, 소유하면 정말 행복한가, 행복에 대한 감각이 소유했느냐 소유하지 못했느냐에 좌우된다면 그것은 정말 행복일까, 혹은 그것은 정말 사랑일까, 이런 아주 많은 질문들을 던지게 되는데요. 아무튼 관계와 소유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섬세한 자기 감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친밀함을 느끼고 싶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대상에 대해 충분히 자기 표현을 해주는 것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것이 꼭 내게 소속돼야만 내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된다면, 지금 내가 ‘잘’ 존재하고 있는 단계인지를 자기 성찰 해봐야 하는 단계인 거 아닐까요. 그런 측면들에 있어서 소유 혹은 무소유에 대한 생각들을 일상적인 성찰의 나침반으로 운영하는 것이, 세상과 일상을 좀 자유스럽게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김용규 : 말씀은 알겠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선 자녀들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꼭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기보다 너무나 사랑하다 보니까 그런 식으로 또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죠. 시 「내 꺼」가 어떻게 ‘내 꺼’인가 한걸음 더 나가서, 햇살이 공기가 대지가 어떻게라고 노래한 점을 보면 선생님이 취하고 계신 것이 단순히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에코페미니스트라고 이런 면모를 다시 엿볼 수 있는데요.

   표제 시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에서는 “세상의 모든 돈을 끌어 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 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또는 “돈으로 여기 이 방울토마토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나요?”라고 자본으로 침해할 수 없는 생명의 절대적 존엄성을 읊었지요. 이(생명의 절대적 존엄성)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특히 요즘 제주도 강정에서 생태계 전반에 대한 대대적 파괴가 이뤄지고 있는데요. 언론에 보니 김 선생님이 특히 안타깝게 생각하더군요.

 

   김선우 : 제가 특별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제가 만나 보니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정말 한마음처럼 안타까워하는데요. 이것이 생명에 대해 자연스러운 반응현상인 거 같아요. 물론 강정마을 문제가 빨리 풀리지 않아 많이 속상하기도 하고 그런데요. 아, 생각난 김에 광고 방송 들어가겠습니다. 4월 27일 금요일, 강정마을을 후원하는 콘서트가 있어요. 은희경 작가를 비롯해서 문인들이 나와요. 여균동 감독님이 사회를 봐주시고, 이번에 국회의원 당선되신 노회찬 의원, 최재천 의원 불러서 어떻게 강정마을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갈 수 있을까 함께 얘기해 보는 콘서트를 진행하려고 해요. 이 얘기를 왜 지금 하는가 하면, 지난 3월 14일에 강정마을에 다녀왔어요. 그날도 ‘강정의 푸른 밤’이라고, 강정 포구에서 콘서트가 있었는데, 제주도를 한 번쯤 다녀온 분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이겠지만, 제주도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정말 얼마나 숨통이 트여요. 그렇게 아름다운 제주도에서 강정은 옛날부터 제일강정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가보니까, 아!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런데 강정마을 초입부터 경찰버스, 물대포가 진치고 경찰병력들이 주민들보다 열 배는 더 많이 마을을 온통 에워싸고 있어요. 강정마을의 구럼비 바위 파괴에 대해 근원적인 분노가 생기는 건, ‘어쩌면 권력이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렇게 무식한가!’라는 것 때문에 너무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이렇게 아름다운 땅과 바위와 이 물빛을 인간이 어떻게 만들 수가 있는가, 도대체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거예요. 우리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보석들에 대해서 완벽히 무지해요. 아름다움에 무지한 권력이 저지르는 끔찍한 파괴, 그걸 강정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볼 수 있어요. 들어가는 순간 이곳이 얼마나 평화롭고 작고 소박하고 깊은 아름다움을 가진 곳인가를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어요. 그런데 권력자들은 괴상한 국가주의 권력과 자본의 셈법으로만 그곳을 재단하고 파괴하지요. 끔찍한 생태적 학살을 자행하는 동시에 400년 전부터 마을을 이루며 산 전통적인 공동체 삶의 유대를 완전히 파탄내고 있어요. 어마어마한 국민의 세금을 들여야 하는 국책사업을 제대로 된 사전 조사도 없이 정말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인 방식으로 일사천리 해치우면서 주민들 땅을 강제수용하고 ‘니네는 꺼져’라는 국가권력제일주의, 반민주적인 방식의 전형으로 그곳의 주민들을 유린한 얘기들을 주민들로부터 들으면서 정말로 슬펐어요.

   그리고 또 하나, 전쟁기지를 지어야 평화가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이 어불성설에 대해서도 너무나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해군기지가 있어야 한다는 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이 필요불가결할 수도 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근대 이후 제국주의 전쟁들이 세상을 혹사시켜 온 가장 못된 방식의 언어 착종이죠. 언어를 다루는 예술가들인 시인들과 소설가들이 화가 나는 건 이렇게 언어가 더럽혀지기 때문이에요. 강들 죄다 죽이면서 ‘강 살리기’ 한다는 언어도단과 같은 맥락이죠. 평화를 위해 전쟁기지를 세워야 한다는 이 더러운 흑주술에 왜 우리가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할까? 강력히 항의하지 못할까 화가 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정에서 제가 정말 행복했던 것은 강정에서 계속 싸우고 있는 주민들, 날마다 미사를 올리는 사제님들, 평화활동가들, 이분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평화로움과 아름다움들 때문이었어요. 해안에 시멘트 콘크리트 쏟아 부으려고 레미콘 차량 들어오고 구럼비 깨트리려고 화약 실은 트럭들이 오면, 신부님, 수녀님, 활동가들이 차량 앞에 눕고 트럭 밑에 들어가 누워요. 도시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정말 격렬한 시위를 하시는 거죠. 그러면서 매일매일 구럼비를 깨뜨리는 공사를 간신히 지연시키려고 몸부림을 치세요. 그렇게 공사를 지연시키려고 하는데도 10분의 1은 망가졌어요. 그런데 이분들을 보면, 정말 희한해요. 상황이 이렇게 절망적인데도 희망이라는 것은 죽지 않는구나, 발견하게 하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얼굴들인 거예요. 햇볕에 그을려서 새까맣게 탄 고생스러운 얼굴이지만 놀라운 평정심으로 가득한 표정들, 평화로운 얼굴들, 그런 얼굴들로 경찰 포위 속에서 춤추고 노래해요. ‘잡아갈 테면 잡아가슈’ 하는 태도로, 가장 격렬한 저항을 하면서도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 저마다의 방법들을 개발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너무너무 반성이 됐어요.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하루는 어떤가?’, ‘내가 쓰고 있는 말을 나는 더럽히고 있지 않은가?’, ‘나는 진실로 평화한가’ 어떤 절망 속에서도 사람을 기어코 살게 하는 것은 희망이라는 게 맞는 말 같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열렬한 소망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정말로 지켜내는 힘인 것 같고,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강정에는 정말 많았어요. 육지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강정의 아름다운 사람들과 어서 연대를 해주시기를, 이 연사 강력히 바랍니다. (웃음)

 

   김용규 : 예.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강의 중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이성은 더 이상 스스로가 불러낸 유령들을 감당을 해낼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아름다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희망이 있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래서요. 쉰다섯 편의 시가 하나같이 귀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오늘밤 우리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보면 표제 시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와 그 안에 들어 있는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라는 구절이 단연 백미입니다. 저는 이 시 가운데 특히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우화를 떠올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보았더니, 그곳에도 음식은 많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자기 팔보다 더 긴 수저를 들고 있어 아무도 음식을 자기 입에 넣을 수가 없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모두가 굶주리는 고통을 받고 있더랍니다. 천국도 상황은 같더랍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마주본 사람의 입에 음식을 떠넣어 주더라는 거지요. 당연히 모두가 배불리 행복하게 살더랍니다. 그들에게는 마주본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자 신인 거지요.

   어쩌면 마주보고 서 있는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생산자와 소비자, 보편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들이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자 신일 때만, 인간은 진정 행복해질 수 있고, 세상은 마침내 천국에 가까워질지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생님께 표제 시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의 낭송을 부탁드리며 제 질문을 맺겠습니다.

 

   김선우 : 다들 너무너무 피곤한 건 아니시죠? 제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를 읽기 전에, 지금 막 생각난 시를 하나만 더 읽어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철학을 하는 이유, 문학을 하는 이유, 시집을 읽는 이유가 그런 것 같아요. 우리의 일상, 매일매일 눈뜨고 잠드는 이 일상이 기적 같은 일이라는 것, 우리가 잠이 들 때 ‘다음날 눈을 뜨겠구나’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잠들지만 그 다음날의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눈 뜨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눈 뜨고 새롭게 맞이하게 되는 그 하루, 그 새로운 일상, 이것이 우리에게 매순간 얼마나 기적 같고 귀한 순간들인지에 대한 감각을 깨우면서 살기 위해서, 우리가 이런 자리에 모여서 철학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시에 대한 이야기도 하는 것 같거든요.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를 읽어 드리기 전에 ‘일상이 혁명이다. 모든 순간이 혁명이다.’라는 걸 공유해 보고 싶어서, 이 시를 읽어 봤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요. 제가 최대한 한번 사랑스럽게 읽어 볼게요. (웃음.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 낭송)

   사랑에 빠진 순간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달라 보이는 끊임없는 각성의 순간들, 세상 모든 것이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인’ 변화와 생성의 순간들을 일상 속에서 가능한 많이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읽어 드릴 시는 아시다시피 작년의 희망버스에 대한 기억을 쓴 시입니다.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낭송)

 

 

   이은선의 Just 10 minutes

 

   이은선 : 긴 시간 동안 무료하지는 않으셨죠? 제가 왜 나왔느냐 하면 이은선의 '텐 미니츠' 시간이라서요. 살짝 기대하셨죠? 제가 어젯밤에 안 하던 팩도 했어요. 야채만 먹고 잤어요.초청 작가가 김선우 시인이라 살짝 긴장이 되더라고요. 실물로 뵈니 저와 별 차이 없다 생각이 들고요. (웃음) 학생 셋이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제 권한으로 시집 세 권 주는 것, 동의하십니까? 얼른 뛰어나와 받아가세요.

   10분이 흘러가고 있어요. 빨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사람이 결코 못 되지만, 그래도 오늘 강연을 듣고 나서 제 마음속에 오늘 이 자리도 혁명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혁명적으로 O, X 퀴즈 진행하겠습니다.

   김 선생님 좀 긴장하시구요.

 

   나는 시와 결혼했다. 김선우 : O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친절해지곤 한다. 김선우 : X

   솔직히 나 좀 쓴다. 김선우 : O

   나는 예쁘다는 소리가 좀 지겹지만, 솔직하게 피부관리, 다이어트 무지하게 한다. 김선우 : X

   만약에 글 안 썼으면 직장생활 잘하고 있을 것이다. 김선우 : X

   나는 지금 행복하다. 김선우 : O

 

   이은선 : 언제부터 그렇게 예쁘셨나요? 저처럼? (웃음) 이만 개 댓글 중에서 엄선해서 2개를 뽑아 봤어요. 아이디 콩쥐님께서 질문했어요.

 

   콩쥐 : 작가님의 작품에서 어머니를, 딸을 읽으며 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어른동화 「바리공주」에서 김선우 씨는 '나도 이제 아이를 가져야겠다.'라고 맺음말을 쓰셨습니다. 보통 작가들은 탈고를 해산에 비유하는지라, 사전 그대로의 생물학적인 의미가 담겼겠다고 생각했어요. 밑에서 다른 분도 결혼에 관한 질문을 쓰셨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으셨을 때 하신 저 말에는 무슨 뜻을 담으신 건지, 아니면 곧장 다른 작품을 계획하셨다는 것인지, 또 시간이 지난 지금 느끼시기에는 어떤지 궁금해요.

 

   김선우 : 점잖게 얘기할게요. 점잖고 싶어요. 그 무렵에 너무너무 아이를 갖고 싶었어요. 서문을 쓸 무렵에 아이가 너무 갖고 싶어서 그렇게 썼어요. 서문 엄숙하게 쓸 거라 생각하는데 가끔 그렇게도 씁니다.

 

   이은선 : 김용규 선생님께 아이디 꽂지님께서 현학적인 질문을 남기셨어요. 철학자로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김용규 : 김용규 철학자라면 새로운 사회로 길을 열어 보이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게 하는 일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철학자는 못 됩니다. 저는 철학을 파서 밥 먹고 사는 철학 장사꾼인데요.

 

   김선우 : 아! 이런 겸손이 제일 싫어. (웃음)

 

   김용규 : 제가 새로운 삶에 대해서 책을 쓴 적도 없고 그렇습니다. 철학자가 세상에서 하는 일 없는 사람, 뭐 별 볼일 없는 사람, 하다못해 손금 보는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고요. 기원전 5세기 아테네 그때부터 시작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내려오면서 이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 새로운 안목을 열어 왔기 때문에 인류가 이만큼 온 겁니다. 철학자들이 세상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란 건 바로 그런 거겠죠.

 

   이은선 : 이만여 개 댓글 중에 몇 개 더 소개겠습니다. 전국국어교사모임, 안산예술의전당,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많은 댓글, 질문들 남겨 주셨는데요. 엄선을 거듭해 몇 개 뽑았습니다. 김길수 님. ‘4월 30일 군대에 갑니다. 여자 친구 문학에 관심이 많고, 여자 친구와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라고 사연을 올렸습니다. 시집 한 권 드리겠습니다. 김성일 님 오셨나요? ‘정체되지 않은 삶이란 무엇입니까? 혁명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요? 김선우 시인에게 혁명이란?’ 질문 해주셨어요. 또 유형주 님, ‘시란 현실을 떠나서만 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가 대중에게 현실을 인식하는 걸 넘어서서 시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 중 답변하고 싶으신 게 있나요?

 

   김선우 : 일단 너무 많이 질문하셔서 다 기억 못 하고요. 기억하는 대로 얘기를 드리면 이번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제목에 대해서 독자들 반응이 좀 갈리는 것 같더라고요. ‘완전 간지나는데요’, ‘대빵 멋있다’ 하시는 분도 계시고, 어떤 분들은 ‘너무 정치적이고 무서운 말이야’, ‘혁명 너무 딱딱해’ 이런 분들도 계시다는 것을 독자 분들 만나면서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죠.

   ‘아직도 우리는 혁명이란 말을 너무나 무거운 과거의 정치적 무게로부터 자유롭게 내려놓지 못하는 세대를 살고 있구나’라고요. 제목이 너무 무거워서 처음엔 읽기가 두려웠다는 분도 있었어요. 혁명이 왜 그렇게 무겁죠? 사랑이 혁명이고 일상이 혁명인 거잖아요. 우리의 감각이 활짝 깨어서 일상의 무덤덤한 순간들을 혁명적으로 발랄하게 만드는 그런 삶을 꿈꾸는 게 이 시집이에요. 일상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소소하고 작은 일상의 혁명들’에 대한 시들로 만들어진 집이지요. 그러면서 제가 했던 얘기 중에 그런 게 있어요. ‘거창한 혁명을 주장하는 자들을 믿지 마십시오’라고요. '세상을 단번에 뒤바꿀 거창한 변혁을 내가 하겠소.’라고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마세요. 혁명은 사소하고 소소한 일상의 그 모든 미시적인 움직임들로 깨어나지 않으면 세상은 절대로 좋은 방향으로 바뀌지 못하는 것 같아요. 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그 소소한 옆의 사정들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듣고, 말하지 못하는 것들의 입이 되어 주고,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눈이 되어 주는 거죠. 그런 소소한 자리,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우리 혁명은 시작한다는 것. 아까 말씀드렸듯이 눈 뜨자마자 오늘 하루가 내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내가 살아가야 하는 하루의 모든 순간들에 가장 발랄한 방식으로 깨어 있으려고 하는 성찰, 이것이 우리를 얼마나 충만하게 만드는지, 이런 감각들을 날마다 조금씩 생활 속에서 실험해 보고, 날마다 자기 삶에서 모험하는 것, 탐험하는 것. 바로 그런 혁명들!

   시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시가 사회 못 바꿔요. 시가 사회 못 바꿉니다. 시가 사회를 못 바꾸지만 선생님께서 아까 그런 말씀 하셨는데, 철학과 예술을 모른다고 해서 내일의 태양은 안 뜨는 게 아니에요. 철학과 예술을 모른다고 해서 일상이 주어지지 않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철학과 예술을 향유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주어진 하루의 일상이 엄청나게 풍부해져요. 충만해져요. 충만하게 일깨운 자기 자신의 에너지를 옆사람과 나누면서 조금씩 행복해지고 끊임없이 뭔가를 변화시켜 가는 실천들이 우리 일상을 반짝이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거잖아요. 시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변화를 부추길 순 있어요. ‘야. 우리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거 아니니? 이게 사는 거야? 살아 있긴 한데 실은 죽어 있는 거 아니니?’ 이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게 한다는 측면에서 궁극적으로 철학과 예술, 문학이 세상을 바꾸죠. 하드웨어를 바꿀 수 없다고 해서 패배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은선 : 김용규 선생님께 또 질문입니다. 청소년들의 폭력적인 사고방식과 대안 제시, 마음을 움직이는 긍정의 힘을 어떻게 얻을 것인지 조언을 얻고 싶다고 하셨네요.

 

   김용규 : 저도 그걸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가 답을 안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러나 방금 김선우 시인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시, 예술, 그리고 철학,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꾸 다시 깨어나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하게끔 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경쟁만 시켜서, 서울대학교 보내려고 아까 입시 말씀하신 대로 위로위로 올라가게 해본들 올라갈 수도 없거니와 올라가 봤자 별거 없다는 게 올라가 본 사람들 얘기더라고요. 우리나라 한 해 고교 졸업자가 70만 명 정도 되는데 상위 0.1% 돼야지 서연고 올라가요. 확률적으로 보면 200명, 300명 모인 자리에서 1명도 못 들어갑니다. 서울대 들어가면 뭐합니까? 요새 서울대 50%가 취직을 못 합니다. 확률적으로 또 떨어지죠. 그 다음에 취직됐다고 해서, 이 사람들 행복한 거 아닙니다. 조기 명퇴하죠. 이런저런 확률로 계산해 보면 그런 식으로 해서는, 끊임없이 올라가는 체제에서는 인간이 행복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김 시인이 말씀하셨어요. 우리 아이들에게 다른 시를, 다른 세상을 보여줘야 합니다. 아이들을 몰아세우고 닦달하니까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되는 거예요. 우선 다른 거 말고, 시부터 많이들 아이들에게 읽게 해야 합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는데, 저는 제 나이 마흔에 딸 하나 낳아서 키웁니다. 어려서부터 제가 젖도 먹이고 목욕도 제가 시키고 똥오줌 기저귀도 제가 갈아서 참 애틋합니다. 중학교 다닐 때 얘한테 제가 교보문고에서 한국시 100선 알록달록한 이상한 색으로 된 시집 하나 사다 줬습니다. 주고 이렇게 얘기했어요. 걔가 중학교 때니까 ‘너 시 한 편 외우면 내가 만 원씩 줄게. 100편 다 외우면 백만 원이야.’ 얘가 다하지 못 했던 것 같아요. 처음엔 돈 받는 재미에 했는데 계속 받아 보니까 별 재미없거든요. 그래서 안 하긴 했는데, 어떻든 그 이후에 깜짝 놀랄 만큼 글쓰기 능력이 엄청 자라났습니다. 제가 딸바보라는 얘기 듣는데 (웃음)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아이들에게 시부터 읽혀야 합니다. 시는 또 아이들의 창의성도 북돋아줍니다. 시는 이미지화해서 표현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지금 여기 계신 분들, 댁에 가시면 내일이라도 교보문고에서 유치한 한국시 100선 사셔서 아이들에게 읽게 하십시오. 아이들이 달라집니다.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되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기 때문에 그래요. 과학자들이 생쥐들을 우리 안에서 견딜 수 있는 그 이상의 숫자를 집어넣으면 엄청나게 경쟁하고 쥐들이 서로 물어뜯고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실험은 오래 전에 드러난 것입니다. 아이들을 폭력적으로 변하게 하는 것은 어른들이고 제도입니다. 당장에 뜯어고칠 수야 없겠지만 끊임없이 고쳐 가면서 아이들에게 시부터 읽히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은선 : 13분이 지났어요. 텐 미니츠를 끝내야 되겠죠? 다음에 또 참여하시면 댓글을 남겨 주세요. 이은선의 텐 미니츠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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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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