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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록] 시간의 두 얼굴

  • 작성일 2012-05-26
  • 조회수 2,253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제2회_ 소설가 윤성희 편

 

 

[강연록] 시간의 두 얼굴

―자서전들 씁시다―

 

김용규(철학자)

 

 

 

 

1

 

  여러분은 조금 전에 196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뮈엘 베케트(S. Becket, 1906~1989)의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를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작품을 매개로 철학자들이 보통 ‘시간성(時間性)’이라고 부르는 ‘시간의 본질’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시간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살펴보자는 거지요.

  그럼 우선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를 잠시 되짚어 볼까요? 이 작품은 베케트가 1958년에 발표한 단막극입니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고도를 기다리며〉(1953)를 쓴 지 꼭 5년 후 작품이지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 지닌 부조리성을 뛰어난 연극기법으로 표현해 온 베케트의 완숙기에 쓴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극적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해 두 명의 배우가 각각 테이프 속의 크랩과 현실 속의 크랩을 나누어 맡아 2인극처럼 낭독 공연하는 것을 보았지만, 본디 이 작품은 모노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는 69세 생일을 맞은 크랩이 젊어서부터 늘 하던 습관대로 지난 1년간의 기억을 담아 놓기 위해 녹음을 하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30년 전인 39세 생일 때 녹음을 했던 테이프를 찾아 듣는데, 이 녹음 테이프에는 또 그로부터 10여 년 전에 녹음한 테이프를 들어 본 소감이 담겨 있지요. 30년 전 크랩은 10여 년 전 자기를 어리석었다고 비웃습니다. “또 그 부질없는 결심들이라니! 특히 술을 줄일 것이라니! 8천여 시간 중 천 7백 시간을 술집에서 보내면서, 20퍼센트 이상, 아니 깨어 있는 시간의 40퍼센트라고나 할까. 그러고도 술을 줄여? 또 성생활을 줄이기 위한…… 갖가지 계획들. 아버지의 최근 병세. 맥 빠진 행복의 추구. 도달하기 힘든 여유. 그러니 청춘시절을 비웃으며 청춘이 지나간 것을 신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라고 실토하며 이내 속내를 털어놓지요. “걸작을 써내겠다는 환상. 신의 섭리에 대한 반항으로 끝을 맺을 생각이다. 그런데 그 비참함을 겪고 남은 게 뭐람?”이라고 말이지요. 이로써 관객들은 크랩이 걸작을 쓰겠다는 야심 때문에, 즐기는 술과 성생활도 줄이려 하고, 가족들과도 소원하게 지내며, 행복과 여유가 뭔지도 모르는 채 2, 30대 젊은 시절을 보낸 3류 작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다 보니 크랩은 생의 중반이라고 할 수 있는 39세밖에 안 되었지만, 이미 지난 세월에 놓쳐버린 소중한 것들에 대해 후회하고 있습니다. 특히 글을 쓰기 위해 헤어진 비앙카라는 여인과 과부로 살다 쓸쓸하게 죽은 어머니에 대한 회상 때문에 안타까워하지요.

  그런데 그 후 30년이 지나 이제 69세가 되었지만 크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막 30년 전의 나라는 바보 녀석의 넋두리를 들어 보았다. 내가 그 정도로 못났을 줄이야, 믿기 어려울 정도다.”라고 또다시 한탄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난 30년 동안 여전히 자기의 진정한 삶은 내팽개친 채 “마치 어린애들이 숙제하듯이, 마음을 가두고 그 잘나빠진 작품에나” 매달렸지요. 하기야 그 덕에 책을 열일곱 권 내고, 그중 열한 권은 외국 공공 도서관에 팔리기도 하는 등 꽤 유명해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 뭐하나?”라고 크랩은 곧바로 한탄하지요. 여름이 다 가도록 겨우 한두 차례 밖에 나가 공원에 홀로 앉아 공포스러운 몽상에 잠길 뿐이라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생활을 “더러운 변기에 구역질이나 해대는 것과 뭐가 달라! 흥청망청 말잔치나 하며 살다니!”라고도 표현합니다. 뿐만 아니라, “걸작을 쓰겠다는 최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면 그때는……”이라며 자살할 생각까지 하지요. 때문에 이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도 서글픈 독백은 크랩이 이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지 잘 알면서도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라고 처절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저 어둠 속에서 버티면서 다시 방황을 해보는 거야! 다시 한 번 크리스마스이브에 깊고 좁은 골짜기에 들어가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따는 거야! 다시 한 번 안개 자욱한 일요일 아침에 그녀와 함께 크로간 산에 올라가 우두커니 서서 종소리를 듣는 거야! 그런저런 일들을 다시 한 번 해보는 거라구! 모든 비참했던 일들을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한 번으로는 부족해! 그녀의 몸 위에 다시 한 번 엎어지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드라마는 크랩이 아무리 “한 번으로는 부족해!”라고 외쳐 보아도 단 한 번뿐인 삶의 모든 것을 잃고서 뼈를 저미는 회한과 절망 속에 망연자실하는 모습으로 막을 내립니다. 

 

  사뮈엘 베케트는 이처럼 녹음기라는 기계의 조작을 이용해 이뤄지는 시간의 역전, 비약, 정지, 반복을 통해 한 인간이 젊은 시절에 가졌던 사랑과 욕망, 중년에 품었던 회의와 희망, 그리고 말년에 감당해야 하는 회한과 절망을 우리에게 일목요연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이 극작가로서 그가 보인 탁월함이지요. 녹음기라는 극적 장치가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하는 시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 곧 오직 우리의 마음 안에만 존재하며 때로는 과거로, 또 과거의 과거로도 거슬러 흐를 수도 있는 시간의 새로운 얼굴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와 연관해 오늘 밤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라는 시간의 단절, 곧 현재의 자기와 과거의 자기와의 단절이 결국에는 인간을 회한과 절망, 그리고 망연자실로 몰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과거와 단절된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며,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시간이란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며 시작하려 합니다.

 

 

2

 

  고대를 대표하는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그의 『고백록』에서 시간이 무엇인지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신에게 다음과 같이 볼멘소리로 호소했습니다.

 

  “시간이란 대체 무엇이옵니까? 누가 그것을 쉽고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나이까? 누가 그것을 사유 속에서 파악하고 그 답을 말로 표현할 수 있나이까? 하지만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시간보다 친숙하게 알고 언급하는 것이 없음 또한 사실이 아니옵니까? 우리는 시간을 말할 때도 확실히 그것을 이해하나이다. 다른 사람이 시간에 대해 말할 때도 그것을 이해하나이다. 그럼에도 시간은 대체 무엇이옵니까? 누가 내게 묻지 아니하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나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물어 그것을 설명하려 하면, 나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렇지요? 우리 모두가 이렇습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태어나, 시간 안에서 살다가, 시간 안에서 세상을 떠나지만, 시간이 무엇인지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야 여럿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에게는 적어도 두 가지 얼굴이 있는데 그것들이 서로 상반되고 이질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는 일찍이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가 규정한 ‘물리적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5세기에 히포(Hippo)의 감독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한 ‘심리적 시간’입니다.

  ‘물리적 시간’이란 우리가 시계로 재는 자연적 시간으로 무한히 나뉘어 끊임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입니다. 때문에 이 시간에는 언제나 ‘현재’만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시계를 볼 때마다 거기에는 단지 현재의 시각만 순간순간 존재하듯이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물리적 시간도 ‘과거’, ‘현재’, ‘미래’로 연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계를 보세요.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계 판에서 실제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 곧 현재뿐입니다. 그나마 그 ‘지금’마저도 사실인즉 한없이 나뉘어 분산되는 찰나(刹那)일 뿐, 그 어떤 시간적 연장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물리적 시간에는 수많은 찰나만 지금?지금?지금?지금 무한히 계속될 뿐이지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한 물리적 시간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서글픈 경험이 말해 주듯이, 이러한 물리적 시간은 우리 삶이 가진 모든 것, 즉 육체와 정신 그리고 삶 자체까지 하나하나 파괴해 갑니다. 태어나는 모든 어린아이는 낳자마자 늙기 시작하여 결국 죽습니다. 시간은 그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하는 폭력적 파괴자지요.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이 물리적 시간을 ‘크로노스(Cronos)’라고도 부르는데, 잘 아시다시피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자기 자식을 낳는 대로 잡아먹는 끔찍한 신입니다. 그래서 크로노스 안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삶은 사멸하는 것, 단지 흘러가고 마는 것,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 때문에 값어치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P. Vergilius Maro, 기원전 70~기원전 19)가 “시간은 모든 것을 가져간다. 심지어 마음까지도”라고 한탄했고, 영국 문호 셰익스피어(W. Shakespeare, 1564~1616)가 “너는 모든 것을 낳고, 또한 모든 존재하는 것을 소멸시킨다”라고 불평한 것이 바로 그래서죠. 요컨대 물리적 시간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때문에 개인은 이 시간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정립할 수 없고, 국가와 민족은 역사의식을 형성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자기 또는 자신들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게 되지요. 알고 보면 바로 여기에 우리 삶에 짙게 드리우는 실존적 불안과 절망, 그리고 모든 허무주의가 발을 딛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의 파괴성은 고대로부터 인간이 극복해야 할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나온 지혜 가운데 하나가 기원전 4세기경 사모스 섬에서 출생하여 활동한 에피쿠로스(Epicurus, BC. 342~270)의 쾌락주의입니다. 그는 인간을 신, 시간, 죽음과 같은 초자연적 힘이 동반하는 숙명적 공포에서 해방시키려는 숭고한 목적을 갖고 골똘히 사유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쾌락을 유일한 선(善)으로 간주했는데, 그가 말하는 쾌락이란 소위 ‘방탕자의 쾌락’이라 불리는 향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쾌락으로 ‘아트락시아(atraxia)’, 곧 ‘마음의 평정’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쾌락주의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던 퀴레네 학파(Cyrenaics)의 그것과 구분되는 점이지요.

  에피쿠로스가 개발한 방법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물리적 시간의 파괴성을 두려워하거나 억지로 피하려 애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순수하게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오직 ‘지금’, 곧 현재에 몰두할 것을 권했습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다시 말해 마치 산딸기 열매를 따듯이 그때그때 몰두해 행복하게 살라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바람처럼 흘러가 버려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나 신기루처럼 다가오지 않아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 때문에 생기는 회한과 절망, 그리고 불안과 공포들을 떨쳐버리라는 거지요.

  “모든 일은 그대가, 곧 오늘 여기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그대가 행복하게 산다는 데 달려 있다.”나 “가장 무서워해야 할 악, 곧 죽음은 우리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가르침이 모두 이와 같은 시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에피쿠로스의 지혜는 기독교와 같은 정통 종교나 법제도와 의료제도와 같은 각종 사회적 안전장치가 아직 확립되지 않아 숱한 위험과 공포에 노출되어 있던 고대인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용기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700년쯤 후에 전혀 다른 시간관을 바탕으로 고대 기독교신학을 정초한 아우구스티누스조차 “나중에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에피쿠로스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바쳤을 것”이라고 고백했던 거지요. 예수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를 숭배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무려 2300년 전 사람인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다시 삶의 지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컨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에 열광하는 것이 좋은 예가 되겠지요. 『희랍인 조르바』에서 주인공 조르바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은 묻지도 않지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라고 외치며,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그대로 되뇝니다. 그리고 가령 뭘 먹고 싶으면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게” 하라고 가르치지요. 음식뿐 아니라 담배, 술, 여자에 대한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입니다.

 


  이 같은 조르바의 에피큐리언적 철학에 우리가 열광하는 현상은 현대인들의 삶이 고대인들의 그것에 못지않게 위험과 공포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이 이름 지은 ‘위험사회(risk society)’, 곧 우리가 당면한 위험을 지금까지 유효했던 제도적 방안(과학기술과 사회제도)으로 통제하거나 보상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깨져버린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지요. 삶과 죽음에 대한 현대적 불안과 공포가 우리를 새로운 에피큐리언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3

 

  시간의 파괴성이 가져오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과 절망, 그리고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찾았습니다. 그것은 에피쿠로스의 방법과는 판연히 달랐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 안에 존재하는 시간을 우리 마음 안에서 찾아냈습니다. 이른바 ‘심리적 시간’이지요.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삶을 단지 흘러가고 마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물리적 시간의 끔찍한 파괴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애써 교훈하고 위로했지요. 바로 이것이 학자로서 그의 탁월함이자 종교인으로서 그의 위대함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 세 가지 때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 셋은 모두 우리의 마음[靈魂]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記憶)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直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企待)입니다.”

 

  요컨대, 우리 마음 안에는 과거는 기억으로, 현재는 직관으로, 미래는 기대로서, 생생하게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말을 듣고 ‘설마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면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볼까요? 가령 당신의 마음이 지금 기쁘거나 슬프다면, 그건 대개 지금 바로 이 순간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분명 지나간 과거의 어떤 슬픈 일이나 다가올 미래의 어느 기쁜 일과 연관되어 있지요.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의 삶에 있어서, 과거나 미래란 단순히 ‘지나가 버린 것’, 또는 ‘아직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 순간순간 현재로서 존재하고 영향을 미치며 현재를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처럼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여 마치 ‘바로 눈앞에 보이듯 현전(現前)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 가진 이런 능력을 ‘상기의 힘(vis memoriae)’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능력을 통해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무한히 분산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가 됩니다. 때문에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는 과거는 사라져서 허무한 것이 아니며, 현재가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미래 역시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 아니지요.

  또한 매 순간순간이 지나가는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 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책임을 부여합니다. 마찬가지로 역사도 매 시대가 결코 사멸하지 않고 그 전체에 이바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역사적 의미와 가치 그리고 책임을 부여하지요. 이렇듯 상기의 힘은 개인적 차원에서든 역사적 차원에서든 모든 허무주의를 극복하게 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에 깔린 심오한 사유입니다.

  라틴어 ‘비스 메모리아에(vis memoriae)’를 문자대로 ‘기억의 힘’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플라톤의 용어인 ‘상기(想起)’를 빌려와 ‘상기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래서입니다. 우리말로는 ‘재기억’이라고 번역되는 플라톤의 상기(anamnesis)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의 힘이자,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리는 영혼의 능력이지요.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의 영혼은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데아의 세계에서 본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출생 때 망각의 강 레테(Lethe)를 건너면서 그것들을 잃어버렸답니다. 그렇지만 조금은 희미하게 남아 있어 우리의 감각기관이 어떤 대상(예; 장미꽃)을 지각하면, 우리의 영혼은 그 대상의 이데아(예; 장미꽃의 이데아)를 ‘재기억’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한다는 거지요. 바로 이것이 우리의 기억이 예컨대 단순한 기억장치인 컴퓨터의 메모리와 다른 점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예를 들어 볼까요?

  역시 여러분이 잘 알고, 또한 사랑하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7부작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바로 이 같은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마르셀은 어느 겨울날 어머니가 건넨 마들렌 한 조각을 차에 담갔다가 먹다가,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일찍이 느껴 보지 못한 “강렬한 쾌감”을 경험하지요. 차에 섞인 마들렌 부스러기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느꼈던 감각이, 어린 시절에 아침인사를 하러 레오니 숙모에게 갔을 때 그녀가 따뜻한 보리수꽃차에 마들렌 한 조각을 담가 준 일과 그 당시의 기억들을 연이어 떠올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회상을 “무의지적 기억(mmoire involontaire)”이라고 불렀습니다. 의지와 무관하게 우연히 돌발적으로 떠오른 기억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무의식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 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의 힘’처럼 ―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가지 상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기 정체성과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또한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을 “새로운 여러 가지 상을 지나간 것과 연관시키고, 이렇게 해서 미래의 행위나 사건이나 희망을 구성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나는 이들 모두가 흡사 현전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저술가인 앙드레 모루아(Andr Maurois)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환상적인’ 예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3D 영상에 해당하는 입체경(立體鏡)의 제작 원리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2개의 2차원 영상을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실재에 보다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입체영상을 얻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설명합니다. 그리고 회상, 곧 ‘과거에의 상기(Sensation Prsente―Souvenir Absent)’가 과거와 현재라는 서로 다른 시간의 영상을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입체적이고 생생한 시간의 입체상을 만들어내,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거지요. 또한 그럼으로써 잃어버린 자기 정체성과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은 부단히 반복되는 이러한 회상을 통해 결국 소설가가 되려다 좌절에 빠짐으로써 잃어버렸던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고 허무에 빠진 자기 자신을 구하게 되지요. “자신을 열등한 존재, 우발적이고 죽기 마련인 존재”라고 느끼고 “결코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다시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희망이 생긴 것이고 결국 그의 삶이 구원받게 된 것이지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탁월한 연구를 쓴 프랑스 평론가 조르주 풀레(Georges Poulet, 1902~1991)는 그의 『인간적 시간에 대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따라서 프루스트의 사상의 [무의지적] 기억은 기독교 사상의 은총처럼 초자연적 역할을 한다. 기억은 실추한 인간의 본성,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원래의 본성에서 분리된 인간의 그 본성에 대하여, 일거에 전적으로 그 근본 조건을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닌, 구령(救靈)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효력을 발휘하는 그런 불가해한 현상이다.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프루스트 작품들에서 회상은 인간적인 동시에 초인적 형상을 띠고 끊임없이 나타난다.”

 

 

4

 

  아우구스티누스 덕분에 이제 우리에게는 사실상 두 가지 시간적 가능성이 주어졌습니다.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이지요. ‘분산되는 시간’과 ‘통일된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그것이 존재물인 한, 세상의 모든 존재물이 그렇듯 좋든 싫든 물리적 시간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지요.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다릅니다. 물리적 시간을 살 수도 있고 심리적 시간을 살 수도 있어요. 편편히 ‘분산되는 시간’을 살 수도 있고 하나로 ‘통일된 시간’을 살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존재물의 시간’을 살 수도 있고, 모든 것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는 ‘존재의 시간’을 살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지요. 다시 말해 그것은 당신 삶의 철학 내지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당신이 에피쿠로스나 그의 사도인 조르바가 교훈한 것같이 쾌락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흔쾌히 물리적 시간을 살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훈한 것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기꺼이 심리적 시간을 살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난감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 사이를 부단히 방황한다는 ‘비루한’ 사실이지요. 한편으로는 향락적 삶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정체성과 구원을 간절하게 소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결국에는 향락도 즐기지 못하고 구원에도 이르지 못한다는 거지요. 아닌가요?

  내 생각에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카잔차키스도 우리와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써놓았다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에 매혹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고 카잔차키스가 아마 조르바처럼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면 그렇지 않지요. 또한 그런 묘비명은 ‘사실인즉’ 바라는 것도 많고 두려운 것도 많아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쓰는 법입니다. 왜냐고요?

  자고로, 영혼을 사랑하는 수도승은 영혼의 승리를 바라고 육체의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사랑하는 난봉꾼은 육체의 승리를 바라고 영혼의 패배에는 관심조차 없지요. 그런데 카잔차키스는 영혼과 육체 모두를 사랑하고 각각의 승리를 바랐습니다.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이 어찌 두려움이 없고 자유로웠겠습니까! 그는 영혼의 승리가 그리울 때, 바꿔 말해 영혼의 패배가 두려울 때, 『붓다』와 『성 프란체스코』 같은 수도승에 관한 작품들을 썼고, 육체의 승리가 그리울 때, 뒤집어 말해 육체의 패배가 두려울 때,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난봉꾼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의 묘비명은 아마도 그의 바람이었을 겁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본 낭독공연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에서 크랩은 분명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 사이를 부단히 방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통해 베케트는 크랩이 바로 우리의 분신이라는 것을 신랄하게 고발한 거지요! 크랩은 평소에는 아무 의식 없이 물리적 시간을 살다가 일 년에 단 한 번 생일을 맞아 녹음을 할 때만, 그것도 기계적 조작을 통해 과거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를 연결시킴으로써 심리적 시간을 살아 보려 했습니다. 때문에 자기가 누군지도,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때마다 주어지는 쾌락은 얻었을망정 진정한 자기는 잃어버린 겁니다. 다시 말해, 크랩은 녹음을 할 때마다 과거의 자기를 비웃지만, 순간순간 파편화되는 물리적 시간을 살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의 과거와 단절되어 살았습니다. 그 결과 삶의 소중한 모든 것을 잃고 뼈 저미는 회한과 절망 속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요.

  생각해 보면 이것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이냐 내일이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 우리가 머지않아 마지막 장면의 크랩과 같은 모습으로 망연자실 앉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크랩과 같이 살고 있다면 말입니다. 바로 그래서 살펴보고 싶은 작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작품이 크랩과 같은 처지에 놓인 우리가 어떻게 하면 회한과 절망, 그리고 망연자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주기 때문입니다.

 

 

5

 



  20세기 초,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등과 함께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여 아방가르드 문학을 개척한 버지니아 울프가 1925년에 발표한 『델러웨이 부인』은 1923년 6월 어느 날 하루를 서술합니다. 주인공 클라리사 델러웨이 부인이 저녁 파티에 사용할 꽃을 사러 집을 나서는 아침에 시작하여 파티가 진행되는 저녁에 끝나지요. 그 사이에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은 없습니다. 프루스트나 조이스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델러웨이 부인』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줄거리에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돌발적으로 떠오르는 주관적 체험과 생각, 감정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그래서 원제목이 ‘시간’이었던 이 작품에는 런던탑에 걸린 빅벤이 매 시간마다 알려주는 ‘외적 시간’(또는 물리적 시간)과 인물들의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내면적 시간’(또는 심리적 시간)이 뒤섞여 흐릅니다.

  예를 들면, 집을 나서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상가를 걸어가던 클라리사는 갑자기 젊은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낭만적 사랑을 떠올립니다. 이때 빅벤이 울리고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회상에서 깨어나지요. 이후에도 그녀는 또다시 다른 회상에 잠기다가 예컨대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일을 통해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합니다. 클라리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죠. 이들에게는 빅벤의 종소리를 따라 단선적으로 흘러가는 ‘외적인 시간’ 사이에 갑자기 떠오르는 ‘내면적 시간’, 곧 추억이나 예측이/ 마치 땅속에 묻힌 고구마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나타납니다. 그럼으로써 현실 세계와 내면의 세계, 일상성과 내적 성찰, 과거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가 연결되고 뒤섞인 진실이 드러나지요. 이러한 서술기법을 울프는 “터널 파기”라고 불렀습니다.

  이 작품에서 클라리사는 매우 특이한 인물입니다. 중견 국회의원의 “완벽한 안주인”인 그녀는 외적으로는 허영에 가득 찬 사교계를 대변합니다. 이날 밤에도 그녀는 마치 버킹엄 궁에서 손님을 맞는 여왕처럼 파티의 중심에 서 있지요. 그래서 그녀의 옛 애인인 피터 월시조차 그녀를 속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사실상 속물들이 득실대는 사교계를 참기 어려워하고 혐오합니다. 이 점에서 그녀는 이 작품의 다른 주요 인물인 셉티머스 스미스와 오히려 맥이 닿아 있습니다. 전쟁에서 얻은 정신적 상처에 시달리는 퇴역군인인 그는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황태자가 지나가는 공간과 때마다 빅벤이 울려대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단절에 절망하는 인물이지요.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셉티머스는 결국 창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지만 똑같은 삶에 대한 공포, 무력감,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클라리사는 파티를 끝내고 조용히 삶을 이어간다는 점입니다. 삶에 대한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 모든 것을 불안하고 무의미하며 혐오스럽게 만드는 외적 시간에 대항하여 “끝끝내 살며” “조용히 걸어가게” 하는 그녀의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해 버지니아 울프는 주인공 클라리사의 입을 빌려 “별빛이 명멸하는 밤하늘”,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덧없는 아름다움이 주는 기쁨, 순간마다 “그 순간의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사소한 추억이 주는 즐거움”이라고 답합니다. “이렇게 의자를 바로 놓고 책을 한 권 책장에 밀어 넣으면서 일상에 골몰하여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아가다가도, 해가 뜨고 날이 저무는 것을 보며 문득 기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 비길 만한 즐거움은 없다.”라고도 설명하지요. 이어 셰익스피어의 말을 빌려 “뜨거운 햇빛을 두려워 말라!”라고도 충고합니다.

  클라리사는 셉티머스 스미스와 달리, 시간의 단절을 극복할 지혜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녀는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처럼 사소한 일상에서 솟아나는 ‘추억이 주는 즐거움’을 통해 과거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를 연결시킴으로써 삶에 대한 공포, 무력감, 혐오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지요. 『델러웨이 부인』의 미국판 서문에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한 셉티머스가 클라리사의 ‘분신’이라고 썼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셉티머스는 울프 자신의 분신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녀는 과거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를 연결시킬 수 없어 삶에 대한 공포, 무력감, 혐오감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1941년 어느 화창한 봄날 서섹스의 루이스 근교를 흐르는 우즈 강에 몸을 던져 셉티머스를 따라갔지요.

  그렇습니다.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우리의 몸은 부득이 물리적 시간을 살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마음은 부단히 과거와 미래를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현전케 하는 ‘심리적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크랩처럼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클라리사처럼 매 순간순간 기억과 기대를 통해 과거와 미래를 현전시켜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추억이 주는 즐거움’을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 앞에서 자기가 누군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삶에 대한 공포, 무력감, 혐오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어느 날 크랩처럼 삶의 소중한 모든 것을 잃고 뼈 저미는 회한과 절망 속에서 망연자실 앉아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에게 긴히 권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서전들 씁시다!”입니다. 물리적 시간의 파괴력에 의해 산산이 분산되어 버린 우리 각자의 자기들로 이루어진 이야기, 곧 과거의 자기, 현재의 자기, 나아가 미래의 자기를 하나로 잇는 진실한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는 거지요. 이런 의미의 자서전에는 단절된 시간을 하나로 연결시킴으로써, 잃었던 자기 정체성을 회복시키고 허무에 빠진 자기를 구원해 내는 힘이 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밝혀 주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마치 역사가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듯이 말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는 이런 방식으로 형성되는 인간의 자기 정체성(ipsit)을 ‘이야기 정체성’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행동하는 주체로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며,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자기 정체성이 만들어진다는 거지요. 이 말은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야기에 의해 재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서전이 ― 크랩의 녹음 테이프와는 달리 ― 시간의 파괴성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서전들을 쓰자는 겁니다!

 

  그런데 자서전을 쓰면서 단절된 과거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를 연결시킴으로써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한 여인의 문제를 소설로 다루어, 지난해 제11회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가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2007년에 제14회 이수문학상을, 2005년에는 제2회 올해의 예술상을, 그리고 같은 해 제50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신 소설가 윤성희 선생님이지요.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레고로 만든 집」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 『레고로 만든 집』, 『거기, 당신』, 『감기』,『웃는 동안』 등 4권의 소설집과 장편소설 『구경꾼들』 외 다수의 책을 내셨습니다. 이제부터 모시고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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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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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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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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