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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록] 21세기의 혁명

  • 작성일 2012-04-30
  • 조회수 1,287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제1회_ 시인 김선우 편

 

 

[강연록]  21세기의 혁명

 

김용규 (철학자)

 

 

 

 

  본 서비스는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열리고 있는 〈예술토크 프로그램_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의 내용을 전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총 8회로 예정되어 있는 이 행사는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철학 저술가 김용규 선생님이 전체 진행을 맡아, 우리 삶과 연관된 철학적 주제를 강연과 낭독공연, 그리고 같은 주제를 문학작품으로 다룬 시인, 소설가 등 우리 작가와 나누는 토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보기)

 

 

 

1

 

  여러분이 감상하신 소포클레스(Sophokles, 기원전 496~406)의 『안티고네』에서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정의(dike)에 관한 문제입니다. 크레온 왕이 내세우는 ‘왕의 법’과 안티고네가 주장하는 ‘신의 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근원적이며 정당한가 하는 거지요. 요즈음 말로 표현하자면, ‘실정법’과 ‘자연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정의로운가 하는 문제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실정법이란 ‘모든 국민에게는 납세의 의무가 있다’, ‘병역의 의무가 있다’처럼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법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연법이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 또는 ‘남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처럼 ‘자연의 질서’와 ‘인간 본성’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보편적 윤리를 말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근원적이고 정당한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안티고네』와 연관하여 이 문제에 의미 있는 답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19세기 철학자 헤겔의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20세기 페미니스트들의 해석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G. W. Hegel, 1770~1831)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예술작품 가운데 가장 찬란하고 만족스런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괄목할 만한 해석을 남겼지요. 그는 이 작품의 중심은 안티고네와 크레온과 같은 비극적 인물이 아니라 그들이 벌이는 비극적인 갈등인데, 그 갈등의 주체는 윤리?종교?정치적으로 똑같이 정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즉, 크레온 왕이 내세우는 ‘인간의 법’, ‘국가의 법’, ‘남성의 법’과 안티고네가 주장하는 ‘신의 법’, ‘가족의 법’, ‘여성의 법’이 각각의 관점에서 모두 윤리적이라는 거지요. 또한 그 두 법이 각각 ‘국가’와 ‘가족’이라는 공동체적 삶의 본질이기 때문에 똑같이 정당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결과도 역시 양쪽 모두가 파멸됨으로써 한편의 일방적인 승리가 부정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정(these)과 반(antithese)으로 대립하는 양자는 서로를 부정하고 지양하여 한 단계 더 높은 종합(synthese)에 이른다는 자신의 변증법적 도식에 의한 해석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헤겔의 변증법적 해석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예컨대, 페트리치아 밀스(P. J. Mills)는 안티고네를 ‘가부장적인 지배에 저항하는 인물’로 규정했고, 파리 대학의 사회학 교수였던 뤼스 이리가라이(L. Irigaray)는 ‘여성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라는 가정에 도전하는 인물’로 보았지요. 또 캘리포니아 대학의 비교문학 교수 주디스 버틀러(J. Butler)는 ‘근친상간금지를 의문시하는 인물’로서 조명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안티고네의 주장과 입장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모두 흥미로운 해석입니다. 특히 주디스 버틀러의 해석이 그런데요, 그녀가 보기에 오이디푸스 집안은 온통 근친상간자들입니다. 오이디푸스와 딸들과 관계도 그렇고, 오빠 폴뤼네이케스와 안티고네 사이에도 다분히 근친상간적 애착이 있지요. 그래서 안티고네는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질서인 ‘근친상간금지’에 대해 저항하는 인물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안티고네에 대한 19세기 헤겔의 해석과도, 20세기 여성 페미니스트들과도 다른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마땅히 나아갈 길을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안티고네의 말을 직접 들어 볼까요. 그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저는 글로 씌어진 것은 아니지만,

   임금님의 법이 확고한 하늘의 법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늘의 법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고 불멸하는 것이며, 그 시작은 아무도 모르니까요.”


 

  한마디로, 왕의 법인 ‘실정법’보다는 신의 법인 ‘자연법’이 더 근원적이고 정의롭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티고네를 기꺼이 ‘자연법의 수호자’로서 조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는 안티고네나 이 작품의 작가인 소포클레스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아닙니다. 자연법이 실정법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을 오늘날 우리는 ‘자연법사상(the principle of natural law)’이라고 부르는데, 이 같은 사유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서 시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2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기원전 6세기경)는 기원전 6세기 그러니까 소포클레스보다 1세기쯤 앞서 살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만물 뒤에는 그것들의 생성과 소멸을 이끄는 법칙, 즉 만물을 지배하는 ‘신의 법'인 ‘로고스(Logos)’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마땅히 이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신의 법이 인간의 법보다 더 근원적이고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말을 “인간의 모든 법은 신의 법에 의해 명맥을 유지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또 “신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정의롭고 올바르지만, 인간에 있어서는 어떤 것은 정의롭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남겼는데, 이것은 왜 자연법이 실정법보다 우월한가를 정의한 말로 평가됩니다.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수사학』에서 위에서 우리가 본 『안티고네』의 대사를 직접 인용하며, 자연법의 절대성을 주장했다는 사실이지요. 그의 위대한 스승 플라톤이 자신의 『법률』에서 자연법과 실정법을 동등하게 본 것과는 달리 말입니다. 하지만 로고스를 ‘자연법(lex naturalis)’이라 부르고 자연법사상을 체계화시킨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고 스토아철학자들이었습니다.

 

  스토아철학자들에 의하면, 신의 법인 로고스가 세계에서는 ‘자연법칙’으로 나타나고, 인간에게는 ‘도덕법칙’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 법칙의 강력함은 그것들을 만든 신마저도 한번 만든 후에는 자신이 만든 법칙들에 복종해야 할 정도지요. 당연히 모든 인간의 법은 이 법칙에 근거함으로써만 정당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키프로스의 제논(Zenon ho Kupros, 기원전 336~264)은 “자연법은 신의 법이며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을 규정하는 힘을 갖고 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이후 자연법사상은 로마법과 기독교 신학으로 들어가 서구 법체계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즉, 자연법은 로마시대에는 ‘만민법’과 ‘시민법’에 우선했고,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는 ‘영원법’, ‘신정법’으로 불리며 모든 실정법의 근거이자 척도가 되었지요. 그래서 중세 교황들이 자연법을 봉건군주들을 지배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연법사상은 중세를 지나 ‘신적 이성’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인간 이성’이 올라앉은 근대에 와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7세기 영국의 법률가 에드워드 코크 경은 “자연법은 영국법의 한 부분이며, 신으로부터 비롯되어 영원히 변치 않기 때문에 세속적인 법에 우선한다”고 선언했고, 계몽주의자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도 『법의 정신』에서 자연법이 실정법의 근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자연법과 실정법의 관계를 반지름과 원의 관계에 비유해서 “실정법이 명령하고 금지하는 일 이외에는 공정하다거나 불공정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누군가가 원을 그리기 전에는 원의 모든 반지름이 똑같지 않다는 주장과 같다.”라고 표현했지요. 한마디로, 반지름 없이 원을 그릴 수 없듯이 자연법 없이 어찌 실정법이 있겠느냐는 의미입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신의 법이 부여하는 지위”라든지,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권리”와 같은 표현 역시 자연법사상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지요. 


  정리하자면, 비록 근대 이후 그 빛이 퇴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법은 서구에서 오랫동안 ‘정당하기 때문에 법(jus quia iustum)’이고, 실정법은 ‘명령되었기 때문에 법(jus quia iussum)’이라고 인식되어 왔습니다. 또한 자연법과 실정법은 상하관계에 있으며, 상위 규범으로서의 자연법은 실정법을 정당화하거나 수정하고 보충하거나 무효화할 수 있다고 인정되어 왔지요. 그 이유는 앞서 밝힌 같이 자연법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 본성’에 기초를 둔 도덕적 법 원리로서 ‘보편타당성’과 ‘보편적 윤리성’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안티고네가 가진 정당성의 근거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부당한 실정법에 저항하는 모든 행위의 법적 근거가 됩니다. 예컨대 국가가 실정법을 이유로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침해할 경우에, 개인은 자연법을 근거로 이에 대항해 소송이나 기타 정당한 저항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바로 이 말을 안티고네는 “저는 글로 씌어진 것은 아니지만, 임금님의 법이 확고한 하늘의 법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표현했던 겁니다.

 

  ‘자연법 수호자’로서 안티고네는 동시에 ‘부당한 국가와 실정법에 대한 저항자’인 거지요. 전 남아공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가 “우리의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은 안티고네였다”라고 선언한 것을 비롯해, 오늘날 중동에서 자스민 혁명을 주도한 아랍인들까지 안티고네를 그들 저항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제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자연법을 근거로 국가와 실정법으로부터 지켜야 할 권리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21세기의 안티고네가 결연히 감행해야 할 저항과 혁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해답은 마땅히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크레온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가 행하고 있는 부당한 폭력과 억압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결론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 이후 신을 대신해 그 자리에 올라선 ‘근대적 인간 이성’이 곧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는 크레온이고, 그것이 국가와 실정법 그리고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크레온의 부당한 폭력입니다.

 



 3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영웅적인 고발과 투쟁의 결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히로시마 원폭’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이성의 폭력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조명되고 극복된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주목해야 할 것은 ‘계몽’과 ‘계발’을 신조하는 근대적 이성은 아직도 우리의 현실적 삶과 사회를 여전히 틀어쥐고 흔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폐해를 우리는 ‘무지비한 수탈에 의해 파괴된 자연’과 무제한적 ‘경쟁에 의해 황폐화된 사회’, 나아가 부단한 ‘자기 계발로 피폐해진 개인’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가 현대 기술의 특성이라고 규정한 ‘몰아세움’과 ‘닦달’이 바로 근대적 이성의 본질입니다! ‘몰아세움’과 ‘닦달’이라는 용어는 근대적 이성의 폭력적 성격을 나타내는 데 매우 적합한데, 이것은 일찍이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 1561~1626)이 자연을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고백을 받아내야 하는 대상”이라고 표현했을 때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근대적 이성은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몰아붙이고 닦달하여 파괴했고,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서구가 제3국가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20세기를 살았던 하이데거는 자연에 대한 ‘몰아세움’과 ‘닦달’이라는 이 ‘도발적 요청’의 정점을 물질을 ‘원자’라는 극단까지 몰아세우고 닦달하여 핵무기 개발과 원자력발전을 이뤄낸 원자력 공학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21세기를 맞은 오늘날 자연에 대한 ‘몰아세움’과 ‘닦달’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유전자마저 계발 대상으로 취급하여 ‘산업화’하려는 생명공학과 유전공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간상 이 자리에서 다 말씀드릴 수 없지만, 오늘날 경제상 이익에 초점을 맞춰 발달하고 있는 생명공학, 유전공학은 20세기의 원자력공학만큼이나 매우 위험합니다.

 

  특히 사람과 돼지처럼 이종교배가 되지 않는 종(種)들 간의 유전자를 뒤섞는 ‘수평적 유전자 전이(horizontal gene transfer)’가 그렇지요. 예상되는 다양한 문제 가운데 이미 드러난 것은, 이것을 통해 기존의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나 새로운 질병을 유발하는 병원균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우려가 현실화되어, ‘수평적 유전자 전이’를 통해 만들어진 세균이 유전공학 연구실에서 새어 나와 수백, 수천의 인명과 수십만에 달하는 동물을 해친 사례는 이미 여럿 보고되었습니다. 때문에 다년간 핵무기 철폐를 위해 투쟁하다가 1995년에 노벨상을 받은 영국 물리학자 조셉 로이블라트(J. Royblat)는 이에 관한 우려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나의 걱정은 과학에서의 또 다른 진보가 어쩌면 핵무기보다 훨씬 더 쉽게 대량파괴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유전공학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분야인데, 왜냐하면 이 분야는 가공할 만한 발달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요.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근대적 이성이 이제 인간이 자기 자신마저도 계몽과 계발 대상으로 삼아 ‘상업화’하도록 암암리에 몰아세우고 닦달하고 있다는 거지요. 21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자기 계발’ 열풍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 계발에는 사회적 능력 계발뿐 아니라, 신체 계발, 예컨대 남자들의 몸짱 열풍이나 여성들의 다이어트 열풍, 성형 열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근대적 이성의 한 얼굴인 ‘자본’이 인간의 육체마저도 상품으로 취급하도록 조작해 낸 거짓된 욕망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당사자들은 그것이 자기 자신의 욕망인 줄 착각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가령 다이어트 열풍에 휩쓸린 여성들은 자신들의 몸을 얼마나 닦달해야 하며, 명품 열풍에 빠진 여성들은 명품을 살 돈을 벌기 위해 또 얼마나 자기를 몰아세워야 할까요. 그래서 그녀는 날씬하고 섹시한 몸매에 명품을 걸치거나 메고 명동이나 청담동 거리에 나서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것은 소비를 통해서만 유지되는 후기 산업사회와 자본이 자체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만일 이 여성들이 다른 시대, 다른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예를 들어 빅토리아 왕조에 영국에서 살았다면, 다이어트를 하고 명품 쇼핑을 다니지 않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했을 거란 말이지요. 어쩌면 독서를 하거나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감상하며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뿐 아니라, 정신과 삶을 보다 풍요롭게 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소비물질주의가 판치는 후기 산업사회가 이 여성들을 그렇게 놓아 두지 않고 지치도록 쇼핑하고, 그것을 위한 돈을 벌기 위해 또 죽도록 일하게끔 몰아세우고 닦달한다는 말이지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같은 몰아세움과 닦달이 성한 곳에서는 식물이든 가축이든,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더 이상 그것들이 전에 갖고 있던 고유한 ‘자립적 본질’, ‘갖춘 본질’, ‘신에 의해 창조된 본질’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근대 이후 인간은 그 어느 곳에서든 더 이상 사물들의 본질뿐 아니라 자신의 본질마저도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닦달의 본질은 위험이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근대적 이성의 본질이 닦달이고, 닦달의 본질이 위험이면, 근대적 이성의 본질이 곧 위험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요. 그리고 바로 그 위험을 우리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이 이름 붙인 ‘위험사회(risk society)’로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울리히 벡은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지금까지 유효했던 제도적 방안, 곧 과학기술로 통제하거나 사회제도로 보상하는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깨진 사회”를 ‘위험사회’라고 규정했습니다. 달리 말해, 금융위기, 원자력발전소 폭발, 항공기 테러, 환경오염 등과 같이 ‘근대적 이성이 만들어낸 위험을 근대적 이성으로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사회’를 그는 위험사회라고 이름 지은 겁니다.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S. Baumann)은 이 같은 위험사회에서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이 우리를 덮쳐오는 위험과 공포를 ‘유동하는 공포’라고 이름지요. 그리고 이 공포가 우리 삶에 독가스처럼 스며들어 유령처럼 떠다니는 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발전소가 폭발하고 석유 매장량이 동이 나며 주식시장이 붕괴하고 온갖 대기업이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당연한 것처럼 누리던 여러 서비스가 끊기는 한편 든든해 보이던 수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져 버리고 제트기끼리 충돌해 수천 개의 화물과 수백 명의 승객이 공중에서 쏟아지고, 시장 가격이 미쳐버려 가장 귀하고 소중했던 자산이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밖에 온갖 상상할 수 있는 또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재난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려 하며또는 이미 넘치고 말았을까?, 그리하여 현명한 사람이든 바보든 단순에 삼켜버리려 한다. 날마다 우리는 위험의 가짓수가 더 늘어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거의 매일 새로운 위험이 나타나고 경고된다.”

 

  반드시 이대로는 아닐지라도, 분명 우리는 천 년 전의 중세인이나 백 년 전의 근대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백 년 전이라면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해도 한국경제에는 타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세계경제가 거미줄같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발발한 금융위기가 다음날부터 주식을 폭락시키고, 불과 몇 달 안에 실업자들을 거리로 내몰지요.

 

  또한 백 년 전에는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치사율이 높은 악성 인플루엔자가 발생했다 해도 우리나라까지 전염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서울까지 확산되는 데 불과 몇 주밖에 걸리지 않지요.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모든 공항과 항만을 폐쇄해 인적?물적 교류를 차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년 3월 11일에 일본 도호쿠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과 해일은 그 자체로 커다란 재앙이었지만 이 역시 백 년 전이라면 우리와 무관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곳에 원자력발전소가 없었을 테니까요. 파손된 후쿠시마 원전에서 시시각각 새어 나오는 방사능은 빛도, 냄새도, 형체도 없이 후쿠시마 현을 덮쳤고 지금도 소리 없이 인접 지방과 해양, 그리고 이웃 나라들까지 침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야기만 하지 않을 뿐, 갑작스런 경제 위기로 직장이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주택과 주식의 가격폭락으로 빈털터리가 되지 않을까? 내가 먹고 마시는 것에 방사능이 묻어 있어 암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통제할 수 없는 유행성 인플루엔자가 나와 가족을 공격하지는 않을까? 핵발전소가 폭발하거나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테러나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나름의 공포에 떨고 있지요.

 

  실업이든, 경제 위기든, 자연 재앙이든, 환경오염이든, 은행 파산이든, 악성 인플루엔자의 확산이든,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전쟁과 테러든,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자연을 파괴하고 가정을 무너뜨리고 직장을 없애고 생명마저 위협하는 이 모든 재앙은 근대적 인간 이성이 만들어낸 폭력입니다. 근대적 인간 이성은 자신이 불러낸 유령들을 통제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들 재앙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거나 조장하고 있는 국가와 실정법과 그리고 자본에 대해, 마치 안티고네가 그랬듯이 분노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그것이 유전공학, 생명공학을 통한 과학발전이나 핵발전소 건설에 의한 경제발전과 같이 ‘국가의 감언이설’로 다가오든, 아니면 세계화,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와 같이 ‘자본의 화장한 얼굴’로 나타나든, 설사 실정법이라는 ‘무서운 가면’을 쓰고 덮쳐오더라도, 우리는 생명에 대한 총체적 위험을 몰고 올 모든 체제와 제도에 대해 ‘자연법을 근거로 한 저항’으로 맞서 우리의 자연과 가정과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바로 이것이 21세기를 사는 안티고네들이 마땅히 감행해야 할 저항과 혁명의 내용입니다.

 

 

4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성의 역사』에서 언급했듯이, 고유한 규준성(normativit)을 근거로 한 봉기나 반역은 “어떤 권력도 이를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제거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에 대한 권리’는 모든 권리의 궁극적 기반으로서 인간의 그 어떤 다른 권리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푸코가 언급한 생명에 대한 권리라는 개념을 단지 ‘인간의 생명’에 국한시키지 않고 자연의 모든 생명에로 확장시키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마치 그물망같이 연결되어 어느 한쪽이 무너질 경우 다른 한쪽도 온전히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오래된 지혜는 오염된 자연 속에서는 그 누구도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로 이미 증명되고 있습니다. 곧, 통제하기 어려운 질병과 지구온난화에 의한 기상재난이 범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데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식품조차 없다는 데서 여실히 증명된 것이죠.

 

  정리하자면, 21세기 ‘글로벌 위험사회’를 살며 ‘유동하는 공포’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필히 요구되는 것이 ‘생명권을 위한 저항과 혁명’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지난해 미국 뉴욕 맨해튼 주코티 공원에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고 외치며 시작하여 들불처럼 전 세계로 번진 ‘반(反)월가 시위’, 세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반핵시위’와 ‘반원전 시위’, ‘유전자조작식품(GMO) 반대시위’,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강정해군기지건설 반대시위’ 등이 사실상 오늘날 행해지는 ‘생명권을 위한 저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反)월가 시위는 얼핏 1대 99라는 불평등에 대한 저항처럼 보이지만 그 근원에는 실업문제, 곧 먹고사는 생명에 관한 문제가 깔려 있습니다. 때문에 이 시위는 단순히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생명권 저항’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디 저항이란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고 일시적이며 소극적 운동이지요. 반면에 혁명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추진한다는 점에서 능동적이고 지속적이며 적극적인 운동입니다. 때문에 생명권을 위한 운동은 모름지기 ‘저항에서 혁명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같은 목적을 추구하고 실행해 가는 운동 가운데 하나인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에코페미니즘을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여 뛰어난 작품을 생산하는 시인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제9회 천상병시상과 제4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고, 근래에 네 번째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를 출간한 김선우 시인이지요. 김선우 시인은 또 『나는 춤이다』와 『캔들 플라워』라는 소설도 냈습니다. 이제 모시고 ‘21세기의 생명권 혁명’을 겨냥한 에코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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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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