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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학수의 선물

  • 작성일 2012-04-27
  • 조회수 714

 

  [2012년, 동화를 읽자!]

 

 

학수의 선물

 

오채

 

  



 

  학수다.

  “학수야! 우리 준영이랑 같이 놀아 줘라잉! 자전거도 타게 해주고!”

  할머니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학수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진짜 혼자 놀아도 괜찮은데…….’

  자전거를 멈추고 학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생각했던 것처럼 까맣지도, 촌스럽지도 않았다. 이름만 듣고 엄청 촌스럽게 생긴 아이를 떠올렸는데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하긴, 사람들은 내 이름만 듣고 내가 여자인 줄 아니까. 학수가 멈춰 서서 할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손을 흔들며 또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가던 길 가고, 난중에 우리 준영이랑 같이 놀아라잉!”

  우리 가족은 여름마다 외할머니 집으로 휴가를 온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할머니 집에 오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매년 다른 곳으로 휴가를 다녀온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할머니가 사는 섬은 너무 작아서 사람들이 많지 않다. 학수는 유일하게 내 또래인데 할머니 집에 올 때마다 도시에 있는 친척집에 가 있어서 처음 보게 되었다.

  엄마 아빠는 낮잠을 자고 할머니는 밭에 가셨다. 뭘 해도 지루한 오후였다. 아빠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다가 그것도 재미가 없어 평상에 누웠다. 멍하니 바다를 쳐다보는데 학수가 또 지나갔다. 이번에는 곁눈질로 나를 힐끔 쳐다보고 갔다. 나를 불쌍하게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었다. 하나도 심심하지 않은 척. 하지만 인라인 스케이트도 혼자 타니까 재미가 없었다.

  ‘친구들이랑 시합할 때는 재미있었는데…….’

  인라인 스케이트를 벗어던지고 다시 평상에 누웠다. 친구들은 외할머니 집이 섬이라고 부러워한다. 이렇게 심심해 죽을 것 같은 내 표정을 못 봐서 그렇다.

  “준영아! 이것 봐라!”

  할머니가 내 코앞에 사마귀를 내밀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점프를 하다 머리를 나무 기둥에 부딪치고 말았다. 놀란 할머니가 “오메, 내 새끼” 하며 내 머리를 살펴보았다. 할머니는 내가 곤충을 무서워한다는 걸 잊으신 모양이다. 작년 여름에도 나는 사마귀를 보고 이렇게 놀랐었는데. 심심해하는 나를 즐겁게 해주려는 할머니 마음을 알기에 아픈 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아팠다.

 

  다음날 아침, 우리 가족은 할머니 말처럼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기지개를 켜며 마당에 나가자 못 보던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어제 학수가 타던 자전거였다. 나는 텃밭으로 달려가서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활짝 웃으셨다.

  “내 새끼, 일어났냐. 학수가 속이 깊어야. 아침에 일찌감치 자전거 갖다 놓더라. 심심하믄 그놈 타고 놀아라잉!”

  자전거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았다. 기분이 상쾌했다. 학수 자전거는 산 지 얼마 안 됐는지 핸들에 비닐이 씌어 있었다.

  ‘나 같으면 이런 새 자전거 안 빌려줄 텐데, 넘어져서 긁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세워 놓았다. 할머니가 한번 타게 해주라고 했지, 이렇게 놓고 가라고 한 건 아니다. 학수는 할머니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자전거를 한 번 더 탔다. 이번에는 아빠도 타겠다고 나섰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아빠를 막아섰다.

  “아빠 같은 어른이 타면 자전거 펑크 나요. 그럼, 이 자전거를 섬에서 어떻게 고쳐요? 도시까지 보내서 고쳐야 하잖아요!”

  그때였다. 지나가던 학수가, 여기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학수는 저 멀리서부터 할머니 집을 보면서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던 것 같다. 설마, 나랑 놀고 싶었던 걸까? 갑자기 학수가 큰 소리로 말했다.

  “타도 돼요! 빵꼬 안 나요. 빵꼬 나면 제가 고칠 수 있어요.”

  학수의 말에 아빠 얼굴이 환해졌다.

  “학수야, 나 그렇게 안 뚱뚱해. 한 번만 타고 올게.”

  아빠가 출발하려고 하자 언제 나왔는지 엄마가 폴짝 뛰어 아빠 뒤에 탔다. 엄마 아빠는 데이트하는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멀뚱히 서 있던 학수가 내 옆에 슬그머니 앉았다.

  “넌 새 자전거를 이렇게 막 빌려주면 어떡하냐?”

  학수가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우리는 그런 거 없다. 어차피 타다 보면 헌거 되는디.”

  나는 머쓱해져서 엄마 아빠가 사라진 길을 보았다.

  “느그 할머니가 니 얘기 많이 하셨어. 너 태권도 잘한다믄서?”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유치원 때 태권도를 잠깐 배우고 안 배웠다. 할머니는 그때 했던 태극 1장을 아직까지 기억하시나 보다. 내가 멋쩍게 웃자 학수도 따라 웃었다.

  “꺅! 달려라 달려!”

  멀리서 엄마가 아이같이 신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빠가 브레이크를 잡으며 우리 앞에 멋지게 멈춰 섰다. 나는 자전거 바퀴부터 살펴보았다. 다행히 자전거 바퀴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자전거에서 내린 엄마가 학수를 보며 말했다.

  “학수 김밥 좋아해?”

  엄마의 기습 질문에 학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외할머니 집에 올 때 항상 빼놓지 않고 사오는 것은 김밥 재료다. 할머니가 김밥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엄마가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그럼, 재료 준비해서 싸고 있을 테니까 준영이랑 놀고 있어.”

  우리는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엄마 말을 들어야 할 것 같긴 한데,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몰라서. 한참 만에 학수가 물었다.

  “쫄장게 잡으러 갈래?”

  무슨 말인지 몰라서 학수를 쳐다보자 학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 꽃게라고 해야 알지. 꽃게,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꽃게.”

  그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수는 집에 다녀오겠다더니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쫄장게, 쫄장게…….”

  꽃게 이름이 이상하긴 했지만 자꾸 부르다 보니 재미있었다. 금세 나타난 학수의 손에는 투명한 플라스틱 통이 들려 있었다.

  “타!”

  얼떨결에 학수 뒤에 탔다. 바닷가에 도착하자 학수는 갯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도 학수를 따라 갯벌로 걸어갔다. 씩씩하게 걷던 학수가 허리를 숙이더니 쫄장게를 잡았다.

  “이것이 꽃게 중에 가장 작은 놈이여. 군인으로 치면 졸병이라고 해서 우리는 쫄장게라고 불러.”

  엄지손톱만 한 작은 게가 다리를 마구 흔들고 있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학수는 통에 바닷물을 반쯤 넣고 쫄장게를 넣었다.

  “쫄장게를 잡아서 바닷물을 부어 주면 며칠씩 살아 있어.”

  눈 깜짝할 사이에 쫄장게가 내 앞을 지나갔다. 쫄장게를 잡으려고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학수는 가만히 엎드려서 빠르게 지나가는 쫄장게를 잘도 잡았다. 쫄장게를 잡아서 통에 넣다가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같이 넣으면 누가 갖지?’

  심각하게 고민이 됐다. 학수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잡은 쫄장게를 세면서 넣기로 했다. 여섯 번째 쫄장게를 넣으려고 보니 통 바닥이 벌써 쫄장게로 차 있었다.

  “와, 이렇게 많이 잡았어?”

  학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만날 하고 노는 게 이런 거니까…….”

  만날 이렇게 노는 학수가 정말 부러웠다. 나는 4학년이 되면서 더 바빠졌다. 이렇게 마음대로 놀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안간 학수한테 으스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메이플스토리’ 알아?”

  학수 눈이 커졌다. 학수는 눈이 크고 눈동자가 유난히 까맸다. 그렇지, 학수가 알 리가 없지.

  “알아! 아이디는 ‘바다 학수’!”

  이럴 수가! 내가 좋아하는 게임 사이트를 학수도 알고 있다니.

  ‘학수는 게임도 고수일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학수가 쫄장게도 잘 잡고 게임까지 잘한다고 하면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았다. 멀리서 아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밥을 먹으라는 신호 같았다. 학수는 갯벌이 묻은 팔과 다리를 바닷물로 꼼꼼하게 씻었다. 나도 따라 씻으면서 학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설마, 공부도 잘할까?’

  쫄장게가 든 통을 들고 학수 자전거에 탔다. 통 속에서 뒤죽박죽 섞여 있는 쫄장게를 보자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 혼자 가졌으면 진짜 좋겠다…….’

 

  우리가 잡은 쫄장게를 보고 아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야, 우리 아들 많이 잡았다!”

  나는 학수가 거의 다 잡은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학수도 자기가 거의 다 잡은 거라고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학수가 절반이 넘는 쫄장게를 가지고 간다고 생각하자 아까운 마음까지 들었다. 어차피 내가 잡은 것도 아닌데…….

  “김밥 먹어 봐!”

  엄마가 먹음직스러운 김밥을 들고 나왔다. 할머니는 김밥을 들고 마을회관으로 가셨다. 여기서는 뭐든지 이렇게 나눠 먹는다.

  “근데 이거, 어떻게 나누지?”

  내가 쫄장게를 가리키자 학수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너 다 가져!”

  속으로는 좋았지만 덥석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네가 더 많이 잡았잖아.”

  “여기 널린 게 쫄장게여.”

  쫄장게가 든 통을 받아들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고, 고마워.”

  집으로 돌아가면서 학수는 자전거를 놓고 갔다. 내가 자전거를 갖고 가라고 하자 학수가 웃으며 말했다.

  “심심할 때 타.”

 

  아침밥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자전거를 세우다가 학수에게 뭔가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 인라인 스케이트가 보였다. 나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지금껏 한 번도 다른 친구에게 내 물건을 빌려준 적이 없다. 어떤 애는 치사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내 물건은 나 혼자 깨끗하게 쓰는 게 좋다.

  ‘학수는 쫄장게도 다 주고, 자전거도 빌려줬잖아…….’

  인라인 스케이트를 들고 학수네 집으로 갔다. 강아지랑 놀고 있던 학수가 나를 보고 웃었다.

  “인라인 스케이트 탈 줄 알아?”

  “한 번도 안 타봤어.”

  나는 학수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내밀었다.

  “신어 봐.”

  학수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학수도 겁이 나는 게 있나 보다. 나는 학수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또 내밀었다.

  “재밌어. 가르쳐 줄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고 엉거주춤 일어나던 학수가 그대로 넘어졌다. 학수도 못하는 게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학수 손을 잡아 주었다. 긴장했는지 손이 축축했다. 아빠가 나한테 해주듯이 나도 학수 손을 잡고 천천히 끌어 주었다. 학수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잘 따라왔다.

  “재, 재밌다.”

  학수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학수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금방 배웠다.

  “이제 자전거 타보자.”

  내가 자전거를 타고 학수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은 채로 자전거 안장을 잡았다. 나는 아주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뒤에서 학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학수네 마당을 몇 번이나 돌았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 가르치는 기분이 이런 건 줄 몰랐다. 더위도 잊을 만큼, 배고픈 것도 잊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라면 먹을래?”

  학수가 물었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학수네 집에서 라면을 먹기가 쑥스러웠다.

  “집에 가서 먹을게.”

  학수가 냄비에 물을 받으며 말했다.

  “우리 집에 온 손님인게 먹고 가.”

  손님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라면을 먹기로 했다. 학수는 엄마 아빠가 새벽에 꽃게를 잡으러 갔다가 저녁에 오니까 혼자서 밥을 차려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라면 끓이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물이 끓자 학수는 냉장고에서 새우를 꺼내서 라면 냄비에 넣었다. 새우가 들어간 라면은 어떤 맛일지 너무나 궁금했다.

  드디어 라면이 다 끓여졌다. 나는 국물을 한 번 떠먹고 깜짝 놀랐다.

  “진짜 맛있다! 새우 들어간 라면은 처음 먹어 봐. 넌 진짜 요리사 같다!”

  내 칭찬에 학수 얼굴이 빨개졌다. 라면을 맛있게 먹고 학수는 설거지를 했다. 엄마처럼 행주를 꼭 짜서 싱크대까지 깨끗하게 닦는 학수는 진짜 요리사 같았다.

  “낚시하러 갈까?”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학수는 창고에서 대나무로 만든 낚싯대를 들고 나오더니 나한테 하나를 내밀었다. 학수는 어깨에 낚싯대를 걸치고 앞장섰다. 나도 학수처럼 어깨에 낚싯대를 걸치고 걸었다.

  우리는 바닷가 모퉁이를 돌아 한참을 더 걸어갔다. 큰 바위가 나오자 학수가 멈춰 서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내 비밀 장소여. 여기서 우럭도 많이 잡았어.”

  큰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앉은 학수는 낚시의 고수처럼 보였다. 학수는 녹슨 깡통에서 갯지렁이를 꺼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갯지렁이가 통 속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징그러웠다. 학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낚싯바늘에 갯지렁이를 끼워 주었다.

  “힘껏 던져!”

  있는 힘껏 낚싯줄을 던졌다. 학수는 자기 낚싯대에도 갯지렁이를 끼우고 낚싯줄을 던졌다. 햇살이 너무 따가웠다. 등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엄마가 모자를 줄 때 받아올 걸 그랬다. 모자라도 있으면 눈은 제대로 뜰 수 있을 것 같았다. 물고기는 한 마리도 구경하지 못했다. 그만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학수 눈치를 살피며 바다만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학수가 일어났다.

  “오늘은 물고기들이 쉬는 날인갑다. 우리 수영이나 하자!”

  첨벙, 학수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도 학수를 따라 뛰어들었다. 시원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원했다. 물고기가 쉬는 날이라서 좋았다. 사실, 나는 낚시보다 수영이 백 배는 더 좋았다.

  학수가 잠수를 하고 나오더니 씨익 웃었다.

  “없어. 한 마리도 안 보여. 물고기가 쉴 때는 같이 쉬어야 돼. 그런 날은 우리 엄마 아빠도 일찍 집에 돌아와.”

  학수는 잠수도 잘한다. 나도 학수에게 잠수를 배웠다.

  “코를 꽉 쥐고 숨을 참고 들어갔다가 못 참을 것 같을 때 나오믄 돼!”

  나는 물속에 들어가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잠수는 나랑 안 맞는 것 같았다. 대신 우리는 수영 시합도 하고 물수제비뜨기도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큰 바위 위에 학수와 나란히 누웠다. 학수가 바위에서 딴 미역으로 눈을 덮었다. 미끈미끈하고 차가운 느낌이 좋았다. 미역은 따가운 햇살을 가리는 좋은 선글라스였다.

  “너 말고 4학년은 없어?”

  “있어. 우리 선생님 아들. 지금은 방학이라 집에 가 있어. 개학하면 선생님이랑 같이 올 거여.”

  학수에게 바다 말고 다른 친구가 있다는 게 기뻤다. 나도 모르게 친구가 없을 학수가 걱정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학수가 좋아하는 산길로 왔다. 산에는 소가 아주 많았다. 학수와 나는 소가 몇 마리인지 세어 보기도 했다. 소똥을 피해 걷던 학수가 빨간 열매들이 줄지어 늘어선 곳을 가리켰다.

  “해당화 열매여. 꼭 잘 익은 애기 호박 같제.”

  애기 호박이라는 말에 자세히 보니 작은 호박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학수도 웃었다. 알고 보니 학수는 친구가 아주 많았다. 애기 호박처럼 생긴 해당화 열매도 있고, 쉬는 날을 알려주는 물고기도 있고, 쫄장게까지……. 섬의 모든 것이 학수의 친구였다.

  그날 저녁, 학수가 커다란 그물망을 들고 할머니 집으로 왔다.

  “아빠가요, 준영이 삶아 주래요.”

  커다란 꽃게들은 바닷물도 없는데 살아서 집게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이여. 꽃게는 오늘 쉬는 날 아닌가 봐. 맛있게 먹어.”

  학수가 나한테만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복숭아 몇 개를 학수에게 건네며 몇 번이나 “잘 먹으마.” 하셨다. 꾸벅 인사를 하고 가는 학수의 뒷모습이 정답게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할머니 때문에 늦잠을 잘 수 없었다. 할머니가 새벽부터 엄마에게 자꾸 “이건 안 필요하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차에 다 실을 수 없다며 할머니에게 그만 주셔도 된다고 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여 놓고는 금세 다른 것을 또 무겁게 안고 뒤뚱뒤뚱 걸어오셨다.

  배가 곧 출발한다고 했다. 엄마가 학수에게 인사를 하고 오라고 했다. 학수네 집에 가니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나는 전화기 옆에 있는 메모지에 쪽지를 썼다.

  “내 아이디는 ‘준영짱’이야. 나는 토요일에만 게임할 수 있어. 게임 접속하면 내가 초대할게!”

  아빠는 벌써 짐을 배에 싣고 있었다. 나는 학수가 준 쫄장게를 챙겼다. 서울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신선한 바닷물을 담아서. 선착장에서 할머니가 우리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또 온나잉. 항상 건강허고들.”

  할머니 눈가가 빨개졌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꼬옥 안아 주었다. 나도 할머니를 안아 드리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자전거를 탄 학수가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났다.

  “어디 갔었어? 아까 집에 갔었는데 너 없었어.”

  학수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뱃고동이 울렸다. 할머니하고 헤어질 때도 안 슬펐는데 아주 조금 슬퍼지려고 했다. 학수가 자꾸 머뭇거렸다. 내가 먼저 멋지게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잘 있어. 내년 여름에 또 봐.”

  학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수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내 손에 뭔가 쥐어 주고 쏜살같이 자전거를 타고 가버렸다. 배에 올라타서 손을 펴보았다. 학수가 내 손에 쥐어 준 것은 꼬깃꼬깃 구겨진 이천 원이었다. 어른이 아닌 친구한테 용돈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엄마, 이거 용돈이야?”

  엄마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섬에서는 선물을 살 수 없으니까 이걸 줬나 봐. 이건, 용돈이 아니고 선물이야.”

  선물이라는 말에 갑자기 목이 따끔거리고 눈도 따끔거렸다. 뱃고동이 울리고 배가 출발했다. 우리 가족은 나란히 서서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디에도 학수는 보이지 않았다.

  배가 선착장을 천천히 돌았다. 그때, 선착장 구석에 물끄러미 서서 배를 쳐다보는 학수가 보였다. 나는 두 손을 들고 있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선물 고마워…….’

  학수도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나는 학수의 선물을 보고 또 보았다. 할머니 말처럼 학수는 속이 깊은 것 같다. 학수의 선물은 감동이다.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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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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