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유령은 말할 수 있는가?

  • 작성일 2011-11-28
  • 조회수 1,116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1년 명장면

 

 

유령은 말할 수 있는가?

 

김남혁

 

 

 

 

 

  2009년 한 편의 소설이 긴급한 사회문제를 다루었고, 그해 그 소설은 무수한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다시 그 소설은 2011년 한 편의 영화로 각색되었고, 영화는 영화대로 또 소설은 소설대로 이른바 스크린셀러가 되어 국민적 차원의 호응을 받았으며, 이제 영화와 소설은 사회의 부조리한 문제를 감싸 줄 여지가 있던 법을 개정하게 만들었다. 주지하다시피 공지영의 장편소설 『도가니』1)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야말로 ‘말이 칼보다 강하다’는 지고의 진리를 보여준 이 사례 앞에서 우리는 2011년을 대표하는 문학적 사건이라고 명명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사태에 대한 명명은 언제나 명명할 수 없는 것들을 은폐하면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문학적 사건에 대한 명명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명명의 순간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성찰이다. 그렇게 은폐되는 것들을 사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2011년 지금 2009년의 『도가니』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런데 어떻게 보면 뜬금없어 보이고 심지어 객관적인 답변을 구할 수 없어 보이는 의문을 먼저 제기하고 싶다. 2000년대 이후 발표된 작가의 대표 작품들이 구조적 폭력을 숨기고 있는 사회제도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2), 그리고 보수 정당의 위선적인 행동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작가의 사회적 행보를 고려할 때, 다시 말해 작품과 작가의 세계관을 염두에 둘 때 『도가니』라는 소설을 쓰기 위해 고심했던 공지영에게 광주 인화학교 사건의 피해자의 말을 듣는 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반대로 가해자의 말을 듣는 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수화로 통역되는 피해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고심했을 공지영의 진정성을 존중하면서도 계속해서 마음 한자리에 남는 궁금증은 희생자를 향한 그 같은 진정성이 도리어 가해자와 대면해야 하는 어떤 불편함을 피하게 하는 명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당연히 여기서 우리가 가해자들에 대한 이해를 문제 삼는 이유는 그들의 무고함을 변호하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희생자의 이해와 더불어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비로소 인간성 자체에 대한 문제3)를 심화시킬 수 있고, 더 나아가 가해자를 그야말로 가해자로 만드는 구조적 폭력4)에 대해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도가니』에서 강인호와 서유진을 비롯한 희생자들의 편에 선 인물들이 가해자의 위선을 고발하는 와중에, “이제 국고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복지법인과 학교법인 경영진과 이사진은 해임될 것이다. 그리고 관선이사가 파견되어 이후 정상화 절차를 밟으면 될 것이었다.”(157)라며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될 미래상을 제시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여기서 이 소설은 장애인을 보호하는 제도 자체에 대한 사유를 진전시키는 대신 제도를 합리적이고 정직하게 운영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은 아닐까. 다르게 말해, 가해자를 악하게 만드는 원인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소설은 장애인 보호 시설 자체에 대한 비판적 사유5)를 누락하게 하고, 제도 자체에 대한 사유의 결핍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에 안착하게 한다. 더구나 언어의 질서에서 벗어나 제 목소리를 갖지 못한 피해자를 재현하는 데 있어서 이 소설은 그들을 선한 이미지에 고정시킨다. 예를 들어 소설에서 열다섯 살의 김연두가 강인호 선생에게 보낸 편지는 초등학교 일학년부터 청각 장애를 앓은 인물이 쓴 편지로 보기 어렵다. 편지의 대상이 자신을 가르치고 더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이라는 점, 김연두가 어릴 적부터 글을 잘 쓰고 읽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더라도 소설에 재현된 편지의 문체는 가해자와 구별되는 선한 성인의 말하기와 닮아 있다. 미성년이고 농인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배태될 수 있는 이질성이 이 편지의 재현 범위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다르게 자신의 이질성을 선생이라는 수신자의 특별한 위치 때문에 김연두 스스로 제거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텐데, 오히려 이는 인간 사이의 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발신자(증언자)의 태도가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처럼 『도가니』에는 선(善)의 스펙트럼 속에 가둘 수 없는 농인들의 이질성이 배재되어 있고, 김연두(발화자)와 강인호(청자)의 관계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투명한 관계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선악의 이분법은 더욱 더 공고히 응고된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속에 독자는 편안히 참여하게 되고, 이때 문제의 원인은 오로지 악한 인물들에게로 수렴되며 해결책은 이들을 선한 인물로 대체하는 것으로 축소된다. 이러한 수렴과 축소 속에 사라지는 것은 이질적인 인간성과 구조적인 폭력에 대해 섬세하고도 복잡한 사유다.

  제 ‘유령’이 2000년대 문학의 한 특성을 알려주는 중요한 키워드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령은 존재의 고정된 정체성에 대한 반대이자,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르는 이분법에 대한 거부이며, 따라서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하에서 사라지는 어떤 것들에 대한 지칭이다. 이를테면 박정희 시대의 유령은 군사정권의 지배담론에 의해 망각되고, 이에 대항하려 했던 민중담론에 의해 또다시 묻혀버린 어떤 것들이다. 그렇기에 이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화법이 도입되어야 한다6). 2000년대 문학이 나아간 이 같은 사유를 존중할 때 과연 『도가니』는 농인들을 ‘유령’의 가르침에 따라 이해하고 있는가. 오히려 이 소설은 2000년대 소설이 깨뜨린 구태의 이분법을 또다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러한 이분법은 긴급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필요할지 모른다. 더구나 유령의 목소리는 완벽히 재현될 수 없는 것 운운하는 윤리적 가르침이 오히려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힘겨운 노력으로부터 손쉽게 도피하는 명분이 될 수 있다면, 이들의 목소리를 재현하려 했던 『도가니』와 같은 긴급한 행동성은 분명 소중한 자질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이 아무리 유효하더라도 종국에는 자신이 공격하고자 했던 지배자가 기대했던 결과를 반복하게 된다는 점, 다시 말해 이질적인 인간성과 구조적 폭력에 대한 또 다른 “침묵의 카르텔”(196)을 의도와 다르게도 이러한 전략이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아프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2011년 『도가니』를 읽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질문해야 한다. 유령은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이는 『도가니』가 이끌어낸 많은 사유를 닫아버리는 냉소적인 질문이 아니라 『도가니』로부터 사유가 새롭게 시작되기를 바라는 응원의 질문이다. 수많은 글에서 공지영이 알려줬듯이, 사태에 대한 손쉬운 망각을 유도하는 대신 힘겨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특별한 ‘위로’와 ‘응원’ 말이다.

 

《문장웹진 12월호》

 

 

 

1) 『도가니』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 DAUM에 2008년 11월 26일부터 2009년 5월 7일까지 연재됐고, 같은 해 6월에 단행본으로 발표됐다. 이 글에서 소설 본문을 인용할 경우에는 단행본을 따르며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공지영, 『도가니』, 창비, 2009.

 

2) “특히 2000년대에 쓴 장편소설 가운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5)은 윤리적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던 사형제 폐지론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고, 『즐거운 나의 집』(2007)은 현실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다양한 가족 형태를 수용하고 다문화사회로 향하는 데 필요한 담론을 제공하면서 2008년 호주제 폐지를 알리는 서막이 되기도 했다.” 이상의 언급은 정혜경, 「소설 형식의 시국선언과 기억의 윤리」, 《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 315쪽.

 

3) 이를테면 가해자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과정에서 인간 안에 내재한 악의 평범성 문제를 논했던 한나 아렌트를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도가니』에서 구조적 폭력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자애학원과 연결된 시청, 경찰, 교육청, 교회, 법정이 구조적 폭력의 하나일 수 있는 “침묵의 카르텔”을 조장하고, 이들이 만들어 놓은 지배의 그물망을 김연두를 비롯한 중심인물들이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서사적 백미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득권자들의 유착 관계로 드러나는 구조적 폭력은 한국소설사 전체에 걸쳐 무수히 반복됐던 진부한 소재가 아닐까. 오히려 각주 5)에서 볼 수 있듯이 진정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은 시혜와 동정의 시선 그 자체다.

 

5) 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한 예로 장애인 운동가 박경석의 고견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박경석은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시선으로 보는 태도가 바로 장애인을 정상인으로부터 배제하게 만드는 관용의 제스처라고 비판한다. 영화 《도가니》를 두고 이루어진 비판이지만 이는 소설 『도가니』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다. 그의 의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도가니》가 [장애인_인용자] 문제를 환기한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 영화를 둘러싼 시선과 관심 역시 주류의 틀[시혜와 동정의 틀]을 넘어서진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 장애인 시설의 인권유린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애인이 시설에 갇혀 살아가게 하는 것 자체가 인권침해임을 기억해야 한다. 장애인이 시설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동네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거도 인정해 주고 활동 보조가 필요한 사람은 활동보조자를 24시간 두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설에 들어가는 돈과 지원을 지역 사회로 돌리면 가능하다. 그게 안 되는 건 시설, 즉 사회복지 법인들이 사유화된 기업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그걸 해결하려는 장치가 공익 이사제인데 사유재산 침해라는 주장에 밀려버렸다.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와 닿아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규항의 블로그(http://gyuhang.net)에 올라온 「김규항의 좌판4-장애인운동가 박경석」, 2011년 11월 2일 포스팅 참고.

 

6) ‘유령’은 비단 2000년대 문학의 영역만을 대변하는 키워드가 아니다. 정치학자 김원은 박정희 시대 유령이 양산되는 담론의 메커니즘을 점검하고, 이들 유령을 이해하기 위해 기존의 역사학과 다른 연구 방법인 구술사적 접근을 시도한다. 참고로 이러한 탁월한 연구는 지금까지 발표된 김원의 모든 연구의 문제의식이자 방법론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위 본문의 맥락은 김원,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현실문화연구, 2011 참고.  

  

추천 콘텐츠

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