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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형식

  • 작성일 2011-03-04
  • 조회수 1,511

 

[기획특집] 2011년 경향진단·소설

 

사유의 형식

 

허병식

 

 

 

 

 

이 스마트한 시대에……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읽고 쓰는 방식이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는 주장은 이미 하나의 유행담론을 넘어 대세를 이룬 듯하다. 우리는 이미 인터넷과 각종 정보기술, 그리고 스마트 기기들의 발달로 인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전달하는 방식에서 참으로 빠른 변화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추종하며 무조건적인 열광과 환영으로 스마트한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 우리에게 놓여진 현실적인 과제의 전부일 것인가.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이러한 변화들이 실상은 우리의 사유를 가볍고 천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진단은 스마트 열풍의 한편에서 들려오는 의미 있는 목소리다. IT 미래학자인 니콜라스 카가 쓴 책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최지향 역, 청림출판, 2011)은 이런 디지털 시대의 사고방식이 가져올 여러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디지털 기기를 통해 전통적인 독서가 대체되는 방식은 결국 책을 읽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깊이 생각하는 능력’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전자책의 등장으로 인한 독서는 필연적으로 선형적인 사유가 아닌 하이퍼텍스트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결국 인지적 과부하를 불러와 독자의 능력을 초과하는 작업 기억 능력을 요구하게 된다고 말한다. 결국 사람들은 디지털 매체를 통해 무언가를 읽었지만, 사실은 자신이 여러 하이퍼텍스트가 안내하는 링크들을 방황하다 돌아왔을 뿐, 읽은 정보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는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독서를 통해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정보를 기억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게 된다면, 읽는다는 행위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게 될 것인가.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만들어낸 이후, 독서는 인류에게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깊은 집중과 분석적이고 공감적인 문자해석 활동,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만의 사유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인류가 문화와 문명을 이루는 데 핵심적인 동력을 제공했다. “우리 정신의 역사에서 이 ‘불가사의하면서도 이례적인 일’을 가능케 한 것은 책이라는 기술이다. 독자들의 뇌는 단순히 글을 읽을 줄 아는 뇌 이상이었다. 이는 문학적인 뇌였다.”(『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101~102쪽)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문학을 포함한 인문적인 사유는 단순히 읽고 기억하는 능력 이상의 것을 사람들에게 부여하여 인류를 형성해 왔다. 현재의 문화와 문명을 이루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가 책이라는 형식에 빚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하기 어려운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책이라는 양식이 빠르게 다른 미디어로 대체되어 가는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문학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고 결국 종말을 맞이할 것이란 전망은 이제 거스르기 힘든 흐름이 되었다. 그러나 점점 소수자, 예외자가 되어 간다고 해도 여전히 문학을 생산하고 또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다. 이 스마트한 시대에 그 몰락의 운명을 스스로의 것으로 수락한 자들이 어떤 사유의 형식을 창안하여 상징적인 죽음을 준비하게 될 것인가를 지켜보는 일은 쓸쓸하지만 의미 있는 것이다. 인터넷 웹진의 한 페이지에서 머물며, 다른 페이지들과 각종 링크들에 대한 유혹에 끝없이 시달리며 이 글을 힘겹게 읽고 있을 독자들 또한 그러한 몰락의 예감들 속에서 문학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1년의 문학이 책과 사유의 종말이라는 과제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스마트한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이, 또는 그 흐름과 관계를 맺으면서, 지금, 여기의 작가들이 수행하는 작업을 살펴보면서, 사유의 미래에 대한 어렴풋한 짐작을 수행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언어가 있다

 

어떤 사유는 언어의 경계에 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 주체성의 형성과정이 문학적 사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그 핵심에는 언어의 형상과 표현에 대한 능력의 확보라는 지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배수아나 한유주의 작업을 통해서, 문학이 그 기원의 자리에서부터 자신의 양식으로 확보하고 있던 언어형식에 대한 수행적인 관심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지켜봐 왔다. 2010년에 그러한 대열에 합류한 신예작가로 박솔뫼의 이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첫 장편소설 『을』(자음과모음, 2010)에서 등장인물 ‘을’은 자신의 독백적 발화를 낯설게 느끼는 장면들을 자주 보여준다. “속으로 조그맣게 은행에 어떻게 갑니까 하고 말해 보았다. 여보세요. 은행에 어떻게 갑니까. 어색한 것도 그렇다고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었다.”(『을』, 30쪽)와 같은 대목들이 그것이다.

『을』에서 글쓰기의 형식에 대한 물음은 언어 안에 내던져져 있다는 상황을 낯설게 바라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말을 한다는 것, 언어를 낯설게 바라본다는 것은 발화를 통해서 사물이나 사태의 직접성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감각에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글쎄. 무엇인가를 그리워하게 될 것인가. 을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미 그리운 어떤 것이 있기는 했는지. 아니면 불가피하게 갖게 되는 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견딜 수 없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올 것인가. 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예감이었지만 을은 자신이 어디에선가 혼자 죽게 되리라는 것을 가슴속 깊이 느끼고 있었으며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려보아도 그랬다. 대화가 아닌 문법, 정확한 규칙, 숨결이 없는 기계, 무엇보다 깊숙한 침묵.


(161-162쪽)

 

을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국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보장하는 정체성 같은 것이 결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는 공허와 침묵 속에서 자신만의 장소를 발견하려 한다. 아감벤은 이러한 공허와 소리 없음의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에서 비로소 인간에게 에토스와 공동체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언어 안에 내던져져 있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은 결코 언어를 매개로 한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하나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유 모델 혹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름과 규칙들이 존립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사유 모델을 따를 경우에는 결코 이 ‘언어가 있다’는 사태를 표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강조-원문)” (아감벤, 조효원 역, 『유아기와 역사』, 새물결, 2010, 24-25쪽.)

언어와 목소리가 사라진 장소, 그 곳을 향한 정념을 발화하는/ 하지 못하는 이야기는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고, 결국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과 에토스를 다시 사유하도록 만들 것이다. “공장 지대의 한가운데, 어느 언어의 세계도 아닌 어둠의 한가운데, 모든 소리가 사리진 곳. 아마 그럴 것이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곳. 바로 그 곳일 것이다.”(163쪽)라는 을의 독백은 그 장소로 우리를 인도한다. 『을』의 서사에서 이러한 언어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진단은 서사를 구성하는 여러 겹의 등장인물들의 존재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느 도시에 머물고 있는 여행자들인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그러니까 존재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된 듯한 삶을 이어 가고 있다. 을과 민주, 프래니와 주이, 그리고 민주의 꿈속에서만 등장하는 윤과 바원 등의 이야기가 모두 어떤 사건들을 전달하는 듯하면서도, 결국 어떤 사건도 전달하는 데 의도적으로 실패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기인한 것이다. 프래니가 연인인 주이와 관계를 맺은 사람을 총으로 쏜 사건에 대해 회상하던 씨안이 결국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될 긴 시간을 예감”(178쪽)하는 것은 그러나 씨안만의 예감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이미 우리는 그 시간 속에 초대되어 있는 것이다.

박솔뫼의 「해만」이라는 단편에서도 이러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누군가 해만에 가야겠다고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떠올리는 해만에 갔던 경험을 떠올리는 이 서사에서 해만이라는 장소는 『을』의 무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언어와 목소리가 사라지는 장소, 그 곳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체가 아득한 경계 속으로 사라지는, ‘비장소’에 가까운 곳이다. “해만에서 우리는 문을 열고 인사를 하고 그러다 말이 없고 흔들흔들거리고 떠나고 돌아가고 그리고 생각한다, 그처럼 해만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천천히 모든 것이 멀어지고 사라지는 것이었다.”(「해만」, 《창작과비평》 2010 겨울호, 304쪽)라는 결말의 독백은 이러한 비장소에서 우리를 공동체 속에 묶어 주는 경계들을 다시 새롭게 구성하라고 조용히 권유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하고 목소리가 소멸하는 장소로 우리를 인도하는 이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언어가 있다’는 사태를 분명하게 자각하게 된다.

 

 

장소의 윤리

 

 

마뜨료슈까는요, 라고 무재 씨가 강판에 무를 갈며 말했다.

 

속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알맹이랄 게 없어요. 「……」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무재 씨, 그건 공허한 이야기네요.

 

그처럼 공허하기 때문에 나는 저것이 사람 사는 것하고 어딘가 닮았다고 늘 생각해 왔어요.

 


(황정은, 『百의 그림자』, 민음사, 2010, 141-142쪽. )

 

황정은의 첫 장편 『百의 그림자』는 사람이 살아가는 일의 공허함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박솔뫼의 작품과 닮은 데가 있는 듯하다. 『을』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시간을 향해 나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였다면 『百의 그림자』는 본래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발화를 낯설게 느끼고 속으로 반복해 보는 『을』의 인물들처럼, 『百의 그림자』의 은교는 ‘가마’라는 발음을 무재에게 반복하도록 시키고는 “가마, 라고 말할수록 이 가마가 그 가마가 아닌 것 같은데요.”(38쪽)라는 반응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도 존재하는데, 박솔뫼의 인물들이 언어와 낯설어지는 순간을 그저 견디며 자신만의 침묵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택한다면, 황정은의 인물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소리내어 발화하도록 만들고, 그 언어 속에 내던져져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윤리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방법론적으로 선명하게 갈라지는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단기여행자들의 ‘탈장소’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구체적인 현실을 환기하지 않는 박솔뫼의 작품과 달리 『百의 그림자』가 특정한 장소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장소란 어떤 곳인가.

그 곳은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다. 그 곳에서 일하고 있는 화자는 그 장소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는 본래 분리되어 있었던 다섯 개의 건물이었으나 사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개축되어서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다.”(29쪽) ‘가’에서 ‘마’에 이르는 기호로 그 건물들을 구분하는 방식은 명명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는 선명한 구분이기는 하나, 그것이 각각의 건물들에서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세계와 맺고 있는 장소성을 지워버리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한 명명이 되지 못한다. 마치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38쪽)라고 항변하는 것처럼, 가에서 마에 이르는 기호로 명명되는 그 장소들에 대한 호명은 그 기호를 넘어 장소의 의미를 되찾아주려는 화자의 발화행위에 기인한 것이다. ‘장소’는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에 의해 구성되며, 이러한 실천들은 변화하는 복수의 경계를 지니게 되고, 중첩되고 상호교차하게 된다.(린다 맥도웰, 『젠더, 정체성, 장소』, 여성과 공간연구회 역, 한울아카데미, 2010, 25쪽.) 가에서 마에 이르는 기호로 명명된 장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됨으로써 그 기호적인 구분을 넘어서 스스로의 장소성을 획득하게 된다. 『百의 그림자』는 이 장소에 정당한 정체를 되찾아주고자 하는 윤리로부터 출발한 소설이다.

곧 철거를 앞두고 있는 이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 이 소설은 “아버지는 죽어서 빚을 남기고 소년은 빚을 갚으며 어른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93쪽)의 주인공인 무재와 학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열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전자상가에 일터를 잡은 화자가 서로 어둠 속에 대화를 나누고 어둠에 잠겨 있는 캄캄한 장소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는 이야기다. 그들은 도심의 가난한 전자상가를 일터로 삼고 살아가면서, 그 장소를 벗어난 도시의 다른 지역들이 제공할 수도 있었을 다양한 기회와 삶의 양식으로부터 절연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들이 기반하고 있는 장소를 ‘슬럼’이라고 부르는 사회에 대해서,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115쪽)라고 윤리적인 물음을 던짐으로써 언어가 지니고 있는 폭력성과, 도시의 불균등한 지리적 분포와 지역을 구획화하고 계층화하는 공동체의 윤리에 대해 성찰할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종말의 사유

 

이른바, 종말의 상상을 상연하는 묵시록이 최근 한국소설의 주요한 경향 중 하나가 되었다는 지적들이 들려오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기억 속으로 떠나보내고 싶어 하는 과거의 개발독재가 재현되고 있는 듯한 파국적인 현실의 모습이 작가들을 그러한 묵시록적 상상력으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진단이 그 지적들 속에 들어 있다. 이러한 종말의 사유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여러 가지 모습의 적대들로 가득하다는 자각을 담고 있는 것이어서, 그리고 그러한 적대는 정권 교체 같은 것으로는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것이어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우리 문학의 현장에 출몰하게 될 것이다.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가 인물들의 그림자가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을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불행에 맞서는 방식을 모색하였다면, 김성중은 단편 「그림자」(《문학과사회》 2009년 여름호)에서 제 그림자를 잃고 다른 그림자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초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들려준 바 있다. 이 작가가 환상과 알레고리를 적절히 동원하여 전달하는 파국의 상상력은 이채롭다. 그것은 “우리를 기만하고 혼란시켰던 빛은 어디에도 없다”(「그림자」, 338쪽)는 체념에 기반하고 있는 듯하지만, 또한 유토피아적인 열림의 순간을 내장하고 있기도 하다.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점점 투명해지다가 결국 사라져 버리고, 집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재앙을 맞이한 순간에 최후로 살아남은 두 아이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이 파국에의 예감으로 가득 찬 서사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최후에 살아남은 아이들의 성장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소녀는 본능적으로 어른스러워져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을 집 안에 채워넣어 생존을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고, 소년의 몸에는 허리와 다리가 너무 아프다고 말할 정도로 시각적으로 각인되는 ‘성장의 채찍’들이 출현한다. 거주를 함께 하게 된 두 아이들이 소녀가 사라지기 직전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장면은 이 이야기가 파국의 시간에 대한 감각과 더불어 생성의 시간을 준비하는, 비동시적인 종말의 상상을 보여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대지의 모든 것이 갈라지고 그 속으로 모든 존재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인식하는 것처럼, 두 아이들의 이야기는 헐벗은 파국의 조건의 틈새를 뚫고 자라나는 새로운 생명의 조건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어디선가 마지막으로 남은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남은 땅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몇 달 만에 부쩍 자란 소년이 전부터 들어 오던 소리였다. 뼈가 자라는 소리였다.


(「허공의 아이들」, 284쪽 )

 

소녀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남은 땅조차 무너지고 난 후에, 최후를 맞이한 소년에게 들려온 것이 자신의 뼈가 자라는 소리라는 소설의 결말은 현재의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이후에 도래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예감하도록 만든다.

김성중이 발표한 또 다른 단편 「버디」(《자음과모음》 2010년 가을호)는 어떠한가. 「허공의 아이들」이 파국을 맞이한 세계의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버디」는 평균수명이 백사십에 달하는 미래세계의 노년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고치지 못할 환부가 없어졌지만, 불가능한 수준까지 생명을 연장하면서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써버려 절망적인 노년을 보내는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노인들이 신약과 자본이라는 규율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제약회사와 정부에 대한 연쇄 테러를 감행하게 되는 서사로 빠르게 이동한다. 버디와 화자가 공모하여 진행하는 이 테러 행위는 지배와 재난의 현실에 대한 대응이라는 알레고리만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 화자가 그 테러 행위의 수행 속에서 다시금 자신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장면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늙은 내 모습이 ‘적합한’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어쩌면 내 인생은 이 순간을 위해 달려왔고, 거울 속의 내가 그토록 늙어 있던 것은 바로 이 순간 때문인지도 모른다.


(「버디」, 65쪽 )

 

화자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청춘을 살았다”고 표현한 경험을 안겨 준 버디의 유골을 들고 스스로 조립한 바이크를 탄 채 ‘죽은 바다와 썩은 땅 사이에서’ 허공으로 도약하는 작품의 결말은 파국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불현듯 찾아오는 불가능한 유토피아의 순간, ‘혁명’이라는 사건과의 짧은 조우를 기록하고 있다.

 

세 젊은 여성 작가가 2010년에 발표한 작품들을 읽어 보았다. 이들이 전달하는 세계 속에는 생성하는 존재보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응시가 더 많은 듯하다. 언어가 사라지고 목소리가 사라지는 곳, 삶의 내력이 묻어 있는 장소가 사라지고 달려온 방향과 가야 할 방향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곳, 아이들의 미래와 노인들의 생명이 소멸하는 곳을 향해 이 시대의 작가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시대에 새롭게 문학이 지향해야 할, 문학의 정치에 대한 응답이기도 할 것이다. ‘이 스마트한 시대’에, 모든 소멸하는 것을 향해 자신을 열어 놓고 있는, 겨우 존재하는 문학의 응답 말이다.

 

《문장웹진 3월호》

 

 

허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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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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