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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기 위해서 말하기

  • 작성일 2011-03-03
  • 조회수 1,206

 

[기획특집] 2011년 경향진단·시

 

말하지 않기 위해서 말하기

 

김나영

 

 

 

 

21세기에 들어서서 한국시의 마당에는 한바탕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이른바 ‘미래파’ 논쟁이라 일컬어졌다. 논쟁은 미래파라는 명명의 타당성 혹은 정당성에 관한 것과 그러한 호명 자체의 시기성에 대한 것으로 크게 이분되어 이뤄졌다. 다시 말해 한편에서는 일군의 시를 통칭하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일군의 시가 갖는 공통점이 무엇인가와 같은, 시적 특징을 조명하는 새로운 노력이 덧붙여졌고,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어째서 일부분의 시를 소집하고 그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부를 수밖에 없었는가와 같은, 시대적인 요구에 합당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시를 아끼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논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끝나지 않은 채,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다. 그중의 한 지류가 바로, 이 글의 목적과 궤를 같이할 만한, 향후 한국시의 향방에 대한 의문과 예견에 관한 것일 테다.

먼저, 하나의 의문을 제기해 보자. 시의 향후를 짐작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시의 향후라는 명사형 의문문은 불가피하게도 불가능성을 내포하는 부정문일 수밖에 없다. 시라는 주어의 자리가 모호하기 때문이고, 더불어 지금 여기조차 혼돈과 암흑으로밖에는 말할 수 없는 이상, 지금 여기를 벗어나는 이야기의 방향이나 속성에 대해서 말하기란 가상에 대한 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하게 말하지 않아도 되겠다. 단언컨대 한국시의 향후를 짐작하기란 이미 항상 실패를 가정한 도전이다. 그 일환으로서 이 글은 가능한 실패들에 대해서 기록해 보려 한다. 그 기록은 길이 지워진 눈밭 위에 난 발자국처럼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길을 보여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이 글은 최근 시에 나타나는 하나의 기미를 주목하고, 그를 통해서 시가 스스로 결여하고 있다고 여기는 어떤 조건을 짐작해 보려 한다. 그 기미는 바로 시 내부에 도입된 연극적인 장치다. 그것은 형식적인 방식으로서 연극에 사용되는 용어들을 시에 차용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내용적인 방식으로서 연극에서처럼 시 속에서 두 명 이상의 인물이 대화를 하거나 하나의 화자가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듯 다중의 역할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최근의 몇몇 시의 시적 배경은 연극의 무대 장치처럼 보인다. 굳이 막이 오르내리거나 암전이 되는 상황이 지시되지 않았더라도 시 속의 장면들은 연극의 그것처럼 극적으로, 또한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시 속의 그러한 연극적 특성의 의미를 규명하는 일은 어쩌면 시의 기원으로 되돌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는 애초에 공연의 대본으로 쓰이지 않았던가. 하물며 사람들은 극적 분위기에 이미 항상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활자에 담긴 표현 방식을 의미화하기 이전에 이미 그러한 극적 상황을 받아들인다. 때문에 시에서 극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일은 그저 “주인공”이나 “무대”와 같은 단일한 단어의 사용만으로도 가능해 보인다. 미루어 짐작컨대 일종의 무대를 상정하고 있는 시의 목적은 시의 극화가 아니라, 극화된 분위기의 시화에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시 역시 동시에 여러 장소를 배경으로 삼아, 인물의 변화하는 심리를 표출함으로써 하나의 주제로 포괄할 수 없는 사건에 연루되어 있음을 어떤 시들은 보여준다. 그 원인과 효과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시 속에 도입된 극적 장치들을 수집할 필요가 있을 텐데, 이 글에서는 그 대표적인 예로 오은과 이이체의 신작시를 주목하려 한다. 이 두 편의 시는 나란히 새해 첫 달에 발표되었는데, 놀랍게도 시 속에 하나의 무대를 마련해 두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무대의 배경은 시골입니다. 주인공은 논 위에서 천천히 눈을 쓸었습니다. 어떤 눈은 난처럼 삐죽 솟아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난의 전신全身이 떨었습니다. 문득 나의 전신前身이 떠올랐지요.

 

주인공은 쓸쓸합니다. 눈을 쓸다 말고 먼 곳에 한눈팔기를 여러 번. 그 때마다 바람이 주인공의 몸을 휘감습니다. 바람이 전하는 바람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바람직한 것이겠지요.

 

저만치 밭에서 벗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과연 벚꽃처럼 벗에게 날아갈 수 있을까요. 관객들이 기대하는 바도 바로 그것입니다. 누군가는 한 번쯤 중력을 거스르는 것. 이 땅을 가볍게 배신하는 것.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발이 주인공의 뺨을 톡톡 건드립니다. 언젠가 무릎을 탁 치고 일어날 날도 있을 테죠. 일어났는데, 막상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지라도…….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졌습니다. 나무는 감을 잃었습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남이 나타났습니다. 주인공은 남과 몰래 속삭입니다. 관객들조차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릅니다. 운은 없어도 운치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여름에는 물이 쏟아집니다. 주인공은 이제 젖은 옷을 말려야 합니다. 벚꽃, 장마, 감 세례, 눈발…… 주인공이 맞아야 할 게 또 있을까요? 공연이 끝나 봐야 합니다. 티켓이 표창처럼 날아올지도 모르니까요.

 

 

 

러닝타임이 끝났습니다. 사계절이 금세 지나가 버렸습니다. 주인공은 다시 달려야 하는데, 그만 우울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저 슬픔을 헤아리듯,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난 자를, 마지막까지…….


- 오은, 「최후의 관객」 전문(《현대시》, 2011년 1월) -

 

첫 구절에서부터 연극을 떠올리게 하는 시가 있다. “무대”라는 말이 그러하지 않은가. 굳이 연극이 아니라도 무대라는 명사는 그것이 쓰인 자리를 공연의 일종으로 바꾸어 놓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시의 특별함은 단순히 공연의 분위기를 그 속성으로 취한다는 점에 있지 않다. 이 시의 스포트라이트는 화자와 그 화자로 하여금 말하고 행동하게 하여 한 편의 시를 짓는 시인 외에도 그 둘을 아울러 관찰하는 관객으로서, (시라는) 사건의 가장 뒤에[最後] 있는 누군가를 조명한다. 다시 말해 저 시를 둘러싼 인물은 “주인공” 역을 맡은 자(화자)와 그의 연기를 지켜보는 자(“나”)와 배우와 관객을 함께 관찰하는 자(“관객”)로서 최소한 세 명이 있다고 하겠다. 우선 저 연극(시)을 함께 관람해 보자.

당겨 말하면 저 시는 한 편의 무언극(無言劇)을 문자로써 상연한다. 주인공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계절”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시공간적 배경 변화에 따른 각기 다른 행위를 연기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논과 밭과 감나무를 배경 삼아서 눈을 쓸거나 먼 곳을 바라보거나 감이 떨어진 나무 뒤의 “남”과 속삭인다. 물론 이는 무언극이므로 그가 속삭인다는 것만 짐작할 뿐 관객에게 그의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관객들조차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주인공은 사계절의 변화를, 그에 걸맞은 자연의 움직임을 몸소 체험하는 일로 시종일관 연극의 주인이 되어 무대 위라는 시공간을 견딘다.

그렇다면 이 때 ‘나’는 연기하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일 외에 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역할 중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것은 주인공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그의 심리를 추측하는 일이다. 이것은 흔히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이 (비)자발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대사와 동작을 자신에게로 끌어와서 그의 변화하는 정서들을 민감하게 유추하는 일은 무대와 거리를 두고 앉아서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관찰할 수 있는 관객에게 주어진 임무다. 그 임무를 통해서 ‘나’들은 그 연극이 갖고 있는 의미를 깨닫고 재미를 느끼며, 무엇보다도 그러한 의미와 재미를 획득한 자신을 재발견한다. 그 점에서 저 시의 도입부에서 바람에 눈이 날린다는 화자의 진술, 혹은 눈발이 날리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흥미롭다. 주인공은 겨울 들판에서 눈을 쓸고 있는데, 그 들판에는 “난처럼 삐죽 솟”은 눈도 있다. 그 눈은 난의 외양을 띠고 있을 뿐, 그 속에는 다른 무엇을 품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가령 나뭇가지라든가 수확하고 남은 벼의 밑동이라든가. 중요한 것은 ‘눈’이 ‘난’이 되는 것은 외양의 유사성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두 단어가 같은 자음의 조합으로 이뤄진 한 글자 단어라는 공통점에 의해서라는 점이다. 이러한 문체적 특징은 오은의 시에서 자주 접할 수 있지만, 특히 이 시에서라면 저 단어들 간의 형태적 유사성이 중요한 시적 의미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눈’과 ‘난’은 “전신”이라는 동음이의어를 통해서 또 다시 “나”로 이어지고, 그로써 주인공이 쓸어내고 있는 것, 또는 바람에 날려 주인공의 뺨을 건드리는 것은 단순한 눈발이 아니라 ‘나’라는 역할을 맡은 시인의 은유가 된다.

그리하여 저 시의 주인공이 쓸쓸하게 쓸어내고 있는 것은 시인의 흔적이라 할 만하다. 시인(‘나’)은 한 편의 시가 어떻게 연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관객의 시선을 취해 주인공의 행동과 배경의 변화 등을 대변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나’가 아무리 시기적절한 비유들(“벚꽃, 장마, 감 세례, 눈발……”)을 주인공에게 덧씌운다 하더라도 연극의 결말은 누구의 의도대로도 이뤄지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앞서 언급했듯이 시를 쓰는 시인의 이야기와 그로써 만들어진 허구의 인물인 화자의 행동을 모두 좌시했던 ‘관객’으로서의 누군가다. 이야말로 시인 오은에 가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시를 짓는 자(‘나’)로서의 고민은(“턱을 괴고 앉아 있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스스로 반성할 수 있게 하는 무대 위에 자신의 시적 화자를 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화자를 추동하는 시적 에너지는 종종 “금세 지나가 버리”고 만다. 시인은 한 편의 시로서 영원한 노래를 짓기를 꿈꾸는 자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시공간상의 제약이 있는 연극처럼 마침내 중지해야 하는 저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만 우울해져 버리고 말았”던 자는 주인공인 동시에 시인(‘나’)이다.

이 시에서 ‘주인공’의 견딤, 혹은 주인공이 저 연극을 감수하는 일은 마침내 어떤 우울을 지연하는 일이기도 하다. 연극이 끝난 후에 그는 여타의 배우들이 그러하듯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며 허탈한 심정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대본을 따라서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을 연기하는 주인공에게 옮겨 온 우울함은 대본이나 연출에 의한 극중 인물의 것이지만 주인공 자신의 우울함일 수도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시인 오은은 저 한 편의 시를 연출함으로써 시를 짓는 자신과 그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을 동시에 객석으로 초대한다. 그리하여 한 편의 시로서는 끝내 전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음을 시인인 자신을(으로부터) 응시하(되)면서 다만 침묵(“마지막까지……”)을 통해 말한다. 자신의 결핍을 숙명인 듯 바라보는 시인이야말로 제 연극을 관람하는 연출가의 심정을 가졌으리라.

 

 

재와 흙, 구체적인 것은 갖고 싶지 않다. 무성예술의 말미에서 관객들은 떠나는 법을 배웠다. 하녀들은 보석을 몰라보아서 겸손했다. 망치로 노크하며 방문했던 침입자들은 초라한 형벌을 받았다. 횃불을 밝혀 둔 지하도에서, 그들은 자신의 실루엣에 경악했다. 세련되고 그럴싸한 무지가 궤변을 낳는다. 자살에 실패한 사람들은 혼자 울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울음을 참았다. 죽은 이들도 다시 죽을 수 있었다. 뒷모습이 어리둥절해지는 외곽을 향해. 간질병 걸린 처녀들은 겉늙은 목동이 풀피리로 부는 노래를 번역했다. 파탄에 현혹된 사람만이 사건을 쉽게 저지를 수 있다. 요절한 풀꽃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포르말린 병에 담긴 작은 인형들이 귀여웠다. 골동품들이 늘어선 무대에서, 배우는 자신의 배후를 포개어 안았다. 모든 사건은 이미 일어난 사건들. 관객들은 초대받은 적 없는 권태로 수몰되었다.


- 이이체, 「소설-fermata」 전문(《현대시》, 2011년 1월) -

 

이이체의 시 중 다수는 이미지와 시적 메시지를 농축시킨 이야기라는 인상을 준다. 이이체의 시적 언술은 대개 진술의 형태를 띤 묘사에 가까운데, 특히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것으로 치환하기 위해서 시의 화자들은 과거형의 문장을 구사하면서 낱낱의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이야기를 거대한 하나의 사건으로 생생하게 직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이체의 시에서라면 구전의 방식이 우세한 가운데서도 빛나는 문장 내지 장면은 대개 묘사에 충실할 때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에 대한 충실함이 그 무엇에 대한 열광과 같은 과잉된 관심의 표출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 무엇에 대한 근거 없는 거부감의 표현으로도 드러난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가령 저 시는 “구체적인 것”에 대한 어긋남의 기록들로 충만한데, 또한 그 기록들은 저 시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재와 흙”으로부터 연상되는 일련의 이미지들로 직조되는 그 거대한 그림에 성급하게나마 이름을 붙이자면 “초대받은 적 없는 권태”라 하겠다.

넓은 화폭에 그려진 추상화를 한눈에 담기 어렵듯, 이이체의 시 역시 한 번에 읽기에는 곤혹스러운 면이 있다. 각 시구들이 암시하는 이미지들 각각이 수십 수백 행으로 풀어내어도 부족할 만큼 유구한 사연을 담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어느 구절(“횃불을 밝혀 둔 지하도에서, 그들은 자신의 실루엣에 경악했다”)은 플라톤의 동굴 예시를 연상하게 한다. 그리하여 시의 나머지 구절에서 ‘그들’로 호명되는 “관객들”, “하녀들”, “침입자들”, 또한 “자살에 실패한 사람들” 모두는 실재와 관념의 간극 속에서 구체와 추상을 체득한 자들이라고 짐작할 만도 하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시인은 시라는 ‘구체적인 것’, 혹은 물질적인 것이 갖는 일종의 생산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눈앞에 보이는 저 시를 구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낱낱의 문장에서 휘발된 의미들로 인해 시의 외연은 모호하고도 무한하게 퍼져 나가는 것이다(“뒷모습이 어리둥절해지는 외곽을 향해”). 그러나 저 시가 보여주는 바는 단순히 시를 포함한 “무성예술”의 의미가 비확정적이라는 것만이 아니다. 이이체는 그 특유의 문체를 통해서 시의 고유한 본성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새삼스럽게도 그 본성이란 시적 긴장(tension)이다.

앞서 ‘권태’에 대해 말했다시피 시인은 저 시에서 무기력하고 이미 항상 소진된 것(‘재’)에 대해서 적고 있다. 또한 무지하고(“보석을 몰라보아서”) 무모한(“망치로 노크하며 방문했던”) 자들이 자신의 몽매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더라도(“자신의 실루엣에 경악했다”) 이전의 자신을 완전히 소거할 수는 없음을, 혹은 완전한 죽음이란 불가능함에 대해서도 적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죽음마저도 한 생의 극단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종의 사건에 불과하다고 기록함으로써 살아 있는 일, 혹은 생에 대한 회의감을 짙게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과장된 회의감은 또한 가장된 의지다. ‘재’가 곧 ‘흙’으로 돌아가 그 둘을 구분하는 일이 무용하듯 시인은 구체적인 삶의 권태에 대한 유감을 드러내면서(“간질병 걸린”, “겉늙은”), 실상은 “처녀”와 젊은 “목동”의 소통과도 같은 싱그러운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바로 그 노래 속의 떨림을 짐작해 보라. 풀피리 소리로 부르고 목소리로 답하는 그들만의 대화에, 한 줄기 선율이 무한한 의미로 펼쳐지는 그 무언의 “번역” 속에 시인이 재발견하고자 하는 시의 본성이 있다.

역시나 새삼스러운 그 본성을 이제 와 다시 이야기할 때, 시는 “포르말린 병에 담긴” 모형이 되기를 감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가장 생생히 보존되기 위해서 죽음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야만 하는 위험이, 이렇게 어떤 시에는 도사리고 있다. 사건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사건이라는 사태나 전언에 깃든 긴장을 취하여 도약하려 할 때, 그 어떤 시는 도리어 응축됨으로써 후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모든 것이 새로움에 도취된 장(場) 속에서 계속해서 뒤로, 바깥으로 자신을 이끄는 이는 일면 파국을 향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이체 시의 화자는 대부분 “파탄에 현혹된 사람”이라 하겠다. 시인의 무대 위에는 “골동품들이 늘어서” 있고, “배우는 자신의 배후”와 포개어져 있다. 이 시인은 시가 낡고 닳고 죽어 흩어지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인가.

끝내 시인이 자신의 시 쓰기를 사건으로 만들었다면, 아마도 그 사건은 시의 소멸과 같은 느낌으로 다시 그의 시 속에 내장되어 있을 테다. 그리고 그 반복의 권태로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의 관객들을 생생한 긴장감에 “수몰되”게 할지도 모른다. 권태로운 소멸이란 또한 소멸의 소멸이기도 하므로, 그 항진(降盡)은 오히려 지금껏 없던 사건을 기약하게 할 것이다. 그 기약이야말로 풀피리 소리와 같은 생생한 떨림을 유발하지 않겠는가.

이쯤에서 이 시의 표제와 부제를 상기해 보자. 대개의 “소설”은 인물과 배경이 하나의 사건과 우연의 구도를 이루며 긴장감을 유발하고 해소하는 재미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한다. 시인이 그러한 메커니즘을 시의 제목으로 가져온 원인은 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 규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소설의 우연성을 닮았다. 또한 부제로 붙인 페르마타가 주로 악곡의 표정에 변화를 주기 위하여 곡의 중간이나 마지막에서 박자의 운동을 잠시 늦추거나 멈추도록 지시하는 표시라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소설의 고정된 형식이 아니라 유동하는 내적 리듬에 관심을 갖고 그것에 제동을 걸어 보고자 했다는 점이다.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라는 구체적인 요소들보다 그 요소들이 길항하며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느낌에 주목했을 때, 모든 활자가 사라지고도 남는 것은 지속적으로 자멸하고 자생하는 긴장된 권태다. 그것이 곧 초대받은 적 없는 권태다.

 

저들이 연극의 특성을 시적 장치로 도입한 이유, 또는 연극성을 시의 제재로 삼은 의도에 관해서는 무한한 답변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질문과 대답은 다시 대답과 질문으로 전도되어 반복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시와 연극은 서로 구분될 수 없는 성질을 지니지 않았던가. 연극과 시는 삶의 면면이 갖는 불화를 조화롭게 구성하려는 시도로 존재해 왔다는 점에서 특히나 닮은꼴이다. 단순히 불화를 고발하는 듯한 서사도 비유와 상징의 무대에 오르는 순간, 예측하지 못했던 화해를 암시하는 노래가 되므로. 그리하여 오래도록 일인칭의 장르였던 시가 이렇게 본연의 무대로 돌아갈 때, 도리어 시의 발걸음은 일보 전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이라는 외로운 연출가는 활자와 자신만을 무기로 삼아 세상의 흐름에 맞서야 하겠지만, 그의 역행이야말로 앞으로 쓰일 시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일이 될 것이다.

 

《문장웹진 3월호》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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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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