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산문 부문] 바람

  • 작성일 2011-01-27
  • 조회수 1,561

[2010년 공모마당 연간 최우수상 수상작]

 

 

바람

 

조현빈 

 

 

 

 


바람이 분다. 나무 사이로, 가지 사이로, 이파리들 사이로, 꽃이 져버린 철쭉의 무성한 초록 무덤 사이로, 벚나무 아래 낡은 벤치에 앉아 칭얼대는 아기 달래고 있는 할머니들 사이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주차장의 차들 사이로, 계단을 청소하는 아주머니와 경비원 아저씨의 실랑이 사이로, 이따금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101동과 104동 사이로, 102동과 103동 사이로, 아주 오래된 살림살이 민망하게 드러난 아파트 공터 옆 재활용센터와 세상 모든 종이의 무덤인 고물상 사이로, 지루한 대지와 더없이 허무한 허공이 만나 부서지는 사이, 그 사이로 오늘도 바람이 분다.



 

아홉 살 때였다. 바람은 어디에서 나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러니까 바람의 본적과 존재에 대해 꽤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그것은 꽤나 심각한 고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바람의 존재에 대해 물으면 너나 할 것 없이 파안대소했다. 더러 머리를 쥐어박거나, 엉뚱한 생각 말고 그 시간에 공부나 한 자 더하라는 잔소리가 쏟아졌지만, 유일하게 내 질문에 가장 성의 있게 대답한 이는 머리 좋은 큰오빠도, 학교 선생님도, 마을에서 가장 연로하셨던 어른도 아니었다. 광덕사의 늙은 스님 할아버지. 그러니까 내 깜찍한 질문에 머릴 쓰다듬으며 부처님 같은 미소로 바람의 존재를 가르쳐주고는 그 자리에서 나를 손녀로 삼은 양할아버지 스님이다.

 

해마다 사월초파일이 다가오면 끼니 걱정이 마를 날 없는 집안 형편에도 할머닌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쌀 두어 말을 이고 비탈진 비봉산길을 가뿐히 오르셨다. 먹이를 쫓는 사냥꾼의 날랜 걸음으로 단숨에 절 마당에 들어선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놓았을 때, 우르르 바람 한 무리가 몰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달아난다. 그 바람의 꼬리를 잡고 뒤뜰 대웅전에서 들리던 목탁 소리가 일순간 초록 물감으로 번지고, 맑은 목탁 소리 따라 풍경 소리마저 은은한 무채색으로 퍼진다. 바위틈으로 졸졸 물이 새어 나오고, 절의 내력을 품어 안은 늙은 향나무 한 그루가 목을 축이고 있는 광덕사의 고요, 그 고요를 흔들며 까르르 웃음보 터뜨리는 바람, 저 바람을 알고 싶어요, 스님.

 

사천대왕 눈썹마냥 사나운 얼굴의 개 한 마리가 컹컹, 염불이라도 외는 듯 짖어대자 바람도 일순간 한없이 유순한 표정이 된다. 가시 많은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어슬렁거리던 햇살이 하품을 하는 오후, 해우소를 다녀온 사이 지나간 바람의 모습을 본 적이 있냐고, 바람의 존재에 대해 묻자 불공을 드리러 온 보살님들이 한바탕 난리 웃음 굿을 펼친다. 샐비어마냥 샐쭉해진 표정으로 입을 내밀고 있자 한 보살님이 내 귀를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저어기. 대웅전 안에 계신 큰 스님한테 여쭈어 보렴 네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바람의 속도로 대웅전 법당을 향해 달렸다.

 

바람이 운다. 고요하던 아침 햇살도 울고, 얼어붙은 고드름이 눈물을 흘린다. 할머니 손길을 받아 이장님 대머리처럼 빛나던 장독들도 눈물바람이다. 마루 밑 강아지도 무엇이 슬픈지 어미 품에서 하루 종일 울어대고 있다. 축축해진 바람이 울음 소리를 타고 마당에 잠시 머무는가 싶더니 살구나무 위로 올라간다. 초점을 잃은 나는 하염없이 앞산만 쳐다봤다. 멀리 동구 밖 느티나무가 떠나는 할머니를 배웅하듯 손을 흔든다. 할머니를 태운 상여가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드디어 고개를 넘어간다. 울 힘도 없는 상주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는 바람. 눈물콧물 바람인 오빠와 동생의 어깨를 토닥토닥 쓰다듬는 바람, 바람이 만져졌다.

 

빈집 장독대 옆에 앉아 툭 툭 눈물 터트리는 봉숭아 여린 잎을 어루만지는 바람, 그 바람이 부르는 소리 듣지 못하고 장날이면 몸빼 바지 입고 날랜 장정 걸음으로 사라지던 산마루를 넘어 꼬불꼬불 다랑이논을 지나 선재네 뽕밭 위에 묻힌 할머니. 그 할머니 심심할까 봐, 일 년 삼백예순 다섯 날 바람이 와서 울고, 바람이 와서 노닐고, 바람이 와서 잠자고, 바람이 와서 웃고, 바람이 와서 노래하고, 바람이 와서 떠들고, 서울 간 여섯 손자 손녀 소식 들려주고. 부는 바람 덕분에 울 할머니 저승 가서도 하나도 외롭지 않다지, 심심하지 않다지.

 

요즘 바람났다. 바람이 나서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이 난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걸으면서도, 산책하면서도, 버스 안에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공원에 앉아서도, 책상에 엎드려서도, 밥을 하면서도, 일기를 쓰면서도, 라면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심지어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도 웃음이 난다. 이런 바람은 평생 피워도 좋다. 늙어서 다 주책이라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춤바람보다 즐겁고 신나고 치맛바람보다 거세어 정말 못 말리는 늦바람. 바로 문학에 대한 짝사랑,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나만의 즐거움이라니, 착각일지라도 절대 깨고 싶지 않은 나의 바람은 낫지 않을 불치병, 속수무책 감당 못할 언감생심 꿈이어도 좋아라. 내 살아 있는 동안 꿈꾸는 바람은 이렇게 글을 쓰며 늙어가는 것.

 

또다시 바람이 분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삶을 향한 열렬한 짝사랑이 눈을 뜨고 가만히 나를, 바깥을, 저 세상 너머를 응시한다. 골목을 빠져나간 바람은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초록을 머금은 바람이 숲속을 헤맨다.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뒷목을 간질이고 달아나는 바람의 모습은 영락없는 개구쟁이다. 쥐똥나무 곁을 맴돌며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는 강아지처럼 바람의 코가 벌렁거린다. 파지를 싣고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의 등을 밀어 주는 바람의 손이 어여쁘다. 저 하늘과 대지 사이, 나무와 나 사이, 나와 너 사이, 그리고 우주와 우주 사이, 끝없는 사이. 사이, 사이, 사이, 사이, 사이, 세상의 모든 사이로 오늘도 바람이 분다.

 

 

《문장웹진 2월호》

 

 

 수상소감

 

느린 걸음이었습니다.

있는 힘껏 달리지도 않았고,

숨이 턱까지 닿도록 죽을힘을 다하지도 않았습니다.

빨리 도달하기 위하여 달리면 그 속도만큼 놓치는 것이 있을 테고

놓치는 것이 많을수록 내 삶은 더욱 건조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밀감 닮은 기억이 등불을 켤 때마다 끼적이곤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바람이 들려주는 나지막한 이야기와

텅 빈 고요가 주는 충만을 어렴풋이 알 듯도 한 세월이지요.

별처럼 추억이 빛나는 밤마다 내 곁을 떠난 사람들과

그들이 떠난 자리에 쓸쓸한 바람이 평생 맴돌 겁니다.

그러나 천천히 걷고 또 걷다 보면 내가 걸어온 길이

어느 날, 환한 꽃길이었음을 알게 되는 날 오지 않을까요?


지금은 그저 한발자국 겨우 내딛은 것뿐.

느려터지다 못해 게으른 내 발걸음을 보시고

이제 좀 더 속력을 내라는 재촉으로 알겠습니다.


내 글쓰기의 꽃길이 되어 준 '문장'과

선하여 주신 김소연, 서성란 선생님!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 조현빈 -



추천 콘텐츠

육지에서 쓴 일기

[에세이] 육지에서 쓴 일기 최진영 20240528 4박 5일 동안 육지에서 여러 일정이 있어 오늘 제주에서 서울로 왔다. 앞으로 며칠간 약속과 약속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창을 열고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Are you checking in? pm04:45. 여긴 충무로의 호텔. 3년 전 제주로 이사 간 뒤 처음으로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을 때 숙박한 후 매번 이 호텔만 이용하고 있다. 경기, 인천 지역에서 저녁 행사를 해도 근방 호텔을 잡지 않고 여기로 온다. 새로운 호텔을 검색하고 선택하는 게 번거로워서. 합리적인 위치나 가격을 따지려다가 검색 지옥에 빠져서 몇 시간을 고민한 뒤 결국 이 호텔을 예약했던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시간이 돈이다. 더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검색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자. 점심시간 무렵 충무로 일대 분위기는 조금 묘하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외국인들과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뒤섞이는 거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듯 여러 나라의 언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서울역, 명동, 한옥마을, 남산, 종로가 가까운 곳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호텔 투숙객 중 한국인은 나뿐인 것 같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와서 2박 이상 하니까 나름 단골이랄 수도 있는데 프런트 직원들은 매번 나를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한다(호텔의 특성이겠지?). 체크인할 때도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넨다. “give me your passport.” 그럼 나는 “제 이름은 최진영입니다”라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성공한 인생 오늘 아침 9시쯤 택배 문제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내 용건에 개의치 않고 엄마는 거듭 물었다. 전화를 끊고 뿌듯해서 신나게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침 9시에 엄마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아서. 그건 바로 내 투쟁의 결과다. 거의 20년을 프리랜서로 살면서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도 ‘성인 평균 적정 수면시간’을 사수하며 꾸준히 늦게 일어나는 생활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온 결과 마침내 엄마도 나의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에 전화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진정한 성공 같다. 긴장감 저녁에 북토크를 할 예정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낭독할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긴장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탈 때. 기내 짐칸에 캐리어를 올리다가 무거워서 또는 실수로 떨어트려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매번 긴장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지만 식은땀이 난다. 캐리어를 끌고 에스컬레이터 탈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거나 캐리어를 놓치는 구체적 상상에 시

  • 관리자
  • 2024-07-01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에세이]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 제이크 레빈 소개 거의 12년 동안 나는 한국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해부터 강의하는 교사의 내면적 생활과 관련된 일기와 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수로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교수의 삶은 익숙하지 않다고 믿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민족을 만나는 것 같이 나는 죽을 때까지 방랑자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현실에 경험한 것이 꿈꾸는 것 같고 꿈꾸는 것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가끔은 사라진다. 이 산문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현실의 기록도 아닌 교사로서의 삶의 내면적 반응이다. 교사는 인간이다. 가끔 사회가 인문대 교사의 인간중심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하지만 인문학과 시의 영향력은 계산될 수 없는 가치다. 인간중심주의 가치를 점점 찾기 힘든 사회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 모순적인 긴장의 환경에 존재해야 한다. 학교의 목적은 타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 산문은 한 인간의 존재하는 기록이다. 거대한 존재들의 무한한 경탄이라는 제목은 완전한 이해가 불가한 타인의 인간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왔다. 이 기록은 내 개인적 경험과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영어로 작성한 문장을 나의 소중한 학생 김혜인이 나와 함께 번역하였다. 지우개 머리 어떤 날 나는 대답하기 위해 여기 있고, 어떤 날 나는 오직 듣기 위해 여기 있다. “질문 있어?” 많은 학생들이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예술을 배웠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질문자가 자신의 질문에 답변하는 동안 사용감 있는 지우개처럼 커피를 홀짝이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라.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경소리가 되어 가다가, 불현듯 보이스 오버. 지우개는 부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얼룩을 견딜 수 있을까? 숭고한 느낌 지난 몇 주간, 를 듣는 학생들은 책상 아래 숨어 있었다. “교수님, 저희는 불확실성에 머물고 있어요.” 그들은 말한다. 일정 기간 동안 불확실성에 머문 뒤, 한 학생이 책상 아래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저는 숭고한 느낌을 얻었어요.” 그들이 말한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요.” “이제 제 핸드폰 돌려주시겠어요?” 정적. 학생이 나를 응시한다. 정적. 나는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학생을 응시한다. 흰 두루미 “주말 잘 보냈니?&r

  • 관리자
  • 2024-07-01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r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