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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들은 상처를 요구한다-최치언,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문학과지성사, 2010)

  • 작성일 2010-10-31
  • 조회수 1,455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보는 2010년 명장면들

 

어떤 시들은 상처를 요구한다


- 최치언,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문학과지성사, 2010)



장은정
 



멍들고 살갗이 찢어져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 아이에게 지나가던 한 어른이 다정하게 일러 준다. 간절히 바라기만 한다면, 신은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준단다. 그날 밤, 아이는 불 꺼진 교회로 조용히 숨어든다.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보는 기도는 이것이다. 그들을 모두 죽여 주세요. 아이에게는 살인만이 유일하게 간절한 바람이었으리라. 최치언의 두 번째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는 이러한 최초의 기도를 닮아 있다. 그러니 가까스로 도달하는 화해나 위안이 주는 온기와 같은 것은 이 시집과 거리가 멀다. 이 시들은 아이의 기도처럼 세계의 비참과 폭력에 ‘대응’하고자 한다. 화자는 “발길에 차이면서” “엄마, 제가 죽여드릴게요. 다 죽여드릴게요.”(「매장된 아이」)라고 거듭해서 다짐하거나, “봄나물 같은 여자아이들이 나팔랑거리며/줄넘기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 여자아이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 하나만/새겨 줄 수 있다면”(「일생에 단 한번」)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최초의 기도 내부에서는 여전히 이런 문장들이 통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은밀한 살인이 아니면 진실은 창틀 위에서 썩는다.”(「떡갈나무아래」). 이 시들은 분노와 증오의 근원적인 형태를 시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내가 너희들을 견디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너희가 내 뒤통수에 낯익은 얼굴처럼 붙어 울고 웃고 춤추는 것을
내가 견디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견딜 수 없다면 내가 나를 죽여 너희도 죽여야 하는가.

한순간, 극렬한 감정들이 눈동자에 고인다.


 

-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뒤표지 글 -


이토록 단호할 수 있는가. “내가 너희들을 견디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니. 여기에는 타자의 눈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하여 바라보는 ‘타자로의 우회’라고 할 만한 모든 가능성이 완전하게 차단되어 있다. ‘나’ 역시 ‘너희들’의 입장에선 ‘너희’일 수 있을, 그 모든 가능성 말이다. 이 문장들에겐 어떤 잠재적인 형태로도 ‘너희들의 관점’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이 시들이 스스로도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는 ‘반성 이전’의 세계이며, ‘사유와 교육 이전’의 세계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목소리는 완벽한 일인칭, 밀폐된 일인칭의 것이다. 그러니 이 문장들이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호함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문장을 읽는 우리가 스스로를 타자의 눈으로 대상화시켜 바라보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세계는 완벽한 일인칭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내 뒤통수”에는 끔찍하게도 “너희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낯익은 얼굴처럼 붙어 울고 웃고 춤”춘다. 그러니 위 문장들은 ‘나’라는 존재에 불순물처럼 섞여드는 ‘타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최초의 폭력과 억압에 맞서 내지른 최초의 분노다. 너희를 죽이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죽”이는 방법밖에 없을 만큼 ‘나’가 ‘너희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아이는 이제 알게 되었다. 그들을 모두 죽여 주세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이 최초의 기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제야 마지막 문장이 가능하다. “한순간, 극렬한 감정들이 눈동자에 고인다.” 여기서 ‘극렬한’이라는 형용사에는 분노와 울분, 슬픔이 이상하고 빠르게 혼합된 최치언만의 시적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밀폐된 일인칭과 그러한 일인칭을 무화시키려는 세계와의 충돌, 그 속에서 이 낯선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넘칠 것만 같은 잔처럼 감정적이고, 때로는 깨어져 버릴 듯 위태로우며, 머뭇거리지 않고 눈알을 그어 버릴 듯 공격적이다. 이처럼 이 시집의 많은 시들이 다양한 종류의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여 이 낯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데 이 낯선 목소리가 투명한 분노들을 통과하여 가장 ‘극렬한’ 지점에 가 닿을 때,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극렬함’만으로 시를 쓴다면, 시가 이토록 차가워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고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그리고 우리는 귀 없이 계속 걸었다. 그때 좌측에서 움직였다
보지 마라
움직임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눈꼬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장의 덩굴이 눈알을 휘감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좌측은 우리들 반대쪽으로 기울어 있다
높은 담장을 드리우고 좌측은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
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우리가 더 이상
선한 꿈을 꾸지 못한다는 건 좌측에게 우리들의 악몽을 맡겼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을 때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 최치언,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전문


이 시를 주도하는 것은 단연 ‘걸음’일 것이다. 다소 정지된 느낌을 주는 좌측에 대한 진술들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걷고 있었다”, “계속 걸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라는 구절들이 중간 중간 삽입됨으로써 시는 계속해서 걷고 있는 느낌을 준다. 이것이 이 시를 지탱하고 있는 굵은 선이라면, 우측의 걸음을 소리로, 시선으로, 자꾸만 잡아당기는 좌측은 이 굵은 선의 두께와 걸음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고 깊어지게 만든다. 이 시에서 좌측과 우측은 일견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읽히지만,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구분’되어 있을 뿐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측에서 걷고 있어도 좌측의 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좌측의 움직임들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너무나 주도면밀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도려내고, 보지 않기 위해 눈알을 파는 것이다. 그러니 좌측과 우측의 복합적인 애증 관계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좌측이 믿고 있는 것들은 모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무용해서 이상적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다. “연필의 힘”이라거나, “나무의 치졸함”, “의사당의 순결”, “형제들의 오만”과 같은 것들. 이것은 현실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존재해야 할 것들에 가깝기에 이 좌측의 믿음을 우측이 가진다는 것은 현실적인 우측의 세계와 충돌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섬뜩할 만큼 단호한 이 명령들, “듣지 마라”, “귀를 도려내라”, “움직일 수 있을 때 // 눈알을 파라”와 같은 구절들은 너무나 깊고 잔인한 애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좌측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꾸게 하지만, 그 꿈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고 있기에 좌측 자신으로부터 우측을 보호하고자 한다. 심지어 귀를 도려내거나 눈알을 파서라도. 그래서일까, 다음 구절이 이 시에서 가장 깊은 감정을 건드린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그렇다, ‘믿는다’는 것은 많은 것을 가져가지만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랑이란 칼처럼 찌르는 것, 꿈꾸게 하지만 그 대가로 귀와 눈알을 가져가야만 하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측이 걷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귀와 눈알이 없어지더라도 우측은 계속 걸으면서, 모든 것을 잘라내면서, 좌측의 존재를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모두 죽는 일밖에 없다. 어떤 보상도, 치료도 주어지지 않는다. 시는 담담하게 마지막 행을 마무리 짓는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그렇게 제목은 이제야 우리를 최종적으로 이해시킨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놀랍지 않은가. 많은 다른 시들이 내 뒤통수에 붙은 ‘너희들’에 대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여기서 우측은 좌측과 공존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내주면서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 냉정하고 잔인한 극렬함이 “내 뒤통수에 낯익은 얼굴처럼 붙어 울고 웃고 춤추는 것”을 ‘감내’함으로써 생겨난다니. 이 시집을 읽으며 가장 깊은 분노와 가장 완벽한 꿈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벽한 꿈과 불가능성이 공존하며 만들어내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물’하는 이 시집은 아름다움의 결론이 언제나 공허하고 허탈한 죽음으로만 귀결된다는 ‘피’의 진실을 요구한다. 그렇다. 어떤 시들은 상처를 요구한다. 


《문장웹진 11월호》

장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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