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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에 대한 갈망, 고산자는 박범신의 투영

  • 작성일 2009-09-29
  • 조회수 3,268


‘너머’에 대한 갈망, 고산자는 박범신의 투영

 

 

대담 : 박범신(소설가)

진행 : 정한아(소설가)

 

 

인트로  

근황 - 유랑과 회귀의 반복  

코드에 맞는 인물 고산자  

유령인 고산자에게 육체를 부여  

불가능했던 것들에 대한 욕망  

밑바닥에 있는 그리움, 갈망  

정보가 많을수록 갈망은 깊어질 수 없어  

그리운 저기와 그리운 여기 사이  

문단이 정리하는 박범신과 그 속에 들어있지 않은 나 사이  

문학순정주의, 인간주의  

젊은이들이 불안정가의 주식을 살수 없는 시대  

훼손되지 않는 본질적인 가치  

문학 지망생들에 대한 애정  

삶이 오늘날 한국문학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  

진흙 바닥을 이해하는 것이 문학 

 

 

 

유랑과 회귀, 순례자를 향한 꿈

 

정한아 / 안녕하세요. 선생님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박범신 / 봄에 『고산자』 책이 나와서 뒤치다꺼리했죠. 옛날에는 책 나오면 작가는 할 일이 없었는데 요즘은 책을 팔려면 작가도 끌려 다니기도 하고. 여름 방학 때는 터키에 3주 가 있었고. 얼마 전에는 중국에 잠깐.

정한아 / 책 나오자마자 연락 드렸는데 터키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또 도망가셨구나 생각했어요.

박범신 / 도망이 아니라 스케줄이 그렇게 잡혔지. 편했지.

정한아 / 항상 떠나고 돌아오시는 것의 반복인 것 같아요. 선생님 뵈면. 『고산자』 읽으면서도 맞닿아 있다. 떠났다가 돌아오는. 절필 선언하셨던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떠났다가 돌아오셨던 것이잖아요.

박범신 /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 같고. 한아 씨도 더 오래 살아 보면 자기 삶의 특성 같은 게, 평생 관통하는 특성 같은 것이 나오잖아요. 사는 게 유랑과 회귀의 반복이라고 생각해. 아침에 일터에 나오는 것도 유랑이고 저물녘에 집에 돌아가면 회귀지. 큰 인생의 사이클로 봐도 그렇고. 나는 가정과 문학을 일관되게 지키기 위해 샛길에서는 수시로 유랑을 떠나야 도움이 되거든. 안 떠나고 계속 갇혀 있었다면 아마 그런 것을 제대로 못 지켰을 거예요. 항상 나갔다가 돌아오고 하는 것의 반복이었지.

정한아 / 길 위의 시간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박범신 / 이번에 『고산자』 쓸 때도 고산자가 길에만 나오면 내가 행복해지더라고. 내가 인문학에 약한가 봐요. 국경 문제를 쓴다든가, 고지도에 대한 정보를 쓴다든가 할 때는 힘이 들었고, 고산자가 가볍게 행장을 꾸리고 길로 나오는 대목이 오면 작가로 행복해지는 거야. 내 본질은 길로 나오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소설 시작할 때도 그것 때문에 시작을 했지만. 홈페이지에 그 글을 써 놨어. 내가 만약에 소설을 더 쓸 수 없게 된다든가. 나의 소설 쓰기의 목표는 남과 비교해서 잘 쓰고 싶은 것은 아니고, 내가 지난번 썼던 소설보다 문학과 나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목표거든. 만약에 내가 계속 썼는데 과거에 쓴 것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얻거나 스스로 진단이 나오면 소설을 더 안 쓰려고 해. 그럼 뭐할 것인가. 길 얘기해서 그런데 나는 순례자가 되고 싶어요. 가족이고 소설이고 다 버리고 길에서 길로 떠돌다가 죽으면 좋지 않겠어. 히말라야에 살고 있는 힌두인들, 인도 사람들은 보통 삶의 사이클을 네 개로 나누는데 마지막 기가 유행기라고 해서 순례하다가 죽는 것이거든. 젊을 때 일하고 늙을 때쯤 되면 산에 들어가서 평화롭게 살다가 자기가 병들고 머지않아 인생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행장을 꾸려서 길로 떠나요. 가족들도 없는 곳에서 죽지. 그런 사이클이 사람들에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사이클인지도 모르겠어. ‘나도 더 늙고 소설도 못 쓰게 되면 순례자로 살고 싶은 것이 내 꿈이다’라는 글을 요즘에 쓴 적이 있었어.

정한아 /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요즘 책이 나오면 작가들이 여기저기 많이 불려 다니잖아요. 제가 봐도 요즘 특징인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소모된다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박범신 / 과거에는 신문사 기자 만나서 인터뷰하는 정도면 작가가 일이 끝났거든. 요즘에는 거의 50프로가 인터넷을 통해 책이 판매되기 때문에 행사를 해야, 인터넷에서 작가 박범신과 만남이 언제 있다 하면서 부가적인 광고 효과를 보게 되니까 출판사에서는 책을 팔기 위해 작가를 동원한 행사를 많이 벌이는 것 같아요. 일장일단이 있겠지. 작가에게 독자라는 것은 일종의 관념이었거든. 나도 옛날에 베스트셀러를 내고 하면서 독자와 가까운 작가였거든. 독자와 작가가 가까웠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쓸 때나 쓰고 나서도 우리는 독자를 만날 길이 없잖아. 독자라는 것은 평생 나에게 하나의 관념이었어요. 그게 좋은 점이기도 하고. 작가와 독자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도 작가가 자기 작품을 쓰는데 좋은 환경일 수 있어요. 혼자 외로운 밀실에 있다는 것이. 때로는 작가도 사람이니까 독자를 만나서 말을 나누고 손을 잡고 하면서 격려를 얻을 수 있거든. 좋은 점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기 때문에 작가 자신이 분명한 자기 생각으로 조절해 가면 된다고 봐요.

 

 

고(高)고(孤)고(古)! 고산자 김정호

 

정한아 / 『고산자』 얘기를 해보면 등단하신 지 36년 만에 역사 소설이라고 여기저기서 의미를 둬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역사 소설이라는 것이 쓰실 때 체감해서 느끼는 차이점이 있는지.

박범신 / 특별하게 역사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쓴 게 아니에요. 나는 평생 소설 앞에 관형어가 붙은 것을 싫어하는 작가고. 연애 소설이라고 해서 연애만 다뤄지는 것은 아니잖아. 역사 소설이라고 해서 단지 역사적인 사실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 오늘의 독자가 나누어 읽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물을 소재로 쓰는 것이고. 소설 앞에 어떤 말이 붙어도 온당치 않다고 생각해요. 역사적 소재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도리가 없는 것이지. 고산자 선생은 오랫동안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사람 중의 하나예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어릴 때부터 고산자는 백두산을 열 번을 갔다, 전국을 발로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그렸다 해서 나도 그 말을 그대로 믿었고. 두 번째 속설은 일본 시대 교과서에 나오는데 대원군 시절에 지도를 너무 상세하게 그려서 옥사했다, 감옥에 갔다, 청나라 첩자로 몰려서. 그 두 가지 속설을 나도 오랫동안 믿고 있었지. 백두산을 열 번 가고 지도를 발로 그렸다면 그 사람은 평생 길에서 길로 떠돈 사람이잖아. 내 코드에 잘 맞아. 그런 인물에 대해 내가 업 돼. 두 번째는 단지 길에서 길로 떠도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높은 이상 때문에 그 시대의 지식인 계급, 또는 체제의 이데올로기와 부딪혔다는 것이거든. 감옥에 가 죽었다는 것은. 그런 인물도 내 코드에 잘 맞아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고산자를 써 보겠다고 했는데 실제 내가 공부를 해보니 고산자 선생은 옥사를 하지 않은 게 확실하고, 또 지도라는 것도 북한산만 해도 열 번 간다고 정확하게 그려 낼 수 없어. 고산자 선생은 발로 지도를 그렸다기보다는 그 당대에 나오는 수많은 지도를 보고 인문학적 통찰력으로 오류를 짚어내는데 뛰어난 분이었다는 것이 내 결론인데. 사실은 소설 쓰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사실들을 알고 굉장히 당황했죠. 그래서 출판사에 전화를 했죠. 못 쓰겠다, 이 산이 아닌가벼. 그런데 이미 계약도 돼 있고 출판사도 펄펄 뛰고 해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 아마 정한아 씨가 읽었겠지만 『고산자』는 원래 내가 품었던 고산자의 두 가지 이미지도 버리지 않고 동시에 역사적 근거를 정면으로 위배하지 않는 선에서 소설이 마감돼 있어요. 일종의 모범적으로 쓴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만약에 그분이 옥사해서 그런 근거가 있어서 그대로 쓸 수 있었다면 소설의 볼륨이 굉장히 커졌을 거예요. 두세 권쯤은 쓸 수 있었는데, 그런 사실을 알고 소설을 강력하게 축약했죠. 고산자 선생 일생을 되도록 압축해서 기술하는 방법을 썼다고 할 수 있지.

정한아 /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이 소설이 잘 짜진 균형 있는 소설이라고 느낀 것이 이 소설에서 보이는 김정호의 모습이 선생님께서 서술하신 방식이 상상력으로 메운 부분이 있고 과학적으로 그 시대의 풍물들을 연구를 상세히 해서 기술한 부분이 있고요. 인문학적인 그 시대의 철학이라든지 김정호가 지도를 대하는 인문학적인 모습이 세 가지가 균형 있게 다리가 돼 있더라고요. 굉장히 균형 잡힌 작품이지만 선생님이 쓸 때 고통스러우셨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는 균형 잡힌 사람이 아니잖아요. 넘치는 부분을 떨어내고 부족한 부분을 가져다 붙이는 데서 다른 소설과 구별되는 고통스러운 지점이 있으셨는지.

박범신 / 고산자 김정호는 불과 130~140년 전 사람인데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요. 언제 태어났는지, 몇 년에 죽었는지, 심지어 그의 본관은 무엇인지. 고향도 토산이라는 설도 있고, 봉산이라는 설도 있고, 해주라는 설도 있고. 또 그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는지 어떤 계급이었는지 모든 것이 확정된 부분이 없어요. 고산자는 그 당시에도 조선 최대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도 유기된 것 같아요. 역사가 그를 버린 것이지. 현재에도 젊은 사람들에게 고산자에 대해 물어보면 ‘김정호 대동여지도’ 그것만 알아요. 대동여지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이 위대한 것인지, 그는 어떤 분인지에 대해 아무도 알지 못하거든요. 단지 ‘김정호 대동여지도’ 그것만 돌아다니고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 고산자는 유령이지요. 오늘 우리들도 고산자를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굉장히 마음 아팠는데요. 소설적으로 고산자를 한번 복원해 보자. 유령인 고산자에게 육체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거든. 그것을 정말 근거 없이 내 마음대로 해 버린다면 리얼리티를 얻지 못하거나 독자의 지지를 받지 못할 거예요. 어떻게 고산자 선생의 유령 같은 인생을 사실적으로 독자가 받아들이도록 쓸 수 있는가. 그 지점이 나에게 굉장히 어려운 지점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사람은 환경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니까 고산자가 살았던 시절의 환경을 공부하자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 시대의 인문학, 풍속사, 사회사, 정치사를 읽기 시작했죠. 고산자가 생존했던 시절의 세상은 어땠는가는 역사적 근거가 많이 남아 있어 많이 읽었고. 고산자가 살았던 시대의 세트가 내 머릿속에 그려지니까 거기에 캐릭터만 부여하면, 고산자의 성격만 부여하면 그 환경에 맞추어서 인물은 행동하는 것이고. 작가는 자기 마음대로 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환경을 부여하고 그 환경에 인물을 넣어서 그 인물에 캐릭터를 주면 캐릭터와 환경이 부딪히면서 행동하게 돼요. 작가는 그 행동을 쫓아가면서 기술하는 방식이죠. 고산자를 둘러싸고 있는 그 시대의 배경을 복원하는 것이 나에게는 힘들었어요. 그것을 복원하고 캐릭터, 고산자라는 인물을 세 가지 컨셉트로 보고 있는데 ‘하나는 그 뜻이 높아서 높을 고자 고산자고, 그 뜻이 시대와 충돌하기 때문에 외로울 고자 고산자고, 그 개인은 옛 산에 기대어 살고 싶은 꿈이 있었으니 옛 고자 고산자다’라는 것이 그 인물의 캐릭터를 부여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을 하고 났더니 그분의 인생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물론 소설 속에 그려진 그분의 인생은 많은 부분이 상상력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그런 캐릭터로 지도라는 것을 평생 쫓아가는 사람이라면 대충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지점에서 소설을 운영했죠. 정한아 씨 말대로 인문학적 백그라운드를 갖는 것이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고 동시에 하나의 불가능한 꿈을 좇아서 길을 떠난 인물의 캐릭터는 나의 본질과 맞는 것 같았어요. 그 부분은 특별히 어렵지 않았거든요. 어떤 대목은 매우 행복하게 썼고, 어떤 대목은 좀 힘들고 그랬죠.

정한아 / 『고산자』를 계간지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이것은 선생님 소설이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아서 부딪히는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이 『촐라체』와도 연작선상에 있는 부분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특히 김병현에 대한 애정이 그래 보였어요. 소설 속에 깊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읽었거든요.

박범신 / 김병현이가 짧게 나오죠. 사실 이 소설에서 고산자와 사랑을 나누는 비구니 혜련 스님도 양으로는 짧아요. 독자들은 굉장히 인상 깊었다고 이야기 많이 하더라고요. 김병현이라고 하는 사람과 고산자를 비교해서 고산자의 머릿속에 지나가는 생각을 기술한 부분이 있어요. 그이는 평생 모든 것들을 버리고 열고 사랑하게 자기 인생을 경영했고, 그렇지만 자기는 그래도 허망한 인생에서 뭔가 붙들고 엄격하게 지켜 가야 할 것이 있지 않겠나 하고 옹골지게 지도라는 것을 안으로 다지면서 평생을 그래 왔는데. 기본적으로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삶의 방향이나 그것은 같지 않았나 하고 고산자가 회상하는 부분이 나오죠. 두 분 다 그 시대로부터 버림받았고 제도권 안에서 보면 굉장히 아웃사이였고, 두 분의 인생이 매우 달라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이 함께 있었는데 고산자는 지도를 통해 풀었고 김병현은 자기를 망가뜨리며 풀었던 것 같아요. 지적한 대로 길 위의 인생이라는 것과 제도 안에 대한 뜨거운 욕망이랄까, 안에 대한 욕망이 김병현도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런 것에 대한 내적 고통을 둘이 공유하고 있어요.

 

 

지도 너머, 소설 너머 근원적 ‘갈망’

 

정한아 / 김정호라는 인물이 저는 처음부터 마음이 아팠어요. 왜 일까 생각을 했더니 김정호가 지도를 잘 그려서 자신의 뜻을 이룬들 이 세상에서 평온을 누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이것은 지도의 문제가 아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 인물이 가진 비극성이 눈에 보였고요. 그래서 현실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선생님께서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을 하셨는지.

박범신 / 이 소설의 기본적인 주제라고 할까 그런 것들은 사실은 지도가 아니에요. 대담하면서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김정호에게 지도는 하나의 핑계였을 것이다. 나는 사실 인생을 소설이라는 핑계를 붙들고 살고 있죠. 평생 나도 소설 외의 것은 모르고 살아왔는데 소설이 내 최종적인 목표는 아닌 것 같아요. 젊은 날에는 소설이 최종적인 목표인 줄 알았어요. 최고로 훌륭하고 독자의 지지를 받고 좋은 소설을 쓰면 행복해질 것이다. 지난 10년간은 그것들을 수정해 오는 과정이 내 안에 있었어요. 어쩌면 소설은 내 인생의 핑계였을 거야. 어떤 것의 그림자죠. 절대적 가치의 그림자. 그러면 내가 본질적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김정호가 본질적으로 그리워하는 부분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대라고 하면 난감해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분명한 것은 이 소설의 주제가 지도가 아니라 김정호라는 한 인간이 가졌던 갈망이라고 할까. 나는 이 소설을 통해서 역사적인 한 인물을 복원했다는 측면보다 시대와 관계없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밑바닥에 있는 그리움 갈망을 썼다는 생각이고. 갈망이라고 하는 것은, 갈망이 깊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꿈에 대한 것이거든요. 이를테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불가능한 꿈일 거예요. 내가 살아온 과정을 되돌아보면 사랑조차도 하나의 환상 같은 것이었을 거야. 지도나 소설을 통해 불멸로 남으려고 하는 것도 하나의 환상 같은 것이죠. 결국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꿈이라는 것이 위대한 생애를 지켜 주는 에너지이고 중심이지 않겠는가. 현대인도 목표라고 부르는 것은 꿈이 아니죠. 목표일뿐이고. 불가능한 것에 대한 소망과 그리움이 없는 인간은 없다고 봐요. 워낙 정보가 강력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본질 속에 있는 이상과 꿈을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거죠. 바로 그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회복시킬 때 누구나 갈망이 깊어지지 않겠어요. 김정호는 그런 사람이죠. 갈망이 깊었기 때문에 그리운 것의 한 그림자로 지도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로 지도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밑바닥 층위에는 인간 본성으로서의 갈망이 있는 것이고 그 다음에 지도가 있지요. 지도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백그라운드와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 체제와 한 개인의 충돌, 사랑도 있는 것이죠. 김정호의 이야기를 독자들이 읽어서 자기 마음속의 갈망을 내 소설이 건드리고 지나가면 좋겠다. 망가뜨려졌거나 잠복하고 있는 어떤 불가능하게 보이는 꿈을 건들고 지나가는 소설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쓴 거예요.

정한아 / 권력이 김정호와 불화했던 면에 대한 서술은 이해가 돼요. 그런데 마지막에는 김정호와 같이 지도를 연구하고 도왔던 친구들을 환멸하는 모습이 보이잖아요. 그 사람들을 기득권이라고 일컫기는 힘들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지식인에 대한 불신이 있으신 것 같은데.

박범신 / 거의 생래적으로 있죠. 물론 이 나라를 살리는 것도 지식인이고, 이 나라를 망해 먹은 것도 지식인이라고 봐요.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데요. 여기서는 고산자를 둘러싸고 세 사람이 나와요. 하나는 묘 최성환 이라는 사람이 나오고, 하나는 해광 최인기, 미당 신원. 신원은 대원군 이후에도 승승장구해서 지도층 반열에 오른 사람이고, 해광 최인기는 김정호에게 누구보다도 강력한 인문학적 지식과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고 부를 통해서 중국을 통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에요. 그 자신은 평생 체제에도 부응하지 않고 그야말로 고고하게 살았던 사람이죠. 묘 최성환이는 양쪽에 양다리를 걸치고 기능적으로 인생을 산 사람인데, 이 세 사람은 해방 후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떤 면에서 지식인의 보편적이고 표준적인 캐릭터를 보여 주죠. 김정호는 마지막에 사람에게 100프로 승복하는 장면이 나와요. 이 소설을 정밀하게 읽으면. 승지 남종삼이가 천주교 박해로 처형당하는 순간 저 사람은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가치에 저렇게 초연하게 자기 목을 거는가. 그런 대목에서 고산자의 머릿속에서 승지 남종삼에게 무릎 꿇는 상념이 지나가죠. 세 사람은 평생 의지하고,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잘 사는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고산자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온정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죠. 나는 지식인이 참으로 뛰어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지식인이 그 시대를 위해서 바르게 잘 살 수 있지만 정말 뛰어나기는 어려울 것이야.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온정주의적인 것들, 고산자의 입장에서 세 사람이 최종적으로 자기보다 약했다고 보는 것이죠. 평생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어떤 지점에서 그들도 평범한 인간이었어. 뛰어난 인간이 아니고 하며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이 소설의 말미였고. 그러는 것은 내가 지식인을 보는 세계관을 내 자신 소설 속에서 방어하지 못했다는 느낌이에요.

정한아 / 그 세 사람은 갈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박범신 / 갈망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갈망이 깊이에 있어서 아주 깊지 못한 한계가 있고. 일반적인 지식인이 그렇잖아요. 너무 많이 아니까. 너무 많이 알면,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갈망은 깊어질 수 없어요. 현대인이, 오늘날 젊은이들이 어떤 것에 대해 뜨거운 갈망을 갖지 못하는 것은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이지 그들의 본질 때문은 아니라고 봐요.

정한아 / 그러면서 느꼈던 것은 김정호가 너무 고독하다는 것이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는 여자와의 관계에서도 고독하고요. 딸을 지키지 못한 무력감에서도 고독하고 유일했던 친구들로부터도 실망하는 고독한 모습이었어요.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 산길을 유랑하는 모습도 고독했는데 선생님 생각을 했어요. 작가의 인생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생각했어요. 개인적인 질문을 하면 작가로서 36년의 인생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고독이 친구이고 애인 같기도 한 것 같은데 작가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박범신 / 본인이 알고 있는 것을 물어보면 되나. 고독하다는 것, 세계와 내가 잘 소통이 안 된다는 것, 내가 갖고 있는 이상과 부족한 현실 사이. 그리운 저기와 그리운 여기 사이가 멀고 모질면 그만큼 갈망은 깊어지는 것이고, 갈망이 깊으면 그 부분은 멀고 모질어지고. 그 부분을 모질고 멀게 느끼는 순간이 없는 사람이 소설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든 않든 정한아는 이미 고독한 사람이다. 그 부분에 예민할 사람일 거예요. 결국은 김정호뿐만 아니라 갈망이 깊어지면 고독한 것이죠. 갈망이 깊어지는 것은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사랑이 그만큼 깊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사랑이 깊은 사람이 더 고독하거든요. 사랑이 깊지 않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할 뿐일 것 같아요. 사랑이 깊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천지간에 고독한 순간도 있는 것이죠. 초장에도 말했다시피 사랑은 근본적으로 유한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도 영원성, 불멸성 앞에서는 고독하지 않을 수 없어요. 존재론적 고독이라는 것은 매우 본원적인 것이고 작가는 당연히 그 부분에서 예민한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아마 김정호도 지도쟁이 이전에 한 작가였을 것이다는 느낌으로 썼는데 약간 자의적으로 김정호를 그렸다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어요. 그려 놓고 보니까 내 본질과도 닮은 데가 많고. 김정호는 과학자이고 놀랍게 목판을 새겼던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자의적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어차피 작가라는 것은 자기 관점을 쓰는 것이고, 아마 살아 있었어도 그분은 평생 고독했을 거예요. 지도라는 것은 개인이 그리는 것이 아니에요. 다 관에서 그리는 것이고. 더구나 김정호의 꿈은 국가 권력이 완전히 소유했던 지도를 백성들에게 나눠 주고 싶었던 꿈이 있었어요. 그래서 대동여지도를 목판본으로 만들거든요. 그것은 그 시대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세계관이거든요. 그의 고독은 사회적으로 뼈저리게 고독했을 거예요. 무엇보다도 소설 속에서 그의 고독은 어머니 부재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이 소설에서 어머니는 절대적 가치나 영원성과 같은, 절대적 이상을 생각하고 쓴 거예요. 평생 동안 어머니 부재가 만들어 낸 존재론적 고독, 목판본의 지도를 제작하고 싶었던 사회적 고독이 강력하게 결합돼 있다고 할 수 있죠.

 

 

불가능한 꿈에 대한 갈망, 그것이 문학

 

정한아 / 어머니의 그림자 같은 존재가 한 번 나타나는 장면이 있어요. 동굴 속에서 죽은 혜련 스님의 어머니인데, 그 부분이 너무 인상이 강렬했어요. 굉장히 슬펐고요. 그래서 결국 지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그 부분에서 분명해졌던 게 존재론적으로 이 인물이 감당해야 하는 빛과 어둠의 음영이 너무 짙고. 그 존재론적 본질의 슬픔이라는 것이 생명의 슬픔, 유한한 이 세상의 슬픔이 그려져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어머니가 부재한 상태에서 어머니의 체험을 하는 존재와 죽음을 가로지르는 장면을 그리신 것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신지.

박범신 / 여기서 고산자에게 어머니 부재라는 것은 그가 평생 어디에도 머물지 못한다는 것이 어머니 부재로부터 비롯되죠. 어떤 여자하고 사랑을 해도 그 여자 곁에서 가정을 꾸리며 머물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것은 거의 선험적인 것이거든요. 그것의 모티브가 어머니 부재로 오는 것이죠. 혜련 스님과도 혜련 스님의 어머니 때문에 만나죠. 죽어 가는 혜련 스님의 젖을 빨면서 고산자가 살아나고 혜련 스님은 그 직전에 떠나게 되면서. 간밤에 품에 있던 혜련 스님의 어머니에게서 도망가다가 뒤돌아보죠. 아침 햇빛을 사선으로 받으면서 자기가 간밤에 죽어 가는 여자의 품에서 젖을 빨았으니까 젖가슴이 눌린 부분이 죽었으니까 꺼진 대로 그냥 있지. 솟은 부분은 밝고 꺼진 부분은 어둡잖아요. 그 부분을 쓸 때 작가가 아주 마음이 아팠기 때문에 독자도 마음이 아프게 읽기를 바랐어요. 나는 인생의 존재적인 근원, 존재론적 슬픔이 거기에 있다고 봐요. 내가 나이가 많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나이 들면서 죽음과 멀어졌어요. 나는 10대 때 죽음을 훨씬 가깝게 이해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10대는 정말 죽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느낌인데 나이 먹으면서 죽음에 대한 정보를 축척하면서 실제 내 몸은 죽음에 가까워졌는데 죽음에 대한 이해는 더 적어져 역효과가 나고 말았는데, 바로 고산자가 그 어린 시절, 불과 열 살이었는데 혜련 스님의 꺼진 젖가슴을 보는 순간 평생 존재론적인 고독과 번뇌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 결정되죠. 이 소설에는 존재론적인 고독이라는 것은 독자가 이유를 묻지 않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평자에 따라서는 그것이 불만일 수 있다고 봐요. 작가 박범신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그리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 모른다. 존재의 근원이 주는 고독과 죽음과 부재감은 누군가 근원적으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 짐이고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지난 10년간 이 문제에 매달려 있어요. 아까도 말했듯 소설이 내 꿈이 아니고 진실로 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이 있으면 소설을 항상 그만두고 싶어요. 옛날에는 소설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요즘은 소설 너머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이 너무 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이것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만약 내가 다른 어떤 것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런 근원적인 존재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소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거든요. 고산자 김정호에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문제까지 고백되어 있는 소설이다 이렇게 볼 수 있죠.

정한아 / 이 소설을 책으로 받았을 때 제 시기가 긴 분량의 소설을 제가 처음으로 쓰고 있는 중이었는데, 제 안에 언어가 없다는 것을 절감했어요. 작가가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일컫는 언어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저에게 그것이 없는 거예요. 메말라 있던 상태에서 선생님의 『고산자』를 펴 읽는데, 강물이 넘실대는 것처럼 충족시키고 감동시키는 부분이 있었어요. 언어 그것이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박범신 / 내 얘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정한아 씨 소설을 내가 두 권을 봤는데 하나는 『달의 바다』는 20대 초반에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처녀 이미지가 있어요. 물론 어둡고 슬프고 우울한 것도 있었지만 그것을 선험적인 밝은 것, 긍정론으로 감싸고 있어서 20대 처녀가 쓸 수 있는 소설이다. 이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두 번째 창작집을 보니까 정한아 씨가 어두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전반적으로 언어의 울림이 장중해지고 있다고 할까. 작가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통과의례지요. 정한아 씨가 굉장히 깊어지고 있다. ‘좋은 작가 큰 작가로 가는 길에서 빠르게 어른이 되네’라는 생각. 결국 어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밝음과 어둠에 대해 동시에 이해하는 것 같거든요.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 이룰 수 없는 것과 이루어지는 꿈을 동시에 내 안에서 이해하고 그것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하는 것이 작가의 꿈 아니겠어요. 정한아 씨가 끌고 가는 궤적을 느꼈는데, 정한아 씨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정한아 씨만의 삶의 궤적이라고 느끼지 않아요. 모든 선후배 작가들이 그런 경로를 거쳐 가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어떤 의미에서 평생 고집스럽게 문학에 매달려 있는데 젊을 때는 유명해지고 싶었어요. 너무 가난했고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엄혹했던 80년대에 세 아이를 가르치고 먹여야 한다. 눈 없으면 코 베 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식솔들을 먹여 살리고 어떻게 이곳에 좁은 의자라도 만들어서 앉느냐 하는 것이 엄연한 내 인생의 명령이었죠. 그렇다고 해서 한 지식인으로서의 고뇌가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80년대에는 매일 매일 내 몸이 찢어졌어요. 독자들이 알고 있는 박범신과 내가 그리워하는 본질적인 나 사이. 문단이 정의하는 박범신과 그 속에 들어 있지 않은 나 사이. 내가 일정하게 사회적 책임과 함께 만나야 하는 제도화된 세상 구조와 한 인간으로서의 나 사이라는 것이 강력하게 충돌하고 매일 매일이 고통스럽고 가시방석에 있는 젊은 날을 보냈죠. 사실 문학적 환경으로 보면 지금이 훨씬 행복한 시대예요. 옛날에는 베스트셀러만 내도 피고석에 앉는 기분이었어. 책이 팔려서 좋은 게 아니라 책이 팔리면 이 시대에 뭔가 잘못하는 것 같은 강박 속에서 젊은 날을 보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작가로 살았다는 것이, 어떤 작가로 살았든 상관없이, 주웠던 행복이 무엇일까. 기본적으로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유롭게 살았다고 생각해요. 어떻든 그 어떤 길을 걸었어도 내가 작가로 살았던 것처럼, 내가 나 자신을 끊임없이 스스로 억압하고 해방시키는 반복이었지만 때때로 황홀한 해방감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작가로서 내가 가졌던 큰 행복이었고, 부패한다는 것이 뭔지 모르지만 멈춰 있으면 부패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구르는 돌, 작가는 저잣거리에 명줄이 매달려 있어야지 높은 산사에서 도를 닦으면서 작가 생활 못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정신이 머물러 있지 않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작가로 살았기 때문에 부패하지 않았다’라는 강력한 자긍심을 갖고 살고 있어요. 문학이 본질적인 면에서 나의 방부제였다는 신념이 있거든요. 물론 나도 죄도 많고 부패한 구석도 있겠지만 항상 새로운 바람 부는 곳으로 촉수를 내밀고 그 내부에서는 본질을 지켜 가려는 노력, 그러나 풍향계처럼 새로 부는 바람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망들. 그게 존재라는 측면에서는 불안한 자리인데 그것이 나를 생생하게 깨어 있게 한다. 누가 당신 인생이 어떠냐고 하면 연애 한번 하듯이 인생이 가 버렸다고 하거든. 그것은 작가가 아니면 누리지 못했을 놀라운 행복감 아닌가. 작가로 살았던 것에 대해 감사하고 후회가 없어요. 다만 본원적인 나의 욕망이나 그리움이라고 하는 것이 작가 그것 자체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이룰 수 없는 꿈들뿐인데. 나는 아침저녁으로 화염병으로 현재도 불타고 있는 중이거든. 그냥 사랑인지도 모르겠어요. 검박하게 말하면. 문학은 연애로 시종하는 것으로 봐요. 그런 것에 대한 갈망. 사실은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거든요. 나는 어떤 경우도 이루어지는 사랑은 없다고 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인생도 문학을 지켜 갈 것은 확실하지만 지금의 내 소망은 거기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 너머의 어떤 것, 어떤 영혼성 같은 것, 영원한 사랑, 그런 것에 대한 욕망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는데도 늘 불타죠. 이렇게 사는 것이 나만 그렇겠어요. 인간이 다 (그렇지). 그러니까 존재란 쓸쓸한 것이라고.

정한아 /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까 『고산자』의 한 부분과 일치하는 것 같은데요. 고산자의 지도는 그의 이야기잖아요. 그에게 지도는 작품 말미로 갈수록 지도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과학적으로, 인문학적으로 지도에 다가서고자 하는 모습이 있지만 한편으로 지도를 하나의 맥으로 보는 것이 나오잖아요. 맥이라는 것이 계량할 수 없는 것이고, 선생님 말씀하신 그 너머의 것인데 그것을 더 높은 질서라고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진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구나 생각을 했는데요. 선생님을 뵈면 느끼는 것이, 어른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선생님은 문학에 대해서 순결한 분인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을 항상 받아요. 저도 젊은 작가고 주위에 젊은 작가들이 많이 있지만 선생님께서 걸어오신 길을 보고 선생님께서 쓰신 책을 보면 문학을 견딜 수 없이 사랑하기 때문인지 어떤 순결함이 느껴지거든요.

 

 

대동여지도, 맥으로 이어진 고뇌의 산물

 

박범신 / 사람들에게 그러지요. 내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두 개뿐이다. 평생 많은 변화를 겪어 왔는데 그래도 변화를 겪지 않은 밑바닥이 있지 않겠어요. 하나는 말씀하신 대로 문학 순정주의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문학에 대한 사랑, 사랑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이 순결성 아니겠어요. 순결한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하는 것이죠. 문학 순정주의는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번에도 『고산자』 쓰면서 신춘문예 쓸 때보다 파지가 적게 나왔다고 할 수 없거든. 문장을 만지고 할 때도 신춘문예를 필사적으로 준비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했기 때문에. 황석영 형이 내 소설 보고 당신 문예반 그만하라고. 그게 비난일 수 있지만 나의 문학 순결주의나 문학 순정주의를 짚은 말로 받아들였어요. 또 하나는 인간주의 같은 것이죠. 좌우 너머에 인간주의가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고산자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그 인간주의라는 것은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살자는 것은 아니에요. 고산자도 이 소설에서 모순된 캐릭터를 보여 주는데, 하나는 지도를 그리는 데 있어 강력한 엄격성. 그 다음 지도를 넘어선 곳을 향한 존재론적이고 근원적인 인간주의 이데올로기. 이것은 사실은 현실에서는 상충하는 가치예요. 그는 한 과학자로서 지도는 정확한 축척지도가 되어야 한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매우 과학적인 것이고, 그 너머에서 보는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욕망은 어떤 면에서는 비과학적인 것이거든. 내부에서 이 부분은 때로 상충하고 충돌하는 모양으로 나타나거든요. 인간주의라는 것은 온정주의나 인간적 주의라는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자기 것을 지켜 가며 그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한 열망. 그야말로 문학이지. 문학이 가장 근접해 있다고 봐요. 그래 놓고 봤더니 당신이 그린 김정호가 나의 이미지와 부합된다고 해, 영광으로 생각했죠. 말이 나온 김에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대동여지도는 뭐가 위대하냐 이런 것이거든. 내가 선생을 오래해서 약간 계몽적인 습관이 있어요. 많은 사람, 많은 젊은이들이 대동여지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요. 대동여지도 뭐가 위대한가. 정확한 지도이기 때문에? 물론 정확하죠. 대동여지도 이전의 지도는 방안지도라고 해서. 지구는 둥근데 모눈종이는 평면이잖아요. 둥근 지구를 모눈종이에 그대로 그려요. 수원은 더 멀리 그릴 수 있고 천안은 훨씬 가깝게 그릴 수 있어요. 그런 오류들이 대동여지도가 나오기 전에는 비일비재하죠. 조선 전기에는 선조들이 지도를 회화로 보았고. 매우 과학적인 방식의 축척지도로 고산자가 그린 지도가 최초이고 제일 위대하다. 두 번째는 고산자 이전의 지도는 대부분 필사본 지도예요. 고산자는 그것을 목판본으로 만들고 휴대하기 간편하게 고안했어요. 조선 전체를 22로 분리하고 세로를 80리 간격으로 나누어서 접도록 돼 있어요. 접으면 요만한 서책 한 권이 돼요. 들고 다닐 수 있어요. 이게 무겁다면 그중에서 두 장만 빼내서 품에 지닐 수 있거든. 지도라는 것은 백성들이 생업을 하거나 아는 사람을 찾아갈 때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고산자가 매우 선구적으로 했어요. 그 전의 지도는 국가에서 그리고 차지하고 있으면서 백성에게 공개를 안 해요. 반란이 나면 자기들이 지도 보고 가서 잘 잡고. 전근대의 국가라는 것은 총칼을 들고 국가를 지키는 개념이기 때문에. 국가 권력이 소유한 지도를 일반 백성에게 나누려고 했던 선구자적인 뜻이 있거든요. 또 하나 대동여지도가 위대한 점은 이를테면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이모티콘 같은 것처럼 봉수대면 봉수대라고 안 쓰고 기호로 표기했어. 그것은 최초예요. 그전에는 기호표에 의한 지도가 없었어요. 이게 굉장히 간단한 것 같지만 앞선 감각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어요. 고성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대동여지도에는 기호표로 설정돼 있거든요. 또 하나는 놀라운 전각. 이 수많은 지면과 이런 것들을 새길 수 있는 놀라운 예술적 솜씨가 깃들어 있고요. 대동여지도를 보는 김정호의 일관된 이념은 무엇이냐. 모든 우주 삼라만상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종의 풍수지리에 의해 세상을 보는 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산과 물과 마을과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풍수지리적이고 불교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거예요. 대동여지도를 보면 기본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산이죠. 전부 다 하나로 붙어 있어요. 김정호의 아버지가 잘못된 지도를 가지고 죽는 것이 이 소설의 모티브인데 거기는 산이 떨어져 있는 지도였거든. 김정호는 산맥을 찾아서 다 붙이죠. 물은 물대로 산은 산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하나의 맥을 이루는 것이 세상이라고 본 것 같아요. 그분은 또 강력한 철학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요. 과학자로서의 위대성, 인문학자나 철학자로서의 위대성,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첨단 문명에 대한 위대성, 국가 권력이 소유하고 있던 지도를 백성에게 나눠 주고자 한 위대성, 김정호가 살았던 시대의 실사구시, 실학이 트렌드였는데 실학을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통해 실학을 철저히 구현한 위대성을 가지고 있어요. 정한아 씨에게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이 대담을 보시는 젊은 분들에게 김정호가 이런 점이 위대한 것이 있었구나 설명 드리기 위해 얘기한 것입니다.

정한아 / 작품 마지막에 개인적인 갈등을 해결하고 나서 만장의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장면이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이 나라 국가가 죽었다고 하고 자신의 친구들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선생님 말씀처럼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해 꿈을 꾸지 않는 자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이해를 하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다 산송장이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꿈을 꾸는 젊은이들이 없고, 그 너머의 세계는커녕 이 안의 세계에서 다들 아등바등한다고 정신이 없는데 이유가 뭘까요.

박범신 / 김정호가 데모하는 장면이 두 번이 나와요. 한번은 고향을 떠날 때 토산현 앞에서 무릎 꿇고 시위를 하고 마지막에 딸을 살리기 위해 시위를 하죠. 김정호에게 딸은 회귀하게 하는 모티브죠. 만약에 딸이 없었다면 그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길에서 아마 끝 간 데 없이 유랑으로 갈 뿐인데 삶은 유랑과 회귀의 반복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회귀를 시키기 위한 끈이 이야기 속에 있어야 되지 않겠나 싶어 나는 순실이로 본 것이죠. 순실이는 김정호가 끝없이 유랑하다가도 회귀할 수 있는 모티브. 그런 면에서 김정호가 아주 불행한 것은 아니에요. 마지막에 순실이를 살리기 위한 시위로 만장의 데모로 나오는 것이고, 만장을 통해서 자기가 읽었던 세계에 대한 모멸감 실망감 분노를 김정호가 유일하게 표출해 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죠. 질문의 초점은 오늘날 젊은이들의 정체성이라고 보이는데. 물론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쓸쓸함이 지금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가장 큰 문제이자 고독의 시원인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아요. 대학에서도 보는데 안타깝죠. 젊음 자체에 대한 연민과 욕망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연민은 사람들은 젊은이들 보고 살기 좋아졌다고 하는데 물론 우리 때보다 덜 가난하고, 젊음이라는 것은 가난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불행해지거든요. 장 콕도라는 사람이 ‘안전과의 주식을 사지 않는다’라고 말했어요. 젊은이라는 것은 불안전한 주식을 사는 것이다. 삼성주 같은 것 안 사고. 깨지면 깨지고 흥하면 흥하는 주식. 그게 젊음의 특권인데. 오늘날의 시대는 젊은이들이 불안전과의 주식을 살 수 없는 시대예요. 이미 세계는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 폭압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고 그 장기판 위를 어떤 젊은인들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서 자본주의 장기판을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그게 안타깝지만 장기판을 때로 떠날 수 있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욕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갖기는 어려운데 갖지 않으면 죽음이죠. 요즘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정보에 따라서 찬스를 보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때는 우리가 갈 길을 알고 있었거든. 무엇이 절실하고 어떤 찬스가 와도 이것만은 잃지 않겠다는 것이 우리 젊을 때는 있었어요. 지금은 없거든. 더 파이가 크면 그쪽으로 몰리는 것은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에서 오는 것인데, 그것이 젊은이들 탓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겠어요. 그것에 대해서 욕망과 고뇌를 가져야 최소한 삶의 쓸쓸함과 무위함으로부터 구원 받지 않을까. 나는 평생 무위할까 이 짓을 했거든. 심심하고 쓸쓸해지고 죽고 싶고 그런 것들 있잖아요. 소설만 쓰면 그것을 이길 수 있어요. 나는 굉장히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인생을 산 것이죠.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겠냐는 점에서는 회의적인데 젊은이들 탓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한 욕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 최근에 제가 쓴 『촐라체』 같은 소설이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강력하게 욕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죠.

 

 

젊은 작가들이여! 자본과 전쟁을 벌여라

 

정한아 / 그런데도 작품의 마지막에 보면 굉장히 희망적인 구절이 있어요. 이 강토와 난 그곳에 희망을 건다. 그 강토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지 의문이 들었어요.

박범신 / 기본적으로 문학이라는 것이, 정한아 씨 소설도 절망적이기 이를 데 없더구만. 우리가 쓰는 절망이라는 것이 절망이 목표는 아니잖아요. 어떻게 씌어지든 희망을 생각하지 않은 문학은 죽은 문학이라고 봐요. 우리는 강력하게 뭔가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 부족하고 고통스럽고 결핍투성이 현실을 피나게 쓰는 것이지. 그런 희망에 대한 믿음이나 욕망이 없다면 누가 이 짓을 하겠어요. 김정호도 그가 평생 그렇게 핍박 받으면서 대동여지도를 그릴 수 있었던 참된 에너지는 세계에 대한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세계가 어떤 것인가는 그 소설에 다 진술 돼 있지는 않죠. 나라가 망하고 삶이 쓰러져도 그 강토는 영원히 거기에 있다는 믿음, 이것이 김정호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강토라는 것을 절대적 가치 같은 것으로 생각했어요. 인간이 가진 참된 본원이나 그 시대가 가진 중심적인 가치라고 하는 것은 시대적인 환경에 의해 훼손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도 이제 60대가 됐는데 내가 10대 때 가지고 있던 내 안의,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던 가치가 있다면 안 변하더라고. 훼손 안 돼요. 훼손된다는 것은 환경에 따른 부분에 불과하거든요. 훼손되지 않는 본질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 최종적인 희망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자기는 평생 땅을 그리고 지도를 그렸던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훼손되지 않는 절대적 가치의 표상으로 국토, 땅, 강토를 생각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죠.

정한아 / 선생님께서는 연민이 많은 분이신 것 같아요. 작은 자들, 약한 자들, 순결한 자들에 대한 애틋함이 있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젊은 작가들에 대한 애정이 많으시다는 것을 느껴요. 작가 지망생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 같은데.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시는지.

박범신 / 내가 마음이 착잡할 때가 이쁜 총각 처녀가 주례 봐 달라고 와서 서 있을 때예요.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화려하고 아름다우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죠. 결혼해서 수 십 년 동안 산 끝에 앞에서 내려다보면 솔직히 한심한 생각이 들어요. 애들이 뭘 몰라서 이러고 있지. 한심하다고 편박하게 이야기했지만 한편에서는 애처롭고 어떻게 이들이 어지러운 사회에서 사랑의 맹세를 지켜 갈 것인가.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놀라운 자기희생과 헌신이 따라야 하거든요. 한 사람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매순간 목숨을 거는 짓일지도 모르는데. 그들은 그 앞날에 대해 아무것도 예측 못하면서 지금의 행복감에 도취돼 있으니까 나 같은 사람이 보면 한심하죠. 문창과에 새로 입학한 아이들이 새로운 교수님이다, 저 사람은 유명한 작가라더라 눈빛을 빛내면서 첫 시간에 기다리고 있어요. 주례석에 섰을 때와 똑 같은 마음이 되죠. 문학을 성공하든 말든 지켜 가는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이고, 그것으로 성공하기 힘든 것을 나도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 안쓰럽죠. 내가 젊은이들을 대하는 태도 속에는 기본적으로 연민들이 자리 잡고 있어요. 소외 받고 가난한 모든 이에 대한 연민, 더 크게 보면 인간 자체에 대한 연민이 없다면 문학이라는 것은 불가능하죠. 존재에 대한 연민이 없이 어떻게 문학을 하겠어요. 나도 사람이니까 더 가까운 젊은이들, 하고많은 것 중에서 문학을 선택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런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비생산적일지 모르고. 이것을 선택해서 떨면서 그 길 끝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면 소중한 생각도 들지만 안쓰럽고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나도 정신이 번쩍 나고 숨이 꽉 막히죠. 말리고 싶기도 하고, 강력하게 그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함께 가고 싶은 욕망도 강하고. 그러면서 정 들이죠.

정한아 /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여쭤 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요. 오늘날의 문학이 선생님께서 젊은 시절에 뜨겁게 글을 쓰던 시절과 많이 다르잖아요. 소통되지 못하는 문학이라는 것에 대한 절망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부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박범신 / 오늘날 젊은 작가들 경우에 문학적 지평을 많이 넓혀 놨어요. 소재도 다양해졌고. 내가 30대 초반이나 20대 후반에 썼던 글을 다시 출간하기 위해 교정 볼 때 보면 지금의 정한아 씨가 쓰고 있는 그런 문장력은 못 따라가요. 참 우수하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해요. 조금 염려하는 면 하나는 오늘의 한국 문학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을 소외시키는 것은 아닌가. 문학이 그 당시의 삶을 소외시키면 문학의 죽음이지 않겠나. 어쨌든 문학이라는 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주인이에요. 문학이 삶을 소외시키면 독자가 문학을 소외시키는 앙갚음이 와요. 결국은 악순환이죠. 작가는 이상한 변태나, 뭐 그런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물론 다양하게 다뤄지는―젊은 작가들이 쓰는―것이 의미가 없고 삶이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적어도 우리가 보편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것을 70. 80년대의 문학에서는 담아냈어요. 지금 젊은 문학들은 우리의 보편적인 삶을 담아내는 데는 70, 80년대에 비해서는 덜하다는 느낌, 보편적인 삶이 문학으로부터 소외되는 느낌이 있어요. 그것은 독자가 문학을 소외시키는 앙갚음으로 나타나고, 독자가 문학을 소외시키면 작가는 더더욱 삶을 소외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이것이 우리 문학판이 가지고 있는 내밀한 문제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우리들의 삶을 보편적으로 담아내고 말면 우리 시대가 가지고 있는 내밀한 문제들을 어떤 마취적인 효과들로 다룰 문제가 있어요. 위험함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 부분을 우리 문단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 아니겠나. 두 번째는 비슷한 맥락이지만 결국 자본주의거든요. 80년대 작가들은 이른바 정치적인 민주화를 위해 많이 헌신했는데 지금 문학판에서 싸워야 할 게 있다면 자본밖에 더 있겠어요. 어떤 식으로든 전쟁을 해야 한다고. 이대로 작가들조차 자본의 폭력성에 매립돼 버리고 만다면 아까 같은 문학의 소외로 세상 속에 나타날 것이다. 80년대처럼 리얼리즘 소설을 쓰자는 논리는 아니고, 분명하게 자본주의 세계사적 구조가 사람들을 억압하고 편입하고 조종해 가는지에 대해서 더 젊은 작가들이 예민하게 봐야 한다.

정한아 / 『고산자』에서 세 명의 지식인을 보면서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작가가 지식이랍시고 정말 생을 걸고 뛰어들어야 할 때가 왔을 때 겁을 먹거나 물러서지 않아야겠다는 스스로 경계하는 모습이 있었어요.

박범신 / 모든 작가들이 행복하게 쓰길 바라거든요. 소설이 무거울 필요는 없어요. 재미있고 행복하게, 작가들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독자들도 행복해지기 어렵고. 우리 문학판은 나부터도 목에 힘이 들어가 있어요. 작가가 글을 쓸 때 제단을 올라가죠. 청중들 눈 아래로 보면서 이들을 내가 일거에 격파해야겠다. 나도 결국 그 습관을 못 버리는데 항상 불만 중의 하나예요. 힘을 빼고 독자의 좌석으로 내려가서 속삭이는 말투로 더 많은 허점을 보여 주면서 스며들듯이 쓰면 안 되겠는가. 소재나 문장이나 뭐 하나로 강력한 칼로 일거에 모든 것을 제압해 버리려고 하는 태도가 작가들에게 많이 깃들어 있다고 보거든. 정한아 씨 같은 젊은 작가는 당대적인 고민들을 재미있고 가깝게 써 내려가면 좋지 않겠나. 세상을 일도양날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쓰면 문학판이 더 풍성해질 것 같아요.

 

 

긍정을 향한 비판, 젊은 작가의 힘

 

정한아 / 오늘 선생님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하고요. 다음에는 산에 갈 때 저를 데려가 주세요.

박범신 / 나는 사실 굉장히 비극 지향적인 인간이에요. 내 안에서 많이 느끼거든요. 베스트셀러 작가 시장을 느끼면서 지금의 일부 내 캐릭터는 만들어진 것이에요. 그 전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의 어떤 대목의 나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있어요. 정한아 씨는 나와 달리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긍정이 있다. 이게 큰 희망이라고 봐요. 문학이라고 해서 어두운 관점으로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문학이 비판이었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봐요. 비판의 칼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사랑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것 보지 못하면 문학이 끝나는 것이죠. 그게 쉽지 않아요. 나 같은 사람은.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긍정을 가지고 엄혹한 비판을 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 정한아 씨는 그런 점들을 강력하게 가질 수 있다는 것 하나가 부럽고. 둘째는 정한아 씨는 굉장히 유려한 문장이라고. 엊그제 《문학동네》를 보니까 정한아가 가진 것이 두 가지라고 동료 작가가 썼어요. 하나는 정한아가 독종이래요. 독종이라고 생각 안 했는데 다행이다. 문학은 독종이 아니면 못해요. 부모님이 주신 타고난 순결성으로는 못하지. 진흙바탕을 이해하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에 독종이면 독종일수록 좋은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정한아 씨를 긍정적인 작가라고 했는데 ‘본원적인 우울이 있다’라는 문장이 있었어요. 마지막에 ‘한아 너를 위해 웃어’라고 썼어요. 정한아의 내밀한 것을 보고 나서 쓴 좋은 말로 보였고 그런 점들이 젊은 정한아의 좋은 자산이 되겠다 생각했어요.

정한아 / 다음번에는 산에서 이야기를 해주세요.

박범신 / 히말라야를 함께 가지. 산에서는 한 보름을 걸어야 해. 한 2박 3일 걸으면 세상이 준 정보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아요. 2박 3일 정도는 서울 걱정도 많이 해요. 3일, 4일 지나면 다리에 힘이 빠지고 약간 내면화돼요. 내면화 과정을 일주일 넘게 계속 걸어가면 무념의 상태에 도달해요. 트래킹 거기까지 하면 좋은데. 한아 씨가 간 산티아고의 희망여행과는 보는 풍경이 다르기 때문에 히말라야에서 보는 것이 있을 거예요. 나중에 같이 갑시다.

정한아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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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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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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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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