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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움 속 강인함, 그 따뜻한 글쓰기

  • 작성일 2009-04-27
  • 조회수 3,284

 

부드러움 속 강인함, 그 따뜻한 글쓰기

 

 

대담 이경자(소설가)

진행·정리 김유진

 

인트로

근황

빨래터

치열한 취재, 전투같은 글쓰기

분노로 쓴 소설 '절반의 실패'

종가집 맏며느리로서 가부장제를 직시

등단

도스토예프스키

사랑과 상처

꼽추네 사랑

소설은 밥값이 되어야 한다

긍정은 밥, 일, 삶에서 나온다

 

 



체력은 필력

 



김유진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늘 작가와 작가 진행을 맡은 김유진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몇 년 전, 봄에 뵌 적이 있어요. 지방에 행사가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잔디밭 가운데에서 하얀색 모자를 쓰고 상큼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경자 좋은 모습을 기억해 줘서 고맙습니다.

김유진 잘 지내시는지요. 몇 년 만에 뵙는 것 같아, 근황을 여쭙고 싶습니다.

이경자 『빨래터』라는 소설을 끝냈어요. 작품이 제 손에서 떠난 것은 1월 말경이고, 마지막 교정 본 것이 2월 중순 정도고, 책이 나온 것이 2월 말이에요. 책 나오고 나면 한 달 정도 여기저기 인터뷰하잖아요. 그런 것 하고 조금 쉬면서 다음 작품 생각하고 있죠.

김유진 책을 한 권 끝내고 나면 기분이 남다르실 것 같아요.

이경자 유진 씨가 몇 년생이라고 했죠?

김유진 81년생이요.

이경자 제가 73년에 등단을 했으니까 유진 씨 태어나기 7~8년 전에 소설가가 됐잖아요. 그러고 나서 대충 30권 정도의 책을 냈으니, 지금은 처음 같지는 않아요. 이제는 건강을 살펴서 다음 작업에 들어가도록 몸을 만드는 것에 신경을 쓸 뿐이죠. 나이가 쉰이 넘으니까 작품 하나에 소모되는 에너지라는 것이 뼈에서 기름이 짜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소설가는, 특히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는 체력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유진 저도 예전에 한 잡지에서 소설가들이 몸을 만들기 위해 규칙적으로 조깅을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이경자 몸이 굉장히 중요해요. 예뻐지고 날씬해지려고 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쓰기 위해서 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예술은 기본적으로 사랑이다

 

김유진 선생님의 근작 『빨래터』를 읽고 나서 확연이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어요. 『빨래터』는 표지에도 나왔다시피 박수근 선생님의 예술정신,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미워하고 멸시하던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림만 그리면서 정작 그 그림으론 가족의 생계를 해결할 수 없던 박수근의 고뇌와 그런 아버지를 경쟁자 같은 느낌으로 멀리하던 아들의 갈등이 중요한 축인데요. 아버지의 그늘에 있던 아들이 아버지가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뒤에 비로소 조금씩 아버지의 예술세계와 그 정신이며 가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요. 선생님은 박수근의 그림을 단순히 묘사로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몸체, 문체 자체를 박수근화 시키려고 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굉장히 정갈하고 아주 소박하고 어떤 수사도 없이 짧지만, 굉장히 따뜻하다는 느낌의 문체가 박수근 선생의 그림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소설에서 항상 강조하시는 것처럼, 선함이라는 것들이 따뜻함을 불러오는 것 같았고요. 소설 『빨래터』에 대해서 좀 듣고 싶습니다.

이경자 박수근이라는 분이 돌아가신 지 50년이 넘었고, 예술적 평가가 완성된 예술가를 소재로 삼는 것은 소설가로서 다소 무모한 짓이에요. 제가 우선 그림에 대해 무식한데 박수근을 쓰려고 했던 것은 그 아들, 소설적인 인물이 생존하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빨래터』는 전기나 평전하고는 달라요. 전기나 평전을 쓰려고 했으면 취재를 하는 방향이 달라졌을 거예요. 박수근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취재하고 자료를 검토했어야겠죠. 하지만, 이것은 ‘박수근이라는 화가가 있다. 그에게는 상처받은 아들이 있다’라는 사실을 가지고 소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사실적이고 현실적이고 인간의 인과, 운명의 인과가 맞아야 되죠. 그래야 허구의 세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구요. 그래서 취재를 간소하게 하고, ‘박수근이 있었다, 이런 그림을 그렸다, 이런 사람이다, 그에게 이런 가족이 있고 아들이 있다’ 이런 큰 것을 가지고 그 사이 빈 곳들을 제가 상상으로 채워 나가기 시작한 것이죠. 박수근을 쓰고 싶었던 것은, 지금 이 시대가 ‘천박하고 웃기는 시대’라고 생각하던 내게 그것을 반대로 드러낼 수 있는 소재였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쿨’한 것, 차가운 것, 냉정한 것이 멋있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것이에요. 찬바람이 불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죽어요. 따뜻한 것이 생명을 살리잖아요. 예술은 기본적으로 사랑행위라고 믿어요. 사랑에 대한 깊은 믿음이 없으면 문장 하나도 살아 숨 쉬게 할 수 없어요. 사랑 없이 만든 문장은 장식이랄까요? 장식은 살아있는 것을 돋보이게 할 수는 있어도 숨쉬기는 아닙니다. 숨 쉴 수 없으니 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박수근 선생님의 그림을 보면서 그 따듯함과 시공간이 지나도 생명감이 여전한 화풍에 사로잡혔어요. 박수근 선생님이 쿨한 것을 멋이라고 생각하는 뒤집힌 시대, 뒤집힌 사회에서 구원이나 위로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지요. 그분이 가지고 있는 선함과 진실함, 또 선함과 진실함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눈도 돌릴 줄 모르는, 세속적으로 생각하면 무능력하고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것이죠. 더 나아가, 그런 삶을 살고 예술을 창작하면서 그 주변의 가족들이 갖는 고통을 넘어야 하는 슬픔 같은 것에 제 소설가로서의 마음이 닿은 것입니다.

김유진 작가의 말에 보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되는 문장이 나옵니다. ‘자연스러움은 가장 편안한 것이고, 편안한 것은 진실한 것이며, 진실함은 소박함이며, 소박함은 순박이고 순박은 사랑이다.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 이런 문장이 나오는데, 그것이 이 책 안에 전반적으로 녹아 있는 듯합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유일한 여자가 박수근 선생의 부인인데, 부인만 하더라도 이 사람은 항상 자기 남편을 인정해 주고 어려움을 보듬어 주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태도와 한결같이 그 옆에 있어 주는 어머니의 태도에 대해서 불만이 많고 이해하지 못하지요.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나이가 되도록 늙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 아주 긴 성장소설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본질적으로는 따스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던 것 같구요. 그 과정이 굉장히 아름다웠습니다.

이경자 저도 예술가잖아요. 아이를 낳아서 기를 때 제가 소설을 쓰고 있으면 아이들이 자꾸 저한테 엉기려고 해요. 제가 나가라고 하고 화내고 그래요. 지금은 노트북으로 쓰지만 옛날에는 손으로 썼잖아요. 애들이 나가 놀다, 엄마가 궁금해서 들어와 보면, 제가 심각하게 어떤 장면을 쓰고 있는 거예요. 분노하는 장면도 있고 슬픈 장면도 있고 누구를 그리워하는 장면도 있을 거예요. 제 표정이 당연히 이상해졌겠죠. 엄마 보고 싶어서 왔다가 “엄마 얼굴이 왜 그래” 이러는 거예요. 제가 그때 아이들의 슬픈 마음과 크고 작은 소외로 상처받았을 것이라는 걸 깊이 헤아리지 못했어요. 그런데 박수근을 쓰면서 이해했어요. 박수근 선생님이 다섯 살 먹은 자기 장남을 열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 앉으라고 해요. 다섯 살 먹은 사내아이를 앉으라고 하고 다섯 시간 동안 아들을 그린 거예요. 1분도 참지 못하는 아이를. 그리고 아버지가 아이를 그릴 때, 틀림없이 노려봤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다섯 시간 동안 아버지가 자기를 노려봤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신적으로 외상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 부분도 제가 이 소설을 쓰는데 도움이 되었어요. 다섯 살 먹은 아이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아버지가 자기를 학대한다고, 내면에 분노를 간직하게 됐겠지요. 어떻게 다섯 살짜리 아들이 화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겠어요. 거기서 받은 상처가 있을 거예요. 우리 아이들도 이런 상처가 있는 겁니다. 엄마가 끝없이 나가 놀아, 조용히 해, 가만히 앉아 있어, 이럴 때 제가 소설 쓰기 위해서 그런 것이거든요. 아이가 미워서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 역시 그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둘째 아이가 아홉 살 때 ‘나는 외롭게 자라났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자서전’을 썼어요. 물론 아주 짧고 초등학교 입학으로 끝나는 자서전이긴 했지만요. 그 글을 제가 읽었어요. 몰래 봤지요. 지금 제가 간직하고 있습니다. 큰아이도 그랬어요. 열 살 때, ‘나는 엄마가 싫다. 내 동생도 나와 같다’는 글을 자기 학교 교지에 실었어요. ‘우리엄마’라는 제목으로요. 그것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무언가 끊임없이 혼자만의 일을 하고 있는 부모를 둔 아이들의 분노와 소외와 슬픔과 사랑이 있을 겁니다. 저의 그런 경험 덕분에, 박수근 선생님과 아들의 갈등을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예술가가 자기 작업을 하는 동안 예술 세계는 또 현실과 다른 세계잖아요. 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이 갖는 슬픔과 불화들이요. 다만, 그의 부인은 박수근을 사랑했기 때문에 존중하고 이해하고 그의 작품에 모델이 되었던 것이겠죠.

 

 

생생한 소설을 위해 나는 전투적이다

 

김유진 선생님 따님들은 선생님을 이해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나요.

이경자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죠.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니까 엄마를 이해하게 됐어요. 엄마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지고 지금은 엄마를 ‘존경한다’고 그래요. 여성으로서, 소설가로서. 소설가라는 직업이 얼마나 가혹한 직업인가를 알게 되었구요. 자기네들은 절대로 안 한다고 해요. 더군다나 취재도 어마어마하게 하니까요.

김유진 취재 얘기를 하시니까 제가 『빨래터』를 읽으면서 떠오른 소설책이 한 권 더 있었습니다. 『계화』라는 소설책이었어요.

이경자 제가 아주 유명한 무당 김금화 선생님을 좋아해요. 처음엔 같은 성직에 종사하면서 타종교인 스님, 신부님, 목사님과 달리 여전히 사회적 천민인 무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왜 무당은 그런 천민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게 될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접근했지요. 굿의 서사성과 총체적 제의와 연희, 무가가 지닌 빼어난 문학성에 사로잡혔어요. 처음엔 무당의 일대기를 써보고 싶었는데 그게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무당이 되는 형식인 ‘내림굿’을 쓰려고 공부했어요. 내림굿을 통해 평범한 인격이 신과 소통하고 인간의 고통과 소통하는 중간자로서의 새로운 ‘인격’으로 변화하는데 그 과정이 슬프고 아름답습니다. 그걸 취재하는 일은 쉽지 않고 굿을 이해하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아요. 굿에는 인류사와 역사와 사회모순이 중층적으로 쌓여있으니까요. 그런 먼지들을 뚫고 들어가 내림굿의 순수성을 드러내 보이려고 욕심을 낸 소설이 『계화』입니다.

김유진 내림굿 의식의 과정을 아주 지난하고 세세하게 그리셨는데, 무당이라는 존재가 인간을 치유하고 한 개인에게 위로를 준다는 것의 저변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가 인간에 대한 사랑이 되고요. 결국 그 점에서 예술가와 예술 작품의 목적성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고 느껴졌어요. 『계화』에서 어렴풋이 드러난 예술에 대한 생각들이 『빨래터』에서 더욱 구체화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계화』는 굉장히 쓰기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이경자 계화를 끝낼 때까지 20여 년이 걸렸습니다. 이제는 굿에 대해서는 완전히 졸업을 했어요. 무당이라는 게 사회적으로 비천한 계급이잖아요. 우리 아버지가 목사님이다, 우리 오빠가 신부님이다, 집안에 출가한 스님이 계신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 할머니가 무당이다, 우리 이모가 무당이다 이런 말은 아직도 하기가 쉽지 않아요. 무당의 본질은 신과 소통해서 불행한 사람을 위로해 주는 일을 하는 것이거든요. 무당이 되기 위해서 긴 과정이 있습니다. 내림굿은 입문식에 지나지 않고 그 뒤 혹독한 수련기를 거쳐야 해요. 수련기가 길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는데 그 기간에 정리되는 것 같아요. 우스운 건 요즘,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 ‘인스턴트’를 인정하는 세상이니까 무당들도 혹독한 시련기를 생략하는 경우가 있는 듯해요. 무당에 대해, 그리고 굿에 대해 일반인들이 모르기 때문에 숙련과 비숙련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해서 그런 유통이 가능하겠지요.


김유진 선생님 소설에는 치열한 취재를 하는 것이 굉장히 많아요.

이경자 『빨래터』를 쓸 때는 제가 박수근이 된 상태고, 김복순을 쓸 때는 김복순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소설들을 수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너무 실감나게 썼다구요. 매춘 여성을 소재로 해서 쓴 소설은 마치 제가 매춘을 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취재를 많이 한 결과죠.

김유진 굉장하네요. 선생님께서는 규칙적으로 많은 책을 쓰셨습니다. 그 과정이 꼭 전투처럼 느껴지는데요.

이경자 글만 쓰면서 살았다고 할 수 있어요. 아이 낳고 결혼 생활할 때는 2~4년에 하나씩 썼고. 혼자되고 나서는 1년에 한 권씩 쓰죠. 그러니 몸이 다 망가졌죠.

김유진 선생님이 쓰신 책이랑 발행 연도를 한번 적어 봤어요. 거의 2년 주기더라고요. 그 사이사이 에세이도 쓰시고요. 정말 대단한 작업이구나 생각했어요.

 

 

문장으로 새긴 한국여성사

 

김유진 제가 선생님 책을 근작부터 역순으로 짚어보았어요. 『계화』에서 드러난 여성성의 긍정성과 아름다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성 문제에 천착한 시기가 나옵니다. 『절반의 실패』가 대표적이죠. 저는 그 소설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지금은 사회가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이십 년 전 소설인데 아직도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 놀랐어요. 이십 년은 굉장한 시간이잖아요.

이경자 저는 스물아홉 살에 결혼하고 서른에 애를 낳았어요. 등단은 스물여섯에 했고요. 결혼하기 전에는 건방진 여자였어요. 여성이면서 다른 여자를 멸시하는 여자였어요. 다른 여자하고 말도 안 하고 남자들하고만 놀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남자와 여성이 다르다, 생물학적으로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다름, 제도화된 것의 문제를 발견했어요. 그리고 제가 결혼 생활을 해 나가며, 너무나 많은 모순을 겪었지요. 『절반의 실패』는 서른다섯부터 준비해서 쓰기 시작한 것인데, 여성들의 삶의 현실을 열두 개의 상황에 맞춰서 쓴 소설입니다. 그것을 쓸 때는 제가 분노로 가득 차 쓴 소설이에요. 이십 년 전에 제가 분노로 소설을 썼다면, 이십 년 후 『빨래터』는 사랑으로 쓴 소설이라는 것이 다른 점이겠지요. 그만큼 분노로부터 사랑으로 오는 과정에서 제가 겪은 산전수전은 이루 말할 수 없고요. 저는 사랑은 두 가지 모순된 상황이 있다고 생각해요. 늘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 늘 욕하면서도 사랑인 경우가 그것이에요. 『절반의 실패』는 이 불공평한 사회, 남성과 여성 사이에 제도화되어 있고 인습화되어 있는 불공정함 속에서 불행이 싹튼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슬픔이나 소외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런 문제에 대한 인식을 사회에 발언하는 것이 작가의 사회적 임무라는 것이 그때의 생각이었어요.

김유진 굉장히 단도직입적인 소설이에요.

이경자 이것은 이렇다, 이것은 이래서 문제다. 예를 들면 이혼이라는 범주가 있잖아요. 소설을 쓴 그 당시 팔십 년대 초만 하더라도 지금하고 가족법이 달랐어요. 이혼의 이유나 조건은 남편이 만드는데 그 이혼 때문에 받는 피해와 고통은 아내의 것이었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내가 일을 한다, 딸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집안의 흉이자, 아버지의 흉이었어요. 아내가 밥벌이를 하는 것은 남편의 수치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여자들은 일하면서도 굉장히 죄책감을 느꼈어요. 그런데도 막상 그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남편은 싫어하는 거예요. 소설은 그런 이중 구조와 허위의식 같은 것들을 보여 주는 거죠. 남녀 관계의 불공평, 가정 폭력, 혼인빙자간음과 같은 문제들을 소설에 그려냈죠. 사실 당시, 아주 가부장적인 문단 풍토에서 ‘이건 소설도 아니다’라는 식의 많은 폄하와 공격이 있었기도 했죠.

김유진 대신에 많은 응원도 있었겠어요.

이경자 물론 굉장한 응원도 있었습니다. 제 손이라도 잡아 보고 싶어 하는 여성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저한테 그런 소설 쓰라고 하면 못 써요. 우선 기운이 없어요. 에너지가 없어요.

김유진 지금은 다른 에너지를 갖고 계시니까요. 요즘 시대는 어떻게 느끼시나요. 조금 나아진 것 같나요.

이경자 일단, 여성들이 운신할 수 있는 마당이 넓어졌어요. 그 넓어진 것만큼 여성이 책임을 져야죠. 저는 어려서부터 글을 써 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누구에게 의존하고 살아 본 적이 없어요. 물론 어렸을 때 아버지 어머니께 의존한 적은 있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늘 자립적으로 살았어요. 결혼해서도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았거든요. 다시 태어나면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전업 주부에요. 남자에게 의지해서 한번 살아 보고 싶어요. 그런 것을 못해 봤기 때문에요. 물론 조금 지나면 곧 싫어지겠지만요. 자립적으로 산다는 것은 힘들고 고독하지만 자기 존엄성을 지킬 수가 있어요.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그에 맞춰 살아가는 일 역시 피곤하고 굉장히 비굴할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떤 때는 잠시 동안 그렇게 살아 보고 싶기도 해요.

김유진 누구보다도 여성 주체로서의 글쓰기에 대해 많은 사유를 하셨어요. 그런데 종가집의 맏며느리였다고 들었어요. 소설가와 며느리 사이의 갭이 굉장히 크셨을 것 같아요. 거의 투쟁에 가까웠을 듯한데요.

이경자 제가 결혼 생활을 28년 했어요. 가부장제 사회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1부 1처제를 통해서 자기 보호막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았지요. 결혼 생활에서 남편이나 시댁이 있다는 것들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보호막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신용 카드 같은 거죠. 소설 쓰면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어마어마하게 애를 썼어요. 그 노력을 다른 데 했으면 사시에 몇 번 합격했을 것 같아요. 제가 소종가의 맏며느리였는데, 28년 동안 한국의 봉건적 가부장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충분히 체험했죠. 그 과정에서도 결혼 생활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김유진 소설쓰기는 인간을 직시하고 분해하는 냉정한 작업인데, 가족 사이에서는 전혀 다른 역할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그 둘을 함께하는 것에 굉장한 갈등이 있었을 텐데요.

이경자 어마어마한 고통을 요구했지요. 그러나 가정이란 지킬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혼자 산 지 6년 되었는데, 남편이란 존재를 중심으로 한 관계망이 없으니까 소설에 더 많이 신경을 써요. 그러나 쓸쓸해요. 자유롭되 쓸쓸한 거예요. 지지고 볶을 게 없으니 더 많이 소설에 매달려요. 그러니까 소설가 팔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소설을 쓰라고 이런 팔자를 타고났나보다 하구요. 우리가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라서 월북을 했다, 그러면 작가에게 소설적인 숙제가 되어서 삶도 그런 데 연관되어서 좌편향이 되든 우편향이 되든 하잖아요. 저는 여성으로 태어나서 학대받은 어머니, 외할머니, 시어머니, 그런 여성들 사이에서 자라나, 여성이라는 역사적 현재, 이런 것을 체험한 것이 저의 숙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여성과 남성의 관계, 가부장제를 남들보다 더 신경 쓰고, 더 많이 공부하고, 문학적 소재로 선택해서 형상화시키는 것 자체가 제 숙명 같아요.

 

 

좋은 소설은 평범한 삶에서 나온다

 

김유진 등단을 빨리하셨어요. 26살에 하셨으니 젊은 나이에 하셨는데, 그때 작품을 보면 지금과 굉장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같은 20대라 그런지, 그 작품들이 공감이 더 잘되고 재미있기도 했어요. 문장도 간결하고 아주 냉정하고 진지해요. 허리를 꽉 죈 트렌치코트를 입은 멋쟁이 아가씨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등단하셨을 때 어땠을까 궁금합니다. 강원도에서 올라와서 대학에 들어가고 문우들과 소설을 쓰고, 등단을 하고 하는 과정이요.

이경자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소설을 많이 썼어요. 직업 작가는 스물여섯 살에 됐지만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소설을 썼어요. 제가 열여덟 살인가, 숙명여대에서 모집하는 전국 여고생 단편 공모전이 있었어요. 거기에 공모해서 입선을 했는데 몇 달 전에 그 소설을 찾아서 읽었어요. 열여덟 살에 쓰고 거의 50년 만에 제 소설을 다시 읽었어요. 요새 성장 소설을 쓰려고 준비하기 때문에 그 당시에 내가 어떤 생각을 했나, 궁금해지더군요. 너무 웃기더라고. 그 소설을 보면 이 작가가 앞으로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질까 하는 것이 느껴져요. 강원도 양양이 아주 작은 소읍이에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3학년 전체가 32명이었어요. 그러니까 학교 선생님도 배정이 잘 안 됐어요. 그러니까 누가 저한테 글 쓰는 것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어요. 그때 어떻게 그런 상상을 했을까 놀라웠어요. 제가 응모했을 때 김동리 선생과 강신재 선생이 심사를 하셨어요. 그분들이 이 학생을 꼭 시상식에 오라고 하셨다고 했어요. 숙대에서 직접 학교 교장에게 전화를 해서 저를 서울로 오라고 말이지요. 학생이 썼는지 어른이 썼는지 확인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소설에는 종교의 위선도 있고, 교사들의 무능과 불성실, 어머니와 딸의 갈등, 기성 질서에 반항하는 사춘기 소녀가 있더라고요. 지금의 저는 기억도 잘 안 나는데 말이에요. 그런 소설을 쓰다니. 어려서 노래를 잘한다거나 공부를 잘한다거나 웅변을 잘하든가 했으면 다른 재능도 있었을 텐데, 오로지 글만 썼기 때문에 제 재능에 한눈을 팔 수가 없었어요. 저는 열아홉 살에 서라벌예술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갔어요. 저는 당연히 열아홉 살에 신춘문예에 당선될 줄 알았어요. 시골 벽촌에서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기 때문인지, 제가 잘났다는 생각에 금방 소설가가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해마다 떨어지는 거예요. 열아홉에서 스물다섯 살까지. 제 친구 중에 시인이 한 명 있는데, 절 보고 이러더군요. ‘네가 신춘문예에 떨어지는 것은 글씨체가 안 좋아서 그러는 것 같다’구요. 자기가 써 주겠대요. 그이는 숙명여고 다닐 때 이화여대 전국 여고생 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친구였어요. 서라벌예대를 다녔는데, 제 작품을 자기가 써 주겠다더군요. 그 다음해 신춘문예 당선하지 못하면 죽을 각오를 하고 단편소설 다섯 편을 썼어요. 동아, 조선, 중앙. 그중 한 곳에는 두 편을 넣은 것 같아요. 그리고 한 편은 그 친구에게 써 달라고 했어요. 그것을 서울신문에 냈어요. 그곳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서울신문에서 연락이 왔어요. 상금이 20만원으로 그중 제일 많았지요. 그 친구에게 명동에서 구두를 한 켤레 해줬어요. 아직도 그 은혜를 잊지 못해서 지금도 책이 나오면 그 친구에게 감사를 전하지요. 지금도 제가 가는 곳마다 얘기해요. 그 친구가 글씨를 안 써 줬으면 계속 신춘문예에 떨어졌을지도 모르죠. 제가 문학 공부를 할 때만 하더라도 전후에 훌륭한 소설가도 많았어요. 지금은 다 잊혀진 1950년대, 60년대 활동하신 한국 작가들이 많았어요. 그분들 소설도 읽었지만 저의 작가로서의 열등감과 작품 경향에 영향을 미친 것은 다 불란서 소설, 일본 소설이에요. 특히 전후 일본 소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지요. 아주 감상적인, 감수성을 기반으로 한 감각적인 소설을 쓰는, 문체와 분위기가 중심이 되는, 비사실주의적인 경향에 많이 노출되어 있었지요. 그리고 그것들에 열등감이 있어 본받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죠. 제가 신춘문예 당선된 것은 비발디 사계를 주종으로 깔고 쓴 소설이었어요. 그때가 감각이 절정이었어요. 바이올린이나 비올라의 선율 같은 예민함이요. 그런 감각이 문학적으로 극단으로 치달으며, 거기서부터 방향이 전환되기 시작했어요.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죠. 작가는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글을 써야 한다. 그러면서 사회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고 결혼도 했어요. 연애만 하면서 소설을 쓸 거라 다짐했는데, 소설가는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아야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인간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 속에서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결혼도 했죠. 그런 각성들이 결국은 『절반의 실패』를 쓰게 했죠.

김유진 그 시절, 어떤 작가들을 좋아하셨나요.

이경자 제일 좋아한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에요. 예전에 제가 소설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목표가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이었어요. 문학의 목표가 문학상이라니, 전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자기 문학이 도달해야 할 정점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시절에 내가 되고 싶은 소설가는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소설가라고 생각했지요.

김유진 지금은 어떠신가요.

이경자 그것은 지금도 여전해요. 요즘, 복수에 관한 드라마가 있더라고요. 선량한 얼굴을 하고 나쁜 짓을 하는 인간들 말이죠. 이런 인간형이 도스토예스키 소설에 이미 다 나와요. 모든 인간성의 백과사전 같아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라든가 『악령』이라든가 한 권을 씹어 먹듯이 읽으면 한 달 걸려요. 사춘기 때 그런 식으로 공부를 했죠. 물론 문학의 최고 지향점은 도스토예스키 같은 소설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당장 먹기 달콤한 것들, 일본 소설들 중에 재미있는 것이 많아서 즐겨 읽었죠. 그러나 문학적 뚝심은 도스토예프스키에요. 감각적으로는 그렇게 하지만 밑바닥에서 저를 소설가로 지켜 주는 수호신이나 지향점, 기둥은 도스토예프스키죠.

 

 

남존이든 여비든 다 억압이다

 

김유진 이전 소설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치 상태로 그려지는 것이 많았어요. 굉장히 전투적인 자세로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것을 사랑과 부드러움으로 감싸 안는데 도달하기까지 선생님의 문학적 과정이 느껴지는데, 돌아보시니 어떠신가요.

이경자 『절반의 실패』를 쓸 때는 분노, 남성에 의해서 피해 받는, 예들 들어 자기가 바람나서 외도하고 와서 아내가 바람난 것을 안다면 남자가 두드려 패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제가 35살 때는 그런 면만 본 거예요. 그런데 마흔다섯이 되니까, 왜 저 남자가 여자를 팰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죠. 남자의 입장을 바라보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쓴 소설이 『사랑과 상처』예요. 『사랑과 상처』는 남존여비를 다룬 소설이에요. 남존여비란 남녀 모두에게 억압이 되지요. 남존은 남성에게 억압이고, 여비는 여성에게 억압이에요. 남성에게는 과도한 존엄의 억압이죠. 남자는 무조건 잘나야 된다는 것처럼. 여성은 남자보다 잘나면 안 된다는 비하가 억압인 것이고. 일제 식민지부터 1960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될 때까지의 우리 역사 속에서 녹여 봤어요.

김유진 선생님 작품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사랑인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도 사랑, 연애, 이런 것이 영감이 되는지. 작품 속에서. 젊은 시절의 연애나 사랑이 어떤 식으로 영감으로 작용하는지 궁금해요.

이경자 제 작품 중에 「꼽추네 사랑」이라는 중편소설이 있는데 이것 좋아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제가 「꼽추네 사랑」을 쓸 당시, 제 남편이 그렇게 외도를 하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나서 ‘이게 바로 사랑이다’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여자를 찝쩍거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그 작품을 썼어요. 꼽추니까 몸이 불편하잖아요. 제가 그 소설 취재할 때는 눈에 꼽추만 보였어요. 꼽추인 사람을 사귀어서 등도 만져 보고 잘 때는 어떻게 자는지 앉을 때는 어떻게 하는지 취재를 했죠. 이 착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사창가에서 도망 나와 붙잡힌 매춘 여성을 보죠. 그 여자를 구해 주려고 자기가 가진 전 재산인 배를 팔아서 빼 줘요. 그래서 둘이 같이 살면서 정말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려 했어요. 그런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이를테면 『천개의 아침』 같은 거죠. 『천개의 아침』은 불행한 남자와 또 불행한, 불행을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어떤 여성의 사랑이죠.

 

 

밥이 되는 소설을 써라

 

김유진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면 치열함, 전투와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요. 선생님이 예전 인터뷰에서, 소설은 커피 값이 되려고 쓰는 것이 아니라 밥값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의 문학관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젊은 소설가들에게는 일침이 되지 않나 싶어요.

이경자 밥은 먹어야 살지만 커피는 안 마셔도 살아요. 밥을 먹고 소설을 쓰는데 밥을 먹여 주는 것이 독자들이에요. 소설책 한 권이 만 원이거든요. 만 원이면 설렁탕도 한 그릇 먹을 수 있고 삼계탕도 먹을 수 있어요. 너무 기운 없을 때 삼계탕 먹으면 힘이 나거든요. 그러면 삼계탕 한 그릇 값은 이 소설이 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삼계탕 한 그릇 값을 할 수 없는 소설은 빚지는 소설이죠. 독자들의 삶에요. 이것을 읽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해요. 이게 제가 문학을 하는 자세예요. 제가 다섯 장짜리 글을 쓰든 2,000매 글을 쓰든 이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물론 그 생각이 제가 어려서 미숙하게 드러날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책값에 내 소설을 산 분에게 그 값어치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들 들어 박수근의 ‘빨래터’라는 45억짜리 그림은 부자 한 사람이 사고 소유해요. 그러나 이 소설은 설렁탕 한 그릇, 삼계탕 한 그릇 덜 잡숫고 사는 거라고요. 아주 서민적이죠. 내가 쓴 소설을 읽고 소설이 가진 값만큼 독자에게 줘야 한다는 거예요. 삼계탕 한 그릇을 먹으면 그게 피와 살과 뼈로 가듯, 내일도 기운이 나고 10년 후에도 좀 기운이 나는, 10년 후에 읽어도 좋은 소설이 돼야죠. 이게 제가 소설을 쓰는 기본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김유진 지금의 20대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하고, 정의를 내리기도 해요. 어떤 사람들은 88만 원 세대, 무기력한 세대라고도 하는데, 선생님이 보시기에 어떤지요.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 좀 더 구체적으로는 20대 여성들에게는 어떤 말을 하고 싶으신지요.

이경자 제 생각에, 인생은 정의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시점이 어른이 되는 것 같아요. 인생을 정의 내리려고 하지 말아야 해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일도 옳다는 확신은 아주 미숙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20대는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이죠. 20대가 60대보다 좋은 점은 회복력이 빠르다는 것이에요. 넘어져도 금방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러나 60대는 한참 걸리죠. 20대의 단점이라면, 넘어져도 금방 일어나기 때문에, 넘어진 상태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60대는 금방 일어나지 못하지만 넘어진 상태에서 자기 성찰을 할 수 있어요.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왜 넘어졌나, 이런 것들. 그런 면에서 긍정이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데요. 나는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겠어, 이렇게 결심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긍정은 밥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일, 삶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죠. 마치 물에 열을 가하면 끓듯이 삶 속에서 긍정이 나오죠. 어떻게 긍정의 에너지가 있는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만일 소설가라면 그런 고민을 통해서 소설을 쓰기 바랍니다. 이게 제가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예요. 그래야 그 소설 속에 인생이 담기고 삶이 담기고 인간성이 담기는 거예요. 작가의 목소리만 있고, 소설의 인물은 보이지 않는 소설을 쓰면 안 된다는 게 젊은 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예요.

김유진 귀감이 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이경자 고맙습니다.

김유진 오늘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뵈니까 저도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아요.

 

 

 

이경자  1948년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했다.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19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확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종가집 맏며느리로 가사와 소설 쓰기를 병행하며 그 어느 작가보다 여성 문제에 관해 고민, 1988년 소설집 『절반의 실패』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작품은 금세 독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작가 스스로 대한민국이 들썩거렸다라고 표현을 할 만큼 커다란 이슈를 일으킨다. 그간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던 사회적, 윤리적, 인습적인 여성차별을 정면으로 고발, 수많은 여성들의 지지를 얻으며 인기작가로 자리 매김 하게 된다. 소설가는 커피값이 아니라 쌀값을 해야 한다는 문학적 신념으로 갓 등단한 후배들 못지않은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통해 언제나 ing형 작가로 불리고 있다. 산문집으로 『모계사회을 찾다』 『남자를 묻는다』  『딸아,너는 절반의 실패도 하지 마라』가 소설로는 『절반의 실패』 『사랑과 상처』 『황홀한 반란』 『사랑과 상처』 『정()은 늙지도 않아』 『그 매듭은 누가 풀까』 『계화(桂花)』 『천개의 아침』 『귀비의 남자』 『빨래터』 등이 있다. 올해의 여성상(1990)과 제 4회 한무숙문학상(1999)을 수상했다.

 

 

김유진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04년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그후 프랑스에서 문학과 어학 공부를 병행하였다. 동화 번역서 『마마의 성을 습격하라』 와 최근 발간된 첫 창작 소설집  『늑대의 문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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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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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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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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