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내 취미는 반항이다

  • 작성일 2008-09-30
  • 조회수 4,024

 

내 취미는 반항이다




김사과




나에게 반항하는 인간에 대한 최초의 이미지는 영원히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이다. 다시 굴러 떨어질 게 분명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저주를 받은 불쌍한 시지프 말이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었고, 그게 내 사고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 책은 한동안 내 삶의 바이블이었다. 나는 ‘시지프’라는 캐릭터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는 인간이라는 한계에 대한 반항 그 자체였다. 고결하고 우아했다. 카뮈는 그런 반항 정신을 몹시 사랑했는지 나중에는 아예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하였다. 나는 순전히 그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그 책을 샀다.

그래서 그때부터인가, 내가 반항을 내 삶의 모토로 삼은 것이?

그러나 단지 반항만을 일삼는 인간은 되지 말자고 생각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때라도 말이다. 단지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자유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나 쇠사슬에라도 칭칭 감긴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것저것 재지 말고 죽도록 반항이나 해봤으면 더 좋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러니 이제라도 사실은 단지 반항만을 일삼는 인간이 돼 보고 싶었다고, 그게 진심이었다고 인정하고 싶다.

그런데 내 반항 정신과 취미 생활이 무슨 관계인가? 사실 나는 정말로 평범하게 나의 취미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누구라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이나 덧붙일 수 있는 그런 거 말이다. 사교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가벼운 이슈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 보니 나는 매사에 지나치게 진지한 인간이라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가볍게 즐기는 취미 따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글을 쓰다 보니 일단 독서는 취미에 넣기가 뭐하다. 둘째로 음악은 정말 미치도록 사랑하기 때문에 취미 따위에 넣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음악을 듣지 않으면 죽는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중단한다고 해서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면 그건 이미 취미가 아니지 않을까. 가끔은 산책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기가 좋고 풍경이 여유롭고 인적이 드물고 벤치가 많은 잘 정비된 외국의 도시에서만 그랬던 것 같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쇼핑이 남는데, 그렇다, 나는 사실 쇼핑에 대해서 쓰려고 처음부터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셔츠 한 장을 사려고 네 시간 동안 백화점 세 군데를 왕복하고 원피스 하나를 사려고 한 매장을 두세 시간 동안 헤집는 인간인데 그런 식의 행위는 취미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처절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사실 내가 쇼핑에 대해서 쓰는데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 뭐였냐면 그것은 바로 며칠 전, 팔월 이십육일 오세철 연세대 명예 교수가 사노련과 관련하여 국보법 위반으로 경찰에 긴급 체포된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취미에 대해서 써야 한단 말이지?

오세철 씨가 잡혀갈 때 내가 뭘 하고 있었냐 하면 시원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 영화 감상도 있다. 영화 감상이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취미에 가까울 것이다. 너무 심심해서 할일도 없고 그런데 책도 읽기 싫을 때 혼자 극장에 가서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면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올해 여름에는 특히 극장에 많이 갔는데, 너무 더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따위 것들에 대해서 쓸 수가 없다.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늦은 밤 텅 빈 영화관에서 싸구려 영화를 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에 대해서라면 우리의 경찰은 전혀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안전한 것이라면 취미로 적합할 것이다. 한편 나이든 마르크스주의자가 혁명적 노동자 정당을 꿈꾸는 것은 그런 안전한 취미에서 가장 먼 것인 것이다. 그것은 아주 위험하다. 이십일 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그렇다고 한다. 심지어 경찰에 긴급 체포당해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 경찰의 존재 목적은 한 사회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혁명적 노동자 정당을 꿈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사회에 위험하다는 것인가?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진짜 진지하게 하는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그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내 눈에는 혁명적 노동자 정당을 꿈꾸는 마르크스주의자보다는 경제 지표를 좋게 만들기 위해 거품이 낀 부동산 시장을 인위적으로 부양시키는 정부 공무원들이 훨씬 더 위험해 보인다. 왜 그들은 잡혀가지 않는가?

노동자를 사랑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위험할 정도의 사회라면 그 사회에서 위험하지 않을 것은 없다. 그리고 그건 그 사회의 지배자들이 믿고 싶은 것처럼 그 사회가 지나치게 깨끗하거나 도덕적이라서가 아니라 그 사회가 지나치게 허약하고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사소한 꽃가루도 병든 사회에는 치명적인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병든 사회는 공포에 잠식된다. 그런 약해빠진 사회라면 한없이 안전한, 쓸데없는 것인 영화 감상도 범죄가 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내일 밤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영화를 보다가 잡혀갈지도 모른다. 이유는? 나는 모르지만 그들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공포 사회에서 취미 생활이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대해서 쓸 수 없다. 차라리 나는 취미를 거부하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다. 내 취미는 반항이다. 나는 이 따위 납득할 수 없는 일을 일으키는 이 사회에 반항하겠다. 그게 나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다.《문장 웹진/2008년 10월호》


추천 콘텐츠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 , , 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 wikisoft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 wikisoft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 wikisoft
  • 2010-05-28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