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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꿈꾸지 못하는 겨울밤

  • 작성일 2008-07-31
  • 조회수 2,198

 

누구도 꿈꾸지 못하는 겨울밤




조기조 




겨울은 예술 속에서 종종 아름답게 그려지곤 한다. 그 아름다움 속에는 온 세상을 하얗게 은백의 세계로 덮어 주면서 포근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백설의 축제가 있다. 나에게도 그런 아름다운 겨울이 있었다. 목화송이만한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려와 강물 속으로 스러지는 모습을 고향의 강둑에 서서 바라보며 울면서 술을 배우던 소년 시절이 있었다. 또 한국에서 가장 추운 경기도 북부 어느 소읍에 잠시 머물면서 무릎이 빠질 정도로 쌓인 눈길을 한 여자를 업고 귓불에 얼음이 박히는 줄도 모르고 밤새 걸었던 청년 시절이 있었다. 이제 소년은 중년이 되었고, 여자는 떠났고, 아름다움은 추억일 뿐이다.

 


그러나 겨울에서 하얀 눈을 제거하면 어떤 아름다움이 남을까. 자연 속에서 모든 식물은 생장을 멈추고, 동물 또한 맹수들조차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 움츠리고 잠을 자는 겨울이 드러난다. 그렇듯 모든 생명체에게 주림과 추위의 고난 속으로 이끄는 것이 곧 겨울이다. 이러한 겨울이면 솔잎, 솔방울, 죽은 나무 삭정이 등 땔감을 주우러 산속을 헤매고 돌아와 고구마로 저녁을 때우고 연거푸 신트림을 해대던 소년 시절이 있었다. 하여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보다 농사를 일 년에 세 번씩 짓는다는 여름만 있다는 안남이라는 나라는 참 좋을 것이라 생각하던 긴 겨울밤이 있었다.

겨울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아직도 여름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여름나기도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어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앞에 있으니 말이다. 다만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들에게 먹고 자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충족 조건이라고 할 때 추운 겨울보다는 차라리 더운 여름이 그 기본적 조건들 가운데 하나를 그나마 수월히 이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웬만하면 타인들을 보면서 측은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나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편이니 우리들의 전통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덜된 것이 아니라 막돼먹은 인간형일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견디기 힘든 것이 있다. 추운 겨울에 노숙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막무가내로 내가 서러워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서러워 말고 도와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기에 또다시 내 스스로에게 측은해하고 마는 것이다.

IMF 첫 해 겨울, 깊은 밤에 나는 서울역 지하보도를 지나야 했다. 헌 이불이나 신문지, 종이상자 등을 펼쳐 덮고, 혹은 아무것도 덮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온기라고는 체온 밖에 없는 그곳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해 겨울 들어 수은주가 가장 낮다는 기상보도를 들은 날이었다. 거대한 지하보도가 마치 흉한 공동묘지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갈 길을 마저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한참 멈추어 서고 말았다. 발길이 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집에 돌아가는 막차를 놓치고 나도 그들 옆에 낑겨서 누워 버리고 말았다.

높다란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자니 자꾸 눈물이 흘러서 새우처럼 몸을 말아 돌아누웠다. 나는 그때 실업자였다.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은 있었지만 가족의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한참을 울다가 보니 어느새 눈물이 말라 있었다. 너무 추워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찬 서리와 바람은 피할 수 있는 지하보도라고는 하지만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한기는 온몸의 세포를 다 얼려 버리고 있었다. 내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아주 먼 데서 들려오는 듯했다. 몸이 자꾸만 굳어져서 온몸의 힘을 빼 보곤 했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개구리며, 뱀이며, 곰이며, 박쥐며, 남극이나 북극 지방에 사는 내가 아는 동물들의 이름을 하나씩 떠올려 보다가 그 추위에도 깜박깜박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을 견디다가 광장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광장의 아스팔트에 된서리가 내려 유리를 잘게 부숴서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였다. 광장에서 몸을 흔들어도 보고 뛰어 보기도 했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그때 마침 서울 역사를 멋지게 조명하기 위해 바닥에서 위로 쏘아 올리는 전등을 발견했다. 낡고 더러워진 한국 근대사를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위에다 손을 비벼 보고 걸터앉아 엉덩이를 덥히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깜깜했지만 차고 맑은 하늘이었다. 별들이 몇 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별을 바라보며 누구도 꿈을 꾸지는 못할 것 같았다.《문장 웹진/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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