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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일상

  • 작성일 2007-11-27
  • 조회수 1,991



 

  


이동하는 1967년 상자한 그의 첫 장편 『우울한 귀향』에서 자신의 문학적 생애를 지배할 만한 주요한 키워드를 화두처럼 던지고 있다.


아이가 하나, 들길을 울며 간다. 환한 대낮이다. 나는 걸음을 멈춘다. 웬일일까? 저 아이의 젖은 얼굴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그렇다. 나도 저렇게 울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나의 여행이 언제나 피로한 저녁으로 끝나 버리는 것을, 친구여, 아직은 좀더 용서해 주어야겠다. 아침마다 불안을 느낀다. 내 까칠한 이마로 밀려드는, 그 끈끈한 하루의 무게를 타액처럼 느끼며 나는 애써 몸을 일으켜 보지만, 불면(不眠)과 지나친 흡연으로 해서 오그라든 폐가 푸들푸들 경련을 한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저 어린 날의 기억처럼 그렇게 길을 가자고. 무성한 아카시아의 숲은 없을 것이다.……(중략)……그때, 내가 왜 울었던가?(『우울한 귀향』, 동서문학사,1990,242?3면)


기억은 그의 소설을 지배하는 주요한 작법의 원리가 되고 있다. 한스 마이어홉은 시간과 문학의 상관성에 대한 의미 있는 탐구를 통해, 문학적 시간은 ‘창조적 기억’을 바탕으로 현실을 재현한다는 흥미로운 현상학적 고찰을 시도한 바 있다. 작가에게 기억은 불투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 아우라적 모호성이 재현해야 할 이미지에 더 완강하게 집착하게 한다. 기억에 의존할 때 이동하는 결핍으로 특징지어지는 식민지 유년기와 전쟁의 트라우마 속으로 친숙하게 편입한다. 결핍과 상흔이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에게는 지워지지 않을 비극적 황홀로 자리한다. 그렇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은 기억의 문학이다. 적막한 봄날 대낮 “들길을 울며 가”고 있는 아이에게 기억은 불안과 추위와 피로로 끝나는 그것이며, 좌절한 자의 ‘허망한 젊음’의 벽화로 수렴된다. 그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은 유년의 기억 앞에 ‘울음’의 정체를 찾아가는 ‘우울한 귀향’에 다름 아닌 것이다.

도저한 내출혈로 저작한 궁핍한 시대의 벽화라는 점에서 『우울한 귀향』은 그의 세대가 내면  속에 간직한 순금의식의 일종이기도 하다. 삶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설 속의 여행은 이미 작정한 의식의 해방구 역할을 한다. 대학 졸업반 ‘윤’은 불투명한 미래만큼이나 현재의 심회 또한 참담한 것이고, 그 갈등은 그에게 미궁 상태인 현재적 삶의 불화를 증폭시킨다. 그에게 귀향은 그것이 불행한 과거의 추억이건 밝은 미래를 향한 약속이건 귀환하는 향수로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고통스런 기억에 대한 채무의 이행이며 마침내 작가로서의 존재 증명을 저작하는 ‘고통의 은밀한 즐김’과 유사하다.

이동하의 소설을 자세히 읽다 보면 ‘춥다’라는 어사와 ‘피곤하다’라는 술어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춥다’와 ‘피곤하다’가 그에게 주는 억압의 강도는 서사화 과정에서 어떤 심리적 반대급부로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가 특별한 시기에 경험한 삶의 상흔, 혹은 문학적 원형이라고 볼 수도 있을 터인데, 비평적 판단으로 이는 그가 이 세계에 대해 견지하는 근본적 삶의 인식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정서의 범주 속에서 작가의 글쓰기는 매우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그 진폭은 기억과 연동된 완강한 기율을 내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소설적 정의로 내세우는 개연성 있는 허구에 대한 전제를 무시하면, 그의 글쓰기는 개인적 역사에 관한 자서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게 한다. 작가의 전 소설사를 지배하는 주요한 문학적 키워드를 내장한 것으로 판단되는 『우울한 귀향』과 『장난감 도시』는 이동하적 정체성을 응축하고 있는 소설이다. 자세히 읽어 보면 후자는 전자의 두 이야기 축 사이에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는데, 그 시기는 대체로 유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는 내출혈의 기록이자 작가의 비망록 같은 인상을 준다. 특히 이 두 작품에 부여하는 의미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은 그에게 ‘문학이란 무엇이며, 글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띠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두 소설을 지배하는 정서는 운명론적 현실의 수용과 관련한 비극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운명적 허무주의나 비극적 세계인식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대부분의 소설들은 일상의 구체에 접목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일상의 미시적 관찰이라고 말해도 좋을 삶의 세목들에 대한 묘사로 일관한다. 『폭력연구』에서 엿보는 일상은 우리의 상식적 해석을 넘어서는 이동하적 실존의 한 탐구에 대한 득의의 부분이라 주장할 만하다. 이 소설의 제목이 주는 막연한 인상이나 또 작품을 읽고 난 후 바로 생각할 수 있는 문학사회학적 해석은 오독이 될 가능성을 그래서 이동하적 실존주의는 암시한다. 가령 우리가 「폭력요법」을 읽고 난 후 받는 감상은 한 폭력(과부의 아들)이 더 큰 폭력(가령 공권력)에 제압당해 길들여지는 모습을 연상하게 되는데, 그런 면에서 80년대의 시대적 의미를 그대로 대입할 만한 유혹을 제공할 수 있다. 이는 「폭력연구」에서도 유사하게 재현되고 있는데,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의 정당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폭력에 대한 이동하적 해석은 시대적 문제를 넘어선 곳에 있다. 말하자면 그는 인류에게 점증하는 폭력은 궁극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문제라는 운명론적 해석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다는 점에서 그의 소설은 폭력의 실체가 실존적 개인에게 가하는 운명적인 성찰과 관계한다. 그 성찰은 이동하적 세계인식이 글쓰기를 통해 암시하는 허무주의의 일종이다. 

이동하는 1987년에 작품 선집 『밝고 따뜻한 날』을 상자하면서 ‘나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란 주석을 덧붙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분명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는 듯싶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은 나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아직은 아무 것도 없는 기분이다. 말하자면,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아직도 대합실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고나 할까. (『밝고 따뜻한 날』,나남, 1987, 16?7면)


‘밝고 따뜻한 날’이 상징하는 표제와 달리, 비교적 담담한 이 심회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중년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무엇인가 ‘서성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실존적 불안의식이다. 그 존재론적 자기 확인은 반복하여 말하면 ‘춥다’와 ‘피곤하다’로 압축되는 유년의 기억에 대한 지속적 환기와 다른 것이 아니다. 『문 앞에서』(1998)에 실려 있는 14편의 소설들이 한결같이 보여 주는 것은 일상에 스며든 작가가 세계를 향해 대화하기를 희망하는 이동하식 만화경이다. 그러나 그 만화경 속에서도 엿볼 수 있는 모티브는 잠재된 작가의 유년기적 이미지들에 대한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서 여러 인물들은 과거의 그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물적 기초 위에 서 있다. 그러나 항용 그의 소설들이 그러하듯 고요한 일상의 틈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의 정체를 작가의 인물들은 독자로 하여금 환기시키게 한다. 「지붕위의 산책」의 ‘성문’이 그러하며, 「성가신 죽음」의 ‘김씨’의 죽음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그렇고, 「땀」의 노인의 죽음이 그런 의식을 은밀하게 보여 준다. 작가는 그것을 일상의 미시적 관찰을 통해 독자들에게 역으로 환기시킨다.

최근 이동하는 『우렁각시는 알까?』(2007)라는 창작집을 통하여 여전히 특유의 암시를 깔면서 세계를 향해 “이제 예순을 훌쩍 넘어 마침내 정년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다. 세상은 그때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그렇게 산뜻한 풍경 대신 외려 더 스산하고 탁해 보인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 20대의 허망한 바람처럼 기왕이면 내 꿈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전업작가’로서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소설을 두어 편쯤” 써 보고 싶다는 의지를 시사한다. 그러나 이번 소설집의 「앙앙불락」이나 「담배 한 대」에서도 엿볼 수 있듯, 여전히 작가는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에고적 탐구를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문학이란 춥고 결핍된 실존으로서의 목마른 자가 하는 것이고, 그렇다는 점에서 그는 “환한 대낮에 들길을 울며 걸어가는 아이의 기억” 속에 지속적으로 갇혀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그의 문학이 앞으로 어떤 커브를 그리든 현재의 그의 문학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을 해 본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단초부터 현재까지 한결같은 작가이다. 그 완강한 트라우마적 에고가 그러나 그의 작가적 생명력의 지속성을 가능케 하는 문학적 리비도가 될 수도 있다.《문장 웹진/200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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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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