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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 작성일 2007-11-26
  • 조회수 2,851

 

사막

 

 


장유정




<등장인물>


서(逝)우진 - 男, 30대 초반

정(情)연   - 女, 20대 후반

김(金)제인 - 女, 30대 초반

도(逃)석환 - 男, 40대 초반

동(童)재천 - 男, 40대 중반

성(惺)라경 - 女, 10대 후반



<시간>


아무 시기. 아무 때.

거꾸로 돌아가는 하루.

 


<공간>


Text상의 배경은 몽골의 고비 사막이나 굳이 사실적일 이유는 없다. 다만 이 공연에는 최소 3개의 독자적인 공간이 필요하며 각 공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조명으로 구획을 나누어도 좋고, 정삼각형(무대) 안에 역삼각형(객석)을 넣어 세 개의 작은 삼각형을 연기 공간으로 사용하는 것도 좋다. 



끝-1 <한밤1> 동재천과 김제인 ; 김제인의 공간


                       텅 비고 열린 공간. 고요하고 쓸쓸한 달빛 그리고 별빛.

                       재천의 무릎에 눕혀 있는 제인, 자는지 죽었는지 움직이지 않는다.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의 것 같기도 하고 새의 것 같기도 한 소리.

                       재천, 추워서인지 손은 떨고 있으나 목소리는 차분하다.


동재천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 양도 다들 자는데…… (보일듯 말듯 김제인,

                         움직인다.) 이봐요. 이봐요. 괜찮아요? 이봐요.


                       제인, 쿨럭거린다. 조명, 어두워진다.



끝-2 <한밤2> 도석환과 정연 ; 도석환의 공간


                       랜턴이 달려 있는 텐트 하나.

                       고요하고 쓸쓸한 달빛 그리고 별빛.

                       석환과 정연, 반쯤 벗은 차림으로 모닥불 앞에 앉아 있다.

                       조명이 밝아지고도 한참의 침묵이 흐른다. 


도석환            후회하진 않아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에요.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의 것 같기도 하고 새의 것 같기도 한 소리 


               어딜 까요?

도석환           글쎄요. 여기는 워낙 텅 비어 놓아서 소리가 막힘이 없지요. 전 같으면 무서워 했을 텐데. 변했군.

              인간은 항상 변해요.

도석환           그런가?

정연              여자는 원래 그래요. 떠나오고 나서야 사방이 보여요. 그런 걸 두고 깨달음의 거리라고 하죠.

                      (사이) 난 항상 진짜를 기다렸는데……. 진짜가 진짜와 가까울수록 겁이 나요.

도석환          (사이) 아까 당신 지갑을 봤어요. 재미있는 게 많더군. 

정연               다 버릴 거예요.

도석환           기억 안 하면 된다면서 사실은 잊어버릴까 봐 노심초사하는 건 아니고?

              여행이 좋은 이유가 뭔지 알아요?

도석환          글쎄요.

정연              쉽게 버릴 수 있다는 거죠.


                      정연, 지갑 속에서 사진들을 꺼내어 태운다. 긴 사이


               커피 있어요?

도석환           차에. (나간다.)

정연             (희미하게 웃으며) 어제는 별이 졌다네. 나의 가슴속의 별 하나. 별은 그저 별 일뿐이야. 모두들

                      내게 하지만……


                      시동 걸리는 소리.


도석환            걸렸어요. 

정연               결국 우리네요.

도석환            무슨 말이요?

정연              떠나는 사람은.


                      석환과 정연, 서로를 바라본다. 조명, 어두워진다.



끝-3 <한밤3> 성라경과 서우진; 서우진의 공간

              

                       메마른 나무 한 그루. 고요하고 쓸쓸한 달빛 그리고 별빛.

                       라경, 손을 호호 분다. 우진, 불붙지 않은 담배를 물고 있다.

                       조명이 밝아지고도 한참의 침묵이 흐른다. 


성라경             우리 기다리는 거 맞지?

서우진            뭘?

성라경            (담뱃불을 붙여 주며) 사람이든. (사이) 아침이든. (사이) 죽음이든.


                       라경, 오카리나를 분다. 바람의 것 같기도 하고 새의 것 같기도 한 소리.


서우진            왜 여기 있는 걸까?

성라경            난, 떠나는 게 취미야. 아저씬?

서우진            (희미하게 웃으며) 버리는 게 취미야. 

성라경            뭘?

서우진            기억을.

성라경            왜?

서우진            무겁고 지겨워서.

성라경           그래봤자 1분 전도 과거인데 비우는 족족 채워지지. (사이) 그 여자랑 아무 관계없어?

서우진           관계? (사이) 관계는 기억이야. 공유하면 할수록 힘들어.

성라경           그래도 살아야지. 살려면 그건 필수적이야.

서우진           언제부터 그렇게 살고 싶었어?

성라경           지금부터, 아니 예전부터 쭉. 그냥 몰랐을 뿐이야.

서우진           잘 됐네. 너 어른 되고 싶어 떠난 거잖아. 이제 어른 됐네.

성라경           아저씨는?

서우진           나? 난 사라지려고 떠난 거니 꺼져 버리면 되지.

성라경           죽는다고 사라질까?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게 아니야.

서우진           (사이) 넌 날 기억할 거니?

성라경           난 아무 것도 잊어 버리지 않을 거야. 두 눈 똑바로 뜨고 기억할 거야.

 

                     우진, 라경을 바라본다. 조명, 어두워진다.



중간-1 <해질녘1> 성라경과 김제인, 그리고 동재천 ; 김제인의 공간


                     텅 비고 열린 공간.

                     무겁게 내려앉은 노을과 아직 지지 않은 해.

                     김제인, 자는지 죽었는지 움직이지 않는다.

                     멀리 말발굽 소리, 들린다.

                     라경, “야~” 소리를 낸다.

                     라경, 혼자임을 두려워하는지 시체와 함께임을 두려워하는지 몹시 불안해 보인다.


성라경         (노래한다) 깊은 산 속 성라경, 누가 와서 먹나요. 맑고 맑은 성라경,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김 서방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씹만 하고 가지요. 씨바라라라. 바라라. 씨바씨바씨바라. (김의 발을 툭 쳐 본다.)


                     먼지바람, 휭~ 분다.


성라경         (콜록대다) 예전에 성당에 갔다가 고백성사를 본 적 있어. 고해소에서 신부가 그러대. 세상은 아름다운 거라고. 하느님께 죄만 고백하면 다시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럼 사람 죽여 놓고도 기도만 하면 그 죄가 사라져? (불현듯) 아줌마, 아줌마, 아줌마 진짜 죽었어? 아줌마, 말 좀 해 봐. (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무서워.


                      먼지 사이로 사람 형상이 보인다. 재천이다.


성라경            누구야?

동재천            (사이) 나야. 넌 이제 가도 좋아.


                       라경, 떠난다. 재천, 떠나는 라경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조명, 어두워진다.



중간-2 <해질녘2> 도석환과 동재천, 그리고 정연 ; 도석환의 공간


                       지퍼가 내려진 텐트 하나.

                       무겁게 내려앉은 노을과 아직 지지 않은 해.

                       석환, 텐트 뒤에서 용변을 보고 있다.

                       재천, 텐트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다.

                       말발굽 소리, 들려온다.

                       재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급하게 기어간다.


도석환            야! 야! 뭐 해, 임마. 이리와.  


                        말발굽 소리, 멀어진다.


도석환            갔냐? 갔어?

동재천            …….

도석환           완전히 맛이 갔다. 이젠 시동도 안 걸려. 하여튼 러시아 똥차는 어쩔 수가 없어. 어떻게 십 분도 못

                         버티고 퍼지냐. (사이) 우린 길을 잃었다고. 내 말 안들려?


                        먼지바람, 휭~ 분다.


도석환             (콜록거리며) 이놈의 먼지. 이놈의 먼지 탓이야. 도대체 10미터 앞도 볼 수가 없잖아. 가서

                         시동이나 걸어 봐.

동재천              (단호하게) 싫어. 난 다신 운전대 안 잡어.

도석환              (희미하게 웃으며) 그러게, 일상이 무서운 거야. 일상이. 누가 이럴 줄 알았겠어?

동재천              이건 니 탓이야.

도석환              그건 누구 탓도 아니야.


                         어디선가 “야~”하는 소리 난다. 동재천, 대바늘에 찔린 듯 놀란다.


동재천              자꾸 그 사람 얼굴이 떠올라.

도석환              눈 감아.

동재천              정말 잘못됐으면 어떡해.

도석환              다른 사람들이 남아 있어.

동재천              안 남았으면, 모두 떠났으면.

도석환             너 계속 이럴래?

동재천              목말라. 그 사람도 목이 마르겠지?

도석환              죽은 사람은 그런 거 못 느껴.

동재천              죽지 않았어.

도석환            지금쯤이면 벌써 죽었어. 그러니까 너도 여기 모래 바닥에 코 박고 콱 죽어버리든지 기억을 죽여

                         버리고 살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


                         재천, 주저앉는다. 석환, 하늘을 본다. 날이 저문다. 


도석환             해가 지네. (랜턴을 켠다) 나뭇가지라도 꺾어 와야 불을 피우지. 속도 비었겠다, 우느라 탈진

                        했겠다, 더럽게 객사하기 딱 좋은 꼴이다. 다녀올게. 딴맘 먹지 마.


                         석환, 나간다.

                         재천, 도망친다.

                         잠시 석환의 공간은 비어 있다.

                         먼지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인다. 정연이다.

                         정연, 텐트의 주위와 안을 살펴본다.

                         잠시 후 석환, 허겁지겁 들어온다.


도석환             아무래도 걱정돼서 안 되겠어. 같이 가자. (동이 떠남을 인식하곤) 이런 젠장. (이어 정연을

                           발견하곤) 여긴 어떻게……

정연                세 시간을 헤맸어요. 나, 이 밖까지만 데려다 줄래요?


                        석환, 정연을 바라본다. 조명, 어두워진다.



중간-3 <해질녘3> 정연과 서우진 그리고 성라경 ; 서우진의 공간


                         메마른 나무 한 그루.

                         무겁게 내려앉은 노을과 아직 지지 않은 해.

                         정연, 나뭇가지 사이에 몸을 숨기곤 빨래하는 우진을 바라보고 있다.

                         말발굽 소리, 들린다.


정연                  (멀리) 가. 얼른 가.


                         우진과 정연, 소리가 멀어지는 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서우진               그 사람들은, 괜찮을까?

정연                  누구요?

서우진               다들요. 


                          우진, 빨래를 계속한다.


정연                 내 옷까지 모두 그 가방에 있는지 몰랐어요. 미안해요. 내가 빨아야 하는데 가릴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었어요. 그쪽이 여자라고 치고 입장 바꿔 생각해 봐요. 텅 빈 공간에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된 남자랑 둘만 있는데 배탈이 났다면요. 도리 있어요? 해 지기만 기다려야지. (사이) 끝까지 참을 수 없었던 건 제 탓이 아니라구요. (나뭇잎을 던지곤) 당신,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

서우진              (젖은 팬티를 내밀며) 우선 이거라도 입고 있을래요? 입고 말려요.

정연                  고마워요.


                         우진, 다시 돌아앉아 정연의 치마를 빤다. 정연, 팬티를 입는다. 


정연                  이런 일 해 본 적 있어요?

서우진              아니요.

정연                 근데 정말 잘 하시네요. 그래도 본 적은 있죠?

서우진             조카들 거요. (사이) 근데 난 손 델 수가 없었어요.

정연                 더러워서요?

서우진             아뇨. (사이) 형님이 애들 근처엔 못 가게 했어요.

정연                 희한한 형이네. 형네 집에 얹혀살았나 봐요.

서우진             그 얘긴 그만하죠.


                        우진, 치마를 건넨다. 정연, 손을 뻗는다. 먼지바람이 휭~ 분다.

 

정연               (콜록대며) 괜찮아요? (치마를 입으며) 괜히 선녀와 나무꾼이 생각나네. 나도 이 옷 입고 하늘로 떠날까? 떠난다는 말, 너무 멋지지 않아요. 떠난다. 그 속엔 수천의 감정이 있어요. 진정 가벼워야 할 단어가 너무 무겁죠. 무거운 건 싫어. 난 버리는 게 취민데. (나온다) 힘들죠? 제가 팔 주물러 드릴게요. 

서우진             아뇨. 됐습니다.

정연               (사이) 해가 지나 봐요. (랜턴을 켜고 노래한다) 어제는 해가 졌다네. 나의 가슴속의 해 하나. 해는

                        그냥 해일 뿐이야.

서우진             가사 틀렸어요.

정연                노래 안 한다면서 가사는 어떻게 알아요? (정, 웃는다) 애인 없어요?

서우진            궁금한 게 많나 봐요.

정연                네. 전 항상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아요.

서우진             애인, 있었는데 시집갔어요.

정연                제 애인들도 많이 장가갔어요. (서, 웃는다) 근데 왜 시집갔대요?

서우진             제가 별로, 건강치가 못해서요. 그러는 그쪽은 그 사람 왜 그냥 보냈습니까?

정연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이 누구죠? (사이) 관계는 기억이죠. 관계가 끝나면 기억도 끝이에요. 나 그

                       사람 잊었어요. 난 금방 금방 잊어요. 참, 재미있는 거 보여 줄까요?


                        정연, 가방 안에서 지갑을 꺼낸다. 지갑 속에서 증명사진을 한 뭉치 꺼낸다.


정연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은 내가 고등학교 때 사귄 대학생이에요. 나랑 첫 키스 한 사람이죠. 키스하고 나서 그러대요. “정연이 너 대학 가면 인기 좋겠다.” 근데, 내가 막상 대학에 가니 그 사람은 떠났어요. 이 사람은 3학년 때 사귄 과선배예요. 나도 애인이 있고 이 사람도 임자가 있었죠. 개강 파티던가? 노래방을 갔는데 갑자기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묻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였는데 그 사람 눈 속에 내가 가득한 거야. 그 눈에 반한 건지, 그 속에 있던 나에게 반한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이 사람은 유럽여행 때 만난 사람인데요. 음…… 비밀이에요. 그이랑 같이 노래를 불렀어요.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실수인지도 몰라. 아침이면 까마득히 생각이 안 나 불안해할지도 몰라…… 


                       정연, 노래를 부른다. 우진, 따라 부른다. 정연, 노래를 멈추고 우진을 바라본다.


정연               당신도, 증명사진 한 장 줄래요? 여권사진 있죠?


                       정연, 우진에게 입맞춤한다.

                       우진, 주춤하나 얼마지 않아 두 사람, 깊이 키스한다.

                       잠시 후, 어디선가 야~ 소리 들린다.

                       우진, 화들짝 놀라 정연을 뿌리친다.


서우진            미안해요. 

정연                네?

서우진             안 되겠어요.

정연                그건 보통, 여자들이 하는 멘트잖아요. 왜 그래요? 내가 싫어요?

서우진            그런 거 아니에요.

정연               왜요?

서우진          (사이) 난 당신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정연, 일어나 천천히 짐을 챙긴다.

                      정연, 울며 떠난다.

                      우진, 떠나는 정연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다른 편, 먼지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인다. 라경이다.


성라경          아저씨. 


                     우진, 라경을 바라본다. 조명, 어두워진다.

 


처음-<아침> 모두 함께 ; 모두의 공간


                     이른 아침, 동이 터 온다.

                     무대 양 사이드에는 낡은 지프와 텐트가 있다.

                     빈 맥주 캔이 쌓여 있는 무대 가운데에 우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석환, 지프 안에서 나온다.


도석환          어이구, 일찍 일어났습니다.

서우진          아. 예.

도석환          여름인데도 날씨가 서늘하지요. 낮에는 대가리가 쪼개지게 덥다가도 밤이 되면 발꼬락이 얼어

                     터지게 춥고. 허허,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있네요. 여기는. (서우진의 어깨를 짚고 앉으며) 그나

                     저나 감사합니다.

서우진          (벌떡 일어나며) 제가 뭘요. 여자 분 덕분이죠.

정연             (텐트 안에서) 어머, 그만해요. 어딜. 어머.

동재천          (텐트 안에서) 어이쿠. 손가락 삐었잖아. 잘났다. 정말. (나오며) 웬 술들은.


                    석환과 우진, 재천에게 눈인사 한다.

                    재천, 지프에서 붕대를 꺼내 필요 이상의 많은 양을 감는다.

                    라경, 기지개를 켜며 나온다.


성라경          아저씨, 담배 있어요?

동재천          어린 것이 담배는.

성라경          저 저기서 오줌 눌 거예요. 보지 마요. 보는 사람이 라경이 데리고 살기.


                     라경, 휙 돌아서다 재천과 부딪친다.


성라경         뿍! (휙 나간다.)

도석환          쟤 웃기네. 뭐 하는 애래요?

동재천          내 알 바 없지. (텐트 속으로 들어간다.)

서우진          학생이겠죠.

도석환          밤새 술까지 마셔 놓곤 모르는 사람이에요?

서우진          여기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익숙한 것들이 지루해져 떠나 온 걸 텐데요. 


                     제인, 바지를 털며 등장한다.


김제인           아이고. 정신없는 년. 세수하고 있는데 내 옆에서 궁딩이 까고 오줌 갈기는 거 있죠? 하여튼 마약

                     하는 것들은 별 수 없다니까. 돈도 없는 것이 약값은 어떻게 대는지 몰라.

도석환          저 학생 마약 해요?

김제인          뻔한 것 아니겠어. 울란바토르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한 달씩 버티는 것들은 다 똑같아. 트레킹도

                     안 하고 (석환에게 눈치를 주며) 숙박비도 제때 안내고. 저런 것들 한번씩 걸리면 재수 옴 붙은

                     거야. 수금이 안 돼요. 수금이.

도석환          (비위 맞추며) 정말, 고생이 많습니다.

김제인         (텐트를 가리키며) 저쪽 팀은 아직도 안 일어났대요? 신혼여행 티 내나? 아줌마! 아줌마는 화장해도

                     똑같으니까 얼른 갑시다. (핸드폰이 터지는 곳을 찾으며 나간다.)

정연            (나오며) 뭐요? 아줌마? (우진을 발견하곤) 안녕하세요. (들으라는 듯) 뜨거운 사막의 아침,

                     고요하다. 고요해. (콧노래를 흥얼댄다.) 

동재천         (텐트를 접으며) 어이. 어이. 이것 좀 잡아봐.

정연            혼자 해요. 나 구상중이잖아.

동재천         구상은 무슨.

정연             이거 다 기록해 뒀다가 여행기 한편 근사하게 써야지.

도석환         작가시나봐요.

정연             (자랑스럽게) 네.

동재천         하던 거나 잘 해. 에로비디오 작가, 좋잖아. (텐트 줄에 걸려 넘어진다.)

정연             에로비디오 감독님. 괜찮으신가? (우진에게) 우진 씨죠? 노래 참, 잘 하시던데요. 늦도록 들리는

                    소리가 너무 좋아서 잠이 쉽게 안 들었어요.

서우진         그거 학생이 부른 건데요.

정연             에이, 남자 목소리던데.

서우진         (단호히) 전 노래 안 부릅니다.

정연            (헛기침을 하고) 어제 일은 제가 사과 드려요. 저희는 홉스골 호수로 가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알고 출발한 건데 김제인 씨가 약속을 안 지켜서 약간 당황스럽더라구요. 생각해 보니까 가는 게 좀 수고스러워서 그렇지 사막도 나쁜 것 같진 않아요. 별도 많고, 조용하고, 이삼 일 앉아 글쓰기엔 딱이죠.

서우진         일주일은 더 있을 건데요.

정연             네?

서우진         그렇게 알고 지불했습니다.

성라경         (멀리서) 아저씨, 담배 있어요?


                    우진, 라경 쪽으로 간다.


동재천          (다가와) 하여튼 남자라면 환장을 해요.

정연            또 시작한다. 이 막막한 곳에서 당신이랑 어떻게 일주일을 버틴담.

동재천         일주일?

정연              김제인이 저분한테 그만큼 있겠다고 했대요. 이건 분명히 이중계약이야.

동재천          참아. 휘저어 봤자 우리만 손해야. (사이) 근데 이 여자, 왜 말을 돌려. 내 말은 저 치랑 당신이

                     랑…….   

도석환          텐트 다 갰습니다.

정연              (재천을 피해) 어머. 저희 것까지. 감사합니다.

동재천          (확 끌어당기며) 저 자식은 또 뭐야? 한 번에 하나씩만 해라.

정연              고맙다는 말도 못해요?

동재천           고맙긴. 공짜로 얻어 타는데 알아서 기어야지. 말이 나와 말인데 어제만 해도 그래. 난 죽어도

                      싫다는데 너는 태우자 난리고.

정연             그럼, 같은 한국 사람을 객사하게 둬요?

동재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태우냐? 이런 데 버려져 있는 사람이면 무슨 일이건 한 건 크게

                     치고 도망친 게 뻔한데. 정원 이상 태우고 트레킹하면 불법 아니야? 김제인은 뭘 믿고 저런

                     사람을 태웠대.

정연             저 사람이 울란바토르로 돌아가면 천 불을 준다고 했대요. 돈에 환장한 여자니 그거 받아서 방마다

                    침대 댓 개쯤 더 넣겠지. 어쨌든 저 분을 태운 건 도의적 차원에서…….

동재천         시끄러. 저 멸치 같은 놈이 도의 운운하니까 찬성한 주제에. 어제부터 하루 종일 저 자식 편만 들고.

                   나랑 같이 왔으면 나를 따라야지 왜 생전 본 적도 없는 놈을 따라. 혹시 멸치, 마음에 담은 거 아니

                    야?  

정연             쓸데없는 소리 좀 말아요.

동재천         난 멸치 맘에 안 들어. 강간범은 더더욱 맘에 안 들고, 싸가지 소녀도 맘에 안 들고 돈벌레도 맘에

                    안 들고.     

정연            툴툴대지 좀 마요. 당신 와이프는 어떻게 버티는지 몰라. 내가 지금이라도 헤어지길 잘 했지.

동재천         헤어지려면 곱게 헤어질 것이지 어디서 본 건 많아 가지고 꼴같지 않게 이별 여행은 무슨.


                   정연, 지프 속으로 들어간다.

                   재천, 따라간다.

                   우진, 석환, 라경 반대편에서 담배를 피운다.


도석환         꼬마야.

성라경         이 아저씨가 진짜. 나 지지난 주에 열여덟 살 됐어요. 이제 어른이라구요.

도석환         알았다. 처녀야. 그래 담배는 언제부터 피웠습니까?

성라경         고딩 1년차 때부터요.

도석환         그럼 마약은?

성라경        허참, 남이사 담배를 피우든 마약을 빨든 데리고 살 것도 아니면서 무슨 상관이에요? 나 아저씨한테

                    불만 많아요. 아저씨 때문에 제 돈 주고도 짐칸에 타잖아요. 남보다 쪼그만 것도 서러운데 작다고

                    무조건 짐칸에 쑤셔 넣고. 김제인, 미워 죽겠어. 

서우진         나중에 물어 달라고 해.

성라경         그럴 거예요. 그나저나 얼마를 물어 달라고 해야 하나?

서우진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칼로리 소모량을 계산하면 되지. 구겨 앉아 차로 이동할 경우엔 한 시간에

                    230칼로리 소비하니까 하루에 6시간씩 1380. 18일 트레킹이니 24840. 1000칼로리 당 1달러라고

                     치면 24달라 84센트. 몽골 돈으로는 27324투그릭. 원화로 3만원 좀 넘네. 지불한 금액에서 37%는

                     돌려받을 수 있겠어.

성라경          (폴짝거리며) 와우. 아저씨 열라 멋지다.

도석환          (밀어붙이며) 당신, 뭐 하는 사람이요? 박사요?

서우진          (당황하며) 은행원이었어요. 지금은 아니고.

성라경          그렇대도 이건 거의 천재 수준인데.

서우진          집에만 있다 보니까.

도석환          이런 것도 소질이면 소질인데 왜 그만뒀소?

서우진          그냥, 몸이 좀 안 좋았습니다.

김제인         (들어오며) 뭐 해요. 빨리 타요. 빨리 타. 얼른 출발합시다. 이놈의 나라는 핸드폰도 제대로 안

                     터져요.


                     모두 차에 탄다.

                     제인, 시동을 건다. 꺼진다. 다시 건다. 꺼진다.

                     사람들, 웅성거린다.


김제인          왜 이래?

도석환          다시 한 번 해 보시죠.

동재천          거 좀 빨리 갑시다. 일찍 일어난 보람이 있어야지.

성라경          무슨 일 있어요?

정연              아이 정말, 러시아 똥차 끌고 올 때부터 알아봤어.

서우진          나가서 본네트 좀 열어 봐요.

 

                     제인, 차 밖으로 나간다.


동재천          배터리가 방전 됐나 봐요.

정연              아는 척 마요. 운전도 못 하면서.

동재천          면허증만 없을 뿐이야.

김제인          그럼 말만 말고 좀 밀어 보든가.

동재천         저요? 전 험한 일은 안 해 봐서. 그것도 하던 사람이 해야지. (도석환에게 눈치 준다.)


                    석환, 차에서 내린다.

                    제인, 운전석에 앉는다.

                    우진과 라경, 따라 내린다.


도석환         김제인 씨, 이거 쉽지 않겠는데요. 오르막길에다 모래밭이니. 운전대 다른 사람 주고 내려서 좀

                    도와요.

김제인         동재천 씨, 당신이 좀 내려 봐요.

동재천         죄송합니다만 전 팔이 삐어서요.

정연            손가락이잖아요.

동재천         팔이나 손가락이나.

김제인         그럼 운전대라도 잡아요. (내린다.)

정연             내가 정말 못 살아. 치마 입고 이게 무슨 짓이야.

동재천         그러니까 치만 왜 입어. 이런 데서 치마 입고 다니는 여자는 당신 딱 하날거다.


                   그들, 차를 민다.

                   그러나 도리어 더 깊이 파묻힐 뿐이다.

                   몇 번의 반복되는 시도.


성라경         더는 못해!

김제인         사막 한가운데 내다 버린다!

성라경         씨. 어디서 협박이야. (다시 붙는다.)


                   몇 번의 반복되는 시도.


정연            손에 물집 잡히겠네. (도석환에게) 그러니까 저녁에 차 체크를 하셨어야지요. 밤바람이 그렇게 센데

                   모래가 안 쓸려 오겠어요.

도석환        아니 이거 제 차도 아닌데.


                   정연, 다시 붙는다.

                   몇 번의 반복되는 시도.

                   우진, 사람들 사이에 살짝 빠져나와 전화를 건다.


서우진         거기 경찰서죠? 여기 고비사막 서쪽 지점인데요…….

김제인         경찰서?

모두            안돼!!!


                   제인, 핸드폰을 빼앗는다.

                   잠시 침묵. 모두, 서로의 눈치를 본다.


김제인         아. 걔들이 언제 올지도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고비사막이 얼마나 큰데요. 참, 모르죠? 몽골

                   경찰들은 경찰차 안 타요. 말 타고 다녀요. 언제 우릴 찾겠어. 못 찾아요. 못 찾아.

성라경         경찰 오면 신분 조사도 하고 한국에도 알려지는 거야?

도석환         (버럭) 안돼! 안돼요.

서우진         당신은 왜요?

도석환         저…… 저…… 학생이 마약 한대잖아요. 경찰 오면 학생 잡아갈 텐데. 인간된 도리가 있지.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성라경         왜 날 가지고 트집이야. 나도 말썽 나서 송환되는 건 싫지만 왜 생사람을 약물 중독자로 만들어요?

도석환         (성라경의 입을 막으며)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사막에서 차 퍼지면 죽을 수도 있다구요. 다시

                    해 봅시다. 다시요.

정연             난 싫어. (김제인에게) 당신 차니까 당신이 해결해.

김제인         이게 내가 잘못한 일이야?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반말이.

정연             당신은 아까 나한테 아줌마라고 했잖아.

김제인        그럼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 아. 알겠다. 당신들 결혼한 사이가 아니구나. 헛,

                     참. 별 것들이 다 내 차에 탔네. 재수 없게.

동재천         야! 너 몇 살이야.

정연             당신은 운전대나 잡고 있어. 알지도 못하면서.

동재천         넌 어째 말끝마다 무시냐? 응!

도석환         형씨, 형씨가 참으세요.

정연             (도석환에게) 아저씨는 아저씨 일이나 똑바로 해요. 어디서 참견이야. 

동재천          (도석환에게) 저리 가. 냄새 나. 당신 때문에 짐까지 들고 짜증나 죽겠는데…….

도석환          아니 제가 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동재천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너 태우는 거 반대였어. 이 여자가 누구한테 꼬리치느라고 숨이 넘어가면서

                     비는데…… 마지막이라니까 내 못 이긴 척 찬성해 준 거야.

정연             미쳤어? 할 말 안 할 말 좀 가려. 다 끝난 마당에 지저분하게 정말.    

동재천          뭐야! (손을 확 올린다)

서우진          (막아서며) 저기요. 좀 심하시네요. 

동재천          넌 또 뭐야? 오호라. 그렇지 않아도 의심스러웠는데. 너희 둘, 나 없는 고 사이를 못 버티고 붙어

                     먹었냐? 에이 더러운 것들. (멀리 침을 뱉는다.)

김제인          (침을 맞곤) 뭐야, 씨발. 지도 바람난 주제에.

동재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어디서…….

김제인         아저씨!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건 (성라경을 가리키며) 쟤고 나도 먹을 만큼 먹었거든요.

성라경         아줌마! 나도 먹을 만큼 먹었거든요.

김제인         이 버르장머리 없는 소녀야. 어른들 얘기하는 거 안 보여?

성라경         아줌마, 지금 나 쳤어요?

동재천        (김제인에게) 그래 말 한번 잘했다. 넌 어른이 뭔지도 모르냐? 오빠도 없어!

정연            (동재천에게) 그만 해. 뭐 저런 돈벌레하고 말을 섞어. 그러니까 당신이 질이 낮은 거야.

김제인         돈 벌레? 질이 낮아? 너는 얼마나 잘났어? 씨발년들 가랭이 얘기나 쓰는 주제에.

정연             뭐! 이 씨발년아. 말 다 했어?


                    정연, 제인의 머리채를 잡는다.

                    제인, 지지 않고 달려든다.

                    사람들, 뒤엉켜 싸운다.


도석환         (두 여자를 뜯어 말리며) 그만 좀 합시다!!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돼요? 그래요. (재천과 정연에게) 당신들은 밀월여행, (제인에게) 당신은 정원 초과에 계약 위반, (라경에게) 너는 가출. 당신은 또 뭐야. 어쨌든 경찰 오면 다들 좋을 건 없잖습니까!

정연           아저씨, 말 이상하게 하시네. 우린 떳떳해요.

동재천         그래 우리야 고작해야 가정법에 걸리겠지만 당신은 더 수상해. 혹시 한국서 강력범죄라도

                     저지르고 도망친 거 아니야?

성라경          나 가출소녀 아니에요. 이제 열여덟 살이라고요. 어른이에요.


                    멀리서 말발굽 소리.

                    모든 이들, 몹시 불안한 얼굴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본다.  


김제인         (석환에게)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떠나. 당신만 없으면 난 걸릴 문제 없어.

동재천          그래. 당신이 떠나. 당신이 시발점이야.

정연             좋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당신.

김제인          가요. 가. 돈이고 뭐고 필요 없어. 

동재천         이 판국에 인정머리가 무슨 소용이야. 가 버려. 가.


                    사람들, 석환을 심하게 몰아세운다.

                    말발굽 소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궁지에 몰린 석환, 주머니에서 칼을 꺼낸다.

                    사람들, 기겁한다.

  

도석환         그래 나 도망자다. 한국서 부도 내고 중국 넘어 여기까지 왔어. 이제 여기 국경만 넘어 러시아로 가면 아내랑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 여기서 멈출 순 없다고. 나도 좀 살자, 제발. 부탁이다. (사이) 자, 이제부터 내 말대로 해. (재천에게) 너, 운전대 잡아. (라경과 정연에게) 너희들 사이드 잡아. (제인에게) 너, 뒤쪽 모래 파서 길 만들어. (우진에게) 너는 나랑 본네트 쪽에서 뒤쪽으로 밀어. 이제부터 후진한다. 시간 없어. 빨리 해.

동재천         후진은 어떻게 하는데?

정연            후진기어로 놓고 액셀러레이터 밟아요.

동재천          어떤 게 액셀러레이터야?


                    미는 사람들, 안간힘을 쓰고 모래 파는 제인, 열심히 삽질한다.

                    요란한 시동소리 가운데 차,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들 기뻐한다.

                   그러나 재천, 브레이크를 밟는다는 것이 그만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미처 피하지 못한 김제인,

                    차에 깔리고 만다.

                    잠시 정적 후 우진, 제인을 꺼낸다. 제인, 축 늘어져 있다.

 

서우진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어.

도석환         (제인 목에 손을 대고) 죽진 않았어. 하지만 외상이 없는 게 더 불안해.

정연             우리 다 같이 죽는 거예요?

도석환         재수 없는 소리 마. 몽골에서 사람 죽는 건 한국서 고양이 죽는 것보다 흔한 일이야. 버리고 그냥

                    가자. 어차피 곧 경찰이 올 거야. 

서우진         죽은 것도 아닌데 포기할 순 없어요.

도석환         여기 같이 있으면 다 죽어. 우린 그냥 여행자야. 아무리 험한 일이 생겨도 길 위에선 떠나면

                    그만이야. 그게 여행의 룰이야.

성라경         그래도.

도석환         그렇게 걱정되면 너희가 남아.

서우진          (허공에 대고) 일상이 무서운 거야. 일상이.

도석환          (우진을 한번 돌아본다. 이어 재천에게) 내려.

동재천          (몹시 공격적으로) 니 잘못이야. 니가 지휘했잖아. 

도석환          뒤에 타. 면상 마주 대기 싫어. (정연에게) 같이 안 가요?

정연              난 안 가요. 어차피 저이랑 나, 여기서 끝내려고 했어.

도석환          (모두에게) 우린 전에도 모르는 사이였고 지금도 모르는 사이요. 평행길만 쭉 가는 거야. 꿈에서

                     라도 다시 보지 맙시다.


                     차, 떠난다.


정연             전, 가 볼게요.

서우진          혼자서 괜찮겠어요?

정연             평생 혼자인 적이 없었어요. 이번 기회에 다시 태어나는 거죠. 여행이란 그런 거 아니겠어요.

                    살아서 다른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는 윤회.


                    정연, 떠난다.


서우진         난 병이 있어. 사실 여기 남아 있을 수가 없어.

성라경         무슨 병인데?

서우진         에이즈래.

성라경         에이즈?

서우진         

성라경         언제, 어쩌다

서우진         서른 되던 해에. 재수 없어서.

성라경          근데 어떻게 돌아다녀?

서우진         형이 의사야. 아버지도 의사고. 감기 걸린 줄 알고 검사 받다 형이 발견했어. 원래는 신고해야

                    하는데 집안 망신이라고. 숨 멎을 때까지 감금되는 걸로 죄값을 치뤘지. 림프구 숫자는 자꾸만

                    줄어들고. 죽을 때가 되니 누가 날 기억할까 싶었다. 그래, 형수가 지키는 날에 안 놔 주면 겁탈

                    하겠다고 협박하곤 도망쳤어.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하곤. 

성라경         가.   

서우진          미안하다. (담배를 주며) 혼자 외롭지 않겠어.

성라경          (받으며) 인간은 원래 혼자야.


                     우진, 떠난다. 정연, 왔던 길에서 다시 돌아온다.


정연              그 사람, 어디로 갔어?

성라경           저쪽이요.

정연              그래?

                     정연, 가리킨 방향으로 향하다 문득 멈춰 손을 흔든다.

                     라경, 손을 흔든다.

                     정연, 떠난다.

                     라경,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정연이 나간 쪽을 바라본다.

                     말발굽 소리, 들린다.


성라경          (작은 소리로) 야~ (점점 큰 소리로) 야~ 야~

 

조명 어두워진다.《문장 웹진/2007년 12월호》


장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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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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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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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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