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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과 흠집으로부터 찾아낸, 잘 닦인 길 하나

  • 작성일 2007-11-01
  • 조회수 5,199

 

<작가와 작가>


얼룩과 흠집으로부터 찾아낸, 잘 닦인 길 하나



대담 이동하(소설가)

진행?정리 이명랑(소설가)

 

intro

우렁각시는 알까

작가와 직장

소설가의 아내

현실에 대한 물정을 모르는 남자

학창생활

치열했던 문학적 논쟁

자기상처

밝고 따뜻한 날

원초적인 경험, 상처

폭력연구

허무의식

나에게 소설은 눈물, 추위, 자화상, 못질하기




이동하, 그의 우렁각시들을 만나다


이명랑  안녕하세요.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만나 뵙기로 하고 예전에 내셨던 작품들도 다시 읽어보고요, 최근에 내신 소설집『우렁각시는 알까?』도 읽어봤습니다. 10년 만에 소설집을 내셨다고 소개가 됐어요. 감회가 어쩌신지 여쭤 봐도 될까요.

이동하  후기에도 썼지만 부끄럽죠. 작가가 10년 만에 책 한권 냈다는 것이 게으름이니까. 상당히 자책하고 있어요.

 

 

이명랑  저는 선생님의 『우렁각시는 알까?』를 읽으면서 예전 작품에 비해서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우렁각시는 알까?」라는 표제작이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우리 시대의 우렁각시에 대해 알려 주세요.

이동하  표제가 된 그 작품이 수록작품 중에서는 비교적 가장 최근에 쓴 작품 중의 하나인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작품집은 10년 동안 쓴 것을 묶은 것이니까 작품의 편차가 많을 거에요. 그것을 좋게 봐 주면 다양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명랑  저는 그렇게 읽었어요. 편편이 다 달라서.

이동하  나쁘게 보면 일관성이 부족하게 보일 텐데. 표제작인 「우렁각시는 알까」와 그 외 한 두 작품, 단편집 앞쪽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이명랑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기왕의 내 작품의 스타일하고는 다른 느낌을 줄 거예요. 우리의 전통 설화에서 아이템을 가져온 것인데 우리 시대의 우렁각시는 설화의 우렁각시와는 다른 모습, 다른 의미가 아닐까 여기서 시작한 작품인데, 글쎄 독자들은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네요.

이명랑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렁각시 저도 한 명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같은 애 있는 아줌마들은 매일 그런 얘기를 해요. 우렁각시가 있어서 집에 들어가면 살림이 다 돼 있었으면 좋겠다. 아줌마들이 쓰는 은어로는 우렁각시는 파출부, 가정부라는 의미가 많거든요. 선생님 소설에서 우렁각시는, 순박한 청년이랄까요, 노총각의 마음만 뒤흔들어 놓고 파멸에 이르게 한 무책임한 여성으로 그려지잖아요. 선생님이 우렁각시를 쓰게 된 이유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이동하  우리 주변에 이와 유사한 사례들을 자주 볼 수 있죠. 한 가지 비근한 예를 들면 로또 복권, 한 번에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우선 많고, 그 중에는 실제로 기회를 붙잡는 사람들도 있는데. 후일담을 들어보면 그게 그다지 바람직한 인생역전이 아니더라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어요. 비단 그것 말고도 그와 유사한 사례들을 일상 중에 자주 겪으면서 살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해요.

이명랑  이 작품집이 10년 동안 쓰신 작품을 묶으셨다고 하셨는데 1년에 한편 꼴로 쓰신 것이잖아요. 소설 안 쓰실 때는 뭘 하면서 이 10년을 보내신 거예요?

이동하  첫째는 게으름인데. 핑계를 대자면 저는 학교에 있잖아요. 일단 강의가 시작되면 학기 중에는 거의 글쓰기를 못 해요. 보통 이 일 저 일을 겸해서 잘 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재주가 없어서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잘 못 해요. 학기 중에는 주로 강의하는 일, 학생들의 원고 읽어 주는 일, 사실 부담이 커요. 내 일을 못하다가 방학 때를 이용해서 그나마 약속이 된 것을 최소한 쓴다고 애를 쓰는데 대체로 성과가 없어요. 방학이라는 게 여름에는 더워서 그렇고 겨울방학에는 또 행사가 많아요. 학교 있는 사람들은 입학식 졸업식부터 시작해서 가정에는 신정 구정까지 이러 저리 끼여서. 대체로 마음만 쓰고 성과는 별로 없고 그래요. 아마 이런 일 때문에 대학에 발을 들여놓은 유능한 작가들 상당수가 결국은 작가로서는 뒷감당을 못한 사례가 많은 것 같아요. 항간에는 그것을 대학에 먹힌 작가, 대학이 삼킨 작가 이렇게 표현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작가들이 한둘이 아니죠. 나는 그러니까 그야말로 대학에, 직장에 먹힌 작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애면글면한 게 그나마 1년에 한 두 편이라도 쓰게 된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해요. 쉽게 말하면 전직 작가라는 소리는 그래도 면해야겠다. 이 생각이 이제 와서 책 한 권을 묶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이명랑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선생님께는 처자식이 있잖아요. 정말 다 제쳐 두고 소설만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처자식이 있다 보니 가장으로서의 의무도 있잖아요. 선생님께서는 강의를 하시는데요, 제가 상상을 해봤어요. 사모님 입장에서는 돈 한 푼 안 되는 소설을 끄적거리는 남편보다는 따박따박 월급 타오는 남편이 좋을 것 같아요. 사모님은 개인적으로 기뻐하셨을 것 같아요. 선생님 처음 교수가 되셨을 때 집안이 어떤 분위기였는지 궁금하네요.

이동하  우리 세대들은 글 쓰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직장이 뻔했어요. 출판사나 잡지사가 고작인데.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20대 30대 같은 때만 하더라도 출판사 잡지사들이 1년도 못 버티고 문을 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어요. 늘 생활이 불안정하죠. 그러면서 30대에 들어서 가정을 가지게 되고 애들이 생기고부터 안정된 직장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한테 안정된 봉급만 약속한다면 섬마을 선생이라도 하겠다 이런 식으로 안정된 직장에 대한 갈증이 컸어요. 그런데 나는 그래도 운 좋게 이렇게 저렇게 풀리다 보니까 학교 쪽으로 풀려서, 올해가 내가 정년인데, 지금까지 비교적 안정된 직장생활을 했죠. 작가로서 내 개인은 아까도 얘기했던 것처럼 늘 직장 때문에 죽어 버린 작가가 되지 않아야겠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생활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집사람으로 보면, 가장 편안한 직장이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이명랑  저는 여자이고 결혼을 해서 그런지 궁금한 점이, 소설가가 되겠다는 것은 자신의 결심이지만, 사모님께서는 소설가의 아내가 되겠다고 결심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요새는 연애 코치해서 연애지식을 많이 가르쳐주기도 해요. 유행가 가사에 하루에 네 번 사랑을 말하고, 여덟 번의 포옹, 여섯 번의 키스를 해줘 하는 공식도 있는데. 사실 사모님은 미인이시잖아요. 사모님 같은 미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방법이 궁금해요. 어떻게 청혼을 하셨는지.

이동하  내가 청첩장을 찍어서 주변 분들에게 드렸는데 그중에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시인 김구용 선생이 계셨어요. 성균관대 교수로 계셨는데 이분이 내가 다니던 서라벌예술대에도 강의를 나오고 하셨는데요. 이분한테 청첩장을 드렸더니 첫 질문이 “어디서 만났느냐?”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오다가다 만났습니다.”가 내 대답이었어요. 그랬더니 이 양반이 “그러면 천생연분이로군.”하시더군요. 그래서 나는 천생연분으로 알아요.

이명랑  선생님 소설에 『삼학도』 있잖아요. 거기에 보면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비를 찾아가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여학생이 나옵니다. 『삼학도』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혹시 사모님을 그렇게 만난 것은 아니신지.

이동하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이명랑  오다가다 어디서 만나셨는데요.

이동하  다행히 한때 내가 다녔던 이웃 직장에 근무하고 있어서 그래서 오다가다 만났어요.

이명랑  그러니까 근무하시다가 점심 먹으러 가는데 사모님도 점심 먹으러 오고 해서 만나게 되셨던 거군요. 글을 쓰시는 남자분들, 문학하시는 분들은 여성분들에게도 “밤하늘의 별이 아름다워.” 뭐 이런 식으로 낭만적인 연애를 하셨을 것 같아요. 그러세요?

이동하  전혀 그렇지 못해요. 내가 젊었을 때는 소설을 쓰는 일 빼고는 모든 일이 서툴렀어요. 인생 사는 일부터 시작해서 사람 만나는 것까지 서툴기 짝이 없는 촌놈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서툰 게 여자 만나는 것이었어요. 그랬으니 낭만적인 시구를 읊을 마음의 여유가 있을 턱이 없고 집사람이 나를 선택하는 데는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이성의 상대로 생각했지 저 사람이 특수한 사람이니까 점수를 더 주자 이런 것은 없지 않았을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금까지 살면서도 그걸 특별히 자랑스러워하거나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명랑  책 나오면 제일 먼저 읽고 신문에 나면 스크랩도 해 놓고 굉장히 좋아하실 것 같은데.

이동하  별로 그렇지 않아요.(웃음)

이명랑  사모님께서 선생님이 소설가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때가 상금 받아오고 그럴 땐가요?(웃음)

 

 

이동하  과거에는 상금이 많은 상이 없었어요. 나도 두루 상을 받았는데 다 명예이지 상금은 별로 없었어요. 몇 푼 안 되는 상금 받아서 뒤풀이 좀 하면 남는 것 없죠. 결국은 내게는 명예가 남지만 집사람에게는 성가신 일이었어요. 돈도 안 되는데 그날 정장하고 나가서 옆자리 앉아 있고 하는 게 굉장히 부담스럽고 성가신 일이었어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이명랑  속으로는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실 것 같아요.

이동하  아무래도 그렇지요.(웃음)



추억보다 더 강하고 질긴 열정!


이명랑  아까 선생님 말씀 중에 20대 때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시면서 소설 쓰는 것 말고는 다 엉성했다고 말씀하셨어요. 너무 유명한, 작년에 영역도 되었는데 『장난감 도시』에 보면 모든 것이 엉성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 아버지로 나오잖아요. 그 아버지의 모습에서 굉장히 감동을 느꼈어요. 특히 『장난감 도시』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너무나 세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농촌에서 서울로 와서, 나중에 감옥까지 가게 되고, 감옥에서 나왔더니 아내는 벌써 죽고 없고, 각목 몇 개로 지게를 만들잖아요. 지게를 메고 시장에 가기는 하나 벌이에는 열성이 없잖아요. 마치 우렁각시 이야기의 총각이 ‘논은 지어서 누구랑 밥을 먹지?’ 혼잣말 하며 함께할 사람이 없는 것을 슬퍼하는 것처럼. 이런 것처럼 『장난감 도시』에 나오는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시장에는 가지만. 모든 것이 엉성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 선생님 소설에는 현실에 대한 물정을 모르는 남자들이 곳곳에 등장하는데 그런 남성들에게 특별히 연민을 갖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동하  내 소설에 그런 아버지 상은 『장남감 도시』에서부터 그 이후에 가장 최근에 나온 『우렁각시는 알까』에 수록돼 있는 「사모곡」까지 꾸준히 여러 작품에 등장을 하죠. 그 아버지도 계속 나이를 먹어가면서. 『장남감 도시』에 등장하는 그 아버지는 40대 중반의 젊은 아버지죠. 「사모곡」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팔순의 치매를 앓는 아버지로 등장하듯이. 그래서 어떤 분들은 내 소설에서 가족사적인 이런 부분들을 지적하고 그래요. 사실 내 소설의 아버지나 어머니나 가족과 관계되는 가족의 모델들은 내 가족에서 취해졌죠. 그 아버지의 모습이 세상사는 일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런 남성상인데. 한 가정을 제대로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남자죠. 그런 모습이 사실은 『장남감 도시』의 아버지서부터 다 그렇죠. 내 아버지, 내 선친의 모습인데. 내 선친과 나, 내 2세, 벌써 손자가 생겼지만, 우리가 아는 사람들은 흔히 물 3대라고 그래요. 이때 물이라는 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고 세상 사는 일에 여물지 못하고 느슨하기 짝이 없는 물 같은 사내 할 때 그런 뜻으로 물 3대죠. 특히 그런 모습이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 심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 전에 나는 대구에서 골방생활을 하다시피 했어요. 무슨 뜻이냐면 대인관계가 거의 없었어요. 친구도 한두 명에 지나지 않았고 거의 대인관계 없이 살았기 때문에 나는 골방시절이라고 하는데 그러다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대학도 내 또래들이 졸업하는 해에 입학을 했으니까 4년 지각생이죠. 예를 들어 문단에서는 김원일씨가 나와 동갑인데 내가 입학하고 보니까 이미 졸업해서 나갔더라고요.

이명랑  그러면 김원일 선생님과 서라벌예대를 같이 다니시지는 못했겠네요.

이동하  동갑내기고 문단등단 연도도 같아요, 같이 동인도 했고 해서 친구처럼 되기는 했지만 학교 선후배 따지면 내가 한참 후배예요. 그랬기 때문에 지방에서 골방생활만 하던 사람이 서울에 늦게 와서 한 대학 생활이 정상적일 수 없죠. 그 적응이 나는 참 힘들었는데 더더구나 촌스럽고 소심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고 세상물정 몰라서 참 힘들었어요. 그래도 글 쓰고 문학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였다는 것 때문에 그 대학 생활의 많은 추억이 남아 있어요.

이명랑  그때, 선생님 서라벌예대 시절에 학교를 같이 다닌 문인들 누가 있을까요.

이동하  당장에 나랑 같은 학년에 시 쓰는 김형영, 마종하 이런 분들이 있었고, 소설 쪽에는 김청 같은 작가가 있고, 드라마 작가 나연숙 같은 사람도 있고, 소설 쓰는 김정례 씨도 같은 학번이었어요. 바로 위에도 최범석, 시조시인 윤금초, 여러 사람 있었고, 우리보다 한 해 또는 두 해 아래는 정말로 많았어요. 오정희 씨, 이경자 씨, 황충상 씨, 이시영 씨, 감태준 씨 참 많았어요.

 

 

이명랑  대학 시절에 어울려 다니면서 술은 많이 드셨어요?

이동하  내가 학습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술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한두 잔 하면 얼굴이 시뻘개지고 거기다 한두 잔 더하면 곯아떨어지고, 지금도 똑같은데 그때도 마찬가지였어. 그랬는데도 글하고 술이 친분관계가 워낙 강해서 열심히 몰려다니기는 했어요. 힘들었죠.

이명랑  남들은 즐거운데 선생님은 술을 못 드셔서. 서라벌예대 다니던 시절에 재미난 일들, 예를 들면 우리는 그런 것에 귀가 열려 있잖아요. 누구랑 누구랑 연애했다더라 이런 것, x파일 좋아하잖아요. 서라벌예대 시절에 유명한 사건 없었나요.

이동하  없을 수가 없죠. 그런데 말할 수가 없지. 공개적으로는. 이것 다 끝난 뒤에.(웃음)

이명랑  선생님이 혹시 그런 일에 주인공이 된 적은 없으셨어요?

이동하  나는 소설 쓰는 일에는 주인공이 될 기회가 더러 있었는데 그런 일에는 조연밖에 못했어요. 예를 들어 내 동급생들이 그때도 짝짓기를 잘 하더라고요. 학기가 시작되고 몇 주일 안 지나니까 짝이 생겨서 쌍쌍이 다니는데 항상 내가 끼면 짝이 안 맞아요. 내 짝이 없으니까.

이명랑  선생님은 쌍쌍이 노는 데는 별로 못 가 보셨겠네요.

이동하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끼워 주는 것을 좋아해서 자주 나를 데리고 다니기는 했는데.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그때 많이 외로웠어요.(웃음)

이명랑  선생님 주로 사진 찍어 주는 일 하신 것 아니에요?

이동하  그때는 카메라가 흔치 않았으니까 그건 아니고 주로 말동무를 했죠.

이명랑  사실 저희 세대에게만 해도 선생님도 그렇고 오정희 선생님이나 이경자 선생님이라든가 역사 속의 인물 같고 우상이잖아요. 그 당시 오정희 선생님이나 이경자 선생님이나 예쁜 여학생이었을 것이잖아요. 선생님도 사귀어 보려고 노력하시고 그랬어요?

이동하  많이 흠모했죠. 그랬음에도 내가 너무 촌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늘 짝사랑으로 끝났죠.

이명랑  문예창작학과, 특히 서라벌예대는 지금 현재 많은 대학 문예창작학과의 효시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 당시에 문학을 하겠다고 모인 미래의 젊은 작가들은 술을 마셔도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분들의 고민도 문학과 관련된 고민이었을 것 같아요. 젊은 시절에 술 마시면서 어떤 문제로 문학을 고민하셨어요?

 

 

이동하  내가 문예창작과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하면서 요즘 세대와 비교를 하면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때는 서라벌예술대 문예창작과가 전국에서 유일한 학과라는 특수한 조건이 있기는 했죠. 그래서 강의 시간에는, 타교생들도 자주 보이곤 했어요. 청강이죠. 청강이 도강이죠. 도강하려 많이 왔어요. 그 중에는 작고한 시인 작가들도 있고 생존한 작가들도 있는데 예를 들면 작가 윤후명 씨 같은 분은 연대 철학과 재학생이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그 양반이 자기 학교 가기보다는 우리 문창과에서 강의 듣고 시간 죽인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오면 결국은 같이 어울려서 술집으로 몰려가게 됐는데 그때는 미아리에서 정릉까지 복개되기 전에 하천이 있었는데 하천을 따라가면 바라크 촌이 형성돼 있고 그게 다 순 술집이었어요. 거기 주 종목이 막걸리라고요. 그때는 주로 막걸리를 마셨지요. 술 파는 아가씨들이 다 있는 집인데 그때 학생들이 호주머니 사정도 뻔했는데 툭하면 몰려가서 밤을 홀딱 새고 마시고 그랬어요. 술집 아가씨들도 우리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옆에 손님 오면 가서 시중하고 가고 나면 우리하고 밤을 새우고. 거기서 누구라고 말하면 지금도 알 만한 모 시인과 로맨스도 생기고 했어요. 술자리건 강의실이건 강의실 밖이건 지금 생각하면 순진하다 싶을 정도로 치열하게 문학적 논쟁을 즐겼던 것 같아요. 요즘에는 정색을 하고 문학적 논쟁을 벌이는 것을 덜 떨어지는 것으로 치부하는 일면이 있는데 우리는 전혀 그런 의식 없이 치열한 논쟁을 했어요. 자기 작품이나 작가나 주로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이런 치열성 하나가 지금 생각해도 기억에 남을 만큼 있었고. 그 다음에 주변 동료들의 글은 물론이거니와, 동료 중에는 등단한 사람도 있고 아직 습작기에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걸 가리지 않고 ‘그 녀석이 지금 무엇을 쓰는가’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고, 등단한 시인의 경우에는 ‘어디에 뭘 발표했냐’, ‘작품이 어떤 수준이냐’에 대해서 굉장히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고 비판하고 이랬던 기억이 주로 남아 있어요. 아마 그 시대의 순진성이 아닐까 싶은데 요즘 분위기를 보면 그때 그 순진성, 치열성 이런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이명랑  세월이 흘렀어도 막걸리 집에서 문학적 논쟁으로 밤을 새웠던 그 날들이 선생님 스스로에게는 나의 가장 빛나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그런 느낌으로 자리를 잡고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선생님께 이런 질문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장난감 도시』라는 작품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인데요. 선생님을 만나기로 하고 그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절실하지 않으면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부끄러워했어요. 이런 문장이 있더라고요. ‘도시가 온통 고단한 잠에 떨어져 있는 그 시간에도 골목 밖을 서성거리는 여자들, 진열장처럼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방에서 외롭게 그날의 운세를 떼고 있는 여자들, 벌레처럼 취한 사내와 잡초 같은 낯짝의 여자들, 오직 팬티 한 장밖에 가린 곳이라곤 없는 여자들, 시멘트 바닥의 좁은 뜨락을 온통 낭자하게 적셔놓고는 다시 제 구멍으로 기어들어가 쓰러져 자는 여자들, 그러니까 몽땅 까발리고 사는 치들’의 이야기를 『장난감 도시』에서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 역시 소설을 쓰다가 가끔 소설가 역시도 선생님이 『장난감 도시』에서 그려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까발리고 사는 치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대면하고 그것을 소설로 쓰는 과정에서 선생님 나름대로 힘든 것이 어떤 것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이동하  두 종류의 작가들이 있죠. 주로 자기 얘기만 하는 작가, 그 다음에 자기 얘기는 절대로 안 하는 작가가 있는데, 우리 세대의 작가들은 대체로 전자예요. 문학을 시작하게 된 동기도 자기 상처 때문이고 그러다 보니까 붙들고 씨름하는 주제도 자기 자신의 아픔이고 상처고 주로 그래요. 자기 자신의 아픔이기 때문에 가장 진지한 톤으로 말하게 돼요. 화법도 진지해요. 그리고 그게 내가 생각할 때는 자기 자신의 고통과 어둠을 문장의 말을 빌려서 까발리는 것이 고통이면서도 치유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요. 나 같은 경우에 내가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최초로 하게 된 것이 중학교 2학년 때부터인데 그럴 수 있는 동기가 바로 그 나이에 생모를 사별했어요. 그 고통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장난감 도시』 후기에도 그렇게 썼지만 그 삶의 얘기, 내 아픔을 누군가에게 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다는 심정에서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작정을 했어요. 그러면서 40년 세월을 게으르게라도 소설을 써 온 지금 되돌아 보면 소설 쓰기가 있었으니까 내 삶도 있었고 내 아픔도 어루만질 수 있었고 나의 아픔을 통해서 남도 이해할 수 있지 않았느냐 생각해요. 요즘의 젊은 세대들은 후자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자기 얘기를 하기 싫어서라기보다도 자기 얘기는 소설로 담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로 남의 얘기를 하다 보니까 환상적인 요소가 많다거나 관념 묘사가 많다거나 또는 역사나 특수한 장르로 빠지는 경향이 드러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청준 씨 부분을 클릭을 해 봤는데 마침 그런 얘기를 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우리 세대는 다 자기체험을 소설의 틀에 담으려고 했는데 요즘 세대들은 자기 체험이 아니고 다른 데서 가져와서, 역사나 자연이나 또는 다른 세계에서 가져와서 얘기하니까 훨씬 어렵게 문학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더라고요. 나도 그 점에 공감이 가면서 또 하나 걱정스러운 점은 그런 작업들이 우리들의 삶의 지평을 넓히는 데 물론 기여하겠지만, 그러나 내 생각에는, 기본적으로 글 쓰는 것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작업이라고 하면 자신이 삶 또는 현실과 자꾸만 거리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지 않겠나 하는 걱정도 하게 돼요. 자칫하면 현진건이 이야기했던 달나라 얘기로 빠지지 않을까 염려도 되고 그래요.



나비를 잡는 소년처럼, 눈부신 성취를 위하여


이명랑  선생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저희에게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체험이 사라져버린 글쓰기가 유행처럼 요사이 번져 가는 시대에 저도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가끔 저 스스로도 고민에 빠질 때가 많거든요.

이동하  그런데 적어도 내가 읽은 이명랑 씨의 작품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어느 작가보다도 자기의 삶이나 성장과 밀착된 작품 세계를 쌓아올리고 있어서 나는 그 점에서 참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명랑  고맙습니다. 선생님, 제가 고민했던 부분에 대해 프랑스의 여성작가인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는 공장 노동자였는데 자기는 그분들의 희생을 담보로 해서 이제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쁘띠부르주아가 됐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아버지 얘기를 쓰려고 보니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을 자기는 부로주아의 언어로 쓰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굉장히 힘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는 내가 체험하지 않은 것은 단 한 줄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작가인데요. 저도 가끔씩 사실은 저에게 있어 글쓰기가 없었다면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저 역시도 상처를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글쓰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제 체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거든요.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면 체험적 글쓰기에 대해 여쭤 보고 싶었습니다. 『과천에는 새가 많다』저는 이상하게 그 작품에 밑줄을 많이 그었어요. 거기에 보면 선생님이 산책을 나가서 나비 잡는 소년을 만나잖아요. 그 문장에 제가 가슴이 막막해졌는데요. 좀 읽어 드릴게요. ‘통 안에는 나비가 몇 마리 들어 있었다. 소년을 그것을 내게 자랑하는 참이었다. 그랬다. 도무지 나이를 종잡기 어려운 그의 얼굴에는 대견한 일을 해낸 어린아이의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내 가슴이 다 뻐근해질 정도였다. 여전히 얼굴 하나 가득 만족한 웃음을 담은 채 소년은 내 앞을 떠났다. 약수터 쪽을 향해 나는 다시 스적스적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무지 소년의 인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나의 삶에도 성취의 기쁨이 있었던가. 어느새 나는 자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듯 눈부신 기억을 좀처럼 건져 올리기가 힘들었다.’ 이 문장을 읽다 말고 새벽에 나비 한 마리 잡고도 기뻐하는 소년처럼 선생님에게 문학을 처음 결심하게 되었을 때는 마음에 드는 한 문장을 써도 나비 잡은 소년처럼 기쁘잖아요. 요즘은 사람들 만나면 다 부동산 이야기만 하고 펀드 이야기만 하니까 물어 봐요. 제 주변의 아줌마들이, 이명랑 씨는 단편소설 하나 쓰면 얼마나 받느냐고. 그러면 몇십만 원 받는다고 하면 이해를 못하거든요. 소설 한편 쓰는데 두 달 걸린다 그러면 이해를 못해요. 그런 성취의 기쁨이 있어서 이걸 쓰잖아요. 선생님께 성취의 기쁨이 느껴졌던 순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이동하  문득 기억나는 내 소설 중에 「밝고 따뜻한 날」이라는 단편이 있는데, 좋은 회사에서 능력 있는 가장이 여러 달째 매달려 있던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해결하고 쉬는 주말 이야기가 나와요. 주말에 자기 집 뜨락에서 우연히 흙을 뒤집다가 깡통에 가득 든 구슬을 발견해요. 그 구슬을 누군가 묻었죠. 아주 소중한, 특히 구슬 중에 아주 알록달록하게 만들어진 것을 우리는 보배라고 했는데, 보물로 알고 묻은 것이죠. 그것을 보고 자기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가 나오죠. 어릴 때 골목에서 딱지치기 대장이었는데 동네 애들의 딱지를 다 긁어 모아서 그게 대단한 재화고 보물인 것처럼 그것을 깡통에 담아서 보물을 묻듯이 밤중에 묻어놓고 묻은 장소를 보물지도 그리듯이 그려서 간직하고 있다가 크면서 까맣게 잊어 버린 것이죠. 성인이 된 이후에 우리가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성취란 것은 아마도 그 아이들이 그 땅에 묻었던 구슬, 딱지 만도 못하죠. 그 소설에서도 나비를 잡은 소년의 성취감을 다시는 맛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냐. 그 얘기인데 우리는 결국은 글 쓰는 작업이 꽤나 자기를 들볶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랑 씨가 이야기했듯이 시나 소설에 원가 계산하면 아무도 그 작업을 안 하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매달리는 것은 결국은 그런 작품 속의 아이들이 얻는 그때의 그 눈부신 성취감을 다른 세속적인 삶에서 맛볼 수 없기 때문에,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결국 글을 쓰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성취감을 이따금은 단 한 줄의 문장에서 느끼기도 하고 그러죠.



여전히 아픈, 그러나 붙잡고 놓아 주기 싫어 떠나지 못하는


이명랑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하지만 선생님이 내 작품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잘 썼다 하는,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 작품을 어떤 것이세요?

이동하  언젠가 한번 누가 나에게 묻더라고요. 자기 스스로 대표작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해서 말장난 하느라고, 대표작은 앞으로 쓸 것이고, 지금 쓴 것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보면 역시 『장난감 도시』다, 거기에 내 얘기의 모든 주제와 인물이 다 그려져 있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이명랑  4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첫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애정을 따를 작품은 없나 보네요.

이동하  『장난감 도시』의 경우 내가 40대에 썼거든요. 사실은 작가로서도 등단할 때 스물다섯 살이었고, 나이로나 정력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충분할 때 쓴 소설인데. 단 『장난감 도시』의 세계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인생과 세계에 대한 원천적 경험을 갖게 했던 그 성장기에 쓴 작품이기에 내가 더 집착하지 않는가 싶어요.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가끔씩 소설을 써야 하긴 하는데 뭘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거나 뭘 써야 하는데 시작이 안 돼서 막연할 때 내 소설을 스스로 다시 뒤적거려 보게 되는데 그럴 때 『장난감 도시』를 아무데나 펼쳐서, 짤막짤막한 글들이니까, 그것을 펼쳐 들면 대체로 상당시간 동안 몰입해서 다시 읽게 되고, 그러면서 이 나이에도 어느 순간에 보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돼요. 결국 그것은 문학적 성취와 완성도와는 별개로 내 자신의 원초적인 경험과 상처들이 거기에 가장 잘 드러나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돼요.

이명랑  선생님께는 상처를 들여다보는 작업이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일 텐데, 저희들에게는 훌륭한 작품을 접하게 돼서 좋아요. 『장남감 도시』에서도 느껴졌고, 『폭력연구』라는 작품에서도 보면 선생님이 생각하는 폭력은 단순히 주먹질을 해서 때리고 두드려 맞는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선생님 어린 시절의 이야기나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인데, 선생님이 생각하는 폭력은 더 교묘한 폭력인 것 같아요. 인간을 인간일 수 없게 만드는 그런 폭력적인 것들, 선생님이 현재 느끼는 폭력적인 것들은 어떤 것인지 여쭤 보고 싶어요.

이동하  『폭력연구』라는 작품이 연작이었는데 처음에는 단편 하나의 제목이었다가 폭력의 주제를 계속 쓰면서 그것을 부제로 해서 연작을 써서 한 권으로 묶었는데, 사실은 더 많이 쓰고 싶었어요. 물리적 폭력보다는 정신적 폭력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훼손하거나 인물들의 인간성을 훼손시키는가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는 소설입니다. 여덟 편인가 일곱 편인가 쓰고 그만뒀는데, 이유인즉슨, 어느 순간에 생각해 보니까 내가 쓴 소설들이 대부분 그 범주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개념을 확대하니까 굳이 분별할 필요가 없었어요. 예를 들어, 최초의 작품인 1966년 신춘문예 당선작이 「전쟁과 다람쥐」인데 전쟁이란 거대한 폭력과 다람쥐라는 가장 연약한 생물의 대비니까, 그게 폭력 얘기잖아요. 결국은 굳이 ‘폭력연구’라는 타이틀을 이마에 두를 필요가 없지 않냐 해서 끝이 났어요. 폭력에 대한 관심은 다른 작가들의 경우에 인간적인 삶을 저해하고 방해하는 현실적인, 정치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물리적인 것, 형이상학적 세계관까지 그 관심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요컨대 폭력연구가 내 독창적인 문제의식의 제기라고 볼 여지가 별로 없더라고요.

이명랑  『폭력연구』의 한 문장인데요. 텐트 치고 움막 치고 사는 묘사를 하시면서 ‘자질구레한 세간들 이불이며 헌옷가지들, 누렇게 뜬 아낙내와 겁 잔뜩 집어먹은 어린애들, 새삼스럽게 그런 순간을 대면하면서 아! 이 속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 하는 감동에 빠져들곤 했다’는 문장을 쓰셨는데요, 선생님께 지금 그런 순간이 있다면 어떤 순간일까요?

이동하  나는 길 가다가 철거작업 하는 현장을 보면 한참 서서 구경하곤 해요.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그게 늘 새롭게 느껴지는 게 있어요. 우리 집이라는 생각을 해요. 네 벽을 막고 지붕을 씌우고 칸막이를 그어서 그 안에서 우리의 모든 삶이 시작되고 끝난다고요. 태어나는 것부터 임종 순간까지. 어느 집에든지 들어가면 고유한 냄새와 인생이 있고 이미지가 다 달라요. 정말 내밀한 삶들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이 철거 현장이잖아요. 그러니까 철거 현장이 주는 충격이라는 것이 달동네 무허가촌을 깡패 같은 동원된 인부들이 강제로 철거하는 장면만 충격적인 것이 아니고 모든 낡은 집을 헐어내고 철거하는 장면을 봐도 나는 가슴이 먹먹해져요. 이상하게 우리가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잘 가꾸고 매일 걸레질하고 털어내고 하는 이 안방조차도 언젠가는 벽이 허물어지고 지붕이 날아가고 백일하에 드러나리라!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그래요. 뿐더러, 이제는 이 집에서도 10년 이상 살았고 여기 오기 전에도 과천에서 10년 이상 살았지만, 30, 40대에는 이사를 참 많이 다녔어요. 이사할 때마다 짐을 내려놓고 그 다음날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그 낯선 골목들을 돌아다녀 보는 일이예요. 돌아다니면 이 골목에는 이런 풍경, 저 골목에는 저런 쓰레기통, 그러다가 열린 대문 안으로 들여다보면 뜨락의 모습, 이런 것들이 이상하게 늘 강하게 마음에 와 박혀요. 야! 이 골목에는 이런 사람들이 사네! 저 집에는 누가 살까? 이런 식으로. 최근 생각인데 결국 이런 정서의 밑바닥에는 우리들이 아무리 지극정성을 다 해도, 뿌리를 내리려고 해도 이승에서는 내릴 자리가 없구나, 언젠가는 무너지고 뽑히고 백일하에 다 무(無)로 가는구나! 이런 허무의식이 결국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명랑  저는 선생님의 허무의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백일하에 드러난 세간살이며 삶의 모습들이 너무나 비루할 정도로 초라하잖아요. 『장난감 도시』에서도, 선생님이 새벽잠을 설쳐 가며 시장으로 야채 쓰레기를 주우러 다녔는데 걸리면 다 드러나잖아요. 그 문장을 독자들에게 꼭 소개시켜 드리고 싶었어요. 걸려서 바구니를 뺏기게 되면 바구니 속에 있는 것을 보여 주게 되는데 거기서 ‘그러나 우리를 가장 수치스럽게 했던 것은 문제의 잘못도, 따귀를 얻어맞은 것도 아니었다. 만인환시리에 길바닥에 쏟아 놓은 우리들의 소득물이 너무나 초라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깨달아지는 것이었다. 그토록 초라한 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모두 아침잠을 설친 것을 생각하고 나는 몹시 부끄러워졌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이 문장을 제가 몇 번씩 다시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가 굉장하다고 생각하면서 아등바등 얻으려고 하는 것이 사실은 다 남들 눈에 까발리듯 속을 드러내 놓고 보면 그토록 초라하고 사소한 것들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깨달음 같은 것을 주더라고요. 선생님께서 폭력이라든지, 여러 작품 속에 배어 있는, 선생님은 허무주의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인생을 대할 때 겸손한 삶의 자세라든지 선생님 소설의 굵직한 주제들이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께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 몇 가지 묻고 싶었어요.



눈물과 추위와 자화상이었다가 못질하기일 것


이동하  언젠가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나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100장 정도 쓴 적이 있어요. 몇 가지 예를 들었어요. 요약하면 첫 번째는 나에게 소설은 눈물이다. 요컨대 성장기에 내가 미처 흘리지 못했던 그 눈물이다. 상처 이야기죠. 또 나에게 소설은 추위다. 내 소설에는 겨울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유독 추위 많이 타는 사람이 많이 나오는데 내가 추위를 많이 타기도 하고. 그건 대체로 내가 30대 때 쓴 작품에서 그런 현상이 많이 드러나요. 그때는 사회에 편입이 되어서 한 가장으로서 사회에 뿌리 내려가는 과정에 생존의 불안의식이라든지 각박함 이런 것이 늘 추위로 느껴졌다는 것이죠. 늘 오들오들 떨면서 사는, 한 가정을 거느리고 한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내가 느꼈던 그 두려움, 불안을 추위로 표현한 것이죠. 또 그리고 나에게 소설은 자화상이다, 40대 이후에는 주로 자기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끝없이 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나에게 소설은 무엇이기를 바라는가 이런 자문을 던지고 거기에 내가 한 답변이, 나에게 소설쓰기는 못질하기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존재의 견고한 벽에 나 자신의 불안하고 허무한 존재를 견고하게 박아 두는 것을 못질하기라고 답변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대충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명랑  오늘 좋은 말씀 감사드리고요, 이번에 내신 『우렁각시는 알까?』를 후배의 한 사람으로 읽으면서 저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설가는 끊임없이 자기를 뚫고 나와야 하고 문체의 변화도 시도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변화하려는 모습을 『우렁각시는 알까?』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끝으로 후배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씀은 어떤 것인지?

이동하  작가들은 아까, 자기 얘기만 하는 작가가 있고, 절대로 자기 얘기를 안 하는 작가가 있다고 했는데, 그러나 어느 쪽이건 출발은 자기 자신, 가지존재, 자기 삶에서 출발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글쓰기라는 것은 삶을 되돌아보고 다시 성찰하는 작업의 일환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의 삶의 내용들이 엄청나게 급격한 속도로 변해 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연배의 작가들은 이명랑 씨나 또는 그 뒤 세대들의 삶을 담아내기가 어려워요. 이런 상황에서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한다면 소설로 담아낼 만한 특별한 경험이 없다, 삶의 체험이 없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 그런 질문을 나는 주고 싶네요.

이명랑  선생님. 오늘 귀한 말씀 감사드리고요. 앞으로도 저희들에게 좋은 소설을 읽을 기회를 많이많이 주세요. 감사합니다.

이동하  고맙습니다.문장 웹진/ 2007년 11월》





이동하  1942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와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전쟁과 다람쥐」가 당선되었고, 1967년 현대문학사 제1회 장편소설 모집에 「우울한 귀향」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창작집 『모래』『바람의 집』『저문 골짜기』『밝고 따뜻한 날』(선집)『폭력연구』『삼학도』『문 앞에서』『우렁 각시는 알까?』가 있으며, 장편소설 『도시의 늪』『냉혹한 혀』『장난감 도시』 등이 있다. 『장난감 도시』는 『Toy City』로 영역 출간되었다. 한국창작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명랑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문학 무크지 《새로운》에 「에피스와르의 꽃」 외 두 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고, 장편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를 펴내며 소설가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삼오식당』 『나의 이복형제들』『슈거 푸시』, 창작집 『입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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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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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 wikisoft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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