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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과 복수의 곤경을 넘어서

  • 작성일 2007-09-04
  • 조회수 2,941



 


소록도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거창한 사업의 전말을 추적하고 있는 『당신들의 천국』에서 대역사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고 끝내 파국에 이르는 극적인 사건이 전개되는 장(章)을 위해 ‘배반Ⅰ’ ‘배반Ⅱ’라는 제목을 마련했던 작가는 그뿐 아니라 “도대체 모든 것이 배반의 연속이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배반이었다” 등과 같이 되풀이되는 서술을 통해 스토리의 도처에 산재하는 배반의 혐의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 혐의는 표면적으로는 조백헌 원장과 원생들 혹은 섬사람들과 육지 주민들 간의 대립에서 비롯된 듯 보이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그것이 서로 분명하게 구별되는 ‘건강인’과 ‘문둥이’의 관계에만 잠복해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이순구로 대표되는 배반과 복수의 기억을 감추고 있는 이상욱 과장이 “처지가 달라지면 섬사람들은 누구나 또 이 섬과 섬사람들을 배반하게 되리라”는 황 장로의 불길한 예언을 끝내 떨쳐내기 어려웠던 것처럼, 『당신들의 천국』의 심층에는 어느 누구라도 다른 누군가에 대해 배반자가 될 수 있다는 비관적인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배반(배신)이란 말 그대로 믿음을 등지고 돌아서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배반인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한 행동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배반 운운하는 것은 이청준 스스로도 비교적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바대로 “겁 많고 옹졸스런 인간관”이나 “의혹과 불신” 같은 부정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이청준 소설을 특징짓고 있는 배반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그것이 발생하는 원장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키 작은 자유인」에서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로 되어 있던 ‘나’는 자기 몸을 의탁할 도시의 친척에게 체면치레를 하기 위해 값으로 따지기에는 누추할망정 자기 나름에는 소중한 선물(게자루)을 전달하지만, 그것이 아무 소용도 없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장면을 목격한다. ‘나’가 뭔가를 선물한다는 행동에는 상대방이 그 선물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믿음)가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키 작은 자유인」에서처럼, 만약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상대방이 선물 받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선물을 마다 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으며 또 설령 선물 수령이 거부된다고 해서 ‘나’가 아쉬울 게 뭐가 있겠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선물이란 애초부터 답례를 바라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대체로 보답을 받게 마련이다. 물론 선물에 대한 답례가 반드시 등가일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값어치가 큰 선물에 대한 답례로 단지 감사의 마음만을 돌려받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바, 그가 그 감사의 마음을 자신의 선물에 상응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거기에 만족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상징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답례를 받지 못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요컨대, 모스가 인류학(인간학)적 차원에서 선물 메커니즘의 성격을 “줄 의무-받을 의무-되돌려줄 의무”로 규정했던 것처럼, 선물에는 주는 계기만이 아니라 돌려받는 계기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키 작은 자유인」의 ‘나’는 대단히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을 알 수 있다. 어린 ‘나’가 돌아올 잇속을 계산하고 선물을 했을 리는 없지만, 아무튼 도시의 친척이 선물 받기를 거부한 순간 ‘나’는 그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는 처지에서 고단한 도시 생활을 꾸려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청준 소설의 인물들이 겪는 배반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준 것에 상응하는 만큼을 돌려받지 못한다는, 즉 준 만큼 받지 못한다는 형태로 나타난다. ‘나’가 준 것을 상대방이 받지 않기도 하고(이때 ‘나’는 당연히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한다), 혹은 받고도 그에 대한 답례를 돌려주지 않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나’가 준 것을 오해하여 전혀 엉뚱한 것을 되돌려주기도 하는 등, 그 양상은 다양하다. 또 이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소설이 복수 혹은 보상으로서의 글쓰기의 산물이라고 밝힌 이청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복수와 보상은 모두 ‘갚다’의 의미를 지닌다. 무엇을 갚는 것인가? 이는 준 만큼 받지 못해 청산되지 못한 몫(빚)에 관한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오래된 격률이 전하는 메시지대로, 복수는 상대방이 ‘나’에게 한 만큼을 되돌려줌으로써 비대칭적인 주고받음에서 대칭적인 상태를 회복하려는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숨은 손가락」의 동준은 오랜 친구인 현우의 배신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초를 겪은 끝에 “내가 네게 신세를 진 만큼만”을 현우에게 돌려줌으로써 복수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벌레 이야기」의 아내 역시 자신의 아들을 유괴 살해한 범인에 대해 “아이가 당한 것 한가지로 손목을 뒤로 묶어 지하실에 가두고 목을 졸라 땅바닥에 묻”음으로써 복수하고 싶어한다. 주는 만큼 받는다는 원칙의 변형인 당한 만큼 갚아준다는 원칙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간단하고 정당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켜질 수 없다. 가령, ‘나’의 눈 한쪽이 상한 대가로 누군가의 눈 한쪽을 상하게 했을 때, 그가 ‘나’만큼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그의 다른 한쪽 눈까지 요구할 수 있는 것인가? 복수는 언제나 너무 모자라거나 너무 넘치는 것이어서 어떤 경우에도 대칭적인 주고받음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자란 복수는 여전히 빚을 남기며, 넘치는 복수는 또 다른 복수로 이어질 뿐이다.

물론 배반, 또 그에 대한 복수의 혐의에 주목하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의혹과 불신의 탓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배반을 걱정하고 복수를 꾀하기보다는 서로 믿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테지만, 실상은 믿을 만한 사람들에 한정하여 관계를 맺기 때문에 배반과 복수를 염려하지 않는 것일 뿐이며, 따라서 믿지 못할 사람이나 한두 번 배반했던 사람은 그 믿음의 공동체에서 아예 배제된다고 하는 편에 가깝다. 상호신뢰에 대한 피상적인 강조보다는, 가령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판단하거나 진정으로 그러기를 원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되돌려주는 반응에 상관없이 ‘나’는 줄 것이라는 식의 태도가 배반과 복수의 곤경을 넘어설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다시 『당신들의 천국』으로 돌아오자. 천국 건설 사업이 교착 상태에 빠진 후 섬을 떠났다가 몇 년 뒤 돌아온 조 원장은 그간의 사정을 회고하면서 “내가 꾸민 천국을 믿지 않으려는 이유, 나의 동기나 천국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을 수 없었던 이유, 섬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성실한 봉사를, 나의 선의와 노력을 자기도취적인 동정으로만 폄하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진심에서든 동정에서든 조 원장이 뭔가를 주려 했다면, 원생들은 그저 받아들이면 되었던 것 아닌가? 그러나 전임 주 원장의 경우를 통해 원생들은 뭔가를 받으면 반드시 되돌려줄 ‘의무’가 발생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조 원장에 앞서 천국 건설을 약속했던 주 원장은 동상으로 상징되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둠으로써 원생들에게 어느 정도 나눠주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대가로 원생들은 더 많은 것을, 견디기 힘든 노동과 나아가 목숨까지를 주 원장에게 바쳐야 했다. 그들은 받은 것보다 많이 돌려주었기 때문에, 즉 준 만큼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배신당한 희생자였고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더 이상 받지도 않고 따라서 주지도 않으려 한다.

“원장님의 실패도 아마 원장님께 그런 선의나 희생이나 의욕이 없어서가 아니라 원장님의 다스림을 받는 원생들과의 관계에서의 실패일 것”이라는 이정태 기자의 판단이 보여주듯, 원생들을 위해 일하려는 조 원장의 선의와 의욕을 굳이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과감하게 구태를 뜯어고쳐 원생과 건강인 간의 접촉 규정을 철폐하고, 직원 지대와 병사 지대의 경계를 가르고 있던 철조망을 철거하고, 미감아(未感兒) 아동들과 직원 지대 아이들의 공학 수업을 단행한다. 그러나 조 원장 쪽에서는 자신이 약속한 병원 운영 방침을 하나하나 실행으로 옮기는 데 반해 원생들 쪽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다. 조 원장에게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그런  눅눅한 침묵만 계속하고 있을 것인지 속을 짚어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 원장이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천국 건설을 계획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조급함에서 빚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 원장의 약속이 단지 한 사람만의 약속에 그치지 않고 섬사람 모두의 약속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침내 조 원장과 원생들은 “배반이 없게 하자고 똑같이 서로 서약”하고 천국 건설 사업을 시작한다. 그 사업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 원장은 일신을 위해 물 한 모금 사사로이 취하고 않고, 어떤 공훈이나 명예도, 보답도 바라지 않겠다는 약속을, 원생들 또한 자발적이고 열성적으로 바다를 메울 둑을 쌓겠다는 약속을 서로 지킬 때에만 실현 가능한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절반은 실패이고 절반은 성공이다. 아마도 그들은 서로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를 메우는 데 들인 자신들의 노고에 대한 보답이 주어지지 않는 한, 원생들은 배반당한 것이며, 원생들이 그 배반에 대한 복수로 조 원장에게 “문둥이들만 몰아대지 말고 너도 한번 우리 손에 물구멍으로 죽어 들어가”라고 요구하는 순간, 조 원장 역시 배반을 겪게 된다. 어느 누구도 배반할 의사가 없었고 오히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배반은 발생했다는 점에서 『당신들의 천국』의 기획은 실패를 맞는다. 곧, 자신이 들인 노고에 대한 정당한 몫을 돌려받는 상태에는 끝내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절반은 성공이다. 배반과 복수로 점철된 실패극 끝에 조 원장은 섬으로 돌아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달라진 것은 없다. “애초의 약속과 희망대로 원생들로 하여금 그들이 땀을 흘려 일한 만큼 그들의 몫을 차지하게 해” 주지 못했고, “오마도 일이 저렇게 되고 보니까 원생들의 불신은 전보다도 더 심해졌”고, 그 결과 “섬사람들과 원장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은 갈등을 해소”한다는 계획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 처해 “이 섬은 미치지 않고는 견뎌낼 수가 없단 말요”라고 말하는 조 원장의 심정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원장은 때로는 성자와 같은 태도로, 또 때로는 광인과 같은 태도로 섬사람들을 위해 일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몫을 돌려받겠다는 것은 전혀 부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극히 정당한 요구이다. 아마도 현실을 움직이는 원리는 그 요구로부터 찾아져야 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 요구들을 전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해 곳곳에 빈틈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정당한 요구가 배반을 낳고 그 배반이 복수를 낳고 그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 악순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청준 소설은 처음부터 배반과 복수의 부도덕성을 단죄하지도 않고 마찬가지로 용서와 희생의 미덕을 추켜세우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의혹과 불신을 끝까지 밀고 나간 끝에 도달한 곤경을 보여 준다. 그러한 곤경을 겪은 끝에 ‘나’가 배반과 복수의 마음을 버릴 수 있다면, 이는 ‘나’의 선의나 후의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음’이란 한편으로는 운명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무이자 윤리이며, 이 둘이 교묘하게 결합된 것이 “자생적인 공동 운명”이다. 운명이므로 저절로 용서하고 희생하게 되는가? 그러나 그 운명은 또한 ‘나’의 의해 자발적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기, 이 묘한 이율배반을 통해 『당신들의 천국』은 배반과 복수의 복마전을 넘어설 수 있는 통로를 제시하고 있다.《문장 웹진/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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